대한민국사 1945~2008
임영태 지음 / 들녘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1100 페이지;;; 너무 길어서 김영삼 정부까지만 읽었다. 김영삼의 재임 초기 지지율이 90%를 넘었었다는 얘기가 왜 이렇게 충격적이지. 아들 김현철이 연루된 한보사건으로 지지율이 급락하고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난' 이었다는 IMF 경제 위기를 몰고 옴으로써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김영삼.

 

p121. 조봉암은 박헌영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처음 결성한 공산주의자였지만, 미군정기에 박헌영의 독단적인 행태를 비판하면서 전향한 인물이었다. 이승만이 조봉암을 농림장관에 기용한 것은 당시 주요한 사회적 관심사였던 농지개혁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는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당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지주와 친일 세력이라고 비난받던 한민당을 배제하고, 전향했다고는 하지만 공산주의자였던 인물을 농지개혁의 최고책임자로 기용한 이 절묘한 인사는 이승만의 뛰어난 통치술을 보여주는 일면이기도 하다. ..(토지개혁문제만큼은 민국당에 비해 이승만이 훨씬 개혁적이었다.)

 

p233. 4월혁명에서 5.16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있었던 일들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귀중한 경험과 자산이 되었다. 권위주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중은 자신의 힘과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경험했으며, 그 정신은 엄혹한 군사정권 하에서도 민주화운동은 줄기차게 이어졌고, 드디어 876월항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4월혁명이라는 밀알은 땅에서 썩었지만 27년 후에 더욱 무성한 민주주의의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p530. 하나회의 첫 출발은 육사 11기생이던 전두환, 노태우 등이 생도시절 만든 5성회였다. 영남 출신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는 생도시절 늘 어울려 다녔는데, 이들은 모두 별이 되기를 꿈꾸며 5성회란 친목회를 만들고 각각 성격에 따라 별 이름을 지어 불렀다. ..(후에 일심회로 바뀌었다가 한마음회로, ‘하나회로 바뀌었다.).. 이들은 당시 5.16의 주체였던 김종필을 비롯한 8기생들에게 적지 않게 불만이 있었다. .. 하나회 세력들은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8기생들을 제거하려 했다. .. 이후 10.26으로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를 12.12를 감행하여 군부를 장악했다. 하나회는 군부 전체로 보면 소수였지만 이들은 조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상상황에서 조직화되지 않은 다수 장교들을 배제하고 권력을 쥘 수 있었다. .. 하나회는 말 그대로 5공의 실세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5공은 하나회의 축소판이었다. .. 재미있는 점은 5.16의 기획자였고,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은 박정희에게서 권력을 이양받지 못한 반면, 노태우는 특유의 처세로 전두환의 뒤를 이어 6공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나회는 대통령까지 주고받으면서 12년 동안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했다. 이후 하나회는 노태우 정권이 끝난 다음에도 비밀리에 조직을 확대해가고 있었지만, 김영삼 정권 시절 군대 내 사조직 척결이라는 철퇴를 맞아 뿌리가 뽑히고 말았다.

 

p536. 5.18 광주항쟁은 4610월 민중항쟁, 604.19혁명, 876월 항쟁과 함께 한국현대상서 가장 역사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5.18 광주항쟁은 무력투쟁을 동반했다는 점에서는 10월 항쟁과 닮았고, 자연발생적인 투쟁이 조직적인 봉기로 발전했다는 점에서는 4.19와 닮았다. 그러나 10월 항쟁은 이념대립이란 요소가 강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과는 다르다. 6월 항쟁은 조직적으로 준비된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광주항쟁과 다르지만, 이념적으로 보면 광주항쟁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 점에서 광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4.196월항쟁을 잇는 가교라고 할 수 있다. 4.19의 비조직성과 낭만성이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보다 조직적인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했고, 그 바탕 위에서 6월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p545. 전두환 정권 시절 미국에서는 레이건의 극우보수주의가 득세하고 있었다. 레이건은 소련과의 철저한 대결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신냉전시대를 불러왔다. 전두환은 레이건의 보수주의적 대결정책에 철저히 편승했다. ..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국산 무기개발과 같은 자주국방정책은 포기했다.

 

p547. 1980.5.17.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김대중은 다시 죽음과 맞대면하는 신세가 되었다. 김대중이 남산에 연행된 지 48일 만인 74일 계엄사는 이른바 김대중 일당의 내란음모사건수사결과를 발표했다. ..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씌운 죄목은 내란음모죄와 국가보안법이었다. 내란음모란 국민연합을 통해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조종하고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통해 광주학생을 배후조종하여 민중봉기로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 같은 날 특별사면으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요었고, 8233일에는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 내외의 여론과 미국, 일본 정부의 압력 덕분이었다. 82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김대중은 가족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서 일체의 정치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출국을 허락한 것이다. .. 852월 귀국했지만 곧바로 자택연금 신세가 되고 말았다.

 

p580. “재벌과 권력의 한판 잔치이는 5공화국과 6공화국의 정경유착을 설명해주는 가장 집약적인 표현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5공화국 동안 기업들로부터 거두어들인 비자금 총액은 9,500여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97417일 대법원은 이 가운데 2,2595,000만원을 뇌물로 규정하여 추징을 최종 결정했다. 또한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는 5,000억원대의 비자금 가운데 2,8389,600만원이 뇌물로 규정되어 추징이 결정되었다.

 

p643. 3당합당으로 민자당은 국회의원 총수의 2/3가 훨씬 넘는 총의석 221석의 거대 야당이 되었다. 대신 야당은 평민당과 꼬마민주당(이기택, 김정길, 노무현, 김광일 등의 합당 불참파)으로 왜소화되었다. 3당합당을 두고 청와대는 헌정사 40년만의 명예혁명’, 김영삼과 김종필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자찬했지만, 실제로는 총성 없는 쿠데타였다. ... 김영삼으로서는 합당을 통해 여당을 장악함으로써 손쉽게 다음 대권에서 승리하지만 생각만 있었을 뿐, 3당합당이 가져온 민주화의 후퇴는 안중에 없었다.

 

1990,10.13 ‘범죄와의 전쟁선포

1989. 문익환, 임수경, 황석영 방북 사건(90.7.20 8.15를 전후해 누구나 제한없이 판문점 통해 북한방문을 할 수 있게 허가. 그러나 판문점 통해 방문한 사람X. 모조리 전경차로 연행)

1990.1.22.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

1989.5.28. 전교조 결성

1991.4.26. 명지대생 강경대 사망

 

p712. 한겨레 신문 창간.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신문. “민주화는 한판 승부가 아닙니다라는 문구로 광고. 50억원의 창간 기금을 금방 모았다. 한 사람의 주주가 1% 이상의 주식을 소유하지 못하게 함. 89.4.14 리영희 논설고문이 방북 취재 계획으로 구속되면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았다. 리영희 고문이 안기부에 의해 강제연행 되고 한겨레 편집국이 압수수색 당하는 사진이 신문에 나가자 국민 성금이 100억 원 이상이나 모였다.

 

p762. 문민정부의 추락은 1997년 한보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97년 재계 순위 14위인 한보그룹의 주력기업인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 정태수 회장이 대출과 사업의 인허가를 위해 정, 관계와 금융계 인사들에게 청탁하고 그 대가로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수사가 금융계와 정치권으로 확대되었다. .. 그런데 이런 와중에 김현철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의사 김경식의 양심선언과 김현철의 비리를 입증할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되었다. .. 김현철 사건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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