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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돌베개인문.사회과학신서 50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198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p38. 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는 다분히 미국의 역할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전쟁을 일으킨 주범에 해당하는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 표현했던 바, 오히려 이 용어가 전쟁의 실상을 보다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p38~39. 우리가 주의할 점은 일본을 패망시킴에 있어서 미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였지만 미국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태평양전쟁의 핵심지역은.. 태평양 해상이 아니라 만주와 북중국, 그 중에서도 동만주지역이었다. .. 그러기에 일본은 미국조차 가장 막강한 부대로 평가하였던 관동군을 만주지역에 배치하였던 것이다. 관동군이 지닌 위력은, 미국이 독자적으로 이와 대결할 때 1년 이상의 전쟁과 100만 명 이상의 미군의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그 부담을 소련에게 떠넘기려 했다는 사실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 막강한 관동군을 포함하여 일본 육군의 대부분과 대항한 것은 아시아 민족과 소련이었다.
p58.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종종 모스크가 협정의 실현을 둘러산 민주진영과 비민주진영의 공방전을 찬탁이냐 반특이냐의 대결로 표현한다. 그러나 당시 민주진영은 신탁통치를 옹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미국의 신탁통치 음모를 폭로, 공격하고 있었다. 민주진영이 옹호한 것은 신탁이 아니라 그 당시 표현대로 ‘모스크바 협정의 총체적 실현’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1947년 7.27 인민대회에서 확연히 나타났던 민주주의 임시정부의 촉구였다.
p75. 10월 1일 9.24 총파업을 지지하는 대구의 400여 개 공장의 노동자들은 집회를 가진 뒤 학생 및 일반 시민 약 1만여 명과 함께 ‘미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돌입하였다.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인해 시민 1명이 희생되는 사태가 발생.
p123. 유엔 총회 석상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이 만에 하나 단독선거의 실상을 폭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미국은 유엔 사무국으로 하여금 유엔 총회가 열리는 파리행 여행비용을 위원단에 지급하지 못하도록 종용함으로써 총회에 위원단이 참석하는 것을 저지시켰다. (주권을 도둑질한 강도의 심정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p130. 북조선 인민회의는 북한 지역에서의 대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를 8월 25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그 세부지침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남한에서는 공개적인 투표가 곤란한 사정을 고려하여 비밀리에 이중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 최고인민회의에 보낼 360명의 남한 지역 대표를 최종적으로 선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시군구 선거위원회 산하에 전권 위원회가 결성되고 위원회의 성원들은 민주주의민족선전이 내정한 대표들에 대한 서명투표를 각 부락과 직장 단위로 비밀리에 수행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대략 7월 중순부터 남한 전역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와 관련되어 7월 24일부터 8월 10일까지 수도경찰청에 검거된 수만도 모두 1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 북한 당국의 집계 발표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총 유권자 중 99.97%가 투표하였고, 반면에 남한에서는 총 유권자 1,754만 명 중 77.52%가 비밀 선거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남한에서의 투표자 수는 5.10단독선거의 그것보다 65만 명이 더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 본부를 평양에 두되 수도는 서울로 하며 남북에 걸친 전 인민의 선거로써 성립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자처하였다.
p141. 역사적으로 볼 때 제주 민중은 오랜 기간에 걸쳐 외세와 봉건적 착취세력에 항거해 왔던 불굴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와 그에 항복한 봉건왕조에 대한 최후의 저항기지가 되었고 가까이 조선 말기에는 6차례에 걸친 민중봉기의 경험이 있었다. 또한 해방 직후 제주 민중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귀환자들은 그들이 겪었던 혹독한 시련을 통하여 강인한 투쟁력과 진보적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p149. 저항자에 대한 밀고가 장려되었고 그 밀고는 진위를 묻지 않았으며 밀고된 자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간단히 처형되었다. 모든 토벌대에게는 매일 한 명씩의 저항자를 색출해야만 한다는 의무가 주어졌다. 또한 유격대를 생포한다거나 살해했다는 물적 증거로서 머리를 상관에 제시만 하면 직책 여하에 따라 상금 및 승진의 기회가 주어지는 ‘민중학살 장려금제도’가 마련되었다.
p162. 여순 봉기라는 폭탄을 안겨받은 이승만 정부는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하여 군대 내부의 저항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 작업에 착수하였다. .. 여순 봉기를 계기로 군장병들이 대거 입산함에 따라 야산대는 급속히 유격대로 전환되어 갔다. .. 남한의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이나 되는 곳에서 유격전구가 형성되게 되었다. .. 이러한 탄압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1948년 12월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고 1949년 한 해 동안 미국과 이승만 정부의 압제에 저항하는 11만 8.621명의 인사가 이 법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 미군이 철수해 버린 상황 하에서 이승만 정부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군대는 비록 저항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로 동요를 계속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상태로 계속 갔더라면 이승만 정부는 조만간 붕괴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치 않게도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 즉시 미국에 의한 대규모 군사적 개입이 단행됨으로써 가까스로 위기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p179. 미국이 애초에 기대를 걸었던 중국이라는 보루가 허물어지자 일본은 아시아의 병참 기지라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1949년과 1950년 상반기 사이에 미국은 한국을 우선적 목표로 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반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일본에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대비체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것은 맥아더가 1949년 일본인에게 보내는 신년 메시지에서 일본의 평화헌법이 자기방어의 권리를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일깨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 1949년 4월 16일, 일본인의 조세를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시킬 수 있게 하는 ‘대충자금 특별회계법’이 일본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 본래 일본의 군수산업은 전쟁도발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그 전부가 미국에 의해 몰수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정된 군수산업의 시설 몰수분이 미처 30%를 채우기도 전에 배상 몰수조치가 중단되었다. .. 미국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한국 및 기타 아시아의 옛 식민지 민족들에 대한 전통적인 경멸감ㅇㄹ 되찾도록 부추겼다. 간단히 말해 미국은 모종의 대규모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일본인들의 효과적인 협력을 필요로 하였고, 이를 보장하기 이한 방편으로서 일본의 군국주의적 망령을 부활시키고자 기도하였던 것이다.
p190. 어떻게 보면 전쟁은 적어도 이미 4.3 제주 항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여순봉기와 전면적인 유격전을 거치면서 최소한 10만 이상의 희생자를 양산하면서 치루어진 적대적인 두 세력 간의 대규모 무력 충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보아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1950년 6월 25일 본격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이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한 군대 간의 대소규모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p205. 딘 소장이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밝혔듯이 당시 남한지역에서의 이승만 타도와 조선인민군에 대한지지 열기는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승만 정권이 서울에서 퇴각한 이후 남북 협상파,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 등 그동안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해왔던 인사들을 대부분 북한군에 대해 협력적인 자세를 취했다.
p215. 미국은 지금까지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의 대의명분으로서 38선의 원상회복을 내세워 왔다. 물론 이러한 미국의 개입원칙은 최초의 순간부터 지켜지지 않았었다. .. 38선을 돌파함에 있어 미국은 참전 때와 마찬가지로 일단 일을 저질러 놓은 다음 의회와 유엔의 승인을 얻어내는 방식을 취했다. ..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가하기 훨씬 이전에 미 공군기가 만주지역을 폭파해버렸다. ... 본래 중국군은 4일분의 식량과 80발의 소총탄만을 지급받은 뒤 트럭 한 대 없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 뒤로 필요한 식량과 장비는 모두 북한 유격대와 주민들의 협력을 통해 현지 조달받았다.
p239. 1950년 11월 30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선에서 미군의 패배를 시인하면서 “원자폭탄의 사용을 고려중이고 그 권한이 맥아더에게 주어졌다”고 말했다.
p249. “본 조사단(국제과학조사단)은 결론으로서 미 공군은 일본군이 제 2차 대전 중에 장티푸스를 퍼뜨리기 위해 사용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동 조사단의 의견으로는 장티푸스에 감염된 쥐가 비행기로부터 낙하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p257. 본래 전쟁포로는 1949년에 수정 조인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실질적인 적대행우가 끝나면 지체 없이 석방, 송환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미국도 이 협정에 조인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군측이 제네바 협정에 제시된 원칙에서 벗어나 이른바 포로의 자유교환을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 미국이 포로의 자유교환을 들고 나온 것은 중국군과 북한군의 포로들 중 일부가 송환되지 않음으로써 상대편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p264. 국민방위군 사건... 부통령 이시영이 항의 표시로 사표를 제출하는 등 적극성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p268. 야당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국회에 수용하고 나서, 경찰과 군이 국회를 포위하고 깡패 출신 국회의원들이 출입을 통제하는 가운데 1952년 7월 4일, 발췌개헌안에 대한 표결이 시작되었다. 숨막히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기립투표를 강요한 결과 출석 166명, 찬성 163명, 기권 3명으로 문제의 발췌개헌안은 전격 통과되고 말았다.
p279. 이승만 정부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관한 최고 결정권자인 미국에 의해 휴전회담은 재개되었다. 국내외적인 압력에 쫓긴 미국은 보다 유리한 조건 하에서 휴전협정을 타결짓기 위하여 재차 중국에 대한 원폭 투하를 협박하였다. .. 북한측은 결국 미국의 포로교환에 관한 최종안을 수락하였다. ..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북한과 미국이 합의한 포로교환 방식은 중립국 감시 하의 자유교환이었는데 이승만은 이것을 거부하고 제네바협정에도 어긋나는 완전한 자유교환을 실시.
p290. 미국은 제네바에서 개최하기로 예정된 정치협상회의를 무난하게 결렬시킴으로써 관련된 휴전협정조항의 효력도 아울러 제거시키고자 하였다. 즉 미국은 휴전협정의 최종적인 실현 과정에서 자신은 슬쩍 비켜남으로써 그것의 원칙까지 위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고자 한 것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었던 베트남 문제의 처리를 위한 제네바회담에서 보여 주었던 행동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 이승만 정부는 제네바 정치협상회의에 대해 보다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 회의는 아무 성과 없이 결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