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 -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도피한 이승만, 죽어간 국민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
서중석.김덕련 지음 / 오월의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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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2권,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편을 읽었다. 어째서 이승만이 민주주의의 수호자일 수 없는지, 왜 그리 불러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가 잘 나와 있다. 부정선거와 민간이 학살을 방관, 종용하고 그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쥐어준 사람에게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자란 수식어를 붙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피해자들을 두번, 세번 죽이는 일이다.

 

* 국회는 인권 유린을 막고자 굉장한 노력을 한다. 사형 금지법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의 비상조치에 관한 개정 법률안, 뒤이어 폐지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 식으로 국회랑 사사건건 맞서다가 거창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는 거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이라고 볼 수 있는 1950년 6월 25일부터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권 사건을 처리하는 1951년 봄까지, 대통령이 적절하게 전쟁을 수행했나? 그렇지 않다. ... 이 대통령이 한국전쟁에서 후세에 좋게 기억될 만한 것을 한 게 있나? 그런 건 없다. (65)

* 1945년에서 1948년 사이 미군정 시기에도 학살 비슷한 현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큰 규모의 주민 집단 학살이 주로 일어나는 건 1948년 11월(제주 4.3사건 당시 학살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기)부터 1951년 봄까지다. 전쟁 때도 전체에 걸쳐 학살이 일어난 게 아니다. 주로 1951년 1~2월(거창 민간인 학살이 발생할 때가 1951년 2월이다)까지 일어난다.(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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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9세기, 인민의 탄생 - 조선 5 민음 한국사 5
김정인 외 지음, 강응천 엮음 / 민음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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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김정인 교수님이 저자 명단 맨 앞에 계시다니. 몇년 전 학부모이기도 하셨던 분. 신기하다~~

홍경래가 실제로는 평민 출신이었다고 한다. 교과서에는 '몰락 양반'이라고 서술되어 있는데;

19세기 편에서는 독립협회를 설명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 조선은 서양이나 일본보다 문화적 수준이 더 낮아서 근대로 진입하는 것이 늦어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지역이 따라 올 수 없을만큼 수준 높은 중앙집권적 유교 왕국을 이룩하고 있었기에 그 체제를 극복하고 다음 시대로 나아갈 주체 세력이 쉽게 형성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부합한다.(서문 중)

 

* 대상인의 독점 상업을 보호하는 세도 정권의 상업 정책과 매관매직으로 인한 삼정 문란은 중소 상인, 빈민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특히 중국 무역을 의주상인과 개성상인에게 독점시키면서 평안도의 중소 상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중소 상공인들은 이러한 정부 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1811년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 바로 그것이었다. ... 조선왕조 초기부터 지속되어 온 지역 차별 정책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이 시기 평안도의 상품 화폐경제의 발전이 반영되어 있었다. ... 홍경래의 난은 두 세력의 대립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난을 주도한 사람들은 당시 평안도의 지역적 시장권을 장악한 중소 상인층, 대청 밀무역을 중심으로 성장을 도모하던 잠상(밀무역업자) 세력이었다. (70)

 

*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일본 정부는 수출입세 5퍼센트를 용인할 의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세 무역을 용인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선은 국내시장과 발달이 미약한 국내 산업의 보호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자 주요한 정부 재정원으로 삼을 수 있는 관세 수입을 박탈당했다.(89)

 

* 대원군과 제휴했기 때문에 안동 김씨는 대원군 집정기에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세도정치기에 2위였던 문과 급제 점유 비율이 대원군 집정기에는 6위로 떨어졌지만 의정부와 육조 당상관 점유 비율은 전주 이씨에 이어 두 번째였다.(131)

(안동 김씨 세력을 대놓고 견제하거나, 몰아냈던 것은 아니었구나;;)

 

* 사실 갑신정변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이는 고종이었다. 고종을 지지하던 중요한 두 축이 동시에 무너짐으로써 정치적 기반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청으로부터는 개화파와 연계해 반청적인 태도를 취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입지가 불안해졌다.(142)

 

* (임술농민봉기 이후 정부가 삼정이정책을 발표했지만) 조선 정부는 그 시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농민 항쟁이 잦아들자 결국 본래 제도로 돌아가겠다고 태도를 바꿨다. '삼정이정책'을 너무 서둘러 만들었기에 완벽하지 못할 염려가 있어 옛 것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유 아닌 이유였다.

(삼정이정청을 설치했지만, 삼정의 문란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

 

* 의회 개설을 둘러싼 독립협회와 정부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문제의 김홍륙 사건(고종 커피 독살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죄인을 심문하면서 심한 고문이 자행되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황제를 독살하려 한 범인이라도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어야 하며 고문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 이 운동은 결국 성공했다. ... 의회 개설 운동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자 독립협회가 이를 널리 공표하고 대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의례로 개최한 것이 관민공동회였다.(252)

 

* 20세기를 목전에 두고 펼쳐진 자발적 결사체 독립협회, 미디어 공론의 장 <독립신문>, 집회와 시위의 인민 자치의 장인 만민공동회. 이 삼중주는 결사, 언론, 집회의 자유가 무엇이고 왜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인민이 스스로 깨달아 나간 정치 훈련의 장이었다. 인민이 공론의 장을 통해 압박한 의회 개설 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갑오개혁 때와 달리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정부를 상대로 참정권을 확보하기 위한 입헌 제도를 쟁점화한 것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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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 해방과 분단, 친일파, 현대사의 환희와 분노의 교차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서중석.김덕련 지음 / 오월의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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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때인지라, 서중석 교수님의 신간이 나왔길래 고민없이 구입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에 있어 워낙 유명하신 교수님. 책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이후 두 번째, 직접 강의를 들었던 것은 예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하는 연수 때 딱 한 번. 10년 가까이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셨었다는 건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취재기자로 일하셨다니, 이 분은 종이 활자로만 공부를 하신 게 아니라 역사 한 가운데서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들이 많았을 터. 물론 어떻게 경험하고 느끼느냐, 그게 더 중요한 거지만. 암튼 더 믿음이 생긴다.

 

이 책은 교수님과 프레시안 김덕련 기자의 인터뷰 내용을 엮은 것이다. 얘기한 걸 약간만 정돈해서 옮겨 놓은듯, 실제로 강의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교수님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아서 좋았다.

 

검색을 해보니, 프레시안에서 계속 연재중인 것 같다.

흥미롭지만 어려운 현대사. 다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 정리하면 한국은 해방을 통해 시민 혁명이자 정치적 혁명, 사회적 혁명, 경제적 혁명, 문화적 혁명을 맞았다. 그야말로 유사 이래 이렇게 큰 변화를 순식간에, 한꺼번에 맞이하게 됐다는 것, 이건 정말 대단한 거였다. 젊은 사람들은 '공기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해방도 자연스럽게 왔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국내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싸워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게 됐는가와 연관시켜서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해방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도 뉴라이트는 해방을 몹시 폄하한다.(47)

 

* 미소 공위가 완전한 성공까진 못 가더라도 적어도 몇 단계는 갔어야 하는 건데, 최소한의 첫 단추도 못 끼운 것 아닌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극좌와 극우의 탓이 크다고 본다. 그건 우리가 반성해야 할 일이지, 미소공위 또는 미국과 소련을 먼저 비난하는 건 너무 발 빠른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조선일보 사설> '임시정부에 제언함'(45.12.5)

첫째, 이상 양대(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세력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합작하여 민족 통일 전선을 완성할 것. 둘째, ...... 민중의 총의에 의한 민주 정부여야 할 것. ... 조선에는 아직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봉건 제도를 못 벗어났으니 이를 현실적으로 타파할 것. ... 이를 타파하자면 토지 문제가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한다. 넷째는 현재 민족 통일 전선의 암이 되어 있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문제이다. 이런 도배를 신성한 우리의 건국에서 배제함으로써 후한을 단절하는 데 어느 누가 찬동치 않을 것인가.

 

* 해외 학자들이 제일 궁금하게 여긴 건 도대체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그전에 일본, 그리고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 같은 데서 어떻게 엄청난 경제 발전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 이 지역들의 공통점은 토지 개혁이다. 일본은 패전 이후에야 토지 개혁을 했고 중국은 1950년대 초에 토지 개혁을 했다. 대만도 장제스 정권이 토지 개혁을 했고 한국도 농지 개혁을 했다. 그러니 네 지역에서 이 점이 공통적이다. 이와 달리 중남미와 필리핀 등 동남아 일부 국가가 그렇게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도... 이 지역들이 전부 토지 개혁이 안 됐다.(215)

 

* 나라를 빼앗긴 직후부터 독립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운동들 대부분이 공화주의를 표방한다. 놀라운 일이다. 전 세계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나라가 별로 없다. 어째서 그런 건가. 이렇게 된 한 요인은 '대한제국이 우리 국가를 보전하는 데 과연 잘했는냐', 대한제국에 대한 이런 강한 불신 때문이다. 또 신해혁명... 러시아혁명의 영향이나 미국의 영향도 생각해봐야 한다. .. 그러나 공화제로 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독립 운동가들이 자유와 평등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233)

 

* 친일파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하는 건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친일파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못한 데서 잘 드러난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 동안 그랬다. 극단적인 극우 반공체제를 유지하던 시기엔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친일파 문제는 6월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아가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등장한다.(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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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소리를 찾아서 - 성현, 악학궤범을 만들다
최형미 지음, 이부록 그림, 송지원 감수 / 한국고전번역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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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에서 보내준 두번째 책이다.
성종 대, <악학궤범>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을 소설의 형식으로 담아냈다.

 

성현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성종의 명을 받아 음악 이론서인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책에는 성현을 따라다니며 심부름도 하고, 아이디어도 제공하는 인물로 노비인 명복이와 장악원 악공 목돌이, 도화서 화원 윤복이가 등장한다. 성현에 대한 객관적 정보가 자세히 실려있지 않아 다만 짐작할 뿐이지만, 그는 권위를 내세우고 질서를 중시하는 고리타분한 선비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쓴 또 하나의 책 <용재총화>를 봐도 그렇다. <최고의 소리를 찾아서>에서는 성현이 함께 고생한 명복, 목돌이, 윤복이에게 선물해줄 뜻으로 <용재총화>를 지었다고 설정했다. 소설의 전개상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 스스로 책을 쓴 의도를 '심심할때 보기 위한 것'이라고 했듯, 누구나 재밌게 읽고 즐기라는 뜻에서 쓴 책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성종의 숙원이었던 음악서를 편찬해낸 성현은,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부관참시 당했다.

 

 

* 성현은 음악을 책으로 배운 사람들에게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생 그 악기가 내는 소리에 홀려 악기만을 만들어 온 악기장들. 누가 저들을 천하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성현은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직접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에 무척 감사했다. 또한 그들 덕에 큰 깨달음을 얻고 가는 것 같아 마음이 두둑해졌다.(159)

 

* 책을 쓰기 위해 악생과 악공을 만나고, 악기장을 만나고, 무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전까지는 몰랐었다. 보기 좋은 꽃을 피우기 위해 추위와 비바람을 이겨 내야 하는 것처럼 궁중 의례에서 악무를 담당하는 이들이 너무 많은 것을 견뎌 내고 있다는 것을.(172)

 

* 악학궤범 서문
樂이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요,
虛에서 발하여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감동하게 하고,
혈맥이 통하여 정신이 편안해지게 한다.
느낀 바가 같지 않으면 소리 또한 같지 않다.
기쁜 마음을 느낀 소리는 퍼져서 흩어지고,
노한 마음을 느낀 소리는 거칠고 사나워진다.
슬픈 마음을 느낀 소리는 급하고 빠르고,
즐거운 마음을 느낀 소리는 너그럽고 여유롭다.
서로 다른 소리를 합해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임금이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도하는 것이 바르냐 그르냐에 따라
풍속이 성해지느냐 침체되느냐가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악의 도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관계가 큰 이유이다.(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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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서 이야기 - 정조, 이순신을 역사에 새기다
김대현 지음, 조성덕 그림, 정준영 감수 / 한국고전번역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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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 실린 말.

'책은 모든 것을 담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건과 사물에 대해서도, 글쓴이와 편찬자의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점입니다. 맹자는 책을 그대로 믿는다면 차라리 그 책이 없는 게 낫다고 말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말해주는 것 같다. 맹자가 그랬단다. 그런 책은 없는 게 낫다고.

 

 

 

이 그림은 정조가 규장강 앞 연못에서 신하들과 뱃놀이를 하며 시짓기 게임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 게임에서 진 신하 두 명이 연못 안 작은 섬에 유배보내졌다. 재밌어서 담아 봤다.

 

* 책을 인쇄하기 전에 꼭 거쳐야 할 매우 중요한 과정이 하나 있네. 바로 교정이지. 교서관에서는 인쇄 과정에서 오자 한 글자가 나올 경우 태를 30대 치게 되어 있었네. ... 또 다섯 자 오자가 나오면 관원을 파출하도록 했지. 우리 옛 책이 우수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엄격하고 꼼꼼한 교정에 있었네. <이충무공전서>를 만들 때 교정은 맡은 이는 감인관 유득공이었네.(119) 

 

* 개항 후까지도 남아 있던 거북선은 1895년(고종32) 각 군영이 폐지되면서 함께 없어졌네. 실물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그림이나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았네. ... 하지만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더군. 지금은 쓰지 않는 500원짜리 지폐에 거북선이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지. 한 도전적인 사업가가 이 지폐 속의 거북선 그림을 보여 주며 외국에 나가 돈을 꾸어 아무것도 없는 모래벌판에 조선소를 만들었단 이야기를 들었네.(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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