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 해방과 분단, 친일파, 현대사의 환희와 분노의 교차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서중석.김덕련 지음 / 오월의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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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때인지라, 서중석 교수님의 신간이 나왔길래 고민없이 구입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에 있어 워낙 유명하신 교수님. 책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이후 두 번째, 직접 강의를 들었던 것은 예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하는 연수 때 딱 한 번. 10년 가까이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셨었다는 건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취재기자로 일하셨다니, 이 분은 종이 활자로만 공부를 하신 게 아니라 역사 한 가운데서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들이 많았을 터. 물론 어떻게 경험하고 느끼느냐, 그게 더 중요한 거지만. 암튼 더 믿음이 생긴다.

 

이 책은 교수님과 프레시안 김덕련 기자의 인터뷰 내용을 엮은 것이다. 얘기한 걸 약간만 정돈해서 옮겨 놓은듯, 실제로 강의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교수님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아서 좋았다.

 

검색을 해보니, 프레시안에서 계속 연재중인 것 같다.

흥미롭지만 어려운 현대사. 다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 정리하면 한국은 해방을 통해 시민 혁명이자 정치적 혁명, 사회적 혁명, 경제적 혁명, 문화적 혁명을 맞았다. 그야말로 유사 이래 이렇게 큰 변화를 순식간에, 한꺼번에 맞이하게 됐다는 것, 이건 정말 대단한 거였다. 젊은 사람들은 '공기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해방도 자연스럽게 왔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국내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싸워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게 됐는가와 연관시켜서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해방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도 뉴라이트는 해방을 몹시 폄하한다.(47)

 

* 미소 공위가 완전한 성공까진 못 가더라도 적어도 몇 단계는 갔어야 하는 건데, 최소한의 첫 단추도 못 끼운 것 아닌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극좌와 극우의 탓이 크다고 본다. 그건 우리가 반성해야 할 일이지, 미소공위 또는 미국과 소련을 먼저 비난하는 건 너무 발 빠른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조선일보 사설> '임시정부에 제언함'(45.12.5)

첫째, 이상 양대(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세력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합작하여 민족 통일 전선을 완성할 것. 둘째, ...... 민중의 총의에 의한 민주 정부여야 할 것. ... 조선에는 아직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봉건 제도를 못 벗어났으니 이를 현실적으로 타파할 것. ... 이를 타파하자면 토지 문제가 무엇보다 선결되어야 한다. 넷째는 현재 민족 통일 전선의 암이 되어 있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문제이다. 이런 도배를 신성한 우리의 건국에서 배제함으로써 후한을 단절하는 데 어느 누가 찬동치 않을 것인가.

 

* 해외 학자들이 제일 궁금하게 여긴 건 도대체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그전에 일본, 그리고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 같은 데서 어떻게 엄청난 경제 발전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 이 지역들의 공통점은 토지 개혁이다. 일본은 패전 이후에야 토지 개혁을 했고 중국은 1950년대 초에 토지 개혁을 했다. 대만도 장제스 정권이 토지 개혁을 했고 한국도 농지 개혁을 했다. 그러니 네 지역에서 이 점이 공통적이다. 이와 달리 중남미와 필리핀 등 동남아 일부 국가가 그렇게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도... 이 지역들이 전부 토지 개혁이 안 됐다.(215)

 

* 나라를 빼앗긴 직후부터 독립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운동들 대부분이 공화주의를 표방한다. 놀라운 일이다. 전 세계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나라가 별로 없다. 어째서 그런 건가. 이렇게 된 한 요인은 '대한제국이 우리 국가를 보전하는 데 과연 잘했는냐', 대한제국에 대한 이런 강한 불신 때문이다. 또 신해혁명... 러시아혁명의 영향이나 미국의 영향도 생각해봐야 한다. .. 그러나 공화제로 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독립 운동가들이 자유와 평등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233)

 

* 친일파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하는 건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친일파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못한 데서 잘 드러난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 동안 그랬다. 극단적인 극우 반공체제를 유지하던 시기엔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친일파 문제는 6월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아가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등장한다.(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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