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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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스릴러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선택지가 몇개 인지, 선택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 적어도 나는 동일하거나 혹은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없이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라고 해도(어쩌면, 빠르게 내린 결정일수록) 과거의 내 체험이나 나의 행동패턴, 습관 같은 것들이 작용한 결과일 수 있다.

그래서 순간에 내린 선택일수록 그 사람의 진심이 담겨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주위에 정말 착하고 선행을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면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손과 발이 먼저 움직인다. 나는 그렇게 되려면 멀었다.;

따라서 어떤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그 사람의 생을 치명적인 파국으로 몰고 갔을 지라도 동일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때 그는 같은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다. 주인공 최현수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사고 직후 소녀를 호수에 던지지만 않았더라면'이라는 후회와 가정은 불필요하다.

 

 

책상 앞으로 돌아와 앉았다. 보이지 않는 저 창밖에 무엇이 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손이었다. 내 삶을 흔들어온 오영제의 손. 나는그의 손가락에 낀 요요였다. 던졌다가 당기고 말아 쥐었다가 멀리 날려 보내면서 그는 7년을 기다린 것이다. 내가 어딘가에 정착하는 걸 막는 게 첫 번째 목적이었겠지. 떠돌이로 만들어야 영원히 사라져도 궁금해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덤으로 사소한 보복행위라는 즐거움도 누리고. 자기 딸을 죽인 자의 아들을 맘 편히 살게 놔두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설령, 때가 오면 자기 손으로 거둘 놈이라 할지라도. 나는 죽어라, 도망쳤으나 실은 한 번도 그를 벗어난 적이 없는 셈이다.(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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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빨간 책방 팟캐스트를 통해 알게 된 책이다. 편집자가 책표지와 제목을 뽑아내느라 하도 고생을 해서 이책을 끝으로 사표를 낼 생각까지 했었다고. 그런 수고끝에 만들어진 책이라 그런지(물론 어느책이나 다 그렇겠지만) 표지와 제목 모두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물자체로서의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이런류의 사회과학 서적이 지극히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게 느껴지는 건 물론 8할 정도는 내용과 구성의 힘이겠지만, 나머지 2할과 +알파는 책이 지닌 외양의 힘인 것 같다.
 
책을 읽기 전 가졌던 이미지때문에 사회과학이란 말을 쓰긴 했지만 이 책은 사회과학 서적도 아니고 마르크스의 저작을 철저하게 비판, 분석한 책도 아니고 고전의 해석을 돕기 위한 해설서 같은 책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공산당선언>, <독일이데올로기> 등에 언급된 내용들을 인용하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책의 목적이었다면 이책은 지금까지 마르크스에 관해 쏟어져 나온 셀 수 없이 많은 책들 중 한 권이라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저작 뿐 아니라 알래드 보통, 가라타니 고진, 김훈, 홍상수 등의 작품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어렴풋이 알고 있던, 혹은 전혀 낯설기도한 이들의 저작이나 영화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학부 시절,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공산당선언>을 비롯해 마르크스, 엥겔스, 심지어 알튀세르까지 그 사람들의 책 일부를 복사해 한데 모은 다음 두꺼운 책으로 제본해서 읽었었는데, 그러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을 수 있었다면 좋아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읽는 내내.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러니까 십년 전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혹은 알튀세르의 책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읽었다기 보다는 그 두꺼운 제본 꾸러기를 들고 다닌데에 오히려 더 큰 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전부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때 내 생각이 더 유연하고 좀 더 깊었더라면.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때의 나는 정확히 'beside oneself' 즉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던 것 같다. 미쳤거나 정신이 나갔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내 안에 있지 못하고 옆에 서 있는 듯한 상태였다는 것.
 
생산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윤이 발생하는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가 어떤식으로 이루어지는지, 혹은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우리가 잃을 것은 억압의 쇠사슬 밖에 없다' 같은 과학적이고 선언적인, 선동적인 어떤 표현들에 흥분하고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하는 법" 이와 같은 말에 좀 더 무게를 두고 고민하고, 그 의미를 새겼더라면, 그동안 더 잘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더 잘 살았을 것이라는 말은, 내가 좀 더 주변 사람을 알뜰히 챙기고, 고마움을 느끼고 표현하며 살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지금에라도 그렇게 살아야하지만;;;
 
"공산주의는 단지 사적 소유(자유 재산)를 철폐하고 국가계획을 도입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적 본질이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상태, 인간과 인간의 충돌이 진정으로 해결되는 상태여야 하는 것입니다."(264)
 
마르크스가 정말이지 내게 아프냐고 물어오는 것 같다. 인간이 끊임없이 아플 수밖에 없는 이유인 '자기 소외'. 그 소외의 원인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으로부터 기인하기도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치유를 위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처방을 내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왜 아픈지 뭐때문에 아픈지, 진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그리고 위로가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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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4
윤흥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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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의 단편집이다. 한국 현대사 관련된 어떤 책에서 1970년대에 있었던 광주대단지 사건을 설명하며 관련된 소설로 이 책을 소개했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다.

 

1. <하루는 이런 일이>

 

송교수는 어느 날 고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낯선 남자로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송교수의 비밀을 덮어줄테니 그 대가로 현금 십만원을 준비해놓으라는 협박 전화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화가 두 번, 세 번 반복되면서 자신이 남에게 책 잡힐 만한 일을 한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만나기로 한 날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 불안에 떤다. 불안은 전염병처럼 번져 송교수의 가족 전부를 신경 쇠약 상태로 몰어넣는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던 송교수는 자신을 찾아온 고학생의 당당한 모습에 기가 눌려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 간다. 결국 길에 떨어진 돈을 주우려고 했던 일, 불량학생들이 노인을 괴롭히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냥 지나쳤던 일, 미망인이 된 친구 아내를 도와주려다 남의 시선이 두려워 그만두었던 일 등 스스로 떳떳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다. 그리고 고학생에게 현금 5만원을 준다. 5만원과 맞바꾼 고학생이 넘기고 간 서류 봉투에는 짧은 메모지 한장만이 들어있었다.

p34.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저는 사회심리학을 전공하는 고학생입니다. 사회적 배경이 현대 지식인의 양심에 미치는 제영향을 가지고 논문을 작성중에 있습니다. 자료를 하나씩 수집할 때마다 자기 양심에 자신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재확인하곤 합니다. 그러나 검진해본 결과 선생님은 역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양심적인 인사들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부디 자신을 가지고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의 끈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끊어지는 느낌. 나 자신은 송교수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됐을 때 당당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는지 자문하게 하는 소설이다.

 

2. 양

 

녀석은 누구로부터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동할 때마다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인민군가를 기운차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걸 들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피를 부르는 소리였다. 뺨 한 대 얻어맞은 과거를 찌르면 등쪽까지 꿰뚫리는 죽창으로 앙갚음하는 세상이었다.

인민군 병사는 인민군가와 연설을 흉내내는 네살 된 아기 윤봉이를 이뻐했다. 윤봉이와 윤봉이를 업어 키운 형이자 화자인 '나'는 마을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인민군이 떠나고 곧 국군이 들어오자 상황은 뒤바뀌었다. 아버지가 양민증을 빼앗겼고 얼마 뒤 헌병에게 끌려갔다. 식구들은 불행의 원인이 윤봉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홍역에 걸려 앓고 있는 윤봉이가 하루 빨리 죽어 없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날 윤봉이가 죽는다. 하늘이 무너진 듯 거친 울음을 토해내는 엄마를 보며 주인공 '나'는 의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산너머에서 연기가 되어 솟아오르는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엄마처럼 울음을 토해낸다. 방에 들어서면서 반사적으로 뱉었던 "저 작것 아직도 안 뒈졌냐"는 엄마의 물음이 정말 자식이 죽었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 무사했냐'라는 안부 인사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3. 엄동

 

얼마전까지 광주대단지라 불리던 곳, 성남에서 서울까지 출퇴근을 하는 박과 미스 정이 퇴근길에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나 폭설 때문에 운행이 중단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겪게 되는 하룻밤 동안의 일을 다룬 소설이다. 자신 역시 성남 사람이면서 또 다른 성남 사람 미스 정,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관계성을 부인했던 못난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 끝이 나는데 거기엔 1970년대 개발 논리에 밀려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위협 받았던 사람들을 방관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죄의식 같은 게 담겨 있는 것 같다.

 

미스 정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가지 박은 길가 수은등 아래 외돌토리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울보다도 많이 내린 듯한 눈이 성남 시가지 전체를 순백의 갑주처럼 두툼하게 덮고 있었다. 오물과 폐수가 뒤섞여 흐르던 탄천의 지류도, 굴곡이 심한 언덕바지에 염병 후에 돋은 발진처럼 덕지덕지 엉겨붙은 무수한 가옥들도, 그리고 그 속에서 한창 세상 모르게 곯어떨어져 있을 모든 지아비와 지어미와 그들의 새끼들도 두루두루 다 하얗게 백야를 이룬 한 차례의 혹심한 눈사태 속에서 순결한 피로 다시금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은 밤이었다. 세상을 온통 휘덮은 그 순백의 색채를 마주하고 있는 동안 박은 이렇다 할 대상도 없으면서 그저 주위의 모든 것에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더 이상 고개를 바루고 꼿꼿이 서 있기가 마차 무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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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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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서 풍기는 느낌도 그렇고, 장르도 그렇고 평소 좋아했던 스타일은 아니다. 요즘 마음이 심란해서 뭔가에 집중하고 싶어 책에 다시 빠져들기 시작했는데, 학교 도서관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다가 이 책을 집어들게 됐다. 읽기로 한 이유는 딱 두 가지. 어떤 책이든 읽어야 겠다는 마음, 그리고 저자가 <냉정과 열정사이>를 쓴 사람이라는 것. <냉정과 열정사이>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영화로는 본적이 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잔잔하고 애잔한 느낌의 멜로 영화였던 것 같다.

 

화려하고 번잡한 도심 속 홀로 우뚝 서있는 도쿄타워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그려지진 않지만 쓸쓸함, 외로움, 고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랑도 그렇다. 열렬히 누군가를 사랑하지만(토오루가 사후미를), 그리고 자신의 사랑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채 여러명의 여자와 만남을 지속하지만(코우지) 그 둘 역시 외롭고 고독해보인다. 사랑받는 사후미도, 코우지를 버린 키미코도, 유리도, 요시다도 모두 외롭고 고독해보인다.

 

열아홉 고등학생인 토오루와 코우지에겐 각자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공통점은 그 연인이 모두 연상의 여인이라는 점이다. 정서적으로 감정이입하기 좀 힘들었던 부분이기도 한데, 토오루의 연인 사후미는 엄마의 친구이고 코우지의 연인 키미코는 친구의 엄마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토오루의 엄마가 자신의 친구와 아들과의 관계를 알게 됐을때 두 사람의 교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이런 경우가 자연스러운가?

 

사후미는 토오루에게 있어 '스위치'와 같은 존재이다. 오로지 그녀로 인해 토오루의 삶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한 빛의 세상이 되었다가 어둠과 절망으로 가득한 어둠의 세상이 되기도 한다. 얼마전에 끝난 내 짧았던 연애의 경험이 계속 떠올랐다. 토오루의 모습이 한때의 나 같다고 생각했다. 전화 연락이 오기 전, 후로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느낌.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내가 없었다. 내 기분과 감정이 온전히 내 의지대로 컨트롤 되지 않았다. 아직도 난 정작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상실감을 뒤늦게 깨닫게 된 덕분으로 이별이 준 허전함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좋게 추억하는 부분이 훨씬 많긴 하지만, 여러번 곱씹어 생각해도 그때의 내가 가련하고 애처롭다.

 

"기다린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기다리지 않는 시간보다 훨씬 행복하다. 사후미와 연결된 시간. 이곳에 사후미는 없지만, 자신이 사후미에게 감싸여 있다고 느낀다. 지배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115)

 

예전이라면 아무 감흥없었을 문장이 너무나 가슴깊이 와닿았다.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만, 기다리지 않는 시간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말. 더이상 기대하고 기다릴 것이 없는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고 기운빠지는 일인지, 요즘은 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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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 개정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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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길 위에, 보편적인 삶 속에 모든 것의 의미와 가능성이 녹아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 죽기 전에 꼭 한번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고 싶다. 꼭 그 길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신 역시 보편자였음을 알게 됨으로써 나도 적어도 내 자신에게 만큼은 위대하고 가치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말이 필요없다. 그냥 강추.

 

p23. 무슬림 전통에 의하면, 모든 신자는 적어도 생애에 한 번은 메카로 순례를 떠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탄생 이후 첫 천 년 동안 세 개의 신성한 순례길이 존재했다. 누구나 그곳 중 하나를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축복과 관용이 베풀어졌다. 첫번째 길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상징은 십자가이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로마의 방랑자'라고 불렸다. 두번째 길을 예루살레의 예수의 성묘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수상가(palmist)라고 불렸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그를 맞아준 이들이 흔들었다는 종려나무 가지가 그 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세번째 길은 이베리아 반도에 묻힌 사도 야고보의 성 유골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곳은 어느 날 밤 양치지가 들판 위에서 빛나는 별을 봤다는 장소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후 성 야고보와 성모마리아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복음서의 말씀을 가지고 그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그곳에는 콤포스텔라(별들의 들판)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오래지 않아 모든 기독교도 국가의 여행객들이 몰려드는 도시 세워지게 되었다. 이 신성한 세번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는 '순례자'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그들은 가리비껍데기를 상징으로 선택했다.

 

p77. 인간은 결코 꿈꾸기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영혼은 꿈을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요. 살아가는 동안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실망하고, 충족되지 못한 욕망 때문에 좌절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지요. 하지만 그래도 꿈꾸기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이 죽어버리고, 아가페가 들어갈 자리가 없게 되니까요. ...

선한 싸움은 우리가 간직한 꿈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우리 내면에 간직한 꿈들이 힘차게 꿈틀댈 때면 우린 용기 백배하지만, 그땐 아직 싸우는 법을 알지 못했지요.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그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을 때는, 전장에 뛰어들 용기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적대시하게 되고, 결국엔 스스로 자신의 가장 큰 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자신의 꿈은 유치하다거나, 실행하기 힘들다거나, 인생에 대해 몰랐을 때나 꾸는 꿈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죠. 선한 싸움을 이끌어갈 용기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꿈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p322. 저는 저 자신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어려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이 먼 길을 걸었습니다. 주님,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이 힘을 지닐 수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느끼는 가슴의 통증, 저를 흐느끼게 하고 어린양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이 고통... 이것들은 인간이 존재한 이래 늘 우리와 함께해왔습니다. 승리의 무거운 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마침내 실현되려는 꿈을 그냥 놓아버립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선한 싸움'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것들에 갇혀 있는 포로들입니다. 무엇을 할지도 모른 채 검을 찾기만을 바랐던 저 자신처럼..." ㅣ

 

"비범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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