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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4
윤흥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3월
평점 :
윤흥길의 단편집이다. 한국 현대사 관련된 어떤 책에서 1970년대에 있었던 광주대단지 사건을 설명하며 관련된 소설로 이 책을
소개했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다.
1. <하루는 이런 일이>
송교수는 어느 날 고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낯선 남자로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송교수의 비밀을 덮어줄테니 그 대가로 현금 십만원을
준비해놓으라는 협박 전화를 받게 된다. 처음에는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화가 두 번, 세 번 반복되면서 자신이 남에게 책 잡힐 만한 일을
한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만나기로 한 날을 기다리며 하루 하루 불안에 떤다. 불안은 전염병처럼 번져 송교수의 가족 전부를 신경 쇠약 상태로
몰어넣는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던 송교수는 자신을 찾아온 고학생의 당당한 모습에 기가 눌려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 간다. 결국 길에 떨어진 돈을 주우려고 했던 일, 불량학생들이 노인을 괴롭히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냥 지나쳤던 일, 미망인이 된
친구 아내를 도와주려다 남의 시선이 두려워 그만두었던 일 등 스스로 떳떳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다. 그리고 고학생에게 현금
5만원을 준다. 5만원과 맞바꾼 고학생이 넘기고 간 서류 봉투에는 짧은 메모지 한장만이 들어있었다.
p34.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저는 사회심리학을 전공하는 고학생입니다. 사회적 배경이 현대 지식인의 양심에 미치는 제영향을 가지고 논문을
작성중에 있습니다. 자료를 하나씩 수집할 때마다 자기 양심에 자신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재확인하곤 합니다. 그러나
검진해본 결과 선생님은 역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양심적인 인사들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부디 자신을 가지고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의 끈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끊어지는 느낌. 나 자신은 송교수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됐을 때 당당할 수 있는 삶을 살아왔는지 자문하게 하는 소설이다.
2. 양
녀석은 누구로부터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동할 때마다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인민군가를 기운차게 부르는 것이었다.
그걸 들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피를 부르는 소리였다. 뺨 한 대 얻어맞은 과거를 찌르면 등쪽까지 꿰뚫리는 죽창으로 앙갚음하는
세상이었다.
인민군 병사는 인민군가와 연설을 흉내내는 네살 된 아기 윤봉이를 이뻐했다. 윤봉이와 윤봉이를 업어 키운 형이자 화자인 '나'는
마을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인민군이 떠나고 곧 국군이 들어오자 상황은 뒤바뀌었다. 아버지가 양민증을 빼앗겼고 얼마 뒤
헌병에게 끌려갔다. 식구들은 불행의 원인이 윤봉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홍역에 걸려 앓고 있는 윤봉이가 하루 빨리 죽어 없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날 윤봉이가 죽는다. 하늘이 무너진 듯 거친 울음을 토해내는 엄마를 보며 주인공 '나'는 의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산너머에서
연기가 되어 솟아오르는 동생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엄마처럼 울음을 토해낸다. 방에 들어서면서 반사적으로 뱉었던 "저 작것 아직도 안 뒈졌냐"는
엄마의 물음이 정말 자식이 죽었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 무사했냐'라는 안부 인사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3. 엄동
얼마전까지 광주대단지라 불리던 곳, 성남에서 서울까지 출퇴근을 하는 박과 미스 정이 퇴근길에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나 폭설 때문에 운행이 중단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겪게 되는 하룻밤 동안의 일을 다룬 소설이다. 자신 역시 성남 사람이면서 또 다른 성남 사람 미스 정,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고, 관계성을 부인했던 못난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 끝이 나는데 거기엔 1970년대 개발 논리에 밀려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위협 받았던 사람들을 방관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죄의식 같은 게 담겨 있는 것 같다.
미스 정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가지 박은 길가 수은등 아래 외돌토리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울보다도 많이 내린 듯한 눈이 성남 시가지 전체를 순백의 갑주처럼 두툼하게 덮고 있었다. 오물과 폐수가 뒤섞여 흐르던 탄천의
지류도, 굴곡이 심한 언덕바지에 염병 후에 돋은 발진처럼 덕지덕지 엉겨붙은 무수한 가옥들도, 그리고 그 속에서 한창 세상 모르게 곯어떨어져 있을
모든 지아비와 지어미와 그들의 새끼들도 두루두루 다 하얗게 백야를 이룬 한 차례의 혹심한 눈사태 속에서 순결한 피로 다시금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은 밤이었다. 세상을 온통 휘덮은 그 순백의 색채를 마주하고 있는 동안 박은 이렇다 할 대상도 없으면서 그저 주위의 모든 것에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더 이상 고개를 바루고 꼿꼿이 서 있기가 마차 무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