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1 - 봉단편 홍명희의 임꺽정 1
홍명희 지음 / 사계절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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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임꺽정은 정말 멋있는 소설이다. 진정한 조선토종의 마초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이 책만한 것이 있으랴..

사실 이 책을 읽은지는 꽤 시일이 지났다. 그러나 기억을 대충 더듬어 보아도 홍명희의 맛깔스럽고 담백한 표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람들이 많이 읽는 장길산이나 그와 비슷한 류의 책들은 그 기본 구도에 있어서 임꺽정을 모범으로 계보를 흘러왔음을 읽어 본 사람들은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역사소설의 계보의 중심에 있을 정도로 중요하면서도 탁월하다 할 수 있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 작가의 문장력도 매력이지만 책 속에 일관되게 흐르는 작가의 주제의식은 보다 고차원적이다. 가장 버림받고 천덕꾸러기 같은 민중들의 애환과 그들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해 버린 저항의식은 혁명적 모티브가 되어 소설의 전반적 흐름을 잡고 있다. 작품이 1920년대 말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서는 상당히 파격이다. 즉,일제시대 때 쓰여진 소설로는 적나라하게 민족의 혁명의식을 고취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상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급진적 맑시즘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기에 아마 해방 이후에도 검열이 까다롭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

결국 아쉽게도 작가가 월북하는 바람에 책의 결말은 흐지부지 되어 궁금증을 끊임없이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월북한 이후에도 후속편을 남겼다는 끊임없는 추문이 돌고 이를 복원하고자 하는 작업이 지속되므로 아직 결말을 알 희망은 있을지도 모른다.

장편소설은 중독적인 성향이 있는 듯 하다. 장편을 쓸 수 있게 하는 작가의 동력도 초미의 관심사이지만 정말 훌륭한 장편을 읽고 났을 때의 어떤 개운함과 뒤 끝이 또 다른 큰 스케일의 장편을 찾아나서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읽어야 할 장편이 많이 남았으므로 삶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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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Y 2004-09-22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있는 소설이라고 했드만..멋있는..이라 바꿨넹..ㅠ.ㅠ

 
위기의 공교육 어디로 가야 하는가? - 부교연 연구총서 2
김영용 외 지음 / 열린아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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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교육의 문제점과 방향을 진단해 볼 수 있는 평이한 책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교육의 여러 문제점들이 수도 없이 난무하지만 그런 문제점들을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되짚어 봄에 따라 보다 전문적 식견을 가지도록 해 준다.

그리고 다양한 대안의 제시와 방향 설정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데 개방적이라서 문제를 비판하는 것에만 그치는 선에서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또한 각 전공 분야마다의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균형있게 설정되어 있어서 비판적 안목을 동시에 견지하도록 해 주는 좋은 점이 있다. 특히 경제학자들의 교육을 바라보는 시각은 교육 외부에서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을 고찰하게 함으로써 현 교육에서 수용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해 반성하게 한다.

아쉬운 점은 방향의 구체적 실현 여부에 대한 역학적 조사와 행정적 실천 루트를 제시한 연구가 있다면 보다 영향력 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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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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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름답고 섬세한 화가에게 치명적인 고민이 있었으니 그녀의 그림에는 깊이가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한 일일 수가 없다. 그 깊이를 누가 어떻게 잴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권위있는 비평가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녀는 정말 그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녀의 죄가 있다면 권위있는 자의 말을 너무 귀담아 새겨들었다는 것이다.

누가 너를 정의할 수 있지? 누가 당신을 단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인정한다면 삶의 패배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란 두 귀를 지니지 않았던가. 타인의 언어는 너를 죽일 수도 있다. 아마 그대를 두 번 죽이는 일도 있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굴복하지 말라. 왜냐면 타인의 반응은 네 행동의 거울적 반향이 될 수도 있으나 모든 거울 또한 백설 공주의 거울처럼 진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므로...

체스를 잘 두는 노인에게 젊은 방랑자가 도전을 해 온다. 자부심, 신선함, 패기.. 그리고 노인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실력. 그러나 젊은이는 노인의 노련한 기 싸움의 자세에 눌려 퇴진하고 만다. 노인은 알고 있다. 자신이 젊은이에게 졌다는 것을.. 젊은이는 다만 오랜 세월을 견뎌온 그 진득한 침묵의 힘과 인내에서 졌을 따름이다. 어떻게 보면 젊은이의 패기와 늙은자의 노련함은 같은 힘의 균형을 발휘하는 지도 모른다. 늙어간다고 슬퍼할 일만은 아닌 듯 싶다. 신은 공평할지도 모른다.

보석장인의 발견.. 지구는 점점 조개화 되어가고 있다. 언젠가는 달처럼 지구도 굳어갈 것이다. 인간이 늙어가면서 굳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로.. 엉뚱한 발견이지만 우연히 발견한 진리의 보이지 않는 형상은 진짜(?) 일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에 직시하는 인간의 본능이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인지도..

파트리크 자신의 고민과도 같은 대목.. 모두 읽은 책들의 언어는 어디로 가는걸까.. 지금은 기억에 하나도 남지 않았는데.. 그러나 언어의 힘은 보이지 않는 사고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생각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그것이 바로 독서의 힘인 줄 아는 사람은 꽤나 많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놓지 못하는 것이지..ㅋ. 변화의 가능성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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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 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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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변하니?

가볍게 질문해 본다. 진실=Truth,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혹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삶의 요소 요소에서 들려오는 선택에 대한 요구를 우리는 어떠한 판단의 근거로 충당시켜왔는지에 대한 의식적 질문이다. 아마도 현재의 패러다임 속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귀절은 '믿을 수 있는 건 모든 것은 변한다는 한 가지 뿐이야'라는 언어의 유희일지 모른다.

산도르 마라이'의 두 작품을 접하면서 우리는 감당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게에 짓눌려 살면서도 순간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 색 다른 언어로 삶을 포장할 수밖에 없는 존재 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 우정, 열정, 신의, 자긍심 등등의 형이상을 쫓아서 그 판타지에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진실을 대변하는 양 그렇게 아픔을 달래 왔던 것이다.

그리고 <열정>과 <유언>이 쓰여진 작가의 시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끊임없는 전쟁, 살육 속에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긴장과 불만, 복수심들만이 쌓여간다. '헨릭'은 누구인지 모르면서 서로 다른 나라 젊은이들끼리 폭력을 가하며 모든 규범과 관습이 가치를 잃고, 충동만이 넘실대는 이 세상에서는 다른 어떤 것을 기대 할 수 없다고 회의한다. '콘라드'와 같은 이는 거대한 집단의 신념에서 벗어나 개인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열정을 발산해 보지만 결국 인간은 공동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발견할 뿐이다. 즉, 개인적 애정행각과 사랑도 공동 가치의 그물망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때 용납 될 수 있을 따름이다. 41년이란 세월을 방황해서 콘라드는 결국 자신이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은 부질없으며 적어도 인간 세계에서는 기준으로부터 벗어남에 대해 응당한 대가를 치뤄야 함을 깨닫는다. 적어도 인간 세계의 규범 속에서 '헨릭'은 승리한 셈이다. 그러나 헨릭에게 무엇이 남았는가. 전 생애를 통해 그리고 끈질긴 기다림을 통해 자신의 신념이 옳음을 자부하게 되지만 동시에 크리스티나의 사랑에 대한 열정과 와 콘라드에 대한 우정의 믿음까지 잃어버렸으니..

그러면 사랑에 대한 신념에서 우리는 얼마만큼 솔직할 수 있는가. 크리스티나는 어쩌면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열정의 대상으로서 또 하나는 풍요에 대한 욕망의 대상으로서. 거기에서 진실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과연 자유분방했던 사랑에의 열정이란 실로 존재했던 것인가. 헨릭은 크리스티나의 인격은 자신을 배반하지 않았음을 끝까지 믿고 진실에 대한 '말'을 얻고자 수 십년을 기다린다. 언어가 유일한 증거가 될 수 없음에도 인간은 왜 그리 언어에 집착하는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헨릭의 기다림은 <유언>에서 에스더의 기다림과도 동등한 비중을 가진다. 거짓 투성이인 라요스인 줄을 알면서도 그의 고백, 언어에 대해 집착하고 기다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라요스의 열정을 끊임없이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렸던 고백도 배반 당하며 모든 것을 내 주어야 하는 에스더.. 하지만 사랑에 대한 진실의 이분법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라요스만의 율법을 통해 그녀는 거짓말 투성이처럼 보이는 것이 또 다른 진실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위선의 세계 속에 속해 있을 수도 있음을 통찰해 보는 것이다.

어쩌면 '쿨'한 것을 추구하는 요즘의 세태에서 산도르 마라이의 '고전들'은 씁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기다림? 사랑? 지금 우리는 벌써 변화의 속성를 읽고 순간순간 카멜레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속에 대한 믿음과 열정이 무뎌지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비중으로 외로움을 곱씹어야 함은 왜일까? 인간은 근원적으로 외롭고 판타지를 추구하며 결국은 그 기다림의 연속임은 아닐런지.. 어느 작가가 얘기 했듯이 삶은 스튜를 끓이듯이 조용히 격정을 끓여내는 것이라는 그 말이 어쩌면 진실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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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Y 2004-04-05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로 이벤트 당첨됐었다. 3등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음.. 버지니아울프 전집 중 3권을 상품으로 받았는데 아직까지 못읽어봤다.
 
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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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것과 그것이 1963년에 쓰여졌다는 것이 묘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내가 태어나기 20여년 전에 쓰여 졌는데 2000년대의 내가 이렇듯 비슷한 공유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비슷한 코드로 엮인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서로 만난 적도 없고 생각이 공유된 적도 없지만 보는 방식, 느끼는 방식에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책이 나에겐 그러하다.

냉소적이고 농담섞인 문장 세 줄 때문에 청춘을 말살당해야 했던 운명, 자못 심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고통이었던 추억 앞에서 그것은 인류가 철이 덜 들어서 그렇다는 허탈한 말 한마디가 정말 그럴 듯 하게 들린다.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철이 덜 들어서 아직 덜 컸기 때문이었다는 말은 결국 인간 본연의 미성숙에서 오류가 발생됐다고 다독거리고 있는 것이다.

배반당한 진리와 사랑의 약속 앞에서 그것은 지난 날의 농담일 따름이다. 현재 누구의 책임이라고 따져봤자 의미없는 변명일 뿐이다. 적어도 개인의 실존 앞에서는 그런 것이다.

뭉개져 버린 과거는 농담일 뿐이었고 현재는 예전에 의미를 두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지고 있기에 보상받지 못한 과거에 대한 집착은 궁색하고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루드빅의 복수가 너무나 가여워질 수 밖에 없는, 허탈해 질 수 밖에 없는, 또다시 농담같은 거짓말 같은 의미없는 행위로만 보이게 한다.

그래서.. 심각하게 몰두하는 어떤 상황은 개인에게만 아픔이고 상처이지 다른 이가 보기에는 언제나 뒤집어 말할 수 있는 가설에 다름 아니다.

지금의 심각한 것이 티끌 같은 말 한마디,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면 굳이, 하나에 고뇌하는 자체가 너무나 부질없고 우습지 않은가..

삶의 철학적인 면을 생각해보게 하는 재미있는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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