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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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꽤 유명해진 책이기도 하고 강의 도중, 교수님께서도 추천을 해 주시길래 더이상 미뤄두면 안 되겠다, 왠만하면 좀 읽어주자! 라는 기특한 생각 하에 오랜 만에 구매해서 본 책이거늘...

이 책의 시작은 스키너로부터 시작된다. 보상과 처벌에 관한 행동주의 이론을 주장한 스키너. 실험방법 상의 문제로 인해 악명 또한 높은 스키너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고...그러다가 문득, 이 장이 끝나게 된다. 순간, 뭐지? 이게 다야?? 그냥 스키너가 무슨 실험을 했고 그 실험 내용이 무엇이고 그 실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 뭐다, 이러고 그냥 끝? 갑자기 뭔가 당한 느낌이었다.

대체 난 뭘 기대한 거지? 스키너에 대한 장이 저기서 끝난다고 해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달랐기 때문에 내가 당황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내가 뭘 기대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좀 더 읽어보자, 하고 2장으로 넘어갔다.

2장은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에 관한 실험인데 이 실험은 나치 장교들에 대한 정당성을 뒷받침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실험이다. 이 실험에 대한 내용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공허했다.

그리고 3장으로 넘어가면 또다시 유명한 사건이 나온다. 한 여인이 살해 당할 동안 38명의 목격자가 있었음에도 그 누구도 신고하지 않은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파생된 실험으로 인해, 우리는 도와줄 사람이 많다고 판단되는 상황하에서는 도움을 잘 주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아,,이제 이 책의 윤곽이 좀 잡힌다. 심리학의 유명한 실험들을 모아 놓았다. 그리고 이 실험들을 두고서 어떠한 패러다임을 보여준다거나, 이 실험들을 활용해 저자의 의견을 내어 놓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간혹 그 실험실험마다 저자의 의견을 조금씩은 비추고 있지만 크게 신경쓸 만한 건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하나의 실험 앞에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러이러한 측면에서 볼 수도 있고, 그러한 측면에서 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 볼 수도 있고, 그러한 측면에서 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심리학이 아니다. 실험이다. 그리고 그 실험이 어떤 상황에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으며 어떤 식으로 실험이 이루어졌고, 그 실험의 결론은 무엇이었으며 그 결론에 대한 평들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완전히 당했다. 나는 심리학 책인 줄 알았다. 스키너의 심리상자들을 열어서 심리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은 시종일관 실험들의 배경, 절차, 과정, 결론, 평가 등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고 저러한 데이타들을 이용해 저자만의 톡특한 시각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해 준다거나 하지 않는다. 저게 다다. 완전 실망이다.

이 책 자체는 네이버 오늘의 책에 선정될만큼 뛰어난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개인적인 기대치는 충족시켜주지 못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나에게 찍혀버린 책이 되었다. 애초에 이 책에 대한 사전지식이 부족해 내 멋대로 오해해버린 탓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들은 다 저마다의 인연이 있다.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책도, 그 날의 특별한 추억과 맞물리면서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멋진 책이 될 수도 있으며 나에게 발생한 이러한 오해로 인해 안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은 나에게 있어 내가 이걸 왜 샀을까,,,라는 추억을 안겨 줄 책이 되었다.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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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파리 - 황성혜의 파리, 파리지앵 리포트
황성혜 지음 / 예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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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쁜 책이다. 기자인 저자가 파리에 유학갔던 기간 동안 쓴 글들과 서울에 돌아온 후 파리에 대한 회상을 묶은 책이다. 이 책에는 파리의 거리, 파리의 카페, 파리의 문화, 파리의 사람, 등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고 참 파리스럽다-라고 느낀 대목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아저씨가 열차 칸에 오른다. "메담 에 메시에, 저는 직장을 잃은 가장으로, 집에는 두 아이와 아내가 있습니다. 이제는 술도 끊고 새 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데 이런 저를 격려해 주세요. 몇 센트도 좋고, 식당 식권도 좋고 다 좋습니다. 아니면 미소라도 제게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아니면 미소라도 제게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사람. 파리니까 가능한 멘트 아니었을까? 일단 기분 좋게 시작한 이 책은 읽기도 좋았다. 일기같이 아니면 블로그의 포스트 같이 그렇게 편하게 다가오고 편하게 읽히는 글이었다. 그러면서 아, 파리에 한번 가보고 싶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 파리에 가려다 목적지를 바꿔버린 친구에게 이 책을 권해 줄까 말까 고민도 되고. 그 친구 녀석 다시 파리병 도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과 동시에 다시 한번 그녀석 마음에 불을 질러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파리행을 생각해보라고 하고도 싶고. 파리를 애인 삼는다던가. 파리 정도면 너무 매력적인 애인인 것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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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지침서 (양장)
쑤퉁 지음, 김택규 옮김 / 아고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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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소설은 처음일까? 뭔가 나도 모르게 읽은 작품이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중국소설임을 인식하고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이혼지침서라는 책은 소설집으로  '처첩성군', '이혼지침서', '등불 세 개' 이렇게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첩성군은 '첩' 이라는 걸 다룬 소설이었는데 나는 조선시대 후궁들을 생각하면서 읽었다. 실제로 본처는 본처라는 위엄만 남은 채 세 첩들을 대하고 있었고 둘째 부인은 그야말로 조선시대 후궁들 생각이 절로 날 만큼 간교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셋째 부인은 권력이니, 총애니 하는 것보다 자유를 갈구하는 듯 보였고, 이 작품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넷째 부인은 나머지 세 부인들처럼 무서운 여자이진 않았지만 결국엔 또 다른 의미의 무서운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우물. 이 시대엔 남자에겐 다른 여자가 허용되었지만, 여자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우물은 때로는 자살의 장소가 되었고, 때로는 타살의 장소가 되었다. 그렇게 우물의 존재로 인해, 자유롭고자 한 여자는 끝내 자신의 자유를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혼지침서는?
이번에는 반대이다. 남자가 자유롭고자 이혼을 하고자 하지만 결국 남자 또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처첩성군에서는 남자가 강자였고 여자가 약자였지만 이혼지침서에서는 여자가 강자가 되고 남자가 약자가 된다.

그렇다면 두 작품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여자를 혐오스럽고 지긋지긋하고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그리고 있다. 처첩성군에서 네 여자를 거느리고 사는 남자는 네 여자에게 강자로 존재하지만 그는 내심 그 여자들을 지겨워하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또한 이 여자들을 무서워 한다. 이혼지침서의 남자는 여자를 혐오스러워 한다. 자신의 아내임에도 혐오스러워 하고 그래서 이혼하고자 했지만 결국 이혼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아내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신의 재혼 상대인 여자로부터 앞으로의 혐오를 엿봤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 혐오를 아내 대한 무서움으로 합리화하고 그렇게 이혼에 실패한 채로 살아가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두 작품 모두에서 여자는 그렇게 그려진다는 거다. 그것도 남자가 본 여자가 말이다. 의문이 아니 생길 수 없다. 중국남자들의 여성관은 이러한가? 아니면 쑤퉁이라는 작가의 여성관이 이러한가? 아니면 단지, 이 두 작품에서만 이렇게 그려진 것일 뿐인가? 앞으로 쑤퉁의 소설들이 속속 출간된다고 하니, 이 참에 쑤퉁의 여성관이든, 쑤퉁 작품 속의 여성관이든,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이 책 말미에 쑤퉁을 두고 그는 누군가를 계몽하려는 자가 아니라 신랄한 이야기꾼일 뿐이라고 말한다. 공감한다. 그는 진정 이야기꾼이다. 이 책은 잡으면서부터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가고, 이야기 또한 매끄럽게 잘 넘어간다.그가 진짜 이야기꾼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는 그런 글이었다. 재밌고, 잘 읽히는. 진짜 이야기꾼의 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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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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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쥐고 있던 쌀을 무의식적으로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쌀을 씹는 것이나 죽을 먹는 것, 밥을 먹는 것이 모두 매한가지였다. 어쨌든 허기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p16
이 구절을 보면서, 내가 이미 생쌀과 죽, 밥이 매한가지가 아닌, 그 속에 드러나는 생황방식의 차이를 당연한 듯 느끼는 시대와 계층 속에 살고 있음을 느꼈다. 이에 비춰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은 나와는 다른 세대, 다른 생활 방식 속에 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도입부의 이 한 구절이 앞으로 이 소설이 어떻게 펼쳐져 나갈 것인지 암시하는 것임을 느꼈다.

와장가에 막 도착했을 무렵의 우룽은 가로등 아래 누워 있는 사람을 보고 감기 걸린다며 일어나라고 한다. 그러다 그 남자가 이미 죽은 남자임을 눈치 챈 우룽은 죽은 사람이 쫓아 오는 것도 아닌데 놀라 도망을 간다. 하지만, 쌀집에서 일을 하는 동안 우룽은 남의 일에는 무관심한, 자기 일만 아니면 사람이 죽어도 상관없다 생각하는 와장가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바오의 눈을 보며 움찔했던 우룽이었지만 이젠 다른 이들이 우룽의 눈을 보고 움찔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며 두려워했던 우룽은 자신을 두렵게 했던 이들에게 모두 복수하고, 자신이 바로 그 두려운 존재로 등극했다. 애초에 너무 배가 고파 악해졌다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악을 유지했다. 무엇을..위해서?

쯔윈.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고 그녀의 몰락에 가장 마음이 아팠다. 쯔윈은 어린 나이에 와장가의 부호인 뤼 대감의 수양딸이 된다. 하지만 말이 수양딸이지 이내 정부 노릇을 하게 되고 이는 허영심에 가득 찬 쯔윈이 원한 일이었다. 뤼 대감이 그녀에게 시들해지자, 그녀는 오매불망 뤼 대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내들과 어울리며 뤼 대감에게 앙큼한 반항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누구의 씨인지로 모를 아이를 임신한 그녀, 뤼 대감에게 버림 받고, 비참한 몰골이 되어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쯔윈은 이내 다른 사내를 유혹해 함께 영화를 봤던 것이다. 나쁜여자이다. 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남자에게 버림 받았다고 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악녀가 되어 그 상처를 훌훌 털어버리고선 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그녀가 좋았다.
하지만 역시 쑤퉁이다. 이런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신에게 시들해진 뤼대감에게 앙큼한 반항을 할 수 있었던 그녀에게 결국엔 뤼대감의 첩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고, 실상 그 속에서 하녀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이 장성하면 자신의 처우도 달라질 것이라는 욕망또한 품게 했다. 쑤퉁은 그렇게 지나치리만큼 당당했던 그녀를 오매불망 남자만 바라보며 그가 자신의 위치를 끌어올려주기만을 바라는 그런 여자로 전락시켰다.

이 작품에 나오는 거의 모든 여자는 화냥년으로 그려진다. 다시 한번 쑤퉁의 여성관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무작정 선악설적인 시각은 어찌할꼬. 이 작품은 정말이지 선악설이다. 악에 대한 동정도 없다. 원래는 선한 인간이었지만 환경이 악하게 만들었다,는 설정이 아니라 원래 악했지만 딱히 그 악을 드러낼 상황이 없었는데 그 상황을 맞게 되자 그의 악이 발현됐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선악설이다. 우룽의 아들 둘에게 시집 온 여자들도 애초부터 악이었다. 그 집안에 그냥 무작정 덮어두고 악한 여자들이 들어온 것이다. 지나친 시집살이에 지쳐 서서히 악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애초부터 그런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악에 대한 개연성이 떨어지는 만큼 확실하게 인간은 애초부터 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래서..이 소설을 읽으면 읽을 수록 거북했다. 쑤퉁 소설의 특징은 평범한 이야기인것 같은데 딱히 기교를 부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글이 정말 잘 읽힌다는 것이다. 이야기도 재미있고. 그래서 한창 재밌게 읽다가 점점 그 흥이 깨어져 버렸다고나 할까.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이 인간들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궁금한 사람들은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겠지만 읽는 도중 이내 역겨움을 느껴버린 나로서는 마지막까지 읽어 나가는 게 거북스러웠다. 재밌지만, 한편으론 거북해서, 바로 그 거북함이 안타까운 그런 소설이었다.
그리고 작가의 치기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언젠가는 끝이 난다. 이런 사회 고발적인, 이런 자학적인, 이런 치열한 글 말이다. 물론, 이런 글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글을 쓰던 사람이 좀 순한 글을 쓰면 변절했다느니, 스타일이 변해서 싫다느니,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작가의 후작을 더 기다린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을 때 나오게 될 그의 글들을 기다린다. 어찌 됐건 그는 재밌는 이야기를 쓰는 이야기꾼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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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이야기
이종선 지음 / 토네이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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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덮으며...두가지 상반된 생각을 했다.

이 책이 과연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책인가 하는 것과 진정으로 감동스럽고 해 볼만한 일이다 하는 생각.

과연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은 주인공의 설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이미 이 책 속의 주인공은 너무 잘났다. 이미 많은 걸 가지고 있었고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앞만 보고 달리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이 과연 열패감만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등불이 되어 줄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그런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그래, 이런 주인공이니 가능한 이야기이겠지, 하고서 자신의 자괴감만을 더 키워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감동적이라 함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저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삶에 있어 가치가 있는 진리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 생활에 적용시킬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한 발작 물러서서 생각하면 그래, 그래야지, 하고 수긍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들인 것이다. 열가지 달란트를 종이에 적어다가 책상 앞에 붙여두고 그 열가지 달란트를 가슴에 새기어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우리는 좀 더 우리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책은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와도 비교가 되는데, 폰더씨는 시간여행을 통해 위인이라 불리는 이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주인공의 가까운 인물, 즉, 곁에서 지켜 보았던 이들, 그리하여 이 주인공에게 내가 본 너의 달란트는 이것이다, 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이들과의 여행을 그리고 있다. 어머니, 연인, 은사, 직장 동료, 그리고 바로 자기 자신. 이들과의 여행을 통해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달란트를 하나씩 깨달아 간다. 그렇게 볼 때, 이 책은 각 개인에 비춰 갖가지 스펙트럼을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정형화 된, 용서, 믿음, 책임, 등등..이런 것들을 운운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지니고 있는 나만의 달란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한 충고이기에 각 개인에 비춰서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주인공에게 내려진 열가지 달란트보다 주인공이 자신의 달란트를 깨달아가는 그 여정이 더 뜻깊은 것이라 할 수 있겠고, 그 과정이 독자들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이런 것들이 먹혀 드는 사회였으면 한다. 어찌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나는 점점 그러한 희망들을 잃어가고 있다. 예전엔 나만 열심히 하면, 아무리 나 가진 것 없어도 진지한 열정으로 무엇이든 해 나간다면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중,고생들이 꿈을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괜히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온다. 아, 젠장, 나도 이제 끝난거야?? 젠장, 젠장, 이전엔 내가 가진 것 없음을 정당화 했었다. 내가 가진 게 없어 내 힘이 부족하여 이루어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내 부족함을 채워가고 있는 지금, 나는 그 후에도 과연 나의 설 자리가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아직은 두가지 마음이다. 이런 의구심에 시달리면서도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심산. 모르겠다. 어쩌면 안될거라는 걸 이미 알면서도 해 보았다는 과정 없이는 내가 그 어떤 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런 삽질을 하고 있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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