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그는 쥐고 있던 쌀을 무의식적으로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쌀을 씹는 것이나 죽을 먹는 것, 밥을 먹는 것이 모두 매한가지였다. 어쨌든 허기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p16
이 구절을 보면서, 내가 이미 생쌀과 죽, 밥이 매한가지가 아닌, 그 속에 드러나는 생황방식의 차이를 당연한 듯 느끼는 시대와 계층 속에 살고 있음을 느꼈다. 이에 비춰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은 나와는 다른 세대, 다른 생활 방식 속에 살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도입부의 이 한 구절이 앞으로 이 소설이 어떻게 펼쳐져 나갈 것인지 암시하는 것임을 느꼈다.
와장가에 막 도착했을 무렵의 우룽은 가로등 아래 누워 있는 사람을 보고 감기 걸린다며 일어나라고 한다. 그러다 그 남자가 이미 죽은 남자임을 눈치 챈 우룽은 죽은 사람이 쫓아 오는 것도 아닌데 놀라 도망을 간다. 하지만, 쌀집에서 일을 하는 동안 우룽은 남의 일에는 무관심한, 자기 일만 아니면 사람이 죽어도 상관없다 생각하는 와장가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바오의 눈을 보며 움찔했던 우룽이었지만 이젠 다른 이들이 우룽의 눈을 보고 움찔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며 두려워했던 우룽은 자신을 두렵게 했던 이들에게 모두 복수하고, 자신이 바로 그 두려운 존재로 등극했다. 애초에 너무 배가 고파 악해졌다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악을 유지했다. 무엇을..위해서?
쯔윈.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고 그녀의 몰락에 가장 마음이 아팠다. 쯔윈은 어린 나이에 와장가의 부호인 뤼 대감의 수양딸이 된다. 하지만 말이 수양딸이지 이내 정부 노릇을 하게 되고 이는 허영심에 가득 찬 쯔윈이 원한 일이었다. 뤼 대감이 그녀에게 시들해지자, 그녀는 오매불망 뤼 대감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내들과 어울리며 뤼 대감에게 앙큼한 반항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누구의 씨인지로 모를 아이를 임신한 그녀, 뤼 대감에게 버림 받고, 비참한 몰골이 되어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쯔윈은 이내 다른 사내를 유혹해 함께 영화를 봤던 것이다. 나쁜여자이다. 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남자에게 버림 받았다고 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악녀가 되어 그 상처를 훌훌 털어버리고선 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그녀가 좋았다.
하지만 역시 쑤퉁이다. 이런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신에게 시들해진 뤼대감에게 앙큼한 반항을 할 수 있었던 그녀에게 결국엔 뤼대감의 첩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고, 실상 그 속에서 하녀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이 장성하면 자신의 처우도 달라질 것이라는 욕망또한 품게 했다. 쑤퉁은 그렇게 지나치리만큼 당당했던 그녀를 오매불망 남자만 바라보며 그가 자신의 위치를 끌어올려주기만을 바라는 그런 여자로 전락시켰다.
이 작품에 나오는 거의 모든 여자는 화냥년으로 그려진다. 다시 한번 쑤퉁의 여성관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의 무작정 선악설적인 시각은 어찌할꼬. 이 작품은 정말이지 선악설이다. 악에 대한 동정도 없다. 원래는 선한 인간이었지만 환경이 악하게 만들었다,는 설정이 아니라 원래 악했지만 딱히 그 악을 드러낼 상황이 없었는데 그 상황을 맞게 되자 그의 악이 발현됐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선악설이다. 우룽의 아들 둘에게 시집 온 여자들도 애초부터 악이었다. 그 집안에 그냥 무작정 덮어두고 악한 여자들이 들어온 것이다. 지나친 시집살이에 지쳐 서서히 악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애초부터 그런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악에 대한 개연성이 떨어지는 만큼 확실하게 인간은 애초부터 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래서..이 소설을 읽으면 읽을 수록 거북했다. 쑤퉁 소설의 특징은 평범한 이야기인것 같은데 딱히 기교를 부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글이 정말 잘 읽힌다는 것이다. 이야기도 재미있고. 그래서 한창 재밌게 읽다가 점점 그 흥이 깨어져 버렸다고나 할까.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이 인간들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궁금한 사람들은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겠지만 읽는 도중 이내 역겨움을 느껴버린 나로서는 마지막까지 읽어 나가는 게 거북스러웠다. 재밌지만, 한편으론 거북해서, 바로 그 거북함이 안타까운 그런 소설이었다.
그리고 작가의 치기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언젠가는 끝이 난다. 이런 사회 고발적인, 이런 자학적인, 이런 치열한 글 말이다. 물론, 이런 글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글을 쓰던 사람이 좀 순한 글을 쓰면 변절했다느니, 스타일이 변해서 싫다느니,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작가의 후작을 더 기다린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을 때 나오게 될 그의 글들을 기다린다. 어찌 됐건 그는 재밌는 이야기를 쓰는 이야기꾼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