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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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장미의 이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고 싶다고도 생각했던 책이기에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덜컥 책을 주문했다. 며칠 후 이 책을 받아들고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실수했구나. 그냥 중세 수도원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에 관한 이야기겠지,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에 비추어 봤을 때, 분명 그 시대를 풍미하던 두 진영의 대립 내지는 그 시대 배경이 어떠한 과도기적인 성격이 있어서 지금의 것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과 새로운 사상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오겠지 하는 정도는 짐작했지만 너무 많은 사상사, 성인들의 이름 속에서 다시 한 번 내가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단순히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추리소설이 아니었다.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작가는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어떤 것이 분명하게 작가의 입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예전에 박경리의 토지를 읽었을 때, 나는 박경리 작가의 여러 사상에 대한 박식함에도 놀랐지만 무엇보다도 더 놀라웠던 것은 상반되는 사상들을 각각의 인물의 입장에서 적절하고도 설득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자기가 만들어낸 인물들을 통해 그 인물들의 입장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 그 자체가 경이로웠고, 때문에 나는 토지라는 책이 상당히 어렵고 긴 책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어 내었던 기억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 장미의 이름 또한 그러하다.

교황 측으로 대표되는 진영이 있고 황제 측으로 대표되는 진영이 있다. 그리고 이 둘 진영은 그리스도의 청빈이라는 주제를 앞에 두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리고 나는 이 책 속에서 또 하나의 대립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호르헤와 윌리엄으로 이야기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윌리엄 그 자체로도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이 책의 대략적인 줄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다.

때는 1327년,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은 모종의 임무를 띠고 이탈리아의 어느 수도원에 잠입힌다. 윌리엄과 그의 조수 아드소는 수도원장의 부탁에 따라 아델로라는 수도사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고 그들은 곧 이 수도원의 장서관에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뚜렷한 실체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제 2의, 제 3의 죽음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죽음들은 기가 막히게도 묵시록의 예언과 맞아 떨어졌다.

첫 번째 희생자인 아델모 수도사의 시체는 첫째 날 나팔소리에 우박이 내린다는 예언과 같이 우박 속에서 발견되고, 두 번째 희생자인 베난티오는 둘째 날 나팔소리에 바다가 피로 변한다는 예언과 같이 돼지 피를 담은 통 속에 거꾸로 박힌 채 발견되고, 세 번째 희생자인 베렝게리오는 셋째 날 나팔소리에 빛나는 별이 강에 떨어진다는 예언과 같이 욕조 속에서 몸이 퉁퉁 부은 형태로 발견되고, 네 번째 희생자인 세베리노는 넷째 날 나팔소리에 해와 달과 별이 없어진다는 예언과 같이 천구의에 머리를 맞아 죽게 된다. 범인으로 추정되던 마지막 희생자인 말라키오 마저도 다섯 째날 나팔소리에 메뚜기가 전갈의 독침으로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예언과 같이 뜻 모를 전갈의 독이라는 말을 남긴 채 죽게 된다. 
이렇듯 모든 죽음의 징표들이 묵시록을 향하는 바, 뛰어난 수사관이던 윌리엄 수도사도 묵시록을 염두에 두며 수사를 진행하지만 결국에 묵시록은 이용당한 것일 뿐, 그들의 죽음이 묵시록의 필연과 맞물려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을 어떻게 해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것인가.

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수미쌍관법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윌리엄 수도사가 처음 이 수도원에 와서 들었던 웃음에 대한 논쟁은 이 모든 수수께끼를 풀게 되는 마지막에 다시 나오게 된다. 결국 그 웃음에 대한 논쟁이 답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웃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호르헤 수도사와 웃음에는 좋은 기능도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믿던 몇몇의 수도사의 언쟁을 흘려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뒤돌아보면 그날 호르헤 수도사와 언쟁을 했던 수도사들이 결국에는 진리를 갈구하다 죽었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을 죽게 만든 장서관의 비밀은 바로 이 웃음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호르헤 수도사는 자신의 진리를 깨뜨릴지도 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장서관에 숨겼고, 또 다른 진리를 찾아 헤매던 자들은 바로 이 서책을 보며 죽어갔던 것이다. 그렇다. 모두가 진리를 찾고자 하다가 죽었거나 자신이 진리라 믿고 있는 그 진리를 지키려 하다가 죽어갔다.
이는 그리스도의 청빈 논쟁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청빈을 주장하던 프란체스코회는 그들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이단으로 몰려 죽어갔고 교황 측은 자신들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였다. 호르헤 수도사가 자신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 조차 그 진리를 지키기 위해 바쳤듯이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윌리엄 수도사라는 인물이었다. 윌리엄은 신학자라기보다는 과학자였다. 과학자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과학자의 이성으로 사고했다. 베이컨의 제자였으며 그 자신 역시 삼단논법을 즐겨 사용하고 유리를 깎아 만든 안경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윌리엄이었기에 수도원 안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사고에 기초하여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였지만 결국 윌리엄에게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되어 주었던 것은 과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적인, 초현실적인 것이었다. 호르헤에게까지 도달했던 것은 애초에 그가 세운 가설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몇 번의 우연에 기인하였고, 결정적으로 그에게 답을 주었던 것은 그의 조수인 아드소가 꾸었던 꿈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과학이 한창 성장하던 시기, 신학으로 그 과학을 눌러야만 했던 시기에 신학자로서 오히려 과학자의 자세를 가진 한 수도사가 있었고 그 수도사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지만 결국에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비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문제의 답을 얻게 된다니 이 얼마나 짓궂은 일이란 말인가. 이러한 윌리엄 수도사의 자기배반이, 이야기를 과학적인 시점에서가 아닌 신학적인 시점에서 끝내버린 작가의 시선이, 어쩌면 과학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어야만 했던 신학에 대한 연민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물론, 현재의 내가 신학보다는 과학을 더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신학을 더 믿었더라면 이러한 결론이 역시 옳은 것이야 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신학보다는 과학을 더 믿고 있기에 이 마지막 부분을 신학에 대한 연민 내지는 신학에 대한 배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 느낌들을 이야기 해 보고 싶다. 배경이 수도원의 장서관이라 그런지 서책, 즉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 종종 나오곤 했는데 일단 시작하면서부터 나오는 구절인, "내 이 세상 도처에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p23)라는 구절은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책끼리의 대화라는 것도 흥미로웠다. 아직 나의 독서 경험이 그렇게까지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기에 이 책을 읽으면 바로 저 책이 떠로으고 이 책에서 이러한 사상을 말하면 저 책의 저러한 사상을 떠올릴 정도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어떤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을 떠올려 본 일이 있는 나로서는 이 서책끼리의 대화라는 것 또한 동의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서책을 보려거든 그 서책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의미 있는 말이었다. 우리가 고전을 즐겨 읽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가 또한 이 서책의 뜻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영락없이 이단이 되었겠구나 싶은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드소의 꿈 이야기를 읽으면서였다. 아드소는 '키프리아누스의 만찬'의 내용을 꿈으로 꾸었고 그 꿈을 묘사한 글이 이어지는데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그 글에 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각각의 인물들의 특징에 따라 끝말잇기를 하듯이 재미나게 말장난을 하고 있는지, 그러면서도 어찌나 글이 아름답게도 술술 넘어가던지, 그런 것에 홀딱 정신이 팔려 그 부분을 단숨에 읽어 내린 나는 아,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이단으로 지목 당했겠구나 싶었다. 뭐 결국에는 나의 이러한 말들이 이단의 사상에 대한 칭송보다는 작가에 대한 칭송에 더 가깝겠지만, 이 책의 내용을 다 잊어버릴 만큼의 시일이 지나도 아드소의 꿈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느낌만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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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phile 2013-09-0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미의 이름>에 관해 수없이 많은 서평이 있겠지만, 제가 본 서평 중에 제일 좋습니다.
제 노트에 스크랩하여 두고두고 읽겠습니다.

skyceti 2013-09-09 16:15   좋아요 0 | URL
어머, 고마워요^^
이 참에 저도 다시 한번 읽어 봤는데... 오타 작렬인데요?? ㅎㅎ
왜 진즉에 몰랐을까...오타는 감안해서 봐주세요^^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우리 역사 바로잡기 2
이덕일.김병기.박찬규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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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고 당당히 선언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표지에는 이를 나타내는 구절이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이 박혀 있다. 그리고 역사학자의 책답게 풍부한 자료들이 실려 있다.
그것도 칼라판으로. 여기서, 책이 상당히 무겁다는 것은 이 책의 단점이긴 하지만 질감이나 자료의 선명함에 있어선 더 나은 선택이었을 것 같아 내 팔에 배긴 알통은 넘어가 주겠다.

 

 이번 책은사도세자의 고백과 조선왕 독살사건과 같이 특정 테마를 정해 역사적 사료와 저자의 상상력을 통해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책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특정 사건이 아닌, 고구려라는 한 나라의 기원부터 멸망까지 이야기하고자 했으니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사료가 부족한 탓에 객관적 자료에 의한 결과라기 보다는 저자의 견해가 더 어필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부족한 증거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견해를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자료가 저자의 견해가 옳다고 확실하게 말해줬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들이 수집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에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마시키기 어려울 것 같다. 대부분의 고구려에 대한 유적이 북한과 중국에 걸쳐 있기 때문에 한국 역사학자로서는 조사, 연구 하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아쉬움을 접어두고 이 책에 대해서 살펴보자.

 

 고구려 역사에 있어서 부여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이는 부여의 시조 동명왕의 탄생설화와 고구려의 동명성왕의 탄생설화가 유사한 점을 보아 알 수 있다. 즉, 부여의 한 갈래인 북부여로부터 갈라져 나온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부여의 시조사화가 고구려의 시조사화로 차용된 것이다. 이런식으로 시조사화를 비교해 가며 설명해 준 덕에 교과서보다 학습효과가 더 높았다고 하겠다. 이는 이 책의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평양천도에 대한 다른 해석은 흥미로웠다. 교과서에서 배우기로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고구려가 남하정챙을 펴기 위해서였다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고구려가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평양천도를 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곧바로 백제를 공격하지 않고 48년이 지나서야 백제를 공격했다. 이는 고구려가 의도적으로 남하정책을 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구려 내부 사정으로 인해 평양으로 천도할 수 밖에 없었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역사상 1천 년래 제일대사건'을 빗대어 '조선 역사상 2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라 칭했는데 이는 광개토대왕이 한 것처럼 북방확장정책을 통해 고구려의 천하체제를 확대했어야 했지만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백제,신라와의 긴장관계를 형성, 고구려 역사의 주 무대를 만주 대륙에서 한반도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게 되었으니, 이를 조선 역사상 2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라 부를 만 하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라 하겠다.

 

 여하튼 이 책을 통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하고 기존에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사실에 대해 다른 견해를 접하기도 했다. 고구려 전체 역사를 다룬 탓에 그 방대함에 전체적으로 고구려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기에는 좋았지만 그만큼 자세하고 세밀한 맛은 없어서 아쉬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단편을 자주 쓰는 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장편들은 그가 일전에 썼던 단편들 중의 한 편을 확장시켜 장편으로 쓴 것이 많다. 저자 또한 이 책을 쓰면서 했던 고구려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세도세자의 고백, 조선왕 독살사건 같이 좀 더 재미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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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박현찬, 설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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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꽤나 흥미로웠다. 처음엔 좀 고리타분한 책이지 않을까 해서 읽기도 전에 머리가 아파왔는데 책장을 열자마자 그건 기우였다는 것을 알았다. 뒷내용이 어찌나 궁금하던지, 자꾸만 자꾸만 읽게 되는 것이었다. 이야기도 재밌게 엮어가고 있지만 글 속에서 연암이 쓴 글이 정녕 연암이 쓴 것이가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들어 그에 대한 답이 궁금해지면서 계속해서 읽게 된 면도 없잖아 있다.

이렇듯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적절한 긴장감과 흥미를 갖게 하면서 이야기를 끌어 가고 있다.

 

 이 책이 완벽한 소설이었다면 흠 잡을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팩션이고, 게다가 글쓰기에 대한 인문교양의 내용까지 담아야했기에 이 책의 소설적인 면은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야, 책은 무엇보다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장점으로 받아들였지만.

팔리기 나온 책일 것이고, 글쓰기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글쓰기 포인트를 잘 전달하기 위하여 소설 형식을 빌어 재밌게 쓴 점에 대해서 불평할 생각은 없다.

그저 글쓰기 포인트를 줄줄 나열한 후 각각 풀어서 쓴 설명 정도 있는 책은 재미도 없을 뿐더러 작정하고 보지 않는 한 머릿속에 잘 남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 형식인 까닭에, 또 그 소설 속의 인물에게 주어진 미션에 따라 하나씩 깨달음을 더해가고 있기에 그 인물에게 주어진 미션과 에피소드 등이 글쓰기 포인트를 설명함에 있어 재미있는 예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왜 연암인가!

이 책에 의하면 연암의 글은 정조가 금서로 만들만큼 그 시대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글이었다. 박제가의 글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지원, 박제가 등을 북학파라고 배웠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이러한 북학파들이 크게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의 저서도 후세에 와서야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았던 것 같다. 물론, 그 시대에도 눈 밝은 사람들은 이들의 글을 알아보고 이들을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치켜세우기도 했을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연암은 자신의 글쓰기 이론을 직접 글쓰기에 실천한 최고의 문장가라고 평하고 있다. 그가 말한 글쓰기 이론이란, 정밀하게 독서하라, 관찰하고 통찰하라, 원칙을 따르되 적절하게 변통하여 뜻을 전달하라, '사이'의 통합적 관점을 만들라, 11가지 실전수칙을 실천하라, 분발심을 잊지 말라이다. 정밀하게 독서하기 위하여 논어를 한달에서 4개월 정도 잡고 읽었다는 이야기, 관찰하고 통찰하기 위하여 붉은 까마귀라는 미션을 내 주기도 하고, 원칙을 따르되 적절히 변통하는 법과 사이의 묘를 깨닫기 위해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청하기도 한다. 11가지 실전수칙은 병법에 비유해 설명해 놓았고 분발심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마천이 사기를 쓴 마음을 생각해 보라는 미션을 내 주었다. 큰 틀로서 연암과 연암의 제자 지문의 이야기가 있고, 연암이 지문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내린 미션들이 액자형식으로 작은 이야기를 만들면서 각각의 글쓰기 포인트를 집어 주고 있는 것이다.

 

 다 읽고 난 느낌은, 잘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과 동시에, 소설은 남고 글쓰기 포인트는 남지 않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는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그만큼 연암과 제자의 이야기라는 소설 속에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 잘 녹아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외운 내용 보다는 예를 들거나 연상해서 외운 내용이 더 잘 기억에 남듯이, 지금 당장은 소설만 남은 게 아닌하 하는 생각을 해 보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소설의 내용과 맞물려서 적절한 예로써 이 책의 내용들이 생각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참, 마지막으로 연암의 글들이 모두 연암이 쓴 것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글쓰기의 포인트에 부합하듯이 여운으로 남겨 두었다. 참..그 시대를 살지 않은 나에게 이런 궁금증을 갖게 하더니 이마저도 속시원히 밝혀주지 않은 채 끝내 버리다니. 글쓴이는 여운을 남겨 좋을 지 모르겠으나 나는 적잖히 답답하단 말이오..이렇게 여운처리를 한 것을 보면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내용일 터, 즉, 다 연암이 쓴 글이 맞다는 말일테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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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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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단 한줄 평.

역시, 이 남자와는 절대 연애하지 않을테야-

알랭 드 보통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난 이 남자와 연애하지는 말아야지.

이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꼼짝달싹 못하고 내가 내가 아닌 게 되어 철저히 분해당해

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의 시각에 의해서. 거기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인지

알랭 드 보통이 신간이 나왔다고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인연은 인연인지 이렇게 읽게 되었고, 그렇다면 이번에 나온 행복의 건축은

대체 어떤 책이란 말인가.

 

일단 정체성 불명. 이 책이 어찌하여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의 책으로 선정되었을까.

건축 에세이라는데 그러면 문학일텐데, 아니면 차라리 실용취미가 더 적절할 것 같은데

이 책은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의 책으로 주어졌고 그러다 보니 나는 참 난감했다.

 

너 이녀석, 네 정체가 무엇이냐! 이렇게 잔뜩 의심을 하고 봐서 그런지 나는 의미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활자를 읽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이해하고자

미간에 힘을 주어가며 읽었지만 역시나 무슨 말인지. 그렇게 자꾸 읽다보니 일단 조화라는

키워드가 떠오른다. 이 조화란 건물 전체적인 조화일 수도 있고, 시대와 공간에 대한 조화일

수도 있고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은 조화일 수도 있고 사람의 기질과 취향과의 조화일 수도 있다.

여하튼 중요한 건 조화로와야 한다는 것. 그리고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있는데 글쎄, 행복이라는

관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자신의 기질과 취향에 맞는, 자신의

행복을 완성시켜 줄 만한 집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3% 정도?

좀 더 많으려나? 여하튼 보편화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 그래서인지 이 책은 약간은 씁쓸하기도

했다. 

 

이 책 읽으면서 건축학도들이 읽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물론 일반인들도 읽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직접 건축물을 설계하고 디자인하고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들이 건축물을 대할 때,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 때

그 건축물과 사람과의 관계, 그 건축물이 주는 의미 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건축물을 만든다면 아름답고도 행복한 건축물이 탄생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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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외수 오감소설 '광기'편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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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이제 시작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다 읽었다-라기 보단 이제 시작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

마지막 장면에서 박정달의 피를 묻혀야만 완성되는 칼, 부분에서

처음엔 박정달이 누군가의 피를 묻혀야만 한다면 다른 누군가를 지목해 죽일 수 없다는

양심의 발로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기로 하지만 예정된 날 하루 전에 왜 저 노인의

피이면 안되는가, 라는 생각에서 한밤 중, 몰래 노인을 죽이려 한다. 하지만 결국엔 그 노인에게

당해 예정대로 자신의 피를 묻히게 되는데...이를 두고 칼의 완성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둥,

결국엔 박정달의 그 칼의 완성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려야 했다는 둥, 하는 해석들이 있지만

난 이게 너무나 인간적이고 정상적인 결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연한 것 아닌가.

오히려 거창하게 칼의 완성을 위해 초연하게 목숨을 내어 놓는 설정이었다면 오히려 이 소설의

설득력이 떨어졌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굳이 칼의 완성에의 희생이니 집착이니 하는 것들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나를 설득할 순 있었다. 박정달의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사명이란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결국 박정달은 도구일 뿐이었다.

그 신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선택당한 도구. 그 완성과 함께 사라져버린 도구.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낸 그 신검은 결국엔 혼자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그 마음대로 처분조차 할 수 없으며 결국엔 그 칼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고 그리고 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은 한 노인에 의해 그저, 선한 의지로 이 칼이 씌여질 것이라는 것 밖에 알지

못한다. 그렇다. 이미 신검을 만들기로 한 뜻이 있었고 그에 선택당한 한 사람이 있었고

그리고 그 결과물은 이미 그 뜻을 세웠던 존재들이 가져가 선한 뜻대로 사용되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달이라는 사람은 그 칼을 만들어야만 하는 사명을 지닌 것이겠지.

과연, 누구에게나 어떠한 뜻에 따라 부과되는 사명이 있는 것일까?

내가 얻은 결론은, 원하는 자에겐 부과 된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던 박정달은

굴욕스러운 순간에도 오로지 복수라던가, 증오라던가의 감정 이외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그들이 자기와 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를, 그들이 사회 속에서

정정당당하게 인정 받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었고, 그 소망의 발로로 신검에 대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런 것이지 않을까. 바라는 자에게 사명이 주어지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차원을 넘어선 힘들은 그런 사명을 지닌 자들의 행보를

돌보아 주고 격려해 주고 이끌어 주어 그들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끔 해 주는 것은 아닐까.

결국엔 하나이다. 결국엔 나는 가만히 있는데 누군가가 덜컥, 하고서 나에게 사명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그러한 사명을 이끌어 당긴다는 것.

언뜻 보기엔 하늘에서 먼저 뜻을 세우고 그에 맞는 적임자를 골라 내어 사명을 지운 듯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 뜻이라는 건 한 사람의 가슴에서부터 하늘에까지 가 닿게 되고, 그 하늘로 가

닿은 뜻은 다시 사람에게로 가 닿게 되는 건 아닐까.

음,,처음부터 말했지만 이제 시작인 거라구. 나는 아마도 이 책을 좀 더 연구해 봐야 겠으며

맨 마지막의 도표는 내가 죽기 전까지 해독할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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