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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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인「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도서관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린 책. 아. 재미있다. 공교롭게도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편지'에 대한 책을 읽게 되었다. 두 권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번역서는 뿌연 렌즈를 낀 것 같은 탁한 느낌이 들어서 원작의 느낌이 그대로 들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가능하면 다 원서로 읽고 싶으나.~ 일어를 배울 수도 없고.  

여튼 이 책은 매우 매력적인 소설이다. 뭔가 살짝 우울을 깔고 있는 1인칭 시점의 자기 성찰적, 자기 반성적 사고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그런 소설인데 최근에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들이 대부분 그런 톤을 가진 것 같다. 우울을 깔고 있으면서 고독한 희망을 추구하며 동화스런 면을 가지고 있는 그런 소설. 

책은 한 삼십대 남성이 하던 일을 관두고 집을 나와 삼년째 강아지 와조랑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얘기이다. 그는 길가에서 만나 관계를 맺은 사람들에게 주소를 얻어서 그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가 집을 떠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집에만 가면 느껴지는 특정 공간에 대한 공포증, 발작이 다른 곳에 가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집이 그를 밀어낸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교사인 부모, 전국 1등이었던 형, 똑똑한 여동생에 늘 치이는 말더듬이 밉쌀맞은 둘째라는 이유. 뭔가 언어로 표현을 하고 싶어도 말을 더듬기에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많이 불편했을 터. 낯선 여행지의 낯선 이들과의 만남들을 통해 이 더듬거리는 말을 치유하고자 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살짝 눈치를 챘을까. 편지라는 매체 자체가 가진 속성. 공유. 독점된 기록인 일기와 다르게 공유된 기록 매체인 편지를 통해서 주인공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과 타인과 세상과 타협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 갈망. 불안과 고독을 안고 있는 주인공의 얘기와 후반부의 사실들을 통해 보면 이 책도 하나의 성장 소설, 자기 치유의 과정을 그린 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는 답장이 올 때 그때 여행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이웃에 사는 친구에게 편지가 왔는지 확인을 한다. 그러나 매번 매번 매번. 편지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시 끝없는 여행을 계속한다. 그러는 중에 얼떨결에 소설작가 751(주인공은 만나는 사람들을 이름이 아닌 번호를 붙여 기억한다)을 만나서 여행을 함께 해나간다. 함께 배고픔과 더위를 겪고 고시원 방화 사건으로 죽음의 고비도 함께 넘는다. 이 방화 사건을 통해서 과거와의 끈인 조부께서 기르시던 여행 메이트 개 와조가 급격히 체력을 잃고, 와조에게 더 이상 여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주인공은 '답장이 오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애초에 세운 계획을 뒤로하고 751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다.  

과거로부터, 가족으로부터 탈출을 염원하면서도, 그것들로부터 결코 끊어질 수 없었던 주인공. 길거리에서 만난 750명의 사람들에게 쓴 편지는 가려진 체, 유독 가족 엄마, 아빠, 형, 동생에게 보낸 편지만이 소개되는 것이 의문스러웠는데. 모든 것은 마지막에 가서야 반전에 의해서 밝혀진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그랬구나. 마지막 페이지를 덥고 나서 나도 모르게 전율이 느껴졌다. 작가는 그럼에도 세상에는 희망이 있다고,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알게 모르게 세상은 따뜻한 곳이라는 메세지를 남긴다.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단 한사람뿐이라 하더라도(277)' 셋도 넷도 아닌 딱 한사람.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를 돌아봐주는 딱 한 사람. 편지 한통. 그거면 족하다. 어쩌면 내가 무심결에 지나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인공과, 또 주인공이 거리에서 만난 이들과 같이 외로움과 상처를 안고 말을 걸어주기를, 내 마음에 들어와 주기를 바라는 그런 외로운 이들일지도 모르겠다. 

잊혀진 매체 편지. 그 매체가 가진 속성과 수반되는 행위에 대한 통찰. 매체가 가진 파급력.에 관한 감수성 넘치는 표현들이 참 좋았다. 괜시리 연필을 쥐고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글씨를 쓰고, 꽁지에 달린 지우개로 문장을 매만져 보고 싶은, 봉투에 심장인 우표를 부쳐 어딘가로 날아가게 해보고 싶은. 편지지를 꺼내들고 누구에게라도 편지를 한 통 써보고 싶게끔 만드는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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