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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2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 옮김 / 민음사 / 2006년 3월
평점 :
'제인 오스틴'하면 도무지 마음에 와닿지 않는 작품을 쓴 작가로만 인식 되어 있었다. 첫 인연은 중학생 때 롱맨에서 나온 축약본 「Pride and Prejudice」를 과외 숙제로 번역하면서 맺었다. 그때 당시의 느낌은 '머리에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할 생각 외에는 없는 머리가 빈 여자들의 얘기'로만 여겨졌었다. 대체 책에 나오는 남자며, 여자며, 젊은이며, 나이든 이며 할 것 없이 모조리. 모조리.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차 마시고, 식사하고, 수다떨고, 산책 밖에 없어 보였다. 그래서 '제인 오스틴'하면 일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 것이다. 그 후로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제인 오스틴의 영화들을 여러번 보게 되었지만 그 때마다 '냉담'하게 반응하는 마음은 일종의 '로맨스 컴플렉스'까지 안겨줄 정도였다. 그녀가 로맨스 작가로서는 최고라는데. 어쩜 이리도 마음에 아무런 울림을 줄 수 없는 것이지. 하는 낙담.
어릴 때 못읽었던 고전을 지금이라도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서관에서 민음사 전집을 스캐닝하던 중 못보던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이성과 감성」. '그래, 편견 없이 한번 읽어보자' 그리고 몇 십 페이지를 읽는 데. 이건 왠걸. 십수년간 가지고 있었던 '제인 오스틴은 재미없다'는 그 생각이 사르륵 녹아 버리고 단숨에 엘리너와 메리엔에게 매료되었다. 몇 백 페이지를 더 읽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성과 감성」은 내가 그리도 재미 없어 하던 「Sense and Sensibility」라는 원작의 번역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이미 몰입 고도에 올라타 있던 차라서. '재미없다'는 편견 없이 백지 상태에서 책의 궤도에 올라 탈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중학생 소녀였을 때와, 삼십대가 된 지금. 작품이 포함하고 있다고 느끼는 재료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여전히 스놉(속물)이 아닌 이가 없고, 가십만이 그들의 대화 주제이며, 돈만은 이와의 결합만이 진리이며, 체면과 매너가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토록 이 작품에 빨려 들어간 것은 물론 이제는 이 사실이 과거에나 지금에나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임을 알게된 연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끈질긴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의 고민과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에는 대립되는 품성을 지닌 장녀 엘리너와 차녀 메리엔이 나온다. 둘은 모두 사랑했던 이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실연을 아픔을 겪고, 그 아픔이 회복되고, 이전의 혹은 새로운 이와의 행복한 결합을 이뤄낸다. 유사한 경험라인. 그 라인에서 이성적인 엘리너와 감성적인 메리엔이 취하고 있는 행동과 사고의 흐름은 너무나도 상이하다. 감성적인 나는 이성적인 엘리너의 메리엔을 향한 충고와 배려, 그리고 요리조리 상황을 따져서 본인 스스로의 감정을 놀랍도록 자제하는 엘리너의 모습에 경탄을 했고, 저렇게도 반응할 수 있구나 하는 여러가지 깨달음도 얻었다. 반면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이 이 작품을 봤더라면 오히려 메리엔의 명랑하고 불타는 듯한 사랑의 모습에 저렇게 자유롭고 폭발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두 자매 외에도 흥미로운 인물들은 많이 나온다. 남편을 어떻게 뒤에서 살살 홀리는지 잘 보여주는 자기 이익 밖에 모르는 새언니 패니, 무식하지만 반반한 얼굴과 철철 넘치는 애교와 아첨으로 결국에는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을 손에 쥐는 루시, 줏대는 없고 남의 일에만 지나치게 관심 많은 사람 좋은 제닝스 부인, 특별한 매력이 없어 그 자체가 특징인 레이디 미들턴. 등.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이 두 자매. 데시우드 가의 사람들과 얽히면서 만들어 나가는 얘기들 속에서는 큰 주제와는 또다른 재미와 삶에 대한 통찰을 준다. (남자들은 큰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
연애와 결혼. 그리고 돈. 평판. 사실 이것을 노골적으로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손가락질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을 조금만 고상하게 바꾸면 이는 사랑과 안정, 그리고 평안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인 것이다. 탁 까놓고서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사건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의 행동과 말,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뜻하지 않게 혼자서는 터득하기 힘들었을 법한 지혜들이 가득 녹아져 있다. 어쩌면 목사의 딸로 두 번의 파혼 후 독신으로 살아간 제인 오스틴이 그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겪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책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
매년 제인 오스틴의 책을 읽는 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때 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었는데. 나도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 그리고 엘리너와 같이 좀 더 현명하고, 섬세한 배려심을 가진 여인이 되고 싶다. 그녀의 다른 책들도 얼른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