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ꡔ사회진보연대ꡕ 기획연재] 신자유주의 시대 중국(4)


흑묘백묘 : 외국인 직접투자와 대외개방

 


백승욱 | 한신대 교수, 편집자문위원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의 배경에는 외부의 충격을 유도해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의 속도를 가속화하겠다는 중국정부의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은 많이 지적되고 있다. 외부의 충격이란 해외 자본의 유입을 말하며, 이들 해외에서 유입되는 자본이 국내 기업과 경쟁을 촉발함으로써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을 강제하고, 선별적으로 국유기업을 인수합병할 수 있는 토대도 만들며, 또한 이를 통해 비국유기업의 외연을 확장하고, 경제성장률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는 것이 중국 정부의 예측인 듯 보인다. 물론 이는 많은 국유부문의 민영화, 외국자본에 의한 핵심산업의 장악, 특정 산업에서 실업자의 대량 배출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널리 관측되는 문제를 낳겠지만, 중국 정부가 정책적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이런 예상되는 사회문제보다는 외부의 힘에 의존한 빠른 구조조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외국인 직접투자는 중국을 빠른 속도로 세계경제로 편입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외국 자본은 중국 무역의 성장을 주도하여 무역 총액 중 외국인 투자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6년의 4.0%에서 1992년에는 26.4%로, 1999년에는 50.8%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의 무역의존도 또한 1980년의 14.4%에서 2000년에는 43.9%로 높아졌다. 외국인 투자기업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빠르게 증가하여, 1999년 전체 광공업 기업 중 외국인 투자기업이 총자산의 29%, 총매출액의 50%, 이윤총액의 76%를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특히 중국이 해외 수출에서 경쟁력을 보이는 노동집약적인 섬유․전자 산업과 새롭게 부각되는 선도산업에서 외국인 자본의 장악률은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중국에 외국인 투자가 많고, 1990년대 초까지는 중화학공업 중심의 중국 산업구조와 중복되지 않는 분야와 지역에 투자가 많았다는 사실은 그간 중국에서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개혁개방 이래 동남아시아 인근지역에서 화교자본의 투자가 많았다는 점은 중국이 걸어온 지난 20여 년의 대외개방의 과정의 특이성과 1990년대 말 동아시아 금융위기 상황에서 중국이 처해있던 예외성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조건들은 1990년대 말들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그에 따라 중국에서 외국자본의 영향력 또한 이전과 다른 형태로 커지고 있다.

 

 

외국에서 유입되는 자본은 크게 차관과 직접투자로 나눌 수 있는데, 중국의 경우 차관보다는 직접투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이런 현상은 1990년대 들어 두드러져 1992년경부터는 중국이 흡수한 전체 외국자본 유치액 중 외국인직접투자가 차관보다 많아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차관이 주로 사회기간설비에 투자되어온 반면, 외국인 직접투자는 기업의 영역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였다.

 

 

중국의 외국인직접투자 기업은 보통 ‘삼자기업’(三資企業)이라고 부르며, 여기에는 세 가지 상이한 투자형태가 포함되는데, 중국 측과 외국파트너가 함께 투자하고 공동경영하며 계약기간이 만료 된 후 설비가 중국 측에 귀속되는 합작기업(合作企業), 중국 측과 외국 측이 투자지분에 따라 이윤을 배분하는 합자기업(合資企業), 그리고 외국 측이 100% 투자하여 기업을 자체적으로 경영하는 독자기업(獨資企業)이 있다. 초기에는 합작기업이 많다가, 이후 합자기업이 다수를 이루었으며, 최근 들어 독자기업의 비중이 늘어난다는 것이 중국의 외국인투자기업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중국은 세계적으로 외국인 직접투자가 집중되는 대표적 국가여서, 1990년대에 대체로 미국에 이어 세계의 두 번째 외국인 직접투자 유입국의 지위를 차지해 왔고, 발전도상국 중에서는 선두주자의 지위를 차지해 왔다. 발전도상국 사이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국으로서의 위상은 1985년과 2000년의 발전도상국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순위를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1985년 발전도상국 중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액이 많은 국가를 살펴보면 중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멕시코, 브라질에 이어 4위로 발전도상국 외국인 직접투자액의 7.0%를 차지하였는데, 2000년에는 발전도상국 외국인 직접투자액의 19.2%를 차지하는 1위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국 뿐 아니라 중국에 대한 직접투자의 간접통로가 되는 홍콩의 지위 또한 상승하여, 같은 순위표에서 1985년의 9위에서 2000년에는 2위(16.0%)로 높아졌다. 중국에 외국인 직접투자가 집중되면서 동남아시아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중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는 광뚱성과 푸젠성 등 남쪽 지역의 성들 및 이들 성으로부터 상하이와 텐진을 거쳐 따렌까지 이어지는 동부연해 지역에 집중되어 왔다. 중국의 경제성장의 지역적 격차가 심각한 것도 외국인 직접투자의 지역적 불균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흰고양이던 검은 고양이던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떵샤오핑의 ‘黑猫白猫’론의 직접적 후원을 받으며 성장한 외국인 투자기업은 이제 중국 경제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경제를 세계경제에 연결시키는 핵심고리가 되었으며, 중국이 세계자본주의의 요구를 빠른 속도로 수용하게 되는 중요한 채널이 되고 있다.

 

 


중화경제권 -- 1980년대 화교자본의 대량 유입


중국에 유입되는 외국인 직접투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동남아시아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화교자본에 의한 투자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홍콩과 타이완을 필두로, 싱가폴 외에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화교의 투자도 계속되고 있다. 1980년대 이래 현재까지 중국의 외국인 직접투자중 이들 화교자본의 비중은 전체 투자액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비중은 1990년대 들어 다소 줄어들었지만,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에 중심부 자본유입이 줄어들면서 1999년에는 다시 82%선으로 높아졌다. 중국이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던 이유로서 중국의 자본시장이 외국자본에 개방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중국에 투자된 외국 자본의 핵심이 이런 화교자본이었고, 이들 자본이 실물투자를 중심으로 하는 중소규모의 제조업 자본이어서 경기변화에 따라 신속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이처럼 중국에 화교자본이 집중적으로 투자된 것은 처음부터 중국정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들어서 중국이 대외개방정책의 일환으로 외국인 투자 유치정책을 펴나가면서 처음 의도한 것은 중심부 국가의 기술집약적 자본을 유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투자에 대한 위험이 적지 않았고, 투자를 위한 하부구조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며, 투자를 할 마땅한 분야도 적었기 때문에 중심부 자본의 유입은 많지 않았다. 그 결과 1980년대 후반 들어 중국정부는 화교자본 유치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고, 이에 따라 화교자본 유치를 위한 적극적 정책을 전개하였는데, 외국자본 투자지역으로서 동부 연해지역을 점차적으로 전면 개방한 것이 그런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에 가장 먼저 적극적 반응을 보인 것은 홍콩이었고, 그 뒤를 이은 것이 싱가폴, 타이완과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의 화교자본이었다. 이런 변화는 동아시아 경제구조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미국 시장의 개방, 그리고 일본과 국제분업적 구조를 통해 선별적인 동아시아의 반주변 국가들이 냉전기 쇼윈도우로서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빠르게 성장하였다. 두 개의 분단국가와 두 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신흥공업국(또는 신흥공업경제)이 그것으로, 보통 ‘네 마리 작은 용’이라 부르는 한국, 타이완, 싱가폴, 홍콩이 일본을 이어서 동아시아 내에서 새로운 성장의 축으로 부각되었다. 이들 네 국가(지역)는 차관이나 외국인 직접투자에 자금을 의존하고, 일본을 정점으로 하는 동아시아 내의 ‘다층적 하청체계’에 편입되어 저임금을 기반으로 노동집약적인 제조업 제품을 생산하여 이를 미국시장에 판매하는 수출지향적 경제를 형성함으로써 빠른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이를 가능케 했던 구조에 변화가 생기면서 이들 국가의 위상이 불안정해졌다. 냉전의 틀이 깨어지기 시작하면서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미국시장의 개방이라는 조건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1985년 플라자 협약을 계기로 일본의 동남아시아 투자가 늘면서 동남아시아의 후발주자들이 경쟁을 격화시켰고, 세계경제의 전반적 침체에 따라 수출시장의 팽창이 둔화되었다는 점이 이들 국가에 불리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위기의 조짐은 1980년대 들어서도 개선되기 어려웠으며, 이에 따라 이들 ‘네 마리 용’ 사이에서는 변화된 조건에 맞추어 전체 경제의 구조를 전환하려는 대대적 구조조정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조정의 방향은 네 가지 정도였다.

 

 

첫 번째 시도는 일본을 모델 삼아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는 것이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을 중심으로 삼던 구조를 탈각해 고부가가치의 기술집약적 방향으로 산업구조를 전환한다는 계획이 세워졌고, 한국, 타이완, 싱가폴 모두 이 방향으로 전환하기 위한 정책적 시도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높은 기술종속도와 낮은 자체 연구개발 수준, 전환을 위한 금융력의 부족 등 여러 한계점들 때문에 이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고, 다만 몇몇 업종에 한정해 최첨단은 아니지만 선도산업이라 할 수 있는 분야의 수출시장을 부분적으로 장악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두 번째 시도는 내수시장의 확대였다. 수출시장 확대의 부진으로 쌓인 재고를 해결하기 위해 내수시장을 대대적으로 확대하려는 시도가 등장하였고, 국내 시장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남한의 경우 이 방향의 전환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여타 세 지역의 경우 내수시장의 규모의 한계 때문에 내수시장 확대라는 방향의 전환은 한계가 있었으며, 한국의 경우도 내수시장의 확대는 국내산업에 대한 중복과잉 투자를 낳고, 특히 금융자유화와 연결되어 이를 자유로운 해외차입이 부추키면서 1990년대 말 금융위기를 낳는 요인이 되었다.

 

 

세 번째 시도는 자국의 제조업 생산기지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면서 금융․정보중심지로 탈바꿈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세계경제 침체와 맞물린 금융화의 진전과 더불어 동아시아에서 금융시장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과 맞물리는 것이었다. 싱가폴과 홍콩은 전통적으로 지녀온 무역중개항의 이점을 이용해 이런 금융중심지로 전환을 빠르게 서둘렀다. 타이완 또한 국내의 제조업 기반이 빠르게 해외에 유출되면서 이런 변화에 동참하려 하였으나, 이미 인근지역에 경쟁상대가 많은 상황이어서 변화의 속도는 빠르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

 

 

마지막 네 번째 시도는 제조업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홍콩이었다. 홍콩은 동아시아의 다른 NIEs(신흥공업경제) 세나라와는 상황이 다소 달랐는데, 이들 세나라에서 권위주의적 정부를 중심으로 선별 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산업정책이 시행되었던 반면, 홍콩의 식민지 정부는 자유개방형 정책을 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산업구조를 정책적으로 전환하기 어려운데다가, 홍콩은 중국대륙과 동남아시아 인근 지역으로부터 계속 낮은 임금의 노동력이 계속 충원되었기 때문에 노동집약적 제조업으로부터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는 방향의 변화가 나타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홍콩을 염두에 두고 선전, 주하이, 산토우 등에 경제특구를 설치한 중국의 정책과 맞물려 홍콩의 생산거점을 대륙으로 이전하고, 홍콩은 그 생산거점에서 생산된 상품의 판매지이자 금융중심지로 전환하는 것이 상당히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홍콩의 제조업 공장들은 빠른 속도로 배후지역인 광뚱성으로 이전되었다. 1990년대 중반이 되면, 홍콩 제조업 자본이 광뚱성에서 고용한 노동자수가 300만 명인데 비해, 홍콩의 제조업 노동자수가 70만 명으로 줄어들 정도로 홍콩의 제조업 기반은 축소되어, 홍콩 제조업의 공동화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그에 따라 홍콩 노동자중 서비스업 종사자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였다. 홍콩에 이어 타이완에서도 경제의 골간을 이루는 중소자본의 중국유출이 진행되었다. 이들은 주로 타이완 토착민의 원적지인 푸젠성에 집중투자를 하였고, 중국정부 또한 이를 유치하기 위해 푸젠성의 샤먼을 경제특구로 지정하였다. 타이완의 중국투자는 정치적 요인 때문에 제한되어 있어, 상당히 많은 투자가 홍콩을 경유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타이완 정부는 1980년대 말 타이완 자본의 해외투자의 통로를 동남아로 유인하기 위한 남진정책을 펴고, 중국본토에 대한 투자에 대해서는 투자규모의 제한이나 핵심 기술분야의 투자제한 등의 조치를 시행했으나, 실효성이 적었고, 중국으로 진출하는 타이완 자본의 흐름을 막지는 못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타이완 자본이 제 3국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중국에 투자하는 액수 또한 증가하고 있다.

 

 

이들 화교자본은 주로 섬유와 전자 등의 노동집약적 산업부문에 투자되었으며, 투자 지역도 광뚱성과 푸젠성에 집중되었다. 광뚱과 푸젠은 중국의 전통적인 산업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 화교자본이 이 지역에 투자할 때 합자기업 형태를 취하더라도 중국의 현지공장과 합자하는 경우 외에 많은 사례에서는 파트너인 현지 정부나 중국기업이 토지나 공장건물 등을 제공하는 동시에 현지 농촌에서 저임금 노동력을 공급할 책임을 지는 반면, 화교파트너 측이 필요한 설비와 원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분담하는 형태의 합자가 많았다. 이들 화교자본은 원료공급과 제품판매의 통로를 모두 해외에 두고서 중국현지는 가공생산을 맡는 중간기지로 활용하였다. 이 때문에 화교자본이 투자한 중국의 남쪽 두 성은 중국전체 경제구조와는 단절된 상태로, 화교자본이 이미 편입되어 있던 동아시아 내의 분업구조에 빠르게 편입되어 갔다.

 

 


개방정책의 심화와 중심부 자본 진출의 증가


화교자본 중심의 외국인 직접투자에 변화가 생긴 계기는 1992년이었다. 이 해에 떵샤오핑의 ‘남순강화’를 통해 대외개방 정책의 심화가 천명되고, 중국의 경제구조가 더욱 자본주의적으로 전환되면서 화교자본 이외의 중심부의 초국적 자본의 진출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투자분야도 변화했다. 화교자본의 투자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와 더불어 중심부 국가중 일본과 미국의 투자가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유럽국가의 투자도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상하이와 따렌이 새로운 투자의 중심지로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한 것도 이런 변화와 맞물린다. 외국자본의 진출 분야에도 변화가 생겨 과거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여 가공공업에 초점을 맞추던 섬유와 전자분야를 벗어나 중국의 내수시장을 목표로 한 투자가 늘어나고, 선도산업 분야의 진출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90년대 말이 되면, 일례로 승용차의 68%, 엘리베이터의 70%, 컬러브라운관의 65%, 이동통신설비의 100%를 중심부 국가의 초국적기업이 지배하게 되었다.

 

 

1990년대 초반 중국에 투자를 확대한 대표적인 국가는 일본과 미국으로, 양국이 대체로 각각 중국내 외국인 직접투자의 8-1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그 이면의 다양한 측면을 함께 고려하여 1995년 정도까지의 추세를 살펴보면 일본자본의 중국진출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런 이면은 일본자본의 동남아시아 진출의 과정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일본자본의 중국진출의 전체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려면 공식적 투자 액수 이외의 여러 조건을 함께 계산해야 한다. 첫째 원조와 차관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단일국가로서 중국에 대한 최대의 차관공여국이다. 이 차관은 ODA 같은 원조와 상업차관이라는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여되고 있고, 주로 하부구조 건설에 투자되고 있는데, 동아시아 다른 자본주의국가들의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일본차관의 공여는 이후 경제구조를 일본의존적으로 만드는데 상당히 기여하게 된다. 일본이 제공한 차관을 합하게 되면 중국이 사용한 외자액중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17%로 늘어나게 된다. 둘째 홍콩을 통한 간접투자를 살펴보아야 한다. 홍콩의 제조업 공동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홍콩에 대한 제조업 직접투자의 대부분은 중국을 목표로 한 간접투자로 볼 수 있는데, 1990년대 들어 홍콩에 대한 제조업 투자에서 일본은 1위 자리를 차지하였다. 중국을 겨냥한 홍콩 지역본부 개설에서도 1990년대 들어 일본 지역본부의 성장속도는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홍콩의 무역구조에서도 이런 특징은 잘 드러난다. 셋째는 일본 종합상사와 은행의 역할을 고려할 수 있다. 중소규모의 일본자본의 해외진출에서 해외 투자선을 확보하고 현지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종합상사와 일본은행이 수행한 역할은 동남아의 경우 잘 알려져 있다. 같은 방식의 역할이 중국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종합상사와 일본은행의 중국 진출 속도는 매우 빠르게 나타난다. 네 번째는 다층적 하청체계와 무역구조의 문제이다. 일본 자본이 진출하면서 투자상대국과 일본 사이에는 수직적인 하청구조가 형성되는데, 이는 중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으로부터 정밀기계류의 수입이 크게 증가하는 반면, 중국으로부터 일반기계와 중간재 및 의류의 위탁생산에 의한 수입이 증가하는 구조가 등장하고 있고, 이에 따라 일본은 중국의 가장 비중이 큰 무역상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중심부 국가 자본의 중국투자의 특징을 살펴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중국투자의 경우 초대형 초국적 기업이 중국시장을 겨냥해 자회사를 설립하는 형태로 진출하는 것이 주요한 형태를 이루는 반면, 일본의 경우 초대형 기업부터 소형기업까지 고르게 진출하고 있고, 제조업 생산에 투자하는 형태로 투자의 방향이 집중되고 있으며, 이들 기업 대부분이 기업내 거래나 산업내 거래 형태로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국제적 분업 구조 속에서 생산의 한 고리로서 중국을 이용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세계자본의 동향의 변화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세계의 외국인직접투자의 흐름에는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외국인 직접투자의 방향이 중심부로 집중되는 반면, 발전도상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가 감소하고 있는 것이고, 둘째는 외국인직접투자의 형태가 초국경적 인수․합병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금융자본의 투자형태가 증권투자나 은행대출보다 위험성이 적고 안전한 투자로서 인수․합병의 방향으로 전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요한 투자처는 미국이며, 주요 투자자는 EU로, 미국은 세계 인수․합병 시장의 32%를 차지하였고, 이 투자의 35.3%는 EU에 의한 투자였다. 주요 투자 영역은 IT 관련 정보통신 분야와 금융분야이며, 이는 TNC 순위에도 변화를 유발하여 2000년의 상위 초국적 기업 25개중 10개가 IT 산업으로 전년보다 5개가 더 증가하였다.

 

 

1998년 세계적인 인수합병 시장의 규모는 2조 4천억 달러였는데, 1999년 이는 3조 5천억 달러로 증가하였으며, 그중 초국적기업에 의한 인수합병액은 75% 증가하였다. 1999년 중심부 국가 사이의 외국인직접투자는 그 전년도의 4810억 달러에서 6360억 달러로 증가한 반면, 발전도상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는 1790억 달러에서 2080억 달러로 그 증가세가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난다. 1996년에 발전도상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의 증가가 34%였던 것에 비하면 이는 투자가 상대적으로 감소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적인 외국인 직접투자 중 발전도상국에 대한 투자의 비중은 1994년의 41%에서 1999년에는 21%로, 2000년에는 19%로 줄어들었으며, 이 수치는 발전도상국이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낮은 것이다.

 

 

발전도상국 중 외국인 직접투자의 감소의 타격을 가장 크게 입은 것은 동남아시아 국가로, 특히 이들 국가에 대한 일본자본의 투자가 정체하거나 감소하면서, 아시아 발전도상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중 동남아시아 국가의 비중이 1990년대 중반의 30%에서 2000년에는 10%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동아시아 발전도상국에서 외국인직접투자는 중국을 제외하면 대부분 초국경적 인수․합병의 형태로 전환되어, 금융위기를 겪은 5개국이 아시아 발전도상국 인수합병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96년의 19%에서 1998년에는 68%로 증가하였으며, 아시아 발전도상국의 인수․합병액은 1994-96년 연평균 70억 달러 수준에서 1997-99년에는 연평균 200억 달러 수준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중국에 대한 투자 동향의 변화


이처럼 세계적으로, 그리고 동아시아 내에서 인수합병이 새로운 투자의 형태로 전환되면서 중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 유입의 추세도 둔화하고 있다. 중국의 WTO 가입은 이런 변화된 조건에 따라 둔화한 외국인 투자를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대외개방의 수준을 더욱 높이려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며, 중국은 이를 위해 국내 인수․합병 시장의 활성화와 주식시장에 대한 외국 기간투자자의 진입의 허용 등 자본시장의 자유화를 위한 단계적 조치들을 발표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중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의 형태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중국 측과 외국자본 사이의 합자 형태의 투자가 줄어드는 반면 외국자본의 100% 지분에 의한 독자(獨資) 형태의 투자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 한 측면이다. 1980년대에 독자기업의 비중은 매우 낮아 1986년에는 투자액의 1.2%였고, 1990년에는 늘어났지만 아직 1/4 선인 25.6%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1999년에는 독자기업 투자액의 비중이 48.5%까지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기존에 합자형태로 투자한 외국 기업들의 경우도 증자를 통해 지분을 확대하여 경영권을 장악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P&G나 지멘스는 최근 경영권 장악을 위한 지분확대 투자를 시행하였는데, 2000년 이후 중국에 대한 신규 외국인 직접투자 중 경영권 확보를 위한 기존 합자기업의 증자의 비중이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런 변화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2000년과 2001년 중국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에는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는데, 타이완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투자가 증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타이완의 경우 타이완으로부터 직접투자가 늘어나는 외에 카리브해의 버진아일랜드를 우회하는 투자가 대대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일본의 경우 1995년 이후 달러강세의 ‘역플라자’와 아시아 금융위기로 일본의 대중국 투자가 대폭 줄어든 바 있는데, 일본의 전체적인 해외투자가 정체상태임에도 불구하고 2001년부터 중국에 대한 투자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이미 외국인 직접투자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아져 있고, 이를 매개로 세계경제의 전반적 부침으로부터 상당히 민감한 영향을 받는 구조로 전환되었다. 기업의 투자자금원이 기업내 축적분 외에 국유기업의 경우는 전적으로 국가은행의 대출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 비국유기업의 경우는 은행차입이 어렵기 때문에 외국인 직접투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점 때문에 외국인 직접투자의 증감은 중국경제에 상당히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대외적인 기술의존도가 상당히 높은데다 첨단부문에 대한 외국기업의 지배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외국인 직접투자의 유치를 위해 자본시장을 점차 개방하지 않은 수 없는 상황은 향후 중국의 경제․사회구조에 적지 않은 불안정성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겉보기에 고양이가 쥐는 잘 잡았는지 모르지만 이제 안방을 호령하게 될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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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ꡔ사회진보연대ꡕ 기획연재] 신자유주의 시대의 중국(3)



국유기업 개혁과 중국의 노동자


백승욱 (한신대교수/운영위원)

 

 


중국의 동북지방에 자리잡은 랴오양(遼陽)과 따칭(大慶)에서 노동자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수천에서 수만 명의 노동자 시위대가 시정부청사와 공안국 청사를 포위해 요구를 외치고 있고, 이 와중에 시위의 지도부가 체포․연금 되고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 시위대의 주축은 기업에서 면직(下崗)된 노동자들이고, 이들의 요구는 기업과 정부가 일자리를 보장하고 밀린 생활보조금을 지급하고 자신들의 사회보험금을 계속 납부해 달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면직이란 공식적으로 실업과는 다른 범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이 가속화하면서 외형상 실업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실업으로 내몰린 불안정고용 상태의 노동자를 말한다. 실업이 기업과 공식적인 고용관계가 해지되는 경우를 말하는 반면, 면직이란 고용계약관계는 유지되지만 직무를 배정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임금을 받지는 못하고, 다만 기업에서 일정액의 생활보조금을 지급 받고 기업에서 배정 받은 주택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계속 지니며 기업에 사회보험금을 대납하는 경우를 말한다. 중국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01년 6월말 기준으로 중국의 공식 도시 등록 실업자 수는 619만 명이고 도시 실업률은 3.3%였는데, 이들 이외에 국유기업의 면직 직공이 이보다 많은 수인 769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어, 이들을 합하면 사실상 도시의 실업률은 7%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실업자의 경우는 정부가 실업보험을 통해 구제금을 지급해야하는 책임을 지며, 실업률의 상승 자체가 정치․사회적 부담이 되기 때문에 중국 정부는 실업대신 면직제도를 이용해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에서 배출되는 노동자를 기업 내에 묶어두기를 원하고 있다. 면직자의 취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고 기업이 책임지거나 면직자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1) 2001년 면직직공 중 재취업한 사람은 11.1% 뿐인데, 새로 취업한 일자리가 대부분 사영기업인 경우가 많아 사영기업이 적고 국유기업이 밀집해 있는 지역인 동북지방의 면직자는 장기간 실업의 상태로 남게되는 경우가 많고, 이번 동북지방의 시위도 이처럼 누적된 면직자의 문제가 폭발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랴오양과 함께 시위가 벌어진 따칭이란 어디인가? 중국사회주의 역사에서 따칭은 1960년대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지역이었다. 일찍이 1960년대에 마오쩌뚱은 “공업은 따칭에서 농업은 따자이(大寨)에서 배우자”는 구호를 외친 적이 있었다. 따칭은 중국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유전으로 자력갱생과 노동자의 헌신, 정치우위 등이 집약된 상징적 모델이었으며, 중국 전체 석유 생산량의 2/3를 담당해 왔다.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공장이 몇 곳 있다. 따칭이 그렇고, 정치우위에 입각한 기업관리를 뜻하는 ‘안강헌법’의 본산지인 안산(鞍山)강철 공장이 있고, 중국 사회주의 기업의 대표적 모델인 서우뚜(首都)강철이 있고, 문화혁명기에 마오쩌뚱의 직접 지원을 받은 쭝난하이(中南海) 공작대가 조반파와 결합해 공장경영체제의 혁신을 실험한 베이징 방적공장, 그리고 같은 시기 노동자 중심의 생산경영체제를 실험하고 대학과 공장의 결합을 실험한 상하이 공작기계창 등이 있다. 이런 과거 역사를 대표하는 기업의 하나인 따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점에서 이번 일이 보여주는 상징성은 크다. 더구나 따칭에서 시위가 벌어진 이유가 중국의 대표적 대형기업집단인 중국석유가 뉴욕과 홍콩 증시에 상장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단행한 구조조정과 인원삭감의 결과였다는 점에서 현재 중국이 걷고 있는 길의 상징적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 동북부 석유산업을 통합한 거대기업인 중국석유는 1999년 이후 산하기업 중 비효율적인 기업들을 점차 축소하기로 하면서 종업원의 28%를 삭감하였다. 중국석유에 인수된 따칭에서는 8만6천명이 감원되어, 종업원수가 9만 명으로 줄었는데, 따칭은 대외개방의 심화과정에서 국제 유가기준 보다 생산가가 높다고 평가되어 점차 그 생산을 단축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집중적인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앞선 연재에서도 언급했듯이 1990년대 중반 들어 중국의 국유기업 적자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였고, 1998년 총리에 취임한 주룽지는 3년 내에 국유기업의 적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국유기업 문제 해결을 위한 대대적 구조조정에는 반대가 많았고, 이의 해결을 위해 WTO가입으로 대외개방을 확대하고 외부의 힘을 통한 내부의 구조조정을 단행한다는 방침이 설정되었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런데 외형상 2001년 들어 중국의 국유기업은 적자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윤총액의 대대적인 증가가 그 표지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몇몇 업종의 초대형 기업과 나머지 대다수 중소기업 사이에서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2001년 1월에서 9월 사이 이윤액 10억 위안 이상인 20개 국유기업이 국유기업 이윤총액의 78%를 차지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이윤총액순 5위안에 드는 중국석유, 중국이동동신, 중국전신, 중국해양석유, 국가전력이 이윤총액의 55%를 차지하고 있으며, 업종별로 보아도 고이윤 5개 업종이 이윤총액의 74.6%를 차지한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보아도 31개성․직할시․자치구중 6개성이 국유기업 이윤총액의 64.2%를 차지하여 규모․업종․지역에 다른 집중도가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에 비해 중소규모의 국유기업의 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는데, 이런 양극화의 추세는 1995년 중국공산당 14기 5중전회(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에서 제기된 “큰 것은 쥐고 작은 것은 놓는다”(抓大放小)는 방침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가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국유기업 변화의 방향은 전체 발전노선의 틀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국유기업 구조의 변화는 국가와 기업의 관계와 기업운영 방식 상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발생시키며, 또한 노동관계상에서도 근본적인 전환을 낳는다는 점에서 중국 전사회구조 변화의 핵심적 축이 되고 있으며, 현재 중국이 나아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전환의 핵심적 쟁점의 장소가 되고 있다.

 

 



1. 개혁개방과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중국의 개혁개방을 향한 노선전환은 처음에 농촌에서 시작되었지만 핵심적 목표는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과 그 비중의 축소에 맞추어져 있었다. 다만 국유기업이 지니는 상징성이나 국유기업이 수행해온 사회경제적 역할 때문에 처음부터 이 문제를 거론하기에는 이데올로기적 저항이 강했고, 그 때문에 1980년대에는 우회로를 거치면서 국유기업의 외곽을 포위한 뒤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국유기업에 대한 공격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국유기업의 구조 전환은 국가와 기업관계의 변화와 기업 내에서 권력관계의 변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 수 있는데, 양자는 사실 분리되어 진행되어온 것은 아닌 동일한 과정이기도 하다.

 


(1)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


개혁개방 전 중국의 도시지역의 기업에는 크게 국유기업과 집체기업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이 둘을 묶어 ‘공유제’라고 불렀다. 국유기업은 1994년 이전까지는 국영기업 또는 ‘전민소유제’ 기업이라는 명칭으로 지칭되었다.2) 국유기업은 그 기업의 책임관리주체에 따라 중앙부서 직속 기업, 성급기업, 지구급기업, 현급기업 등 행정 등급에 따라 구분되었고, 그에 따라 시설 규모나 급여, 복지혜택 등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이에 비해 집체기업은 건국초기의 사기업들이 국가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통합되면서 집체기업으로 전환된 것과, 국유기업 산하에 설립된 기업, 도시의 구(區)보다 아래 등급인 가도(街道)에서 설립하여 운영하는 기업, 농촌지역의 인민공사가 설립한 기업(이는 인민공사 해체 이후에 鄕鎭企業으로 전환된다) 등을 일컫는다. 중국은 소련과 달리 계획경제 운영에서 중앙 집중성이 덜한 탈집중적인 특징을 지녔는데, 이는 대약진이나 문화대혁명이라는 중국 고유의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다수의 국유기업은 중앙정부의 직접 관할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의 해당 부서의 관할 하에서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운영되었고 전국적 통합성은 비교적 적었다. 일반적으로 국유기업의 운영은 그 기업 상급의 해당 정부의 관할 부서가 책임을 나누어 졌는데, 재무, 원료공급, 노동력 공급, 생산물 유통 등이 각기 별개의 부서로 나뉘어 관할되는 체제였다.

 

 

1970년대 말 개혁개방의 시기에 국유기업의 구조전환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변화는 국유기업과 상급주관 단위 사이의 이런 고리를 끊고 기업에 더 많은 경영권을 위임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점차 그 변화의 폭과 깊이가 깊어지면서 국유기업의 성격 자체가 변하기에 이르렀다. 이 세 단계는 ① 권한의 위임과 이윤허용 시기(1978-84년) ② 소유권과 경영권 분리의 시기(1985-1993년) ③ 현대기업제도 건립 시기(1994년 이후)로 구분된다.

 


첫 번째 ‘권한의 위임과 이윤허용 시기’에는 기존에 기업의 이윤을 상급주관단위에 전액 납부한 뒤 이를 다시 배분하던 방식을 일부 벗어나, 기업이 상급주관 단위에 이윤액이나 이윤증가율 등을 청부하고, 청부한 목표를 초과하는 이윤을 기업 내에 유보하여 자체적인 축적기금이나 복지기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방침이 도입되었다. 1983년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윤상납을 세금으로 전환하는 제도(利改稅)가 도입되어, 대형국유기업의 경우 실현이윤 중 55%를 소득세로 납부한 뒤 나머지를 자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8급의 차등 누진소득세 제도를 도입하였다. 1984년에는 기업 경영자에게 허용되는 권한을 10개 영역으로 확대하여, 생산경영계획, 상품판매, 상품가격설정, 자금 사용, 인사노동권, 임금사용권 등을 기업에 허용하였고, 이듬해는 허용영역에 4개가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 달리 이런 방식은 기업의 경영자의 권한을 확대하고 기업 자체적으로 생산 계획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그동안 억제된 임금인상에 대한 요구가 폭발하면서 기업의 유보이윤을 복지기금으로 배분하는 경향이 두드러져, 당과 정부는 경영자의 권한 확대를 위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두 번째 시기에는 소유와 경영권을 분리하고 경영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경영책임제가 도입된 것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상급주관단위는 기업경영의 여러 목표와 관련하여 기업의 경영권을 특정 경영자에게 청부하고, 이 청부를 맡은 경영자는 청부기간 내에 기업에서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형기업에서는 일반적으로 청부제가 시행되었고, 중소기업에서는 기업 임대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양자를 묶어서 살펴보면 1987년에 이 제도를 시행하는 기업이 예산 내 기업의 78%를 차지할 정도로 빠른 변화가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앞선 시기의 이윤상납을 세금으로 전환하는 제도를 개선한 세금과 이윤의 분리(稅利分流)제도가 시행되어 기업 소득세가 일률적으로 33%로 낮아졌으며,3) 주식회사 제도가 시험적으로 도입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논의는 국가가 기업에 대해 소유권만을 지니지 경영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 없다는 소유권과 경영권 분리주장이었는데, 이는 다음 시기 현대기업제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세 번째 시기는 1994년 이후에 현대기업제도 건립이 추진된 시기이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발전노선으로 채택되고, 국가가 경제의 직접개입에서 거시경제 관리로 물러남에 따라 기업제도에서도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근본적인 전환이 나타나는데, 이는 주식회사제도를 골간으로 한 현대기업 제도의 건립이 추진된 것이었다. 기업의 핵심 조직은 주주총회와 이사회, 감사회가 되며, 이사회의 대표인 회장(董事長)이 그 아래 사장(總經理)을 두어 기업을 경영하고, 소유자로서 국가의 권한은 대주주로서 주주총회와 이사회를 통해 발휘된다는 방침으로, 국가가 소유자로서 권리만 가지겠다는 것은 계획경제에 의한 관리방식을 포기하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 체제로 기업은 경영책임과 손익에 대한 책임, 발전계획에 대한 책임을 지며, 국유기업의 파산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현대기업제도에서는 국유기업이 현대주식회사 형태로 변화되어감에 따라 국유기업과 비국유기업 사이의 경계는 점차 모호해지게 되었다. 기존의 국유기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는데 일부는 독자적인 지주회사 형태의 총공사(總公司)로 독립한 기존의 상급주관단위가 그 산하의 개별기업들을 소유지분을 통해 통제하는 기업집단형 기업체제로 전환되었고, 일부기업은 실질적으로 주식회사제도로 전환되어 상하이와 선전의 주식시장에 상장되었으며, 범주상으로도 국유기업이 아닌 주식제 기업으로 분류된다. 이어 1995년의 중국공산당 14기 5중전회에서는 앞서도 언급한 ‘큰 것은 쥐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방침이 제기되어, 핵심적 국유기업만 국유형태를 유지하고 중소형의 기업들은 파산, 매각, 합병 등의 방식으로 처분한다는 새로운 방향이 설정되었다.

 

 

현대기업제도를 중심으로 국유기업 체제가 전환됨에 따라 ‘공유제 우위’의 원칙이나 국유기업에 대한 해석 자체도 바뀌고 있다. 중국이 사회주의임을 주장하는 근거의 한 축은 국유와 집체가 핵심이 되는 ‘공유제의 우위’인데, 이에 대한 해석은 공유제가 절대적 수치상의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에서부터 점차 경제의 핵심 영역(자원개발, 교통운수, 통신 등)만을 공유제가 장악하면 된다고 보는 것으로 옮겨가고 있고, 그에 따라 국유기업의 사유화에 대한 합법적인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처럼 빠른 변화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국유기업이 전체 경제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1999년 통계를 보면, 공업기업 중 국유기업 수는 6만 1천3백 개로 외국인투자기업 6만 2천 3백 개와 비슷한 수준이며, 주식제 기업수도 1만 4천2백 개로 늘어났다. 기업수로만 보면 개체호와 사영기업 수가 총612만 6천 8백 개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집체기업으로 165만 9천2백 개이다(그러나 집체기업의 다수는 이미 실질적으로 사영기업으로 속성이 바뀐 향진기업들이다). 공업생산총액에서 차지하는 국유기업의 비율은 28.2%로 주식제와 외국인투자기업을 합한 기타형태기업의 26.1%와 비슷한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도시 종업원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이보다 다소 높지만 40.8%로 절반 이하 수준이며, 두드러지는 것은 사영기업 노동자와 자영업자(개체호)의 비중이 16.5%로 크게 늘어나 국유기업 노동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2) 경영권의 확대와 노동자의 배제


국유기업의 구조에서 이처럼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되고 경영자의 권한이 확대됨에 따라 기업의 운영에서도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의 권력관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중국에서 기업관리체제는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적 기복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신중국 건설이후 옌안(延安)시대의 모델을 따라서 건립된 공장관리위원회 제도는 짧은 도입기 이후 1차 5개년 계획기(1953-1957)에 소련 모델을 따른 공장장 책임제(一長制)로 바뀌었다. 이 공장장 책임제에 대한 노동자의 반발이 높아지자 대약진 시기에는 당위원회 지도 하의 공장장 책임제가 도입되었고, 문화혁명기에는 공장관리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등장함에 따라 혁명위원회제도라는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기도 하였다. 이후 1970년대 말에는 당위원회 지도 하의 공장장 책임제가 다시 도입되었고, 1980년대 들어 경영청부 책임제 하에서는 기본적으로 경영자에게 권한을 더욱 집중시키는 공장장 책임제가 기업관리제도의 골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990년대의 현대기업제도는 기존의 사회주의 하의 기업관리체제와는 근본적인 단절하게 되는데, 새롭게 등장한 기구와 기존의 공장 내에서 존재하던 대중조직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현대기업제도 하의 새로운 변화가 잘 드러난다.

 

 

현대기업제도가 등장하기 이전 공장 내에서 노동자의 대중조직으로 건립되어 있던 것은 ‘노삼회’(老三會)라고 부르는 당위원회, 직공대표대회, 노동조합(工會) 세 가지였다. 물론 이 조직들이 진정한 대중조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며, 이를 둘러싼 논쟁 자체가 문화대혁명을 가로지르는 핵심 쟁점이기도 했다. 공장 내 대중조직인 직공대표대회나 노동조합 모두 노동자의 의견의 결집체로 존재하기보다는 노동규율의 강화에 필요한 보조적인 기구였고,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작업장의 생산규율이 강조되고 공장장의 권한이 강화되는 시기에 오히려 정책적으로 이 조직들의 보완적 역할이 강조되었다는 점에서도 이 조직들이 실질적 힘을 지니지 못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1980년대까지는 형식적으로나마 공장내의 노동자의 ‘권한’을 상징하던 이 조직들이 현대기업제도의 도입 이후에는 주주총회, 이사회, 감사회라는 ‘신삼회’(新三會)와의 관계정립 속에서 점차 그 존재자체가 의문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법적으로 기업의 의사결정권이 주주총회에 집중되는 현대기업제도 하에서 이들 옛 조직들이 설자리는 복지영역 정도로 국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과 기업을 분리한다는 정책 하에서 당위원회의 입지는 축소되었고, 직공대표대회는 직공주주회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고, 노동조합은 복지분야로 역할이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2. 불안정 노동화


기업 내에서 경영권의 강화가 노동자의 조직적 권한의 축소로 나타난다는 것은 위에서도 살펴보았는데, 이는 조직적 차원뿐 아니라 개별노동자의 지위의 하락을 낳는 각종 조치들과 맞물려 진행된다. 전체적인 추세를 개괄하면, 노동자에게 보장되었던 제한적인 권리들이 축소되고, 노동자들을 노동시장에서의 개별적 계약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며,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에 따라 전반적인 노동자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방향을 보이고 있다.

 

 

국유기업의 구조전환은 노동관계의 구조전환과 맞물려 진행되어 왔다. 노동관계의 구조전환은 세 영역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는데, 고용관계에서 노동계약제의 도입, 임금관계에서 임금차등화와 개별고과제도의 도입, 사회복지 영역에서 사회복지의 시장화가 그것이다.

 

 

첫째 고용관계영역에서는 노동계약제가 도입되고 이것이 전원노동계약제로 확대됨에 따라 고용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 하에서 중국의 도시 노동자는 종신고용이 보장되는 ‘고정노동자’(固定工)라는 형태로 존재하였다. 물론 이런 고용제도 하에서도 호구제도에 따른 도시주민과 농촌주민 사이의 직업배분의 엄격한 장벽, 고학력․고기술 관리자에게는 ‘간부’ 지위를 부여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 ‘노동자’ 지위를 부여하는 분할선, 국유기업 노동자와 집체기업 노동자 사이의 대우의 차별 등이 존재하였지만, 도시노동자 전체로 보아서 고용의 안정성은 사회주의 시기 중국 고용제도의 대표적 특징이었다.

 

 

개혁개방이 진행되면서 중국은 1986년 신규 노동자에 대해서 노동계약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노동계약제는 종신고용 체제를 허물고 계약기간을 정해 고용관계를 수립하도록 하고, 고용기간이 종료된 뒤 해고가 가능하도록 한 제도이다. 이로써 ‘고정노동자’ 이외에 ‘계약제 노동자’라는 범주가 등장하였는데, 이 제도는 처음에 신규 노동자에게만 적용되다가 1990년대 들어서 전체 노동자에게 확대되었다. 이것이 전원노동계약제인데, 전원노동계약제는 단지 대상 범위가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달라졌을 뿐 아니라, 계약의 전제조건으로서 작업장 내에서 직무최적화를 거쳐 잉여인력을 계약의 대상에서 배제할 수 있는 단서가 붙어서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이후 면직과 해고가 가능해지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1994년 발표된 중국의 <노동법>은 노동계약제를 고용의 일반원칙으로 못박았고, 1990년대 중반 이후 노동계약제는 일반화되고 있다.

 

 

노동계약제의 실시에 대해 기존의 고정노동자의 저항이 적지 않았지만, 국유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면직의 증가와 농촌에서 유입되는 농민노동자(農民工)의 증가 때문에 이러한 저항은 점차 약화되었다. 농촌 출신의 농민노동자는 1989년 이후 비약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들은 도시 호구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의 종업원 수 통계에 잡히지 않지만 사실상 사영기업이나 외자기업의 노동자 또는 자영업자 등의 형태로 도시의 저임금 산업예비군을 형성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수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4)

 

 

둘째, 임금체제의 변화를 보면 과거의 등급임금제가 사라지고 다양한 임금평가기준을 도입하는 임금제도가 형성되고 있고, 일반노동자와 경영자 사이에 상이한 보수지급 원칙이 등장하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중국의 임금체제는 국가가 통일 관리하는 등급임금제였다.5) 이는 한 업종 내에서는 동일한 임금표에 따라서 숙련상의 차등을 두어 임금을 지급하는 원리였다.

 

 

개혁개방 이후에는 처음에 기본급 이외의 성과급을 늘리는 형태로 임금제에 변화가 나타났다. 이후 가변임금제나 구성임금제를 통해 임금의 평가기준의 다원화를 실험 한 뒤 1990년대에 정착된 하나의 방식은 직무기능임금제인데, 이는 기본급, 직무급, 기능급, 연공급 등 여러 가지 임금결정 요소를 두고 개인별 임금 평가의 기준을 ‘능력에 따른 배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임금의 결정을 두고 지속적으로 제기된 논쟁은 ‘노동에 따른 배분’에 대한 해석이었는데, 사회주의시기에 이에 대한 해석은 이를 최소한으로 해석하여, 가능한 임금 격차를 줄이고 재분배적 형태의 급여를 늘리는 것이었던 반면, 개혁개방 이후 ‘노동에 따른 분배’에 대한 해석은 이를 최대한으로 해석하여 가능한 개인차를 늘리는 방향의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반노동자와 경영관리자 사이에 보수 지급에서 상이한 원칙이 적용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 경영관리자에 대한 고액의 상여금 지급과 연봉제가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고학력 기술인력과 관리자에게 스톡옵션 형태의 주식배분이 이루어지는 것도 유사한 추세를 반영해 주고 있다.

 

 

셋째, 사회복지 영역에서는 과거 노동자가 속해있는 기업(딴웨이: 單位)이 복지를 전적으로 책임지던 체제를 허물고 사회복지를 상품화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사회복지의 상품화는 개인 갹출 비율을 늘리는 사회보험 체제를 수립하는 것과 기업의 복지 혜택을 기업 외부로 이전하여 유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회보험의 개혁은 과거 기업이 전적으로 책임지던 양로보험, 의료보험을 개인과 기업의 공동책임으로 전환하고 여기서 개인의 책임비중을 점차 높이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보험 영역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변화는 해고가 가능해짐에 따라 실업보험제도를 수립한 것인데, 여기서도 개인과 기업의 공동부담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보험 제도는 국가가 직접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개인의 부담을 늘이고 개인과 기업이 공동으로 책임지도록 한 것인데, 국유기업 구조조정과 맞물려 사회보험금 납부 능력이 없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이 제도 하에서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노동자의 비중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한편 기업의 복지 혜택의 유료화는 기업에서 무상으로 공여하던 혜택인 식당, 탁아소 등 각종 편의시설을 기업에서 분리하여 유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3. 중국노동자의 분할과 통일의 길


중국의 국유기업이 전반적인 구조조정에 들어서면서 이에 상응하여 중국노동자의 지위도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일부 업종과 대형기업의 경우 국유기업이라 하더라도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배경으로 빠른 성장세를 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중국 노동자 사이에서 다양한 분화가 형성될 것임을 시사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보통신 관련업종이나 금융관련 업종에서 면직의 대상에서 벗어난 일부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삶의 지위를 당분간 누릴지도 모른다. 이에 비해 구조조정 대상이 된 기업들이나 매각이나 파산의 기로에 서있는 중소국유기업의 노동자들의 지위는 농촌출신 농민공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따칭이나 랴오양의 거리 시위에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도시와 농촌 사이에는 호구제도의 장벽이 존재함에 따라 도시주민인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 유리함은 이들과 농촌출신 노동자를 갈라놓고 있으며, 도시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는 농촌노동자와 아직 농촌에 살고있는 농민사이의 격차는 이들 사이를 또다시 갈라놓고 있다.

 

 

지역적으로도 잘 나가는 지역과 오랜 침체 속에 빠져있는 지역이 분할되어 있고, 이들 사이의 연계가 형성될 수 있는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노동자를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있는 유일한 노동조합인 중화전국총공회는 국가기관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으며, 노동자의 조직이기보다는 기업의 노무관리 담당자로서의 성격을 더욱 많이 지니고 있다. 틈틈이 벌어지는 파업은 노조와는 무관하게 벌어지며, 1982년 헌법에서 파업권 조항이 삭제된 후 파업권에 대한 법적인 보장은 아직도 논의된 바 없다.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조직화의 단초를 보인 수도노동자자주연합과 같은 독자적 노동자 조직의 맹아는 당시의 실패의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WTO 가입 이후 더 가속화할 구조조정 속에서 배출될 불안정 노동층은 늘어날 것이고, 사영기업가를 당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중국공산당의 방침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축소시킬 것이다. 다양하게 존재하는 분할의 장벽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는 중국 노동자들의 몫이겠지만, 어디 또 그것이 중국 노동자들만의 몫이겠는가?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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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ꡔ사회진보연대ꡕ 기획연재] 신자유주의 시대의 중국 (2)


외부의 자극으로 내부의 구조조정을: WTO 가입과 중국의 미래

 


                                                       백승욱 (한신대교수/운영위원)

 

 


1. WTO 가입의 과정


중국은 2001년 11월 10일 142번째로 WTO에 가입하였다. 이는 1986년 GATT 가입을 신청한 이래 15년만의 일이다. 중국 방송에서는 WTO 가입이 중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중국의 대외수출을 촉진할 것이며, 중국의 경제구조를 세계적 기준에 더욱 가깝게 만들 것이라는 낙관론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WTO 가입이 가져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적지 않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깊어진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심각한 문제로 드러날 것이라는 지적도 일어나고 있다.

 

 

GATT 가입을 신청한 뒤로 중국의 가입 요구가 바로 수용되지 못한 것은 가입조건에서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핵심산업의 통제와 외국인 소유제한, 정보통신과 금융업에 외국인 진입 제한을 주장해왔지만, 미국을 비롯한 세계무역의 주도국이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가입협상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개혁개방 뒤로 중국의 대서방 수출이 봉쇄된 적은 없었고, 중국은 미국이나 유럽으로 수출에서 WTO 가입국가에 비해 큰 차별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이는 중국의 가장 큰 수출시장인 미국과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매년 미국 의회에서 최혜국대우 연장 비준을 얻어야 했고, 이것이 항상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압력의 빌미가 되기는 했지만, 중국이나 미국 어느 쪽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 조치가 중단될 것이라고 예상한 적은 없었다.

 

 

중국 지도부는 GATT, 그리고 1995년 이후에는 WTO 가입이 중국의 세계시장 편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중국 내의 경제적 구조조정과 사회적 재편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정치적으로도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늘려 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장쩌민 국가주석과 리란칭 부총리를 중심으로 이 국제기구의 가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그렇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는 WTO 가입보다는 국내의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이 더 시급한 과제로 상정되어 있었다. 이 상황은 1998년쯤부터 빠르게 바뀌었다. 1998년과 1999년에 중국은 WTO 가입을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렇게 상황이 바뀐 배경에는 아시아 금융위기로 중국의 수출도 둔화되기 시작했고, 국유기업의 구조조정 속도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국내적 반발이 적지 않음에 따라 새로운 충격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1997년 15차 당대회에서 총리에 임명된 주룽지는 국유기업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우선적 과제로 삼았지만, 이 작업이 예상과 달리 빠른 속도로 나아가지 않음에 따라 WTO 가입을 국유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로 판단하고, 1998년 뒤로 WTO 가입을 위한 협상안 마련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1998년 6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은 그동안 정체상태에 있던 중국의 WTO 가입 협상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은 이듬해 봄, 예정된 주룽지 총리의 미국 방문일정에 맞추어 중-미간의 WTO 가입 협상을 위한 물밑 접촉에 적극적 자세를 보였다. 1999년 초에는 중국의 WTO 가입을 독려하는 클린턴의 친서가 세 차례나 중국에 전달되었고, 이를 미국의 적극적 자세로 해석한 중국은 1999년 4월 주룽지 총리의 미국 방문 시 광범한 양보조항이 담겨있는 협상안을 준비해 갔다.

그러나 막상 워싱턴에 도착한 주룽지 총리가 협상의 조건을 제시하자 클린턴의 측근 정책결정자 사이의 의견이 갈라지면서 미국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처럼 미국이 태도를 결정하지 못한 것은 이미 상당한 양보를 담고 있는 중국의 제안에 대해 미국이 더 많은 양보를 받아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제기된 데다,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에서 중국의 WTO 가입 협상안을 비준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 내에서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를 비롯해 안보보좌관과 무역대표는 중국의 제안을 수용해 협상을 타결하자는 쪽이었고, 재무장과 루빈을 비롯해 국가경제회의 의장과 국내정치 보좌관은 노조를 설득하고 경쟁산업에 대한 보호조치가 없으면 의회 동의를 얻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협상을 당장 타결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행정부 내의 이견이 조정되지 못함에 따라, 잔뜩 기대하고 워싱턴을 찾은 주룽지 총리는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한 채 남은 방문일정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협상이 중단된 상태에서 미국 무역대표부는 중국의 양보안에 대한 미국 내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중국 쪽 제안을 무역대표부 홈페이지에 게시하였는데, 이일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중국 쪽 양보안이 중국 국내에 즉각 알려지게 되면서,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들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 내에서조차 반대여론이 거세게 일어나자 주룽지 총리는 더 이상의 협상을 진행할 수 없었고, 주룽지가 귀국하기 직전 클린턴은 중국의 협상안을 수용할 의사를 비쳤지만 이미 상황은 협상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달 1999년 5월에는 코소보 전쟁 중에 나토의 전폭기가 유고의 중국대사관을 폭격하는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중국 내에서 반미의 분위기가 높아졌고, 대미 양보안의 책임을 물어 주룽지에 대한 정치적 공격 또한 점점 더 늘어났다. 정부 내에서는 개방의 영향을 심하게 받게될 중공업, 서비스업, 농업, 정보통신, 금융부문과 지방정부가 반대의 의사를 적극 표명하고 나섰고, 반발이 거세지자 WTO 가입을 주도해 온 대외경제무역합작부조차 WTO 가입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다시 반전되어 6월 이후 빠르게 다시 미국과의 WTO 가입 협상을 재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장쩌민 국가주석이 전면에 나서 반미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잠재우고, 국유기업 구조조정 일정을 늦추는 양보안을 제시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WTO 가입만이 중국이 살 길 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도 정부와 재계가 의회에 로비를 적극 벌이게 되어, 결국 1999년 11월 베이징을 방문한 미국 무역대표 바쉐프스키와 중국 대표 사이에 중국의 WTO 가입에 대한 중-미 협상이 타결되었다.

 

 


2. 중국의 WTO 가입 조건


중국과 미국간 타결된 협상안은 이듬해인 2000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되어, 미국은 중국에 대해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 지위를 부여하였다. 중국은 이어서 EU와의 협상도 타결하였다. 2001년 중국이 정식으로 WTO에 가입하면서 수용한 조건은 이 두 협상에서 타결된 내용을 기본틀로 삼고 있다. 중국이 WTO 가입을 위해 수용한 조건은 발전도상국 지위보다는 선진국에 조금 더 가까운 선진발전도상국 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의 WTO 가입 조건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공산품과 농산품의 관세인하와 서비스 시장의 개방으로 요약된다.

 

 

농업 영역에서 중국은 농산물 수입관세를 현행 22%에서 15%로 낮추기로 하였고, 농업보조금을 국내 농업 생산의 8.5%로 제한하였다. 공산품 관세율은 1997년의 24.6%에서 2005년까지는 평균 8.9% 수준으로 인하하기로 하였다. 특히 공업부문 중 그동안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아온 자동차 산업에서는 관세율이 현행 80~100%에서 2006년까지 25%로 인하되며, 정보통신 산업 분야에서도 통신부품, 컴퓨터,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제품의 관세가 2005년까지 폐지된다. 자동차와 정보통신 부문의 서비스 시장도 개방되는데, 자동차 산업에서는 외국기업의 독자적 영업 및 서비스 망이 허용되고 자동차 구매자에 대한 개인신용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동통신 서비스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한도를 3년 뒤에 49%까지 높이고, 인터넷이나 무선호출, 기타 부가 통신 서비스의 외국인 지분을 2년 후까지 50%로 늘리도록 하였다. 유통과 서비스업에서도 3년 내에 진입 제한이 철폐되고, 대형 백화점과 체인점에 대한 합작 제한도 철폐된다.

 

 

지금까지 외국자본의 진출이 상당히 제한된 금융부문도 개방되어, 은행업, 보험업, 증권거래업에 외국자본이 합자형태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지금까지 외환업무만 취급할 수 있던 외국계 은행은 2년 뒤에는 기업을 대상으로, 5년 뒤에는 개인을 대상으로 인민폐 거래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증권업 영역에서는 펀드매니지먼트 합자회사의 투자가 허용되어, 3년 후에는 49%까지의 지분을 가질 수 있고 보험업에서도 50%까지의 지분을 허용하는 합자형태의 진출이 허용된다.

 

 

이상이 주로 중국이 미국과 유럽에 제시한 양보안이라면, 그 대가로 중국이 받게된 가시적 혜택은 섬유산업에서 중국산 제품의 수입쿼터제가 2005년 폐지되고, 다섬유협정 폐지 혜택을 중국이 받게된 것이다. 그러나 세이프가드제나 반덤핑 규제수단이 앞으로 상당기간 존속되기 때문에, 이 영역에서 중국이 얻게될 실이득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3. 1990년대 말 중국의 위기 구조


1990년대 말 중국이 WTO 가입을 서두르게 된데는 국유기업의 위기가 배경에 깔려있었으며, 중국정부는 외부의 자극으로 국내 구조조정을 가속화하려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말과 비교해보면 1990년대 말 중국 국유기업의 상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10년 사이에 국유기업의 이윤액은 64% 하락하였고, 적자액은 10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적자기업의 비율이 350% 증가하였다. 그동안 ‘점진적 이행’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국유기업 처리의 문제는 1990년대 들어 중국의 신자유주의의 진행과 더불어 점점 더 핵심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대체로 1992년 이후이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진압 뒤 가라앉은 투자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1992년 떵샤오핑은 선전 경제특구를 출발점으로 중국 남부의 경제발전 지역을 순시하는 ‘남순’(南巡) 행사를 벌인바 있는데, 이를 계기로 중국의 경제는 대외개방을 더욱 촉진하고 자본주의 지향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게 되었으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에 조응하는 ‘궤도진입’(接軌)을 중요한 목표로 삼게되었다. 이런 변화를 반영해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는 중국의 발전노선을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로 정립하여, 과거의 계획경제의 요소를 상당부분 제거하고, 중앙정부는 거시적 경제조정을 중심으로 방향전환을 모색하였으며, 기업은 주식회사제도를 모델로 하는 구조전환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본격화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의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빠르게 높아지게 되었고, 초국적 기업의 중국진출도 대대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사회적 양극화 또한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 1992년의 계기 이전에 1980년대 중국의 성장모델은 국유기업 문제를 유보해 둔 채 그 외곽을 확장해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농촌의 인민공사체제가 해체되고 대신에 가족 중심의 농업 체제가 수립되었으며, 농촌 소재 기업인 향진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농촌주민의 비농업 소득이 증가해 전반적인 농촌 주민의 소득수준이 일시적으로 증가하였다. 도시에서는 국유기업에 대한 청부경영제도가 실시되면서 경영자의 권한이 확대되긴 했지만, 아직까지 기업파산이나 고용의 불안정화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 전이어서, 자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늘어난 유보자금을 그동안 억제되어온 임금인상에 배분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도시 노동자의 소득과 소비수준도 다소 향상되었다. 대외개방의 면에서 살펴보면 1980년대 중국에 유입된 외국인 직접투자는 홍콩을 중심으로 하는 화교자본이었는데, 이들 자본은 기존의 공업지대가 아닌 남부 연해지역의 노동집약적 공업에 투자되면서 기존의 국유기업과 경쟁을 피해 새로운 고용을 빠르게 창출해갔다. 이처럼 국유기업에 대해서는 파산을 억제하는 국가의 정책이 시행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소득수준이 상승하면서 ‘소비열’이 형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중소규모의 투자가 지방정부의 지원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과잉 중복투자 문제는 결국 1988년의 인플레이션을 낳았고, 내구성 소비재에 대한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게 된 뒤로, 1989년 정부가 긴축정책을 펴게되자 국유기업 사이에 채무관계가 물리는 ‘삼각채’ 현상이라는 위기로 표출되게 되었다.

 

 

이 시기까지는 외양상 사회 전반적으로 소득과 소비수준이 향상되는 윈-윈 게임처럼 보이던 상황은 1990년대에 들어서는 ‘제로섬 게임’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떵샤오핑의 남순 뒤로 투자가 대대적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토지와 부동산에 투자가 몰리는 거품현상이 나타났고, 중복투자는 오히려 심해져서, 가동이 중단되거나 설비가 유휴상태에 빠지고 적자가 커지는 기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기업의 파산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1990년대 들어서 고용계약제를 전체 노동자에게 확대하는 전원노동계약제가 실시되면서, 적자 국유기업 노동자의 실업문제가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정식 실업 외에 기업에 이름만 걸어둔 실업자인 ‘면직’(下崗)이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 외국인직접투자의 추세에도 변화가 발생하여, 국유기업의 문제는 더욱 해결하기 힘든 상황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외국인 직접투자의 절대다수가 화교자본의 투자였음에 비해, 1990년대 들어서는 중심부 국가의 초국적 기업의 진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들 기업은 해외 수출의 중간 가공기지로서 중국에 진출한 화교자본과 달리 중국의 내수시장의 진출을 목표로 들어오게 되었고, 핵심 산업의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게 됨에 따라 중국의 국유기업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어 중국 국유기업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1993년부터 국유기업의 상업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그전까지 직접 국가 재정에서 국유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던 방식이 은행대출 방식으로 전환되었고, 국가의 긴축 정책으로 은행의 부실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출심사를 강화하게 되면서 국유기업의 어려움은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1990년대 말이 되면 그동안 유예된 국유기업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등장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이 문제를 매각․파산․합병 등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지만, 국유기업이 오랫동안 국가재정 수입원이면서 사회적 안전망으로 작용해 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에는 적지 않은 저항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WTO는 이런 저항을 누르기 위해 외부의 강제력을 도입함으로써 국유기업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개시할 수 있는 중간 기착점으로 상정된 것이다.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은 ‘큰 것은 쥐고 작은 것은 놓는다’는 방침에 따라, 핵심적 중요성을 지니는 몇몇 산업의 중앙급 국유기업은 합병의 방법으로 규모를 키워 국유기업 형태를 유지하지만, 그 이외 중소규모의 국유기업이나 경영적자가 누적된 기업들은 파산, 매각, 임대의 방식으로 처분하려는 것이 정부의 목표이다. 이런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업의 매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인수․합병 시장을 육성하고, 주식시장을 통한 자본조달과 기업 지분 거래를 가능케 하는 제도적 기반의 마련, 그리고 기업의 파산이나 매각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것 등이다. WTO 가입은 대외개방을 더욱 확대함으로써 이런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을 누르고 구조조정의 속도를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4. WTO 가입의 파장


중국의 WTO 가입의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 아직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중국의 농업과 국내기업들의 기반이 빠르게 와해되고 중국이 대외종속형 경제구조로 전환될 것이라는 걱정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지만, WTO 가입은 이미 상당히 바뀌어온 구조의 사후적 추인에 불과하며 직접적 파장이 생각만큼 크지 않을 것임을 주장하는 견해들도 있다. 관세율 인하와 관련해서도, 이미 중국에 수입되는 물품의 75%는 사실상의 면세혜택을 받고 있으며,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한 밀수도 적지 않아 충격은 적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고, 농업의 경우에도 중국에서 농업 보조금의 수준이 낮고 내륙지방의 수송 하부구조 미발달로 농촌에 미칠 충격도 크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지방정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저항 때문에 외국기업의 진출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많다는 점과 금융부문에 대해서도 정부가 여러 법규로 외국자본의 투기성 진출을 규제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충격이 예측보다 적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사실 1990년대에 중국이 걸어온 길을 염두에 두면 WTO 가입은 지금까지의 발전노선과 완전히 단절되는 새로운 계기는 아니며,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정당화하고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계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입장과 상관없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1990년대 들어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 지역별 격차, 계급적 격차의 문제가 더욱 깊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농촌의 집체농업 구조를 해체하고 농가별로 토지를 재배분해서 청부경영을 하도록 한 체제가 도입된 뒤 농산물 수매가격의 인상과 결합되어 일시적으로 농촌주민의 소득을 상승시키긴 했지만, 이런 효과는 1985년을 기점으로 소진되어 그 뒤로 농촌주민과 도시 주민 사이의 소득격차는 다시 확대되고 있고, 소규모 경작은 생산의 효율 또한 떨어뜨리고 있다. 게다가 농촌 주민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해주는데 기여해 온 농촌의 향진기업의 고용창출 또한 1993년 뒤로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농촌주민의 소득 중 비농업 소득 비중이 계속 늘어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이 또한 농촌 주민의 소득 하락으로 귀결되었다. 이처럼 농촌과 도시지역의 소득격차가 벌어지자, 외국자본 투자가 집중된 연해지역과 내륙 농촌지역 사이의 주민 소득의 격차도 벌어지기 시작하여, 대표적인 발전 지역인 상하이와 내륙의 구이저우성의 일인당 평균소득은 열 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도시지역에서도 경제개혁은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심화하여 소수 경영관리자와 중앙정부 직속의 일부 성장산업의 노동자나 외자기업의 중간관리자를 제외한 노동자의 고용상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농촌에서 유입된 농민공과 국유기업에서 일자리를 잃고 밀려난 면직노동자는 불안정 고용 상태의 거대한 노동력 저수지를 형성하고 있다.

 

 

WTO 가입이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동원된 측면이 있음을 고려하면, 국유기업의 구조조정이 가속화함에 따라 실업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자동차, 금속, 석유화학 같은 자본집약적 부문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한 예로 자동차 산업 분야에서는 전국 자동차 생산업체는 136개 중 40개 정도만 살아남을 것이고, 앞으로 50만 명 정도가 해고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중국 경제 전체를 놓고 보면 대략 1,300만 명 정도의 해고가 발생할 것이고, 공식실업률은 현재의 3.3% 수준에서 몇 년 사이에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살로몬 스미스바니의 보고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향후 5년간 4천만 명 정도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하였다. 농업 분야에서도 밀, 옥수수, 쌀 등 주곡과 면화 생산부문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고, 지역적으로는 특히 북부지방의 타격이 커서 북부지방 농민 중 1,300만 명 정도가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된다.

 

 

WTO 가입은 특히 핵심 선도산업의 외국기업의 지배력을 높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1990년대 들어 초국적기업의 중국 진출이 늘어나면서, 핵심 산업의 외국기업의 장악 정도가 높아져서, 예를 들어 승용차의 68%, 엘리베이터의 70%, 컬러브라운관 65%, 이동통신설비의 100%를 외국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 세계적 자본흐름의 추세가 초국경적 인수․합병이 주도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중국에 투자되는 중심부 국가의 투자도 신규투자보다는 기존에 합자형태로 투자한 분야에서 지분확대와 경영권 확보를 위한 투자로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런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WTO 가입에 대한 수혜자와 피해자는 분명하게 나뉠 것인데, 중앙과 부유한 지구의 간부들과, 외자기업의 관리자층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이 주요 수혜자가 될 것이고, 노동자와 농민은 전체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피해자로 등장할 것이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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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ꡔ사회진보연대ꡕ 기획연재] 신자유주의 시대의 중국 (1)


흔들리는 중국

 


백승욱 (한신대교수/운영위원)


 

1.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


중국에게 2001년은 2008년 올림픽 유치의 성공, WTO 가입, 그리고 중국 축구팀이 최초로 월드컵 본선 진출 등으로 세계무대 진출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해처럼 보인다. 겉보기에는 세계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고성장이 계속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며, 중국인들은 유례없는 자긍심을 떨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사회의 양극화는 전례 없는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은행은 중국의 불평등이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보다 심해 “비교 가능한 자료가 있는 모든 나라 중 최대”라고 평가하였다. 소득의 불평등을 측정하는 지니계수를 살펴보면 심각한 불평등 문제가 잘 드러나는데, 지난해 중국의 한 잡지에 나타난 보도에 따르면 중국의 지니계수는 1995년의 0.38에서 1990년대 말에 0.47로 높아져 빠르게 불평등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부 민간 조사에 따르면 중국의 지니계수는 사실상 이보다 높은 0.59로까지 나타난다.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기점인 1978년에 이 수치는 0.15에 불과하였다. 지니계수가 0.4를 넘으면 소득분배가 심각한 불평등 상태인 국가로 분류되는데, 개혁개방 20년 만에 중국은 소득분배의 면에서 평등도가 가장 높은 국가군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군으로 빠르게 옮겨간 것이다. 중국 내에서는 이것이 과도기적 현상으로, 사회 내에서 고소득자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1992년 떵샤오핑이 제창한 이른바 ‘선부론’(先富論)의 효과라고 보지만, 문제는 앞으로 이런 불평등이 줄어들기보다는 오히려 심화될 요인이 많다는 것이다. 중국 내에서 불평등은 크게 세 축으로 발생하는데,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의 확대, 지역 사이 불균형의 확대, 그리고 관리자층과 일반 노동자 사이의 격차의 확대가 그것이다.

 


중국에선 도시와 농촌 사이의 자유로운 이동이 아직도 제약되고 있다. 과거 코포라티즘적 관리의 결과 생겨난 호구제도는 중국의 인구를 농업호구와 비농업호구로 나누고 농업호구를 지닌 사람이 도시지역으로 이주하여 직업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개혁개방 이후 식량배급제도가 사라지고 직업배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호구제도의 규제력이 다소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안정적 직업의 획득과 교육과 의료 혜택들에서 호구제도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1980년대 초반 인민공사 제도를 해체하고 농지를 가구별로 청부를 준 제도가 시행되고 수매가격이 인상됨으로써 일시적으로 농가의 소득이 높아진 때가 있었다. 그러나 1985년 이후에는 이러한 농촌에 대한 일시적 자극효과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도시지역의 소득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에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는 수치상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고, 삶의 불안정성이라는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농촌주민들의 소득증가가 사실상 농작물 판매수입의 증가보다는 농촌지역에 건립된 향진기업에 취업하여 얻은 비농업 소득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런데 1993년 이후 향진기업의 고용창출 역할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농민들의 취업기회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농가의 소득도 줄어들었다. 경작지를 소규모로 다시 분할하였고, 농촌에서 비농업 분야의 취업기회가 한정되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생활수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1989년부터 많은 내륙지방의 농민들이 연안지역의 발달한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농촌출신 노동자들의 파도 현상’(民工潮)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전국에 걸쳐 적게는 4천만 명에서 많게는 1억 명 이상으로 추계되는 이 거대한 유동 인구군은 호구를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도시지역에 서 2등 시민인 ‘불법취업자’로 거대한 노동력 저수지를 형성하여 저임금 노동력 공급처가 되고 있다.

 


지역 간 격차 또한 계속 커지고 있다. 현재 중국의 일인당 GNP는 800달러 수준인데, 성장이 빠른 대도시인 상하이는 3,300달러, 베이징은 2,100달러, 텐진은 1,800달러 수준으로 평균의 두배 이상 높으며, 이에 비해 내륙의 구이저우성은 300달러, 간쑤성은 440달러로 평균의 절반 수준일 뿐이다. 이처럼 지역별 소득 격차가 커지는 원인은 중국의 고속성장을 추동한 해외 외국인 자본의 투자가 연해지역에 집중됨에 따라 이 지역에서만 소득의 증대가 발생하였고, 반면 내륙의 농업지역에서는 기존의 상호부조의 틀이나 국가의 지원의 틀이 약화되면서이다. 이처럼 지역격차가 벌어지면서 내륙지역에서 배출되는 유동인구 또한 늘어나는데, 쓰촨, 안후이, 구이저우 등지가 주요한 농촌출신 노동자 배출지역이 되었다.

 


도시 내에서는 기존의 국유기업과 집체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실업과 불안정고용이 심각한 문제이다. 중국의 공식 실업률은 아직 4% 수준에 묶여있지만, 중국의 특성을 반영한 특징적인 준실업 현상인 ‘면직’(下崗)이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면직이란 소속 기업에서 공식적으로 해고된 상태는 아니지만, 직무를 배정 받지 못해 기업 내에 대기발령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하며, 기업으로부터 약간의 생활비 보조를 받고, 기업이 여전히 사회보험비를 납부하고, 기존에 배정 받은 주택에서 거주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면직자의 일부는 새로 일자리를 찾겠지만, 조사에 따르면 면직자의 대다수가 상당 기간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면직자의 수는 1천만 명을 넘고, 이런 고용의 불안정성의 결과 1996년에서 1999년 사이에 단체 노동쟁의가 3배 증가하기도 하였다. 면직자를 포함한 일반노동자들의 지위하락이 계속되는 반면, 기업의 경영관리자의 지위는 반대로 계속 상승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에 도시주민의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상승한데 비해 1990년대 들어서는 고급관료와 기업경영자의 소득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일반노동자의 고용불안이 커지면서 도시 내 소득 불평등은 계속 커지고 있다. 기업경영자들이 연봉제의 시행, 주식의 배분 따위를 통해 기업이윤을 분배받게 되면서 이들과 일반노동자들 사이의 괴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2.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중국은 아직 ‘사회주의’ 간판을 내걸고 있다. 중국 헌법 제 1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지도하는,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사회주의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 어떤 조직이나 개인도 사회주의제도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법조문의 규정을 넘어서 실제로 중국을 사회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논란은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중국 내에서 중국이 사회주의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소유제와 정치권력의 문제이다. 즉 소유제에서 공유제(국유와 집체)가 우위에 있다는 것과, 정치권력이 인민에게 있으며, 이는 인민의 당인 중국공산당이 대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는 모두 사실상 법률 차원의 정의 문제에 불과하며, 그 내실과 나아가는 방향의 경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공유제의 우위’만 하더라도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이에 대한 정의는 중국 내에서 여러 차례의 변화를 겪어왔다. 과거 이에 대한 정의는 국내 모든 산업이 공유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었지만,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사영기업이나 외자기업처럼 비공유제 형태의 기업이 병존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다음으로 공유제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권리는 분할될 수 있다는 논의가 전개되어 국유기업의 운영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이를 계승하여 국유제란 국가가 소유제 지분의 51%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정의에 부합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었고, 이어서 전체 경제 중 핵심적 부분만 공유제 형태로 유지하면 공유제의 우위가 된다는 논지로 발전하였다. 1999년에 이미 국유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도시종업인원의 39.7%(집체부문은 7.9%), 농촌을 포함한 전체 종업 인원의 12.1%, 전체공업기업수의 0.8%, 공업생산총액의 28.2%로 낮아졌다. 급기야 중국경제체제의 구조조정을 담당하고 개혁개방을 주도하는 핵심기구인 체제개혁위원회의 기관지라 할 수 있는 ꡔ중국개혁ꡕ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수립하는 근본 해결책은 절대다수의 국유기업을 비국유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공유제의 성격에 대한 논쟁은 중국공산당의 성격 변화와 맞물리고 있다. 떵샤오핑의 노선을 계승한 중국의 국가주석이자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장쩌민은 2000년 2월 ‘세가지 대표론’을 제시하였다. 이는 당이 중국의 선진생산력의 발전요구, 중국선진문화의 전진방향, 중국의 가장 폭넓은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하기만 하면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선진생산력의 발전요구와 선진문화의 전진방향을 대표한다는 의미와 폭넓은 인민이란 누구를 포함하는가가 문제가 될 수 있는데, 2001년 7월 장쩌민은 7.1 강화에서 사영기업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한다는 입장을 발표하여 그 함의를 분명히 하였다. 즉 사영기업의 발전을 독려하기 위해선 사영기업가의 입당을 허용해야 하는데, 이들 사영기업가들이야말로 선진생산력을 대표하는 자라는 논지가 성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국공산당을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사회 모든 세력에 대한 조직적 통제력을 확보하는 코포라티즘적 정당으로 전환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나타낸 것이다.

 


이런 과정은 중국의 개혁정책이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자본가 계급이 등장하는 자본주의 발전의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에는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 자본가 계급은 없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계급으로서 자본가 계급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가 이를 대신하여 한편에서는 적극적으로 자본축적을 위한 제도적 기초를 준비하고,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계급으로서 자본가 세력을 적극 형성해 온 과정이었다. 자본주의 지향의 국가관료와 국유기업의 상층관리자들 그리고 외국자본이 결합된 주도세력이 국가자본주의 또는 관료자본주의라 말할 수 있는 발전노선을 추진해 왔으며, 이 주도세력의 일부가 점차 독립된 자본가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 과정은 중소규모의 사적자본가들이 아래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점차 자본주의 지향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진 세력이 주도적으로 변신하여 국가자본주의 발전노선을 펴나가면서 여타의 부문들을 종속적 지위로 포섭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장쩌민의 7.1 강화는 당 외부에 존재하는 사영기업가들을 당 내부로 끌어들이는 전략인 동시에 당원인 각급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실질적 자본가로 변신하는 현실을 사후에 추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의 방향은 사실 1978년 개혁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인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난 계기는 1972년의 닉슨의 중국 방문이었다. 당시 공화당의 현실파인 닉슨/키신저는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남진을 막고 동아시아의 해상봉쇄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며, 이는 문화혁명 종결 후 대외개방의 길을 모색하던 중국의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1970년대 초 중국의 이처럼 변화된 전략이 반드시 1980년대 이후 개혁개방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졌다는 필연성은 없지만, 이후 변화는 문화혁명 실패의 후과였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다.

 

 

중국 사회주의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 경향과 공산주의 경향의 모순적 결합에서 출발하였다. 이 두가지 경향은 1960년대 말까지 상충하면서 지속되다가 문화혁명을 계기로 결국 중국에서 민족주의 경향이 압도적 우위에 서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에 의한 봉쇄에 이어 1950년대 말과 1960년 초 중소논쟁을 거치면서 소련과 단절하게 된 후 자력 갱생적 사회주의 모델을 실험해 온 중국은 1960년대 말에 사회주의에서 축적된 모순이 폭발하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문화대혁명으로 드러났다. 하나의 단일 사건이라기보다 상이한 역사적 경향과 모순들이 응축된 응결점으로서 문화대혁명은 당과 대중의 모순, 사회주의와 국가의 문제,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 등 은폐되어 있던 문제들에 대한 전면적 문제제기로 나타났다. 그러나 결국은 문제제기로 멈추었고, 문화대혁명을 지속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할 마오쩌둥이 그 운동의 지속을 중단시키고 당조직을 복원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문화대혁명은 그 후 오랜 기간 특정 사회세력에 대한 숙청 켐페인으로 변질되어 중국인들 사이에 거대한 트로마로 남았다. 문화대혁명기 한 방향으로 과도하게 휘어진 막대는 1970년대부터 다시 과도하게 반대방향으로 휘어져 문화대혁명기의 모든 문제제기를 무화하는 쪽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3. 중국의 개혁개방 전략과 동아시아적 길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변화는 농촌에서 시작되었다. 인민공사, 인민공사 하의 생산대대 그리고 생산대로 중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른바 농촌의 ‘3급소유’ 체제와 이에 기반을 둔 공동생산 체제는 ‘연산승포책임제’라는 가구별 청부제도로 대체되고 인민공사는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농업생산의 가구별 청부제도는 지역별 차이가 있지만, 대략 농민집체소유로 되어있는 농지를 생계를 위한 토지와 상품생산을 위한 토지로 나누어 가구별로 관리권을 다시 배분하고, 수확이후 일정 부분을 국가에 수매한 후 잔여 부분은 시장에서 판매하도록 한 제도이다. 지역별로 파종을 공동으로 하는가, 파종할 농작물에 대한 결정권까지 농민에게 주는가 등의 차이가 나타났지만, 농촌의 공동생산체제는 가족별 생산체제로 실제 전환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농촌에 이어 도시지역에서 기존 경제체제의 전환은 1984년쯤부터 진행되었다. 이 변화는 국가와 기업의 관계와 기업내 경영관리 양측면에서 진행되었다. 1980년대에 진행된 기업제도의 변화는 기업관리의 권한을 기업 경영자에게 점차로 위임하고 상급주관 부문의 관할권을 축소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데 처음에는 상급 주관기관에 상납해야하는 이윤 중 일부를 기업 내에 유보하는 이윤유보제나 이윤상납액을 달성하면 인센티브를 주는 이윤청부제가 실시된 후, 이윤납부를 법인소득세로 전환하는 ‘利改稅’, 다음으로 기업의 경영자가 기업의 경영권리권을 상급 국가기관으로부터 청부하는 기업경영생산책임제로 바뀌어갔다. 이어 국유기업의 소유권과 재산권을 구분하고, 경영권을 독립시켜 국가는 국유기업의 경영문제에서 2선으로 후퇴하는 방향의 노선이 제기되었고, 이것이 국유기업을 주식회사제도로 전환하는 현대기업제도 방식으로 제기되어 1990년대의 기본노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국유기업 내에서 소유권과 재산권을 분리하고, 비공유제 형태의 기업의 발전을 촉진하면서 전체적인 사회의 성격 규정을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정하였는데, 이 모순적인 두 어구의 결합에서 사회주의라는 의미는 앞서도 말했듯이 변화된 의미에서 ‘공유제 우위’의 유지였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제창된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이 본격적으로 가동한 것은 1997년 15차 당대회 이후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과 주식회사화가 본격 가동되면서부터이다. 국가에 대한 기업의 자율성의 확보라는 구조조정 노선은 기업 내에서 노동자에 대한 경영자 권한의 확대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기업 내에서 노동자에게 부여된 몇가지 권리들을 약화시키는 조치들을 시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종신고용 지위의 폐지, 개별 노동자의 고과 평가에 기준을 둔 임금 차별화, 기업이 거의 무상으로 제공해 온 복지 혜택의 유상화 등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종신고용 지위를 폐지하기 위한 노동자 고용형태의 다양화가 앞서 말한 ‘면직’ 등의 문제와 맞물려 핵심적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중국의 변화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 중 하나는 1980년대와 비교해 볼 때 1990년대 중반부터 보이는 발전노선상의 변화의 조짐이다. 이는 중국의 대외 개방경제와 맞물려 나타나는 변화이며, 동아시아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만은 한 잡지에 쓴 평론에서 중국의 은행에 비하면 태국의 은행들은 미국 우량은행인 J.P.모건이라 부를 수 있지만, 오히려 중국이 금융위기를 겪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국가의 자본시장 통제에 있었다고 쓴 적이 있다. 이것이 쟁점의 일면을 보여주는데,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비해, 중국은 오히려 동아시아의 ‘발전국가’라고 할만한 모델로 나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발전국가라 함은 자본가 세력이 미약한 상황에서 국가가 금융부문을 통제하고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산업정책을 통해 특정 산업을 육성하고 자국 시장을 외국으로부터 보호하며, 특히 투기성 자본의 유입을 통제하고 수출지향의 산업화를 육성해 가고 노동운동을 강하게 통제하면서 빠른 자본주의적 성장을 추진해 온 모델을 말한다. 일본, 한국, 대만 등으로 대표되는 이런 모델은 사실 냉전체제에서 사회주의 국가들과 대치전선에 미국주도로 만들어진 ‘쇼윈도우’라는 특징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① 미국이 군사비 부담까지 포함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원을 한 것 ② 원조나 차관 등의 자본지원을 한 것 ③ 해당국에 대한 미국의 초국적 기업의 진출을 막고 토착기업을 육성하도록 적극 육성한 것 ④ 미국시장을 일방적으로 개방한 것 ⑤ 국가정책에 대한 잠재적인 토착 반대세력들을 제거한 것 등이 포함된다. 냉전기의 이러한 조건들이 탈냉전 시기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에서 사라진 것은 이 지역의 국가들이 더 이상 과거의 ‘동아시아 모델’을 추구하기 어려워지고 워싱턴 컨센서스의 방향으로 나간 지구적 맥락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는 이런 조건이 없음에도 1990년대 초반까지 동아시아적 모델과 유사한 발전 전략을 추구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이 이런 길을 걸을 수 있던 것은 크게 세가지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달리 중국은 1970년대 말 개혁개방을 시작한 당시에 외채가 거의 없었고, 경제개혁기에도 외채 증가에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자본시장 개방에 대한 외부의 압력을 비교적 덜 받았다.

 

(2) 중국의 빠른 성장을 주도한 한 축은 해외에서 유입된 자본이었는데, 중국은 외채를 늘리는 차관보다는 직접투자를 선호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중국에 투자된 외국인직접투자의 대부분은 해외 중국인들(華人)들의 투자였고, 특히 화남지역과 연해지역에 투자한 홍콩 투자가 대부분이었다. 전자나 섬유/복장 산업에 투자한 이런 자본은 이 시기에 중국에 투자한 외국인직접투자의 70% 이상을 차지하였다.

 

(3) 중국에 투자한 화인자본은 중국을 동아시아의 국제적 하청체제의 하위파트너로 편입시켰다. 동아시아 신흥공업국에 기반을 두고 있던 이들 중소규모 화인자본은 중국 현지에 가공생산 공장을 짓고 수출품을 다시 미국시장으로 판매하는 기존의 생산네트워크를 유지하였다. 이들 화인계 기업은 중국의 기존의 국유기업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중국의 거대한 농촌지역에서 배출된 수많은 농촌출신 노동자들은 이들 화인계 기업에 저임금 노동력으로 거의 무한정 제공되었다.

 

 

그러나 1992년 떵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대외개방을 가속화하면서 중국에 유입되는 외국인직접투자의 형태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여, 화인계 자본 외에 대량의 중심부 국가의 초국적기업의 진출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맞물려 중국의 경제구조를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에 동조시킬 수 있는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일부 대형 핵심 국유기업을 제외한 중소형 국유기업을 매각하여 사기업화하고, 금융제도를 국제기준에 맞추어 개편하며, 외국자본의 진입을 막는 각종 장치들을 제거하고 노동유연화를 높이기 위한 제도의 도입을 서두르는 방향의 변화 또한 진행되고 있다. 특히 1998년 이후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이 구조조정의 결과로 발생한 면직자가 늘어나고 있고, 중국 정부는 대외개방을 촉진하여 이를 통해 국내기업의 구조조정의 속도를 촉진하는 방향의 정책을 추진하여 WTO 가입을 서둘러 왔다. 이 때문에 1990년대 말 중국이 처해있는 조건은 1980년대와 다르며, 훨씬 더 전지구적 자본주의 변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4. 중국과 신자유주의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은 본격적인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국가에 의한 노동력의 관리․포섭을 해온 코포라티즘적 틀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고, 이는 소속되어 있는 층위에 따른 노동자들의 분할관리라는 노동력 관리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국내경제 정책에서도 국가의 적극 개입에 의한 발전주의 노선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WTO 가입으로 상징되는 대외개방의 가속화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한 국내의 반대세력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새로운 힘을 실어줄 것이며, 국유기업과 노동제도에 대한 구조조정은 신자유주의적 길을 따라 더욱 전면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자본시장에 대한 통제를 어느 정도 유지해갈 것인가가 관건이지만, 국유기업 구조조정의 한 방향으로 지금까지 통제되어온 외국자본의 증권시장 투자의 제한을 풀고 증권시장을 통해 외국자본을 적극 유입하겠다 것이 중국정부의 목표이다. 정치적으로 중국공산당을 코포라티즘적 통제를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고 있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그 코포라티즘을 유지해 온 토대를 허물고 있는 딜레마는 향후 중국이 걸어갈 길을 오히려 라틴아메리카와 유사한 방향으로 만들어 나가게 할 수도 있다.

 

 

중국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심화하면서 1997년 이후 중국 내에서도 중국의 발전노선을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 가는 움직임이 등장하고 있다. 아직 그 목소리는 작지만, 계속 커져가고 있는 실업문제 및 사회적 불안정과 맞물려 이후  점점 더 큰 반향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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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시간적인 여유도 없고, 정제된 글을 쓸 여력도 없어서 페이퍼란은 일단 자료 저장용으로  주로 활용할 계획이다. 다만 내게 필요한 글들인만큼, 혹여 들르는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 [UK]

 

 

 

[VOLUME 5 NUMBER 1, 2006]

  

REVIEW


China's Modernization and the New Left


(Wang Hui, China's New Order: Society, Politics, and Economy in Transition. Edited by Theodore Huter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Paula Cerni

 

 


1. Wang Hui is a leading figure in China's 'New Left'. Since 1996, he has co-edited Dushu (Readings), perhaps the most influential Chinese journal of radical thought. Wang is also Professor of Humanities at Beijing's prestigious Tsinghua University, with a specialist interest in the intellectual and literary history of China's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y. This historical perspective allows Wang to locate the pro-market reforms of the post-1978 era within the much longer, complex and contradictory process of China's modernization - a process, he notes, which also shaped the Mao era. But the author also mentions as a major personal influence his exile in the poverty-stricken Qinling Mountains following the 1989 Tiananmen Square protests, in which he participated. It was this encounter with life far beyond Beijing's intellectual circles, he explains, that inspired his 'sort of self-critique, a critique based on a sense of the need to reconstruct the historical relationship between the world of the intellectuals and the other world outside it' (ix).

 

 


2. After a very useful introduction by the editor, the book brings together two long Wang essays on one broad theme—the relationship between recent Chinese thought on the one hand, and the economic and social transformations that are shaking up the country on the other. The first essay, "The 1989 Social Movement and the Historical Roots of China's 'Neoliberalism'", remains unpublished in mainland China, where it nevertheless circulates through the internet. Versions of this essay appeared elsewhere in 2001 and 2002. The second and older essay, 'Contemporary Chinese Thought and the Question of Modernity', provoked a major controversy when it was first published in a 1997 issue of Tianya (Frontiers), though it had been written four years earlier. Only the final section of the first essay was written by Wang exclusively for this book.

 

 


3. Wang's key point is that recent Chinese intellectual debates are closely connected to the re-introduction of capitalism to China or, what amounts to the same, the re-introduction of China into the world capitalist economy. It was his disclosing of this connection between cultural and economic life that made Wang's initial article so controversial amongst Chinese intellectuals. For example, Wang shows that the 1980s 'New Enlightenment' movement reflected a naïve belief that privatization would spontaneously bring about democracy. In that sense, far from challenging Communist Party pro-market policies, it actually went hand in hand with them.

 

 


4. Contrary to mainstream Western interpretations, Wang characterizes the 1989 protests as a revolt against such policies. As well as being a conduit for intellectuals' and students' demands for democracy, explains Wang, the protests were also 'a spontaneous resistance to the inequalities springing from the growth of markets' (58). Simultaneously, they revealed divisions within the state apparatus, and between that apparatus and newly created interest groups. Culminating in the June 4 th massacre, the 1989 events shattered intellectuals' naïve hopes and exposed how little they understood the complex features of China's new order. Because they had narrowly discussed that order in culturalist, moralistic and even spiritual terms, they were unable to provide a practical alternative at a moment of crisis; as a result, 1989 destroyed much of their heroic status.

 

 


5. One lesson Wang draws from these events is that the evolution of Chinese society cannot be discussed through abstract binaries such as China/West, tradition/modernity, or capitalism/socialism. Today, the lives of millions of Chinese people are being transformed in very concrete ways. The spectacular rise of Chinese capitalism has brought about wholesale industrial restructuring, mass poverty and unemployment, degradation of working conditions—Wang mentions 'the slave labor conditions that have arisen in China's coastal regions in the form of contracts' (73)—drastic reduction of welfare protections, rampant corruption and nepotism, heightened divisions between city and country, crime, pollution, and other social ills. The neoliberal discourse of freedom promoted by many officials, intellectuals, and the media, cannot be set aside from these changes, but is closely linked with them. Although Wang does not put it in these terms, particular kinds of freedom are being granted to particular groups of people—the majority's freedom to sell their labour-power, the elites' freedom to exploit it. And, as Wang reminds us, such freedoms have been imposed by force, through carefully planned top-down reforms enforced through harsh state repression.

 

 


6. Wang is most critical of urban reforms that initially increased the autonomy of large state-controlled enterprises, and then led to 'closure, temporary stoppage, consolidation, or transfer and finally to changes in management rights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relations of production themselves' (50). With these changes, explains Wang, 'a significant amount of national property "legally" and illegally was transferred to the personal economic advantage of a small minority' (53), often to individual members of the political elites and their relatives. Thus, neoliberalism has been a misnomer, since 'the creation of today's market society was not the result of a sequence of spontaneous events, but rather of state interference and violence' (65).

 

 


7. Nevertheless, the author remains hopeful that China's new capitalism can be recast into a system of 'social' or 'fair' markets. Yet his turn to the state as a solution - his political critique of neoliberalism - does not sit comfortably with his own empirical critique - the crucial role of that same state in the development of China's very unfair market relations. Wang aims to provide 'a theoretical basis for the practical possibility of a democratic system of markets and a self-regulating society, as well as the fostering of popular strength' (60). But his own description of China's recent economic reforms shows that, in practice, the reintroduction of capitalism has polarized society and restricted political freedoms.

 

 


8. Wang displays the same faith in the state in his analysis of contemporary international relations. His proposal that nation-states 'organize a global force to reduce the polarization of north and south, protect the global ecology and push for a fair world order' (130) overlooks the historical class character of the nation-state, its role in protecting sectional interests and privileges, and its recourse to violence to settle the conflicts created by capitalist development. Neoliberalism, then, is also a misnomer at the global level, where the logic of capitalist competition in the present period enhances state power and sharpens its most repressive and militaristic features.

 

 


9. Most importantly, however, Wang underestimates the position of Chinese capitalism within the new international balance of forces. At one point, he recognises that 'the scale of China's economy, whether in Asia or in the world at large, has already reached a substantial level, and the logic of development may push China toward repeating the developmental logic of the economically advanced nations, thereby creating new economic conflicts' (129-30). However, Wang does not explore this possibility, and instead emphasises Asia's subordination and the continuation of Cold War arrangements under US hegemony. Yet, the Chinese experience surely proves that the state-interventionist strategy of the Cold War era succeeded in developing large parts of the periphery to the standards of the centre. The process of 'reform and opening' initiated by Deng Xiaoping after Mao's death can be understood as an extension of that same strategy by other means. That this process does not eliminate global tensions, but in fact creates newer and sharper ones, Wang does not see.

 

 


10. In an earlier work, Wang has wisely warned of the dangers of mobilizing Chinese nationalism (see Hughes, 2006: 101). In this volume, Wang continues to address this important theme, arguing that 'how to distinguish different nationalisms, how to analyze the historical conditions for nationalism, and how to reconstruct the historical tradition of internationalism in a period of globalization become the most urgent of theoretical topics' (108). However, his underestimation of China's place in the new global economic order prevents him from doing just that. Contemporary Chinese nationalism cannot be the progressive sentiment that inspired the May Fourth movement in 1919, because both China and the world have changed enormously. China is no longer a backward semi-colony fighting away predatory imperial powers. Today, she is a great power in her own right, the workshop of the world, a vast rising nation hosting the planet's largest armed forces and nurturing her own independent ambitions throughout Asia and the globe.

 

 


11. Wang believes that China cannot become a hegemon in the twenty-first century (184), an assessment he does not support through an analysis of global economic trends. At this international level, Wang abandons the method he so successfully applies to China's domestic intellectual scene - the linking of social and economic history with politics. Consequently, he overplays the strength of US hegemony and turns one-sidedly anti-American. He simplistically denounces the rise of 'a globalized military with the United States and NATO as its center' (127-8); but he does not consider that globalization might be creating new economic, political and military powers. He denounces as hyper-imperialist the US-led NATO campaign in Kosovo, when the US bombing of the Chinese embassy in Belgrade caused mass protests in several of China's cities; yet, he makes no critical mention of the modernization of the People's Liberation Army, nor offers even veiled support for Tibet's, Xinjiang's or Taiwan's right to self-determination. Instead, he calls for Asian regional unity to 'resist the political, economic, and military order of an American-led neoliberalism' (131), a project that can only embolden Chinese imperialism and exacerbate frictions with the US and other Asian powers.

 

 


12. The danger is that, like the New Enlightenment of the 1980s, the Chinese New Left could become transformed 'from a mode of ardent critical thinking into the pioneering voice of contemporary Chinese capitalism' (160-1). There has, indeed, been a rapprochement between this New Left and the current Chinese administration. President Hu Jintao and Premier Wen Jiabao have pledged to be 'close to the people' and to establish a 'harmonious society', thus acknowledging the existence of social inequalities denounced by the New Left. Similarly, this year's National People's Congress responded to the social pressures and the disenchantment with privatization that provoked many of the 87,000 'public order disturbances' recorded in 2005. A key decision of the Congress was to shelve a property rights bill. However, these initiatives need to be placed in the context of China's national modernization strategy. China's elite realises that, in order to secure the nation's status as a capitalist superpower, it needs to cultivate a politically loyal and economically stable middle class. But to create and sustain this class, it will have to compete more forcefully for a greater share of global wealth - much of which is now produced by China's poorest workers. Thus, the pursuit of political legitimacy in China entails social conflicts at both the domestic and international levels. Not surprisingly, then, Hu's and Wen's administration has been characterised by political repression, diplomatic assertiveness, and a more aggressive attitude towards Taiwan, as evidenced by the anti-secession law passed in 2005.

 

 


13. Intellectuals, of course, are a key component of China's painfully emerging middle class. Wang describes how 'the intellectuals of the 1980s were gradually transformed into experts, scholars, and professionals' (143), under the authorities' organisational and political scrutiny. His own journal Dushu is published by the state and administered by the Bureau of Journalism and Publications, as he candidly admits. In these circumstances, his call for Chinese intellectual independence from the West is misplaced. True, Chinese authors have sometimes adopted Western ideas—such as postmodernism and Fukuyama's 'end of history' thesis—uncritically. But in our increasingly globalized and competitive international environment, Sinocentrism is just as limiting as Eurocentrism. East and West, radicals need to transcend the ideological limits of their own national cultures, engaging with others around the world in search of alternatives to the conflictive international order we all live under. Addressing all past and present human cultures as part of one common world history becomes more necessary as rivalries between old and new powers raise the risk of military confrontation.

 

 


14. 'China buff', a California-based list compiler featured in amazon.com, has described Wang's book as 'over-hyped and quite boring to read'. Certainly, this is not a book written for popular consumption. Wang's essays are mainly addressed to other intellectuals, and display an elaborate, sometimes oblique, style. Readers might wonder whether a censorious climate renders this kind of style safer for China's critical intellectuals. But the themes Wang deals with are vitally important, and his first-hand account valuable and insightful. Many of us share his hope 'to transcend formalistic theory and to open up the examination of the actual relationships of history, a hope to transcend the gulf between theory and practice, and a hope that we may get beyond our various prejudices' (136). In this spirit, the publication in English of these influential essays makes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debates about China's remarkable transformation.


 

 


Paula Cerni MPhil is an independent writer. She can be contacted at paula_cerni@msn.com

 

 

 


 

Bibliography


Hughes, Christopher R. (2006) Chinese Nationalism in the Global Era. New York: Routledge.


Lardy, Nicholas R. (2005) China: The Great New Economic Challenge?, in C. Fred Bergsten (ed) The United States and the World Economy: Foreign Economic Policy for the Next Decade.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121-41, http://www.iie.com/publications/chapters_preview/3802/4iie3802.pdf.


Pocha, Jehangir S. (2005) China's New Left. New Perspectives Quarterly 22(2), http://www.digitalnpq.org/archive/2005_spring/07_pocha.html .


Ramo, Joshua Cooper (2004) The Beijing Consensus: Notes on the New Physics of Chinese Power. London: Foreign Policy Centre, http://fpc.org.uk/fsblob/244.pdf .


Shenkar, Oded (2005). The Chinese Century: The Rising Chinese Economy and Its Impact on the Global Economy, the Balance of Power, and Your Job. Upper Saddle River: Wharton School.


Wang, Chaohua (ed) (2005) One China, Many Paths. London and New York: Verso.


Yang, Dali L (2006) Economic Transformation and Its Political Discontents in China: Authoritarianism, Unequal Growth, and the Dilemmas of Political Development. Annual Review of Political Science, 9, 143-64.


Zhao, Suisheng (2004) A Nation-State by Construction: Dynamics of Modern Chinese Nationalism.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 borderlands ejournal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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