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쿵이지 주점’ 술청에 선 루쉰이 부르네
‘샤오쯔하는’(돈 쓰며 즐기는) 이들이 찾는 허우하이
뜻밖에도 루쉰의 단편소설 ‘쿵이지’를 만났네
모순 가득한 그의 무거운 행보 떠올라
‘샤오쯔’처럼 가볍게 소흥주 한잔 걸칠 수 없었네
한겨레
» 허우하이 호수가에 있는 콩이지 주점. 허우하이는 베이하이(北海)와 중국 수뇌부가 살고 있는 중난하이(中南海) 뒤쪽에 있는 호수를 가리킨다.
  기획연재 :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③

베이징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꼭 들러보고 싶던 곳이 있었다. 바로 허우하이(後海)라는 곳이다. 이른바 샤오쯔(小資)에 속하는 젊은이들이 즐겨 찾기 때문에 근자에 새롭게 부상한 곳이다. 샤오쯔란 원래 문자 그대로 소부르조아의 준말이지만 의미가 점차 변해서 요즘은 일정한 학력과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생활의 ‘격조’를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젊은이들을 지칭할 때 쓴다. 동시에 그들이 추구하는 생활방식이나 정취를 지칭하기도 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심지어 동사로도 쓰이기도 한다. 가령 샤오쯔하자!(小資一下)라고 하면 돈 좀 쓰면서 즐기자! 라는 정도의 뜻이다. 짧은 일정에 이곳저곳 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종로에서 볼 일 마치고 잠시 인사동의 찻집을 들러보는 심정으로 허우하이를 찾았다. 그래 나도 잠시 샤오쯔 좀 하자!

 

생활 격조 찾는 젊은이 ‘샤오쯔’

허우하이는 베이하이(北海)와 중국 수뇌부가 살고 있는 중난하이(中南海) 뒤쪽에 있는 호수라는 말이다. 스차하이(什刹海)라고도 하는데 다시 치엔하이(前海), 허우하이, 시하이(西海)로 나뉜다. 전체적으로 베이하이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34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상당히 커다란 호수다. 해질 무렵에 찾았는데 정말 운치가 있었다. 강추! 가서 보니 예전에 한번 와 봤던 곳이었다. 이 일대는 고궁의 뒤쪽이어서 과거엔 사실 웬만한 권력을 갖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쑨원의 부인 쏭칭링(宋慶齡), 유명한 역사학자 꿔모러(郭沫若)의 옛 집, 전형적인 쓰허위엔(四合院)으로 유명한 꽁왕푸(恭王府) 등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가서 보니 예전에 없던 술집이나 카페들이 ‘샤오쯔하게’ 호수 주변으로 꽉 들어차 있었는데 가끔 외국 관광객을 태우고 후퉁 투어를 하는 자전거 인력거가 10여대 씩 줄지어 호수 주변을 도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나도 아무 카페에나 들어가 맥주 한 잔 하면서 천천히 저 멀리 호수 너머 시산(西山)에 지는 석양을 바라볼까 하다가 그냥 걷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손님이 많지 않아 혼자 들어가기가 좀 멋쩍은데다가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호숫가를 걷다 보니 한 모퉁이에서 서민들이 한적하게 산책을 하거나 체조를 하고 있었고 또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예전에 봤던 광경인데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소박한 서민의 기운이 넘쳐나는 베이징의 정취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콩이지(孔乙己) 주점이라는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콩이지를 여기서 만나다니…. 콩이지는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루쉰의 단편소설의 제목이자 그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아닌가. 아주 짧은 작품이어서 단숨에 읽을 수 있지만 읽고 난 뒤의 쓸쓸한 여운은 아주 오래 동안 가시지 않는 그런 작품이다. 두루마기를 입고 와서도 돈이 없어 안채에 들어가 앉아서 술을 천천히 마시지 못하고 술청에 서서 마시곤 했던 몰락한 지식인 콩이지. 그는 정말 죽었을까. 그러나 아무도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이 없었던 콩이지. 루쉰은 자신이 쓴 단편소설 중에서 어느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콩이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주점의 주인은 그런 콩이지가 못내 불쌍했던 것일까. 아예 그의 이름을 딴 술집이 만든 이유는 혹 <콩이지> 보고 돈 걱정 말고 술 마시라는 뜻은 아닐까. 나중에 확인한 일이지만 이 주점의 주인은 루쉰과 동향인 베이징 대학의 중문과 출신이라고 하니 정말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베이징대 비정규직 사서 ‘마오’

» 치엔하이와 허우하이 중간에 위치한 인팅챠오(銀錠橋)에서 바라본 석양. 예전에 왕들은 이곳으로 산책을 나와 시산에 지는 석양을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베이징 10경 중의 하나다.
하여간 <콩이지>는 나로 하여금 루쉰, 그리고 다시금 마오를 올리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루쉰이 1918년 겨울에 쓴 것인데, 마오는 마침 그해 8월 후난성에서 처음으로 베이징에 올라와 스승 양창지(楊昌濟)의 소개로 11월부터 베이징대학 도서관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주된 업무는 15종의 중국과 외국 신문을 관리하고, 신문을 열람하기 위해 온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비정규직’ 일이었는데 월급은 8인위안(은원)이었다. 전문적인 연구에 따르면 당시의 1인위안은 요즘의 50위안(1995년 기준), 즉 15㎏의 쌀을 살 수 있는 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8인위안은 요새 돈으로 400위안, 대략 120㎏의 쌀을 살 수 있는 돈이다. 한편 당시 문과대 학장이었던 천두슈(陳獨秀)는 300인위안(요즘의 1만5000위안), 도서관 관장이었던 리다자오(李大釗)는 120인위안을 받았고, 얼마 뒤 겸임강사로 부임했던 루쉰은 교육부 관리이기도 했으므로 300인위안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 엄청난 월급의 양극화! 마오는 4개월 만에 그만 두었고, 루쉰은 1920년부터 베이징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므로 대학의 교정에서 두 사람은 같이 만날 수는 없었지만 루쉰이 이 작품을 쓸 당시 마오도 베이징의 회색빛 하늘 아래에 같이 있었던 것이다. 마오가 만약 베이징대학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면 중국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중국의 가장 중요한 두 거인 마오와 루쉰은 평생 만난 적은 없지만 당시 마오는 그의 동생인 저우쭈어런(周作人)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1920년 4월의 일인데 사실 5ㆍ4운동 당시에 저우쭈어런이 루쉰보다 유명했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저우쭈어런은 중국 신촌(新村)운동의 최초의 주창자였고 마오는 이 운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신촌운동은 요즘 중국에서는 추진되고 있는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 운동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이다.

 

» 위엔스카이의 얼굴이 새겨진 1914년 당시의 은(인)화 1원. 그러니까 마오는 이걸 8개 받았다는 얘기다.
이처럼 마오는 루쉰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일생을 통해 두 번 ‘만났다.’ 첫 번째는 대략 1934년 전후였는데 1931년 “매우 엄중하고도 일관된 우경 기회주의”라는 이유로 당의 수뇌부에서 배제당한 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고독 속에서 루쉰을 ‘만났다.’ 한번은 펑쉬에펑(馮雪峰)이 마오의 시를 가져다가 상하이에 있는 루쉰에게 보여준 일이 있었다. 당시 펑쉬에펑은 상하이와 루이진을 오가며 중공(중국공산당)의 연락책 노릇을 하고 있었다. 루쉰은 이 시를 보고 산적 두목(山大王)의 시 같다고 평했는데 펑이 마오에게 다시 이런 평가를 전하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마오는 정말로 얼마 있다가 준의회의(1935)를 통해 중공의 ‘산적 두목’이 되었다. 마오는 루쉰이 서거한 다음 해에 루쉰을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 루쉰의 가치는 내가 보기에 중국의 최고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봉건사회의 성인이고 루쉰은 현대중국의 성인이다.”

 

문혁때 루쉰만 자유롭게 읽혀

일찍이 루쉰은 ‘현대중국의 공자’라는 글에서 “공자는 중국에서 권력자들에 의해서 떠받들어졌고 그 권력자나 권력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성인이었지 일반 민중과는 매우 인연이 먼 존재였다”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런 그가 마오로부터 이런 ‘공자’라는 평가를 받은 것은 매우 역설적이었다. 성인 콤플렉스를 가졌던 마오의 속마음이 루쉰에 대한 평가 속에 드러난 것은 아니었을까.

 

두 번째의 ‘만남’은 문혁 전후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전후에 마오는 대약진운동의 실패, 소련 기술자의 철수, 당내의 비판 등 내우외환에 직면해 있었다. 사면초가 속에서 다시 루쉰을 ‘만난다.’ 그는 당시 중국을 방문한 일본인들에게 “광대한 천지와 연결된 호탕한 마음속 심사, 소리 없는 가운데 요란한 천둥소리 들리네(心事浩茫連廣宇 于無聲處聽驚雷)”라는 루쉰의 시로 이런 자신의 마음속 심사를 드러내었다. 얼마 뒤 마오는 문혁이라는 ‘천둥소리’로 중국을 뒤흔들었다. 그렇지만 루쉰은 문혁의 와중에서 왜곡된다. “루쉰은 위대한 문학자일 뿐만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혁명가다”라고 널리 선전되었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책은 문혁기간에 마오의 어록 외에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던 유일한 책이었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그러나 그런 만큼 풍부하고 모순으로 가득찬 루쉰의 사상이 지나치게 단순하게 신성화되고 권력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코 명랑하지 않은 루쉰의 글은 “아주 오래되었으면서도 방대한 중국의 문화가 근대적 전환기에 펼쳤던 무거운 행보를 침울하게 펼쳐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하고, 또 언제 읽어도 신선하다. 이는 아마도 그가 결코 선구자가 아니라 역사적 중간물임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만 길에는 하나의 종점이 있고,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어서 누가 가르쳐줄 필요도 없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다.”

 

루쉰에 중독되었기 때문일까. 샤오쯔들처럼 가볍게 콩이지 술집에 들어가 회향콩 안주에 소흥주 한 잔 마시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후회는 없었다. 석양에 물든 호숫가가 너무 아름다웠으므로….

 


바로잡습니다 지난번 2회째 글 가운데 ‘로스 테릴이 마오를 호랑이 기운(호기)와 원숭이의 기질(원기)를 동시에 지닌 복잡한 인물로 그렸다’는 부분이 나오는데, 원숭이 기질 뒤의 괄호속 한자는 원숭이 후자를 쓴 ‘후기’가 돼야 맞습니다. 편집과정의 실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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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흘러가버린 일 ‘마오’는 거슬러 오는가

 

‘영웅을 꼽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 생전 마오는 그렇게 읊었건만
천안문 초상화 앞 인파는 ‘어제’를 본다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 시대 중국인들은 왜 마오를 품는가
거대한 중국의 신체에 스며든 작은 영웅 세번의 마오 열풍 거
한겨레
» 로스 테릴이 쓴 <마오쩌둥전>.
  기획연재 :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②

웬지 모르게 베이징에 갈 때마다 들러보게 되는 곳이 천안문이다.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는 마오쩌뚱(이하 마오로 칭한다)의 초상화.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지 천안문의 마오 초상 앞에는 중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자기 손으로 일으켜 세운 나라를 손오공이 천궁을 소란시키듯이 대동란 속에 빠뜨리기도 했던 마오. 일평생 투쟁을 좋아해 “하늘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고 땅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무궁하며 인간과 싸우니 그 즐거움이 더더욱 무궁하다”고 설파했던 그가 저렇게 변함없이 고요히 천안문에 수십 년에 걸려 있는 것이 ‘달나라의 장난’ 같기도 하다.

 

“마오하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주변에 있는 아는 중국인에게 물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저는 우선 능력이 대단하고, 사상이 있으며, 그리고 문학적 재능이 빼어났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론 말년에 과오는 저질렀지만 그래도 공적이 많지요.“라는 예의 상투적인 평가. 마오에 대해 관심이 있냐는 질문에 “그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다”고 대답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이와 비슷하게 대답하리라.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사범학교 출신의 일개 반지식인(半知識人)이었던 그가 혁명에 뛰어든 지 불과 20여년 만에 그 거대한 통치세력을 타도하고 신중국을 건설했으니 그는 참으로 대단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마오 혼자서 한 일은 아니지만 마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조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자와 달리 처음으로 농민을 혁명의 중심으로 내세워 혁명에 성공하기도 하고, “뒤집어엎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造反有理)”라는 반항의 철학을 일생 견지했으니 그에겐 남과 다른 확실한 사상이 있었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적 시인이기도 하였다. “애석하게도 진시황, 한무제는 문화가 조금 부족했고, 당태종 송태조는 시재(詩才)가 조금 무뎠더라. 일세의 영웅 징기스칸도 다만 활쏘기만 잘하였을 뿐. 모두가 흘러가버린 일, 영웅을 꼽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라는 마오의 시가 언론에 실리자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일개 무장에 불과한 존재로 보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손오공처럼 천하를 쥐락펴락




» 베이징 천안문 광장의 마오쩌둥 대형 초상화를 배경으로 서 있는 중국 신세대 여성. 모두가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 시대가 됐어도 마오에 대한 열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른다. 베이징/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그렇지만 그야말로 이 모두가 지나간 일이 아닌가. 지금은 개혁 개방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30년이 다 되어가는, 모두가 돈을 향해 달려가는 “굿바이 마오”의 시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중국인들은 왜 마오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 하긴 부시도 마오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가 마오의 전기를 읽고 동독 출신의 독일 총리에게 추천까지 했다는 소식이 들리니 말이다. 최근엔 그 책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바야흐로 마오에 대한 관심은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베이징에 갈 때마다 들르곤 하는 서점에서 늘상 느끼는 일이지만 그에 관한 책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많은 중국인이 그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전혀 책을 읽을 것 같지 않은 ‘아큐’ 같이 생긴 분이 진지하게 그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을 보고 감탄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갔을 때에는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하나는 일본 관련 서적이 하나의 코너를 이루고 있을 정도로 많이 출판되어 관심을 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 일본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동북아 정세의 미묘한 변화 등으로 중국사회는 전에 없이 일본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또 한 가지는 붉은 표지의 마오의 전기가 당당히 베스트셀러에 오른 사실. 이 책은 현재 하버드대학 아시아센터 연구원으로 있는 호주계 미국인인 로스 테릴이라는 사람이 쓴 전기였다. 이건 중국인민대학 출판부에서 마오에 관한 외국의 유명 연구서를 총서의 형태로 펴낸 시리즈 중의 하나였다. 베스트셀러를 겨냥해서 기획 출판된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출판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미 5만부가 팔려 나갔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원래 1980년에 출판되었고 중국에서는 이미 1989년에 허베이 인민출판사에서 번역되어 12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물론 이번에 새롭게 뜬 책은 마오 이후 진행된 중국과 세계의 변화, 그리고 새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된 마오에 관한 자료를 반영한 스탠포드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개정판(1999)을 새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미 120만부나 팔린 책이 다시금 출판되고 또 출판된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5만부 넘게 팔린 일은 아무리 인구가 많은 중국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 2003년 12월26일은 마오 탄생 110돌, 올해는 타계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마오 열풍이 다시 불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그의 고향 후난성 샤오산에서 열린 마오 탄생 기념 행사 장면.
로스 테릴은 이 책에서 마오를 호랑이의 기운(虎氣)과 원숭이의 기질(猿氣)을 동시에 지닌 매우 복잡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마오는 한때 그의 아내 장칭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에겐 호랑이의 기운(虎氣)과 원숭이의 기운(猿氣)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모티브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호랑이의 기운을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는 호방하고 장중한 기세로, 원숭이의 기운을 B 지점에 도달하려는 원망(願望)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는 태도로 해석, 마오를 모순으로 가득한 아주 복잡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사실 마오는 어릴 적부터 <서유기>를 좋아했고 손오공을 높이 평가했다. 아무튼 이 책이 중국의 독서시장에서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은 마오의 열기가 새롭게 고조되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마오 전기 개정판 또 베스트셀러

돌이켜보면 마오 사후에 세 번의 마오 열기가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1980년대 후반에 일어났다.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는 86년에 열기가 일기 시작하여 88년에는 상당한 기세를 이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979년에 번역된 스튜어트 슈람이 쓴 <마오쩌뚱>이 내부자료로 번역된 것이 바로 이 해였다. 로스 테릴의 마오 전기가 처음 번역된 것도 이러한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해엔 처음으로 마오를 신이 아닌 보통의 인간으로 묘사한 취엔옌츠(權延赤)의 <신단(神壇)에서 내려온 마오쩌뚱>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두 번째 마오 열기는 마오 탄생 100주년(1993년)을 즈음한 시기에 불었는데 이번에는 마오에 대한 찬송가라고 할 수 있는 ‘홍태양(紅太陽)’이라는 카세트 테이프가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불과 한 달 사이에 무려 100만개가 팔렸는데 이 기록은 현재까지 그 어떤 가수도 깨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택시 안에 무사고를 기원하는 부적으로 마오의 사진이 걸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다. 마오에 관한 영화도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역설적인 것은 마오가 농민들과 택시 기사들 사이에서 다시금 신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우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사실이다.

 

마오 탄생 110주년이 되는 2003년에 달아오른 세 번째 마오 열기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분야에서 일어났다. 상업적 측면이 개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특기한 만한 일이다. 순금으로 된 마오의 시집이 출간되기도 하고 수천만 원에 달하는 마오의 금상이 주조되어 수집가들의 애장품으로 혹은 뇌물로 환영을 받기도 했었다.

 

마침 올해는 마오 서거 30주년이 되는 해. 중국의 언론은 이 굵직하고도 중량감이 있는 마오 전기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일이 또 다른 마오 열기의 징조가 아닐까 주목하고 있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최근 급속히 불거지고 있는 빈부격차가 마오에 대한 향수를 부채질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생전 단지 두 사람 반(충성스런 기밀담당 비서 두 명과 장칭의 반)만을 다스릴 수 있다고 농담반 진담반의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었던 마오. 그런 마오가 사후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록새록 주목받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마오에 관한 책을 노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를 회고하기 위해서 읽고 젊은이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읽는다고 한다. 그들은 마오의 시대를 직접 경험하거나 혹은 그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라왔다. 그렇기 때문에 마오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각자 자신들의 마음 속 깊은 소망을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마오의 열기는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기상도(氣象圖)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중국인들이 여전히 마오에 관심이 많은 것은, 그는 갔지만 그의 정신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신체에 스며들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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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부산 기장의 어느 포구에서 함께 기울였던 술잔의 기억이 세월에 잊혀질 즈음, 황 선생님과의 조우는 뜻하지 않는 곳에서 일어났다. 한겨레 북리뷰 섹션 <18˚>에 새로 실린 연재물에 반가운 이름이 있었던 것. 글에 묻어나는 선생님의 정치적 견해나 이념적 지향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중국철학(선생님은 처음으로 한국에서 풍우란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쓴 분이다)에 기반한 탄탄한 내공으로, 선생님은 여전히 좋은 글을 쓰고 계신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아드님처럼, 선생님 역시 건필하시길 바란다. [UK]

 

 

루쉰은 중국 등짝 후려친 ‘세계화’ 보았을까

 

베이징역 근처 세계공원을 찾았다 50개국 명소의 ‘짝퉁’ 100여개 모아둔 곳
‘먹가이버 칼’처럼 조악하지만 세계를 복제한다는 건 가히 중국적인 생각
‘가짜를 진짜로 여길 때 진짜 또한 가짜’ 홍루몽의 ‘태허환경’ 속에 빠지네
한겨레
» 세계 50개국 100여 곳 문화유적과 자연경관 ‘짝퉁’들을 모아 놓은 중국 베이징 세계공원. 2001년 9.11 자폭공격으로 무너져 지금은 없어진 뉴욕 맨해턴의 세계무역기구 쌍둥이 빌딩이 여기에선 건재하다. 물론 축소판이지만, 그 뒤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보인다.
  기획연재 :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①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에 이어 황희경 영산대 교수의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이 ‘와다 하루키 회고록’과 함께 격주로 번갈아 연재됩니다. 중국의 현대사상사와 지식인 담론에 각별히 주목하면서 고대중국을 포함한 중국문화 전반에 대해 호기심을 번뜩이고 있는 황 교수의 글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중국의 실체에 깊숙이 접근해갈 것입니다.

 

베이징 역 근방에서 744번 버스를 타고 찾아 나선 곳은 제왕의 기운이 충만한 고궁이나 천안문 광장도 아니고 소박한 기풍이 넘쳐나는 후퉁(골목)도 아닌 세계공원이었다. 아침부터 여행 안내책자에도 잘 나오지 않는 곳을 굳이 찾아갈 생각을 한 것은 그 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얼마 전에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영화의 제목도 ‘세계’였다. 그것은 이른바 ‘지하 영화’(underground film)를 대표하는 지아장커의 작품으로, 세계공원에서 경비원과 댄서로 일하는 두 남녀의 음울한 애정 이야기를 통해 급속한 현대화의 길을 걷고 있는 현대 중국이 맞닥뜨린 곤경을 우화적으로 그려낸 영화다. 아주 인상 깊게 보았는데 듣자하니 이번에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아장커는 지난해 해금되어 처음으로 ‘지상’의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고 한다. 아무튼 나에게 무한경쟁과 휴식을 연상시키는, 그래서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세계와 공원이 만난 세계공원을 찾게 만든 것은 그의 ‘세계’였다. 또한 언제부터인지 세계화니 글로벌 스탠더드니 세계무역기구니 온통 세계가 문제되고 있으니 이 ‘세계’를 알긴 알아야 했다.

 

초행길인지라 한 시간 넘는 시간이지만 지루한 줄 모르고 차창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베이징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했다. 와호장룡의 도시답게 베이징은 ‘세계’를 자신의 서남쪽 구석에 숨겨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예전에 이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관원에 와본 기억이 떠올랐다. 대관원은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홍루몽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살던 곳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리 가짜(미니어처)라고는 하지만 ‘세계’를 복제해놓다니 그 발상이 가히 중국적이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일찍이 천하를 자임했던 청 왕조 때에 원명원 안에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서 서양루(西洋樓)라는 건축물을 만들어 놓은 적도 있었다. 아편전쟁 때 영불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잔해만 뒹굴고 있는 폐허가 되었지만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있다고 한다.

 

천하 개념 바꿔서라도 천하 유지




» 베이징 천안문 광장.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 양쪽에는 ‘세계인민 대단결 만세’ ‘중화인민공화국 만세’라는 구호판이 걸려 있다.

 

세계공원은 46만7천㎡에 달하는 면적에 거의 50개 국가의 100여 곳의 유명한 문화유적과 자연경관의 ‘짝퉁’을 모아놓은 곳인 데 1993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에펠탑과 개선문, 영국의 빅벤, 런던 브리지, 오스트리아의 슈테판 대성당,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러시아의 붉은 광장, 그리고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등 누구나 가서 한번쯤 보고 싶은 것들은 모두 있었다. 심지어 9.11로 사라진 뉴욕 맨해턴의 쌍둥이빌딩도 있었고 이라크의 바빌론문(이슈타르 여신의 문)도 있었다.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누는 아이 동상 같은 것은 작기 때문에 실물 크기 그대로 복제해놓았지만, 에펠탑은 10분의 1로,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은 25분의 1로 축소해놓는 등 축소의 비율은 일정하지 않았다. 에펠탑이나 노트르담 사원과 같은 것들은 꽤 근사했지만 대체로 조악하기가 ‘먹가이버’ 칼 수준이 많았다. 하지만 조악하나마 이렇게 ‘세계’를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대면할 생각을 하는 것이 중국이 아닐까, 아니 중국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하노라니 도리어 흥미롭게 여겨졌다. 전통중국은 늘상 천하를 자임하다가 새롭게 강력한 타자가 나타나면 천하 개념의 조정을 통해 그 천하를 유지해오지 않았던가. 어떤 이는 중국을 “민족국가의 자칭한 하나의 문명”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짝퉁이라지만 언제 다시 이렇게 ‘세계’를 한 눈에 볼 기회가 있으랴 싶어 하나 하나 살펴보니 모르는 것들도 많았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모두 유명한 것들이었다. 역시 세계는 넓었다. 나 자신 지구 촌놈임을 새삼 깨달았다. 이른 봄의 주말이었기에 유람객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아주 적지도 않았다. 외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가짜 오대양 육대주이긴 하지만 이곳을 거닐자니 도리어 “가짜를 진짜로 여길 때 진짜 또한 가짜이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길 때 있는 것 역시 없는 것이니라”의 홍루몽의 ‘태허환경(太虛幻境)’에 빠져 진짜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그리고 세계가 온통 주목하고 있는 중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끝은 어디일까.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상념을 하면서 저 아프리카의 이집트에서 그리스 로마를 거쳐 유럽을 돌아보고 다시 북미대륙으로 갔다가 아시아로 돌아오는데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나에게 세계공원은 식전경이었다. 이제 점심을 해야 했다. 아무리 대충이지만 반나절 만에 세계를 훑자니 배가 고팠다.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공원을 나와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대충 지저분하고 왁자지껄한 아주 전형적인 중국의 보통 식당이었다. 물만두를 시켜놓고 기다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변했고 또 변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이 중국이라고. “유감스럽게도 중국에서는 변화가 대단히 쉽지 않습니다. 책상을 하나 옮긴다든지 난로를 하나 바꾸는 일조차도 피를 흘리다시피 해야 합니다. 더구나 피를 보고 나서도 옮기거나 바꾸는 일을 꼭 성사시킨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은 아주 커다란 채찍이 등짝을 후려치지 않는 한 자기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채찍은 언젠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건 별 문제이지만 틀림없이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라고 루쉰은 말한 적이 있다. 베이징 역에서 마주친 피곤에 쩐 민꽁(民工: 대도시로 유입되어 각종 노무에 종사하는 농민)들의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변두리로 접어들면서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옛 모습들 때문인지 모르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쉰은 다시 살아 돌아와서 격변하는 중국을 목도한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세계화의 채찍이 중국의 등짝을 후려쳤기 때문에 이제 변하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변치 않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과연 변하는 것은 무엇이며 변치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편전쟁 패한 뒤 열국 자각

천하를 자임해 왔던 중국. 그 중심에 문화적인 중국이 있고 주변에 번국(藩國)이나 교화 대상인 이른바 네 오랑캐 즉 남만(南蠻) 북적(北狄) 동이(東夷) 서융(西戎)이 있다는 천하관을 견지해온 나라. 어느 나라건 자기중심적으로 세계를 묘사하기 마련이지만 중국의 이러한 천하관 혹은 화이관념(華夷觀念)은 단순한 허장성세에 그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지리적 실체감을 동반한 것이었기에 상당히 강고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념은 서양이라는 강력한 타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아편전쟁에서의 참담한 패배는 중국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전통적인 천하관에 안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천하는커녕 열국 중에 하나의 나라, 그것도 강한 나라가 아님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했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이제 근대적 민족국가로 거듭나야 했다. 하지만 중국의 현대화란 루시앙 파이(Lucien Pye)의 말처럼 거대한 하나의 문명체계를 민족국가인 것처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중국은 20세기에 신해혁명, 국민혁명, 공산혁명, 문화대혁명 등 많은 혁명을 겪어야 했으며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을 치러야 했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보통국가’였다면 감내할 수 없을 이러한 엄청난 격동을 수용해냈다는 점에서 중국은 크고 넓은 나라다. 이것은 단순히 땅덩어리가 넓고 큰 문제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저력이 있었기에 개혁 개방 20여년만에 세계가 주목하는 급부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편 경제 개혁의 와중에서 세계로 진입한(2001년에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것을 중국에서는 ‘입세=入世’라고 부른다) 중국은 만리장성도 날려버릴 세계화의 거센 바람 앞에서 사회적 분화와 갖가지 모순으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돌아오는 길에 천안문 앞을 지나면서 차창에서 마주친 마오쩌둥 초상화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와 ‘세계인민대단결’이라는 편액 사이에서 말없이 중국과 세계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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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진태원(서울대 철학과 강사)



국가를 위협하는 위험들의 원인은 항상 외부의 적보다는 시민들이다. 왜냐하면 좋은 시민들이란 드물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1. 서론: 정치철학자로서 스피노자

 


  국내에서 스피노자는 대개 형이상학로, 곧 ꡔ윤리학ꡕ이라는 대표작으로 집약되는 방대한 형이상학적인 체계를 구축한 철학자로 간주된다. ꡔ윤리학ꡕ이 스피노자의 철학 체계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감안한다면, 그리고 이 저서가 이후 철학사․지성사에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당연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스피노자의 ꡔ윤리학ꡕ에 대한 배타적 관심 때문에 그의 철학의 다른 부분들이 무시되거나 간과되는 일이 생기곤 하는데, 이는 특히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 대해 사실이다. 스피노자는 그가 남긴 매우 적은 수의 저작들 중에서 정치학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남겼지만, 사람들은 대개 그가 정치학에 관한 저작들을 남겼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학에 관한 그의 저작들이 그의 체계에서 부차적인 의미만 지니고 있거나 그의 다른 저작, 특히 ꡔ윤리학ꡕ에 대해 매우 종속적이고 파생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면 이러한 무관심이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 그의 정치학 저술은 본질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스피노자 정치학에 관한 연구들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어떤 의미에서든 정당한 태도로 평가하기 어렵다. 

 

 

  사실 지난 1960년대 이후 르네상스를 맞고 있는 스피노자 연구1)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업적을 배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정치철학에 관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인간학과 정치철학이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외재적이거나 부수적인 논의가 아니라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스피노자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알렉상드르 마트롱의 ꡔ스피노자에서 개인과 공동체ꡕ(Matheron 1969) 이후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네그리나 프랑스의 에티엔 발리바르, 앙드레 토젤André Tosel, 피에르-프랑수아 모로Pierre-François Moreau, 로랑 보베Laurent Bové, 샤를르 라몽Charles Ramond 또는 미국의 리 라이스Lee C. Rice 같은 연구자들은 주목할 만한 연구들을 통해 스피노자 정치철학의 새로운 면모를 부각시켜주었다. 뿐만 아니라 루이 알튀세르나 질 들뢰즈, 또는 발리바르나 네그리 같은 철학자들은 독창적인 작업을 바탕으로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인간학과 정치철학이 비단 철학사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새롭게 사고하는 데도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스피노자의 정치학 저작들, 곧 ꡔ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ꡕ(1670)과 ꡔ정치론Tractatus Politicusꡕ(1676-77)에 대한 연구는 국내 철학계가 하루빨리 메워야 할 중요한 공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우리가 이 글에서 특별히 다뤄보려고 하는 것은 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이 수용되고 변용되고 해체되는 양상들에 대한 검토이다.

 

 

  스피노자의 정치학 저술들에 관해 제기되는 주요한 질문들 중 하나는 두 저작이 보여주는 명시적인 차이에 관한 것이다2). 그 동안 여러 주석가들이 이 점을 지적해왔는데, 예컨대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까지 한다. “스피노자의 죽음 때문에 미완성으로 남은 ꡔ정치론ꡕ(1676-1677)과 ꡔ신학정치론ꡕ(1670) 사이에는 몇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가 변화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Balibar 1997a, p. 63) 실제로 두 저작 사이에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존재한다. 우선 스타일의 차이가 있다. ꡔ신학정치론ꡕ은 당대의 네덜란드 정세에서 오란여Willem d'Orange 공(公)을 중심으로 한 군주정의 지지자들과 칼뱅주의 신학자들의 공모에 맞서 드 비트de Witt 형제를 중심으로 한 공화파의 정치적 노선을 지지하고 이를 내재적으로 교정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저술되었다. 따라서 ꡔ신학정치론ꡕ은 엄밀한 의미의 연역적 질서에 따르기보다는 당대의 지식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역사적 사례들(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사, 특히 히브리 국가의 역사)이나 실천적 효용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반면 ꡔ정치론ꡕ은 ꡔ윤리학ꡕ처럼 엄격한 연역적 질서에 따라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인간 본성 및 자연권에 관한 논의에서부터 국가의 본성에 대한 논의, 군주정과 귀족정, 민주정 같은 정체들의 유형에 관한 상세한 논의들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질서에 따라 서술되고 있다. 

 

 

  하지만 두 저작의 중요한 이론적 차이점은 무엇보다도 계약론의 문제와 관련된다. ꡔ신학정치론ꡕ, 특히 16장 이하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는 정치학에 관한 논의들은 명시적으로 사회계약론이라는 이론적 틀을 차용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반면 ꡔ정치론ꡕ에서는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ꡔ정치론ꡕ에서 계약contractus이라는 용어가 단 한 차례만 사용되고 있고(TP 4장 6절)3) 22번 사용되고 있는 “양도하다transfero”라는 단어(TP 3장 3절; 4장 6절; 6장 8절, 14절; 7장 2절, 5절, 9절, 14절, 17절, 23절, 26절; 8장 3절, 17절) 역시 사회계약론과는 달리 국가의 창설이나 설립이라는 의미로는 전혀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를 잘 엿볼 수 있다.4)   

 

 

  사회계약론의 부재와 현존 여부가 두 저작의 이론적 차이점을 측정하기 위한 주요 기준이 되는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사회계약론은 주지하다시피 그로티우스와 홉스에서부터 루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시 현대에 이르러 존 롤즈 등에 의해 복권되기까지 근대 정치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이론적 모체 중 하나로 기능해왔다5). 따라서 사회계약론이 ꡔ신학정치론ꡕ에는 현존하는 반면, ꡔ정치론ꡕ에는 부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근대 정치철학, 특히 자유주의 전통의 정치철학과 관련하여 스피노자가 어떤 위치에 있고 (또 스피노자가 이러한 사상 노선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었는지) 평가해볼 수 있는 좋은 척도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스피노자가 홉스의 정치철학을 수용․변용하고 해체하는 양상에 관한 문제다. 스피노자 당대의 네덜란드 지식인들, 특히 반(反)칼뱅주의와 반(反)군주정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드 비트 형제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던) 지식인들에게 홉스의 정치철학은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작들은 네덜란드로 신속히 소개되고 널리 논의되었다6). 스피노자 역시 홉스의 정치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정치철학의 상당 부분은 홉스의 정치철학을 수용하고 이를 내재적으로 교정하려는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Lazzeri 1998을 참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홉스가 이론적으로 발명해낸 사회계약론을, 스피노자가 ꡔ신학정치론ꡕ에서는 (비록 비판적으로 변형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명시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가, 몇년 뒤 ꡔ정치론ꡕ에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충분히 주목해볼 만한 이론적 가치가 있다.

 

 

  더 나아가 사회계약론의 존재 유무에 관한 문제는 자유주의 정치철학 전통에 대한, 또는 홉스의 정치철학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정치철학, 더 나아가 그의 철학 전체의 전개과정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한 가지 기준을 제공해준다. 사실 마트롱 같은 대표적인 스피노자 연구자는 ꡔ신학정치론ꡕ에서 ꡔ정치론ꡕ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해 “진화/발전évolu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Matheron 1990), 네그리 역시 ꡔ정치론ꡕ에서 스피노자의 정치학 및 그의 철학 체계 전체의 이론적 기획(그가 ‘구성constitution’의 기획이라고 부르는)이 가장 완성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고 평가한다(Negri 1990; 1994 참조). 그리고 그밖의 많은 연구자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ꡔ신학정치론ꡕ에서 ꡔ정치론ꡕ으로 나아가는 시간적 과정에서 스피노자의 정치학과 철학이 좀더 정련되고 성숙해졌다는 데 대해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이 몇년의 기간 동안 중요한 이론적 변화 및 발전을 이룩했다는 데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일치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7)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스피노자가 ꡔ신학정치론ꡕ에서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어떤 식으로 수용하고 있고, 또 이를 어떻게 변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결국 어떤 이유 때문에 이를 해체하게 되는지 검토해보는 일이 필수적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바로 이것인데, 우리의 논의는 세 가지 단계에 따라 진행될 것이다. 먼저 우리는 홉스 사회계약론의 요소들을 살펴볼 생각인데, 특히 그의 자연상태 개념과 계약의 절차, 그리고 권위부여하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주권적 권력의 구성에 관해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그의 계약론은 인공주의 또는 ‘법률주의juridisme’(Terrel 1994; 2001을 참조)에 기초하고 있음이 밝혀질 것이며, 이러한 인공주의의 이론적 목표(중 하나)는 다중multitudo을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데 있다는 점이 해명될 것이다. 그 다음 우리는 ꡔ신학정치론ꡕ에서 제시되고 있는 계약론의 형식이 홉스의 계약론과 매우 상이하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이 논의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질 텐데, 우선 ꡔ신학정치론ꡕ 16장에 나타나는 스피노자의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이 홉스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볼 생각이다. 이 논의는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만으로는 왜 스피노자가 홉스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ꡔ신학정치론ꡕ에서 사회계약론의 틀을 채택하고 있는지 제대로 해명이 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두번째로 17-18장에 나타나는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스피노자에게 계약은 정치적 계약과 종교적 계약의 이중적 형식을 띠고 있고, 둘째, 그의 계약론은 국가의 원초적 토대에 관한 허구적 계약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계약에 관한 것임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이처럼 홉스의 계약론을 변형해서 활용함으로써 보여주려는 것은 법적 제도화의 조건으로서 다중을 규율하는 문제임이 해명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 우리는 ꡔ신학정치론ꡕ을 특징짓는 비관적 현실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이론적 요소들이 ꡔ윤리학ꡕ과 ꡔ정치론ꡕ을 통해 어떻게 전개되는지 지적하면서 이 글을 끝마칠 것이다.

 



2. 홉스 사회계약론의 요소들


  근대 사회계약론은 세 가지의 이론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자연적 존재조건으로서 자연상태라는 병리적 상황, 또는 반사회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둘째, 사회계약론은 이러한 병리적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지, 이를 통해 어떻게 국가라는 인공적 질서를 구성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이론을 포함한다. 이것이 바로 계약의 도출과 체결에 관한 이론이다. 셋째, 사회계약론은 또한 이렇게 해서 구성된 국가의 권력과 제도의 체계에 관한 이론, 곧 주권에 관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다. 홉스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회계약론에 관한 최초의 이론가, 또는 한 홉스 연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계약이론의 발명가”(Terrel 2001, p. 135)로 간주될 수 있다. 방금 지적한 사회계약론의 세 가지 계기에 따를 경우 이는 다음과 같이 해명될 수 있다.

 

 

  우선 홉스는 자연상태에 관한 최초의 이론가라는 점을 들 수 있다. 홉스 이전에 그로티우스의 저작에서 계약에 관한 논의가 엿보이고, 장 보댕의 저작에서 근대적인 주권 개념의 단초가 마련되지만, 자연상태라는 개념은 홉스에 의해 비로소 철학적․정치적 개념으로 등장한다8). 자연상태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자연적 실존에 함축되어 있는 병리적 조건이 해명될 수 있고, 그리하여 (자기보존이라는 인간학적 공리와 결부되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곧 계약을 통해 사회상태 또는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인간학적․실존적 과제라는 점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연상태 개념은 사회계약론의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가 된다. 

 

 

  자연상태 개념이 지니는 중요한 의의는 이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철학에서 나타나는 정치사상의 핵심 원리로서 인간의 자연적 사회성이라는 관념과 단절했다는 점에 있다. 사실 홉스는 1642년 처음으로 출간된 ꡔ시민에 대하여De Civeꡕ 서문에서부터 자신의 정치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지속되어온 정치철학의 원리들9)을 과학적으로 개조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그 자신이 기하학적 방법mos geometricus이라고 부르는 근대 과학의 방법을 채택하여 “시민철학(또는 정치철학)civil philosophy”을 구축하고자 했다10). 따라서 목적론에 따라 위계화된 우주론적 질서에 근거하고 있는 자연적 사회성이라는 관념(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로서의 인간이라는 규정에서 유래한다)은 일체의 목적론을 배제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출발하는 홉스,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근대 정치철학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홉스는 이러한 자연적 사회성이라는 관념 대신 자연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는 고립된 개인들이 살아가는 자연상태라는 가설적 조건에서부터 자신의 정치철학적 논의를 시작한다. 홉스가 그리고 있는 이 자연상태는 몇 가지의 주목할 만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11). 첫째, 자연상태는 모든 개인이 모든 사물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는 상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자연적 불평등을 전제했던 것과 달리 홉스에게 인간은 본성적으로 평등한 존재이며, 각 개인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이나 능력을 동원할 권리 또는 자유를 지니고 있다. 둘째, 이처럼 자연상태에서는 각각의 개인이 동등하게 절대적인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기 때문에, 공동의 법률이나 규약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것이 정의롭고 부정의한지 판단해줄 수 있는 공통의 척도나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과 정의, 불의를 판단하고 이에 따라 행위하게 된다.

 

 

  홉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연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상태로 특징짓고 있다. 자연상태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첫째, 자연상태가 희소성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곧 생존을 위한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각자는 불가피하게 경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홉스가 “공포” 또는 “불신 내지는 확신의 결여diffidence”라고 부르는 정념도 이것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홉스가 말하는 불신 내지는 확신의 결여는, 자원이 결핍되어 있고 객관적인 안전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각자가 언제 다른 사람이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태를 가리킨다. 비록 지금 내가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고 피해도 입지 않고 있지만 나는 언제 어디서든 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 있으며, 이 공격이 치명적인 피해, 곧 죽음을 야기시킬 경우 나는 그에게 반격할 수도 없다. 따라서 불신 내지는 확신의 결여에 빠져 있는 자연상태의 인간에게 최선의 행동방식은 적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된다12). 마지막으로 “헛된 공명심vain glory”이나 “자부심pride” 역시 사람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겨 평화를 위협하고 전쟁상태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홉스를 사회계약론의 발명가로 볼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그가 계약이론을 고안해냈다는 데 있다. 계약이라는 관념 자체는 홉스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를 통해 사회의 성립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존재했지만13), 홉스는 사회계약을, 자연상태와의 전면적인 단절을 통해 인위적으로 시민사회 또는 국가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상가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계약에 대한 관념에 따라 지레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홉스의 계약 개념은 일의적이지 않으며, 계약의 절차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 먼저 홉스는 계약과 관련된 몇 가지 용어들을 구분하고 있다(EL 1부 15장, DC 2장, L 14장 참조). 홉스는 계약contractus/contract을 매우 간결하게 정의하고 있다. “권리의 상호 양도가 사람들이 계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DC 2장 9절; L 14장 9절, p. 82) 이에 비해 홉스가 “협정pactum/pact” 또는 “신약(信約)covenant”14)이라고 부르는 것은 권리의 일방적인 양도로 특징지어진다. “계약자들 중 한쪽이 계약된 것을 이행하고 다른 한쪽이 일정한 기간 이후에 자기편의 [약속을] 이행하도록 남겨둘 때(그리고 그 동안 그를 신뢰할 때), 이행자 편에서 보면 이 계약은 협정 또는 신약이라 불린다.”(L 같은 곳) 또는 홉스는 ꡔ법의 원리ꡕ 같은 곳에서는 이를 좀더 세분해서 말하고 있다. 곧 1) 계약의 두 당사자가 현재 계약의 내용을 이행하는 경우가 있고, 2) 한 당사자는 계약 내용을 즉각 이행하고 다른 한 쪽은 나중에 이행하기로 약속만 해두는 경우가 있으며, 3) 두 당사자 모두 현재 계약 내용을 이행하지 않고 나중에 이행하기로 약속하는 경우가 있다(EL 1부 15장 8-9절). 이 세 가지 경우 중 첫번째 경우가 홉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계약에 해당하고, 나머지 두 경우는 협정 또는 신약에 해당한다15).

 

 

  계약의 절차 역시 단선적이지 않다16). 홉스는 두 가지의 절차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첫번째 절차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맺어지는 “예비적 계약preliminary contract”으로서, 이는 자연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자연상태에 만연해있는 갈등과 위험, 곧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처한 개인들은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욕구, 곧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 홉스는 바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제1 자연법이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 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을 수 없을 때에는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과 유익을 추구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성의 계율 또는 일반 규칙이다. 이 규칙의 첫번째 부분은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따르라는 자연의 첫번째 근본적인 율법을 포함한다. 두번째 부분은 자연권의 요약으로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보호하라는 것이다.”(L 14장 4절, p. 80―강조는 홉스)17) 그리고 이 제1 자연법에 뒤이어 평화를 달성하고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구체적 지침으로서 제2 자연법이 도출된다. “평화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모든 것에 대한 이 권리[곧 자연권]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꺼이 포기해야 하며, 그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허용한 자유만큼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허용한 자유에 만족해야 한다.”(L 같은 곳―강조는 홉스) 이러한 자연법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제한적인 자유, 곧 자연권을 포기하거나 유보하자는 데 동의를 하게 되며, 이러한 동의는 계약을 지켜야 할 의무를 낳게 된다18). 하지만 이러한 계약이 어떠한 강제도 동반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의무 역시 강제되지는 않는다. 이 의무는 자연법의 명령으로부터 유래한 도덕적이고 자발적인 의무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연히 이 예비적 계약은 쉽게 파기되거나 위반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원래의 계약의 목표인 평화와 안전을 달성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 때문에 계약을 위반했을 때 이를 처벌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지닌 제 3자를 설정해서 개인들 사이의 상호 권리 양도가 평화를 이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이 생겨나게 된다. 이처럼 제 3자, 곧 주권적인 권력의 보유자를 세우는 것이 바로 두번째 단계의 계약이며, 이것을 고유한 의미의 사회계약 또는 정치적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외적의 침입이나 [성원들] 상호간의 침해로부터 성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 공동의 권력을 세우는 유일한 길은 자신들의 모든 역량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회의체에 부여하는 것이다.”(L 17장 13절, p. 109) 이 두번째의 계약은 각각의 개인이 서로간에 어떤 사항이나 권리와 관련하여 맺는 계약 또는 신약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모든 사람과 더불어 공동의 권력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자신의 권력 및 힘을 한 사람이나 하나의 회의체에게 양도한다는 점에서 첫번째 단계의 계약과 구분된다. 홉스는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를 좀더 명확하게 부연하고 있다. “이는 동의나 합의 이상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과 맺는 신약을 통해 만들어진 하나의 동일한 의인(擬人, person)으로 모든 사람을 실재적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마치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모든 권리를 이 사람 또는 이 회의체에게 주어 그가 하는 모든 행동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조건 하에 나는 나 자신을 통치하는 권리를 그에게 양도한다고 말하는 것처럼.”(L 같은 곳―강조는 홉스) 이처럼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나 하나의 회의체, 곧 하나의 동일한 의인에게 자신의 권력과 힘을 양도하기로 약속하고 이를 부여했을 때, 자연상태에서는 불가능했던 공동의 권력이 창출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한한 신으로서의 리바이어던, 국가이며, 이를 통해 주권자와 신민 또는 시민 사이에 복종과 통치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세번째로 홉스는 주권에 관한 개념화에서도 독창성을 보여준다. 앞에서 말한 계약의 과정은 홉스에 따르면 동시에 주권자에게 “권위부여하기authorization”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권위부여하기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홉스는 의인person에 관한, 따라서 대표representation에 관한 매우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홉스에 따르면 의인은 “그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진실로이든 허구적으로이든 간에 그에게 귀속되는―다른 어떤 사물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가리킨다.”(L 16장 1절, p. 101) 의인에는 자연적 의인과 인공적 의인이 존재하는데, 전자의 경우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될 때, 또는 귀속되는 것으로 인정될 때를 가리키고, 후자의 경우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될 때를 가리킨다. 홉스의 의인 이론은 홉스의 정치철학이 갖는 법적 인공주의를 잘 보여준다. 홉스의 의인 이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런 점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신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늘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체를 동일한 것으로, 어떤 행동이 늘 같은 존재자에 의해 수행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동일성을 부여하고, 이러한 동일성을 지니고 있는 그를 이 신체, 또는 그가 수행하는 이러저러한 행동의 주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를 통해 자연권과, 시민사회 또는 국가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인공적 권위의 차이가 설명될 수 있다. 곧 자연권은 생물학적 원리에 따라 어떤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를 뜻하는 반면, “어떤 행위든 할 수 있는 권리”(L 16장 4절, p. 102)로 정의되는 권위는 자연적 의인이든 인공적 의인이든 간에19) 법적으로 규정된 의인이라는 개념을 전제하며, 따라서 상호개인적 관계를 함축한다. 따라서 자연적 의인이든 인공적 의인이든 간에 이처럼 어떤 동일성을 상정하고 그에게 말이나 행위를 “귀속시키는attribute” 법적 절차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국가 속에서 인간의 행위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획득할 수 있으며, 따라서 대표나 권위부여를 통한 공동의 권력의 설립도 가능하게 된다20)

 

 

  이러한 권위부여의 절차가 갖는 중요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권위부여의 절차는 주권자의 권위가 각각의 개인들이 주권자에게 양도한 권리에서 나온다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홉스는 장 보댕Jean Bodin과 마찬가지로21) 주권의 절대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자연법에 근거하여 주권자의 권한을 확립하려고 했던 보댕과 달리 홉스는 주권자의 권위를 피통치자, 곧 신민 또는 인민의 동의에 근거지으려고 했다. 곧 홉스의 주권자는 각각의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양도하는 권리들 이외의 독자적인 역량이나 권력을 지니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발적 양도를 통해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홉스의 권위부여의 절차는 주권자에 대해 법적 규범성을 부여하려는 절차로 이해할 수 있다22).

 

 

  둘째, 권위부여의 절차는 홉스의 주권이론의 목표 중 하나가 다중multitudo/croud을 해체하고 이를 인민으로 구성하는 또는 포섭하는 데 있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홉스는 ꡔ시민에 대하여ꡕ나 ꡔ리바이어던ꡕ 같은 저작에서 인민과 다중에 대한 엄격한 구분의 필요성을 여러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ꡔ시민에 대하여ꡕ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인민다중을 충분히 명료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은 사회체제, 특히 군주정에 대해 해롭다. 인민단일한 의지를 가진 단일한 실재single entity이다. 여러분은 이것에게 하나의 행위를 귀속시킬 수 있다. 하지만 다중에 대해서는 이것들 중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DC 12장 8절, p. 137―강조는 홉스) 또한 ꡔ시민에 대하여ꡕ 6장에서는 다중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첫번째 결정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다중이란 실제로 무엇인가? ... 왜냐하면 그들은 단일한 실재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며, 이들 각자는 모든 문제에 관해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기 자신의 판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각각의 사람이 특수한 계약들을 통해 자기 자신의 권리소유를 갖게 되어, 어떤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도, 다중 전체가 각각의 개인과 구분되는 하나의 의인으로서, 이것은 다른 이의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다중에게 그들의 행위로서 귀속되어야 할 어떤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DC 6장 1절, pp. 75-76)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홉스가 다중을 문제삼고 있는 것은, 통일성이 존재해야 비로소 공동의 권력이 형성될 수 있고, 이에 따라 평화와 안전이 성립할 수 있는데, 다중은 하나의 단일한 실재로 환원되지 않는 다수의, 또는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계속해서 다중에게 행위를 귀속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서 잘 드러나듯이 홉스는 다중에게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중이 정치적 행위자로서, 또는 하나의 의인으로서 행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중을 이루고 있는 개별적인 인간들로 해체되어야 하며, 이들 각각이 자신의 권리와 힘을 양도함으로써 하나의 동일한 의인, 곧 국가를 구성해야 한다(같은 책, p.76).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다중이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일 수 없다면, 다중은 다수의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하다면, 무엇 때문에 인민과 다중을 구분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이에 대한 답변의 실마리는 ꡔ시민에 대하여ꡕ 12장 8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여기서 홉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또는 신민들은 다중이다. 민주정귀족정에서 시민들은 다중이지만, 평의회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다중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다중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같은 책, p. 137)

 

 

  “역설적이게도”라는 삽입구에서 볼 수 있듯이, 홉스는 자신의 구분법이 사람들에게 기묘하게 들릴 수 있음을 충분히 의식하면서도 집요하게 인민과 다중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 또는 다중들이 국가에 반역하고 통치권을 찬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홉스가 두려워하는 것은 다중이 충분히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라는 사실, 사실은 너무나 영향력 있는 행위자여서 국가를 위협하고 전복할 수도 있는 행위자라는 사실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홉스가 권위부여의 절차를 통해 주권자의 절대적 권한,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려 하고, 다중이 법적 의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중에게 유효한 정치적 행위자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에는 다중이라는 위협적인 정치적 행위자를 해체하고 법적 질서 안으로 포섭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ꡔ신학정치론ꡕ과 사회계약론의 변형


  지금까지 살펴본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스피노자의 ꡔ신학정치론ꡕ에도 등장한다(특히 16장 및 17장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ꡔ신학정치론ꡕ에 등장하는 계약이론은 홉스의 문제설정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 및 이론적 요소들을 빌려오고 있지만, 홉스의 계약론 같은 형식적 통일성을 보여주지 않을 뿐더러, 그 내용 자체도 중대하게 변형되어 있다. 우리가 이 절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ꡔ신학정치론ꡕ에 나타나는 스피노자의 계약론의 문제설정이 홉스의 계약론과 어떻게 다르며, 이러한 차이가 생겨나게 되는 이유는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3-1. 홉스의 사회계약론과의 차이점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비교해볼 때 ꡔ신학정치론ꡕ 16장에 나타나는 사회계약론의 문제설정은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차이점을 보여준다.

 

  (1) 무엇보다도 ꡔ신학정치론ꡕ에 나타난 계약론에서는 자연상태status naturalis와 사회상태status civilis 사이에 아무런 단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앞에서 본 것처럼 홉스의 계약론의 특징 중 하나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또는 국가 사이에 엄격한 단절을 설정한다는 데 있다. 순수한 자연상태와 전쟁상태를 동일시하고, 그리하여 자연상태 속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간 개인들이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전쟁 상태와 단절하기 위해 각자가 원초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자연적 권리를 제 3자에게 양도할 때에 비로소 국가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홉스 계약론의 이론적 핵심이기 때문이다. 반면 16장, 더 나아가서 ꡔ신학정치론ꡕ 전체의 논의에서는 홉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단절, 또는 이행의 과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절의 부재가 의미하는 것은 스피노자에게는 자연상태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자연권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점이다. 옐레스Jarig Jelles에게 보내는 유명한 50번째 편지에서 스피노자 자신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선생이 질문하신, 정치학과 관련한 홉스와 저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습니다. 곧 저는 항상 [자연상태에서든 국가 안에서든] 자연권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어떤 국가이든 간에 주권자는 그가 신민을 능가하는 역량을 발휘하는 만큼 신민에 대한 권리를 가질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연상태에서 늘 그렇듯이 말입니다.”(G IV, 238-239)23)

 

따라서 스피노자가 “가령 물고기는 본성상 헤엄치도록 규정되어 있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도록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물고기가 물에서 주인 노릇을 한다는 것potiuntur, 그리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최고의 자연권에 의한 것이다.”(TTP 16장 2절; 모로판, pp. 504-505)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로 사회상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처럼 사회상태 안에서도 계속해서 자연권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것은 또한 사회상태 안에서도 여전히, 자연상태를 지배하고 있는 갈등과 기만, 증오의 메커니즘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룩하고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회계약의 절차를 고안해냈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회상태에서도 여전히 자연권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계약의 절차를 통해서도(이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한다면) 자연상태를 지배하는 갈등과 기만, 증오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홉스와 비교해볼 때 ꡔ신학정치론ꡕ을 특징짓는 점은 스피노자의 비관적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비관적 현실주의는 무엇보다도 (ꡔ신학정치론ꡕ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충동과 이성의 대립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다음 구절은 이를 잘 보여준다.


할 수 있는 한 공포metum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살기를 욕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각자가 모든 것을 자기 기분대로 하도록 허용되는 한, 그리고 증오odio와 분노irae보다 이성에게 더 많은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적의inimicitias와 증오odia, 분노iram, 간계dolos의 한 가운데에서는 근심 없이non anxie, 따라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이것들을 피하려고 노력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 안전하게, 그리고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로 화합해야 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만물에 대해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던 권리를 집단적으로 보유해야 하고, 이러한 권리가 각자의 힘vi과 충동appetitu보다는 그들 모두의 역량potentia과 의지voluntate에 의해 더 많이 규정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충동이 권유하는 것만 따르고자 한다면 이는 헛된 일이 될 터인데, 왜냐하면 충동의 법칙들은 사람들 각자를 상반된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TTP 16장 5절, p. 510)24)


  이 구절에서는 무엇보다도 정서들이 모두 부정적인 정서들, 또는 수동적인 정서 내지는 정념들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스피노자는 ꡔ윤리학ꡕ에서 정서를 수동 정서와 능동 정서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 두 가지 정서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는 능동 정서가 이성과 대립하지 않고 이성으로부터 따라나오는 정서라는 점에 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ꡔ윤리학ꡕ 5부 정리 4의 주석25)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동일한 정서는 수동적일 수도 능동적일 수도 있으며, 이 정서를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성의 힘, 또는 이성의 인도에 따르는 삶이다. 하지만 이 구절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ꡔ신학정치론ꡕ에서는 정서들이 순전히 부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성과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또 바로 이 때문에 이성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연권은 정서들과 다르지 않은데, 이성이 정서들과 외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이상, 이성은 인간의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힘 또는 역량과 외재적인 관계만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이 단 하나의 자연의 지배 하에 살아간다고 간주되는 한, 아직까지 이성을 모르거나 유덕한 습관을 갖지 않은 사람도 자기 삶을 이성의 법칙들에 따라 이끌어가는 사람과 동일한 최고의 권리로 오직 충동의 법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같은 책; 모로판, pp. 506-507) 이성적이든 무지하든, 유덕하든 배덕하든 간에 모든 사람의 삶을 이끄는 가장 원초적인 규칙은 바로 충동의 법칙인 것이다.

 


  (2) 이처럼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사이에 단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ꡔ신학정치론ꡕ 16장에는 홉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원초적 계약의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몇 가지 점들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먼저 스피노자의 논의에는 홉스의 논리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전도가 존재한다. 앞서 본 것처럼 홉스에게서 원초적 계약은 자연상태의 각 개인들이 제 3자에게 자신의 자연권을 양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권력potestas, 이러한 명령의 권리jus imperandi는 시민들 각자가 이 사람 또는 이 회의체에게 자신의 모든 힘과 모든 역량potentia을 양도한다는 데서 성립한다. [...] 이는 저항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다른 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연적으로는 자신의 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DC 5장 11절, pp. 73-74) 따라서 홉스에서는 사회계약의 체결을 통해 개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비로소 주권자의 절대적 권력이 성립하게 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논리가 나타난다. 곧 그는 권리의 양도 대신 역량의 양도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권리의 정도는 역량의 정도에 따라 규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권은 오직 각자의 역량에 의해서만 규정된다는 점을 이미 확립했기 때문에, 각자가 지닌 역량을 강압적으로든 자발적으로든vel vi vel sponte 타인에게 양도하는 정도만큼 필연적으로 각자는 이 타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넘겨준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따라서 만인 가운데 최고의 권리[주권]을 지닌 이 사람은 만인을 힘으로 강제할 권력, 모두가 보편적으로 두려워하는 최고 형벌에 대한 공포로 그들을 붙잡아둘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지닌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행할 수 있는 이 역량을 보존하는 동안에만 그는 이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그의 명령은 취약해질 것이며, 그보다 강한 힘을 지닌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에게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TTP 16장 7절; 모로판, p. 514).

 

이러한 역량의 논리는 스피노자가 사회상태에서도 자연권이 지속된다고 보는 것의 논리적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홉스에게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연권을 제 3자에게 양도함으로써 공동의 권력을 설립하는 것은 자연상태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자연상태에서든 사회상태에서든 자연권이 계속 지배하고 있고, 따라서 홉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자연권의 양도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역량은 왜 양도하는가? 사람들은 강압에 의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역량을 양도하는 것인가? 하지만 스피노자는 분명히 “강압적으로든 자발적으로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의 역량, 따라서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는가? 

 

 

  우선 스피노자에게 전면적인 권리 또는 역량의 양도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해두자. “하지만 누구도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할 정도까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내어줄 수는 없다”(TTP 서문; 모로판, p.72) 이는 다시 말하면, 국가 내에서도 시민들은 계속 저항권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홉스가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주권자의 역량이 약화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주권이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집단에게 넘어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에게 권리 또는 역량의 양도가 이루어지는 것, 따라서 계약이 성립하는 것은 항상 유용성utilitas 때문이다. 곧 사람들은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역량이나 권리를 양도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이를 양도해서 얻을 수 있는 손해보다 크다고 생각할 때, 계약을 체결하고 실행하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계약이란 그것이 가져올 유용성의 힘에 의해서만 힘을 지닐 수 있다고 결론내린다. 유용성이 사라지면 그와 동시에 계약도 철폐되며 무효가 된다.”(TTP 16장 7절; 모로판, p. 512)

 

 

  이는 처음 보기에는 홉스의 경우와 매우 유사한 것 같다. 홉스에서도 역시 사람들은 미래에 얻을 이익에 대한 희망(평화와 안전) 때문에 계약을 체결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는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홉스의 경우 계약의 주요 동기는 이익에 있지 않다. 이는 유명한 수인의 딜레마 논변과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여러 홉스 연구자들, 특히 영미권의 상당수 연구자들은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결코 홉스식의 계약을 성취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수인의 딜레마 논변을 동원해왔다26). 곧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utility-maximizer”로서, 각자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상호 권리의 양도를 통한 계약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변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최근의 몇몇 연구자들이 주장하고 있듯이27)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홉스적 인간은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인 자연상태의 파국상황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룩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시 이러한 파국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이익을 얻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방식은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행동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홉스의 계약론이 갖는 규범적 성격을 간과한 반론이다28). 만약 홉스적 인간이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은 계약의 결과로 성립한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고 판단할 경우, 언제든지 국가를 해체하거나 적어도 다른 국가로 변경하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홉스는 신민들이나 시민들이 주권자에 대해 반역하는 행위는 (규범적으로) 성립할 수 없거나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계약의 체결의 결과로 주권자가 자신의 절대적 권한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계약 체결 자체 내에 포함된 복종의 약속으로 인해 주권자의 통치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이의나 반역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홉스적인 인간을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로 간주하는 논변은 홉스 계약론이 포함하고 있는 규범적 함축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이처럼 계약의 규범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홉스는 계약과정이나 계약의 실행 이후 기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스피노자는 기만을 자연권 속에 포함시킨다. 다음 구절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각자는 저마다 쾌락에 이끌리며, 정신은 그토록 자주 탐욕, 명예심, 질투심, 분노 등에 점령되어 더 이상 이성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이 확실한 신실함의 징표로 약속을 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서약한들, 이러한 약속에 무언가 다른 것이 덧붙여지지 않는 한 아무도 아주 확실하게 타인을 믿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연권에 의해 각자는 기만적으로 행위할 수 있으며, 오직 더 큰 선에 대한 희망이나 더 큰 악에 대한 공포에 의하지 않고서는 계약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TTP, 16장 7절, pp. 512-514―강조는 필자)


사실 모든 계약의 동기에 유용성이 놓여 있고, 사람들이 이성보다는 충동에 이끌려 살아간다면, 좀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또는 피해를 막기 위해 계약에서 기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는 이처럼 계약이 유용성에 의거해 있고, 자연권에 의해 기만이 가능하다고 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곧 사회상태에서도 항상 자연권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언제든지 주권적 권력은 교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홉스는 계약을 통해 확립한 주권적 권력은,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 당시에 약속했던 복종의 약속을 영속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결코 교체될 수 없다고, 교체되어서는 안된다고 보고 있다. 이는 결국 위에서 지적한 홉스의 용어법대로 하면, 스피노자에게는 엄밀한 의미의 계약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계약은 협정이나 신약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사실 ꡔ신학정치론ꡕ에서는 계약contractus이라는 단어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고 있으며29), 그 용법 역시 국가와 국가 사이의 동맹 조약이나 협정, 또는 신과의 계약(16장 19절; 모로판, p. 528)이나 이스라엘 부족 사이의 맹약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국가를 창설한다든가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는 의미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이 후자의 경우는 오히려 pactum이라는 용어(이는 총 12번 사용되고 있다), 곧 홉스가 협정이나 신약의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런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해볼 때 스피노자가 계약의 근본 동기로 유용성을 제시하는 것은 홉스의 계약론과의 핵심적인 차이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는 홉스 계약론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난점, 곧 국가의 설립은 권리의 상호양도로서 계약의 체결과 이행을 전제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계약은 도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관되게 드러내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30)

 


  (3) 또한 16장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주권자의 권리에 대한 스피노자의 규정에 있다. 앞에서 본 것처럼 홉스에게서 주권자의 권력, 주권자가 갖는 절대적 권위는 각각의 개인들이 주권자에게 양도하는 권리에서 성립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홉스가 설정하는 것과 같은 원초적 계약의 절차들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주권자의 권력 역시 이러한 절차들을 통해 인공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획득될 수 없다. 그 대신 스피노자는 계속해서 주권자의 권리는 주권자의 역량의 정도에 비례하고, 주권자는 충분한 역량을 지니는 한에서만 자신의 권리를 영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실행할 수 있는 이 역량을 보존하는 동안에만 그는 이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그의 명령은 취약해질 것이며, 그보다 강한 힘을 지닌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이 자발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에게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TTP 16장 7절; 모로판, p. 514). 이 주장은 마치 스피노자가 원칙적으로 강권정치나 참주정치를 옹호하는 것처럼 들리지만31), 스피노자의 주장은 그보다는 좀더 미묘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여러번에 걸쳐 강권정치의 위험성과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32), 그리고 스피노자가 ꡔ신학정치론ꡕ에서 추구하고 있는 근본 목표는 “각자에게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고 자신의 기질에 따라 신앙의 기초들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하는 것”(TTP 서문; 모로판, p. 72)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역량에 대한 스피노자의 강조는 강권의 옹호와는 성격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주장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오히려 스피노자가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고 기질에 따라 신앙의 기초를 해석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ꡔ신학정치론ꡕ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왜 이러한 자유와 권한을 허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스피노자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측면에서 답변한다. 첫째, 인간학적 논거들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견해가 범죄적인 것으로 최급받고, 신과 인간에 대한 그들의 경건한 행동을 유발시킨 것이 사악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가장 견디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럴 경우 그들은 법을 혐오하게 되고, 정부에 반대하는 것을 배덕한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일로 판단하게 되어, 결국은 선동적인 운동과 폭력을 시도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사람들의 견해에 거슬러 제정된 법률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들ingenui을 위협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사악한 자들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을 자극시키는 것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국가imperium를 커다란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서는 집행될 수 없다(ꡔ신학정치론ꡕ 20장 11절; 모로판, 644).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스피노자가 의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이를 금지하고 억압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적 권리, 또는 정념적인 힘들은 인공적인 수단들을 통해 외재적으로 금지될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상태, 국가 속에서도 여전히 자연권은 지속된다는 스피노자의 집요한 논리에서 따라나오는 결론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의 의견 및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에서 볼 수 있듯이) 규범적으로 부당하다는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본성적으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금지된다고 할 수 있다33).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판단 및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되, 이를 국가 보존에 유용한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주권자의 역량을 측정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둘째, 역사적 논거들이 있다. 스피노자는 17장 이하에서 20장에 이르기까지, 특히 17장과 18장을 통해 고대 히브리 국가들에서 왕과 사제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갈등의 역사 및 중세 유럽에서 벌어진 로마교회와 제국 사이의 갈등, 또는 영국왕과 개신교 종파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에 관해 광범위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을 통해 스피노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주권자가 종교 문제에 대한 감독권(“jus circa sacra”)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역사적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종교적인 지도자들(그들이 사제이든 교황이나 주교, 목사이든 간에)이 국가의 법적 통제 없이 개인들의 신앙심과 미신적 성향(이는 개인들의 정념의 수동성에 근거하고 있다)에 의거하여 자신의 고유한 조직을 구성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국가의 정치적 문제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며, 이는 곧 국가의 심각한 혼란과 소요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는 “종교는 [정치적] 명령권을 갖고 있는 이들의 결정에 의해서만 법적인 힘을 획득하며, 신은 국가를 통치하는 이들을 통해서만 특정한 인간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ꡔ신학정치론ꡕ 19장 3절; 모로판, 606)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곧 주권의 양분을 금지한다는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적 절대주의의 진의가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역량의 논리, 주권자의 역량에 대한 강조는 강권정치에 대한 옹호로 이해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비이성적, 비도덕적 본성은 사회상태에서도 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인간학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홉스처럼 인공적인 법적 절차를 통해 이를 제어하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 인간들의 정념적인 본성을 민주주의적으로 규율하고 활용하려는 태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ꡔ신학정치론ꡕ의 계약론의 참된 의미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곧바로 우리를 다음의 논의로 인도한다.

 

 


3-2. 계약의 이중화: 복종의 장치로서의 계약


  16장의 논의는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매우 주목할 만한 차이점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16장만으로는 홉스의 논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스피노자가 계속 계약론의 문제설정을 견지하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히 ꡔ신학정치론ꡕ 17장과 18장(및 3장과 5장)에 나타나는 히브리 국가의 역사에 관한 스피노자의 논의를 같이 참조해야만 한다.

 

 

  우선 17장 첫머리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앞장에서는 모든 것에 대한 주권자의 권리와, 각자의 자연권을 주권자에게 양도하는 문제를 살펴봤다. 이러한 논의가 실제와 아주 잘 합치한다 해도, 그리고 이러한 논의와 좀더 근접하도록 실제를 규제한다 해도, 이는 많은 경우 순전히 이론적인 것으로mere theoretica 남게 될 것이다.”(TTP 17장 1절; 모로판, 534)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논의는 “실제와 아주 잘 합치한다 해도”, 곧 경험적으로 아주 잘 입증된다 해도, 원칙적으로는 이론적인 것으로 남게 되는가? 16장의 논의가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라는 말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직접적인 논거는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누구도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하기를 그칠 정도로ut homo esse desinat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역량potentiam, 따라서consequenter 자신의 권리jus를 양도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TTP 같은 곳) 그런데 이러한 논거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6장의 논의와 다르지 않다. 스피노자는 이미 16장에서 권리 또는 역량의 완전한 양도란 존재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새로운 논거라기보다는 16장에서 스피노자가 제시했던 논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17장의 새로운 논거, 새로운 논의는 바로 이러한 논점에 근거하여 제시되는 다른 논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주목을 끄는 것은, ꡔ신학정치론ꡕ만이 아니라 ꡔ정치론ꡕ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스피노자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다. “국가가 시민들―자신들의 권리를 박탈당한 시민들이라 할지라도―보다 적들로 인해 더 큰 위험을 겪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같은 곳, p. 536)34) 그 다음 바로 2절 첫머리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우리의 논의를 위해 필수적이다. “국가의 권리와 권력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권력이 결코 사람들을 공포로 강제하는 능력으로 환원되지 않고, 사람들이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들 일체를 포함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민을 만드는 것은 복종의 이유가 아니라 복종[한다는 사실 자체]이기 때문이다.”(같은 곳―강조는 필자)

 

 

  이 두 가지 언급은 앞에서 우리가 스피노자의 역량의 논리에 관해 말했던 것을 입증해주면서 새로운 주제, 복종이라는 주제를 도입한다. 곧 스피노자가 말하는 역량이란 무력과 강권이라기보다는 신민, 또는 시민을 복종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이러한 힘은 무력과 강권이 될 수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견지되고 있는 스피노자의 인간학적 원리에 비추어봤을 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국가 또는 주권자의 권리에 복종하게 만드는 능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상태에서도 지속되는 사람들의 자연권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바로 그들의 자연권, 그들의 정념들의 힘을 활용하여 안정된 통치를 확립하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구절은 이러한 스피노자의 의도를 가장 잘 보여준다. “따라서 주권자의 명령과 일치하는 신민의 모든 행동은, 그가 사랑에 의해서 이렇게 하든 아니면 공포로 강제되어 하든, 또는 (이것이 훨씬 더 빈번한 경우인데) 희망과 공포 양자 모두에 의해 하든 관계 없이 [...] 자기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국가의 권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다시, 복종은 외적인 행위보다는 마음의 내부 작용과 더 관계가 있다는 점을 아주 명확하게 확인하게 해준다. 이 때문에 자기 마음을 다해 다른 사람의 명령들에 복종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지배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민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람은 가장 큰 지배권을 보유하게 된다.”(같은 곳, p. 538)35)

 

 

  이러한 논의는 왜 스피노자가 홉스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변형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ꡔ신학정치론ꡕ에서 계약론의 문제설정을 계속 채택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피노자가 16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계약론의 요소들은 매우 추상적인, 또는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전히 이론적인 것”에 불과하다. 16장의 계약론에 관한 논의들은 홉스처럼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자연상태라는 가설에서 출발하여, 법적인 계약절차들을 통해 인공적인 주권을 창설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의미에서 형식적이지는 않지만, 실제의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또는 존재했던 계약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17장에서 제시되는 계약론은 구체적인데, 이는 17장(및 18장)의 주요한 분석 대상이 히브리 국가의 역사, 정확히 말하면 이중적인 계약을 통해 창설된 히브리 국가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석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주어진 국가가 자신의 형태를 안전하게 보존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조건들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에게 이러한 조건들은 일차적으로 신민들의 복종을 확보하는 것, 신민들이 이유야 어떻든 간에 “주권자의 명령에 일치하게 행위”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히브리 국가의 분석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시되는 스피노자의 언급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히브리인들의 역사의 전개과정을 검토해볼 생각인데, 이는 국가의 안전 및 번영을 증대시키기 위해 주권자가 신민들에게 일차적으로 허용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국가의 보존은 본질적으로 신민들의 충성심과 유덕함, 그리고 명령들을 수행하는 굳건한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은 경험과 이성이 가장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것이다.”(같은 곳, p. 540) 

 

 

  그렇다면 왜 하필 히브리 국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가? 이는 스피노자가 유대인 출신이기 때문에 다른 국가의 역사보다 히브리 국가의 역사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이유나 ꡔ신학정치론ꡕ 15장까지의 성경에 대한 논의가 불가피하게 히브리 국가의 역사에 관한 논의와 뒤섞여 있으며, 따라서 정치에 관한 논의에서도 역시 히브리 국가에 대한 분석을 다루는 게 더 일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얼마간 형식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히브리 국가가 실제로 계약을 통해, 더욱이 정치적 계약과 종교적 계약이 결부된 이중적 계약을 통해 창설된 매우 드문 역사적 사례이기 때문이다36). 사실 스피노자가 히브리 국가의 역사를 분석하는 절차는 정확히 자연상태에 대한 묘사, 이러한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 그리고 이 계약을 성립하게 된 주권적 권력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 국가에 대한 분석은 스피노자가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계약론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먼저 스피노자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하자.

  먼저 자연상태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된 상태를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이미 5장에서 이에 관해 서술한 적이 있으며, 17장에서 이를 다시 언급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탈출함으로써 그들은 더이상 다른 민족의 법에 복종하지 않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들 마음대로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 있게 되었다. [...] 하지만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입법의 지혜와 권력을 공동으로 보존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들 모두는 비참한 노예 생활로 인해 심성이 상하고 미개인 같은rudis 기질을 하고 있었다.”(TTP 5장 10절; 모로판, p. 222) “미개인 같은”이라는 매우 보기드문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의도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상태를 자연상태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모습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 계약의 절차에 관한 서술이 나온다. “왜냐하면 이집트인들의 참기 힘든 억압에서 일단 해방된 이상 어떤 계약pacto도 더 이상 그들을 다른 유한한 존재자에 묶어두지 않게 되어, 그들은 자신들의 역량 아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자연권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각자는 새롭게 이 자연권을 보존할 것인지 아니면 이를 포기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양도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러한 자연상태statu naturali에 놓이게 된 이들은 그들이 매우 신뢰했던 모세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권리를 더 이상 유한한 존재자에게 양도하지 않고 신에게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들 모두는 주저하지 않고 한 목소리로 신의 모든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이며, 신 자신이 예언자의 계시를 통해 설립한 것과 다른 어떤 법도 인정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TTP 17장 7절; 모로판, p. 544) 이렇게 해서 모세를 포함한 히브리인들 전체가 신과 맺은 첫번째 계약이 성립하게 된다.

 

 

  이 계약을 통해 히브리인들은 신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는데, 스피노자는 이에 관해 다섯 가지 사항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그는 이 계약이 일반적인 계약과 동일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신과의 계약, 곧 신에 대한 권리의 양도는 사람들이 신의 절대적인 역량을 경험한 이후에 이루어졌음(출애굽기 19장 4-5절)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성립한 히브리 국가, 신의 법, 곧 종교와 시민법이 일치하고, 신은 히브리 국가의 왕이고 히브리 백성은 신의 백성이며, 신의 명령은 곧 국법이 되는 이 국가를 스피노자는 “신정국가imperium theocratia”라 명명하고 있다. 넷째, 그런데 스피노자는 곧바로 이것이 “사실보다는 의견opinione magis quam re”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이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가 1장 이하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듯이 ꡔ성경ꡕ에 나오는 대부분의 서사들은 실제의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라기보다는 히브리 백성들의 기질과 상상에 부합하는 의견들(곧 허구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적은 스피노자가 신과의 계약에 관한 ꡔ성경ꡕ의 이야기 역시 허구적인 상상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이러한 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무의미하다거나 현실적인 효과를 낳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상상에 기초하여 히브리 국가를 구성했고, 또 히브리 국가는 이러한 상상에 기초하여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언급은 자신의 의도가 (신학자들처럼) ꡔ성경ꡕ의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르며, 자신은 히브리 국가가 어떻게 오랫동안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는지, 또 거기에서 이러한 상상적 이야기가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파악하는 데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신정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의 유사성에 관해 지적하고 있다(TTP, 548). 왜냐하면 두 국가 모두 “다른 사람”에게 권리와 역량을 양도함으로써 성립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구성원들 모두는 평등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리 국가의 경우 이 단계에서는 아직 신과 인간들 사이의 “명시적 중개자 없이nullo expresso mediatore”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다.     

 

 

  그 다음 두번째 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스피노자가 그대로 인용하는 ꡔ성경ꡕ의 구절(신명기 5장 23-27절)에 따르면 신의 명령을 들으러 산에 올라간 사람들이 신의 목소리를 듣고 공포와 두려움에 젖게 되어, 다시는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신 신의 모든 말씀의 중개자, 해석자로서 모세를 설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신의 법의 공표자이자 해석자, 따라서 또한 누구도 그를 판단할 수 없는 최고판관으로 남게 되고, 히브리인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신의 자리를 지키게 된다. 곧 주권자”(TTP, 같은 곳)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계약은 모세에게서 통일되었던 이러한 권력들을 분할하는 계약이다. 곧 신의 말씀을 계시받고 해석하는 일은 아론을 비롯한 레위족에게 맡겨졌고, 군대지휘권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히브리 국가의 권력, 특히 정치 권력과 종교 권력 사이의 제도적 분할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를 더 이상 상세하게 서술하는 일은 우리의 논의 목표가 아니므로, 이제 이러한 히브리 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 특히 계약의 과정들에 대한 분석의 의미를 정리해보기로 하자. 스피노자의 분석은 우선 스피노자가 홉스식의 사회계약론이 보여주는 인공주의 내지는 법률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계약의 모델을 찾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홉스식의 계약론은 사람들의 자연권이 집요하게 계속된다는 점을 간과한 채(또는 오히려 그것을 법적 모델을 통해 상상적으로 봉합하기 위해) 인공적 절차를 통해 주권을 설립하려고 하지만, 정념들에 좌우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본성상 이러한 절차는 효과적인 국가 설립의 수단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스피노자가 히브리 국가의 역사에서 발견한 것은 사람들의 정념과 상상에 기초하여 안정된 국가를 설립하고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상상과 정념에 기초하여 전능한 신 야훼에 대한 표상을 만들어내고 자신들의 국가를 야훼의 국가로, 또 자신들을 야훼의 백성으로 간주했지만, 오랫동안 안정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념과 대립하는 이성, 또는 개인적인 능력으로 이해된 이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어리석은 이러한 표상과 믿음이 역설적으로 매우 유익한 결과, 제도적으로 매우 합리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모세가 [...] 우중이 공포 때문이 아니라 신앙심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국가 안에 종교를 도입했기”(TTP 5장 11절, p. 222) 때문이다. 곧 사람들의 정념과 상상, 신앙심을 억압하지 않고, 그것들을 국가의 발전에 활용할 수 있었던 모세의 정치적 능력이 히브리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곧 사회계약, 또는 국가의 구성과 보존을 위해서는 홉스식의 인공적인 법적 절차, 또는 고유한 의미의 정치적 계약만으로는 부족하며, 각각의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역량을 양도할 수 있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보충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히브리 백성들이 신과 맺는 계약에서 바로 이러한 메커니즘을 발견한다. 히브리인들이 신과 맺는 계약은 집합적인 계약이기 이전에, 히브리인들 각자가 신과 맺는 계약, 곧 야훼를 자신의 신으로 받아들이는 계약이며, 그에게 헌신과 절대적 복종을 다짐하는 계약이다. 모세의 정치적 능력은 이러한 개별적인 종교적 계약을 국가를 안정시키고 보존하는 방법으로, 곧 정치적 계약으로 활용했다는 데 있으며, 이것의 핵심은 신을 각 개인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히브리 민족 전체의 신으로, 히브리 국가의 신,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유일한 주권자로 만듦으로써, 각자가 신에게 바치는 절대적 헌신과 복종이 동시에 국가에 대한 헌신과 복종으로 되게 만드는 기술에 있다.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설립에서 볼 수 있는 계약은 종교적 계약이면서 정치적 계약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한 계약의 이중성 때문에 히브리 국가는 백성들의 “미개인 같은” 심성에도 불구하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 히브리 국가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계약은 매우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는 홉스식의 인공주의적인 절차 없이도 계약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또한 계약의 진정한 본질은 “미개인 같은” 심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곧 탐욕과 공포, 기만과 분노 등과 같은 정념들에 좌우되어 살아가는 다중이나 우중들vulgus37)을 국가의 법이나 주권자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데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홉스의 계약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대중들의 자발적 복종의 메커니즘, 따라서 국가의 보존의 수단들을 제시해주는 한에서, ꡔ신학정치론ꡕ에서 계약론의 틀을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4. 결론: 정서들의 모방과 다중의 역량


  지금까지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1) 스피노자는 홉스 사회계약론의 핵심 전제 중 하나인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사이의 단절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서 사회상태는 자연상태와 마찬가지로 자연권이 지배하는 곳이다. (2) 이에 따라 사회계약은 홉스에서와는 달리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o”, 곧 인공적 질서로서 국가를 정초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권리는 역량에 의해 조건지어지며, 권리의 범위는 역량의 정도에 비례한다. 따라서 주권자의 권리 역시 그의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 (3) 홉스와 달리 스피노자에서 계약은 역사적 계약으로 나타나며, 더욱이 고유한 의미의 사회계약, 곧 정치적 계약과 이를 보충하는 종교적 계약으로 이중화된다. 이때 종교적 계약은 사회상태 속에서 지속되는 개인들의 자연권, 곧 정념들을 순화하기 위한, 또는 규율하기 위한 장치로 도입된다. 스피노자는 히브리 신정국가에 관한 고찰들을 통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의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ꡔ신학정치론ꡕ 이후, 곧 ꡔ윤리학ꡕ과 ꡔ정치론ꡕ에서는 더 이상 계약론의 문제설정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왜 이러한 변화가 생겨나게 되었을까? 이 문제에 관한 고찰은 다른 글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두 가지 이유만 지적하면서 글을 맺기로 하자.

 

 

  첫째는 인간학적 관점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ꡔ신학정치론ꡕ에서 스피노자는 정념들, 또는 정서들에 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ꡔ신학정치론ꡕ이 엄밀한 이론적 저작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인 목적을 위해 저술된 책이며, 따라서 ꡔ신학정치론ꡕ에 나타난 정서들에 관한 논의가 당시의 스피노자의 실제 견해라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이 있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ꡔ윤리학ꡕ에서 스피노자는 ꡔ신학정치론ꡕ과는 매우 상이하고 매우 발전된 정서에 관한 논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ꡔ윤리학ꡕ에서 전개되는 정서들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이론이나, 스피노자의 정서론 및 인간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정서들의 모방affectuum imitatio”에 관한 이론은 인간의 본성 및 상호개인적 관계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점을 상당히 변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치학에 관한 견해 역시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되며, 그것의 중심적인 결과가 바로 사회계약론의 소멸이다.

 

 

  둘째,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다중에 대한 스피노자의 관점의 변화이다. 스피노자는 ꡔ신학정치론ꡕ에서 multitudo라는 용어보다는(이는 단 세 차례만 등장할 뿐이다) vulgus라는 용어, 곧 경멸적인 의미가 함축된 “우중”(愚衆)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다중에 대한 그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38). 곧 ꡔ신학정치론ꡕ에서 다중은 일차적으로 통치의 대상으로 간주될 뿐이며, 그것도 매우 위험하고 해로운 (소요와 국가 전복을 불러오기 때문에) 대상으로 간주될 뿐이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했듯이 스피노자의 계약론은 바로 이러한 다중을 주권자의 명령이나 국가의 법질서에 복종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을 탐구하려는 노력의 핵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간학적 관점의 변화도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ꡔ정치론ꡕ에서 다중은 더 이상 일방적인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토대 자체이자, 국가의 통치자들이 그 중에서 선발되는 인민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다중을 복종시킬 수 있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다중의 역량을 어떻게 민주주의적으로 제도화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며, 그 결과 다중을 복종과 규율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계약론은 스피노자의 이론적 논의에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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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ꡔ사회진보연대ꡕ 기획연재] 신자유주의 시대 중국(5)


[연재순서]

1. 흔들리는 중국 (1․2월 합본호)

2. 외부의 자극으로 내부의 구조조정을: WTO 가입과 중국의 미래 (3월호)

3. 국유기업 개혁과 중국의 노동자 (4월호)

4. 黑猫白猫: 외국인 직접투자와 대외개방 (6월호)

5. 마오쩌뚱의 유령 (본호)


마오쩌뚱의 유령


백 승 욱 (한신대교수, 편집자문위원)

 


최근 들어 중국에서 국유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시행되면서, 실업문제가 심각해지고, 노동자의 지위가 하락함에 따라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의 불만이 커져가고 있는 것은 여러 보도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신자유주의 지향의 사회적 구조조정은 극단적인 사회적 양극화를 낳았다. 중국을 취재한 한국의 한 방송사의 기획프로그램에서 중국 내륙의 한 농민은 개혁개방의 성과에 대해 평가하면서 "있는 놈들은 배 터져 죽고, 농민과 없는 놈들은 굶어 죽고"라는 말로 현재의 중국 현실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기도 하였다. 떵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 이후 중국의 지도부는 이런 현실을 단지 과도기적인 상황으로 합리화하고, 현실의 문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사회주의론의 변용을 추진하고 있지만 현실의 문제가 이론적 합리화에 의해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구나 코포라티즘적 체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자본가계급까지 포함하는 집권당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성격을 전화하려는 노력은 인민공사의 해체와 노동자 특권의 해체라는 코포라티즘적 토대의 와해와 엇물리는 것이어서 현실적 효과도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위기적 현실 속에서 중국 노동자들의 대응 또한 새로운 모습을 띠고 있는데, 올 초부터 발생한 동북 지방의 자생적 파업이 한 예일 것이다. 노동자들의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중국 중부 지역의 한 공업도시에서 중국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자발적인 모임을 조직해 학습과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도시의 노동자들은 저녁 시간을 이용해 노동자 문화궁 앞의 광장에서 자발적 토론회를 구성하기도 하였고, 또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자체적 학습모임을 만들기도 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한 이론적 준거가 마오쩌뚱의 후기 사상, 즉 문화대혁명기 마오쩌뚱이 제기한 ‘계속혁명론’이었다고 한다. 계속혁명론이란 사회주의가 언제나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하에서도 계속적인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으로 중국의 문화혁명의 근거가 된 이론을 말한다. 중국 정부가 현실적으로는 중국사회주의 역사의 핵심적 측면을 부정하고, 그 속에서 단지 근대화론적 함의만을 계승하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임을 내세우고 있는 정당화의 근거인 떵샤오핑의 ‘4대 기본원칙’ 중 하나가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쩌뚱 사상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이들 노동자들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역설을 이용해 현 체제를 비판하고 있는 흥미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이 도시의 노동자들은 이 지역에서 발생한 파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에서 고위급 간부가 파견되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이 지나가는 눈에 잘 띄는 길목에 커다란 현수막을 내걸고, 거기에 ‘마오쩌뚱 사상만세!’라는 구호를 적었다고 한다. 이 구호를 중국지도부가 어떻게 해석했을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마오쩌뚱, 특히 대약진과 문화혁명기의 마오쩌뚱의 입장은 공식적으로 중국에서 오류로 거부된 입장이고, 사실 중국의 개혁개방 20여 년은 이런 마오쩌뚱의 입장에 대한 즉자적인 안티 테제로 자리 매김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마오쩌뚱의 ‘정치우위’가 떵샤오핑의 ‘경제우위’로, 마오쩌뚱의 ‘계속혁명론’이 경제성장을 우위에 놓는 단계적 발전론으로 대체되어 온 것이 그 일면이다. 중국 천안문 광장에 걸려있는 거대한 사진 속의 마오쩌뚱은 분열되고 서방의 모멸을 받아온 거대한 중국을 소생시킨 국부(國父)이자 중국 경제건설의 기초를 닦아 중국을 강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위인으로 수용될 수 있을 뿐이며, 1950년대 말 이후의 마오쩌뚱은 잘못된 노선선택에 의해 중국을 적어도 10년 이상 퇴행시킨 오류에 찬 인물이라는 것이 중국정부의 공식적 평가이다. 이렇게 해서 마오쩌뚱의 현재적 위험은 제거되었다고 보고있었는데, 느닷없이 '마오쩌뚱 사상 만세!'라니, 마오쩌뚱의 유령이 다시 떠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인가?

 

지금 중국에서 다시 마오쩌뚱을 거론한다는 것, 특히 계속혁명론의 마오를 다시 거론한다는 것은 마치 역사를 다시 과거로 돌리고, 현재의 삶의 수준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중국을 다시 폐쇄되고 낙후된 상태로 되돌리려는 반동적 시도로 간주될런지도 모른다. 마오쩌뚱은 ‘죽은 개’일 뿐이다. 중국 사회주의 역사의 모든 오류는 마오의 이름으로 귀속되고, 현 체제의 발전방향에 대한 반대는 즉각적으로 마오노선으로 회귀하려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이분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누구도 마오쩌뚱 시기의 중국사회주의의 역사를 공식적 견해와 다른 관점에서 제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를 어기고 죽은 혼을 무덤에서 되살리려는 자에게는 ‘극좌파’라는 험악한 딱지가 붙을 뿐이다.

 

이처럼 20여 년 동안의 노력 끝에 중국지도부는 마오쩌뚱을 역사적 인물로, 죽은 개로 매장하는데 성공했다고 치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오쩌뚱의 유령이 어두운 창 밖에서 흐릿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실내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막지는 못하고 있다. 마오 사후 1980년대까지 이따금씩 나타나던 마오의 유령은 1990년대 들어서는 더욱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유령은 죽은 자이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논쟁의 상대로, 그리고 수미일관된 입장을 지닌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해 어떤 다른 세력과 대면하지는 않는다. 누구도 죽은 마오쩌뚱의 계승자임을, 특히 공식적으로 비판되고 부정된 그 입장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지 않다. 유령은 우리의 삶의 일정 속에서 예측 가능한 시간적․공간적 자리를 차지하고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정되었고, 사망하였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그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선가 출몰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것은 느닷없이 어느 한 도시의 노동자들이 내건 ‘마오쩌둥 사상만세!’라는 구호 앞에서 잠시 나타난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중국의 근대성의 문제를 다시 사고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주장 속에서도 마오의 유령은 다시 등장한다. 마오쩌뚱의 사진을 택시에 달고 다니고 마오쩌뚱의 일상생활을 드러내는 출판물의 붐을 이룬 '마오쩌뚱 열' 속에서도 소비주의의 팽배 속에서 나타나는 불안심리와 결합된 마오의 유령은 등장한다. 더 근본적으로 마오쩌뚱을 묻었다고 생각하고, 마오쩌뚱과 전혀 다른 방향의 발전노선을 추진하고 있는 개혁개방의 지도부들 앞에도 마오는 늘 나타나고 있다. 개혁개방 노선의 변천사는 마오가 던진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과, 그에 이은 마오 유령의 재출현, 그에 대한 재부정과 재출현이 반복되는 과정이며, 중국의 지도부는 끊임없이 마오의 유령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유령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조차 그중 일부에게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마오는 여전히 없는 존재이고 사망한 존재일 뿐이다. 유령은 유령을 불러낸 자 앞에만 나타날 뿐이고, 한 번 나타난 유령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그 유령을 불러낸 자를 언제 어디서나 붙어 다닌다. 그러나 앞으로 마오의 유령을 보게될 목격자는 점점 더 늘어나지 않을런지?

 

유령은 그 유령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유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흔히 말하듯 ‘한풀이'도 하지 않았는데, 유령이 사라지겠는가? 마오의 유령이 나타나는데는 마오가 던진 어떤 문제들의 동시대적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은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성격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들은 주로 문화혁명기에 제기된 것들인데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사회주의의 가역성 문제이다. 이는 마오의 이른바 ‘대과도기론’과 스탈린의 ‘소과도기론’의 대립으로 나타난바 있는데, 사회주의가 다시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스탈린을 중심으로 소련에서 제기한 소과도기론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 가역성의 가능성은 없다. 스탈린은 이를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으로 정식화한 바 있는데, 하나의 독자적 생산양식으로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선진적 생산양식이므로, 자본주의가 봉건제로 복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기초는 생산관계 측면에서 국가소유와 생산력 측면에서 과학기술 혁명이 될 것이다. 다만 이런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위협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주로 ‘외부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반해 마오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장기간의 과도적 시기로 간주하였고, 이런 이행기의 특성상 사회주의는 늘 자본주의로 복귀할 위험성을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곧바로 연관되는데, 이런 가역성이 존재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마오는 복귀의 가능성의 근거를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적인 본질에서 찾았는데, 여기서 문제의 관건은 ‘소유제’가 아니다. 소유제는 단지 법적인 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국가부르주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走資派)이 국가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인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전화의 실패인가, 생산력인가 등등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마오는 분명한 대답을 내리지 않았고, 문화대혁명기의 논쟁도 여기에 다중적 답변을 주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일정한 정치적 분파의 문제인 것처럼, 때로는 ‘사상’(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구습에 가까운 것)의 문제로, 때로는 조직의 문제로 제기하기도 했지만, 다만 문제로 던져졌을 뿐 합의된 결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마오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력의 낙후를 근거로 삼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사실상 문제를 영원히 이월하는 것일 뿐,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두 번째 질문에 이어지는 것으로, 그렇다면 이런 이행기의 가역성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사회주의 하의 정치의 새로운 형태라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사회주의를 일련의 프로그램에 따라 선진적 엘리트들의 주도로 계획된 플랜을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대중정치와 대중참여, 그리고 대중의 자기전화에 초점을 둘 것인가라는 대립이 나타나게 된다.

 

마오, 그리고 마오가 중심적으로 얽혀있던 문화대혁명은 이 문제들을 다만 문제제기로서 던졌을 뿐 그 이상의 구체적 해답의 모색에서는 복잡하게 착종된 역사적 과정으로서만 남아있을 뿐이었고, 이는 때로는 마오의 모호한 정치적 결정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어쨌건 이처럼 미해결의 형태로 제기된 마오의 질문들은 마오 사후에 개혁개방의 과정을 거치며 다시 마오의 유령과 더불어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고, 마오의 즉자적 안티테제로서 개혁개방의 이데올로기는 이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마오의 유령을 다시 무덤으로 되돌려 보낼 수 없는 취약함을 지니고 있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서 중국공산당의 정체성 전환까지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은 마오의 질문들에 대한 자기 부정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걸고서 그 이면에서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자기부정적 변화를 추동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최초의 탈마오적 시도는 마오 사후 후계노선의 정립과정에서 등장하였다. 마오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화구어펑은 마오가 말한 것은 모두 옳고 마오가 내린 결정은 모두 지켜야 한다는 ‘범시론’(凡是論)을 들고 나와서 마오의 후광을 통해 자신의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지만, 이는 마오의 문제제기가 아닌 어록만을 글자그대로 수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실을 근거로 한 반박에 취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립한 세력을 대표한 떵샤오핑은 이를 반박하면서 “실천만이 진리의 유일한 검증기준”임을 내세운 진리표준 논쟁을 촉발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노선을 중심으로 정치지도권을 확립하였다.

 

탈마오적인 개혁노선의 정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오에 대한 평가와 마오가 주도한 중국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연이은 두 단계를 통해 진행되었다. 먼저 정리된 것은 마오 개인에 대한 공식적인 역사적 평가였다. 1981년 11기 6중전회(11기 전국대표대회 제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의 공식 입장으로 정리된 “약간 중대한 문제에 대한 역사적 결의”에서는 마오에 대해서 1950년대 중반까지는 기본적으로 올바른 입장이었지만, 그 이후는 많은 오류를 범한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 마오는 더 이상 동시대적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현재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로 선고된 것이다. 이처럼 마오에 대한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린 후 다음은 마오의 ‘대과도기론’에 따른 사회주의론을 부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1980년대를 거쳐 그 이론적 결론이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으로 정리되었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그 내용상 스탈린과 소련의 소과도기론 및 전인민의 국가론과 상당히 유사한 이론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이는 또한 근대화론의 자유주의적 함의를 수용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인정하고 소유제 개조를 통해 계급이 철폐되었음을 주장하지만, 다만 사회주의 혁명 이후 과정을 중국처럼 생산력이 낙후된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의 초급단계와 고급단계를 나눌 수 있다고 보고,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 고급단계로, 그 다음 공산주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 이론의 요체였다. 떵샤요핑의 이론적 입장을 ‘유생산력론’(唯生産力論)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통해 마오의 사회주의론을 부정함으로써 개혁개방 하의 새로운 소유제의 도입, 외국 자본의 유치, 다양한 물질적 유인의 동원, 집단주의의 해체 등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친 후, 1990년대 들어서 탈마오 과정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제출된 것이 1992년 14차 당대회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이었다. 등소평의 남순강화와 맞물린 시기에 제기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은 대외적으로는 초국적 기업을 필두로하는 해외자본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면서, 대내적으로는 국유기업의 비중을 낮추고, 노동자에게 제공되었던 여러 가지 혜택을 없애며, 사적자본주의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가경제의 골간을 계획경제적 방식에서 거시경제관리적 방식으로 전환하는 등의 근본적 변화를 정당화하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의미규정 또한 이에 따라 변화하여, 국유와 집체를 합한 공유제가 차지하는 절대적 비율의 우위를 주장하던 것에서 점차 그 상대적인 중요성의 유지 정도의 의미를 주장하는 것으로 사회주의의 의미가 축소되었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의 달성여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규정 변화 속에서도 중국을 스스로 사회주의로 칭해온 중요한 근거는 두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소유제적인 규정으로 공유제의 우위였고, 두 번째는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으로서 프롤레타리아당인 공산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양자 모두 법률적 규정 이상을 넘어설 수 없음에도,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은 이중 첫 번째 영역에서 근본적 전환을 모색한 것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국가권력의 성격과 공산당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탈마오화의 길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는 2000년 장쩌민의 ‘세가지 대표론’과 2001년 사영기업가 입당 허용론에서 나타나고 있다. 세가지 대표론은 중국공산당이 선진생산력, 선진문화, 광대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런 세가지 대표론의 선진적 생산력이나 광대한 인민의 이익의 내용을 드러낸 것이 작년 7월 1일 장쩌민의 연설에서 나타났듯이 사영기업가의 공산당 입당을 추진한 것이었다.

 


계몽주의적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마오의 유령은 중국의 지식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화혁명에 대한 공식적인 역사적 해석은 문화혁명의 대표적 피박해자로 일컬어지는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발언의 공간을 개방하였고, 많은 지식인들은 문화혁명의 즉자적 반대물로서 개혁개방의 탈마오화에 대대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문화혁명이 1969년 이후 제도화된 정치켐페인으로 전화하는 과정에서 공격의 목표가 국가와 당, 그리고 관리자에서 지식인들로 전환되었으며, 여기서 지식인들은 조직된 공격에 노출되어 사회를 아홉 계급으로 나눌 때 ‘냄새나는 아홉 번째’인 가장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기억을 지니고 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공격과 마오에 대한 비판을 입지의 강화기반으로 삼은 새로운 지도부들은 이런 지식인들에게 발언의 공간을 열어주었으며, 또한 서구적 발전모델을 추종하고 엘리트주의적 교육제도가 복귀됨에 따라 지식인들의 발언권과 정책결정과 실행에서의 참여공간 또한 넓어졌다.

 

1980년대 중국지식인계의 논쟁을 주도한 것은 계몽주의였다. 이는 중국 사회주의 역사의 문제, 특히 문화대혁명의 문제를 계몽적 전통의 결핍으로 본 것이었는데, 이런 논의에서는 심지어 중국 사회주의를 ‘봉건적 사회주의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현대사는 국가를 구한다는 목표에 치우치면서 계몽이 무시됨에 따라 비극이 발생하였다는 논지가 그 대표적 입장이다. 이런 계몽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은 자유주의적 입장에 서있는데, 중국에서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적 인권 관념의 수립과 이런 자유주의적 기반을 건설하기 위한 시장의 도입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시장주의적 자유주의는 중국지도부의 입장과도 공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태를 통해 자유주의의 정치적 희망이 좌절되면서 계몽주의는 새로운 분화를 겪게된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더 보수적 입장으로 바뀌면서 중국 현대사의 비극의 뿌리는 ‘급진주의’에 있었다고 평가하고, 1919년의 5.4운동에서 문화대혁명과 1989년의 6.4에 이르기까지 점진주의적이지 않은 급진주의가 시대적 조건을 넘어서는 반계몽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이며 반지성주의적인 파괴적 효과를 낳았다는 비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들은 1990년대 들어 자유주의적인 최소한의 정치적 개혁에 대해서조차 점점 더 소극적이 되었고, 광범한 시장지향적 개혁을 통한 자유주의적 토대를 마련한 후 자유주의적 정치제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단계론으로 입장을 전환하고, 결국 이는 1990년대 중국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되게 된다. 자유주의자 중 일부 비판적 세력은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자본주의 건설을 희망하지만, 신자유주의화 추세 속에서 이들의 비판의 목소리는 힘을 싣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반해 1990년대 인문논쟁을 거치면서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신좌파’라고 지칭되는 조류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을 네가지 정도의 논점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현시대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다. 중국의 다양한 자유주의자들이 시장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고, 도덕적인 자본주의관의 환상에 빠져있음을 비판하면서, 이들은 현시대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일 수밖에 없으며, 그 자본주의는 배제와 양극화, 종속의 심화, 부패의 만연을 내장한 자본주의일 수밖에 없고, 제 3의 길은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두 번째로 중국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평가이다. 계몽주의자들이 중국사회주의를 근대적이지 않고, 근대에 도달하지 못한 ‘봉건적’ 특성을 본질로서 지니고 있는 것임을 주장한데 반해 이들은 중국 사회주의는 아주 전형적인 ‘근대적 기획’이며, 특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반근대적 근대성’이라는 역설을 띠고 있으면서 결국 그 반근대성이 근대적 틀 속, 특히 발전주의라는 자유주의의 틀 속에 함몰되어 버렸다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중국의 역사적 경험을 20세기의 전체 세계사 속에서 관찰해야 함을 뜻하고, 또한 사회주의적 길이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문제제기 속에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 속에 매몰된 근거를 규명할 필요를 제기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개혁개방기의 빠른 성장이 마오시기의 역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마오시기에도 가능한 것이었는지라는 문제를 던지고, 개혁개방 시기에 강하게 남아있는 마오시기 역사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제기하고 있다.

 

네 번째로, 마오로 대표되는 중국의 반근대성의 요소에 대한 적극적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일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등장한 다양한 적극적 반근대성의 요소들을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런 신좌파 세력 또한 아직 몇몇 지식인에 한정되어 있고,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 또한 제한적이지만, 마오의 유령이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마오가 제기한 질문과 이들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의 연결점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이후 이들 주위에서 마오의 유령을 통해 중국사회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임없이 제기될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판적 지식인들이 보는 마오의 유령과 노동대중이 보는 마오의 유령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나타났지만 점점 더 그 목소리가 닮아갈 가능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일찍이 1959년 대약진의 공과를 평가하기 위해 개최된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에 대한 평가를 놓고 펑더화이와 대립하던 마오는 대약진에 대한 반발이 심하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면 자신은 다시 유격대를 조직해 정강산에 들어가 근거지를 만들어 투쟁을 전개하겠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지금 마오의 유령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일까?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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