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곳서 ‘꽃 밝은 마을’ 찾고 있네

 

나이트클럽서 체조하듯 디스코 추던 노인
버스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남녀에 무심한 승객…
현실의 중국과 처음 만난 14년전,
이질적인 ‘서양’이 자연스레 융화되고 있었다
문화의 시대 ‘80년대 방담록’ 보다가 그때의 일이…
한겨레
» 동쪽으로는 와이탄에서 시작해서 서쪽 징안스(靜安寺)까지 5.5㎞에 이르는 중국 최대의 번화가 난징루(상하이)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중국의 젊은이들. 그러나 그들의 정신세계는 주변 상점의 다양한 간판들과 달리 점점 단조로와지는 것은 아닐까.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⑧
 

14년 전의 일이다. 내가 상상 속의 중국이 아니라 현실의 중국과 처음 만난 것은. 중국의 고전이나 중국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얼마나 ‘글자가 없는 진짜 책(無字天書)’을 볼 수 있기를 고대했던가. ‘여산’ 속에 있기 때문에 도리어 ‘여산’의 진면목을 모르게 될지라도 나는 ‘여산’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진짜로 ‘여산’에 갈 수 있었다.

 

오랫동안 중국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나라였기에 더욱더 모든 것이 새록새록 했다. 그들이 무심코 지었던 표정 하나에도 마치 격동의 현대사 비밀이 숨어 있는 듯이 진지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공원도 아닌 어두컴컴한 지하도에서 라디오 음악을 틀어놓고 중년 남녀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춤을 추거나 노인들이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목청껏 경극의 한 대목을 읊조리던 모습 하나 하나가 모두 이채로웠다.

 

그런데 나 같은 이방인의 눈에 더욱 신기한 것은 구경하기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그런 풍경에 대해 전혀 신기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매우 예외적이고 우연적인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한번은 버스 안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목도했는데 다른 승객들이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깎듯이 인사하지도 않았고 선배와 후배의 구분도 별로 없어 보였다. 중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가끔 들르곤 하던 당시 새로 생긴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에서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노인들도 찾아와서 줄서 기다리며 진지하게 ‘서양’을 맛보고 싶어 했다.

 

한번은 나이트클럽에도 가보았는데 아주 나이 지긋한 분이 마치 체조를 배우듯 디스코 춤을 열심히 따라 추고 있는데 주변의 젊은이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같았으면 물을 흐린다고 눈치를 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매우 세련되고도 섬세하게 눈치를 주었기 때문에 눈치없는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런 모습을 보고 나는 중국 사람들은 매우 실용적이고 서양적이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다른 한편 자전거를 타고 누비던 골목 속에서는 예전에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음직한 사물들과 자주 마주치게 되어 아련한 향수마저 일었다.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톈안먼 광장 앞 창안거리를 마부가 태연히 말 달구지를 끌고 가는 일도 많았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그러할 수 있소. 마음이 초연하니 땅이 저절로 편벽해지네”라는 도연명의 싯귀처럼 내가 별안간 저 궁벽한 시골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었다. 평소에 막연히 서로 조화되기 어려운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들에게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있었다. 엊그제 같던 그 때가 벌써 14년 전이라니!




장사치 뜻하는 ‘샤하이’ 유행어

 

» 난징루 건너편의 푸둥 신시가지 야경. 새 중국 얼굴이다.
최근에 출판된 <80년대 방담록>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처음 중국에 갔던 때가 생각나 이런 저런 추억을 떠올려본 것이다. 이 책은 80년대의 이른바 ‘문화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 11명을 인터뷰한 기록인데, 80년대를 인터뷰하는 일은 제목과 달리 자연스럽게 90년대 이후를 떠올리게 되고 또 두 시대를 비교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들의 회고에 따르면 중국의 80년대는 새로운 이상과 낭만적 열정에 불타던 문화의 시대였다. 마치 우리의 80년대가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시대였던 것처럼.

 

문화대혁명엔 도리어 ‘문화’가 없었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개혁 개방 이후 문화를 대부분 서양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중국은 ‘죽의 장막’ 속에서 서양문화와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5·4운동 시기처럼 중국이 현대화에 뒤쳐진 이유는 중국의 전통문화에 그 원인이 있으니 하루빨리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적어도 80년대의 주류적 흐름이었다. 그러다가 “그 후 신청년 그룹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떤 이는 출세를 하고, 어떤 이는 물러나 숨고, 어떤 이는 전진했다. 같은 진영의 동지들마저 이러한 변화가 있을 수 있음을 나는 또다시 경험했다.”고 토로한 루쉰의 말처럼 90년대 들어서 그들은 서서히 분화되었다. 어떤 이는 장사에 뛰어들었고 어떤 이는 해외로 떠났으며, 어떤 이는 상아탑 속의 학문의 세계로 침참해 들어갔다. 우리가 처음 중국에 갈 수 있었던 90년대 초반은 바로 그런 시기였다.

 

그 당시 가장 유행했던 말 중에 하나가 ‘샤하이(下海)’라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다에 뛰어든다는 말이지만 본래의 직업을 버리고 상업활동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에는 유명한 문화인인 아무개가 ‘바다에 뛰어들었다’라거나 과연 지식인의 샤하이는 바람직한 것이냐는 논의가 무성했던 기억이 난다. 모두가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절로 든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시장경제체제 속으로 본격적으로 진입하자 이런 저런 논의가 다 무색해져 버렸다. 1994년에 벌어진 인문정신 논쟁은 경제개혁과 현대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인문적 지식인의 절망적 외침이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복벽운동이라거나 좌파적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비춰지면서 금방 사라져버렸다. 90년대는 이미 문화의 시대가 아니었고 경제의 시대였다. 어느덧 인문적 지식인들은 사회의 저 변방의 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냉혹한 시장의 위력 몰랐던 지식인

시장경제가 도래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만약 전면적으로 시장화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하면서 문화를 향유하는 고상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이 가장 원하는 이상(현대화, 경제개혁)이 실현되는 순간이 가장 원치 않는 사실(가치상실, 사회의 전반적 비속화)과 직면하게 되는 때임을 그 누가 알았으랴. 냉혹한 시장과 자본의 위력은 점차 두드러졌고 지식계는 급기야 1997년 신좌파와 자유주의 진영으로 크게 분화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90년대와 오늘날의 상용어는 현실, 이익, 돈, 시장, 자본주의, 정보, 유행, 대중 등임에 반해 80년대에 자주 등장했던 용어들은 격정, 반발, 낭만, 이상주의, 사회주의, 계몽, 역사, 문화, 엘리트 등이었다.

 

그러나 “산 끊기고 물 다하여 길 없는 줄 알았더니 버드나무 그윽하고 꽃 밝은 또 한 마을 나오더라”는 싯귀에 나오는 ‘또 다른 마을’은 정녕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이 책의 대담자 중의 한 사람이며 80년대의 문화열의 와중에서 서양의 다양한 고전 총서를 기획 소개하여 철저재건파 혹은 전반서화파의 한 사람으로 불렸던 간양(甘陽)의 최근 주장이 눈길을 끈다. 그는 20세기에 중국이 민족국가(nation-state)를 건립하는 일에 매진해왔다면 21세기에는 문명국가(civilization-state)를 다시금 건설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국이 개혁 개방 이후 25년 만에 세계가 놀라는 비약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마오 시대에 닦아 놓았던 군중과 기층을 중시했던 이른바 옌안노선과 중국전통문명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연안노선이라는 것은 중앙이 모든 것을 계획해서 결정하는 소련식의 노선과 달리 중국은 일찍이 지방화의 길을 걸었으며, 중국전통문명의 힘이란 해외의 화교자본이 중국에 와서 투자하는데 고향과 인정을 중시하는 전통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는 말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에서 계획경제가 가장 발전했을 때에도 중앙정부는 600종의 제품 생산과 분배를 통제했지만 소련은 5500종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 사는 인도인들은 대부분 중상류층이지만 그들은 중국인과 달리 고향에 돌아가 투자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의 소프트파워 ‘사회주의 전통’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따라서 단순히 현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전통문화를 비판하거나 개혁 개방을 위해서 마오 시대의 평등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인애(仁愛)로 개괄할 수 있는 중국의 유가적 전통과, 평등과 참여로 요약할 수 있는 마오 시대의 전통, 그리고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개혁 개방 이래의 또 다른 전통, 이 세 가지 전통을 잘 조화시켜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천민적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 그의 새로운 문명국가 건설의 핵심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회주의적 전통이야말로 중국의 가장 중요한 소프트 파워의 하나라고 단언한다. 80년대 당시에 전통을 계승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통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그였기에, 그리고 오랫동안 미국에 머물며 서양문명을 공부해온 그였기에 이런 그의 주장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시절을 회고하는 책을 읽으며 찌는 무더위를 날려본다. “그대가 세간심을 떨쳐 버린다면 어느 누대의 달이 밝지 않으랴.” 아큐식 피서법?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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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함 노래한 린위탕…이제 와 그를 그리네

 

“미국인들은 위대하게 바쁜 사람이요, 중국인들은 위대하게 게으른 사람이다”
린위탕은 중국인의 유한자적 기질 찬미했으나 바쁜 미국인보다 더 바빠진 중국인
그를 통해 ‘노장의 천성’ 되찾고자 하는가
한겨레
» 린위탕은 “중국인들은 천성적으로 노장사상에 가깝다”며 중국인의 유한자적 자질을 찬미했다. 그림은 노자가 늙은 소를 타고 두루 돌아다니며 자연방임과 무위를 즐기는 모습.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⑦
 

한때 나는 린위탕(임어당)의 책을 보고 있을 시간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적(閑適, leisure and comfortable), 성령(性靈, human spirit), 유머를 주장한 그의 사상이 너무 한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그가 쓴 루쉰의 추도문을 읽게 되었는데, 그 후 나는 린위탕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 린위탕이 루쉰을? 그것은 루쉰을 문인이라기보다는 <수호지>에 나오는 노지심(魯智深)과 같은 전사(戰士)로 아주 생동감 있게 묘사한 독특한 추도문이었다. 루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 속에는 은은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루쉰과 나는 두 번 서로를 얻었고, 두 번 멀어졌다. 그 두 가지는 모두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루쉰과 나 사이에 고하나 우열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줄곧 루쉰을 존경했다. 루쉰이 나를 알아봐 주었을 때 나는 서로 알게 된 사실을 기뻐했고, 루쉰이 나를 버렸을 때도 나는 후회는 없었다. 대체로 본 바가 서로 다르기도 했고 같기도 했다. 그러나 만나고 헤어지는데 절대로 사사로운 감정은 없었다.”

 

바쁜일을 한가롭게 받아들이라

린위탕은 1936년 8월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사실 궁지에 몰려 있었다. 국민당과 좌련(左聯)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고 더욱이 루쉰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영문으로 쓴 <내 나라 내 국민>이라는 책이 국외에서 반응이 좋았다. 펄 벅의 초청도 있고 국내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리고 공포 등이 겹쳐 그는 미국행을 단행했다. 사실 “구망(求亡, 망국을 구하는 일)이 계몽을 압도하던” 시기에 그의 유머가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다. 몇 달 뒤 루쉰은 죽었고 린위탕은 뉴욕에서 루쉰의 부음을 접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글을 보고 린위탕에 대해 ‘애정’이 생겼다. 그 후 서가에 오랫동안 외롭게 꽂혀 있던 <생활의 발견>(1937)을 발견했다. 책을 펴자 “사람이 도를 크게 만드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공자의 말과, “세상 사람들이 바쁘게 서두르는 일을 한가롭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세상 사람들이 한가하게 받아들이는 일에 바쁠 수 있다.”는 장조(張潮)의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전에도 알고 있는 말이었건만 내가 변했는지 세상이 변했는지 아니면 둘 다 변했는지 아주 새롭게 와 닿았다.




» 1919년에 결혼한 린위탕이 신방을 차렸던 집. 샤먼의 구랑위라는 작은 섬에 있다. 린은 여기 살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곳엔 지금도 그의 부인의 조카가 살고 있다.

 

공자의 이 말은 “길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라는 루쉰의 말과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게 느껴졌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진리를 ‘자유롭게’ 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공자에서부터 루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내려오는 중국적 전통이 아닐까. 사실 마오의 대장정이라는 것도 국민당의 포위에 몰려 도망치다가 항일을 기치로 새롭게 만들어낸 길이 아니겠는가. 병불염사. 병법에서는 적을 속이는 것도 꺼려하지 않는 법. 규칙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규칙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글로벌 스탠더드’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유일한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별안간 뜬금없이 들었다.

 

또한 <유몽영(幽夢影)>이라는 책에 나오는 장조의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엔 바쁘고 정작 중요한 일에는 한가하다고 자주 비판받는 나를 위해 준비해둔 말처럼 들렸다. 사실 이 말은 린위탕이 “미국인들은 위대하게 바쁜 사람으로 유명하고, 중국인은 위대하게 게으른 사람으로 유명하다.”고 하면서 중국인의 “위대한 유한자(悠閑者)”적 기질을 찬미하고자 사용한 말이지만…. 정말 지금도 베이징의 골목이나 공원에 가보면 이 말의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몽영>은 특히 요즘 같은 휴가철에 나무 그늘 같은 곳에 앉아서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해가면서 읽기 좋은 책이다. 몇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다. “흉중의 작은 불평은 술로써 삭힐 수 있지만, 세상의 큰 불평은 칼이 아니면 풀 수 없다.”, “자신을 다스릴 때는 가을 기운처럼 해야 하고, 처세는 봄기운처럼 해야 한다.”, “젊은이는 노인의 식견을 가져야 하고 노인은 반드시 젊은이의 흉금을 가져야 한다.” 등등

 

‘유몽영’ 구절 휴가철에 곱씹을만

린위탕(1895-1976)은 푸젠성 룽시현(현 장저우)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아주 독특하게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교회에서 세운 학교에서 주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상하이의 성 요한대학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현 칭화대학의 전신)에서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나중에 서양에 중국문화를 알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그였지만 이 당시까지 그는 중국문화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었다. 교사생활 동안 <홍루몽> 등을 아주 열심히 공부하면서 중국문화에 대한 기초를 비로소 다지게 된다. 당시 칭화대학에는 3년 동안 재직하면 학교에서 유학을 갈 수 있게 보조금을 지급해주는 규정이 있었다. 보조금은 매월 40달러. 3년 후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다시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 린위탕.
재미있는 일화 하나. 린위탕은 유학 시절 후스(胡適)로부터 두 번 경제적 도움을 받는다. 한번은 미국유학 시절 아내의 수술 때문이고 다른 한번은 독일에 있을 때 매달 보내오던 칭화대학의 보조금이 끊겼기 때문이다. 당시 돈으로 모두 1500달러. 린위탕은 베이징 대학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한 후 바로 후스를 찾는다. 그러나 그때 마침 후스는 휴가를 내고 남쪽에서 요양 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린위탕은 이 돈을 평생 갚지 못한다. 나중에 후스 사후에 린위탕이 토로한 이야기다. 후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사상적으로도 가까웠지만 귀국 후 의외로 루쉰이 이끌던 <어사>파에 가담한다. 이 잡지는 후스의 <현대평론>파와 당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정치인이 되기 위한 글쓰기 연습을 하는 듯한 <현대평론>보다 진심을 토로하는 <어사>의 방일(放逸)한 논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베이징 여자사범대학 사건 때 린위탕은 루쉰과 함께 학생 편에 서서 교육계와 학교 당국에 맞서기도 하고 중국민권보장동맹회의 중요 멤버였던 ‘운동권’ 교수였다. 그들은 동료였지만 루쉰이 린위탕보다 14살이 많았다. 루쉰과 그의 동생 저우쭤런의 영향하에서 린위탕은 도가사상과 만나게 된다. 루쉰과 저우쭤런은 모두 도가와 도교가 중국문화와 중국인의 민족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한 바가 있었다. “우리들(중국인)은 공부자의 팻말을 걸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 장자의 사숙제자이다.” 루쉰의 말이다. <내 나라 내 국민>에서 린위탕은 “중국인들이 천성적으로 노장사상에 가까운 것이 교육을 통해 공자사상과 가까워지는 것보다 심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루쉰 영향으로 도가 심취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미국으로 건너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출판한 <생활의 발견>(참고적으로 말하면 중국판 제목은 ‘生活的藝術’이다)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심미적인 눈으로 생활을 즐기라고 하는 도가의 주장이 중국인의 생활을 예술화시켰다고 설파했다. 또한 <홍루몽>의 체제를 모방한 <경화연운(京華煙雲>(1939)을 창작하는 등 미국에서 생활했던 30년 동안 왕성한 집필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40년대에 들어서 급격히 장제스의 국민당에 기울면서 공산당을 비판하기도 하고, 1966년에 타이완에 정착하는 등 대륙과는 거리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대륙에서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연설과 여자의 치마는 짧을수록 좋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식 난방이 된 영국 스타일의 방에서 중국인 주방장을 고용하고 프랑스 여자 친구를 사귀며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우리도 예전에 언젠가 듣고 함께 웃었던 ‘통 큰’ 유머가 계급투쟁에 몰두했던 중국에서 환영받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차츰 그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다가 작년에는 관영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에서 이미 80년대 말에 타이완에서 드라마화되었던 <경화연운>을 다시 제작해서 대히트하는 등 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화했다.

 

최근 중국을 다녀온 사람에게 소감을 물으니 한마디로 “중국은 공사중”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미국인들은 위대하게 바쁜 사람으로 유명하고, 중국인은 위대하게 게으른 사람으로 유명하다.”고 했지만 세계화의 거센 파고 속에서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인은 미국인보다 훨씬 바쁘게 살고 있고, 또 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한가함을 노래한 그의 책들이 새롭게 환영받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신좌파’적인 루쉰과 자유주의적인 후스 사이에서 또 다른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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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도 글로벌 스탠더드 세례

 

찬 돼지머리 고기도 먹기 쉽잖았던 20세기 공자
최근 중국에 전통문화 대표자 신분으로 부활
하나의 모습 띤 ‘표준상’ 전세계 보급한다는데…
내가 아는 공자만도 천의 얼굴이렷다
한겨레

 

» 유교 창시자인 공자의 후손들이 공씨 가문의 족보를 살펴보고 있다. 중국 동남부 푸젠성의 ‘공자 마을’로 알려진 시쥔 촌에는 126가구 600여명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푸저우/신화 연합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⑥

지난 달 13일 중국에서 공자 표준 조소상(彫塑像)이 공개되었다고 한다. 산동성 문화산업박람회 조직위원회와 중국공자기금회가 산동성 지난(濟南)에서 공자의 표준상 시제품(初稿)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지난 1월에 공모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하니 아무리 완성품이 아니고 시제품이라고는 하지만 급조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엄격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을 주는 육칠십 대의 공자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는 등 상당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 향후 지속적으로 국내외의 여러 의견을 참고하여 오는 9월 공자 탄신 2557주년 제사 때에 최종 완성본을 정식으로 전세계에 공포할 예정이라고 한다. 바야흐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조하는 세계화의 시대에 이제 공자상마저 국제적 표준이 제정되는 것이다. 가장 산동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돈도 재물도 없는 공자 사당은 썰렁

이러한 소식은 그간 간간이 들려오던 공자학원(Confucius Institute)의 세계적 확산, 공자에 대한 성대한 제사 그리고 유가 경전 읽기 붐 등 일련의 시리즈의 ‘완결판’으로 공자의 위상이 중국 전통문화의 대표자의 신분으로 ‘격상’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세기에 극복해야 할 구질서나 봉건문화의 상징으로 매도되던 공자가 21세기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난 세기에 공자의 신세가 ‘하한가’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상종가’를 구가하던 시절도 없지 않았다. 민국시대였던 1925년에 교육부가 주관해서 소학교에서 유가 경전을 읽도록 한 경우도 있었고, 1930년대에는 장제스가 신생활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유(四維, 예의염치)와 팔덕(八德, 충효인애신의화평)과 같은 유가 도덕을 강조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신생활운동의 본질은 일본이 무력침공을 기도하자 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구국의 기운에 대항해서 장제스 일파가 자신들의 군사독재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국민적 정신동원을 도모하려는 데에 있었지만….

 

» 작가 루쉰의 고향 샤오싱의 시엔헝 주점 앞에 서 있는 쿵이지상. 쿵이지 손가락 사이의 작은 물건은 소설에 등장하는 회향콩이다. 쿵이지는 아이들에게 더 이상 나눠줄 콩이 없다고 하면서 “군자는 다재다능한가, 다능하지 않은 법이다.(君子多乎哉 不多也)”라는 공자의 말을 연상시키는 “많지 않아. 많지 않아. 많은가? 많지 않다(不多不多 多乎哉 不多也)”라고 주절거린다.
돌이켜보면 한 무제에 의해 유교가 국교화된 이후 청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수천 년 동안 공자의 형상은 역사적으로 부침을 겪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폄훼보다는 포양된 경우가 많았다. “성인과 왕은 마치 한 핏줄인 쌍둥이 형제처럼 도처에서 궁지에 빠질 때마다 서로 의지하는 구석이 있다. … 왕은 그의 칭호를 성인에게 나누어 주어 왕이란 글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성인 또한 그의 칭호를 왕에게 나누어 주어 ‘성(聖)’자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후흑학(厚黑學)의 창시자 리쭝우의 이러한 지적은 역사적으로 공자가 추앙받을 수밖에 없었던 비밀의 한 자락을 말해준다. 공자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왕의 칭호를 하사받았고 당대의 임금은 언제나 ‘성군’이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이 공자의 사당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스개 소리 하나. 공자의 사당(文廟)은 한적하기 그지없는데 반해 관운장을 모시는 관제묘(關帝廟)라든지 재물을 관장하는 재신묘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래 하루는 공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왜 나의 사당엔 사람이 없는데 당신들 사당엔 기도하는 사람들의 향냄새가 가득하냐고. 그들이 대답했다. 당신에게는 돈도 없고 칼도 없는데 누가 당신에게 와서 향불을 바치겠냐고….

 

5ㆍ4 시기의 공자를 타도하자는 타도공가점의 구호나 문혁 때의 비림비공 운동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20세기의 공자는 쇠락한 문묘에서 몇 몇 제자들과 정겹게 “차가운 돼지 머리고기를 먹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신세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공자는 칼 마르크스라는 아주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마치 700여년 전쯤에 주희(朱熹)를 통해 부처를 만났듯이. 궈모러의 역사소품 모음집인 <족발(豕蹄)> 가운데에는 이러한 공자와 마르크스의 세기적 만남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제목은 ‘마르크스, 문묘에 가다’(1925년)

 

마르크시즘 공자 통해 중국에 뿌리

» 최근 발표된 공자 표준상. <중국사상사>로 유명한 전 국가도서관장 런지위는 가장 산동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에 온 마르크스가 공자를 만나기 위해 상하이의 문묘(文廟)를 찾아갔다. 마르크스가 먼저 공자를 찾은 것은 어떤 사람한테서 자신의 사상이 공자의 사상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중대한 문제였다. 만약 자신의 사상이 정말로 공자의 사상과 모순된다면 공자의 사상이 여전히 보편적으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중국에서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때 마침 공자는 안회, 자로 그리고 자공과 같은 가까운 제자들과 차가운 돼지 머리고기를 먹고 있던 중이었다.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수염많은 게같은(개가 아니라) 얼굴을 한 인물이 마르크스라는 것을 안 공자는 크게 기뻐한다. 공자도 이미 마르크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러시아 10월 혁명의 포성이 중국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가 먼저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했지만 공자는 자신의 사상이 체계가 없다며 사양한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먼저 자신의 사상을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마르크스는 우선 자신의 사상의 기본적 출발점이 이 세상과 인생에 대한 철저한 긍정에 있음을 밝힌다. 이에 공자는 자신의 사상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면서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이상적 세계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마르크스는 만인이 한사람처럼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그들 모두 있는 힘껏 일하되 보수를 바라지 않으며, 생활 보장을 받아 춥고 굶주릴 걱정이 없는 이른바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공산사회가 바로 자신의 이상적 세계라고 말한다. 이 말에 점잖은 공자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 도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가 만인의 것이 된다. 사람들은 현자와 능력있는 자를 선출하며 믿음과 화목을 중시하게 된다.…재물이 헛되이 낭비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사사로이 독점하지도 않는다. 힘써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위해 힘을 쓰지는 않는다…” 이러한 자신의 대동(大同)세계의 이상이 마르크스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냉정하게 자신의 이상이 공상가들과 다르다고 힘주어 말한다. 공자 당신은 기껏해야 ‘공상적 사회주의자’에 불과하다는 듯이. 마르크스는 자신의 주장은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균등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도 걱정하고 균등하지 못한 것도 걱정하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자 공자는 물질을 존중하는 것이 본래 중국의 전통사상이었으며, 이러한 중국의 전통사상과 자신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당신과 마찬가지로 산업을 발전시킨 이후에 균등한 분배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마르크스는 2천여년 전 이 먼 동방에 이렇게 훌륭한 자신의 동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공자보다 노자가 빈말쟁이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이는 궈모러가 마르크시즘이 중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어낸 가상적 이야기이지만 여기엔 두 사람의 핵심 사상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공자와 마르크스를 화해시키는 미덕이 있다. 하지만 궈모러의 이러한 노력은 나중에 마오에 의해 신랄하게 비판을 받았다. 마르크스(민주제) 플러스 진시황(집중제)을 자임했던 마오가 공자를 비판한 것은 그가 빈말쟁이였기 때문이라는 점은 이미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마오가 높이 추앙했던 루쉰은 노자와 비교하면서 공자를 이렇게 긍정한 적이 있다. “공자와 노자가 논쟁을 벌였을 때, 공자가 이기고 노자가 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자는 부드러움(柔)을 숭상한다. (유가의) ‘유(儒)는 유(柔)’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공자도 부드러움을 숭상한다. 그러나 공자는 부드러움으로써 나아갔고 노자는 부드러움으로써 물러섰다. 관건은 공자는 ‘안되는 줄 알면서 하는’ 실행자였고, 노자는 큰 소리나 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는(無爲而無不爲)’ 공담가였다는 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무언가 하나라도 하려면 한계를 설정해야 하고 그것은 곧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의 표준상이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사실 공자의 모습은 하나일 수 없다. 부처와 대결했던 주희의 공자에게서는 어느덧 선사(禪師)의 분위기가 배어 있고, 세계 정부를 구상했던 캉유웨이의 공자에게서는 분열된 난세 속에서 통일을 체현하고자 있는 힘이 느껴진다. 불안한 세계화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논어>를 읽다가 문득 문득 공자에게서 ‘공을기’(쿵이지: 루쉰의 단편소설 제목이자 주인공)의 그림자가 보인다. 아마도 잘못 보았을 것이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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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단지 빈말을 했고 진시황은 진정 일을 했다

 

산 비가 내리려니 누각엔 바람이 가득했다
마오 암살 기도한 ‘린뱌오 사건’ 계기로
“린뱌오가 나를 진시황이라 욕했습니다”
마오, 진시황이 그랬듯 공자 비판 ‘비림비공운동’

한겨레
» 2006년은 중국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지 40돌이 되는 해다.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에 대한 평가를 엇갈리게 만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장차 또 어떻게 바뀌어갈까. 지난 2일 베이징 시장의 문화대혁명 기념품 가게에서 손님이 마오를 추억하는 포스터를 들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⑤

아큐가 아니라 IQ가 75인 포레스트 검프가 항상 바보 같지는 않았다.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 포레스트가 미국 탁구 대표팀 선수로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한 인상을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어눌하지만 매우 ‘예리하게’ 중국을 단 두 문장으로 개괄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들이 거의 가진 게 없어요.” “그들은 교회에 가지 않아요.” 사회자는 상상(imagine)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자 포레스트 검프 옆에 앉아 있던 딱정벌레(비틀즈) 그룹의 영혼, 존 레논은 노력하기만 한다면 그건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마치 그의 불후의 명곡 이매진의 노랫말처럼. “상상해보세요 국경이 없는 세상을/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누굴 죽이거나 죽을 이유도 없겠지요 / 종교도 없어지겠지요/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게 사는 것을 / 상상해보세요 소유가 없는 세상을 / 당신이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소유가 없다면 탐욕도 굶주림도 없고/ 사람은 모두 한 형제가 될 텐데/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을” 로버트 제멕키스 감독은 포레스트 검프의 입을 통해 미국의 보수세력의 입장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존 레논과 같은 반전 평화주의자들이 꿈꾸는(이매진) 세상, 즉 종교도 없고 소유도 없는 세상은 바로 우리의 포레스트 검프가 방문하고 돌아온 “가진 것이 없고 교회도 가지 않는” 다시 말하면 지독하게 가난하고, 신을 업신여기는 불경스런 중국과 같은 세계라고 슬쩍 비꼬고 있는 것이다. 성동격서.

 

사실 1971년 4월10일부터 17일까지 미국 탁구 대표단과 기자들이 방문했던 당시 중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난했으며 물론 교회에도 가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니라 ‘대동란’의 와중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문화대혁명이라는 인류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대격동, 대실험 속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미국 선수단이 이러한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직전에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가 중국쪽의 방문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핑퐁외교’ 없었다면 동유럽 신세

» 1972년 2월 냉전체제를 뒤흔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방문 때 중국 노동자들과 얘기하는 닉슨 대통령.
이를 두고 핑퐁외교라고 부르지만 마오는 1970년에 에드거 스노를 만나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에게 초청 의사를 전하는 등 이전부터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벗어나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닉슨 대통령은 1972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과 미국이 소련을 겨냥한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은 것이다. 문혁의 와중에 있었다고 해서 중국이 10년 동안 세계와 단절되어 국내에 대혼란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와 같이 향후 새로운 동북아 구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 때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고 소련 일변도로 나아갔더라면 중국은 오늘날 동유럽의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중국 공산당에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린뱌오(임표) 사건이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린뱌오는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문혁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등 급부상하여 1969년 중국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의 후계자로까지 지명되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마오 암살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연료 부족으로 몽고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반대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로 마오와 이전부터 충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린뱌오 사건이 당시 일흔 여덟 살의 마오에게 끼친 정신적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그는 아주 일찍부터 공산당에 가입하여 대장정을 함께 했으며 결국 후계자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군부 내에 그의 세력들도 많이 있었다. 마오의 권위도 추락했고 공산당에 대한 신뢰도 하락했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마오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반성하는 가운데 유가에 반대한 루쉰을 다시금 떠올렸다. 린뱌오 사건이 있은 지 두 달 후 마오는 한 좌담회에 참석해서 아주 흥미로운 발언을 한다. “나는 동지들이 루쉰의 잡문을 보기를 권합니다. 루쉰은 중국의 제일의 성인입니다. 중국의 제일의 성인은 공자가 아닙니다. 나 또한 아닙니다. 나는 현인(賢人), 즉 성인의 학생에 해당합니다.” 이는 일찍이 옌안에 있을 때 루쉰을 논하면서 “공자는 봉건사회의 성인이고 루쉰은 현대 중국의 성인”이라고 한 발언과 미묘한 차이가 있다. 만년의 마오는 더 이상 루쉰과 공자를 위대한 성인으로 병칭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산 비가 내리려니 (중국이라는) 누각엔 바람이 가득했다.” 1973년 드디어 공자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마오는 당시 중국을 방문한 이집트 부총통을 접견했을 때 외빈들 앞에서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의 제일 유명한 황제입니다. 나도 진시황입니다. 린뱌오가 나를 진시황이라고 욕했습니다. 중국은 예로부터 두 파로 나뉩니다. 한 파는 진시황이 좋다고 말하고 다른 한 파는 진시황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고 공자에 반대합니다.”라고 천명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진시황이 뭐가 대단한가? 그는 단지 460명의 유생을 생매장했지만 우리는 4만6천여명 유생을 생매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보고 진시황 같다고 욕하는데 우리는 모두 인정한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들이 말한 것이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 우리가 더 보충해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1958)

 

린뱌오, 소련으로 가다 비행기 추락

그가 공자에 반대하고 진시황을 높이 평가한 것은 공자는 단지 빈말을 했을 따름이지만 진시황은 진정으로 일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공자를 받드는 사람들이 평소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일을 할 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진시황은 어떤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세습을 인정하지 않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건설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진시황은 집중제의 한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마오가 진시황과 공자를 병칭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단지 빈말을 한” 공자였지만 그러한 공자 사상의 영향력은 중국에서 정말로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종교가 없는 중국에서 공자는 지식인들의 ‘교주’였다. 이러한 사정은 공산당에 반대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저명한 사학자인 궈모러(郭沫若)와 같이 아주 일찍부터 공산당과 함께 한 지식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궈모러는 <십비판서>(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중국 고대 사상사>)에서 일찍이 공자를 인본주의자로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적이 있었는데, 마오는 이를 두고 그가 공자를 받들고 법가에 반대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입장은 국민당이나 린뱌오의 견해와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공자 비판을 린뱌오 비판과 연결시킨다. 이러한 마오의 생각은 장칭을 위시한 사인방에 의해서 대중운동으로 증폭되기에 이른다. 이른바 ‘비림비공’운동이 그것이다. 공자는 노예제로부터 봉건제로 이행하는 춘추말기에 몰락한 노예주 계급을 대표해서 노예제 부활을 도모한 보수반동의 사상가로 평가되어 비판받기에 이른다. 사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과유불급)는 공자의 중용 사상은 마오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질서와 안정을 중시하는 공자의 사상과 옛 것을 타파하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마오의 혁명사상은 본질적으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림비공 운동은 이미 린뱌오 사건 이후 이미 빛을 잃어버린 문혁의 회광반조(回光返照)에 불과한 비극이었다.

 

‘과유불급’ 공자사상 마오와 상극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지난 5월은 마침 문혁 발발 40주년을 맞는 달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당국이 문혁에 관한 보도를 통제하고 있다는 뉴스가 우리 언론에 약속이나 한 듯이 보도되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유명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에 문화대혁명을 검색해보면 “당신의 검색어는 법률에 저촉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뜬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에서 한번 해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문혁이라고 치니 수많은 자료를 검색할 수 있었다. 하루가 지나니 ‘문화대혁명’마저도 이상이 없었다. 문혁은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 그동안 중국의 주류적 관념이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유명한 작가인 한샤오꿍이 “편견을 더하거나 기억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빈궁한 대국이 급속히 발전하려는 가운데 겪은 재난은 우리들이 주변에서 흔히 겪는 사랑 혹은 원한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동안의 문혁 담론을 비판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는 등 새로운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과거사 청산을 말하면 민감한 반응을 보이다가도 남의 문혁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짓이라거나 연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쉽게 비판하는 것은 ‘아큐’의 정신승리법이 아니면 ‘포레스트 검프’의 복잡한(?) 단순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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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큐’는 죽지 않았다
자기기만과 굴욕적 삶으로 얼룩진 아큐 여자가 없었지만 그의 후손은 세계 도처에 있다
머리를 쓰지 말고 운명에 맡기면 보살펴준다는 미국의 아큐
‘포레스트 검프’ 나 같은 ‘아큐’의 눈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겨레
» 루쉰은 중편 <아큐정전>을 통해 자기기만과 망각, 비겁 등 퇴영적 속성에 절어 있던 근대 중국인의 영혼을 드러내고 비판했다. 루쉰은 소설집 <외침> 서문에서 중국인들을 밀폐된 방에서 고통도 모른 채 질식당해 죽어가는 사람들에 비유하면서 고통스럽더라도 그들 중 일부라도 깨워서 방을 때려 부수게 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사진은 아큐 조각상.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④
 

TV 채널 파도타기를 하다 <포레스트 검프>를 보았다. 다른 날 같았으면 그냥 다른 채널로 돌려버렸을 텐데 그날따라 마침 영화가 막 시작될 때인데다가 왠지 가볍게 머리 좀 식히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어떤 걸 가질지 아무도 알 수 없어.” TV는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혹 재미있는 프로가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어. 그래 일단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렇지만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영화를 보는 동안 루쉰의 <아큐정전> 생각이 났다. 왜냐하면 포레스트 검프가 미국의 아큐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아큐보다 더 황당했다. 아큐가 언제 미국에 건너간 거야?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혹시 하는 마음으로 <포레스트 검프>의 중국판 제목을 찾아보니 역시 <아감정전(阿甘正傳)>이었다. 이 영화의 중국판 제목을 붙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아큐는 중국의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고, 아큐정신, 정신승리법 같은 말은 일상어가 될 정도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아감정전(1994) 이전에 <아비정전>(1990)이라는 왕자웨이의 영화도 있었지. 아큐정전 삼부작? 여기서 아(阿)는 중국인들이 성이나 이름 앞에 붙여 친근감을 나타내는 글자로, 아감이란 포레스트 검프에서 성(姓)인 검프에 아를 붙여 친근하게 만든 호칭이다. 이처럼 가끔 알고 있는 영화를 중국에서 어떻게 제목을 붙였나 확인해보곤 하는데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엽기적인 그녀>는 <야만여우(野蠻女友)>, <매트릭스>는 <흑색제국(黑色帝國)>, <주홍글씨>는 아주 심플하게 그냥 <홍자(紅字)> 같은 식이다. 이번엔 거꾸로 아큐정전의 영어 제목을 찾아보았다. <아큐의 진짜 이야기(The true story of Ah Q)>였다. 아큐는 실존인물이 아니므로 아큐에 대한 진짜 이야기가 존재할 수 없지만 루쉰이 익살스럽게 정전(正傳)이라고 한 것을 직역한 것이다. 좌우간 포레스트 검프는 나로 하여금 ‘포레스트스럽게’ 아큐정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포레스트 중국제목 ‘아감정전’

아큐정전은 신해혁명을 전후로 한 시기에 미장이라는 농촌에서 날품팔이로 살아가는 아큐라는 최하층 농민의 일대기다. 그는 성명도 불분명하고 서른 살이 넘도록 집도 여자도 없다. 수없이 많은 굴욕을 당하고 살지만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른바 정신승리법이라는 특유의 자기 위안의 방법으로 ‘승리’를 구가하며 산다. 그렇지만 가끔 근방 암자에 사는 젊은 비구니와 같은 약자에게 자신이 강자에게 받은 굴욕과 분노를 전가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급기야 아큐는 자기를 핍박하던 사람들이 혁명을 무서워하는 것을 보고 혁명당에 가담한 것처럼 행세하다가 불쌍하게도 총살당해 죽는다는 이야기다.




중국 공산당이 창당한 해인 1921년에서 22년 사이에 씌어진 그의 유일한 중편소설로 그의 콧수염 길이 정도의 분량이다. 루쉰이 이러한 아큐를 통해 침묵하는 중국인의 영혼을 그려내고 그러한 국민성을 비판하고자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루쉰은 사상 혁명의 측면에서 아큐의 자기 기만, 놀라운 망각, 비겁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이러한 아큐가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내가 다만 현재 이전의 어느 한 시기를 써내었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가 (아큐에게서) 본 것은 결코 현대의 전신이 아니라 이후의 일, 아니 20, 30년 뒤의 일이 아닐까 한다.” 1981년 루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영화 아큐정전 마지막에는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말도 나온다. “아큐는 죽었다. 아큐는 비록 여자가 없었지만 그러나 비구니가 저주했던 것처럼 자손이 끊기지 않았다. 고증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아큐에게는 후손이 있었다. 후손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아주 번성해서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아큐의 후손들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화의 시대에 세계 도처에 있을 것이다. 또한 아큐가 항상 약자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30년대 중반에 <중국의 붉은 별>의 작가로 유명한 에드거 스노와 대화하면서 루쉰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스노가 루쉰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아큐가 현재도 이전과 같이 여전히 많다고 말하지는 않겠죠?” 루쉰은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전보다 더욱 나쁩니다. 그들은 현재 국가를 관리하고 있어요.” 당시 국가를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 신군벌이 또 다른 의미의 아큐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 황제의 노예였던 자들이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고 나서 백성들을 새롭게 노예화하고 있음을 비판한 것이다.

 

날품팔이 최하층 농민 일대기

» 할리우드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미국식 아큐 이야기다. 머리를 쓰지 말고, 운명과 신의 은혜에 만사를 맡긴 채 착하게 살면 형통한다는 검프적 세계관은 옳을까? 사진은 영화에서 검프가 탁구시합을 하는 장면.
그러나 루쉰은 아큐를 냉혹하게 비판만 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소설을 자세히 읽어보면 뒷부분으로 갈수록 루쉰은 점차 아큐의 처지와 운명을 은근히 안타깝게 동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아큐의 죽음을 보고 통쾌하게 생각되기는커녕 도리어 비애를 느끼게 되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루쉰은 아큐로 하여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정신승리법에서 벗어나 현실을 깨닫도록 만든다. 그제야 아큐는 비로소 “사람살려!”라고 외치게 된다. 이미 때는 늦었지만…. 이 소설이 실려 있는 소설집 <외침>의 서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가령 철로 밀폐된 방이 있다고 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방일세.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곤히 잠들고 있어. 그러니 오래 지나지 않아 모두가 다 질식해 죽어버릴 것일세. 그러나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으로 옮겨가는 거니까 죽음의 슬픔은 느끼지 못하는 거야. 그런데 자네가 지금 큰 소리를 쳐서, 다소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들을 깨웠다고 하면, 그들 불행한 사람들에게 도저히 구원의 길이 없는 임종의 고통을 맛보게 하는 것이 되는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꼴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아큐로 하여금 영원히 정신승리법 속에 있도록 그냥 놔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눈뜬 사람이 몇이라도 있다면 그 철로 된 방을 때려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아큐를 깨닫게 하고 죽인 것은 루쉰이 미래의 희망이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편 중국의 자유주의자들에게 그들의 선구자로 새롭게 조명받는 후스(胡適)도 일찍이 루쉰과 비슷하게 중국인의 분명하지 않은 태도를 예리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평소 즐겨 쓰는 “차부뚜어(差不多, 대충이라는 뜻)라는 말을 의인화한 <차부뚜어 선생의 전기(差不多先生傳)>가 그것이다. 이 대충 선생은 어려서부터 흰 설탕과 흑설탕을, 십(十) 자와 천(千) 자를 잘 구분하지 않았다. 뭐 그리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나중에 이 선생이 중한 병에 걸려 의사를 부르게 되었는데 집사람이 불러온 것은 수의사였다. 수의사나 의사나 차이가 많지 않다고 하여 대충 치료를 받다가 죽었다. 죽는 순간에도 그는 죽는 것과 사는 것은 대충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원융무애하게’ 죽었다. 루쉰과 대조적으로 후스는 아주 냉정하게 이 대충 선생을 죽는 순간에도 깨닫게 하지 않았다.

 

대학교 때인가 아큐정전을 처음 읽었을 때 아큐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어디있어? 그런데 중국철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불현듯 점점 바보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총명하면 친구가 없다”, “똑똑한 것보다 멍청해지기가 더 어렵다(難得糊塗)”,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는 “바보 같았다”, “큰 지혜는 어리석은 것과 같다”는 등등의 말들을 자주 접하면서 나도 점차 아큐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아니 나를 지탱하게 만든 건 8할이 아큐정신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진짜 바보가 되라는 것이 아니고 바보처럼 가장하라는 말이지만 아무튼 아큐를 남 비판하듯 함부로 비웃기는 어려웠다. 한번은 중의(中醫)를 전공한 중국인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중국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니까 그 분이 내게 중국철학의 최고의 경지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 저절로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한가롭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그러자 그 분 말씀이 몽롱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하마터면 살짝 깨달을 뻔했다. 그 분 말대로 역설적으로 아큐가 되는 것이 내가 공부하는 중국철학의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아직 완전히 아큐가 못되어 괴로운지도 모른다.

 

중국 철학 최고경지 ‘아큐스러움’

하지만 나 같은 아큐의 눈에도 머리를 쓰지 말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면 신이 알아서 보살펴 준다는 식의 포레스트 검프의 미국 아큐 이야기는 정말이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큐를 비판해도 아큐는 이렇게 많거늘, 이렇게 포레스트를 구세주처럼 그리기까지 하니 아주 오싹한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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