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소호’ 다산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798’이라는 다큐를 봤다
쇠락하던 국영공장지대가 예술구로 변해가는
4년의 과정을 181분으로 압축했는데
수백년 걸친 서구 현대화가 불과 몇년 만에 스쳐갔다
한겨레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은 중국 ⑬
 

나도 이번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아니 <798>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코앞에서 영화제가 여러 번 열렸건만 “내 인생의 반은 그대에게 있어요. 나머지도 나의 것이 아니죠.” 그래서 좀처럼 거동을 하지 못했었다. 설령 시간이 나더라도 표를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레 포기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주위 분의 호의로 보게 되었다. 원래는 다른 영화를 볼 계획이었는데 마침 그 시간대에 하는 아시아 다큐멘터리 <798>이 베이징의 따샨즈(大山子)라는 곳을 다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선택했다. 늦은 시간에 시작하는데다가 무려 181분에 달하는 상영시간이 마음에 좀 걸렸지만 평소 관심이 있던 ‘따샨즈’와 ‘중국 다큐멘터리(紀錄片)’를 결합한 따샨즈를 다룬 중국 다큐멘터리였기에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보았다. 결과는 대만족.

 

만리장성 다음으로 가보고 싶은곳

베이징의 ‘798 예술구’ 혹은 ‘따샨즈 예술구’는 요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부상한 지역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뉴욕의 소호 같은 곳이다. 외국인(특히 서양의)들에게 특히 유명한데, 베이징을 여행할 때 고궁과 만리장성 다음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라는 말도 있다. 근자에 우리 언론에도 이곳에서 열린 행사 소식이 심심치 않게 실리곤 해서 나도 베이징에 가게 되면 한번 가보아야지 하던 중이었다. 수도 국제공항에서 베이징 시내로 들어오는 입구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밀집해 살고 있는 ‘베이징을 바라본다는’ 뜻의 왕징(望京)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로 그 근처에 있다. 이곳은 현재 ‘798 예술구’ 혹은 ‘따샨즈 예술구’라고 불리지만 전에는 ‘718 롄허창(聯合廠)’이라고 하던 지역으로 798, 797, 718, 707, 706 등 칠자 돌림의 여러 개의 국영공장이 모여 있던 공장지대였다. 따샨즈는 이들 공장이 있던 지역의 이름이다.

 

이들 공장은 지난 세기 50년대에 소련의 원조로 지어진 것인데, 소련이 독일한테서 받은 전쟁배상금을 기초로 동독이 설계와 건축을 책임지고 완성한 것이다. 건축 양식은 독일의 유명한 바우하우스 풍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중국 최초의 원자탄과 인공위성의 핵심적 부품이나 부속품이 생산되는 등 이곳은 “신중국 전자공업의 요람”이라고 불리던 지역이었다.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세계 첨단의 공장지대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계획경제 시대의 시스템에 맞게 만들어진 이들 생산공장들은 90년대 이후 시장경제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고, 한때 이만 명이 넘던 798공장의 노동자들도 대량으로 실직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동이 중단된 빈 공장을 예술가들에게 임대하기 시작했다. 시 중심지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빈 공장의 공간은 특히 조각가들이 작업을 하기 좋게 넓고 천장이 높았으며, 더구나 임대료가 비싸지 않았기에 예술가들은 이곳을 선호했다.

 




1996년 중앙미술학원의 조소과에서 이곳의 한 창고를 임시 창작실로 빌렸는데 이 일이 798공장이 공업지구에서 예술지구로 변화하는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이곳은 점차 문화예술계의 사람들에게 유명해지면서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곳이 외부에 널리 알려진 것은 이렇게 모인 여러 예술 단체들이 연합하여 각자 개성 있는 전람회를 열었던 ‘798을 다시 새롭게 만들자!’라는 대형 행사를 개최하면서부터다.(2003년)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화랑, 출판, 건축설계, 의상 디자인, 실내가구 디자인 등 7개 분야의 229개의 문화기구 및 개인 작업실이 입주해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술집, 카페, 음식점, 서점, 요가센터 등 갖가지 소비 오락시설도 많다. 한 때 사회주의 공업 혁명을 자랑하던 곳이 개혁 개방 이후 쇠락을 길을 걷다가 그야말로 몇 년 사이에 중국의 당대예술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798’은 션 샤오민(沈曉?)이라는 젊은 감독이 이곳의 중요성을 일찍이 감지하고 2002년 10월부터 2005년 2월까지 4년간에 걸쳐 여기서 발생한 변화, 즉 폐기된 공장지대에서 번화한 예술구역으로 변모하는 변화의 과정과 사건을 영상으로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이 필름은 맨 처음에는 옌안에서 올라와 마오쩌둥의 다양한 진흙 소조상(塑造像)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왕원하이(王文海)라는 가난한 예술가에 관심을 가지고 찍기 시작하다가 점차 798 예술구 전체가 갖는 상징성에 주목하여 주제를 확대해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보기 전에는 3시간이라는 상영시간이 조금 길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보니 그다지 길다는 느낌을 들지 않았다. 중국 매니아의 발언이니 감안하고 들으시라. 웬일인지 관객은 십여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나중에 박수를 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재미있게 보았기 때문에 집에 돌아와 이리 저리 조사해보니 감독이 처음에는 20시간짜리로 편집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중간에 다시 390분짜리로 편집한 것도 있었다. 감독은 이곳이 썰렁한 공장지대에서 번화한 예술 거리로 변모하는 가운데 재현하고 있는 이른바 뉴욕의 소호 현상, 즉 거의 폐기된 공장에 예술가들이 입주해 들어와 열심히 작업하면서 점차 예술적 공간의 값어치가 상승하자 상업자본이 몰려들어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결국 예술가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그곳을 뜰 수밖에 없었던 현상에 주목하면서 그 와중에 벌어졌던 예술가들과 공장주의 모순과 투쟁을 담아내고 있었다.

 

20시간짜리·390분짜리로도 편집

» 따샨즈 예술구 입구에 있는 머릿돌. 주변에 붙어 있는 많은 포스터들을 통해 이곳이 얼마나 활력이 넘치는 곳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갖는 상징성. 중국은 서양의 수백 년의 현대화 과정을 “반자본주의적 현대화”의 방식으로 압축적으로 따라잡으려 했지만 개혁 개방 이후 이를 수정한다. 그리하여 서양에서 수십 년에 걸쳐 이룩된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와 중국에서 불과 몇 년 사이에 모두 한 번씩 스치고 지나간다. 80년대 중반 이후 벌어진 문화열의 와중에서 서양의 다양한 철학적 사조들이 밀려들어와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양상을 전개했듯이 당대 예술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행위예술, 누보 리얼리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서양 현대의 다양한 예술사조가 이곳에서 실험되었다.

 

한번은 남녀가 나체로 뛰어다니는 장면을 연출하거나 창녀와 성행위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등의 전위예술 때문에 이곳에 거주하는 예술가들이 연합해서 열려고 했던 “따샨즈 예술제”가 무산되기도 하였으며 공장주와의 모순이 격화되어 심지어 이곳 예술구가 존폐의 기로에 놓인 적도 있었다. 이 작품은 이런 과정을 문서로 기록하듯이 찬찬히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최초로 이곳에 입주한 수이 지엔궈라는 저명한 조각가가 자신의 작품을 트럭에 싣고 이곳을 떠나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잡아 보여주었는데 여운이 깊었다.

 

난 이 작품을 보고 마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황지우의 시를 읽은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과 달리 현재 다른 ‘새’들이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어 이곳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다. 유명 브랜드회사가 주최하는 패션쇼와 같은 행사가 자주 이곳에서 열리기도 하고 세계적인 저명인사가 이곳을 방문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클럽이나 작업실에서 매 15분마다 국내외의 관람객을 접대한다는 조사도 있다.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 프랑스의 뽕삐두 예술문화센터 등이 앞으로 이곳에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이곳이 일종의 문화 특구격인 “문화창의산업단지”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다양한 지원을 받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곳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관변조직도 생겼다고 한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그러나 ‘798’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798 예술 특구라는 화려한 현상의 배후에 놓인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이곳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획득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90년대 초부터 이와 같이 다큐멘터리로 역사를 기록하는 운동이 민간에서 전개되고 발전되어 왔다. 푸단대학의 뤼신위(呂新雨) 교수 같은 이는 이러한 흐름을 “신 기록운동(新紀錄運動)”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는 이전의 관변 다큐멘터리와 달리 카메라의 시선을 민간사회로 전환하고 촬영자의 심적 태도를 낮춘 다큐멘터리 제작 운동을 말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운동의 발전에 기술적 토양을 제공하였으며 급변하는 중국사회는 이런 방식의 기록의 필요성과 동력을 제공하였다. 왕빙의 장장 9시간짜리 ‘티에시취(鐵西區)’와 같은 유명한 걸작도 이러한 흐름 중에 탄생한 것이다. 아무쪼록 이와 같은 좋은 작품들이 국제영화제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자주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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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공’의 피를 먹고 사는 12억명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⑫
한겨레
» 휴식을 취하면서 담소하고 있는 농민꿍들. 농민꿍이 1년에 천만명이나 증가해도 중국이 그런대로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그들이 불평등한 대접을 받더라도 차라리 도시로 나가는 것이 농촌의 농민으로 머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관련기사]
최근 우연한 기회를 통해 루쉐이(육학예)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사회학자들을 만나 농민공(農民工)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루쉐이는 중국 사회과학원 사회학연구소의 전 소장이었던 원로학자로, 사회학 이론과 농촌발전 이론 분야의 전문가다. 중국의 이른바 삼농(三農) 문제, 즉 농민의 고난, 농촌의 빈궁화, 농업의 위기 문제는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현재의 중국 지도부가 사회주의 신농촌건설을 국정의 주요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공은 개념조차 생소했는데 이분들과의 만남을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농민꿍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제출한 분들이었다. “그대와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십년 책 읽는 것보다 낫네(聽君一席話 勝讀十年書)”라는 중국의 말이 절로 생각나는 자리였다.
 

이농 막으려던 호적법이 족쇄로

중국은 지난 세기 1950년대 말에 발생한 3년 동안의 경제적 곤란 상황에서 야기된 식량부족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의 호적을 달리하는 이원적 정책을 펼쳐왔다. 호적상의 신분을 농업과 비농업으로 나누어 농업인구의 비농업인구로의 전환을 엄격히 제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경제체제 개혁이 도시로 확대되면서 도시의 2-3차 산업이 대폭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촌에서 도시로 “맹목적으로 유동하는(盲流)” 농민이 생겨나게 된다. 중국 인민대학 농업과 농촌발전학원 원장이며 삼농문제 전문가인 원톄쥔(溫鐵軍)에 따르면 이러한 농민공의 유동 문제는 1992년 도시에서 식량 배급표(粮票)를 없애버리는 조치를 단행한 이후 진정으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도 인구의 유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숫자가 적었다. 하지만 농민도 도시에 와서 일하고 번 돈으로 식품과 생활필수품을 살 수 있게 된 조처 덕분에 숫자는 크게 증가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농민꿍의 숫자가 당시에 이미 4천만 명이었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중국의 경제는 쾌속 성장기에 진입, 농민꿍은 매년 1천만 명 정도 증가하여 2005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의 3배인 1억2천만 명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 만년의 량수밍 모습.
농민공이란 이처럼 거대한 전환기에 처해 있는 중국사회의 특수한 계층으로, 농민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호적상으로는 농민의 신분이지만 실제로는 도시에 와서 노동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전에는 일반적으로 그냥 민공이라고 불렀다. 사전에도 올라 있는 민공이란 말은 첫째 정부가 동원하거나 호소해서 도로나 제방 혹은 군수물자 수송 등의 일에 참가한 사람, 둘째 도시에 와서 노무에 종사하는 농민을 지칭한다. 그러나 농민공은 과거 민공이라고 지칭하던 때보다 숫자가 훨씬 많고, 아무런 조직이나 기관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 민공과 다르다. 그리하여 농민공이 민공을 대신한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2억명 달하는 농민 호적의 도시 노동자 ‘농민공’
호적 제약 때문에 임금 3분의 1밖에 못받아
도-농차별·노-농차별·육체노동의 차별 한몸에
세계적 가격경쟁력 뒤에는 농민공의 희생이 있다

이들의 평균 임금은 농민이라는 호적상의 제약 때문에 같은 일을 하고도 도시 노동자 임금의 3분의 1 내지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중국 상품이 세계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있는 이면에는 이런 농민공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나라나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 그 인구가 적고 비교적 단기간의 현상에 불과했다면 중국의 경우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인구와 관련된 문제라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농민공은 농촌의 향진기업에서 일하는 “토지에서부터는 벗어났지만 고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은” 사람과 다른 도시로 나가 2-3차 산업에 종사하는 “토지와 고향 모두로부터 벗어난” 사람 모두를 포괄한다. 좁은 의미로는 철새와 같이 떠도는 후자만을 지칭하는데, 양자를 포괄하면 무려 2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에 달한다. 당연히 이들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파생되고 있다. 따라서 농민공의 문제는 중국이 마주한 여러 가지 사회문제 중에서도 정말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임시거주증이 없다는 이유로 구속 수감되었다가 구타당해 사망함으로써 인권과 호적제도 개선이라는 화두를 중국사회에 던진 광둥의 쑨즈깡 사건도 사실 농민꿍의 문제와 연관된 것이다.




농민공에 관한 대화를 나눈 이후에 관련 자료를 찾아 읽어보면서 생각나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식량 배급표에 관한 추억이다. 내가 처음 중국에 갔던 때가 마침 1992년이었는데 그 당시 주로 하던 일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 시내를 “싸돌아다니는” 일이었다. 하긴 백번 들어도 잘 들리지도 않았다.

 

사회주의의 추억 ‘식량 배급표’

» 식량배급표. 그밖에 기름표, 옷감표 등이 있었다.
하루는 어떤 가게 앞에 많은 사람이 줄서 있길래 무슨 일인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나도 따라 줄을 서본 일이 있었다. 들리지 않으니 잘 말할 수도 없어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무슨 일예요?”라는 메시지를 가득 담은 눈으로 기웃거리자 주변에 있던 사람에게 내 마음이 전달됐는지 어떤 친절한 분이 웃으면서 작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예전에 쓰던 우리나라의 버스 회수권만한 크기였는데 살펴보니 식량 배급표였다. 나는 ‘식량배급표’를 손으로 만지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아하, 이게 바로 사회주의구나! 나중에 이걸 주고 쌀을 평소보다 조금 싸게 산 일이 있는데 외국인으로서 내가 중국의 사회주의를 손으로 직접 느낀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역이나 건설현장을 지나다가 도처에서 마주친 허름하다 못해 비루한 복장을 하고 피곤한 표정을 짓던 수많은 중국인들과 그 당시 마지막으로 보았던 식량 배급표는 서로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최후의 유학자”로 유명한 량수밍(양수명, 1893-1988)에 관한 일화이다. 그는 신중국 성립 이전에 10년 동안 향촌건설운동에 종사한 일도 있으며 중국민주동맹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사이에서 양자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저명한 민주인사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제3세력을 결집시켜 항일 민족통일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와중에 1938년 옌안을 방문해 항일전쟁에 관한 전망과 계급투쟁의 문제를 두고 마오와 여러차례 격의없는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와 마오는 동년배였다. 마오는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그에게 전용차를 보내 중난하이에서 접견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은 1953년 9월 중순에 그를 비롯한 100여명의 민주인사에게 당의 “총노선”에 관한 의견을 물은 일이 있었다. 량수밍은 회의석상에서 폭탄발언을 한다. 어떤 농촌간부들은 지방정부를 장악해서 온갖 위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며 생산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농민은 배불리 먹지도 못해서 도시로 와서 막노동에 종사하기도 하고 있다, 도시의 노동자와 농촌 농민의 생활은 천양지차다, 공산당은 농민을 잊지 말고 인정(仁政)을 펼치기 바란다 등등. 그러자 마오는 량수밍에게 엄청난 발언을 퍼부었다. 장제스가 총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량수밍 당신은 붓으로 사람을 교묘하게 죽이는 살인범이라느니, 사회주의 총노선에 은근히 반대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를 파괴하고 있다느니, 농민혁명에 성공한 공산당 앞에서 감히 농민을 운운하냐는 등 거칠게 마구 비판했다.

 

삼농 문제 심각한 요즘

“공산당은 농민을 잊지 말고

인정을 펼치기 바란다”

마지막 유학자의 직언이

새삼 그리워진다

량수밍은 이에 불복해 자신은 결코 총노선에 반대하거나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를 파괴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닌데 마오 주석이 오해했으니 말을 거둬들여라, 당신에게 이런 아량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카랑카랑하게 항의했다. 커다란 소동이 일어난 것은 불문가지였다. 반동분자에게 민주적 권리는 없다느니, 헛소리 집어치라는 고성이 난무했다. 량수밍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여 결국 공개표결에 부쳤지만 결과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 후 량수밍은 중국의 정치적 무대에서 사라졌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처음 이 일화를 접했을 때 절대권력 앞에서 직언을 할 수 있었던 량수밍의 용기에 탄복했으며 그에 대한 마오의 비판은 냉정과 아량을 잃은 지나친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으로 혁명에 성공한 마오 앞에서 농민 운운했던 그의 발언도 ‘오버’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농촌을 중시하라는 그의 발언에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량수밍은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는” 그런 강골의 인물이었다. 그가 정치의 무대에서 일찍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중국의 삼농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노동자와 농민의 차별, 도시와 농촌의 차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별이라는 중국의 삼대 차별의 모순을 한 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농민꿍을 생각할 때 농민을 위해 감히 발언할 수 있었던 량수밍과 같은 인물이 새삼 그리워진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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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의 궁전 ‘홍루몽’

 

“홍루몽은 소승, 금병매는 대승, 수호전은 선종”
“홍루몽을 읽어야만 중국 봉건사회를 이해”
중국인이라면 한마디씩 걸치는 걸작 중의 걸작
TV드라마 오디션에 10만명이나 몰렸다는데…
한겨레
» 베이징의 대관원. 황제의 귀비가 된 가보옥의 큰 누이 원춘의 친정 나들이를 기념하여 만든 정원이지만 귀비 행차 이후 빈 정원으로 퇴락할 것을 우려하여 가씨 집안의 아가씨들을 거주하게 한다. 이 때 남자인 보옥이 유일하게 청일점으로 홍루 세계에 거주하게 된다. 베이징 대관원은 1984년 TV 드라마를 위해 세트장으로 만든 것이다.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⑪
 

“고리키의 <40년>, <클림 삼긴의 생애>, 투르게네프의 <루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루쉰의 <아큐정전>, 마오둔(茅盾)의 <동요>, 조설근의 <홍루몽>- 이 책들은 정말 다시 읽어볼만한 책이다. 중국의 두부도 세상에서 정말 맛있는 음식이다. 세계 제일이다. 영원히 안녕!”

 

이는 한때(1930.9~1931.1)나마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있었던 취츄바이(瞿秋白)가 병 때문에 대장정에 참가하지 못하고 후방에 남았다가 국민당에 체포당해 총살당하기 전에 남긴 ‘최후 진술서’(<부질없는 이야기(多餘的話)>)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다. 역사의 ‘오해’로 어쩔 수 없이 공산당의 영도자가 되기도 했지만 그는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한 문인이었다. 그 글을 무슨 계기로 읽게 되었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읽었던 기억은 아직도 새롭다. 어떻게 총살당하기 전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들 책은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그가 죽음을 앞두고서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언급하였을까. <부질없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에게 매료되었기에 한없는 호기심이 샘솟았다. 그 중에서도 <홍루몽>의 명성은 일찍부터 들었을 뿐만이 아니라 중국책을 읽으면서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았던 터라 궁금증이 더했다. 이 참에 한번 읽어봐? 그렇게 해서 나도 <홍루몽>과 인연을 맺었다.

 

총살전 최후진술에서 추천할만큼




최근에 홍루몽을 50회분의 TV 드라마로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그 책을 처음 읽었던 기억을 떠올려본 것이다. 이미 1987년에 드라마화한 적이 있는데도 이번에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자본을 투자해 다시 만든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재 인터넷을 통해 배우 선발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그 열기가 정말 대단하다. 지난 달 21일 관련 사이트를 개통한 이후 9월17일 정오 12시 현재 사이트를 방문한 사람은 2430만명을 초과했다. 공개 오디션에 참가 신청한 사람도 대략 10만명을 넘어섰다. 그 중에서도 주인공인 가보옥 역에 응모한 사람은 2만7천명, 임대옥 역에는 8800명, 설보채 역에는 6600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물론 일약 유명해지고 싶은 일반인의 욕망과 이를 이용한 제작진의 상업적 고려가 자리하고 있겠지만 홍루몽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과 사랑도 일정한 작용을 했으리라.

 

가씨 일족 열두 미녀의 이야기

한편 전문가들은 홍루몽의 본래적 가치가 상업적으로 훼손될 것을 벌써부터 우려하는 경고의 목소리를 던지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중국 고전소설의 걸작 중의 걸작이긴 하지만 소설을 두고 무슨 새롭게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중국인들은 너도 나도 홍루몽을 읽고 모두 한 마디씩 하는 것 같다.

 

» 베이징의 대관원.
홍루몽은 도대체 어떤 책인가. 이른바 ‘금릉십이채(金陵十二釵)’라고 하는 금릉(지금의 난징) 출신의 가씨(賈氏) 일족의 열 두 미녀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주인공 가보옥과 그의 고종 사촌 누이 임대옥(금릉십이채 중의 한 사람)의 비극적 사랑과 그의 귀족 가문의 흥망성쇠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대략적인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조설근의 집안은 청대의 강희제의 61년에 달하는 재위기간(1661-1722) 동안 황제의 총애를 받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강희제가 죽고 옹정제가 등극하면서 공금횡령죄로 고발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완전히 몰락해버린다. 그리하여 어린 조설근도 사치스런 생활을 영위하다가 하루아침에 비참한 가난 속으로 떨어져버리게 된다. 작품 속에는 이러한 조씨 집안의 역사가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설근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먼저 왕궈웨이(王國維)와 같은 대학자는 욕망의 비극, 혹은 인생의 비극이라고 보았다. 우리나라 중국철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모우쫑산(牟宗三)도 일찍이 27살 때 홍루몽은 임대옥의 죽음과 설보채와 가보옥의 결혼, 그리고 가보옥의 출가(出家)라는 2막의 비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견해를 제기한 바가 있었다. 한편 그는 홍루몽은 소승(小乘)이고 금병매는 대승(大乘)이며 수호전은 선종(禪宗)이라고 주장했다.

 

홍루몽을 5번 읽었다고 했던 마오는 역시 그답게 홍루몽의 주제를 계급투쟁이라고 보았다. 그는 “홍루몽을 읽지 않으면 중국의 봉건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홍루몽이 중국 봉건사회의 백과전서라는 말이다. 사실 홍루몽은 중국 문화의 ‘궁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 중국적 문화의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의 관점과 유사하지만 그보다 덜 극단적인 관점으로 홍루몽을 반봉건사상을 설파한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주인공 가보옥은 남존여비와 입신양명을 강조하는 봉건사회의 이단아였다. 그는 용모와 두뇌가 모두 빼어난 남다른 소년이지만, “여자의 몸은 물로 만들어져 있고, 남자의 몸은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자를 보면 상쾌해지지만 남자를 보면 더럽고 속이 메스껍다고 느낀다. 그리고 과거 시험을 보고 공명을 차지하려는 자들은 모두 나라의 녹을 갉아먹는 벌레라고 욕을 하고 과거시험의 교재였던 사서오경과 같은 유가경전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애정의 비극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상식적이고 사실에도 부합하는 관점이지만 문혁 기간 중에는 부르주아적이라고 매우 혹독하게 비판받은 관점이다. 홍루몽은 방대하고도 풍부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 전체를 개괄하기 어렵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첫 번째의 관점에 가장 관심이 있다. 이미 홍루몽의 소극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모우쫑산의 관점은 흥미롭다.

 

한 바가지의 물만 취할 뿐이노라

여기서 잠시 가보옥과 임대옥 두 사람의 사랑의 선문답을 들어보자. 임대옥은 가보옥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보옥도 임대옥을 가장 사랑하고 있지만 불안한 임대옥은 묻는다. “보채가 그대를 좋아하면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이며, 보채가 그대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보채가 전에는 그대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이며 보채가 오늘은 그대를 좋아하지만 앞으로는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보옥이 답한다. “그것이 약수(弱水. 신선이 살았다는 전설 속의 강) 삼천리라 하더라도 나는 다만 한 바가지의 물만 취할 뿐이노라.” “바가지가 물에 떠내려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가지가 물에 뜨는 것이 아니고 물은 스스로 흐르고 바가지는 저대로 흘러가는 것뿐이니라.”, “물이 흐름을 멈추어 구슬이 가라앉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선심(禪心)이 이미 진흙에 젖은 솜꽃이거늘 봄바람을 향해 자고새도 춤추지 않을 것이로다.”, “선문(禪門)의 제일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 “이 마음 삼보와 같도다.”

 

이런 두 사람을 두고 집안 어른들은 설보채를 가보옥의 배필로 맞이한다. 이 소식을 들은 대옥은 그동안 썼던 시고(詩稿)를 불태우고 죽는다. 그 순간 가보옥은 임대옥과 결혼하는 줄 알고 설보채와 결혼한다.(첫 번째 비극) 가보옥은 나중에 임대옥이 죽은 것을 알고 절망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는 설보채와의 결혼 생활을 잘 영위하기도 하고 과거 시험에도 응시해 합격하는 등 냉정을 되찾은 듯이 보였지만 결국 출가해버린다.(두 번째 비극) 그런데 문제는 이 두 비극을 낳은 근원에 모두 설보채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설보채가 나쁜 악인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그는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를 잘 내면화시켰던 이른바 ‘부덕(婦德)’을 갖춘 이상적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악녀라면 차라리 용서라도 할 수 있지만 용서할래야 용서할 것도 없는 바로 그 점이 천하의 비극이라고 모우쫑산은 말한다. 주자학을 정통으로 보지 않았던 훗날의 그의 입장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홍루몽은 중국 혹은 중국 문화와 다양한 방식으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정말 꼭 읽어볼 만한 책이다. 하지만 일찍이 조선시대 말기에 세계 최초의 번역본을 내놓기도 했던 우리가 막상 읽으려고 해도 현재 시중에서 완역된 번역본을 찾아보기조차 힘든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더구나 막연히 음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도 많다. 홍루는 기생이 사는 곳이 아니라 화려한 귀족 가문, 고귀한 규중 여성이 거처하는 저택이라는 뜻이다. 기생집은 청루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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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구 왜 세계 최고? 이유있는 ‘뻥’ 들어보소

 

‘정조 지킨 귀뚜라미 한쌍’ ‘3년 서리맞은 사탕수수’
구할 수 없는 약만 처방하는 ‘중의’를 비꼰 루쉰처럼
당대 지식인들은 양의를 환대하고 중의를 멸시했다
한겨레
» 중국에선 대학에서 중의학과 양의학 기본원리를 모두 가르침으로써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을 극복하고 있다. 근대중국의 문호 루쉰은 중의학에 대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사기꾼”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루쉰만이 아니라 근대 중국의 대다수 엘리트들도 그랬다. 하지만 “중의 때문에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는 중의 옹호론도 많다. <한겨레> 자료사진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⑩
 

어느 황제가 재위하고 있을 때 많은 궁녀들이 병을 앓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별로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나중에 한 명의가 와서 처방전을 써주었는데 거기에는 “장정 약간 명”이라고 써 있었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 의사의 말대로 하였다. 며칠이 지나 친히 가서 살펴보니 궁녀들의 얼굴엔 과연 화색이 가득 돌고 있었다. 그런데 한 쪽 구석에 비쩍 말라 거의 사람같지 않은 남자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황제가 깜짝 놀라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궁녀들은 머무적거리다가 “약찌꺼기옵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신약(新藥)>(1933)이라는 루쉰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원래 청대 저인획이라는 사람이 편찬한 <견호집>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루쉰이 당시 여러 사람으로부터의 비판에 직면해 ‘약찌꺼기’ 신세로 전락한 국민당의 원로 우즈후이(吳稚暉)라는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따온 것이다. 헌데 이 글 속에는 은연중에 전통적 중국의학(中醫)에 대한 루쉰의 신랄한 풍자가 숨어 있다.

 

앓는 궁녀들에 ‘장정 약간 명’ 처방




현재 중국에서는 중의학과 그다지 관련도 없는 인문사회 학계에서 전통적 중국의학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려는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서점가에서 중의 이론을 쉽게 설명한 책들이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동향을 전하는 글을 읽다가 예전에 읽었던 이 이야기가 불쑥 생각이 난 것이다. 루쉰이 중국의학을 통렬하게 비판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중의에 대한 루쉰의 비판적 태도는 이른바 ‘국수(國粹)’ 전체에 대한 비판의 기점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의학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사기꾼”이라고 단언했다. 루쉰의 열렬한 옹호자를 자임하는 리쩌허우(李澤厚)조차 중국의학과 경극 등에 대한 루쉰의 태도는 너무 한쪽에 치우친 각박한 견해라고 비판할 정도로 이러한 견해는 사실 냉정을 잃은 것이었다. 루쉰과 중의의 불행한 만남은 어린 시절 아버지(周伯宜)의 치료를 담당한 의사의 치료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중의가 정말 믿을 만하다, 처방이 영험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나는 도무지 믿지 않았다. 당연히 그 중의 대부분은 그들이 내 부친의 병을 잘못 치료한 때문이었지만 아마 직접 앓아본 병에 대한 스스로의 개인적인 원한도 얼마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일본 센다이의 의학전문학교에 유학하던 시절에 받았던 서양의학 교육의 영향은 중국의학에 대한 그의 부정적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루쉰은 13살 때(1893)부터 16살까지(이 사이에 청일전쟁이 벌어진다) 아주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4년간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기 위해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멸시를 받아가며 얻은 돈으로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와야만 했다. 그런데 처방전에 써 있는 약들은 ‘장정 약간 명’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겨울철 갈대뿌리, 3년 서리 맞은 사탕수수, 귀뚜라미 한 쌍(주의할 점: 처음에 짝을 지은 것, 다시 말해서 본래부터 한 둥지에 있던 것), 열매 달린 평지목(平地木), 패고피환(낡아빠진 북가죽으로 만든 환약)같은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고생의 보람도 없이 루쉰의 부친은 4년을 앓다가 37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다. 나중에 루쉰은 특히 ‘귀뚜라미 한 쌍’에 대해서 “곤충도 정조를 지켜야 하는지 재취를 하거나 재가를 해서는 약재로 쓰일 자격조차 없는 것 같다”고 신랄하게 비꼬고 있다. 또한 아버지를 치료한 의사인 ‘천롄허(陳蓮河)’(가명)에 대해서도 “이따금 길거리에서 그가 세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고 날을 듯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소문으로는 그는 아직도 건재하며, 개업을 하는 한편 ‘중의 무슨 학보’를 주재하며 외과에만 능한 양의들을 상대로 크게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고 싸늘하게 냉소를 던지고 있다.(<아버지의 병>) 병도 못 고치는 돌팔이 의사인 주제에 비싼 의료비를 챙겨 호의호식하는 것도 모자라 무슨 학회지까지 만들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니 참으로 가소롭고도 개탄할 노릇이라는 식이다.

 

루쉰의 부친 병수발 보람없이 하직

» 처방전에 따라 약재를 고르고 있는 젊은 중약사. 중의는 폐지하고 중약만을 살리자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고 한다. 중의의 운명은 전통문화 전체가 마주한 곤경이기도 하다.
애증이 분명한 루쉰 글의 매력에 빠졌던 나는 <아버지의 병>을 처음 접했을 때 당연히 루쉰의 부친을 치료한 의사가 ‘돌팔이’라고 생각했고 ‘귀뚜라미 한 쌍’의 처방에 대해서는 고소(苦笑)를 금치 못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중의에 대한 재평가를 계기로 읽게 된 어떤 글을 보니 루쉰의 아버지를 치료한 의사는 본명이 허롄천(何廉臣)(앞서 말한 천롄허라는 가명은 이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으로 샤오싱 일대의 명의였다. 또한 그의 처방이 그렇게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루쉰의 아버지는 울화가 쌓여 피를 토하고, 전신이 붓는 부종 증상을 보이다가 간경화(혹은 간암?)로 죽었는데, 귀뚜라미(원래의 짝), 평지목, 패고피환 등은 원래 모두 간병(肝病)에 쓰는 약이라는 것이다. 또한 귀뚜라미는 약이 아니라 약인(藥引)으로 처방된 것이다. 약인은 처방 가운데 여러 가지 다른 약을 병이 난 부위로 인도하는 작용을 하는 약물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병’이 원래 고치기 어려운 병인데다가 당시 의료 수준의 한계가 더해져 사망에 이른 것이지 잘못 치료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의 성인’인 루쉰도 이 문제에서만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의에 대한 그의 폄훼에는 스스로 인정했듯이 사원(私怨)도 작용했지만 당시 시대적 분위기 또한 그러하였다. 그 당시의 쟁쟁한 엘리트들은 거의 모두가 중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량치차오(梁啓超)는 “중의도 병을 잘 치료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병을 잘 치료했는지 그 원리를 분명히 잘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건 “중국의 의학이 과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원리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천뚜슈(陳獨秀)는 화답했다. 후스(胡適)는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양의(중국에서는 西醫라고 한다)는 환자가 어떤 병을 얻었는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병을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양의는 과학적이다. 중의는 비록 병을 잘 고쳐도 환자가 무슨 병을 앓았는지 분명히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의는 비과학적이다.” 중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이렇게 단지 엘리트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중의가 살려낸 사람 덕분에…

난징에 도읍을 막 정한 국민당 정부는 1929년 실제로 중의를 폐지하려고 하였다. 의료업에 종사한지 20년이 안된 50세 이하의 구의(舊醫, 즉 중의)는 새롭게 등록해야 한다는 법안이 양의의 주도로 통과되었다. 등록해서 보충교육을 받고 시험에 합격해야만 영업을 허가했다. 이에 분노한 중의들이 반대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눈길을 끄는 이런 주장이 있었다. “중의 때문에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 최근 중국의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중국의 누리꾼이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중의를 부정하는 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중의가 없었더라도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겠는가?” 중국의학 때문에 중국의 인구가 이렇게 많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중국의 많은 인구와 낙후된 의료 위생 상황은 결국 국민당 정부로 하여금 손을 들게 만들었다. 신중국 성립 이후 마오는 중의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양의는 중의에게 배워야 한다는 등 중의를 위해 많은 말을 해주었기에 중의는 보존될 수 있었다. “중국의 의약학은 위대한 보고이다. 마땅히 발굴하고 수준을 높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의는 중의를 학습함을 통해 중의와 양의의 경계를 없애서 통일된 새로운 의학을 완성할 수 있고 전 인류에 더 많은 공헌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중국에서도 중의는 양의보다 지위가 낮고, 보통의 환자들도 먼저 양의를 찾고 거기서 고치지 못할 경우에 중의를 찾는 것이 일반적 현실이다. 양의가 주류 의학인 사정은 우리와 같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의해 ‘약찌꺼기’가 되어가는 농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첨단 의료설비에 의한 대도시의 ‘과학적’이지만 비싼 치료의 혜택을 누리기도 힘들고 또한 누릴 경제적 여유도 점점 없어져 가고 있다. 예방과 양생을 중시한 중의와 같은 전통의학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고의 의사는 아직 발병하지 않은 병을 치료하고 중간 정도의 의사는 막 발병하려는 병을 치료하며, 가장 수준이 낮은 의사가 이미 발병한 병을 치료한다.”(손사막)고 하지 않았는가.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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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가 어드메뇨

 

“일엽편주를 타고 강호에 떴다” ‘장자’ ‘사기’에 등장한 강호는 말 그대로 대자연
점차 은자나 평민이 거한 인간세상 뜻해
세상의 불평 품은 지식인들이 협객으로 꿈 품으면서 강호는 무협지 속 상상의 공간으로 변모
한겨레
» 시안 근교에 있는 화산, 화산은 오악(五嶽) 가운데 서악(西嶽)으로 가장 높고 험준하다. 무협지 작가들은 산을 가지고 무림 문파의 이름을 짓기 좋아했는데 아마도 이렇게 함으로써 허구적 강호세계에 약간의 시적인 정취를 더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⑨
 

중국의 무협영화를 너무나 좋아한 어느 외국의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무협영화에 나오는 강호가 정말 재미있는 곳이라 생각해서 언젠가 한번 가보리라 결심했다. 그리하여 중국어를 조금 배운 다음에 서둘러 중국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만나는 사람마다 강호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이 외국 친구는 강호를 화산(華山)이나 샤오린쓰(少林寺)와 같이 유명한 명승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소오강호>의 감독 쉬커(徐克)는 이런 질문에 답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은원(恩怨)이 있기 마련이고, 은원이 있는 곳엔 강호가 있다.” 짧게 이야기하면 사람이 있는 곳이 곧 강호라는 것이다. 정말 강호를 찾기 위해 중국까지 간 어리석은 친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호의 고수’에게 무술을 배우기 위해 중국을 찾는 사람은 지금도 많다.

 

‘동방불패’가 여자인 까닭은?

내가 자주 가는 한 중국서점이 있는데, 그 서점의 주인장도 그런 사람이다. 책을 사러 가서 우연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해서 대학도 중문과를 다녔고, 또 아주 일찍이 중국에 가서 의권(意拳)이라는 무술을 배웠으며 현재는 이런 저런 계기로 중국서점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서점을 운영하는 한편 의권 보급에 힘쓰고 있다. 그가 얼마나 ‘고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술에 대한 열정을 보면 아마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이리라. 그한테서 들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무림계의 제2인자인 고수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길래 도대체 그를 죽인 당대 최고의 고수는 누굴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모님’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는 것이다. 황당해서 정말 한참을 웃었다. 역시 ‘동방불패’는 여자야! 영화 소오강호 속에서 동방불패도 결국 여자가 되어 강호 최고의 고수가 되지 않았는가. 물론 여자가 되는 바람에 영호충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의 이름과 달리 패하게 되었지만…. 이 ‘사모님’께서는 무술에만 관심이 있었던 남편에게 정이 달아나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각설하고 나도 ‘강호’를 무척 좋아한다. 아주 가까운 분이 나보고 강호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가만히 돌이켜 생각하니 과연 그랬다. 강호란 말을 쓰거나 들으면 왠지 나도 모르게 호방해지는 낭만적 느낌이 드는 한편으로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그럼 나도 ‘강호’를 찾아 나서 볼까. 강호는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는가.

 




강호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장자>다. “샘이 말라버린 다음 물고기가 뭍에서 서로 축축한 물기를 끼얹고, 서로 물거품으로 적셔 주는 것보다 강호에서 서로의 존재를 잊는 것이 낫다. 요임금을 성군이라고 칭송하고 걸왕을 폭군이라고 비난하는 것보다 양 쪽을 다 잊고 도와 하나가 되는 것만 못하다.” 여기서 말하는 강호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창장(長江)과 동팅후(洞庭湖)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대자연의 강과 호수를 지칭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기>에도 강호라는 말이 나오는데,. ‘화식열전’에 보면 범려가 월나라 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후에 “일엽편주를 타고 강호에 떴다.”는 기록이 나온다. 범려가 토사구팽을 면하기 위해 물러나와 대자연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말이다. 범려는 나중에 사통팔달한 도(陶)라는 곳으로 가서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고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자칭하였다. 그가 ‘화식열전’에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림계의 맹주’ 진용(金庸)은 일찍이 동서고금의 인물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이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범려와 우칭위엔(吳淸源)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한때 그는 범려를 주인공으로 하는 <월녀검>이라는 단편소설을 쓴 일이 있는데 이는 역사서에 기록된 범려와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을 혼합하고 상상을 가미한 일종의 ‘팩션’이다. 사실 범려가 일엽편주를 따고 강호에 숨어들 때 미인 서시와 함께 했다는 민간 전승의 이야기는 오월 지방에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호방하면서도 쓸쓸한 느낌

» 강호를 ‘오만하게 비웃다.’ 아침 해뜰 무렵 동팅후(동정호)를 바라보고 선 중국 소년.
아무튼 강호라는 말은 이처럼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체적인 강과 바다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점차 점차 외연이 확대되어 사방 천지를 지칭하게 된다. 지금도 중국어에서 ‘쩌우장후(走江湖)’라고 하면 사방 각지를 떠도는 것을 말한다. 유동성. 그리고 <장자>나 범려의 이야기에서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강호란 말에는 이미 은둔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강호는 어느덧 조정이나 묘당(廟堂)과 상대적인 곳, 즉 은자나 일반 평민이 거하는 ‘인간세’를 지칭하게 된다. “묘당의 높은 곳에 거할 때는 백성을 걱정하고, 강호의 먼 곳에 처할 때는 임금을 걱정한다.”(범중엄)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있지만 같은 동양인 일본에서는 강호(일본어로 고코)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해서 한번 찾아보았더니 세간이나 세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중국적 표현이라고 되어 있었다. 영어로 번역하기는 참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중영사전을 한번 찾아보았다. all corners of country! 시골 구석구석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재미있었다.

 

사실 중국을 위시한 동양의 지식인들은 심각한 내적 모순에 시달려야 했다. 이른바 입세(入世)와 출세(出世)의 모순이다.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는 조정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막상 조정의 높은 자리에 앉는 순간 ‘강호 ’의 자유로움과 한적함을 맛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강호에 있으면? 강호에 있는데 아무도 찾아와 주는 이 없다면? 자유롭고 한적해서 좋지만 얼마 지나면 점차 적막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사실 유비처럼 삼고초려하기도 쉽지 않지만 제갈량처럼 피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잘못하면 영원한 적막 속으로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옛부터 성현은 모두 적막했노라(古來聖賢皆寂寞)”라는 이백의 시구를 암송해도 고독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오호 통재라! 병이 없어도 신음하기도 하고, 루쉰처럼 외치기도 한 것이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면? 전에 <유몽영>의 “흉중의 작은 불평은 술로써 삭일 수 있으나 세상의 큰 불평은 칼이 아니면 풀 수 없다”는 구절을 소개한 일이 있지만, 마오처럼 직접 ‘칼’을 뽑은 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식인은 칼을 뽑을 수 있는 용기나 힘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무협지다. 사실 무협지를 쓴 사람들은 무술의 고수가 아니라 문인이었다.

 

칼빼지 못한 지식인 ‘무협지’ 써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강호는 이제 문인들에 의해서 무협들이 활약하는 상상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강호라는 소설적 무대에는 지식인의 이상과 좌절, 분노와 욕망 등이 투영된다.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천고의 문인들도 모두 ‘협객의 꿈’이나 ‘강호의 꿈’을 꾸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무협지는 이른바 무협지 작가만이 쓰는 것도 아니었다. 결코 무협지 작가라고 할 수 없는 포송령이나 루쉰도 일종의 ‘무협소설’을 쓴 일이 있다. <협녀>(요지지이에 수록)와 <주검(鑄劍)>(고사신편에 수록)이 그것이다. 이 두 글은 모두 짧지만 영화화되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유자(儒者, 지식인)와 협은 분리될 수 없다. 한비자도 “유자들은 글로써 법을 어지럽히고 협객들은 무로써 금령을 어긴다.”라고 하면서 유자와 협객을 병칭한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양자의 연관성을 보아냈기 때문이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옌안에 있던 마오는 당시(1941) 소련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두 아들, 안잉(岸英)과 안칭(岸靑)에게 편지와 함께 여러 ‘필독도서’를 부쳐준 적이 있는데 그 중에는 몇 권의 무협소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가 어려서부터 <삼국지>나 <수호전>을 즐겨 읽었던 것을 상기하면 그다지 의외로운 일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무협의 문화는 중국의 역사나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듣자하니 현재 중국에서는 무협지는 물론이고 무협영화, 무협 연속극, 무협 음악, 무협만화, 무협 인터넷게임, 무술학교, 무협여행 등 이른바 ‘무협경제’가 활황이라고 한다. 특히 2001년에 창간된 <금고전기(今古傳奇)ㆍ무협판>라는 무협관련 잡지가 있는데 발행량이 무려 70만부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에서 ‘무협경제’가 발달하는 것은 시장화가 심화되면서 ‘강호’가 점차 냉혹하게 변질되고 있으며, 또한 도처에서 ‘강호’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다니는 ‘서방불패’라는 ‘괴물’ 때문은 아닐까.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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