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속사상] 기술 발전 거역할 자유도 허하라!

 

‘기술비관론자’ 자크 엘륄의 진단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
기술은 인간 통제 벗어나 자유 억압하면서 ‘효율성의 법칙’ 따라 발전
더 빠른 컴퓨터, 더 얇은 휴대폰 기술이 필요 창출…그의 대안은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
한겨레
» 기술비관론자로 알려진 프랑스 보르도 출신 학자 자크 엘룰은 현대 기술이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고 자율적이 되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③ 기술 시스템과 자율적 기술 - 쟈크 엘륄
 

인간복제나 생각하는 로봇의 생산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가?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면서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바램과 무관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다. 실제로 대학 수업 시간에 물어보면 학생들 중 2/3 이상은 인간복제같이 찬반이 분분한 기술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은 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긍정인데, 그 가운데 묘한 체념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술발전과 그에 따른 변화들은 ‘시대의 흐름’이고 거기에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지하철 곳곳에 붙은 소프트웨어 광고가 심상치 않다. “당신도 OOOOO만큼 진화하셨습니까?”

 

기술발전이란 시대의 흐름 앞에 수동적이 되는 것은 과학자, 공학자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기술발전을 직접 이끌어가는 전문가들에게도 기술발전의 완급이나 방향을 조절한 권한은 없다. 자기의 전문 영역 외에는 잘 모를 뿐 아니라 자기가 개발하는 기술이 장차 어떻게 쓰일지도 모른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살벌한 시장 경쟁의 한복판에서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 혹은 ‘인간은 기술의 주인’이라는 말이 좀 허탈하게 들린다.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이 맞긴 한데, 발전시키지 않을 자유도 사용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면 인간은 기술의 주인인가, 하인인가?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학자 쟈크 엘룰(Jacques Ellul, 1912-1992)은 이러한 현대사회의 상황을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뒤틀려진 기독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등 1990년대 젊은 기독교인들이 많은 읽었던 책들의 저자로만 알려졌으나, 엘룰은 과격한 현대기술 비판론자로 더 유명하다. 1964년 미국에서 <기술사회>(The Technological Society)가 출판된 이래 엘룰은 ‘기술비관론자’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1954년에 나온 프랑스어판 <기술 혹은 우리 세기의 도박(내기)>(Technique ou l'enjeu du siecle)을 번역한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별로 빛을 못 보았지만 영문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 제목의 번역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기술사회(technological society)’라는 말이 현대를 표현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이후 출판된 <기술 시스템>(The Technological System)과 <기술담론의 허세>(The Technological Bluff)도 프랑스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많이 읽혔다고 한다.

 

엘룰은 현대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전혀 다른 특징들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우선 전통 기술은 상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다른 활동들 (예를 들어 종교적 활동)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현대에는 기술의 발전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또 기술의 제작에 있어서는 자동화를 통해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면서, 사용에 있어서는 사용하지 않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엄청난 발전의 속도와 지역의 문화와 상관없이 전지구적으로 사용가능한 보편성, 그리고 여러 기술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는 것도 현대기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 시스템은 자연을 대상으로 했던 전통적인 기술의 영역을 넘어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으로 침투해 간다. 엘룰은 정부의 조직이나 회사의 마케팅과 광고, 그리고 대도시의 놀이시설 같은 것들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기술’이라 부른다.

 

이러한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은 철저히 관찰에 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철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관심은 추상적인 본질에 있지 않고 현실의 정확한 파악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기술사회의 현실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 기술의 발전도 한 개인이나 집단이 완전히 통제한 적은 없다. 그러나 과거 기술의 발달은 매우 느렸고 공간적 제약이 많아서 사람들은 그 변화에 억지로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현대 기술사회의 문제는 컴퓨터와 핸드폰과 은행카드를 사용해야만 하고, 때가 되면 바꿔야만 하고, 바꾸면서 나의 삶이 더욱 나아진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술이 ‘자율적’이라는 표현은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혼자 돌아다닌다거나 기계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기술발전이 기술 시스템의 관성에 의해 지속되고, 그 과정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기술사회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기술 시스템은 인간들에 의해 조정되기보다는 ‘효율성의 법칙’에 따라 운영되고 발전한다. 인간의 가치나 필요는 효율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다. 더 빠른 컴퓨터와 더 얇은 핸드폰이 꼭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의해 기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를 창출한다. 누가 지하철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그렇게 간절히 소망했던가?

 




물론 기술 개발에 소비자의 의견이 반영되기도 하고, 특정 기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기술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그와 같은 개별 사례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아가, 앞서 본 것과 같이 기술발전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뿐 아니라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까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사회 전반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술발전을 모두 포기하고 산업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기술이 자율적이라면, 인간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는가? 엘룰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말년에는 “이제 기술사회에 사는 인간에게는,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자유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술사회의 문제를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도 없고, 그 구성원은 이미 자유롭지도 못하다고 하니, 그를 따라다니는 ‘기술비관론’의 꼬리표는 거의 정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엘룰 자신은 비관론자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비관론자의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가 남긴 50여 권의 저서와 1000여 편의 논문은 자기의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열정의 산물이다. 그 외에도 엘룰은 90 평생을 시골 목사, 레지스탕스, 보르도 대학 교수, 사회학자, 정치학자, 평신도 신학자, 보르도 시장, 청소년 운동가, 환경운동가 등으로 활약하며 그야말로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갔다.

 

기술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우울한 시각과 그의 적극적인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삶을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말로 정리했다고 한다. 학자로서 현대 기술사회 전체를 폭넓게 조망하고 분석한 결과 비관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론 때문에 자기가 속한 삶의 터전에서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평생을 보낸 고향 보르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운동가의 삶을 살면서 작은 일에 보람을 느끼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기술사회가 확 변할 것이라는 환상을 경계하면서도, 자신의 작은 노력들을 통해 기술사회가 위협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개인적으로나마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엘룰의 사상과 행적을 그가 믿었던 기독교와 연관시키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자신은 기술사회에 대항하는 개인적 노력이 신앙과 상관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엘룰의 저서를 읽고 평생을 자기 마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 사람도 있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후에 일본 소니(SONY)의 세계 경영 전략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같은 제품을 팔더라도 각 지역의 문화와 전통, 구매자의 요구사항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대기술을 비판한 대표적 학자가 좌우명으로 삼은 말이 첨단 전자기술 회사의 모토로 둔갑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엘룰이 경고하는 기술 시스템의 무서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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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속사상] 현대기술아 제발 ‘닦달’하지 마
하이데거 ‘도구 이상의 그 무엇’ 첫 사유 “현대기술의 본질은 닦달(강요)” 주장
자연에게는 자원 내놓으라고 인간에게는 부품이 되라고 채근
씨를 다그치지 않는 농부처럼 겸손하게 ‘존재의 드러냄’ 기다려야
한겨레
»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가 아닌 존재자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비판하면서, 그 존재의 망각이 도달한 극단의 모습이 현대 기술이라고 보았다.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② 하이데거의 기술철학
 

돌도끼로부터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손에서 기술이 떠났던 적은 없다. 하지만 수천 년 철학사에서 기술이 철학적 탐구의 주제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묻지 않아도 될 법한 당연한 일들에 대해서도 “~란 무엇인가” 혹은 “왜 ~한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철학자들이 기술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기술은 인간이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고 하면, 더 이상 물을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용의 주체인 인간이나 사용의 목적에 대해서는 몰라도, 사용되는 기술에 대한 철학이란 무의미해 보이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 (1889-1976)가 기술의 문제를 자기 철학의 한 축으로 삼은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20세기 서양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사상가다. 1927년에 출간된 <존재와 시간> 이후의 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사상을 알든 모르든 그의 그림자를 피해갈 수는 없다. 이렇게 중요한 철학자가 여태껏 외면당하던 기술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니 철학의 무대에서 기술도 마침내 한 번 뜬 셈이다.

 

물론 그가 아무 계기도 없이 기술을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산업혁명 이후 현대기술의 급격한 발달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다. 그가 태어나기 7년 전인 1882년에 에디슨은 뉴욕시에서 최초의 전등을 켰고, 1886년에는 최초의 자동차가 제작되었으며,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와 무성영화는 그가 태어난 뒤에 각각 발명되었다. 이들 분야에서의 눈부신 발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외에도 핵폭탄, 컴퓨터, 텔레비젼 등 우리 시대를 바꾼 수많은 기술들이 그가 살았던 시절을 장식했다.

 

산업혁명기 체험이 ‘탐구’ 계기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시각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다. 하이데거 이전에도 여러 사상가들이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정밀한 이론적 철학에 근거해서 현대기술이 비인간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기술에 대한 논구>라는 비교적 짧은 글에서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의 본질이 “닦달”(Ge-stell)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말의 의미는 현대기술이 존재하는 것들의 특성과 다양한 측면들을 무시하고 그들 각각의 의미를 기술적 맥락에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기술은 자연에게 에너지와 원자재를 내 놓으라고 강요(닦달)한다. 현대 기술 앞에서 모든 존재자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갖다 쓸 수 있고 대체 가능한 “부품”이 되어 버린다. 강물은 수력 댐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원일 뿐이고 울창한 숲은 신문을 만들 종이의 재료일 뿐이다.

 

옛날의 기술은 그렇지 않았다. 농사를 지을 때 농부들은 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씨가 절로 나서 자라는 것을 잘 돌보는 것이다. 강 위에 다리를 놓는 것은 강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리는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들지만 그것은 강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하고, 전에는 익명의 존재였던 강 건너 마을을 이웃으로 드러나게도 한다. 기술은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맞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인간의 도구로 보는 인간적, 도구적 정의가 맞기는 하지만 기술의 본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기술은 예술과 더불어 숨겨진 진리가 드러나는 통로, 혹은 존재가 자기 자신을 내 보이는 한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기술이 현대에 와서 닦달의 성격을 가지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현대기술과 하이데거 존재철학의 연결점을 보게 된다. 하이데거의 핵심 사상은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이다. 그는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이 언제나 존재자, 즉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었지 동사적 의미에서의 존재, 즉 있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은 신, 인간, 자연을 인간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있는 것”들로만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동사적 “있음”에 대한 관심, 즉 그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점점 약해졌다. 플라톤이 모든 사물의 이데아, 곧 불변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이나, 중세의 신학자들이 신의 본성을 물으려 했던 것은 “있음”보다는 “있는 것”에 치중한 대표적인 예이다.

 

파시즘·나치즘, 인간을 도구화

이러한 태도는 근대에 와서 훨씬 더 심화되었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질서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진리가 있음을 부인하고, 이성적인 인간 주체를 절대화했다. 존재자들의 진리를 인간이 밝혀내고, 그 상호연관성과 전체적인 질서까지 인간이 부여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렇게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한 것의 최종 결과가 바로 현대기술이다. 현대기술의 태도는 씨가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을 돌보는 농부보다는 농약을 뿌리고 온도를 포함한 모든 조건을 임의로 조절해서 생산량을 억지로 높이는 식품생산 시스템에 비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기술의 “닦달”이다.

 

문제는, 이 닦달의 대상이 자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사회에서는 사람들 역시 부품으로, 에너지의 출처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 부속처럼 인간도 잔뜩 쌓아놓고 필요하면 가져다 사용하고 시간이 지나면 버린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지만, 그 지배의 대가는 자기 자신의 철저한 대상화다. 그 결과 현대의 인간은 눈부신 성취 가운데 공허하고 지배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 속에 권태롭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다른 존재자를 대상화했는데, 결국 주체는 없어지고 지배하려는 의지만 남았다.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은 존재를 망각함으로써 그 특별함을 잃고 말았다.

 

기술사회의 끊임없는 닦달과 팽창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닦달이, 존재가 기술시대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에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부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그리고 그가 잠시 몸담았던 나치즘과 현대 시장 자본주의에서 현대기술의 닦달을 본다. 이들은 끊임없는 발전과 지배의 추구 속에 인간이 인간을 비인격적 도구로 취급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도덕률은 하이데거의 눈에는 별로 유용하지 않다.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하고 인간의 주체성만을 강조한 결과가 현대기술이라면, 도덕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다시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필요한 태도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 과정을 돌보는 농부처럼 겸손하게 그 드러냄에 참여하는 것이다.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처럼 존재자들이 스스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 존재자들을 드러나게 하는 빛과도 같은 존재를 사유하려는 노력을 통해 인간은 그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예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깊은 애착은 이러한 생각에 기반한다. 예술을 통해 예술가를 초월하는 진리의 장이 열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상반된 평가에도 ‘기술철학’ 핵심

» 손화철/성균관대학교 강사·기술철학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에 대한 평가와 반응은 극과 극을 달린다. 현대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정통으로 지적한 사상이라고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술에 대한 아무 실증적 근거도 없이 비관주의, 회의주의에다 신비주의까지 엮었다는 혹독한 평가도 있다. 존재의 드러냄을 기다리고 가꾸라는 말의 의미가 명확하지도 않거니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을 환경윤리적으로 해석하여 모든 존재자의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여러 상반된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이데거를 통하여 철학에서 기술의 문제가 문제라는 사실을, 그리고 기술이 단순히 인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하이데거처럼 현대기술의 중요성을 즉각 인지하고 정면으로 씨름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를 기술철학의 핵심 사상가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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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학 관련 수업을 들어야만 했던, 빈곤했던 지난 학기에 유일한 위안은 "과학기술학(STS)"을 접하게 된 일이었다. 아직 멋모르던 시기, 한겨레신문의 연재 <기술 속 사상>은 흥미를 유발하면서도 얕지 않은 지식을 전달해주었다. 물론 이 연재물은  여전히 내가 가장 즐겨읽는 코너 중 하나다. [UK]

 

 

[기술속사상] 기술이 언제나 사람에게 지고 만다고?
기술, 인간 돕는 ‘도구’에서 종속시키는 ‘기계’로
세상을 변형시킬 ‘인간 의지’ 각인되지만
때론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발전
꼼짝없이 예속 당한다
때문에 ‘기술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
한겨레
» 산업혁명 당시에 공장 시스템을 분석한 앤드류 유어는 공장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과 교육수준을 향상시키며, 기계가 비싼 숙련노동을 값싼 비숙련노동으로 대체함으로써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했다. 그의 기술철학에서 기술발전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완전히 배제된 채로 가동되는 공장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기술 속 사상/① 기술이란 무엇인가
 

그 동안 연재해온 ‘의학속 사상’이 지난 3월31일치 24회로 끝나고, 이번 호부터는 새 연재 ‘기술속 사상’을 시작합니다. 30여회 나갈 ‘기술속 사상’은 이 분야 전문가 10분의 글을 매주 한차례씩 싣게 됩니다. 앞서 의학속 사상에 참여해주신 강신익, 신동원, 여인석, 황상익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자기능을 없애주세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 긴 연애편지를 쓰도록.”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무선통신회사의 광고 카피다. 광고는 “기술은 언제나 사람에게 지고 맙니다.”라는 가슴 찡한 메시지를 남기며 끝난다.

 

이 광고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것의 진실성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편지지에 꾹꾹 눌러 쓰는 연애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다. 우리들 대부분이 중독이라고 할 만큼 핸드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기술이 사람에게 진다는 광고 카피가 감동을 준다. 통신 서비스로 이익을 남기는 회사가 스스로의 서비스를 구매하지 말아 달라는 역설은 기술에 휴머니즘의 외피를 입힘으로써 이에 대한 작은 거부마저도 무력하게 만든다.

 

기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핸드폰과 같은 형체가 있는 대상이나 통신 회사가 제공하는 무형의 서비스도 기술이다. 이러한 대상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이 기초가 되는 공학 지식도 기술의 일부이다. 핸드폰이 상징하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넓은 의미의 기술로 포함되며, 핸드폰을 통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바꾸려는 의지도 기술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술에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의지가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술은 대상, 과정, 지식, 상징, 의지라는 다섯 가지 층위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이 중 ‘의지로서의 기술’은 조금 낯선 개념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술을 “인간이 자연세계와 관계를 맺는 특정한 방식” 혹은 “세상을 드러내는 양식”으로 정의했다. 기술의 본질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인데, 하이데거는 기술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계산가능성, 유용성, 효율성의 잣대로 평가해서 결국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자원(리소스)으로 만드는 ‘의지’라고 간주한다. 존재들을 인간에게 유용한 자산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과학이다.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보면 기술이 과학을 낳았으며, 따라서 기술은 과학보다 선행한다.

 

 

기술, 사회적 권력관계 바꿔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서 꼭 하이데거의 입장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20세기 기술은 연관 과학의 발전을 기반으로 해서만 발전하는 것이 많다. 그렇지만 지금의 기술이 상당 정도 과학화되었다고 해도 기술에는 아직도 과학과 다른 점이 있다. 기술은 물질적 생산에 관련되어 있으며, 인위적으로 무엇을 만들고, 이를 통해서 인간의 가능성과 목적하는 바를 확장한다. 기술은 자원에 기초해서 자원을 확장하고, 과학의 응용만이 아닌 시행착오에서 복잡한 실험에 이르는 나름대로의 지식을 활용한다. 기술 디자인과 선택에는 경제, 정치, 문화적 고려가 개입하고, 이러한 경제, 정치, 문화적 요소는 기술에 의해 다시 형성되면서 변화한다.

 

우리가 기술을 만들지만, 기술은 우리 경험과 인간관계 및 사회적 권력관계를 바꿈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 어떤 기술은 인간 사회를 더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지만, 다른 기술은 독재자의 권능을 강화한다. 라디오와 같은 동일한 기술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어떤 환경에서 사용하는 가에 따라서 이렇게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민주적으로 사용하고 싶어도 그렇게 사용할 수 없는 기술도 있다. 핵무기를 평화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낙타를 바늘구멍에 넣는 것 보다 힘들다. 내가 시계태엽을 감아야 시계가 작동하듯이 인간은 어떤 기술에 대해서는 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계로 상징되는 시간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듯이, 어떤 기술에게는 꼼짝달싹 못하게 예속되어 버린다. 모든 기술이 예측불능인 것은 아니지만, 일부 기술의 궤적은 그것을 발명한 사람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발전한다.

 

19세기 독일의 기술철학자 에른스트 캅은 모든 기술이 인간 몸의 연장(延長)이라고 주장했다. 갈고리, 그릇, 칼, 창, 노, 삽, 괭이와 같은 기술이 인간의 손, 이빨, 팔이 연장된 것이며, 철도는 인간 순환계의 연장이고, 전신과 같은 통신기술은 인간의 신경계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유명한 미디어학자 마샬 맥루헌도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나 컴퓨터가 인간의 대뇌와 신경계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1964)에는 ‘인간의 연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 19세기 독일의 사상가 에른스트 캅은 전신 케이블과 같은 기술이 인간 신경계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기술과 인체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모든 기술을 인간 몸의 연장으로 볼 수는 없다. 기술 중에는 해시계나 철조망처럼 자연을 모방하거나 자연을 체화한 기술도 있다. 그러나 캅이나 맥루헌의 기술관은 전근대적인 기술과 근대 기술의 차이를 무시한다는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전근대적 기술은 화살처럼 인간의 육체를 대체하고, 망치처럼 인간을 강화시키거나, 바퀴처럼 인간을 편하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근대기술은 자연적인 물질을 인공적인 물질로 대체하거나(제련기술), 자연적인 힘을 기술의 힘으로 대체하는 것(증기기관)이다. 간단히 말해서 근대 기술은 인간 몸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자연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근대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도와주는 ‘도구’였다면, 근대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기계’의 외양을 지닌다.

 

기술은 개별 기술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어 ‘기술 시스템’(technological system)을 이루기도 한다. 19세기 이후 철도와 전신, 전력의 보급 이래 기술은 점차 통합된 시스템을 이루면서 확산되었다. 여기서 보듯이 기술 시스템 속에서는 기술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의 경계가 희석된다. 기술과 사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기술의 진보가 사회의 진보로 자동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 거대한 기술 시스템은 이미 그것에 투여된 수많은 사회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 발전 방향을 바꾸지 않으려는 관성을 가지게 된다.

 

 

기술의 진보-사회의 진보 혼동

개별 기술처럼 보이는 것이 시스템의 일부인 경우도 많다.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개별 기술이 아니라 자동차 시스템의 한 구성물이다. 자동차 시스템은 자동차의 디자인 및 연구, 핵심 부품 및 기타 사양 생산, 조립, 도로 건설, 도시·토목 공학, 국토개발에 관한 장단기 계획, 도시구조, 주택구조, 주유·정유체계, 신호체계, 주차 등 수많은 제도와 인적 자본이 얽혀있는 시스템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현대 산업사회의 직장 중 20%가 자동차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자동차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지금까지 대체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이유도 자동차 시스템이 가진 엄청난 관성 때문이다.

 

기술 시스템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에게 거역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듯 보인다. 자크 엘룰이나 루이스 멈포드와 같은 초기 기술철학자들은 이러한 거대 기술 시스템의 특성을 인지하고 이를 각각 ‘테크닉’(technique)이란 개념과 ‘독재적 기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이를 ‘자율적 기술’(autonomous technology)이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기술 시스템의 불확실성과 위험이 강조되고 있다. 기술 시스템이 복잡해지면서 그것이 세분화되고 쪼개져서 그 각각이 전문가들에 의해 다루어지는데, 이러한 전문화와 파편화는 종종 전체를 볼 수 없는데서 기인한 큰 사고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경우 책임이 실종되는 결과가 종종 생긴다.

 

» 홍성욱/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과학기술학
기술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기존의 가능성 중 일부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이렇게 도입된 기술은 우리를 둘러싼 ‘기술 환경’을 바꾸고, 결과적으로 사회 세력들과 조직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바뀐다. 새로운 기술 때문에 더 힘을 가지게 된 그룹과 힘을 잃게 된 그룹이 생기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구조의 변화가 수반된다. 이렇게 변화된 사회구조는 다시 새로운 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하는 조건을 만든다. 기술 중에는 우리가 잘 이해하고 통제하는 기술도 있지만, 대규모 기술 시스템은 한 두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이럴 경우에 기술은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고, 자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술이 언제나 사람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믿다가는 기술의 지배와 통제를 벗어나기 힘들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술에 대한 철학과 사상이, 그것도 비판적이면서 균형 잡힌 철학과 사상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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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문 요 약



본 논문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들을 분석하면서 하나의 사회문화적 구성물로 나타나고 있는 두 문화 담론의 다양한 전개 양상을 포착하고자 하였다. 두 문화 담론은 과학과 기술, 사회가 관련되는 이슈의 특성에 따라 전면에 부각되기도 하고, 오히려 사라지기도 한다. 때로는 이공계 위기나 학제간 교육협력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해관계의 표출이나 분과학문체계의 수호와 관련하여 더욱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황우석 사건에서처럼 오히려 약화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두 문화의 해소가 단순히 두 문화 사이의 소통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문화 담론의 재생산은 과학을 신뢰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근대적 짜임새와 다양한 경계들 속에서 갈라진 채 존재하는 가치충돌과 이해관계의 대립, 전문화된 학문분과 시스템과 근대적 제도화 기제들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 점을 이해하지 않고는 두 문화의 작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두 문화의 재생산 과정에는 두 문화 이면에 놓여있는 근대 사회의 경계와 분절들 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요인들이 결합된다. 그와 같은 경계와 분절들은 특히 분과학문체계 속에서 가로막힌 소통구조나 서로 다른 공간적 영역과 역할 속에 놓인 과학, 기슬, 사회의 존재양식과 제도적 틀 속에서 더욱 강화되면서 문제의 원인이 마치 ‘두 문화’의 본래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여기는 ‘역투사’ 과정, 혹은 ‘재해석’ 과정을 거치면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 본 연구의 주요 주장이다. 



주제어: 두 문화, 과학기술과 사회, 이공계 위기, 황우석, 학제간 협력

 

 

 

 

 

 

 


두 문화 담론의 존재 양식과 재생산 메커니즘

: 과학, 기술, 사회에 대한 세 가지 이슈 분석




I. 들어가는 말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차이와 대립을 전제하는 ‘두 문화’ 담론은 잠시 사라진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일상의 경험과 사회적 이슈로 다시 등장하곤 한다. 흥미로운 점은 1959년에 과학 문화와 인문학 문화 사이의 날카로운 분리를 지적한 스노우의 문제의식이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냉전시대에 스노우가 제기한 두 문화1)와 원자폭탄의 위력이 그대로 남아있는 나가사키 한복판에서 시작된 브로노프스키(Bronowski, 1994)의 두 문화, 1996년 '소칼의 속임수(Sokal's Hoax)'에서 시작된 ‘과학전쟁’(홍성욱, 1999; Pinch, 2001; Bricmont & Sokal, 2001; 이영희, 2003)과 그것이 제기한 두 문화, 그리고 21세기 한국에서 던지는 두 문화라는 화두가 과연 동일한 그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두 문화를 몰역사적, 몰사회적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본 연구의 출발점이다. ‘두 문화’를 둘러싼 논쟁과 담론은 각 나라가 처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고 또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두 문화’의 존재 양식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형되고 재생산되는 하나의 문화적 구성물(cultural construct)로 파악하여 분석할 것이다. 여기에서 문화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믿음이나 신념 체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적극적으로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고 조직화하는 힘(Bocok, 1996)을 가진 것으로 다룰 것이다. 두 문화 역시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또 하나의 사회 현상이며 특히, 근대 사회의 제도적 기반 위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각, 즉 서로 다른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가 일정하게 존재한다는 생각과 믿음은 어디에 근거한 것이고,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과학과 인문학, 혹은 자연세계와 사회세계의 실재적 차이를 반영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차이는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란 사실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 동안 이루어진 국내외 연구들을 검토하고 고찰하면서 다음의 작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즉, 과학기술계와 인문사회계의 연구문화가 갖는 차이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으나 그 차이가 소위 두 문화의 본질적 차이를 보증해주는 필요충분조건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지식생산과 분배, 인정과 관련된 학술 문화와 대학 교육 및 연구의 제도적 기반 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특정 조건하에서 두 문화 담론을 사용하는 개인과 집단의 이해(interest)와 전략에 따라 두 문화 담론은 다시 생명력을 얻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약화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두 문화의 분리나 통합, 혹은 경계선의 약화가 나타나는 사회적, 문화적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이 본 연구의 주요한 과제이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 사회의 두 문화 담론과 맞닿아있는 구체적인 경험 사례의 분석을 통해, 두 문화 현상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대립의 지점들을 탐색할 것이다. 다음으로 제도적 차원에서 생성되는 대립과 두 문화가 존재한다는 문화적 신념이나 믿음이 상호작용하여 어떻게 대립적인 두 문화 담론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의 과정을 분석하려고 한다. 첫 번째 이슈는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였던 이공계 위기론인데, 이공계 위기론은 애초 외형적으로는 마치 두 문화 사이의 해묵은 갈등을 재연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역사적 과정 속에서 변화된 우리나라 엔지니어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 그리고 전문직이라는 직업적 정체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임을 주장할 것이다.

 

두 번째 이슈는 최근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과 갈등의 양상을 검토하면서, 이 사건이 처음에는 과학자 대 방송국 PD 혹은 과학 전문가 대 비전문가라는 비교적 단순한 두 문화적 대결구도로 시작되었으나 논점이 연구 윤리에서 연구의 진위 여부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두 문화의 대립구도가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분석할 것이다. 우리는 이 사례에서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한 것처럼 보이는 두 세계, 즉 과학과 비과학의 영역이 상황맥락에 따라 상호간 간섭과 혼합 과정이 진행되면서 두 세계 사이의 날선 경계는 약화되거나 변형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최근 대학 공학교육에서 두 문화의 연결 내지는 접목의 시도로 나타나고 있는 학제간 협력의 ‘제도개혁’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학문간 협력을 제도화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순적 상황, 즉 양대 학문 사이의 경계가 온존되는 가운데 오히려 ‘지식 영토(knowledge territory)’를 둘러싼 경계 확대나 새로운 경계 설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두 문화 담론의 재생산은 과학을 신뢰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근대적 짜임새와 다양한 경계들 속에서 갈라진 채 존재하는 가치 충돌과 이해관계의 대립, 전문화된 학문분과 시스템과 근대적 제도화 기제들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 점을 이해하지 않고는 두 문화의 작동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두 문화의 재생산 과정에는 두 문화 이면에 놓여있는 근대 사회의 경계와 분절들, 다양한 이해관계의 대립과 재조직화 등이 존재하며 여기에는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요인들이 결합된다. 그와 같은 경계와 분절들은 서로 다른 공간적 영역과 역할 속에 놓인 과학, 기술, 사회의 존재 양식 및 제도적 틀과 특히 분과학문 체계 속에 가로막힌 소통구조 속에서 더욱 강화되면서 문제의 원인이 마치 ‘두 문화’의 본래적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여기는 ‘역투사’ 과정, 혹은 ‘재해석’ 과정을 거치면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것이 본 연구의 주요 주장이다.

       

     

II. 두 문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들


두 문화는 다음과 같은 믿음들로 구성된다. 첫째, 어느 한 쪽은 자연세계에 대한 탐구이고 다른 한쪽은 사회세계에 대한 탐구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다. 둘째, 자연세계와 사회세계는 그 존재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연구방법과 접근방식은 서로 상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셋째, 자연세계의 연구자(과학자와 공학자)와 사회세계의 연구자(인문/사회과학자)는 본성적으로는 아닐 지라도 연구대상과 방법의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연구 문화와 태도를 갖게 된다는 믿음이다. 대부분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물론이고 이와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사실대로, 가치는 가치대로 다룰 수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와 더불어 이와 같은 두 문화의 차이가 본질적으로는 역사적, 사회적 요인과 분리되어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산 정상에 오르는 가장 좋은 등산로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탐험이 갖는 사회적 요소 때문이 아니라 그 길이 실제로 등산객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산 정상에 이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Weinberg, 1992).”


이 유명한 비유는 1979년 전자기력과 약력의 통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고 그 이후 과학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스티븐 와인버그가 과학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자들의 주장에 반론을 펴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과 진리의 영역이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나 과학 외부의 사회적 요인과 엄격히 분리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과학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여기에 대해 우리는 그 길이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 그 길을 만들기 위해 어떤 도구와 어떤 과정이 필요했는지, 혹은 그 길이 다른 길보다 더 좋다는 가치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할 수도 있다. 그 길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문제의식은 ‘그 길’의 진위와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하게 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두 문화에 대한 몰역사적, 몰사회적 이해는 실제로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특정한 사회적 산물인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보편적, 절대적인 틀 속에 가둠으로써 그것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고 소통을 가로막는 역할을 할 뿐이다. 오히려 사회문화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변화해 온 두 문화 논의의 양상을 추적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두 세계, 즉 자연세계와 사회세계를 둘러싼 다양한 대립구도의 성격과 본질을 파악하는 데 훨씬 더 풍부한 인식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우리는 두 문화가 스노우가 지적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와 갈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두 문화는 때로 전문가와 비전문가 영역, 자연과학과 공학, 과학과 윤리 사이에서 발견되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두 문화의 개념을 보다 포괄적인 방식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경계 안에 고정되어 있는 두 문화의 내용 자체 보다 두 문화적 대립 구도를 만들어내는 구성적 과정에 분석의 초점을 둘 것이다. 두 문화를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와 역사적 논의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두 문화 논의의 형성, 과학기술과 근대성에 대한 일련의 성찰적 논의들, 그리고 분석적 차원에서 본격화된 과학 연구의 개념과 이론적 틀을 검토하고자 한다.

       

1. 두 문화 담론의 형성

두 문화 현상은 과학기술분야와 인문사회과학 분야 각각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과 신념 속에서 발생하는 오랜 대립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되고 반복되는 문제의 지형을 제공하고 있다. 통상 전통적 인문학의 이념은 인문학이 보편적 진리의 담지자로서 진정한 지식을 구현하고 자연과학의 사실적 지식과 다른 지적 실천의 도덕적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스노우의 말을 빌리면, “문학적 지식인은 전통적 문화가 ‘문화’의 전체인 양 생각한다(Snow, 1959)”2)는 것이다.

 

반면에 과학적 사고방식은 베이컨(2003)의 말처럼 “진리는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객관적 지식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봄으로써, 인문학적 지식 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과학이라는 ‘부상하는 문화’ 속에서 인문학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으며, 더 이상 삶을 위한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의 차이 속에서, 과학과 인문학의 두 집단은 마치 영원한 평행선을 달려가는 대립적 존재로 여겨지며 서로 간의 대화와 이해의 노력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스노우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두 문화의 분리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 한 쪽에서는 과학자들을 ‘인간의 근본 조건에 대한 통찰력이 결여된 전문가’로 취급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문학적 지식인들을 ‘과학에 대한 무지’와 ‘진보에서 뒤쳐진 사람들’이라며 조롱한다. 이러한 대립은 오늘날에도 반복되어 과학자 집단의 ‘섣부른 낙관주의’와 ‘문화적 고갈’ 못지않게 인문사회과학 지식인들의 ‘(자연과학) 학문세계를 괴롭히는 고질적인 지적 무기력’은 여전히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대립구도 속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과학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와 과학 활동의 통제 의도를 갖고 있다는 의심의 눈길에 처하기도 한다. 

 

스노우에 따르면, 두 문화의 분리는 서로의 학문세계와 지적 논의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즉 과학기술자와 인문사회과학자들은 연구 대상에 대한 태도, 교육 및 지적 훈련 방식, 고유한 언어와 용어 사용법, 학술적 논의의 전개 방식 등에서 다르며, 이로 인해 대조적인 문화적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문화 현상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리터러시(literacy) 문제 혹은 소통 능력의 문제로 환원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보면, 스노우의 두 문화는 근본적 단절과 화해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서로에 대한 충분한 정보교환과 의사소통을 통해 상호이해가 충만해지면, 두 문화의 분리는 언제든지 극복될 수 있음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존재하는 두 문화의 괴리 현상은 좀 더 근본적인 의미의 대립을 반영한다.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과학기술의 쟁점들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가치체계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문제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문화 현상에 대한 해명은 ‘과학기술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혹은 근대사회의 기술문명에 대한 보다 근본적 시각의 접근이 필요하다.3) 두 문화 현상은 그 이면에 과학과 사회의 분리, 그리고 다양한 제도적 경계와 균열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2. 과학기술과 사회 사이의 대립

두 문화 현상의 이면에 놓여 있는 심층의 대립구도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논의의 첫 번째 중요한 시도는 이른바 ‘근대성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근대의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찬양과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킬 것이라는 계몽주의자들의 순진한 믿음은 ‘근대의 비극’을 포착한 많은 이론가들에 의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익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술의 체계가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행위를 지시하게 되는 근대적 기술 문명에 내재된 근본적 위험을 드러낸다고 본다. 기술 시대는 인간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근본적으로 봉쇄하는 체계라는 것이다(Heidegger, 1993). 아도르노 역시 과학기술이 현대사회의 지배적 문화유형으로 대두되면서 나타난 근대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지적한다. 즉 인간의 자연 지배를 위한 도구로서 과학기술이 사회적 조직 양식에 적용되면서 그 도구적 합리성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 논리로 관철된다는 것이다. 근대사회는 인간을 기술의 효율성과 계산적 절차에 따르는 합리화 대상의 지위로 전락시키고 다양한 인간의 삶을 도구적 합리성 유형으로 획일화하는 ‘기술적 전체주의’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4)

 

최근 서구적 합리성과 이성을 ‘해체’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던의 공격 또한 근대성 혹은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과학의 진리와 발전이 과연 그렇게 신뢰할만한가”라는 핵심 질문을 던지면서, 과학은 현대 사회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료타르, 1992). 과학은 자신을 객관적, 보편적 지식으로 표상함으로써, 과학적 방법 및 인식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 규범으로 작용하고 사회적 권위로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치가 과학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되고 과학 대 윤리, 과학 대 문화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근대성과 과학기술의 관계에 대한 이들의 근본적 비판은 의미 있는 성찰을 가능하게 했지만, 근대성에 대한 일면적 사고로 인해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는 못했다. 이러한 비관적 전망은 이성의 악몽을 비이성과 절망으로 대체하거나, 때로는 종교 및 예술에의 탐닉으로 회피하는 태도를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의 출발이 오히려 과학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쟁점들에 대한 ‘지적 무기력’을 다시 불러오는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근대성과 과학기술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내재적 비판이라기보다는, 이성 바깥의 사유로부터 찾는 외재적 비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외재적 비판은 과학의 방향과 내용을 미리 재단하고 결정하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통제로 작용하게 될 공산이 크다. 이렇게 될 때, 두 문화는 근대성과 과학기술에 대한 근본적 사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영원한 대립의 끝없는 평행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의 흐름에 대항해서, 근대의 기획이 지닌 긍정적 함의를 재활성화하는 동시에 근대성에 내재된 모순을 극복할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과학의 성찰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울리히 벡 (Beck, 1997)등의 이론적 접근과 최근의 과학기술학 논의(Bijker et al., 1987; Collins & Pinch, 1998; Labinger & Collins, 2001;  Hughes, 2004)에 잘 나타나있다. 벡은 ‘진리와 계몽을 독점’하던 과학이 오늘날 나타나는 위험과 부작용을 피할 수 없게 됨으로써 반성과 성찰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고 본다. 즉, 문제해결을 떠맡았던 과학이 오히려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인식이 싹터가고 있다는 것이다.

 

1, 2차 세계대전과 환경오염, 핵 절멸의 위험 등은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 즉 과학의 무오류성이나 객관적 진리의 담지자라는 생각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지고, 과학기술을 둘러싼 쟁점들도 기존의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단일한 접근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정도로 다양해지고 있다. 오늘날 과학은 수많은 경합적 가치체계들 사이에 놓여 성찰적 요구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3. 두 문화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두 문화를 추상적이고 본성적 대립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문화의 관계를 지식 생산 및 배분의 방식과 관련된 제도로서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다루는 사회학적 분석이 유용하다. 예컨대 과학에 대한 제도적 분석은 과학적 사고가 과학 공동체, 연구 연결망, 직업적 조직체의 성격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분석을 잣대로 하여, 두 문화의 제도적 경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지, 그리고 다양한 제도적 균열 및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가 사회적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지 등을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는 두 문화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탐구를 시작하는 것이다.

 

머튼(1998)은 과학의 특성을 과학 제도의 특성으로 다루었다. 즉 과학의 독특한 가치와 태도는 과학 자체의 내재적 특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 공동체가 공유하는 일련의 규범이 존재하고 이러한 규범에 따라 과학적 활동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근대 과학을 ‘과학적 소명의식의 형성과정’으로 파악한다. 과학의 이상적 조직과 기능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의 활동을 지시하는 ‘과학의 에토스’가 과학 공동체 내에 광범위하게 존재해야 한다. 개인들의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대한 공통의 관념과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과학 연구 및 그에 대한 평가가 일관된 기준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5) 이와 같이 과학에 대한 제도적 접근방식을 통해 두 문화를 내재적인 본성적 차이가 아니라 과학 공동체와 문학 공동체의 특수한 규범 및 지식 생산방식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머튼은 이렇게 형성된 과학 공동체의 특수한 규범을 사실상 과학의 보편적 특성으로 연결지음으로써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과학을 과학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무엇이 존재한다는 생각 속에서 두 문화의 분리를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6).

 

반면 부르디외(2002)는 ‘과학장(scientific field)’이라는 개념을 통해, 과학을 사회 구조의 직접적 반영으로 보거나 혹은 이와 반대로 순수한 이성적 활동의 결과로 보는 견해 모두를 비판한다. 과학 공동체를 평화롭고 협동적이며, 순수한 관심과 불편부당성의 영역으로 묘사하는 머튼 류의 기능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과학장 내에서 누가 ‘과학적 권위’를 독점하느냐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투쟁이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과학기술지식은 그것의 생산과 수용, 결과의 측면에서 사회적 과정을 포함한다. 과학기술이 연구자의 순수한 관심과 창조성의 산물이기 때문에 어떠한 이유로도 과학의 자율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과학은 이미 실험실 영역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현대 학문연구의 특성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연구자금의 확보, 정부의 산업 정책과 연구개발 지원정책, 학과와 대학의 거버넌스 등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과학 활동은 점점 더 복합적인 시스템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연구 목적, 대상, 방법, 연구자 선정에 개입되는 사회적 메커니즘의 실체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이렇듯 두 문화를 형성하는 사회적, 역사적 과정이 다양하게 변화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두 문화 담론이 오랜 기간 유지되고 재생산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화’로서의 문화가 어떻게 제도화에 기여하는가를 분석한 마이어와 로완(Meyer & Rowan, 1977)의 연구는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접근방법으로서 근대 과학이 제도화되는 방식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개념적 자원을 제공해 준다. 그들에 따르면, 제도화는 사회적 실재에 대한 ‘공유된 정의’를 개개인이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이렇게 구축된 사회적 현실은 사람들의 사고와 행위 속에서 당연시된 법칙으로 인식된다. 즉, 어떤 조직형태가 그것의 기술적 효율성 및 역사적 유의미성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월하다는 믿음이 유지되고 나아가 그러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문화적 기대에 따라 조직구조를 형성하거나 혹은 일련의 상징적 조치를 통해 사회적 인정을 획득함으로써, 외부로부터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내부 구성원들에게 통합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당성이란 문화의 신화적 힘에 의해 창출되기도 한다는 것이다7).

 

개인들이 두 문화의 분리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차이들은 두 문화의 본래적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종류의 문화적 경험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신화적 성격의 믿음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허위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과학과 기술, 사회들 사이의 조직적, 제도적 짜임새와 상호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가치와 이해관계의 충돌과 관련이 깊다. 개인 행위자 혹은 사회적 집단은 그들이 준거한 상황과 조건에 마주하여, 때로는 두 문화의 차이를 다시 소환하고 음미하며, 재해석한다. 특히, 학문체계의 전문화와 분리, 학제간 장벽의 존재로 인해, 그리고 상호소통구조의 부재로 인해 이러한 상황은 더욱 강화되고 악화되기도 한다. 우리가 다음 장에서 보게 될 사례들은 두 문화와 관련된 최근의 사회적 이슈들이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두 문화의 존재양식과 재생산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다.

 

 

   


III. 우리 사회의 두 문화들

1. 소환된 두 문화: 이공계 위기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

‘이공계 위기론’은 2001년도부터 시작되어 2004년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던 사회적 이슈이다. 2005년도에 들어와 이공계 지원에 대한 정책적 로드맵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2005) 이공계 공직 진출 및 장학금 혜택 등의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지만 “과학자도 자기 자식은 이공계 안 보낸다(『사이언스타임즈』, 2005년 11월 14일자)”는 자괴감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공계 위기의 징후가 감지된 것은 서울대를 비롯한 유수 대학의 이공계열 입학 지원율이 현저하게 하락하고 고교과정의 우수한 학생들이 자연과학대학이나 공과대학의 전공 보다는 의대, 치대 등을 더욱 선호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이 사실은 곧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에 대한 교수들의 목소리가 컸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홀대받는’ 이공계 현실에 대한 사회구조적 차원의 분석이 주를 이루게 된다. 주로 교수와 기업체 임원, 연구기관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공계 출신의 여론 주도층들은 이공계 인력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보상 문제, 이공계 출신의 낮은 공직 진출 비중, 열악한 연구 및 교육 환경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이공계열 출신자들과 비이공계 출신자들의 대립 구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과학기술자들은 오늘날 한국경제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주도세력이 이공계 출신들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적합한 사회적, 경제적 대우는 고사하고 공돌이라는 오명이나 쓰게 되어 억울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반면 인문사회계 출신의 필자들은 이공계 필진만큼 격렬히 반응하지는 않았으나 사회적인 기여의 측면에서 인문계 출신의 기여도 결코 이공계 출신자 못지않다는 점, 그리고 인문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위기가 진행되어왔으나 이렇게 요란스럽게 반응한 적도 없다는 점을 들어 좀처럼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의견의 차이는 쉽게 ‘두 문화’의 차이로 환원되어 인식되었다. 예컨대,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이해관계가 엇갈린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원래 다르다”, 혹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논리가 한편으로는 내부적 공감대 형성이라는 차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전투용 언어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공계 출신과 비이공계 출신자들이 점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의 객관적 격차가 이공계 위기의 주요 원인이었을까?

 

얼핏 보기에는 이공계 위기가 마치 이공계 출신과 비이공계 출신의 대립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들 사이에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나 대립구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다. 이공계 출신 필진들의 주장에 대꾸를 한 것은 대개 인문계 출신의 필진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공계 출신들이 겨냥한 대상은 인문계 출신 그 자체이기보다는 오히려 의대, 치대, 한의대, 상경대, 법대 등 전문직을 배출하는 대학과 전문 직종 종사자들이었다8). 요는 스노우가 주목했던 과학계와 문학계의 대립은 사실상 본질적 이슈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과학계와 인문계의 시선은 정작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2000년 이후 본격화된 이공계 출신자들의 불만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상 구조가 매우 불합리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1997년의 경제위기 이후 가속화된 고용 불안정성의 증대와 청년 실업률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직 의사, 변호사, 기업체 임원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만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전문직’으로서 과학기술자의 직업이 갖는 정체성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서로 비슷한 교육 환경에서 힘든 공부를 하고 비슷한 정도의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왜 그들만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가”라는 의문이 과학기술직의 직업 정체성을 둘러싸고 등장한 것이다. 이 문제의식은 과학기술자들의 마음을 근본부터 뒤흔든 것이었지만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의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었기에 문제가 조직화된 공식적 이슈로 제기되기 보다는 오히려 ‘비이공계 출신’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로 표출되었다. 그렇지만 실제 이공계 위기의 대립 구도는 단순히 이공계냐 비이공계냐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전문직’의 정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것이다. 

 

전문가로서 과학기술자의 위치는 현대적 조건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과거와 달리 이공계열 졸업생 수가 증대하면서 그들 내부의 층화와 분화가 진전됨에 따라 이공계 직업의 전문성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과학기술의 발전 자체가 국가의 정책적 방향 및 지원시스템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 과학기술자들의 독자적, 독점적 역할은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셋째, 새로운 과학기술이 빠르게 산업화됨에 따라 한편으로는 과학기술의 전문적 영역이 확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존의 전문적 능력이 급속히 탈전문화되는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전문직 종사자로서 과학기술자의 위치는 이와 같은 조건과 한계 속에서 설정될 수밖에 없으나 이러한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공계 출신자들은 쉽게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런 맥락에서 이공계인들의 직업적 정체성을 둘러싼 불안감,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 인식이 외형적으로는 ‘비이공계’에 대한 막연한 불만과 피해의식으로 나타나 전통적인 ‘두 문화’적 관념을 소환하고 강화하게 된 것이다.

 

2. 퇴장한 두 문화 -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진실성을 둘러싼 논쟁

2005년 5월 황우석 연구팀이 인간배아줄기세포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발표한 이후, 많은 사람들은 난치병 치료에 앞장서는 박애주의자이자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표명한 자랑스러운 과학자가 바로 우리와 같은 한 핏줄이라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우리에게 ‘젓가락질’의 가치와 대중과의 소통능력이 갖는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2005년 11월 22일에 방송된 문화방송 <피디수첩>으로 인해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연구원 난자 사용과 난자 매매가 이슈로 등장했기 때문에 비록 연구윤리가 비판의 대상에 오르긴 했지만 줄기세포 연구의 ‘진실성’과 황우석 교수의 ‘진정성’은 그다지 훼손되지 않았다. 오히려 문화방송의 애국심 부족이 질타의 대상이 되었고, 합법적으로 난자를 제공하려는 여성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진달래꽃과 함께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2005년 12월 1일) 줄기세포의 일부가 환자의 DNA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화방송 보도가 나가면서, 논란의 국면은 연구의 진실성을 둘러싼 과학 논쟁의 성격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이 과정, 즉 연구의 진실성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이 갖는 특징을 몇 가지 측면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황우석 사건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사건의 주제가 ‘줄기세포 연구의 진위’라는 과학적 성격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논쟁에 결말을 내는 권위 있는 판관’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과학과 과학발전에 대한 통념을 깨는 중요한 특징이다. 물론 과학 혹은 과학 제도의 권위가 상대의 논리와 진실성을 해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는 했다. 예를 들면, 황 교수는 문화방송의 재검증 요청에 대해 “언론이 과학을 검증하려고 하느냐”고 했고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해서도 “조사위에 줄기세포 전문가가 없다”는 이유로 반발했으며, 오명 전부총리는 “세계적인 저널 사이언스의 검증을 신뢰하자”고도 했다. 하지만 어떠한 입장에 있든, 과학의 권위에 근거한 어떠한 반론도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지는 못했다.

 

오히려 논란이 진행되면서 각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황우석 지지파와 반대파의 노력은 ‘신뢰’라는 이슈, 즉 “누가 더 신뢰할만한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것이 황우석 사건의 또 다른 특징이다. 과학자 집단인가, 언론 집단인가? 여성 연구원인가, 그의 지도교수인가? 함께 공동연구를 수행한 세계의 과학자인가, 아니면 황우석 연구팀인가? 특허의 지분까지 나눈 사이좋은 관계였으나 이제는 원수지간이 된 미즈메디 노성일 원장을 믿을 것인가, 황교수를 믿을 것인가? 국과수나 중소기업 연구소의 검증결과는 믿을만한 것인가?

 

이와 같이 황우석 사건의 진행이 신뢰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전문가들만이 독점해왔던 과학 용어와 검증 절차가 일간 신문과 일상의 화제 거리로 일반화되었고 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그 발언 의도와 배경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이번 사건이 거의 ‘조작’과 ‘날조’ 사건임이 명백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황우석 교수에 대한 신뢰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현상이 과학적인 조사 보고서의 공개와 다른 과학자들의 과학적 ‘증거 제시’에도 불구하고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과학자들의 과학’ 보다 ‘황우석의 과학’을 더 믿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이번 사건의 세 번째 특징인 ‘대중’의 개입과 연관되어있다. 이번 사건에서 대중은 단순히 구경꾼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발언자로 나섰다는 점이 중요하다. 과학적 진위를 가리는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대중 개입’의 영향력이 거세었던 데는 첫째 줄기세포 연구가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science in the making)'이었다는 점과 둘째, 황 교수가 대중을 끌어들이고 대화하는 방식이 갖는 독특한 특징에 그 이유가 있다고 본다. 황 교수는 때로 대중을 그의 ’동료‘로 호명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누가 내 친구이고 누가 내 적인가를 묻는 방식의 대화를 취하고 있다.9) 이와 같은 대화에 호응하는 과정에서는 두 가지 태도만이 발전된다. 하나는 그의 친구로서 완전히 공감하는 관계를 갖거나 아니면 그의 적으로서 그를 불신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황우석, 그리고 그에 대한 대중의 신뢰와 믿음 사이에는 강한 연대가 형성되었다. 이 연대감은 민족주의 정서, 난치병 환자에 대한 박애주의, 세계 최고에 대한 열망 등과 연관되어 있는 한편 그가 대중과 맺는 관계 형식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과학자에 대한 기존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깬 황우석 교수는 대중과의 대면에서 진지한 전문가 의식을 가진 위엄 있는 과학자로서, 상냥한 인상과 인도주의적 사명감까지 겸비한 존재였다. 즉, 두 문화의 특징을 그의 이미지 속에 통합시킨 황 교수는 첨단 과학의 선도주자이며 친절한 민족 과학자의 상징이자 대중 연설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과학이라는 이유로도, 과학적 방법으로도 쉽게 황우석 신화를 깰 수 없었다. 비록 어머니가 거짓말을 했을 지라도 그것만으로 어머니에 대한 신뢰를 저버릴 수 없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황우석 사건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과학 진실성 검증의 주체 문제, 민족주의적 심성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일어난 세계성과 지역성의 대결, 생명윤리나 여성의 인권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난 과학과 가치문제, 상대를 ‘비이성’이라 부르며 ‘이성’을 선점하려는 노력과 같은 다양한 모습들10)이 표출되었다. 또한 논쟁의 국면이 바뀔 때마다 이러한 이슈들이 번갈아 등장하거나 혹은 함께 등장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과학과 언론 사이의 대결로 보이는 듯 했으나, 실제로 두 문화 사이의 충돌이나 시각의 차이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는 두 문화의 이슈는 사실 근대 사회가 가진 다양한 경계선들 중 하나이며, 그것은 불변하는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슈와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서 때로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때로는 사라지기도 하는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기술세계와 인문사회세계의 본질적 차이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는 있으되, 그것은 여러 학문분과들에서 나타나는 차이들, 또는 청소년세대와 기성세대의 차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3. 화해되지 않은 두 문화: 공학에서 학제간 교육의 현실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하고 그 위험성 혹은 불확실성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짐에 따라 대학의 과학 및 공학 교육에도 과학기술의 사회적, 윤리적 이슈를 다룰 수 있는 교과과정의 도입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연과학 보다는 공학 분야가 훨씬 더 빠르게 움직여 왔는데, 그 이유는 첫째 공학이 산업적 흐름이나 사회적 수요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공학 외적인 분야의 교육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적은 편이고 다음으로 더 중요한 이유는 ‘공학교육인증제도’의 존재로 인해 일정 정도의 학제간 교육과정 도입이 제도적 요건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과학 및 공학 내부의 요구와 인문사회 분야로부터의 외부적 요구가 모두 관련되어 있으나, 이들이 때로 서로 다른 관심과 목적에 기초해 있어 ‘학제간 교육’의 실행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우선 과학과 공학 내부의 요구는 국가적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일찍부터 과학 및 공학 분야에 인문사회분야 교육을 공식적인 교과과정의 일부로 도입했던 미국의 경우,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역사적, 윤리적 성격에 대한 교육을 학부 과정에 체계화시킨 이유가 그들이 배출하는 인력의 사회적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Olds et al., 2005),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의 사회적 대응 능력을 키워 일반 대중 및 인문사회과학자들의 반과학적, 반기술적 태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입장을 표명하는 과학과 공학 분야의 교육자들은 문학 혹은 사회에 대한 과학자들의 무지 보다 과학에 대한 문학가 혹은 사회과학자들의 무지가 더 심각한 상황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전체적으로 과학적 해독력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Cole, 1996).

 

반면 과학기술학 연구자들은 각 분야의 학문적 접근에 기초하여 과학과 기술 활동에 내재된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의 영향력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데 더 관심을 둔다. 과학기술을 다른 사회문화적 현상과 다른 독특한 것으로 다루어주기를 바라는 과학기술자들의 희망과 달리 과학기술학 연구자들은 과학과 기술 역시 사회적, 문화적 구성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본다(Franklin, 1995; Reid & Traweek, 2000). 이렇게 상이한 이해에 기초한다 하더라도 공학교육에서 이루어지는 학제간 교육의 실시는 과학기술과 사회의 연결 지점과 방식에 대한 풍부한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Hauser-Kastenberg et al., 2003).

 

그렇다면 국내의 상황은 어떠한가? 대략 2002년도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한국공학교육인증은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접어들고 있는 상황이다.11)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공학교육인증은 미국 등의 경우와 맥락이 다르다. 첫째, 우리나라에서 공학교육인증이 시작된 것은 일부 공학 전공의 자격증 취득이 곧바로 국제적인 자격증12)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 둘째,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학부제의 시행으로 인해 공대 입장에서는 기초과학교육과 전공교육이 약화되고 있다는 불만이 많았다. 또한 학부제 실시로 인해, 사실상 1, 2학년 학생 교육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제도적 접근이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공학교육인증제도는 기초과학교육 및 전공교육의 이수학점을 높이고 사실상 학부 2학년부터의 전공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물론 공학교육인증제가 도입되면서, 공학소양수업의 강화와 확대가 필요했다.

그런데 공학소양수업의 구성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공학교육의 독특한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공학교육인증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국내의 몇 개 대학은 점차 공대가 자체적으로 경영학 출신의 교수를 임용하여 공대 학생들의 경영학 관련 수업을 전담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기초과학교육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동일 대학의 이과대학 혹은 자연과학대학으로부터 지원을 받기보다는 자체적으로 수학 및 물리 분야의 강의전담교수를 임용함으로써 공대의 기초과목강의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문제가 한편으로 지식 영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학제간 경쟁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쉬(Fish, 1989)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의 학문 영토에는 오직 한 번에 하나만이 거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수입된 텍스트는 결국 그것을 수입한 분과학문에 의해 다시 만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상 학제간 영역이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반대하여 실제로는 유사 학문 내부의 통합 불가능성이 오히려 타학문들 사이의 통합가능성 보다 더 심각한 경우가 있다는 논의도 있다(Lyon, 1992).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나라 대학교육에 있어서, 학제간 협력이나 통합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학소양교육의 운영이나 기타 교과과정의 시스템을 볼 때, 외형상으로는 분과학문간, 혹은 학제간 영역이 확보되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타학문 분야에 대한 통제력을 내부화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지식 영토를 공고히 하거나 확장하려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학제간 협력이나 결합을 마치 ‘임신한 남성에게서 합리성을 기대하는 것13)’처럼 어리석은 일로 보는 풍토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공학소양수업의 경우, 공대에서 필요로 하는 경영학 분야나 특허, 사회학, 윤리학, 법학 등의 분야와 쉽게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분과학문간 체제가 가지고 있는 경쟁과 경계로 인해 오히려 공학 내부에 ‘인문사회과학’을 내부화시키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문화가 단순히 과학 대 비과학의 구도가 아니라 학문분과들 사이의 경계를 통해 또다시 재생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문제는 단순히 과학기술 분야와 인문사회 분야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과학과 공학 사이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최근 인터뷰한 전기전자공학과의 몇몇 교수들은 예를 들어, 핸드폰을 완전히 수학적 원리로 환원시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수학의 중요성을 지적했지만 수학과 교수와 협력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전기전자공학자들이 필요한 수학적 원리를 응용하여 사용하거나 수학 분야 논문을 참고하는 정도의 간접적 접촉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가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나노테크놀로지가 지닌 두 문화 - 과학적 접근과 공학적 접근 - 의 측면을 분석한 글(Bensaude-Vincent, 2004)에서 저자는 양쪽이 모두 생물학에서 영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노기계 개념을 둘러싼 역사적 기원의 차이와 학문적 접근법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개념적 틀을 발전시켜 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강내희(1998)가 지적하고 있듯이, 전문직업화와 관련된 근대의 분과학문 체계 발전과 관련이 깊다고 본다. 근대의 대학에서 지식생산의 구획화가 ‘학과’를 통해 완성되면서, 학과 내부의 조직 원리, 문화, 학과간 경쟁의 양상들이 발전되고 있고 이것이 오히려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IV. 두 문화의 재생산 과정: 두 문화 속의 두 문화들


앞 장의 사례에 나타난 바와 같이, 두 문화 담론은 과학과 기술, 사회가 관련되는 이슈의 특성에 따라 전면에 부각되기도 하고, 오히려 사라지기도 한다. 때로는 이해관계의 표출이나 분과학문체계의 수호와 관련되어 더욱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이공계 위기와 학제간 교육협력의 사례),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약화된 모습(황우석 사건)을 드러내기도 한다. 따라서 두 문화의 해소가 - 스노우가 주장했듯이 - 단순히 두 문화 사이의 ‘소통’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문화(Two Cultures)는 비단 과학 대 비과학의 대립 구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두 문화는 다양한 대립 구도들, 예컨대 과학 대 비과학, 공학 대 이학, 전문가 대 비전문가, 인문과학 대 자연과학, 이공계열 대 비이공계열과 같은 다양한 두문화들(two cultures) 속에서 변형되며 재생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두 문화 담론은 시대적,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 등장하고 있는 것인가?

 

근대 제도와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두 문화 담론의 재생산 메커니즘을 규명하려면 단순히 소통의 문제로 두 문화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가져오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들을 탐색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먼저 근대의 조직화 원리로서 존재하는 과학과 다른 한편으로, 구체적 경험 속에서 만나는 과학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검토한다.

 

근대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 사회가 조직화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이 영향을 미친다. 첫째, 근대 사회에서 추상체계로서 전문지식, 특히 과학에 대한 신뢰는 철회 불가능한 조건(기든스, 1991: 93)이라는 것이다. 전통사회의 가치와 종교, 규범을 근대적 가치로 전환시키는 데 있어서 과학과 과학정신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그리고 과학기술을 활용한 산업기술의 발전과 과학기술 교육시스템 확립, 합리적 제도와 절차의 확대, 전문가 체계의 성립과 이들에 대한 신뢰는 근대 제도의 본질을 형성하고 있다. 즉, 구체적인 지식 생산의 절차와 조건을 포괄하는 과학에 대한 신뢰는 근대적 삶의 전제 조건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과학에 대한 신뢰는 철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근대 사회의 조직화 원리로서의 과학이 아닌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과학은 때로는 직업이고, 때로는 생활필수품이며, 때로는 교과목의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개인들이 각각의 경험세계에서 만나는 과학과 기술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과의 접촉 정도도 개인에 따라 상이하다. 경험세계에서 마주치는 과학과의 대면적 접촉양식에 따라 과학에 대한 복잡한 태도, 예를 들면, 친숙한 과학/어려운 과학, 믿을만한 과학/못 믿을 과학, 세계 과학/민족 과학 등에 대한 독특한 사고가 형성되기도 한다.

 

그런데 개인의 경험을 통해 만나게 되는 구체적 과학과 근대의 조직화 원리로 존재하는 추상체계로서의 과학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이들의 모순적 관계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거짓을 말하고 연구비를 횡령하는 과학자들의 존재로 인해 과학 그 자체의 명성과 위상이 훼손당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은 갈수록 연구자금의 확보, 정부의 연구개발 정책, 시장논리의 도입 등에 의해 영향을 받아 시장의 한 중심부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의 신성함과 과학다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학의 과학다움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가? 분명한 것은 과학이 구체적인 과학자의 활동으로부터 직접 구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오랫동안 기술적 전문지식을 신봉하게끔 만드는 확실한 지식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해 왔다. 우리는 교육 과정 속에서 과학과 기술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명시적으로 혹은 은연중에 전수받고 있다. 즉 근대적 교육체계 안에서 과학은 무지와 싸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며 과학적 지식은 신뢰할만하고 객관적이며 편향되지 않은 것이라는 믿음이 지속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과학기술지식에 대한 대중의 상식적 태도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기든스, 1991).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일반적인 대중의 인식은 존중과 적대감, 두려움의 태도를 함께 나타낸다. 때로는 확실한 지식의 원천으로서 완전히 존중되기도 하며, 때로는 회의와 갈등의 전면에 놓이기도 한다. 과학은 두 얼굴을 지닌다. 즉 과학은 본연의 ‘과학다움’이라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유지하는 동시에 현실의 세속화된 과학으로서 존재하며, 이 둘은 다양한 긴장 속에서도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신성한 세계와 세속적 세계를 넘나드는 과학의 이중성은 과학기술 전문지식의 생산 및 관리 체계, 즉 전문가 체계 속에서 구체화되고 제도화된다. 전문가 체계는 의학, 법학과 같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과학과 기술지식을 다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 체계를 절대화하여 과학자들만이 합리성을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할 때는 문제가 된다.14) 이 때 금기의 파괴자였던 과학은 오히려 ‘금기의 구성자’(벡, 1997: 251)가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과학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이 단지 기술적 관리가능성의 문제로 한정되며 계산 불가능한 위험들은 잔여 위험으로만 취급된다. 황우석 사건에서처럼, 생명윤리의 문제와 난자를 제공한 여성들의 건강 문제, 연구의 특허권 소유 문제, 난치병 환자에 대한 치료비용 문제, 과학기술부의 연구비 제공이 갖는 절차적 정당성과 같은 이슈는 주변적 문제로 남겨져 버렸던 것이다.

 

과학자들이 ‘닫힌 문 뒤’에서 일하고 있을 때, 이것을 알 수 없는 대중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이런 과학을 신뢰할 것인지, 말 것인지의 양자택일적 상황일 수밖에 없다(그레고리 & 밀러, 2001: 191). 이러한 상황은 대중의 영역으로부터 과학이 분리된 사회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주며, 이 과정 속에서 과학과 비과학, 전문가와 일반 대중의 경계는 공고화된다. 과학기술을 전적으로 보편합리성의 구현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특정 전문가들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전문가주의의 표출은 과학과 사회의 분리를 가속화하고, 따라서 두 문화의 분리를 재생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전문가 체계의 작동에 대한 성찰 이외에도 우리 사회가 과학기술과 맺고 있는 독특한 성격, 즉 과학기술의 수단화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과학기술 발전 과정에서 보이는 역사적 특징, 즉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우선주의 정책에서 획득된 태도는 경제성장의 도구로서 과학기술에 대한 열광을 불러 일으켰다. 고시가 개인과 가족 구원의 통로였다면, 과학기술은 국가 구원의 통로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서구에서 과학 논쟁이 대개 종교적 신념, 좌우의 정치적 위치, 근대와 탈근대의 쟁점과 관련된 ‘문화전쟁’의 성격, 즉 전면적인 가치체계의 충돌로 표출되었던 반면 한국에서 이러한 대립구도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았다. 과학 논쟁은 개인, 집단, 국가의 직접적 이해관계에 얽혀 변형됨으로써 과도하거나 불충분하게 얘기되었을 뿐이다.

 

과학기술은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했고, 이를 담당하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 역시 자신의 일과 역할에 대한 성찰적 태도를 깊이 있게 진전시키지 못했다. 이와 같은 태도가 과학기술자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반화되어 있는 가운데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과학기술자의 문제가 ‘위기론’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세계 최초’, ‘미래 과학기술의 중요한 문’을 연 과학자에 대한 일방적인 환호와 열광이 쏟아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두 문화 담론은 자연세계와 사회세계의 본질적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철회 불가능한 과학(Science)과 일상 속에서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는 과학들(sciences) 속에서  근대 사회가 갖고 있는 다양한 이해대립의 지점들과 전문가 체계의 ‘지식독점’을 둘러싸고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혹은 다시 소환되고 있는 담론이라고 본다. 따라서 두 문화(Two Culture)는 대립된 지점들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두 문화들(two cultures) 위에서 생산되고 변형되고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Ⅴ. 맺는 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두 문화를 통해 과학기술과 사회와의 관계를 조망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연구는 최근의 과학기술 쟁점을 둘러싼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면서 ‘사회문화적 구성물로서 두 문화’의 다양한 전개 양상을 포착하고자 했다. 다만, 우리가 다룬 세 가지 사례는 그 자체로 두 문화 이슈만이 아니라 상이한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례들 속에서 두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재생산되고 변형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지점들이 있다고 판단하여 논의를 진행하였다.

 

두 문화는 과학기술 분야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학문적 접근방식과 태도에서 보이는 문화적 차이뿐만 아니라, 나아가 과학과 기술, 사회 사이의 영역 분리 및 제도적 분절,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의 갈등 및 가치체계의 대립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대립적 요소들의 존재가 다른 한편에서는 종종 두 문화의 본성적 차이로 재해석되고 환원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과학은 다른 행위자 및 사회 영역의 개입과 비판을 허용치 않는 신화적 존재로 머무르려 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의 과학, 과학자 및 과학 제도는 사회의 다양한 행위자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과정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이 연구를 마무리하면서 두 문화 분리를 해소하는 길은 단순한 소통을 넘어 아래에서 제시하는 바처럼, 우리 사회 과학기술자 집단의 정체성 형성, 단절된 분과학문 및 교육체계, 독단적 전문가 체계의 문제를 고찰함으로써 개인, 집단, 제도적 수준의 성찰성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사회 전문가 집단으로서 과학기술자의 정체성 형성과 관련한 성찰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흔히 두 문화를 나타내는 이과 성향과 문과 성향이라는 개인의 정체성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 예컨대, 언어 능력의 부재 혹은 수학 및 과학 능력의 부족과 같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것은 어떤 직업 집단의 정체성 구성이 내적인 자신감에 기초하여 적극적으로 추구되는 것이기보다는 타자의 눈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타자에 의존해서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 성찰적 능력의 부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공계 위기론은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의 통합을 위한 표상으로 사용되어, 마치 ‘이공계’라는 단일한 이해가 존재하고 그것이 다른 집단의 이해관계에 반하여 구축되어야 하는 것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과학기술자 집단은 경제성장 및 민족의 담론에 의탁하여 동원되거나 스스로를 도구적 역할에 한정함으로써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요소와 관련한 성찰적 능력을 배양하지 못한 점도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자들은 실험실과 같은 고립된 울타리 안에 갇혀 있기 보다는 전문가로서의 식견과 성찰적 능력을 바탕으로 관련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적극적 발언과 참여를 통해 사회적 인정을 획득하는 동시에 사회와의 소통 능력을 증대시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오늘날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가 복잡해지고 상이한 분야들을 관통하는 지식의 연계와 통합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면서, 분과학문적 지식과 구획화된 교육제도, 분절된 전문가 체계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소통의 영역을 개척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학문분과들 사이의 경직된 장벽은 현대사회가 제기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이슈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기존의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단일한 접근으로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오늘날 학문․교육․직업체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폭넓고 균형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학제간 연구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합적 교육체계와 함께 직업 영역에서 과학기술과 사회가 만나는 다양한 접경지대를 창출하는 등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러한 층이 두터워지고 확대될 때 두 문화 사이의 상호 접목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과학기술을 둘러싼 사회적 이슈들에서 보듯이, 과학기술의 위험과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이 증대되면서 근대 과학과 전문가 체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 체계의 폐쇄성과 지적 독점은 대중을 과학에 대해 무지한 사람으로 만들며, 이로 인해 대중들은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거나 과학이 가져올 결과들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피하려면, 과학의 과잉 전문화 경향에서 벗어나 전문화 이면에 있는 권력을 밝혀내고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연관 속에서 새로운 발전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생명윤리나 연구윤리에 대한 지침이 마련되고 검토와 조정 기능이 제도화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과학이 전문화된 관련 학문 분야와 건전한 사회적 실천가들과 연계될 수 있는 열린 학문으로 자리매김되고 시민사회의 관여와 참여 속에 과학의 제도적 책임이 정립될 때, 두 문화 이면에 놓여 있는 과학과 사회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과학, 기술, 사회 사이를 연계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참여 및 성찰적 능력의 증진, 서로에 대한 인정과 책임성의 확보, 학문․교육․직업․정책 등에서의 다양한 접경지대를 창출하는 전략적 기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사회의 통상적이고 뿌리 깊은 두 문화는 이러한 새로운 대안 모색을 통해 소통의 지평을 넓히게 될 것이다.

 

 

 

 


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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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사실 '두 문화' 담론의 기원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Labinger & Collins, 2001) 근대에 들어와서도 과학이 인문학보다 우월하다는 토마스 헉슬리와 그의 주장을 반박한 아놀드(M. Arnold)의 강연(1882),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강조한 노쓰롭(F. S. C. Northrop, 1947), 경계를 넘는 경험을 강조한 래비(I. I. Rabi, 1955) 등이 있었다(홍성욱, 2005). 그런데 유독 1959년 행해진 스노우의 두 문화 강연이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그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을 밝혀냈기 때문이 아니라 두 문화현상의 성격과 특성을 개인의 경험에 근거하여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2) 스노우가 두 ‘문화’라고 굳이 쓴 이유는 첫째,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자기들의 시대, 장소, 교육이 낳은 소산으로 되어간다는 의미에서, 즉 어떤 집단의 공통된 가치와 규범, 행동의 규준이라는 의미에서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과학 역시 고도의 지적 작업이자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 ‘문화’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과 문학은 동등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스노우의 용어법에는 과학을 사회 문화의 의미 있는 일원으로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인문주의자들의 뿌리 깊은 신념에 대한 비판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이런 점에서 울리히 벡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비판의 기원은 비평가의 ‘비합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대하는 위험에 직면한 기술-과학적 합리성의 실패에 있다. 이것은 개별 과학자나 분과학문의 실패가 아니다. 그보다는 위험에 대한 과학의 제도적 및 방법론적 접근에 체계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벡, 1997: 112)라고 지적하고 있다.

 

4) 전체주의적 관리사회는 도구적 이성이 점차 사회의 지배적 논리로 관철됨에 따라, 개성의 의미가 사라지고 인간은 추상적인 이름으로, 하나의 숫자로 환원되는 동질적 체계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1995). 이러한 전체주의의 논리가 가장 극단적 사태로 드러난 것은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에서였다. 바우만은 유대인 대학살이 완벽하게 합리적인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현대적인 사회공학의 한 예라고 지적하면서, 희생자들이 단지 ‘숫자로 환원’되어, 오직 기차 칸에 실린 ‘화물로서만 다루어지는’ 근대사회의 합리화된 시스템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Bauman, 1989).

 

5) 샤인(1990)은 세계를 인식하는 특정한 관점과 가치가 조직 문화 속에서 싹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즉 과학에 대한 가치와 태도는 “오랜 기간 조직 구성원에게 타당하다고 여겨지고 아무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새로운 구성원들에게는 조직의 대내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으로 학습”된다는 것이다. 

 

6) 이런 점에 때문에 멀케이는 머튼의 기능주의적 분석에 대해 진정한 사회적 실재를 규명했지만 그것은 규범적 구조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간주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지적한다. 멀케이(1976)는 과학자들의 행위가 머튼이 주장했던 제도적 규범의 처방을 따르지 않은 경우, 과학자들의 활동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라고 물으면서, 그것은 연구자들이 그들의 동료가 수행하는 연구에 유용하다고 간주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상받는다고 주장한다. 이 때, 유용성은 연구자들의 이해관계나 재정적 여건 등 사회적, 정치적 요인을 포함하게 된다는 것이다(웹스터, 1991:21).   

 

7) 신화는 우연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 심지어는 특정 가치를 위해 조작된 요소들을 정화시키고 순수하게 만들고, 자연스럽고 영원한 것처럼 보이게끔 만든다. 그것은 모순이 없는 세계, 확신에 찬 세계를 만듦으로써 자신을 신성화한다. 즉 “신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역사를 자연으로 변형’시키는 데 있다”(Barthes, 1995).

 

8)이공계 출신들은 연도별 수능시험 지원자 현황, 우수학생들의 의․치예 계열 진학, 업종별 대졸 초임 비교, 공무원 중 이공계 분포, 상장기업 CEO의 전공 분포와 같은 민감한 데이터를 동원하여 자신의 위치를 다른 영역과 비교하였다.

 

9)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그는 언론이나 각종 모임에 참여하여 자신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활동을 벌인다. 자신의 입장을 설득하기 위해 적극적인 편이고 또한 기존의 다른 과학기술자들의 모습과 달리 일반 국민과 네티즌을 상대로 말을 거는 편이다. 이번 사건에서 나타난 일반 국민 및 네티즌의 열띤 반응은 한편으로 황우석 교수와의 끈끈한 우정관계에 기인한 것이기도 한다. 황교수는 국민을 상대로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진실한 친구라는 점, 그리고 후원자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10)과학의 진실성을 누가 검증할 수 있으며, 그 결과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언론’으로 대표되는 비과학의 임무가 아니라는 데에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으나 서울대, 피츠버그 대학, 사이언스, 세계의 과학자 이들 모두가 이해당사자일 수 있는 현실 때문에 쉽게 결정되지 못했다. 또한 황교수 비판에는 곧바로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는 댓글이 달렸으며 새튼 교수를 오노 선수와 비교해 민족주의적 분개를 촉구하기도 했다. 여성 연구원의 난자 제공 문제는 애써 외면하는 분위기이고 상대를 ‘비이성적’ 상태로 힐난하는 사례도 흔하게 나타났다.  

 

11)www.abeek.co.kr에서 공학교육인증과 관련한 세부사항을 알 수 있다. 외국에서 시작된 공학교육인증제는 무엇보다 공학교육이 사회적 요구와 산업적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체계적 시스템으로 발전되는데 일차적인 목적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요구를 담을 수 있는 공학윤리, 과학기술의 역사, STS 교육이 도입되고 산업체의 요구를 담는 피드백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12)예를 들면, 토목공학 분야에서 취득하는 전문기술사의 경우, 우리나라 자격증으로 외국에 나가 인정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이 워싱턴 협정에 가입되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받은 자격증이 외국에 나가서도 인정받게 된다. 워싱턴 협정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공학교육 인증제도를 실시하고 이에 대한 워싱턴 협정과 관련된 외국기관의 승인이 필요하다. 

 

13)이 표현은 원래 경영학자인 브라운(Brown, 1997)이 경영학을 마치 독자적 학문인 것처럼 보려는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사용한 것이다. 

 

14) 과학기술의 제도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가 체계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롭게 등장한 과학자 집단은 이 전문가체계의 성립과 함께 점차 비전문가 집단과 뚜렷이 구별되고 이것이 과학과 관련한 의사결정의 독점과 결합되면서 과학과 과학자는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된다. 전문적인 직업집단은 폐쇄적 체계 속에서 유지되며, 그들 사이에 통용되는 전문 용어는 일반인들을 위축시키는 것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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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Left Review 35, September-October 2005]

THE ADVENTURE OF FRENCH PHILOSOPHY

 Alain Badiou 

 오랜만에 자료 하나 올립니다. 지난 해 <뉴레프트 리뷰> 2005년 마지막 호에 실린 알랭 바디우의 글입니다. 알랭 바디우는 현존하는 프랑스의 철학자 중 대가로 꼽히는 사람인데, 그가 "프랑스 철학의 모험"이라는 제하로 "현대 프랑스 철학(contemporary french pilosophy)"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글을 썼네요.  

 오히려 다소 도식적이라 보일 정도로, 현대의 프랑스 철학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어서 프랑스 철학의 지적 지형도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디우는 크게 철학의 기원, 철학적 작업(수행), 철학과 문체 및 문학과의 관계,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관계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논의를 전개시킵니다. 우선 기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삶과 개념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을 각각 베르그송적 전통과 브렁슈빅적 전통과 연결시킵니다. 바디우에 따르면 전자는 들뢰즈까지 영향을 미치고, 후자의 경우는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르, 라캉 등에게 각별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한편 이 장의 말미에서는 데카르트적 유산을 둘러싼 입장들로 다시금 지형을 그리면서, 현대 철학에서 '주체'의 문제가 갖는 중요성을 환기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철학적 작업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중요했던 몇 가지 계기들, 그 추동력에 대해 언급합니다. 바디우는 그것을 크게 독일적인 것의 영향(프랑스 철학의 작업 대상으로서 독일 철학의 유산이 갖는 중요성), 과학(science)에 대한 관심의 증대,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개입, 그리고 철학의 근대화(다양한 분야로의 확장),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장에서는 프랑스 철학이 글쓰기, 특히 문학과 맺고 있는 특별한 위상에 대해 언급합니다. 알랭 바디우 자신의 자랑이 좀 들어가기도 해서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 초현실주의가 수행한 중요한 역할에 대한 평가와 푸코나 들뢰즈 등이 추구한 글쓰기에 대한 평가로 이어집니다. 

 마지막 장에서 바디우는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적대적 공존 관계에 대해 해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체의 문제를 재구성하고 다시금 사유하는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비판적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정식화나 개념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사유의 모험"을 즐기는 프랑스 철학의 특징이 바디우의 글 전체, 특히 글 말미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영문으로 되어 있지만 영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으니 다들 일독해보기를 권합니다. :) [2006.1.14, UK]

 

 

 

[New Left Review 35, September-October 2005]


THE ADVENTURE OF FRENCH PHILOSOPHY


Alain Badiou



Let us begin these reflections on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y with a paradox: that which is the most universal is also, at the same time, the most particular. Hegel calls this the ‘concrete universal’, the synthesis of that which is absolutely universal, which pertains to everything, with that which has a particular time and place. Philosophy is a good example. Absolutely universal, it addresses itself to all, without exception; but within philosophy there exist powerful cultural and national particularities. There are what we might call moments of philosophy, in space and in time. Philosophy is thus both a universal aim of reason and, simultaneously, one that manifests itself in completely specific moments. Let us take the example of two especially intense and well-known philosophical instances. First, that of classical Greek philosophy between Parmenides and Aristotle, from the 5th to the 3rd centuries bc: a highly inventive, foundational moment, ultimately quite short-lived. Second, that of German idealism between Kant and Hegel, via Fichte and Schelling: another exceptional philosophical moment, from the late 18th to the early 19th centuries, intensely creative and condensed within an even shorter timespan. I propose to defend a further national and historical thesis: there was—or there is, depending where I put myself—a French philosophical moment of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which, toute proportion gardée, bears comparison to the examples of classical Greece and enlightenment Germany.

 


Sartre’s foundational work, Being and Nothingness, appeared in 1943 and the last writings of Deleuze, What is Philosophy?, date from the early 1990s. The moment of French philosophy develops between the two of them, and includes Bachelard, Merleau-Ponty, Lévi-Strauss, Althusser, Foucault, Derrida and Lacan as well as Sartre and Deleuze—and myself, maybe. Time will tell; though if there has been such a French philosophical moment, my position would be as perhaps its last representative. It is the totality of this body of work, situated between the ground-breaking contribution of Sartre and the last works of Deleuze, that is intended here by the term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y’. I will argue that it constitutes a new moment of philosophical creativity, both particular and universal. The problem is to identify this endeavour. What took place in France, in philosophy, between 1940 and the end of the 20th century? What happened around the ten or so names cited above? What was it that we called existentialism, structuralism, deconstruction? Was there a historical and intellectual unity to that moment? If so, of what sort?

 

I shall approach these problems in four different ways. First, origins: where does this moment come from, what were its antecedents, what was its birth? Next, what were the principal philosophical operations that it undertook? Third, the fundamental question of these philosophers’ link with literature, and the more general connection between philosophy and literature within this sequence. And finally, the constant discussion throughout this whole period between philosophy and psychoanalysis. Origins, operations, style and literature, psychoanalysis: four means by which to attempt to define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y.

 



Concept and interior life

 


To think the philosophical origins of this moment we need to return to the fundamental division that occurred within French philosophy at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with the emergence of two contrasting currents. In 1911, Bergson gave two celebrated lectures at Oxford, which appeared in his collection La pensée et le mouvement. In 1912—simultaneously, in other words—Brunschvicg published Les étapes de la philosophie mathématique. Coming on the eve of the Great War, these interventions attest to the existence of two completely distinct orientations. In Bergson we find what might be called a philosophy of vital interiority, a thesis on the identity of being and becoming; a philosophy of life and change. This orientation will persist throughout the 20th century, up to and including Deleuze. In Brunschvicg’s work, we find a philosophy of the mathematically based concept: the possibility of a philosophical formalism of thought and of the symbolic, which likewise continues throughout the century, most specifically in Lévi-Strauss, Althusser and Lacan.

 


From the start of the century, then, French philosophy presents a divided and dialectical character. On one side, a philosophy of life; on the other, a philosophy of the concept. This debate between life and concept will be absolutely central to the period that follows. At stake in any such discussion is the question of the human subject, for it is here that the two orientations coincide. At once a living organism and a creator of concepts, the subject is interrogated both with regard to its interior, animal, organic life, and in terms of its thought, its capacity for creativity and abstraction. The relationship between body and idea, or life and concept, formulated around the question of the subject, thus structures the whole development of 20th-century French philosophy from the initial opposition between Bergson and Brunschvicg onwards. To deploy Kant’s metaphor of philosophy as a battleground on which we are all the more or less exhausted combatants: during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the lines of battle were still essentially constituted around the question of the subject. Thus, Althusser defines history as a process without a subject, and the subject as an ideological category; Derrida, interpreting Heidegger, regards the subject as a category of metaphysics; Lacan creates a concept of the subject; Sartre or Merleau-Ponty, of course, allotted an absolutely central role to the subject. A first definition of the French philosophical moment would therefore be in terms of the conflict over the human subject, since the fundamental issue at stake in this conflict is that of the relationship between life and concept.

 


We could, of course, take the quest for origins further back and describe the division of French philosophy as a split over the Cartesian heritage. In one sense, the postwar philosophical moment can be read as an epic discussion about the ideas and significance of Descartes, as the philosophical inventor of the category of the subject. Descartes was a theoretician both of the physical body—of the animal-machine—and of pure reflection. He was thus concerned with both the physics of phenomena and the metaphysics of the subject. All the great contemporary philosophers have written on Descartes: Lacan actually raises the call for a return to Descartes, Sartre produces a notable text on the Cartesian treatment of liberty, Deleuze remains implacably hostile. In short, there are as many Descartes as there are French philosophers of the postwar period. Again, this origin yields a first definition of the French philosophical moment as a conceptual battle around the question of the subject.

 

 


Four moves


Next, the identification of intellectual operations common to all these thinkers. I shall outline four procedures which, to my mind, clearly exemplify a way of doing philosophy that is specific to this moment; all, in some sense, are methodological ones. The first move is a German one—or rather, a French move upon German philosophers. All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y is also, in reality, a discussion of the German heritage. Its formative moments include Kojève’s seminars on Hegel, attended by Lacan and also influential upon Lévi-Strauss, and the discovery of phenomenology in the 1930s and 40s, through the works of Husserl and Heidegger. Sartre, for instance, radically modified his philosophical perspectives after reading these authors in the original during his sojourn in Berlin. Derrida may be regarded as, first and foremost, a thoroughly original interpreter of German thought. Nietzsche was a fundamental reference for both Foucault and Deleuze.

 


French philosophers went seeking something in Germany, then, through the work of Hegel, Nietzsche, Husserl and Heidegger. What was it that they sought? In a phrase: a new relation between concept and existence. Behind the many names this search adopted—deconstruction, existentialism, hermeneutics—lies a common goal: that of transforming, or displacing, this relation. The existential transformation of thought, the relation of thought to its living subsoil, was of compelling interest for French thinkers grappling with this central issue of their own heritage. This, then, is the ‘German move’, the search for new ways of handling the relation of concept to existence by recourse to German philosophical traditions. In the process of its translation onto the battleground of French philosophy, moreover, German philosophy was transformed into something completely new. This first operation, then, is effectively a French appropriation of German philosophy.

 


The second operation, no less important, concerns science. French philosophers sought to wrest science from the exclusive domain of the philosophy of knowledge by demonstrating that, as a mode of productive or creative activity, and not merely an object of reflection or cognition, it went far beyond the realm of knowledge. They interrogated science for models of invention and transformation that would inscribe it as a practice of creative thought, comparable to artistic activity, rather than as the organization of revealed phenomena. This operation, of displacing science from the field of knowledge to that of creativity, and ultimately of bringing it ever closer to art, find its supreme expression in Deleuze, who explores the comparison between scientific and artistic creation in the most subtle and intimate way. But it begins well before him, as one of the constitutive operations of French philosophy.

 


The third operation is a political one. The philosophers of this period all sought an in-depth engagement of philosophy with the question of politics. Sartre, the post-war Merleau-Ponty, Foucault, Althusser and Deleuze were political activists; just as they had gone to German philosophy for a fresh approach to concept and existence, so they looked to politics for a new relation between concept and action—in particular, collective action. This fundamental desire to engage philosophy with the political situation transforms the relation between concept and action.

 


The fourth operation has to do with the modernization of philosophy, in a sense quite distinct from the cant of successive government administrations. French philosophers evinced a profound attraction to modernity. They followed contemporary artistic, cultural and social developments very closely. There was a strong philosophical interest in non-figurative painting, new music and theatre, detective novels, jazz and cinema, and a desire to bring philosophy to bear upon the most intense expressions of the modern world. Keen attention was also paid to sexuality and new modes of living. In all this, philosophy was seeking a new relation between the concept and the production of forms—artistic, social, or forms of life. Modernization was thus the quest for a new way in which philosophy could approach the creation of forms.



In sum: the French philosophical moment encompassed a new appropriation of German thought, a vision of science as creativity, a radical political engagement and a search for new forms in art and life. Across these operations runs the common attempt to find a new position, or disposition, for the concept: to displace the relation between the concept and its external environment by developing new relations to existence, to thought, to action, and to the movement of forms. It is the novelty of this relation between the philosophical concept and the external environment that constitutes the broader innovation of twentieth-century French philosophy.

 



Writing, language, forms


The question of forms, and of the intimate relations of philosophy with the creation of forms, was of crucial importance. Clearly, this posed the issue of the form of philosophy itself: one could not displace the concept without inventing new philosophical forms. It was thus necessary not just to create new concepts but to transform the language of philosophy. This prompted a singular alliance between philosophy and literature which has been one of the most striking characteristics of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y. There is, of course, a longer history to this. The works of those known to the 18th century as philosophes—Voltaire, Rousseau or Diderot—are classics of French literature; these writers are in a sense the ancestors of the postwar alliance. There are numerous French authors who cannot be allocated exclusively either to philosophy or to literature; Pascal, for example, is both one of the greatest figures in French literature and one of the most profound French thinkers. In the 20th century Alain, to all intents and purposes a classical philosopher and no part of the moment that concerns us here, was closely involved in literature; the process of writing was very important to him, and he produced numerous commentaries on novels—his texts on Balzac are extremely interesting—and on contemporary French poetry, Valéry in particular. In other words, even the more conventional figures of twentieth-century French philosophy can illustrate this affinity between philosophy and literature.

 


The surrealists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They too were eager to shake up relations regarding the production of forms, modernity, the arts; they wanted to invent new modes of life. If theirs was largely an aesthetic programme, it paved the way for the philosophical programme of the 1950s and 60s; both Lacan and Lévi-Strauss frequented surrealist circles, for example. This is a complex history, but if the surrealists were the first representatives of a 20th-century convergence between aesthetic and philosophical projects in France, by the 1950s and 60s it was philosophy that was inventing its own literary forms in an attempt to find a direct expressive link between philosophical style and presentation, and the new positioning for the concept that it proposed.

 


It is at this stage that we witness a spectacular change in philosophical writing. Forty years on we have, perhaps, grown accustomed to the writing of Deleuze, Foucault, Lacan; we have lost the sense of what an extraordinary rupture with earlier philosophical styles it represented. All these thinkers were bent upon finding a style of their own, inventing a new way of creating prose; they wanted to be writers. Reading Deleuze or Foucault, one finds something quite unprecedented at the level of the sentence, a link between thought and phrasal movement that is completely original. There is a new, affirmative rhythm and an astonishing inventiveness in the formulations. In Derrida there is a patient, complicated relationship of language to language, as language works upon itself and thought passes through that work into words. In Lacan one wrestles with a dazzlingly complex syntax which resembles nothing so much as the syntax of Mallarmé, and is therefore poetic—confessedly so.

 


There was, then, both a transformation of philosophical expression and an effort to shift the frontiers between philosophy and literature. We should recall—another innovation—that Sartre was also a novelist and playwright (as am I). The specificity of this moment in French philosophy is to play upon several different registers in language, displacing the borders between philosophy and literature, between philosophy and drama. One could even say that one of the goals of French philosophy has been to construct a new space from which to write, one where literature and philosophy would be indistinguishable; a domain which would be neither specialized philosophy, nor literature as such, but rather the home of a sort of writing in which it was no longer possible to disentangle philosophy from literature. A space, in other words, where there is no longer a formal differentiation between concept and life, for the invention of this writing ultimately consists in giving a new life to the concept: a literary life.

 

 


With and against Freud


At stake, finally, in this invention of a new writing, is the enunciation of the new subject; of the creation of this figure within philosophy, and the restructuring of the battlefield around it. For this can no longer be the rational, conscious subject that comes down to us from Descartes; it cannot be, to use a more technical expression, the reflexive subject. The contemporary human subject has to be something murkier, more mingled in life and the body, more extensive than the Cartesian model; more akin to a process of production, or creation, that concentrates much greater potential forces inside itself. Whether or not it takes the name of subject, this is what French philosophy has been trying to find, to enunciate, to think. If psychoanalysis has been an interlocutor, it is because the Freudian invention was also, in essence, a new proposition about the subject. For what Freud introduced with the idea of the unconscious was the notion of a human subject that is greater than consciousness—which contains consciousness, but is not restricted to it; such is the fundamental signification of the word ‘unconscious’.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y has therefore also been engaged in a long-running conversation with psychoanalysis. This exchange has been a drama of great complexity, highly revealing in and of itself. At issue, most fundamentally, has been the division of French philosophy between, on one side, what I would call an existential vitalism, originating with Bergson and running through Sartre, Foucault and Deleuze, and on the other a conceptual formalism, derived from Brunschvicg and continuing through Althusser and Lacan. Where the two paths cross is on the question of the subject, which might ultimately be defined, in terms of French philosophy, as the being that brings forth the concept. In a certain sense the Freudian unconscious occupies the same space; the unconscious, too, is something vital or existing yet which produces, which bears forth, the concept. How can an existence bear forth a concept, how can something be created out of a body? If this is the central question, we can see why philosophy is drawn into such intense exchanges with psychoanalysis. Naturally, there is always a certain friction where common aims are pursued by different means. There is an element of complicity—you are doing the same as I am—but also of rivalry: you are doing it differently. The relation between philosophy and psychoanalysis within French philosophy is just this, one of competition and complicity, of fascination and hostility, love and hatred. No wonder the drama between them has been so violent, so complex.

 


Three key texts may give us an idea of it. The first, perhaps the clearest example of this complicity and competition, comes from the beginning of Bachelard’s work of 1938, La psychanalyse du feu. Bachelard proposes a new psychoanalysis grounded in poetry and dream, a psychoanalysis of the elements—fire, water, air and earth. One could say that Bachelard is here trying to replace Freudian sexual inhibition with reverie, to demonstrate that this is the larger and more open category. The second text comes from the end of Being and Nothingness where Sartre, in his turn, proposes the creation of a new psychoanalysis, contrasting Freud’s ‘empirical’ psychoanalysis with his own (by implication) properly theoretical existential model. Sartre seeks to replace the Freudian complex—the structure of the unconscious—with what he terms the ‘original choice’. For him what defines the subject is not a structure, neurotic or perverse, but a fundamental project of existence. Again, an exemplary instance of complicity and rivalry combined.

 


The third text comes from Chapter 4 of Anti-Oedipus by Deleuze and Guattari. Here, psychoanalysis is to be replaced by a method that Deleuze calls schizoanalysis, in outright competition with Freudian analysis. For Bachelard, it was reverie rather than inhibition; for Sartre, the project rather than the complex. For Deleuze, as Anti-Oedipus makes clear, it is construction rather than expression; his chief objection to psychoanalysis is that it does no more than express the forces of the unconscious, when it ought to construct it. He calls explicitly for the replacement of ‘Freudian expression’ with the construction that is the work of schizoanalysis. It is striking, to say the least, to find three great philosophers, Bachelard, Sartre and Deleuze, each proposing to replace psychoanalysis with a model of their own.

 


Path of greatness


Finally, a philosophical moment defines itself by its programme of thought. What might we define as the common ground of postwar French philosophy in terms, not of its works or system or even its concepts, but of its intellectual programme? The philosophers involved are, of course, very different figures, and would approach such a programme in different ways. Nevertheless, where you have a major question, jointly acknowledged, there you have a philosophical moment, worked out through a broad diversity of means, texts and thinkers. We may summarize the main points of the programme that inspired postwar French philosophy as follows.

 


1. To have done with the separation of concept and existence—no longer to oppose the two; to demonstrate that the concept is a living thing, a creation, a process, an event, and, as such, not divorced from existence;

 


2. To inscribe philosophy within modernity, which also means taking it out of the academy and putting it into circulation in daily life. Sexual modernity, artistic modernity, social modernity: philosophy has to engage with all of this;

 


3. To abandon the opposition between philosophy of knowledge and philosophy of action, the Kantian division between theoretical and practical reason, and to demonstrate that knowledge itself, even scientific knowledge, is actually a practice;

 


4. To situate philosophy directly within the political arena, without making the detour via political philosophy; to invent what I would call the ‘philosophical militant’, to make philosophy into a militant practice in its presence, in its way of being: not simply a reflection upon politics, but a real political intervention;

 


5. To reprise the question of the subject, abandoning the reflexive model, and thus to engage with psychoanalysis—to rival and, if possible, to better it;

 


6. To create a new style of philosophical exposition, and so to compete with literature; essentially, to reinvent in contemporary terms the 18th-century figure of the philosopher-writer.

 


Such is the French philosophical moment, its programme, its high ambition. To identify it further, its one essential desire—for every identity is the identity of a desire—was to turn philosophy into an active form of writing that would be the medium for the new subject. And by the same token, to banish the meditative or professorial image of the philosopher; to make the philosopher something other than a sage, and so other than a rival to the priest. Rather, the philosopher aspired to become a writer-combatant, an artist of the subject, a lover of invention, a philosophical militant—these are the names for the desire that runs through this period: the desire that philosophy should act in its own name. I am reminded of the phrase Malraux attributed to de Gaulle in Les chênes qu’on abat: ‘Greatness is a road toward something that one does not know’. Fundamentally, the French philosophical moment of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was proposing that philosophy should prefer that road to the goals it knew, that it should choose philosophical action or intervention over wisdom and meditation. It is as philosophy without wisdom that it is condemned today.

 


But the French philosophical moment was more interested in greatness than in happiness. We wanted something quite unusual, and admittedly problematic: our desire was to be adventurers of the concept. We were not seeking a clear separation between life and concept, nor the subordination of existence to the idea or the norm. Instead, we wanted the concept itself to be a journey whose destination we did not necessarily know. The epoch of adventure is, unfortunately, generally followed by an epoch of order. This may be understandable—there was a piratical side to this philosophy, or a nomadic one, as Deleuze would say. Yet ‘adventurers of the concept’ might be a formula that could unite us all; and thus I would argue that what took place in late 20th-century France was ultimately a moment of philosophical adven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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