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속 사상] 다윈이 얼마나 흐뭇해할까

 

별도 자동차도 휴대폰도 심지어 머리 모양까지
기술 변화를 생물 진화론 개념으로 은유
돌연변이처럼 기술도 다양한 변수로 선택돼
자연·인공물 본질 달라도 작동원리 같지 않은가
한겨레
» 화려하지만 버거워보이는 깃털을 가진 수컷 공작의 모습은 쓸데없는 화소 경쟁과 두께 경쟁에 집착하는 휴대폰 제조업체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수컷 공작과 휴대폰 업체는 각각 암컷의 선택과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그런 값비싼 신호들을 보내고 있다.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 /⑧ 기술 진화론
 

휴대폰 전쟁이 점입가경이다. “카메라 화소를 OO로 늘였다. OO 기능을 추가로 탑재했다. 두께를 몇 mm로 줄였다”라는 소식이 거의 한 달 단위로 들려온다. 바로 얼마 전에는 국내의 모 회사가 출시한 1천만 화소 휴대폰, 7mm 초박형 휴대폰이 세계 최초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기사들의 제목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똑같다. “휴대폰 진화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사실, ‘진화’라는 단어가 생물학의 울타리를 넘은 지는 꽤 오래됐다. 우리는 ‘별의 진화, ‘자동차의 진화’, 심지어 ‘머리 모양의 진화’를 말하기도 한다. 이때 ‘진화’는 진화생물학자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용어가 아니다. 그저 어떤 대상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휴대폰의 ‘진화’는 휴대폰의 ‘변화’와 다를 바 없는 싱거운 제목이다. 하지만 여기에 기자들이 굳이 ‘진화’라는 단어를 쓴 것은 휴대폰이 ‘진보’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아닐까? 그러면 진화는 진보인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통념일뿐

기술을 진화론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기술 진화론’)은 기술의 본성과 역사, 그리고 트렌드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의미있는 시도이다. 이때 ‘진화’란 생물학 영역에서 주로 사용되는 좁은 의미의 개념이다. 약 150년 전 다윈은 ‘종의 기원’(1859)에서 자연선택에 의해 생물이 진화한다는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자연선택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변이들(다양성)이 존재해야하고, 그 변이들이 환경과의 적응 측면에서 정도차를 보여야 하며,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유전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자연선택의 원리가 생물계에서만 작동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기술 진화론’이라고 하면 대체로 진화생물학에 등장하는 주요 용어와 개념들을 은유적으로 사용하여 기술 영역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지칭한다. 즉, 기술 변화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인 셈이다. 하지만 언뜻 보면 생물 진화론이 기술 현상에 곧바로 적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생물 영역에서는 변이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기술 영역에서는 의도적으로 설계되지 않는가? 또한 생물계에서는 자연선택이 일어지만 인공계에서는 인위선택이 일어나지 않는가? 또한 생명의 역사를 꼭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반면, 기술은 점점 더 진보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기술 진화론에 시큰둥한 사람들은 기술의 출현과 생명의 변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동 중에도 통화를 할 필요성이 생겨서 휴대폰이 의도적으로 발명되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라마르크 진화론이 아닌 다윈 진화론에 따르면, 짧은 목, 긴 목, 좀 더 긴 목은 환경에 더 잘 적응할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에 의해 생겨났고, 목이 긴 기린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그렇다면 “필요는 (생물) 변이의 어머니”는 아니지 않는가?

 

기술사학자인 바살라는 ‘기술의 진화’(1988)라는 책에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통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19세기 중엽에 영국의 한 도시에서는 500종의 망치가 있었고 미국에서는 굴뚝 불꽃 장치가 무려 1000종이나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발명에 집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까운 예들도 있다. 사용자 입장에서 휴대폰의 카메라를 천만 화소까지 늘려야 할 필요가 있는가? 용도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오륙백만 화소면 충분하다. 또한 두께가 7mm인 초박형 휴대폰이 과연 사용자에게 필요한가? 너무 얇으면 오히려 만족도가 떨어질 수 있다. 그런데도 휴대폰 회사들은 서로 군비경쟁을 한다. 바살라의 말대로 인간의 기술은 필요의 산물이 아니라 “잉여의 산물”이다. 따라서 통념과는 달리 변이가 발생하는 방식은 생물체나 기술이나 비슷하다.

 

폰카 경쟁은 수컷공작 꼬리 자랑

» 오징어 눈(왼쪽)은 시신경이 망막 뒤에, 인간의 눈은 시신경이 망막 위에 놓이도록 진화해 기능 차이가 난다.
오히려 진화론적 관점은 쓸데없어 보이는 이런 화소 경쟁과 두께 경쟁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통찰을 준다. 화려한 색조의 깃털을 자랑하는 수컷 공작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버겁고 거추장스럽기까지 한 깃털을 겨우 퍼덕이며 어딘가로 날아가는 수컷의 뒷모습은 정말로 측은하기까지 하다.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필요치 않은, 아니 있으면 오히려 불리할 것 같은 이런 형질들이 왜 자연계에는 만연해 있을까? 마치 최근의 휴대폰 경쟁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의 진화생물학자 자하비는 자연계에 만연해 있는 잉여의 산물들을 ‘핸디캡 이론’으로 설명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생산비용이 많이 드는 신호일수록 정직한 신호다. 왜냐하면 그것을 생산해낼 자원과 능력이 없는 사람은 결코 그 신호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신자는 송신자의 신호가 얼마나 많은 비용을 들여 표현된 것인지를 가늠하여 그 신호의 진실성을 파악한다. 수컷 공작이 거추장스럽고 사치스럽게만 느껴지는 길고 아름다운 꼬리를 달고 다니는 이유는 암컷에게 ‘나는 이런 값비싼 깃털을 만들어낼 만큼 건강하고 능력있다’라는 사실을 광고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핸디캡(거추장스러운 꼬리)을 극복하고 잘 생존할 만큼, 값비싼 신호를 만들어내도 까딱없을 만큼 대단한 존재라는 사실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만 화소와 7mm 휴대폰은 공작의 버거운 꼬리와도 같다. 그 화소와 두께는 사용 면에서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수 있으나 선택을 하는 소비자에게 계속해서 ‘우리는 다른 경쟁 업체와는 달리 이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라는 신호를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합하는 기술들이 실제로 어떻게 선택되거나 멸절했는지는 이런 기술력의 차이만으로는 모두 다 설명될 수 없다. 선택압이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

 

바살라에 따르면 기술은 크게 경제?군사적 요인과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해 선택된다. 예컨대 수차와 증기기관, 자동수확기 등은 경제적 요인에 의해 선택된 경우이고, 트럭과 원자력 기술은 군사적 요인에 의해 선택받은 사례이다. 반면 1960년대의 초음속 여객기 개발 사업과 같은 사례는 정부와 대기업의 전폭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비판 여론으로 무산된 경우이다. 바살라는 일본역사에서 ‘검→총→검’으로 기술 선택이 옮겨갔던 현상을 기술 선택에 있어서 문화가치가 실용가치를 앞지른 사례로 들고 있다. 또한 목판 인쇄가 심미적 이유에서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더 널리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기술 선택이 기술 내적인 요인과 외적인 요인들의 복합 작용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실용적인 기술을 택하라”등과 같은 전반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기술 선택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런 '트레이드 오프(trade off)'는 생물 진화에서도 보편 현상이다. 인간의 눈과 오징어의 눈을 비교해보자. 인간의 눈은 놀라운 적응이긴 하지만, 시신경이 망막의 앞쪽에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신경 다발이 묶인 지점에 맹점이 생길 수밖에 없고 그 다발이 흘러내렸을 때 실명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최적’이라 말할 수는 없다. 반면 시신경이 망막 뒤에 위치한 오징어의 눈은 이 점에서 훨씬 더 잘 설계된 경우이다.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은, 척추동물의 진화 과정에서 ‘어쩌다가’ 시신경이 망막 앞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이 모든 후세 척추동물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졌기 때문에 최적이 아닌 적절한 선에서 트레이드 오프가 일어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술의 진보 문제에 진화론적 관점을 적용해보자. 화소수나 두께 경쟁에서 볼 수 있듯이 적어도 특정 목표에 한해서는 기술의 진보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전반적인 기준에 대해 진보를 말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생물학자들도 국소적인 진보와 전반적인 진보를 나눠서 진화와 진보의 문제를 보고 있지만, 아직도 합의된 견해가 없다. 진보의 기준에서부터 의견이 갈리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이 박테리아보다 더 진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똑같이, 어떤 기준에 의해 컴퓨터가 손도끼보다 더 진보한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 장대익/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대우교수
컴퓨터가 손도끼보다 진보인가

언뜻 보면 인공물인 기술과 자연물인 생명은 본질적으로 달라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이 각각 어떻게 생겨나고 선택되며 전달되는지를 살펴보면 둘 간의 차이가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상만 다를 뿐 작동 원리는 똑같은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기술 진화론은 바로 그 원리에 주목하여 기존의 기술학 분야에 새로운 통찰을 준다. 기술 영역으로까지 자신의 진화론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다윈은 얼마나 흐뭇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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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자전거 기술은 치마길이가 좌우했다

 

고무 타이어의 속도감·여성에 맞는 작은 앞바퀴
‘안전 자전거’ 보편화에 결정적 영향 줬듯
기술 발전은 사회집단간 이해관계 따라 결정
기술 자체 논리보다 사람들 합의과정 중요하다
한겨레
기술 속 사상/⑦ 기술의 사회구성론
 

‘기술의 사회 구성론’은 기술변화의 과정에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문화적 요소가 개입하는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기술이 사회과정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기술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왜 150볼트가 아닌 110볼트 또는 220볼트 전기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한때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가 발전해서 결국 누구나 소형 자가용 비행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비행기의 크기는 커졌는가? 자전거가 처음 만들어진 19세기 말에는 다른 형태의 자전거도 많이 있었는데 어째서 다이아몬드 형태의 틀과 고무 타이어를 쓰고 두 바퀴의 크기가 비슷한 안전자전거(safety bicycle) 모델이 지금은 보편적이 되었는가?

 

핀치와 바이커의 ‘자전거’ 연구

이런 문제에 대한 상식적인 답은 대체로 지금 우리가 쓰는 모델이 다른 모델보다 편하고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지금 살아남은 기술이 다른 기술보다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성이란 좋은 것, 합리적인 것, 추구해야 할 것, 심지어 운명지어진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런 관점은 논쟁적인 기술을 분석할 때 문제를 발생시킨다. 핵무기와 독가스도 효율적인 기술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인간복제 기술도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지금 우리가 가진 기술이 다 효율적인 것이라면, 왜 재앙에 가까운 기술적 실패가 종종 발생하는가?

 

기술 결정론에서는 기술의 발전은 물론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이미 기술 속에 결정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기술의 사회구성론은 기술 발전의 궤적이 이미 기술 내에 결정되어 있다는 식의 ‘본질주의’(essentialism)를 비판하면서 기술의 발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사회 집단들을 강조한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을 정립하는 데 선구적인 연구를 한 과학기술학자 핀치와 바이커는 자전거의 변천에 관한 사례연구를 통해 기술의 구성 과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자전거의 발전 과정을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전거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집단이다. 여기에는 자전거를 만든 기술자, 남성 이용자뿐 아니라 여성 이용자, 스포츠 자전거 이용자, 심지어 자전거 반대론자도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특정한 자전거 디자인에 대해 그들 나름의 선호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스포츠 자전거 이용자들은 56인치짜리 커다란 앞바퀴가 달려서 페달을 밟아 격한 운동을 할 수 있는 모델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앞바퀴가 큰 자전거는 여성 이용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설계된 모델을 개발해야 했는데, 당시 여성들은 보통 긴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앞바퀴가 작은 자전거를 선호하던 여성들은 자전거의 모델이 지금의 안전자전거로 종결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식으로 자전거의 발달을 이를 둘러싼 사회 집단의 맥락 속에서 분석해보면, 자전거의 초기 발전단계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 자전거로의 단선적 발전을 반영한다기보다, 오히려 자전거라는 기술과 여러 사회집단, 그리고 풀어야 할 기술적 문제들의 분산된 네트워크를 반영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 공기 타이어가 자전거에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초기에는 아무도 공기 타이어가 자전거 설계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생각지 않았다. 기술자들에게 공기 타이어는 매우 골치 아픈 문제였고, 스포츠 자전거를 즐겼던 사람들에겐 쿠션을 제공하는 공기 타이어가 오히려 불필요한 것이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회집단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동일한 기술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서로 다르게 파악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도 다르게 제시한다. 따라서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회집단들 사이에는 그 기술이 가진 문제점과 해결책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이 사법적, 도덕적, 정치적 성격을 띠는 복잡한 협상을 통해 해소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하게 되면 안정적인 기술적 인공물의 형태가 선택된다. 그런데 사회 구성론자들은 이 합의의 과정이 다시 ‘사회적’ 과정임을 강조한다. 자전거 변천 과정에서도 자전거 경주와 같은 사회적 요소가 논쟁의 종결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 자전거 경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공기 타이어를 장착한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빠르다는 것이 경주를 통해 입증되었다. 이 과정에서 초기 자전거 설계에서 중요하지 않던 속도가 자전거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새로이 부각되었는데, 그 결과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안전 자전거 쪽으로 경쟁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큰 앞바퀴 치마입고 타기에 불편

기술 디자인을 종결하는 데 중요했던 또 다른 요소는 여성 자전거 애호가들이었다. 자전거를 격렬한 스포츠로 여기던 남성들은 큰 앞바퀴가 있는 자전거를 선호했지만, 여성들은 치마라는 복장 때문에 앞바퀴가 작고 타이어가 쿠션 기능을 해주는 안전 자전거를 선호했다. 그러므로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은 기술적 논리(가령 효율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 집단, 이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자전거라는 인공물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나온 여러 가지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안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담론은 논쟁이 종결된 후에 그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재구성되었다는 것이 사회 구성론자들의 주장이다.

 

조금만 일반화시켜보자. 기술적 인공물을 둘러싼 사회집단에는 이를 만들고 판매하는 엔지니어와 기업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소비자도 있다. 이 각각의 사회집단은 어떤 한 가지 기술과 관련해서 자신들이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이며, 이러한 문제 각각에는 다양한 해결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한 가지 문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기술적 유연성’(technological flexibility)이라고 부른다.

 

‘기술의 영향에 무관심’ 비판도

이런 다양한 유연성들은 기술을 둘러싼 사회집단들 사이의 해석차와 갈등으로 나타난다. 갈등은 핵심적인 문제가 새로운 기술에 의해서 해결됨으로써 해소되며, 그 결과는 특정 기술이 표준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논쟁의 종결은 기술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일종의 합의과정이다. 즉 기술의 방향, 내용, 그 결과가 사회 그룹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이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이 모든 과학기술학자들을 설득한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은 우선 사회구성론이 기술의 출현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 영향에는 무관심하다는 비판을 하곤 했다. 즉 기술이 선택된 이후에 그것이 개인의 경험이나 사회관계를 바꾸는 양식은 기술의 사회구성론에서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자들은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와 관련된 몇몇 사례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들은 포드가 생산한 자동차가 처음에는 운송수단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농촌지역에 확산되면서 다른 기계를 작동시키는 동력의 역할도 담당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들은 기술변화에 수반되는 사회구조나 권력관계를 무시하며, 기술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즉 기술의 사회구성론은 기술변화에 대한 서술에 그치고 있으며, 기술변화의 방향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비판이다.

» 홍성욱/서울대학교 교수·과학기술사
이러한 비판자들은 기술철학과 기술사회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기술이 어떻게 구성되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기술중심적인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술의 사회구성론이 이러한 문제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술의 사회구성론은 기술이 가진 유연성을 드러냄으로써 기술결정론을 비판하고 “기술이 지금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회구성론자들은 이러한 이론적 틀을 논쟁적인 기술을 평가하는 ‘기술평가’나 엔지니어를 위한 교육의 개혁에 적용하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사회구성론자들이나 비판자들 모두는 기술결정론이 지배하는 기술사회의 문제를 극복함으로써 더 바람직한 사회의 발전에 공헌하는 기술철학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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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속사상] 에디슨은 시스템 구축가였다

 

조직·법규·자원을 포함한 ‘사회기술시스템’
발명·개발·혁신·경쟁·공고화 단계로 진화
서로 겹치거나 거꾸로 진행되기도 한다
성공한 기술에 주목 특정인 지나치게 영웅시
한겨레
» 기술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기술을 넘어 기술시스템을 구성한 사람들이다. 백열등뿐 아니라 발전기, 배전기, 계량기, 축음기 등을 발명하고 가전업체 GE를 창립한 에디슨이 대표적이다. 사진은 지난 2월13일 에디슨 탄생 160주년을 맞아 서울 롯데백화점에서 열린 기념 특별행사전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⑥ 기술시스템이론-토머스 휴스
 

시스템 접근은 많은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구성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전체가 부분의 합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시스템 접근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몇몇 구성요소를 중심으로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을 설명할 경우에는 항상 부분적인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 세상은 특정한 구성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변화와 관련된 대표적인 시스템 접근으로는 ‘기술시스템’(technological system) 이론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유명한 기술사학자인 토머스 휴즈(Thomas P. Hughes)가 제창한 이래 과학기술사와 과학기술사회학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는 전력시스템에 관한 사례연구를 수행한 후 기술시스템의 개념을 일반화하면서 기술과 사회의 변화를 분석하는 데 적용해 왔다.

 

전력시스템 사례 연구로 시작

기술시스템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술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휴즈가 개념화한 기술시스템은 물리적 인공물뿐만 아니라 조직, 과학기반, 법적 장치, 자연자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술시스템에는 ‘기술적인 것’(the technical)과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술시스템은 ‘사회기술시스템’(sociotechnical system)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술시스템을 구성하는 각 요소는 다른 요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시스템 전체의 작동에 기여하게 된다. 만약 어떤 구성요소의 특성이 변화한다면 시스템 내부의 다른 요소들도 바뀌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전력시스템에서 저항이 변하면 그에 따라 발전, 송전, 배전에 필요한 구성요소들도 바뀌게 된다. 사회적인 요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투자은행이 제조업체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할 경우에 그 은행은 제조업체의 의사결정이나 기술개발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기술시스템에 포함되지 않은 요소들은 ‘주변환경’(surroundings)에 해당한다. 기술시스템과 주변환경은 정태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기술시스템이 진화하면서 주변환경의 일부를 구성요소로 포섭하기도 하며 반대로 기술시스템의 구성요소가 주변환경으로 해체되기도 한다. 어떤 요소가 특정한 맥락에서 기술시스템을 구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술시스템은 일종의 열린 시스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휴즈에 따르면, 이러한 기술시스템은 몇몇 단계를 걸쳐 진화하게 된다. 그것은 발명(invention), 개발(development), 혁신(innovation), 이전(transfer), 성장(growth), 경쟁(competition), 공고화(consolidation)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술시스템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각 단계가 반드시 순서대로 등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 단계가 서로 겹칠 수도 있고 특정한 단계가 생략될 수도 있으며 몇몇 단계는 거꾸로 진행될 수도 있다.

 

발명에는 급진적인 발명과 보수적인 발명이 있는데, 전자는 새로운 시스템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며 후자는 기존의 시스템을 개선하거나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개발단계는 실험환경을 더욱 복잡하게 하여 발명품이 실제 세계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혁신단계에서는 개발된 기술을 바탕으로 실제적인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복잡한 기술시스템이 만들어진다. 발명, 개발, 혁신의 단계를 거치면서 특정한 기술시스템이 탄생하는 셈이다.

 

기술시스템이 이전될 때에는 상이한 시공간의 특성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적응의 과정에서는 각 지역의 정치적 가치 체계, 지리적 조건, 규제 법령, 역사적 경험 등이 개입되어 ‘기술스타일’(technological style)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전력시스템의 경우에 런던과 베를린은 상당 기간 다른 스타일을 보여 왔다. 런던이 소규모 발전소를 많이 두었다면 베를린에는 몇 개의 대규모 발전소가 있었다.

 

시스템끼리 경쟁한 ‘전류전쟁’

» ‘사회기술시스템’ 이론을 주창한 토머스 휴스.
기술시스템은 불균등하게 성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휴즈는 ‘역돌출부’(reverse salients)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역돌출부는 군사작전에서 비롯된 용어로서 기술시스템의 성장이 지체되는 영역을 지칭한다. 기술시스템의 지속적인 성장은 역돌출부를 ‘결정적 문제’(critical problems)로 환원하고 물적·인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동원하여 풀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것은 전쟁 중에 장군이 군사력을 역돌출부에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술시스템은 때때로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는 새로운 기술시스템이 출현하면서 기존의 기술시스템과 경쟁을 벌인다. 19세기 말에 전력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직류 시스템과 교류 시스템이 벌였던 ‘전류전쟁’(current war)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시스템 사이의 경쟁은 많은 경우에 승리자와 패배자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다. 기술의 표준화와 기업간 합병을 매개로 두 시스템이 연결되면서 일종의 ‘포괄적 시스템’(universal system)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술시스템은 내·외부적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점차적으로 공고화된다. 공고화의 단계에 진입한 기술시스템은 ‘모멘텀’(momentum)을 가지며 변경하기 어렵게 된다. 모멘텀은 해당 기술시스템에 이해관계를 가진 조직과 사람들이 변화에 저항함으로써 생겨난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시스템이 주변환경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닫힌 시스템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강력한 외부적 충격이 발생하거나 여러 가지 사건이 동시에 결합될 경우에는 기술시스템의 모멘텀이 굴절되거나 파괴될 수 있다.

 

기술시스템 이론은 기술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하고 있다. 기술의 역사에서 거론되는 유명한 인물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기술을 넘어 기술시스템을 구성한 사람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에디슨(Thomas Edison)은 백열등만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전기, 배전기, 계량기 등과 같이 전력시스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기술적 요소들을 마련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전등의 연구개발, 전력의 공급, 발전기의 생산 등을 담당하는 기업을 잇달아 설립하여 전기에 관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전기에 국한되지 않으며, 인쇄술과 자동차를 포함한 다른 사례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나 포드(Henry Ford)도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시스템 구축가’(system builder)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술시스템 이론은 주로 성공한 기술에 주목하면서 특정한 인물을 지나치게 영웅시하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기술시스템 이론이 군사적 유비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나 대기업의 성공을 합리화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기술시스템 이론은 기술변화에 관한 대안적 해석에 해당한다. 즉, 기술이 사회변화를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과 사회적 이해관계가 기술을 형성한다는 사회결정론을 모두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기술시스템 내에 기술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녹아 있으며 기술과 사회는 동시에 진화하는 것이다.

 

기술과 사회는 동시에 진화

물론 기술시스템이 진화하는 단계에 따라 기술과 사회가 가진 영향력의 상대적 비중이 달라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초기 단계의 기술시스템에는 사회적 요소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반면, 성숙한 기술시스템의 경우에는 외부환경의 개입이 축소되면서 자신의 발전 경로를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 송성수/과학기술정책연구원·과학기술학
이와 관련하여 성숙한 기술시스템은 기술결정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자율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휴즈는 “기술시스템은 공고화된 이후에도 자율성을 가지지 않는다. 대신에 모멘텀을 가지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성숙한 기술시스템을 변경하기는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술이 인간과 무관한 독자적인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휴즈의 신념과 직결되어 있다. 그가 2004년에 발간한 저작이 <기술이 만든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세계>(Human-Built World)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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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속사상] 기술(비인간)도 인간과 같이 행동한다
총(비인간)과 사람이 만났을 때
쏘는 행위는 총도 사람도 아닌
총과 사람의 합체인 새 ‘행위자’가 하는 것
사회결정론·기술결정론 모두 비판
인간과 기술, 주체-객체 아닌 대칭관계로
한겨레
»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이스라엘군 병사 앞으로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지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총이 사람을 죽이는가 아니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가를 놓고 논쟁하곤 했다. 라투르는 총과 사람을 따로따로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총을 쥔 사람’이라는 잡종적 존재가 사람과 총 모두의 목적을 바꾸면서 새로운 행위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갈파했다. 헤브론/ 로이터 연합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⑤ 급진주의자-브뤼노 라투르
 

기술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인간은 의지를 가진 살아 있는 주체이고 기술은 자체 생명력이 없는 기계덩어리다. 인간은 자신의 뜻에 따라서 기술을 바꾸고 목적을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가 간파했듯이 어떤 기술은 인간을 옭죄고 지배한다.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이렇게 자체 생명력을 가진 기술을 ‘자율적 기술’이라고 명명했다.

 

프랑스의 과학기술학(STS)자인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기술이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마음대로 바뀔 수 있다고 보는 시각과 기술이 자율성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한다는 시각을 모두 비판한다. 전자는 기술이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전적으로 구성된다는 사회구성주의적 시각이고 후자는 기술이 거꾸로 인간의 필요와 행동을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적인 시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라투르의 비판은 이 두 입장의 중간을 취하는 식이 아니다. 그는 기술을 이해하는 훨씬 더 급진적 시각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기술과 같은 비인간(nonhuman)을 인간과 같은 행위자(actor)로 보는 것이다.

 

과속방지턱 고통경찰 대체

라투르가 좋아하는 예는 우리가 아파트 단지나 학교 앞에서 자주 보는 과속방지용 둔턱이다. 마음이 급한 운전자들은 “이웃이나 학생들을 위해서 과속을 하지 맙시다”라는 도덕적인 문구가 씌어진 표지판을 무시하고 속도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골목골목마다 교통경찰을 배치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과속방지용 둔턱인데, 운전자들은 둔턱 앞에서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인다. 그런데 운전자가 이렇게 속도를 줄이는 이유는 그가 이웃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속도를 내서 둔턱을 넘었다가는 자기 차의 서스펜션에 무리가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둔턱은 “이웃이나 학생들을 위해서 과속을 하면 안된다”라는 (사람들이 잘 지키지 않는) 도덕적 심성을 “과속을 하면 내 차의 서스펜션이 고장날 수도 있다”라는 (사람들이 잘 지키는) 이기적 태도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둔턱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라투어는 둔턱을 “잠자는 경찰”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둔턱은 교통경찰이 했던 역할을 대신한다. 그 결과 교통경찰은 다른 일을 하거나 다른 곳에 투입될 수 있다. 또 둔턱은 훌륭한 도덕선생님의 역할도 수행한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과속을 하는 운전자들과 주민 사이의 갈등과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이렇게 기술은 인간이 했던 역할을 대신 수행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역할을 바꿈으로써 우리 사회의 훌륭한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라투르는 총기의 예도 즐겨 사용한다. 미국에서 총기의 사용을 엄격하게 규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총이 사람을 죽인다”라고 외친다. 총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을 살인 사건이 총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총기 사용의 규제에 반대하는 그룹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총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강조하는데, 이들의 얘기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총은 중립적인 도구이고 용도에 따라서 좋은 목적으로도 혹은 나쁜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는 총이 아니라 사람에 있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전자를 기술결정론, 후자를 사회결정론으로 분류하면서 이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비판한다. 그의 해법은 사람이 총을 가짐으로써 사람도 바뀌고 총도 바뀐다는 것이다. 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지고, 마찬가지로 총도 사람의 손에 쥐어짐으로써 옷장 속에 있는 총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즉 총과 사람의 합체라는 잡종이 새로운 행위자로 등장하며, 이 잡종 행위자는 이전에 사람이 가졌던 목표와는 다른 목표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겁만 주려 했는데, 총이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식이다.

 

‘비인간’의 번식 깨닫는 게 근대

라투르는 서양의 학문이 자연, 사회, 인간만을 다루어왔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사회과학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사회를 다루고, 철학과 같은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했는데, 라투르에 따르면 여기에는 모두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빠져 있다. 과학은 자연을 탐구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기기와 실험실에 의존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기술인데, 사회과학자들은 기술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 철학자들은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빠져서, 기술을 저급하고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빠져버린 자연과 사회는 ‘근대성’의 골자이다. 결국 라투르에게 기술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행위자로서의 이들의 능동적인 역할을 드러내는 것은 서구의 ‘근대적’ 과학과 철학이 범했던 자연/사회, 주체/객체, 인간/비인간의 양분법을 극복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라투르에게 근대를 극복하는 방법은, 탈근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시작되던 시점부터 자연과 사회 모두에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엄청난 속도로 번식했음을 인식하는 것, 즉 “우리가 근대인 적이 없었다”(We have never been modern!)는 것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한다.

 

과학/기술의 이분법도 라투르의 비판의 화살이 꽂히는 과녁이다. 라투르는 과학과 기술을 대체하는 용어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기술이 과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과학과 엔지니어링의 접점이 확산되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기술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주체/객체의 구별도 비판한다. 사람은 대상과 관계를 맺고 대상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행위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을 주체, 대상을 객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액터’(actor, 행위자)라는 말 대신에 ‘액탄트’(actant)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이분법 외려 강화했다 비판도

프랑스 과학기술학자 라투르는 미국 소크 연구소에서의 인류학적인 관찰 경험을 바탕으로 1979년에 <실험실 생활>이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화려하게 학계에 데뷔했고, 이후 <행동하는 과학> <우리는 근대인 적이 없었다> <아라미스> <판도라의 희망> <자연의 정치학> 등 주목받는 연구업적을 끊임없이 출판했다. 최근에 그는 인간과 사물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집중한 예술전시 기획을 총괄하기도 했고, 그 결과를 <아이코노클래시>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안타깝게도 라투르의 책은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것이 없다.

 

라투르의 관심은 실험실의 민속지학에서 파리의 실패한 지하철 프로젝트를 거쳐 아마존의 열대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렇지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비판하는 그의 입장은 초기 연구에서 가장 최근의 연구까지를 관통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도 많이 제기되었다. 라투르는 기술이 마치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자신을 대변하는 주체처럼 서술하지만, 사실 그런 서술은 라투르라는 인간이 기술에게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라투르가 기술에게 부여한 특성은 ‘인간다운’ 특성, 즉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고, 반응하고, 실행하는 특성이라는 것이다. 비판가들은 라투르의 이러한 시도가 인간의 역할을 더 강조함으로써 라투르가 부숴버리려고 했던 주체/객체의 구분을 더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라투르의 기술철학은 아직 미완이다. 그의 업적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인간/비인간의 구별을 없애고 이 둘을 대칭적으로 생각하자는 라투르의 주장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이 인간/기계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사이보그들이 급속도로 번식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잘 보여주는 것은 인간사회가 기술 없이는 구성될 수도 없고 유지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인간관계, 권력관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기술과, 무생물과, 비인간과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더 민주적이고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의 기능과 역할에, 즉 “물건의 정치학”(politics of things)에 훨씬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점이 라투르의 기술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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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속사상]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오지 않아

 

기술은 목적 위한 중립적 수단이 아니다
인간과 세계 사이 개입하며 ‘실존’ 변형
경험을 확대하는 동시에 축소하고
때론 새로운 세계에 접근할 통로가 되며
공기처럼 숨어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한겨레
» 인간과 기계가 융합된 사이보그 이미지. 기술이 인간 삶의 양식에 필수적인 존재가 된 이제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유토피아냐 디스토피아냐는 단순이분법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기술시대엔 인간과 기술의 관계, 그리고 인간이해도 달라져야 한다.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④ 인간과 기술 공생 강조-돈 아이디
 

오늘날 인간의 문제, 특히 인간의 실존과 관련된 문제는 기술을 배제하고 더 이상 논의될 수 없다. 주위를 둘러보라. 초음파 기기의 인체 질환 진단, 전자 현미경의 물질 나노구조 분석, 전파 망원경의 우주 현상 관찰, 대중매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등등 기술을 통하지 않고 과연 우리가 세계와 의미 있게 만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기술은 인간 삶의 양식에서 매우 필요한 존재가 돼버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술시대에 인간과 기술의 관계, 그리고 그에 기초한 인간이해도 분명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그동안 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기술에서 인간 삶의 질을 개선할 유용성과 함께 궁극적으로 인간을 해방시킬 조건을 보았던 유토피아적 입장이 한쪽 끝에 있었다면, 다른 쪽 끝에 환경 파괴적 속성과 인간의 존재방식을 지배하려는 억압성을 현대 기술에서 발견한 디스토피아적인 입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은 오늘날 인간과 기술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로 만난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설득력 있는 입장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돈 아이디(Don Idhe, 1936~)는 이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오랜 동안 연구해 온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컴퓨터와 정보기술이 발달한 1970년대부터 이 문제에 접근함으로써, 기존 논의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실천적 논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의 출발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고집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다. 아이디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기술을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 인간이 존재자들과 교섭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규정하였다. 기술이 야기한 결과들 혹은 효과들보다는, 기술현상 그 자체 곧 현상적 차원에서 생생하게 감지되는 기술의 본성과 그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또한 현대의 기술은 단순히 목적을 위한 중립적 수단이 아니며, 인간과 세계 사이에 개입하여 그 관계를 굴절시키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실존방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다는 점도 동일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와 달리 현대 기술의 부정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기술의 편재함을 깊이 고려한 상태에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인간학의 새로운 주제를 던져 주었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은 무엇이며, 그러한 분석이 오늘날 기술에 대한 성찰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비관론자 하이데거 사유 출발점




아이디는 기술과 인간이 맺는 전형적인 관계들로 체현관계, 해석관계, 배경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체현관계(embodiment relation)란 기술이 우리의 신체 기능을 확장시키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관계다. 망원경으로 달 표면을 관측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 경우 기술은 외부세계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확장된 신체의 일부로 체현되어 ‘확대된 나’ 혹은 ‘유사-자아’가 된다. 세계와 맞선 나와 공생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체현된 기술을 통한 경험이 반드시 투명한 것만은 아니다. 기술로 인한 변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달 표면에 관한 특정한 시각 경험은 확장되고 부각되겠지만, 동시에 달에 관한 다양한 포괄적 경험들-가령 색깔, 깨끗함, 처량함 등-은 축소되고 간과된다. 즉 기술로 인해 나의 경험에서 확장과 축소가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 한마디로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기술로 인해 세계에 대한 나의 경험, 곧 나와 세계와의 관계가 일부 변형되고, 나의 실존적 의미도 일부 굴절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과학에서의 도구 사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중매체나 정보 통신기기들의 활용과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동일하게 발생할 수 있다.

 

해석관계(hermeneutic relation)란 기술이 해석을 요하는 텍스트를 제공할 때 성립하는 관계다. 전자현미경으로 미시입자의 원자구조를 탐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전자 현미경에서 특정의 전파를 발생시켜 입자에 쏘고 입자의 어떤 성질이 그것과 반응하여 특정의 물리적 신호를 산출하면, 전자현미경이 이 신호를 수신하여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을 거쳐 그 결과를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화면에 그림으로 재현해 낸다. 그러니까 화면 속의 그림은 기술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에 관한 텍스트인 셈이다. 이는 미시세계에 불가능성 때문에 생긴 결과다. 기술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은 미시세계에 전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가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는데 직접적인 조건이 된다. 그래서 기술이 구현해 낸 텍스트만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가 된다. 정리하면 기술은 더 이상 나의 신체의 연장이 아니며, 오히려 내가 탐구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 곧 텍스트로 다가 온다. 한편 사용된 기술에 따라 텍스트들이 달라지므로, 기술은 세계에 대해 매우 불투명하거나 세계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서 해석학적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는 일상생활 속에 보편화된 컴퓨터의 가상공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주장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차단이 아니라 처음부터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관측 망원경’ 시각경험만 확장

배경관계(background relation)는 기술이 배경으로 숨어 있으면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그런 관계다. 가령 컴퓨터의 제어기술로 불빛이 조절되고 난방이 통제되며 실내 공기가 통풍되는 인공지능 건물에,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여기서 기술은 더 이상 신체의 연장 혹은 세계에 접근하는 통로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 곧 대기권에 대비되는 ‘기술권’(techosphere)으로 인간과 관계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기술사이의 배경관계다. 여기서 우리는 기계들과 직접 관계하지 않으면서 이들을 배경으로 하여 살아가게 된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유비쿼터스 사회처럼 사회가 고도로 기술화될수록 한층 확대·심화될 것이 자명하다. 한마디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이처럼 인간이 기술을 통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가에 따라 구분되고, 그 본질 또한 달라진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아이디의 이러한 분석은 고도 기술시대의 인간을 이해하고자 할 때, 기존과 다른 새로운 해명을 제공해 준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전통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체현관계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오늘의 인간이 과거의 인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 기능이 확대되고 인간과 세계가 만나는 영역도 훨씬 깊고 넓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해석관계도 기존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영역(미시세계나 우주 등) 혹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가상공간 등)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인간적 가능성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나아가 배경관계에서 논의된 기술권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 삶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바뀔 것임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가능성의 확대는 기술시대의 인간이해에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현대 기술을 온전히 긍정하는 낙관론의 입장은 바로 이러한 측면들을 배타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해 축소시킨 기술 반성적 비판

그러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인간적 가능성의 이 같은 확대가 필히 또 다른 가능성의 축소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가능성의 확대가 주로 자연현상의 정밀한 관측에 용이한 시각적 혹은 청각적 경험 등과 같은 특정한 경험들에 국한된 반면, 축소는 인간의 정서적 감성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경험 전반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는 세계를 그 자체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특화된 그것도 몇몇 단일-감각적인 도구들에 의거해서만 제한적으로 보도록 함으로써, 결국 세계 혹은 현상에 대한 축소된 이해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 이중원/서울시립대 교수·과학철학
특히 이것이 인간의 자기이해와 관련된 현상들인 경우, 인간의 자기이해에 있어서도 축소가 불가피해진다. 한편 기술의 개입으로 인한 특정 경험의 확장은 인간에게 매우 극적이고 환영할 만한 것으로 언제나 강하게 각인되지만, 다른 포괄적 경험들의 축소는 흔히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이를 자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자각할 수 있는 반성적 비판도 뒤따라 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기술시대에 새롭게 드러난 이 양자의 측면을 동시에 고려할 때, 기술시대의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기술과의 공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아이디 기술철학의 중요한 함축이 아닌가 생각한다. jwlee@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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