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속 사상] 건축가와 컴퓨터 밥그릇 싸움할판

 

미래영화 속 건축물은 왜 모두 폐허같을까
‘테크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였던 ‘짓는 고통’
로마제국·중세·르네상스까지 시대정신 상징
근대 이래 ‘설계-건설’ 나뉘더니 컴퓨터가 재통합
환경위기 주범 멍에까지 썼으니 고민스럽다
한겨레

기술 속 사상/⑬ 기술과 건축
 

미래세계를 그리고 있는 영화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은 폐허가 된 도시의 음산함과 무너질 것 같은 건축물들이다.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시리즈, 터미네이터, 토탈리콜 등 예외없다. 이처럼 감독들은 왜 미래세계가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번쩍번쩍하는 건축물들로 채워진 도시가 아닌, 늘 비인지 안개인지 앞을 구분할 수 없는 어둠과 서치라이트만 번쩍이는 폐허를 생각하는가?

 

에너지 고갈 이후 암울한 세상

현대기술문명의 큰 문제점은 물질문명의 발달속도를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는데 있다. 현대과학기술은 인간이 사회와 자신의 이성의 통제하에 둘 수 없을 만큼 일방향적이다. 기술이 과거와 달리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매개가 되는 도구적 성격을 지나 인간의 삶 전체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방식이 되고, 인간이 전적으로 의지하는 절대적이고도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이른 것을 현대과학문명의 본질이라고 하이데거는 갈파하였다. 이같은 맥락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계산 가능하고 기술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에너지’로, 존재자 전체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저장소로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금처럼 원하는 에너지를 제공하도록 자연이건 사람이건 닦달해 낸 뒤 고갈되면 영화 속과 같은 암울한 환경으로 갈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지녀야 하는가?

 

현대기술과 상반된 의미로 그리스의 테크네(τεχνη)를 들 수 있다. 그 어원을 보면 ‘나무로 만드는 일’, ‘목수일’ 등 무엇인가 고안하고 만들어내는 솜씨 혹은 모든 가능한 기술, 방법 등을 의미한다. 철학적으로 테크네란 사물이 만들어지는 데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나 정확한 지식(episteme, theoria, logos)을 바탕으로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능력(ars, praxis)뿐만 아니라 지식까지 포함한다. 테크네 중에서 가장 높은 위계에 속했던 건축(archi-tec-ture)은 처음부터 실무(praxis)와 이론(theoria)을 같이 병행하여야 한다는 속성을 지니고 출발한다. 생활세계의 기반을 만들어온 ‘짓는 전통’(building tradition)은 단순히 물리적 실체를 구성하고 공간을 만들어내는 행위 이상으로 각 시대 각 지역의 우주관과 종교관, 자연관, 그 사회의 구조적 특성, 기술수준까지 반영된 총체적 결과물이었으며 이는 존재자가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 카티아에 의한 3차원 표면 드로잉 기법으로 건물 전체의 윤곽을 보여준다.
하드리안 황제의 건축가였던 비트루비우스(P.Vitruvius, BC 25)는 <건축10서(Ten Books on Architecture)>를 통해 당시 건축에 관한 이론과 실무를 정리하였다. 그 일례로 로마제국의 인프라스트럭처-로마가도, 교량, 상하수도 시스템, 공공사업, 병영기지 및 신도시의 건설 등-는 하드에어뿐만 아니라 국방, 치안, 조세, 의료, 우편 등의 소프트웨어적 인프라를 모두 포괄하였다. 이는 제국을 다스리고 유지해나가기 위한 고차원의 통치기술이었으며 이를 담당해나간 것은 관료뿐만 아니라 전문화된 공병대였다.

 

중세의 번성기를 주도해나간 강력한 동인은 대성당 건립이었다. 성당 건설자들은 11세기 12세기의 유럽 첫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기술, 농업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각 도시의 성당건설 현장에서 마력을 이용한 수차, 거중기 등의 새로운 기구를 개발하고 만들어 시험하면서 제련기술을 통한 철기구 등을 개선을 시켜나가는 작업은 장인 계층과 건설기술자들을 통해 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고딕시기의 대성당들은 중세의 지적 르네상스, 스콜라티시즘, 사회적 변동, 기술적 수준이 어우러진 시대정신의 총체적 작품이었다.

 

대성당 건립 유럽 번성의 동력

르네상스기부터 근대 이전까지도 건축은 도시계획, 축성, 치수, 건설, 건축뿐만 아니라 기계장치의 고안부터 여러 가지 군사용 무기를 개발하는 일을 포괄하는 엔지니어링의 최상위 영역에 속하던 지식체계였다. 이 과정에서 건축의 영역에 참여해서 건축가로 역사적 작품을 남긴 많은 예술가, 과학자, 특히 수학자가 많았으며 이들의 작업은 이론과 현장이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토목기술자들이 전문화하고, 건축을 학교에서 예술과 과학으로 구분해 가르치고 건축가와 엔지니어가 분리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건축의 경계가 점차 구분된다. 건축적 근대성은 근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건축생산의 합리화와 산업화를 통해 확보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건축은 설계와 짓는 행위가 분리되고 설계는 기술적 프로세스와 기능적 프로그램으로 치환된다. ‘건축은 살기 위한 기계’임을 주장한 르꼬르뷔제의 선언처럼 건축은 존재자의 존재나 생활세계의 기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기계처럼 오브제화된다. 그 결과 건축가는 건설자본에 종속되면서 건축이 최종 결과물이 구축되는 현장에서 소외되며 건축은 사회 내 존재양식 자체가 변한다.

 

» 미래 건축의 암울한 풍경을 엿볼 수 있는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영화 <블레이드러너>.
건축 자체가 점차 대형화, 복잡화되면서 건축은 기술시스템, 정치적 기술, 복합기술의 결과물로 이루어진다. 현대건축은 첨단기술을 끌고나가지는 못하지만 현존하는 기술을 복합적으로 선택해내는 과정에는 깊이 관여한다. 그 중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박물관은 세계 최초로 건축가의 간단한 개념 스케치와 구긴 종이 뭉치, 컴퓨터가 합력하여 생성시켜낸 작품이다. 게리는 개념을 나타내는 석고나 종이 등으로 만든 모형을 카티아라는 자동차·항공기를 만들던 3D 스캔 소프트웨어와 X-ray 3차원 스캐너를 설계과정의 주 동인으로 삼았다. 카티아는 표면의 x, y, z 좌표를 데이터로 읽어 들인 뒤 3차원 모형을 깎아낸다. 이에 대한 구조해석을 거친 뒤 도면화과정 없이 3차원의 윤곽 속에서 프로그램을 충족시키는 작업이 진행되면 (사진 1) 디지털화된 정보는 바로 부재 생산과정으로 넘겨진다. 휘어진 철골부재들은 CAM(computer aided manufacturing)을 거쳐 자동밴딩머신으로 절곡되거나 수치제어 공작기계로 금형에 따라 프레스돼 만들어진다.

 

자동차 조립하듯 조각 맞춰 완성

정밀기계, 자동차와 항공기를 만드는 것과 유사한 절차다. 현장에서는 이렇게 가공된 부재들이 순서에 따라 조립되기만 하면 된다.

 

컴퓨터공학과 비선형이론, 위상기하, 다양한 입체에 관한 고차원 구조해석, 이에 따른 참단의 부품생산, 이러한 모든 실험을 가능케 하는 건축주의 자본과 의지가 빌바오 뮤지엄과 같은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사진 2) 수직수평이 완전히 해체된 조각과 같은 건축물이 컴퓨터를 통해 형태 생성부터 시공직전 단계의 부품화까지 완결되면서 전통적 건축생산 방식을 다시 변모시켰다. 이 작업의 함의를 ‘근대건축으로 단절된 건축의 고유한 전통, 설계와 건설의 통합과정으로서의 건축으로 회복될 가능성’을 보는 건축가도 있다.

 

» 류전희/경기대 교수·건축학

그러나 건축가의 자발적 의지로 프로세스에 투입한 기술이 건축가의 고유한 영역인 공간생성자로서의 역할조차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뉴턴과학의 완성 이후 전지전능한 신의 역할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우주시계의 감시자로 전락한 것처럼 무에서 유의 공간을 창조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텨온 건축가들이 컴퓨터 프로그램과 기계작동을 위한 관리자가 되면서 밥줄을 놓게 만드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이길 바란다.

 

이처럼 21세기의 건축은 첨단기술이기에는 너무 전통적이고 예술이기에는 너무 공공적이고 과학이기에는 너무 다의적이고 철학이기에도 너무 현실적이다. 이것이 비트루비우스 이래 건축이 지녀온 업보이자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지구환경위기의 주범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메달까지 목에 걸게 되었다. 과연 건축은 미래사회를 위해 어떤 고민을 해야 영화의 암울한 미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스럽다.

류전희/경기대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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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속사상] 보들레르는 모르고 백남준은 알았다

 

필름사진을 기술이라 거부한 보들레르
필름사진을 예술이라 고집한 현대작가
기술이 갱신될 때 과거의 것은 예술로 재인식
기술-예술, 갈등하면서 보충하고 인간세상 이루니
공존의 상상력 ‘디지털 아트’ 위대함이여!
한겨레
기술 속 사상/⑫ 기술과 예술
 

서양 역사에서 인간에게 ‘창조성’을 인정해준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창조성은 오랫동안 신의 권능으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바뀌려면 적어도 르네상스를 거쳐야 했다. 그제야 비록 신의 수준은 아니지만 인간도 나름대로 창조력을 가진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발상이 처음 나타난 영역은 예술이다. 사람들은 미켈란젤로를 ‘신과 같은 예술가’라고 불렀으며, 화가 알베르티는 예술가를 가리켜 ‘제2의 신’이라고 불렀다.

 

르네상스 이전에 그나마 ‘생산성’을 인정받던 것은 ‘시’였다. 조각이나 회화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으로 괄시받은 셈이다. 예술가들은 여기서 이중적인 전략을 마련했다. 미술도 시처럼 교양과 창의성을 요구한다고 내세우는 한편 장인들의 기술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때 기술은 ‘기능’으로 폄하되었다. 이를테면 평생 목공일을 익힌 목수는 어김없이 통달한 규칙에 따라 집을 짓지만, 예술가는 집 짓는 규칙 자체를 바꾸며 새 양식을 만들어낸다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근대예술은 기술과의 차별성 위에서 출발한다. 예술은 끊임없는 창조활동인 반면, 기술은 단순히 전통을 답습하는 실용 기능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창조/모방, 혁신/답습, 정신/물질의 이분법이 고스란히 예술/기술의 관계에 적용되었다.

 

여기에 걸맞은 상징이 있는데, 바로 ‘프로메테우스’이다. 특히 ‘제우스’에 맞서는 측면을 부각한 것이다. 영국의 문인 ‘샤프츠베리’를 비롯하여 괴테, 셸리에서 절정을 이룬 프로메테우스 상징은 기존 양식을 무너뜨리는 예술가의 독창성을 대표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지 않았던가? 더욱이 불은 인류 최초의 기술혁명과 연관되지 않는가? 근대 예술가들은 이 점에 주목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기술이 발달할수록 ‘기술혐오’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에 일어난 현상이다. 알다시피 한자 ‘예’(藝)와 라틴어 아르스(ars)는 예술과 기술을 포괄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로 번역된 격언이 히포크라테스 학파에서 나왔으며, 이때 예술이 기술(의술)이라는 점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테크닉의 어원 테크네 ‘예술+기술’

» 보들레르.
사실 ‘예’는 식물을 ‘심다’ ‘기르다’라는 동사이다. 그러니 기술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작물을 키우려면 응당 ‘방법’이 필요할 테니까. 고대 서양에도 비슷한 낱말이 있는데, 콜레레(colere)이다. ‘밭을 갈다’는 이 동사에서 종교적 경배의 ‘컬트’가 나왔고, 인격의 교화를 뜻하는 ‘문화’가 나왔다. 이로부터 우리는 문화예술과 기술이 더불어 ‘사람 농사’라는 것, 즉 인간성 도야를 목표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정신/물질의 분리를 찾기는 어렵다.

 

‘테크닉’의 어원이 되는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techne)도 마찬가지이다. 후자는 이론적인 관조와는 달리 ‘실천’이다. 말하자면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깨달아 익히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과 상통한다. 예술작품의 ‘미묘한 무엇’은 이론만으로 배울 수 없는 것이니까. 경험적이고 신체적이니까. 그래서 시를 짓는 방법도 테크네로 분류되었다. 테크네는 예술과 기술을 포괄하는 실천적 인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과연 기술혐오에 빠진 근대예술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은 이미 예술적 창조가 모든 기술적 요소를 넘어선 순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어버렸으니 말이다. 급기야 19세기 낭만주의에서 과학기술은 우주를 폐허로 만드는 괴물로 인식되었고, 20세기 초현실주의 작가 벨머에 이르기까지 자동기계와 인형은 예술에서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자동기계의 ‘자동성, 반복성’은 원래 인간 속에 있던 요소이기도 하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독립시켜 놓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기계는 인간에게 타자가 아니다. 사람을 닮았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기계의 인간적인 면모를 밝힌다 해도, 예술가들은 여전히 말하리라. 바로 그 때문에 기술을 경멸한다고. 기계가 인간의 저급한 특성을 모방한다면, 그런 기계를 받들어 모시는 가운데 창의성 같은 고급 능력은 마비되고 말 것이라고. 그래서 시인 보들레르는 예술사진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사진이 ‘과학의 시녀’라는 본분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했다.

 

이것은 기술혐오의 심층적인 형태이다. 기술을 단순한 도구로만 보지 않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좌우하는 매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필름 카메라만을 고집하는 작가들도 비슷하다. 문제는 해상도가 아니라 작가의식이다. 쉽게 수정 편집할 수 있는 ‘디카’를 쓸 때 그들은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안이해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여기서 기술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구성하는 매체로 이해되고 있다.

 

비교해보라. 필름사진의 예술성을 부정한 보들레르와 필름사진의 예술성을 고집하는 현대작가. 두 입장은 대조적이지만, 저마다 새로운 매체와 대결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는 작가는 사진 매체를 받아들여 예술로 만든 반면, 디지털 매체를 거부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는 분명하다. 예술과 기술의 대결은 지속적이라는 것. 또한 둘은 그 대결 속에서 서로를 보충해왔다는 것.

 

‘순수’ 예술가의 믿음과는 달리 기술은 종종 예술을 보충한다. 심지어 표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인식 차원에서 말이다. 가령 원근법과 ‘카메라 옵스큐라’의 발명이 예술에 미친 영향이 그렇지 않은가? 문화이론가 맥루언은 말했다. “기계는 자연을 예술형식으로 전환시켰다.” 일리가 있는 얘기이다. 기차여행을 생각해보라. 빠르게 흘러가는 바깥 풍경은 객실 안의 시공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가까운 풍경은 잡히지 않고 먼 풍경만이 시선에 들어온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멀리 놓인 자연이 영화 장면처럼 되어버렸다. 관객이 풍경에 속하지 않은 채 마치 현실을 ‘극장 화면’처럼 바라보게 되었다. 오늘날 인류를 사로잡은 ‘파노라마’적 지각은 기차여행의 대중화와 더불어 발달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기술이란 그 자체로 인간과 세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단순히 자연의 모방에서 그치지 않는다. 도구의 제작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인간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을 구현하는 매체로서 기술은 나름대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러니 예술을 보충해줄 수 있다.

 

인터넷이 종이 매체 예술화 촉발

아니, 그 이상인 경우도 있다. 한 기술체계가 곧장 예술형식으로 바뀌기도 한다. 인쇄매체가 나오자 ‘육필’은 ‘서예’로 자리 잡았고, 인터넷 ‘웹진’이 나오자 종이신문과 책 인쇄는 예술 차원으로 진입했다. 한 기술체계가 새 체계와 만날 때 우리는 종종 과거의 것을 미적 수준에서 재인식하는 것이다. 기술은 이렇게 예술을 촉발할 수도 있다.

 

근대예술이 기능이 아니라면, 근대기술도 마찬가지이다. 중세 때처럼 일생을 바쳐야 습득되는 기능은 근대기술에서 별 의미가 없다. 한편 예술이 교양과 이론을 요구한다면 기술도 그렇다. 과학이론과 연결되지 않는 기술은 거의 없으니까. 또한 예술이 창조적이라면 기술도 창조적이다. 다만 양상이 다를 뿐. 기술이 능동적이고 조작적인 양상으로 세계에 참여한다면, 예술은 보다 정서적이고 주관적인 양상으로 세계에 개입한다.

 

» 이지훈 한국 해양대 강자
우리는 물론 기술 발달에 거의 무관한 예술작품들을 알고 있으며, 그 작품들의 위대한 가치를 의심하지 않는다. 나아가 새로운 기술의 남용이 예술적 진정성의 통속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술과 예술은 인간이 세계 속에 살아가는 두 가지 훌륭한 양상이다. 하나라도 빠지면 사람은 제대로 살 수가 없다. 그만큼 우리 문명 속에는 둘이 공존할 마당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둘은 여전히 맞서고 갈등하며, 서로를 보충해줄 것이다. 이러한 공존의 상상력이 없을 때 우리는 현대 기술매체를 예술화했던 백남준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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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갈릴레오도 무기판매상이었다

 

군사 기술과 민간 기술 다를까 같을까
르네상스 이래 전쟁사 되짚어보면 담은 명백
절대군주들 군비경쟁 위해 신무기 기술자 환대
19세기 ‘과학 애국주의’로 끔찍한 살인기계 발명
원자력·인터넷도 전쟁 기술을 일상화한 것
한겨레

기술 속 사상/⑪ 기술과 전쟁
 

기술과 전쟁을 묶어 생각해보면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전투기나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대포동 미사일 정도가 쉽게 떠오를 것이다. 조금 더 역사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버섯구름으로 상징되는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과 히로시마·나카사키의 참상을 기억할 것이다. 실제로 원폭은 2차대전 이후 과학기술자들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평화적 목적을 위한 과학기술 연구활동에 나서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에만 주목하다보면 기술과 전쟁의 연관이 20세기 이후의 현대 기술문명 사회의 독특한 특징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기술발전이 상상을 초월하는 신무기의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현대에서야 기술과 전쟁이 복합적으로 관련을 맺게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해 볼 수 있다. 또한 최신예 전투기나 원폭을 전형적인 전쟁기술로 생각하다 보면 전쟁과 관련된 기술과 그렇지 않은 기술이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도 F15 전투기를 해외여행 가는 데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며 (전투기를 타본 경험은 없지만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 것이기에), 원폭을 건축현장에서 땅을 파내는 데 이용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위 군사기술과 민간기술은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생각 모두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 유사 이래로 기술적 발전과정과 전쟁의 수행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러지 않았다면 이상했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무의미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전쟁을 일으킨 군주나 지휘관들은 모든 방법과 자원을 동원해서라도 꼭 이겨야 할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전쟁에서 꼭 이기겠다는 집념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새로운 무기의 가능성은 늘 매력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신무기가 적군을 효과적으로 죽이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도와주는 일 말고 인류복지에 보탬이 될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자들은 신무기에 비싼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늘 되어 있었다.

 

권력자들 이기려고 얼마든지 지불




그런데 일반적으로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는 엄청난 자원의 투자와 집중이 필수적이다. 우리에게 기술은 ‘발명가 신화’와 너무 깊게 연관되어 있다. 강력접착제를 개발하던 한 연구원이 실패한 실험재료를 버리려다가 우연히 몇 번이고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편리한 메모지를 발명했다는 이야기 따위가 그런 생각을 부추긴다. 그러나 접착력과 여러 번 사용할 수 있는 특징을 겸비한 접착제의 우연적 발견이 실제로 광범위한 환경에서 사용될 수 있는 제품으로 실용화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의 시행착오와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했다는 점은 종종 간과된다. 마찬가지로 전쟁기술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우연한 발견의 결과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용화되고 전장에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에 걸친 집중적인 자원 투여와 집단적인 기술연구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보통 활보다 훨씬 큰 활을 사용하면 아주 먼 곳의 사냥감도 정확하게 쏘아 잡을 수 있다는 12세기 웨일즈 농민의 깨달음이 1415년 10월25일 아쟁꾸르 전투에서 헨리 5세 원정군의 압도적인 숫적 열세를 극복한 승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웨일즈 침공 중에 배운 장궁의 위력을 여러 재료를 동원한 시험으로 배가시키고 장궁부대의 형태로 집중화시킨 에드워드 1세 휘하 기술자들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 1차대전 당시 한 잡지에 실린 풍자화. 기관총 발명자가 전쟁희생자들을 내려다보며 가소로운듯 웃고 있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 절대왕권이 강화되면서 대부분의 유럽 군주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유럽 각지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기술자들을 높은 연봉을 주고 모셔와 일종의 군사기술 연구팀을 꾸몄다. 그 결과 투석기와 대포처럼 효과적으로 성을 공략할 수 있는 신무기와 그 신무기를 무력화할 수 있는 진흙 축성법, 화승총과 같은 대항 신무기가 놀라운 속도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신무기를 독자적으로 가졌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었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해야만 적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소모적인 군비경쟁은 냉전 시기 이전에도 이미 상당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자들은 환상적인 군사기술을 자신에게만 알려줄 기술자들을 수소문했고, 기술자 역시 자신이 지닌 독창적 축성법이나 적의 보병을 순식간에 전멸시킬 수 있는 비법을 암시하는 편지를 자신의 후원자가 될 잠재적 군주에게 끊임없이 쓰곤 했다. 이런 과학기술자 중에는 기술지식이 전쟁이라는 끔찍한 죄악에 사용되는 것을 증오하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베네치아의 안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포탄의 정확도를 높이는 군사연구를 수행한 타르탈리아 같은 사람도 있었고,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이 새로운 장치의 군사적 장점을 간파한 뒤 베네치아 총독에게 자신이 직접 제작한 망원경을 비싼 값에 판 갈릴레오 같은 이도 있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시대를 앞서간 전쟁용 철갑마차(탱크)에 대한 구상도 밀라노의 군주 스포르차 공작의 후원을 얻기 위해 쓴 편지에서 처음 제시되었다. 요약하자면 전쟁과 관련 기술의 발전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기술발전에서 전쟁관련 기술이 차지하는 부분은 대부분의 경우 주변적이기보다는 중심적이었다.

다소 서글픈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생각해 볼 점은 전쟁 관련 기술과 과학지식의 본격적인 결합이다.

 

망원경 발명해 군사용으로 한몫

19세기 이전까지 기술발전은 대체적으로 과학과 오직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주고받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므로 항해술에서 천문학이 이용되거나 탄도학에서 수학이 응용되는 정도를 제외한다면 전쟁기술의 변화는 과학이론의 변화와는 비교적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은 19세기에 들어 화학공업과 전기공업의 발전을 계기로 긴밀하게 연관되기 시작하였고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서로 협력하며 좀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1차대전 초에 모즐리라는 당시 전도 유망하던 젊은 영국 과학자가 일반 보병으로 전투에 참가했다가 숨진 일을 계기로 영국 과학계는 자신들이 (일반인과는 달리) 과학과 연계된 군사기술 연구를 통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조국에 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때까지도 반전주의는 소수 의견이었으며 과학자들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매우 애국적이었다. 이러한 추세는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퍼졌으며 이 과정에서 전쟁의 양 당사자는 끔찍한 신무기를 경쟁적으로 전장에 도입한다.

 

전쟁기술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 1차대전의 경험은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1차대전중 개발된 탄환 중에는 적군 병사를 즉시 죽이지 않고 엄청난 고통을 느끼되 오래 살아남아 처절한 몸부림과 비명으로 동료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도록 특수제작된 것도 있었다. 독가스의 주된 목적도 직접적으로 적군을 순식간에 죽이기보다는 병사들의 공황상태를 유발하여 전투력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고 발목만 선택적으로 날려버리는 지뢰, 파괴력보다는 폭발시 굉음에 초점을 맞춘 포탄 등이 개발되어 사용되었다. 이중에서도 기관총은 용감하게 적진으로 돌격하는 전통적인 전투자세를 ‘비겁하게’ 기어가는 자세로 순식간에 바꾸게 만든 공포의 신무기였다. 1차대전에서 사용된 전쟁기술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우리는 그 후 등장한 ‘인도적인 무기’라는 다소 역설적인 개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인도적인 무기’ 등장의 역설

»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일상생활에서 이런 끔찍한 무기들이 사용되지는 않지만 군사기술과 민간기술의 차이는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최근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있던 원자력 발전소의 핵심기술은 군사용으로 개발된 원자력 잠수함의 동력기술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고,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인터넷 기술은 핵전쟁에 대비한 미군의 대응전략 개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각종 감시기술과 제어기술처럼 기술의 속성상 군사적으로 개발된 내용이 약간의 변형을 거쳐 사회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은 기술도 많다. 이처럼 전쟁과 관련된 기술발전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생활 곳곳에 침투할 수 있다. 과학기술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전쟁기술의 내용과 활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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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그 해변에 백인만 있었던 까닭은

 

‘기술도 정치적’ 애매모호한 논쟁 정리한 위너
흑인 버스 못오게 설계한 해수욕장 진입로처럼
인종차별·자본·엘리트 같은 정치적 요인 예시
기술이 ‘양날의 칼’ 되는건 주변 상호작용에 달려
한겨레
»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뉴욕의 유명한 건축가 모지스가 자신이 설계한 존스비치공원을 백인들만의 쾌적한 공간으로 만들려고 공원으로 진입하는 고가도로를 흑인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가 지날 수 없도록 낮게 설계했다고 주장했다. 이때 기술은 당시 미국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를 담는 식으로 디자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⑩ 기술과 정치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말은 논쟁적이다. 그렇지만 기술사, 기술철학, 기술사회학과 같은 기술학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다른 전공자들이나 심지어 엔지니어들도 어떤 특정한 기술이 정치적일 수 있다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핵무기, 정찰 인공위성, 지뢰와 같은 살인 병기, 감시카메라가 정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과학이 가치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기술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고 서슴없이 주장한다.

 

그런데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명제를 조금 뜯어보면 그 의미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분명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공물인 기술이 어떻게 정치적일 수 있을까? 정치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 아니 넓게 보아도 사람들 사이의 행위를 의미하지 않나? 핵무기가 정치적 기술이라고 했는데, 핵무기를 구성하는 여러 부품들 중에 (핵탄두, 미사일유도장치, 로켓, 발사장치, 운반장치, 제어 시스템, 통신 시스템 등) 어느 것이 정치적인가? 기술 디자인을 잘게 쪼갤수록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호해진다. 그렇다면 기술이 정치적이라는 얘기는 기술을 수단으로 사람들의 정치적 행위가 강화(혹은 약화)되거나, 변형되거나, 매개되는 것만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Langdon Winner)에 의해서 주어졌다. 그는 기술의 사용만이 아니라 기술 그 자체가 정치적일 수 있다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주장한다. 첫 번째는 발명이나 디자인이 특정한 그룹의 이해를 대변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다. 미국의 건축가 모제스(Robert Moses)는 뉴욕의 존스비치 공원 진입고가도로를 흑인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가 지나다닐 수 없도록 낮게 설계했는데, 이런 경우는 기술이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를 담는 식으로 디자인된 경우다.

 

핵발전 독재적·태양열 민주적 기술




» 뉴욕의 유명한 건축가 모지스가 설계한 존스비치공원.
이런 예는 기술사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기술사학자 데이빗 노블(David Noble)은 2차대전 이후에 MIT(매사추세츠 공대) 엔지니어들이 개발한 수치제어 공작기계가 특정한 정치적 이해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공작기계는 숙련노동자의 작업을 테이프에 입력해서 작동되는 방식과 숙련노동자의 노동에 의존하지 않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수치제어 방식이라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개발 가능했는데, 숙련노동자들의 노조를 무력화하길 원했던 GE(제너럴 일렉트릭)사와 기계가 인간보다 훨씬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MIT 엔지니어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서 공작기계가 전자동 방식인 수치제어 쪽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수치제어 공작기계는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들의 이해를 충족했다고 할 수 있다.

 

기술이 정치적일 수 있는 두 번째 경우는 “선천적으로 정치적인 기술”이다. 위너는 이를 다시 두 가지로 나누는데, 그 첫 번째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 기술이며, 두 번째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과 더 잘 부합하는 기술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은 반드시 중앙에서 이를 통제할 “과학기술자-군인”이라는 강력한 엘리트 그룹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경우가 전자의 예다. 반면에 태양력 발전이라는 기술은, 비록 분산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이런 사회와 더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예가 위너의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기술이다. 기술철학자 루이스 멈포드는 1960년대에 기술을 민주적 기술과 독재적 기술로 나누었고 현대사회가 점점 독재적 기술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개탄했는데, 위너가 예로 든 핵발전소와 태양열 발전은 각각 멈포드의 독재적, 민주적 기술에 해당하는 것이다.

 

노블이 분석한 수치제어 공작기계는 군산학복합체의 산물이었다. 이를 도입한 GE사는 숙련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길 꾀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의도가 생각대로 관철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계가 도입된 뒤 매니저들은 기계공들의 임금을 삭감하였는데, 그 결과 기계공들은 일할 동기를 잃었다. 또한 기계의 속도에 따른 기술적 어려움으로 인해 예기치 못했던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생산라인의 비효율이 초래되었다. 그리하여 GE사는 고참 공작기계공들에게 기계와 프로그램을 조작, 통제,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수치제어 공작기계는 이 기계를 조작하고 통제하는 고급 숙련 노동자들을 낳았고, 이들은 오히려 그 이전의 노동자들에 비해서 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기술사의 곳곳에서 나타난다. 핵전쟁을 대비해서 만든 미국 고등군사연구국의 아르파넷(Arpanet)이 세상을 이어주는 인터넷으로 발전한 것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핵전쟁을 대비한 분산적 네트워크가 포스트모던 세상에 적합한 통신수단이 된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영향

» 랭던 위너.
노동자들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작업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이, 노동자들에 의해서 매니저들의 사적인 판단을 감시하는 역감시의 기제로 발전된 역사적 사례도 있다.

 

이렇게 기술은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정치적 영향을 낳곤 한다. 그 이유는 기술의 궤적이, 기술이 새롭게 열어주고 힘을 부여하는 사회세력들과 동시에 그 기술 때문에 힘을 잃는 사회 세력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때그때 형성되는 불안정한 균형에 따라 불규칙하고 가지치기 식의 경로를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한 기술이 특정한 궤적을 그리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를 들어 정보기술은 반드시 감시기술을 낳는다는 식의) 자칫 비관적인 결정론으로 귀결되기 쉽다. 기술의 궤적에 더 중요한 것은 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세력들 사이의 힘의 관계이지, 기술의 초기 디자인에 각인된 발전 방향성이 아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명백하게 자유를 억압하고 민주적이지 못한 정치적 기술을 놓고 이 기술이 가져올 수도 있는 미래의 역설적인 결과만을 기다리는 것 또한 위험한 태도이다. 이럴 경우 기술의 궤적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궤적을 결정하는 것은 항상 기술과 사회세력들의 다양한 개입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이러한 인식 위에 기술이 매개하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자. 기술에는 양날의 칼 같은 기술이 있다. 즉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선한 결과를 낳기도 하고 해로운 결과를 낳기도 하는 기술이다. 라디오와 TV는 민주주의 미디어가 될 수도 있으며, 전체주의를 강화할 수도 있다. 그 기술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사용되는가가 중요한 경우다. 이런 기술은 “정치적인 해석 유연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기술의 사용과정에 대한 시민들의 각성과 참여가 기술의 정치성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틀어준다. 그렇지만 모든 기술이 양날의 칼 같은 기술은 아니다. 정치적인 해석 유연성이 크지 않은 기술도 많이 있다. 통제와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소수 엘리트들에게 더 큰 권력을 부여하는 기술도 존재한다. 이런 기술의 경우에는 대안 기술을 개발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시민 각성·참여가 방향 길잡이

»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기술의 정치화에 대한 논의는 기술결정론을 피할 수 있는 한 가지 인식적 토대를 제공한다. “기술은 양날의 칼이다”는 주장은 보통 “기술은 가치중립적이다”는 얘기로 이어지는데, 이미 보았듯이 이는 기술에 대한 단순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기술은 자동적으로 양날의 칼이 되는 것이 아니며, 가치중립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의식적인 노력이 없다면 기술은 그것을 디자인하고, 개발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의 의도대로 발전하기 십상이다. 기술의 발전방향을 두 갈래로, 아니 여러 갈래로 만드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둘러싼 다양한 그룹의 개입과 실천이다.

 

기술의 궤적은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기술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발전의 경향성과 그 기술을 둘러싼 사회집단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며, 이는 “시민 참여의 기술정치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기술이 어디에 속하는가를 밝혀내고 그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기술사회를 살아가는 ‘기술시민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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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세탁기가 ‘남편해방’ 시켰다?

 

타자기 등장으로 여성 비서들 단순기능공 전락
세탁기 냉장고 보급에도 가사노동시간 그대로
인공수정 개발로 여성 임신·출산·압박감 더해
기술 자체가 아니라 발전과정 여성 참여가 중요
한겨레
» 세탁기·냉장고 등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줄지 않았다. 여성이 혼자 해야할 일은 더 많아졌고 남성은 외려 자유로워졌다. 기존 성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기술도입만으로 요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바뀌진 어렵다. 사진은 ‘대한민국 남편들 다 벗어라’는 카피를 단 삼성전자 세탁기 광고. <한겨레> 자료사진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⑨ 기술과 여성
 

타자기라는 새로운 사무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던 비서들은 능동적인 지위에서 지시받은 문서를 기계적으로 작성하는 수동적 처지로 전락했는가? 가사노동을 돕거나 대체할 수 있는 세탁기와 같은 수많은 기술의 발전으로 여성은 가정에서 해방되어 사회 각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는가? 피임법을 비롯한 각종 생식보조기술은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의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해줌으로써 여성해방에 일조했는가?

 

이상의 질문들을 인터넷 토론방에 올려놓는다면 다양한 답변과 그에 대한 재반박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처럼 기술과 여성의 관계는 중층적이면서 논쟁적이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대강 ‘기술결정론적’ 시각에서 제시되었다. 기술결정론이란 기술은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기술이 그렇지 못한 기술을 대체하는 내부 논리에 의해 발전하는데 비해 사회는 그렇게 선택된 기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는 생각이다.

 

로봇 주치의·자가용 비행기 ‘환상’

2040년이 되면 나노로봇이 몸 안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점검하고 문제가 있는 곳을 즉시 고쳐서 평균수명이 100살을 돌파할 것이라는 최근의 기대에 찬 미래기술 시나리오나, 필자가 어린 시절 들었던, 2000년에는 각 가정마다 날아다니는 자가용 비행기를 한 대씩 갖추어서 전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여행하게 되리라는 꿈같은 이야기가 대강 이런 시각을 따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기술과 여성을 바라 본 20세기 중반까지의 연구들은 특정 기술이 성불평등을 강화하거나 약화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어 타자기의 도입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진 비서로서의 여성의 적극적 지위를 단순한 타자수의 지위로 강등시켰는데 비해, 세탁기는 여성을 힘든 빨랫감으로부터 해방시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이나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는 분석이 이에 해당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1970년대 여성해방의 시기에 각종 피임기술은 여성이 자신의 출산능력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획득할 수 있게 해준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피임기술의 도움으로 성생활과 출산 사이의 필연적 고리를 거부하고 보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구체적인 여러 사례연구를 통해 기술과 여성의 관계를 외부적으로 결정된 기술이 여성의 활동이나 지위에 고정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에서 워드프로세서 등의 사무자동화 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여성과 기술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았음에 대한 연구가 한 예이다. 사무자동화가 여성 사무원들 전체에게 동일한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원래 존재하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단순한 문서작성에 요구되는 숙련도가 사무자동화 기술의 도입으로 낮아지자, 단순 타자수의 지위는 더욱 낮아지고 전문 비서의 지위는 오히려 높아진 것이다. 이처럼 여성을 동질적인 어떤 집단으로 상정하고 이에 대해 기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방적 영향을 끼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컴퓨터 조판기술의 발전과정에 대한 신시아 콕번의 연구 또한 이 점을 강조한다. 현재 컴퓨터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쿼티(QWERTY)체계(키보드의 왼쪽 위 여섯 글자를 따서 이름붙인 문자배열 체계)는 원래 타자기 자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를 사용한 조판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쿼티 체계는 강력한 라이벌이자 쿼티와는 매우 다른 라이노타이프 체계와 경쟁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쿼티 체계가 승리를 거두게 된 데는 당시 높은 임금을 받으며 강력한 조직력을 자랑하던 라이노타이프 식자공의 힘을 무너뜨리고 노동의 통제권과 비용절감을 달성하려는 관리자의 이해관계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부부 함께 하던 일도 아내 몫으로

» 가사기술과 가사노동 관계를 분석한 코완의 책.
이 과정에서 낮은 임금에 오직 타자기만 다룰 줄 아는 여성 타자수들은 비자발적 동맹자 구실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남성 노동자들도 표준조판을 지나치게 크게 만듦으로써 조판기술과 근육사용을 본질적으로 결합시키고 결국 여성을 식자공 지위에서 배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성과 노동자, 관리자 계층은 각자가 지닌 복잡한 사정에 따라 사무기술의 도입과정에서 복잡한 동맹관계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맺으며 기술의 발전경로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세탁기와 냉장고와 같은 가사기술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1860~1960년 사이 미국의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줄지 않았다는 루스 코완의 연구는 가사기술의 해방적 기능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다. 세탁기를 사용하여 빨래를 하는 것이 손으로 빨래판을 이용하여 빨래를 하는 일보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의 절감을 가져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코완은 가사기술이 널리 보급되는 과정에서 함께 일어난 몇 가지 변화가 평균 가사노동 시간을 일정하게 묶어두었다고 지적한다. 우선 세탁기와 같은 가사보조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실질적으로 큰 힘이 드는 가사노동은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 혼자 빨기 어려운 큰 이불 같은 것은 남편이 거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사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힘든 일들이 이제는 여성 혼자 할 만한 일이 되었고, 남편들은 더 이상 가사노동에 힘을 보태지 않게 된다. 또한 세탁기의 등장은 가족구성원의 ‘기대 수준’을 높여서 결국 자주 빨래를 하게 했다. 빨래하기가 무척 힘든 일이었던 시절에는 웬만큼 더러워도 대강 참고 지냈던 가족들이 이제는 새하얀 셔츠와 깨끗한 속옷을 당연히 하게 되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변화에는 1930년대 이후 세균설이 의학계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지면서 청결의 생활화가 전면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주효했다. 게다가 이런 청결을 책임지고 가정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행복한 주부의 사명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지면서, 주부들은 전통적으로 주부의 가사노동에 포함되지 않던 자녀의 교육문제나 스트레스를 주는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가정이라는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구실까지 당연히 떠맡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통적인 의미의 좁은 가사노동은 줄어들었지만 주부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임무로서의 가사노동 총량은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 특수성 고려한 기술발전을

이 점은 아무리 노동의 한 측면을 간편하게 해주는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여성과 남성의 관계나 여성의 구실과 지위에 대한 기존 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기술만으로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통상 ‘시험관 아기’로 알려진 체외수정 등의 생식보조기술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인다. 생식보조기술은 흔히 아기를 갖고자 하는 부부의 열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꿈의 기술로 선전되었다. 하지만 이 기술에 대해 여성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손을 낳아 기르려는 선택을 담당하는 구실과 함께 생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존재하면 마땅히 그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수 있는 피해자로서의 구실 모두를 담당하곤 한다. 그러므로 생식보조기술 자체가 여성을 출산의 우연적 성격에서 해방시킨다는 단순한 분석보다는 동일한 기술 내용도 사회적 맥락이 달라짐에 따라 다르게 수용될 수도 있고, 기술이 발전되는 과정이나 내용도 여성의 적극적인 선택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실제로 서양에서 여성들은 자신에게 본질적인 행위인 출산에 참여하는 권리로부터 남성과 기술의 연합의 의해 배제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세기 말까지도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산파의 도움을 받아 자연분만했다. 하지만 핀셋이 발명되면서 남성 의사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출산을 주도할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실제로는 핀셋이 득보다 해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산파를 몰아내고 출산과정에서 여성을 수동적인 지위로 강등시켰다.

 

이처럼 여성과 기술의 관계는 기술이 여성에게 주는 영향이 아니라 여성이 기술의 발전과정에 때로는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참여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이해에 기반한다면 최근 의학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성인지의학(gender-specific medicine)처럼 기술의 발전방향을 보다 여성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여성의 참여를 장려하는 방식으로 조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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