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성 펀드', 신자유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 거버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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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민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박사과정

 

최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최근 단계를 나타내며 케인즈주의적 타협(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에 상대적으로 억눌려 있던 소유자 계급의 복귀를 그 특징으로 한다.1) 소유자 계급은 자본주의 역사를 거치며 경영과 분리되었으며, 금융을 매개로 자신의 지배권을 확보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금융이 헤게모니를 확보하게 되는 과정도 그 거버넌스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신자유주의적인 타협은 신자유주의적 생활양식 또는 경제활동 양식의 확립을 필요로 한다. 대중소비의 시대와 양립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중투자사회(아담 햄즈)의 수립이라는 것이 그 거버넌스의 기초가 될 것이다.



한국경제 또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관점들은 최근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의 동요는 이른바 '진보'와 '보수'로 표현되는 우리 사회의 이해대립 구조를 표현하는 방식의 모호성을 드러내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또한 하나의 '비논쟁'일 따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의해야한다.



우리 사회에 대한 분석의 모호성과 '비논쟁'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장하성 펀드'의 사례다. 또한 이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사회)현상은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거버넌스에 대한 물음도 던지게 한다. 이 소고에서는 '장하성 펀드'를 중심으로 한 비논쟁들과 그것들의 함의를 밝히고자 한다.

 

 

'장하성 펀드'라는 현상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장하성 펀드'는 올해 8월 등장한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KCGF: Korea Coporate Governance Fund)를 말한다. 장하성 펀드는 태광그룹 계열의 대한화섬 지분 5.15% 매입한 후, 언론에 기업의 경영상 문제점 등을 밝히고 '주주명부열람' 가처분 소송을 통해 태광산업 측과 법적 분쟁을 진행 중이다. 이러한 장하성 펀드는 이른바 '장하성 효과'라고 불릴 정도로 주식시장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하지만 장하성 펀드가 갖는 불명확한 성격은 언론에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실상 장하성 펀드의 등장은 참여연대가 꾸준히 진행해 온 '소액주주운동'의 결실이기도 하다. 장하성 펀드의 등장과 함께 참여연대의 이른바 '경제 민주화 운동'은 한단계 도약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데, 그들의 싱크탱크인 <좋은 기업 지배구조 연구소>(CGCG)를 중심으로 한 <경제개혁연대>가 설립된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하여 '펀드를 기반으로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적극적 개입', 그리고 이에 동반하는 법적 소송(로펌: 한누리 법무법인) 등을 전개할 예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장하성 펀드는 출범부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논란의 핵심은 장하성 펀드의 실체, 즉 '사회적 책임투자'(SRI)2) 펀드인가, 아니면 외국계 투기자본인가라를 둘러싼 것이다. 이는 장하성 펀드의 구성이 모호하여 비롯되는 것이다. 언론을 통해 이미 밝혀진 것처럼 장하성 펀드의 공식 명칭은 '리자드 KCGF'로 리자드 에셋 매니지먼트에 의해 운용되며, 장하성 교수 자신이 밝힌 것처럼 이 펀드의 투자는 장하성 교수와는 상관없는 리자드 에셋 매니지먼트의 존 리(John Lee)에 의해 결정되는 역외펀드다. 또한 장하성 교수는 인터뷰를 통해 '장하성 펀드'는 그냥 '펀드'일 뿐이라고 했지만, 김상조 교수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모집된 '사모펀드'(PEF)3)라 구체적으로 밝혔다. 최근에는 장하성 펀드가 금융감독원에 국적이 아일랜드인 헤지펀드4)로 등록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장하성 교수 자신의 답변이나 언론에 의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장하성 교수의 모호함이나 '사모펀드'냐 '헤지펀드'냐라는 논란 모두가 규제와 조세를 회피하려는 노력들에서 비롯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5)6)

 



기관투자자 행동주의의 모델, 캘퍼스

장하성 펀드와 <경제개혁센터>의 모델은 주주행동주의에서 발전한 '기관투자자 행동주의'의 대명사인 캘퍼스(캘리포니아 공무원 연금 기금: CalPERS)다. 캘퍼스는 1932년에 설립된 가장 큰 공공 연금기금으로 캘리포니아의 공공기관, 교육기관 등 2,500여개의 공공 분야 종사자들의 퇴직과 노후를 위한 연금이다. 그리고 이 캘퍼스 모델은 수익률과 운용면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다. 최근에 캘퍼스는 장하성 펀드에 투자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며, 한국에 직접투자를 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7)


한국에 대한 투자선언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캘퍼스는 이른바 신흥시장(Emerging Markets)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한다. 동시에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사모펀드 투자자이며, 이를 통해 높은 수익을 얻고 있다. 또한 기업지배구조펀드에도 상당한 액수를 투자하고 있으며, 이러한 투자는 '캘퍼스 효과'(영업성과에 상관없이 캘퍼스의 투자만으로 주가가 상승)를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이들은 매년 지배구조가 불량한 회사의 명단(focus list: 원래 target list로 불리던 이 명단은 그 어감 때문에 개정되었다)을 발표하여 해당기업들을 압박하기도 하고, 이 때문에 법적소송이 벌어지기도 한다.


물론 이들의 투자는 이른바 '복지투자'를 통해 캘리포니아 지역 사회에 대한 투자까지 확대된다. 이러한 투자는 지역사회의 고용 창출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 책임항목을 부가시켜 일정 정도의 공익성을 표방하고 있기도 하다.


장하성 펀드와 최근에 SRI 펀드, 기업지배구조펀드등이 이러한 캘퍼스 모델을 모범사례로 삼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간접투자상품의 성장은 이른바 '펀드 자본주의'8)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비용과 이익을 주는가?

 



펀드 자본주의의 비용과 이익

작년에 적립식 펀드가 높은 수익성을 기록하면서 많은 이들이 적립식 펀드의 가입했고, 거대한 규모의 유동성이 주식시장에 유입되어 주식시장의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장하성 펀드의 긍정성을 보는 이들은 '테마 부족에 시달리는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며 반겼다. 하지만 장하성 펀드를 둘러싼 논란은 IMF와 '벤처붐'을 겪은데다 이른바 386과 시민운동의 주류화를 지켜본 우리 사회가 이러한 과정을 단지 긍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에서도 장하성 펀드와 비슷한 지향을 갖는 '무라카미 펀드'9)가 재계와 정계를 넘나드는 스캔들을 일으킨 사례가 있는데, 이는 장하성 펀드에 대한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님을 증명한다. 또한 신흥시장에서 가장 높은 외국인 투자 비율이 가장 높다는 한국에서 역외펀드에 의한 지배구조개선이 시도되고 이들의 투자·회수과정이 급속도로 발생할 경우에는 국내시장에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다.


사회적 책임 투자라는 명목에서도 그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가치들에 대한, 즉 공익이라는 관점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혹자가 이야기하는대로 주주 중심의 자본주의가 복잡한 이해당사자들이 얽혀 있는 기업의 공익을 어떤 식으로 평가할 것인지, 그리고 그에 대한 장기적 관점을 과연 확보하고 있을지도 문제다.10) 이제는 눈을 좀 더 거시적으로 돌려보아야 한다.

 



대중 투자 사회의 현실(신자유주의의 소득 경향)

신자유주의와 주주중심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경제의 소득 흐름을 보면 금융화를 통해 이익을 보는 계층이 어떤 이들인지 알 수 있다. 물론 한국경제 자체의 흐름을 직접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만, 미국경제로를 살펴보는 우회를 통해 그 경향과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뒤메닐과 레비는 금융화와 이에 따른 미국경제의 소득 흐름에 대해 광범위한 통계분석을 실시했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1)



(1) 미국 98%의 인구가 연간 총소득이 20만 달러 이하이며, 이들의 소득에서는 연금을 포함한 임금이 90.7%를 차지한다. 소득 구성에서 자본이익(capital gain)과 자본소득(capital income)이 차지하는 비중은 총소득 20만 달러의 문턱을 통과하면서 극적으로 상승한다.


(2) 70년대 상위 계층들이 차지하는 소득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80년대에 들면서 회복된다. 특히 부의 재집중이 발생하고 있는 미국의 최상위 404개 가계(인구비율로는 0.0002%)가 미국의 총부 중에 차지하는 비율은 1983년 1%에서 2003년 3%로 상승한다. 그들 중 최상위 101개 가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1982년 0.5%에서 2000년 1.9%로 네 배 상승하고 그 상승폭은 1990년대 급격하다.



(3) CEO의 봉급은 1971년 평균봉급의 47배였으나, 1999년 2,381배로 상승한다. 이러한 소득의 상승에는 그들의 스톡옵션이 기여한 바가 크다. CEO들의 총급여 중 주식이 차지하는 비율은 1977년 20%에서 1979년 40.5%로 갑자기 뛰어 오른다.



(4) 20세기 말부터 금융 자산이 보급되면서 미국 가계가 직·간접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주식 자산의 비중은 1989년부터 2001년 사이에 32%에서 52%로 증가한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가계의 가장 가난한 층으로 까지 확장된다. 2003년에는 연기금과 개인연금 형태로 미국 가계가 보유하고 있는 금융자산이 총금융자산 중 36%를 차지한다. 1980년 미국 가계 중 뮤추얼 펀드를 보유한 가계는 5.7%지만, 2003년 이 비율은 47.9%로 나타난다.



(5) 자본이득을 포함한 자본소득이 가계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하위 98% 소득 분위에서는 6%를 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자본소득은 소득 피라미드의 90∼99%를 이루고 있는 임금 생활자들의 소득에서도 매우 적은 비중만을 차지하고 있다. 연기금과 퇴직연금으로 얻는 소득은 오직 은퇴한 가계에 한해서, 약간만 기능을 발휘한다. 2000년에 연기금은 65세 이상 인구의 소득 중 18%에 그쳤다. 게다가 소득이 많은 층은 적은 층보다 연기금에서 얻는 이익이 더 크다.



우리가 이러한 거시적 관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적 금융화가 부를 상위 계층으로 재집중시켰다는 점이다. 실제 여러 금융자산의 보급을 통해 자산 중 금융자산의 보유 비율은 늘어났지만, 이 자산을 통해 얻는 소득은 매우 제한적이다. 게다가 뒤메닐과 레비의 분석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혁명의 효과는 사실 최상위 1%에 집중된다. 물론 또 하나 추가해야 할 것은 소득 분위 상위 층에서도 금융 투자의 수익이 제한된 범위에서만 작동하지만, 신자유주의에 유리하게 작용할 폭넓은 계급연합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연기금이 우선 확장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임금을 받는 임금소득자들이 결국 65세 이후에 신자유주의적 금융화로 회복된 자본소득과 이득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중 (투자) 자본주의로?

북한의 핵실험이 발표된 이후 많은 언론에서는 핵실험이 '경제에 미칠 영향', 즉 주식시장에 미칠 영향을 앞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의 경제는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이 대표하는 것이며 우리사회의 '평화'는 이 시장의 안정을 우선으로 한다. 하지만 이 시장의 안정은 양극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앞서 미국의 분석에서 살펴보았듯이 신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최대 수혜자는 소득과 부의 최상위 계층들이며 그들이 차지하는 부와 소득의 비중이 커질수록 그 나머지 분위의 인구는 이전보다 낮은 경제적 혜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금융상품을 보급하면서 폭넓은 거버넌스를 확보한다. 사실 이러한 상품들이 보급된다고 해도 우리가 얻는 혜택은 거의 없지만, 이 상품들의 이데올로기적 파급력은 대단하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애주기의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그 불확실성을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금융상품을 구매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고임금 봉급생활자들은 바로 그것에 집착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장하성 펀드' 현상은 일종의 에피소드다.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진화 논리와 나란히 주주행동주의에서 기관투자자 행동주의로 발전해온, 주류화된 시민운동의 소극(笑劇)과 같은 에피소드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는 표류하며, 동요하고 있다. 아마도 장하성 펀드가 내세운 그 지배구조개선은 바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지배구조개선, 즉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의 수립이었을 것이다.



과연 이러한 형태의 대중 (투자) 자본주의는 성공할 것인가? 최상위 계층과 그를 정점으로 광범위한 연합을 형성하는 고임금 봉급자 계층의 소비로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소비와 투자의 주체로서의 시민은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을까?

 

 




1) Neoliberalism: A Critical Reader, A. Saad-Filho, D. Johnston(ed.), Polity, 2005. 본문으로



2) 사회적 책임투자는 이른바 '사회-환경-경제'의 관점에서 투자대상 기업의 투명성과 도덕성을 고려해서 투자하는 것으로 70년대 출발한 '주주행동주의'의 일유형이며, 일본을 거쳐 아시아에도 확대되고 있다. 초기 SRI 펀드 중 대표적인 것으로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이익을 보는 기업들에게 투자를 하지 않기로 한 '팩스 월드 펀드'(Pax World Fund)와 '드레푸스의 프리미어 제3세계펀드'(Drefus' Premier Third World Fund)가 있다. 이러한 SRI 펀드는 지속가능성(sustainable)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기도 하는데, 이는 이른바 '지속가능한 발전'을 향한 운동을 결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즉 SRI는 투자자들과 사회 모두에 이익을 안겨주겠다는 취지하에 사회정의, 환경적 지속가능성, 금융 퍼포먼스에 대한 고려를 모두 포함한다. SRI 파생상품의 성장률은 전체 펀드 상품의 성장률을 앞지르고 있다. SRI 펀드에는 이전의 주주행동주의와 마찬가지로 기업, 학계, 시민단체들이 다양하게 참여한다. 현재 한국에서도 몇몇 사회적 책임투자 펀드가 운용되고 있는데, 알리안츠 운용의 '기업가치 향상 장기주식 G-1(C/I)', 미래에셋투신의 '미래에셋 3억 만들기 좋은 기업 주식 K-1', 농협 CA 운용의 '농협 CA 뉴아너스 SRI 주식', SH 운용의 'Tops 아름다운종류형주식'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친환경, 사회적 책임(준법, 인권, 건강 등 사회적 가치 존중), 경제적 책임(고용안정, 공정경쟁, 지속가능한 기업 이익 창출)을 고려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 편입종목은 제한되어 있지도 않으며 대부분 우량주 중심으로 운용된다. 이들이 말하는 '공익성'이라는 가치 자체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공익성이 수익성이라는 관점과 양립가능한 것인지는 논란거리이다. 「무늬만 사회책임펀드 수두룩」, 『매일경제』, 2006년, 9월 26일. 본문으로



3) 소수의 투자자에게 자금을 모집하고 주로 구조조정기업과 벤처기업에 투자된다. 이 사모펀드는 금융감독 당국의 규제를 거의 받지 않으며, 역외 펀드일 경우, 국내의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자금을 모집하면 간접투자자산운용법(간투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4) 주로 '단기 투기 자본'이라 불리고, 사모펀드와 동일한 자금모집방식을 택하면서 주로 공개시장에서 활동한다. 주식, 채권, 파생금융상품 등이 주 투자대상이다. 이 역시 규제를 거의 받지 않는다. 사실 '사모펀드'와 '헤지펀드'에 대한 논란도 비논쟁이다. 사모펀드가 주로 기업지배구조개선을 목적으로 하고 헤지펀드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형편이고, 게다가 연기금이나 공모를 통한 뮤추얼펀드가 그 투자대상에 의해 확실히 구별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본문으로



5)「장하성 펀드는 외국계 헤지펀드」, 『한국경제신문』, 2006.10.16. 본문으로



6) 장하성 펀드의 등장 이후 우리투자증권의 사모펀드 '마르크 제1호 PEF 전문회사'는 샘표식품의 지분 24.1%를 인수하면서 장하성 펀드와 비슷한 명분을 내걸고 투자에 나선다. 「'제2의 장하성 펀드' 등장」, 『한국일보』, 2006. 9. 20. 본문으로



7)「美 캘퍼스, 한국에 2조 4천억 '직접투자' 추진」, 『프레시안』, 2006. 10.16. 본문으로



8)「펀드 자본주의의 明과 暗」, 『CEO Information』, 삼성경제연구소, 2006.9.20(제571호) 본문으로



9)「일본 또 무너진 투자 귀재의 신화」, 『중앙일보』, 2006. 6.19. 본문으로



10) 전창환,「주주중시 기업모델의 한계」, 『한겨례신문』,2006.10.11 본문으로



11) G. Dum nil & D. l vy, "Neoliberal Income Trends: Wealt, Class and Ownership in the USA", New Left Review, Nov./Dec., 2004. 본문으로


2006년11월03일 1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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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핵실험을 바라보는 적절한 관점을 제공하는 좋은 글이다.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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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한 세계화와 북한의 핵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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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욱 | 운영위원, 중앙대 교수
 

 

무장한 세계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세계적인 위기는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탈냉전시기 들어 세계적으로 발전주의적 틀이 해체되고 이를 신자유주의가 대체하면서,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이 한계에 봉착하고, 금융 우위의 축적 구조에서 배제된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구도 하에서는 미국과 유럽을 잇는 범대서양적 축적공간을 중심으로 자본의 이동이 집중되며, 예외적으로 새로운 생산의 중심지로 등장한 동아시아 몇몇 국가 정도에만 자본 유입이 지속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처럼 자본의 필요에 따른 한정된 지역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들만이 세계화의 구도 속에 편입될 뿐, 그 외의 광범하게 배제된 지역들에서는 사회적 몰락이 관찰된다. 이들 지역에서 국가성 또는 국가 구조의 해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에 통합된 지역 내에서도 빈곤의 증대와 경제의 불안전성 증가는 일반적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가 무장한 세계화를 동반하는 것은 이처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질서의 해체에 대해, 쇠퇴하는 세계 헤게모니인 미국이 불안전성을 관리하고자 반동적 대응을 전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배제된 지역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세계질서의 틀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졌고, 이탈 세력은 점차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적 축적을 지속하고자 선별된 지역들만을 포함, 관리하는 구상만으로는 해체되는 세계질서 전체를 관리하기 어려워지며, 이러한 '카오스적' 상태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금융적 축적구조 자체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의 이점을 가진 동시에 세계 금융흐름이 집중되고 있는 국가인 미국에게 자국 중심의 금융 우위의 신자유주의적 축적구조를 지속시키기 위한 세계질서의 안정적 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미국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9·11을 계기로 미국의 세계 전략은 선제공격/예방공격이라는 논지까지 동원하면서 매우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세계 여러 지역의 불안전성을 더 키우고 있을 뿐이다.


9·11 이후 신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노선은 클린턴 시기의 세계전략만으로는 세계질서로부터 이탈한 지역에 대한 관리가 불가능함을 강조하고, 이들 지역에 대한 적극적 개입 전략, 즉 군사적 개입에서 정권교체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개입 전략을 주창하였다.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시기 들어서, 냉전 하 얄타 체제에 기초한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전략은 새롭게 등장하는 도전에 취약해졌는데, 미국이 새로운 위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미국적 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고,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된 지역에서 새로운 구도로 지역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세력의 등장이다. 이라크가 그 대표적 사례였다. 두 번째는 국가의 응집력이 약화되거나 국가구조가 해체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위협요소들로, '세력균형'의 논리에 따라 상대 국가를 통제하는 이전의 방식은 이런 위협요소를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발칸 반도의 위기, 그리고 알카에다는 이런 특징을 보여주는 위협요소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앞의 둘과 달리 그 자체로는 인근지역이나 미국에 대한 즉각적 위협의 확대라 볼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통치전략의 토대를 침식할 것으로 보이는 지역이나 국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북한은 이런 차원의 문제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럼스펠드의 말처럼).1) 여기서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보자면, 현재 우호적 영향 하에 있는 지역들에서도 향후 미국의 우위에 대한 도전이 제기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클린턴 시기의 미국의 국제전략은 군사적 개입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긴 했지만, 이런 위협적 요소들을 현상유지하거나, 제한적으로 개입하거나, 그리고 이들 지역을 세계경제 구도 속에 편입시키는 등의 정책을 혼합하는 방식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이 침식되는 것을 되돌리기에는 그 효과가 미미했고, 9·11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의 침식을 두드러지게 부각시켰다. 9·11 이후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세계질서를 다시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출발했으나, 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만큼 세계적인 군사적 개입은 군사적 위협성과 불안전성을 더욱 증폭시키게 되었다. 이라크 전쟁의 시작점에서는 새로운 세기를 만들어 내겠다는 강력한 미국의 이미지가 확산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 귀결점에 이르러서는 직접적 군사개입의 확대라는 무장한 세계화로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다시 되살려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재삼 확인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잠시 1990년대 중반 이후 무장한 세계화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적 세계전략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에게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세계지역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럽으로, 여기서는 대서양 공동지배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주변부의 '해체된 국가들'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전성을 자체 제어할 수 있는 군사적 구도를 재형성하고, 또한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분리를 유지하도록 미국의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두 번째는 세계적 생산의 중심지인 동아시아 지역으로, 여기서는 중국과 일본 양국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이 지역 전체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세 번째는 중동지역으로, 여기서는 석유자원에 대한 미국의 장기적 통제력을 확보하고, 이 지역 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성을 감소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현재 미국의 영향력은 이 세 지역에서 모두 난관에 봉착해 있는 셈이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던 윈-윈(win-win) 전략, 즉 세계 두 지역에서 동시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동시에 두 지역에 모두 개입해 미국이 원하는 방향의 승리를 획득한다는 전략은 이미 1990년대 중반에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어졌다. 세계적으로 배치된 미국의 군사기지는 미국 군사력의 상징이긴 하지만, 냉전 하의 세력균형과 달라진 세계의 구도 하에서는 적절한 개입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약한 상징성을 지닐 뿐이었다. 미국은 이런 변화된 상황에 대처해 주둔군 체제에서 신속대응군 체제로 군사전략 구도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를 몇 개의 주요 지역으로 묶고, 각 지역 내에서는 발생하는 분쟁들에 대해 동맹국과 함께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 광범한 지역에 걸친 대응을 전개할 수 있도록 대응방식을 전환하는 것을 뜻했다. 이를 위해 분산 배치된 주둔군을 몇 개의 거점 중심으로 집중 배치하고, 개별 국가의 상황에 매이지 않는 군사작전의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커졌다. 현재 한반도에서 추진되고 있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처럼, 신속대응군 중심의 군사편제와 동맹국들의 군사적 책임의 강화, 개별국가 중심이 아닌 더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군사무기 체계의 개발 등의 변화가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이전에 비해 군사적 위협을 감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증폭시키게 되는데, 미국의 전략적 판단이 중심에 놓임에 따라 국지적 분쟁이라도 이것이 세계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증폭되어, 특정한 국가/지역들이 비대칭적 군사적 위협 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세계질서에 대한 헤게모니적 통제의 역량은 약화된데 비해 군사적 대응의 범위와 정도가 확대됨에 따라 분쟁과 충돌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일단 분쟁에 미국의 초국가적 개입이 개시되면 해당 국가나 지역에 대한 파괴력이 급가속화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군사적 개입력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우위를 유지한다는 구도 하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앞서 말했듯이 이는 무장한 세계화로 진행된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관철되면서 나타나듯이, 그 축적기반의 안정적 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무장한 세계화의 개입력 또한 세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둘째, 이 무장한 세계화는 미국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 하에서 유지된다. 이는 미국의 핵우위에 의해서, 그리고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틀이 보여주듯이 기존 핵보유국을 미국의 군사적 통제 하에서 관리함으로써 유지되며, 다른 한편 군사기술혁명의 추진이 보여주듯 새로운 군사무기 개발기술의 독점에 의해 유지된다. 셋째, 이는 전쟁의 성격 또한 바꾸어 놓았는데, 군사력의 우위가 있는 쪽에서 보자면 전쟁은 점점 더 '자동화한 전쟁'이 된다. 그러나 반면 군사적 열위에 있는 쪽에서 보자면 점점 더 일반화한 대량학살과 대량 파괴의 전쟁이 된다. 넷째, 자동화한 전쟁의 성과를 강화하고, 전략핵의 사용불가능성이라는 제약을 돌파하기 위해, 소규모 국지화한 전술핵이 집중적으로 개발된다. 이미 벙커버스터나 열화우라늄탄의 개발에서 보듯이, 핵억지력 차원의 전략핵과 별개로 실용무기로서 핵의 실전 적용은 군사력의 비대칭성에 있어서 중요한 시금석이 되고 있다. 다섯째, 군사적 공격대상이 국가 대 국가에서부터 다양한 형태로 변환되면서 선제공격/예방공격이라는 새로운 개전의 논리가 정당화된다. 여섯째, 이렇게 변화된 군사적 구도를 확립하기 위해 미국은 세계적 군사력 배치를 신속대응군 중심으로 전환하여, 좀 더 광범한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력을 확대하려 한다.


이렇게 변화된 구도 하에서 우리 편과 적의 구분은 수시로 변경되며, 세계적 개입력의 확대를 위한 연합세력의 재편 또한 수시로 일어난다. 각 지역/국가들의 이해관계는 자체적으로 결정되지 못하고, 미국의 세계적 전략 하에서 늘 새롭게 재해석되며, 부차적이거나 국지적 성격을 지닌 갈등들이 미국의 전략적 의미 해석에 따라 전면적으로 확대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북한 핵실험

그러나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이 성공할 것이라는 것은 미국만의 기대였고, 오히려 새로운 세계전략은 스스로의 한계를 노정하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토대를 빠르게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데, 한편에서 미국의 군사적 제스추어는 커지고, 또 미국은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군사적 개입에 의존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러한 군사적 개입의 효과는 점점 더 의심스러운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지구 도처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노출되어 있는 국가와 지역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역설적이다. 그 첫 번째 메시지는 미국이 이라크에 매어 있고 이라크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미국의 윈-윈의 구도가 오히려 'fail-fail'(실패-실패)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발생할 가능성은 9·11 이전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두 번째로 이라크가 미국의 집중적 군사적 침공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대량살상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억지력을 갖지 못했다는 교훈을 준 것이다. 미국이 내세우는 선제공격/예방공격의 대상은 군사력의 비대칭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역/국가가 되는데, 따라서 위협에 노출된 국가들은 확실한 군사적 억지력을 보유함으로써 이 구도를 다시 국가 간의 세력균형의 구도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새롭게 재편된 국가 간 체계의 구도로부터 받는 위협을, 아직 해체 중인 이전의 국가 간 체계의 구도 속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보호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세계적인 군사적 위험성을 더욱 확대하고 세계적 군비경쟁을 확대할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주도의 NPT를 결국 붕괴시키는 주요한 촉발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런 맥락 하에서 등장했다. 북한 문제는 더 이상 냉전 하의 체제 간 대립의 문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지만,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이라크 전쟁의 수렁 속에서 미국이 발을 빼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동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으며, 여기서 국가 간 체계의 '생존의 논리'를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다.


미국이 사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 중국 내에서 이른바 '국제파'와 '아시아파' 사이의 대립이 있고, 남한 내에서도 북한 제재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긴 하지만, 지정학적인 고려 때문에 중국과 남한이 중기적으로 미국과 완전히 같은 보조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도 북한의 핵실험 카드가 단기적으로 효과를 갖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물론 당분간 경제제재의 고난은 고스란히 북한 민중에게 돌아갈 것이고, 북한은 이란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을 견뎌냄으로써 얻게 되는 다른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립에서 얻고자 하는 목적은 '정상국가화'라고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이란의 경우와 다르다. 이란은 미국의 개입을 배제함으로써 자립적 힘과 지역적 영향력 확대를 달성하려 하며, 이를 위해 핵억지력을 확보하려고 한다면,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의 도구로서 핵억지력을 활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 목표의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중기적으로 보자면, 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을 동아시아 경제 구도 내에 포섭한다는 목표를 갖는 클린턴 시기의 '페리 프로세스'로의 복귀가 반드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보인다. 북한 또한 이 점에서 이견은 없는 듯하다. 이는 핵실험의 핵심 관건이 방코델타아시아 거래중지와 관련되어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선군정치가 정상국가화를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북한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게 남는다. 그리고 페리 프로세스는 그 자체로 평화정착의 구도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만 클린턴식 무장한 세계화의 틀 속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위기의 구도는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해결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현 시점에 북한 핵실험을 둘러싸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는 국가 간 체계에서 발생하는 현실정치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핵억지력은 그것을 지님으로써 갖게 되는 위험성과 파급력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간 체계의 현실정치의 논리에서 발생한 핵실험의 과정을 '민족', '사회주의', '약소국'이라는 차원으로 덧칠함으로써 마무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오래전부터 한반도 통일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쟁점, 즉 북한의 국가 전략에 여타의 중요한 고려들이 모두 종속되는 문제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동아시아 평화구도라는 문제

이라크 전쟁이 NPT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체제임을 보여준 역설적 사건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문제는 누가 그것을 깨느냐,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것이 지역적 구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이다. 북한의 핵실험은 중기적으로 볼 때 세계적인 핵확산을 가속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핵보유는 선제공격/예방공격의 위협에서 다소나마 벗어나 핵보유국을 세력균형의 보호틀로 복귀시켜주는 외피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붕괴하는 세력균형을 되돌리기 위해 핵보유에 의한 세력균형으로 돌아간다는 구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세계적 위험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특히 현 상황은 진영 간 대립 하에서 미 소간에 존재한 세력균형과 핵우산이라는 구도와도 매우 달리, 핵보유의 아나키적 상태를 낳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핵확산은 당장 민감한 지역인 동아시아보다는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개시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1980~90년대에 핵개발을 진행하다 중단한 지역들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봐가면서 핵개발을 재개할 가능성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이 문제는 민감한 사안이고, 단기적으로는 이 지역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개별 국가 내에서의 저항도 적지 않기 때문이 빠른 시일 안에 핵확산의 움직임이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핵확산이 진행되고, 핵확산에 대한 동아시아 내의 제약 요인이 약해지면서, 첫 주자가 출발을 하게 되면 연이은 연쇄반응이 나타날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북한의 핵문제를 북한과 미국 사이의 국제적 거래 차원의 문제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에서 핵확산을 막고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필요성, 특히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통제력을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필요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해 질 것이다. 첫 번째는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미국의 전략적 구도가 이 지역의 군사적 위협성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통제력을 늘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 자체적 대립구도를 최소화하고, 국지적 분쟁이 증폭되지 않도록 하는 집단적 대응의 틀을 만들어 낼 필요성을 사고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물론 국가들 사이의 협력구도겠지만, 이것만을 통해서 이 과제가 달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핵무장 반대가 전쟁 위협에 대한 반대와 결합하는 것이 과제일 것이고, 이는 다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와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전쟁과 핵무장에 대한 반대가 국가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내에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출발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핵무기라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대중적 통제를 가능케 하기 위해 국가를 어떻게 변환시킬 것인가의 과제도 제기된다.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또는 국가권력에 청원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상일 뿐이지만, 극단적 폭력에 대한 억제와 국가 사이의 고리를 사고해야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와 핵무기

그렇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핵무기의 문제는 좀 더 역사적이고 근본적인 재사고를 요구한다. 북한 핵실험은 이런 재사고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핵억지력은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데, 핵무기는 특히 국가 간 체계의 논리를 매우 강하게 부과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 개입의 여지를 배제하는 특징을 갖는다. 냉전과 핵억지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냉전이 보여주듯 '상시화된 전쟁'은 전쟁을 대중적 정치의 통제력 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정치를 전쟁과 국가 간 체계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따라서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통제라는 문제는 처음부터 제기될 수 없었다. 북한 핵실험이 보여주는 문제의 근원에도 같은 쟁점이 놓여 있다.


1970년대 유럽에 퍼싱II 미사일 배치를 둘러싸고 등장한 유럽의 핵무기 반대 평화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것은 당시 유럽 공산당들의 모호한 태도였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적으로 핵무기 반대 운동과 결합되지 못한 역사를 되풀이해 보여준 것이었다. 유럽 공산당의 모호한 태도는 소련의 핵보유와 관련된 문제였다. 소련은 미국 제국주의의 침공 위협에 대한 생존의 논리로서 핵보유를 정당화했다. 소련의 핵보유는 방어적이고 생존적인 것이라는 논리는 자기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논리였다.
소련의 핵보유는 사실 2차 대전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된 문제다. 미국의 핵개발은 나치의 핵개발 첩보에 대한 대응으로 개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절대적 평화주의자'이던 아인슈타인이 나치의 핵개발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의 핵개발을 촉구하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 서명한 사실은 그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독일 패전 후 미국은 대일전의 조기 종전을 위해 각각 농축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원료로 제조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고, 25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사망하였다. 핵무기의 등장과 그 실전 사용은 사실 전쟁의 종료인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파멸적 전쟁의 개시와 무기 확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인구밀집지역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한 전쟁범죄 행위였지만, 파시즘에 반대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2차 대전의 공식적 정리방식이 이 쟁점을 덮어버렸다.
2차 대전 종전 후 핵무장과 핵무기에 대한 반대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핵무장이었다. 소련은 1949년 핵실험에 성공했고, 미국 핵보유에 대한 억지력을 갖기 위해 핵무장을 정당화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핵폭격 위협에 노출된 중국 또한 핵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중소분쟁이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핵보유의 논리를 더욱 정당화하여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여기서 모두 핵보유는 '국가생존'의 차원에서 정당화되었으며, 소련의 핵보유는 소련이나 소련 외부에서 모두 사회주의 운동이 핵무장에 반대하는 싸움을 전제할 수 없는 자기무력화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을 방위'해야 하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파괴적이었다. 핵보유는 결국 국가 간 체계의 논리를 사회주의 국가들에 깊숙이 내장시키는 핵심 기제로 작동했으며, 국가권력의 논리가 대중보다 우위에 서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관련해 중국혁명의 경험은 두 가지 서로 충돌하는 논리를 보여준 바 있다. 한편에서 마오의 '정치우위'는 전쟁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강조하면서 군사력의 우위가 아닌 대중의 조직력의 우위로 군사적 승리와 혁명을 달성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혁명에서 베트남 전쟁까지 이어진 과정은 이 논리가 관철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문화혁명 기간 제기된 사회주의 과도기론은 사회주의에 대한 위협이 외부의 침입에 있기보다 내부의 모순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권력 장악 과정까지만 정치우위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 설립 이후에도 정치우위는 계속해서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핵보유를 통해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대중노선의 우위가 관건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중국 또한 소련과 마찬가지로 핵억지력 보유를 통한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 포섭되는 과정이 발생했다. 문화혁명 기간에 인민해방군은 문화혁명의 영향 밖에 남아 있었다는 점과 1967년 중국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이것을 민족적 경사로 추앙한 것은 이후 중국이 걷게 되는 길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핵보유가 대중운동을 희생하는 대가로 국가를 생존시키고 국제주의를 억압하는 계기이자 논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반대로 국가권력의 지속성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더라도 운동을 소생시키고 국제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봉쇄되었다. 세력의 비대칭성을 운동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체계의 동학을 통해 세력균형의 틀 속에 들어감으로써 좀 더 쉽게 비대칭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커졌던 것이다.


이 쟁점은 사실 1차대전 시기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킨 '조국방위전쟁'의 쟁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1차대전이 촉발되자,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태도를 놓고 분열되었다. 다수가 자국의 운동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데 동의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국제주의를 붕괴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결성된 찜머발트 좌파는 국제주의를 다시 내걸었고, 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로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 맥락이 핵보유와 같은 것은 아닐 텐데, 당시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아니었고, 이 전쟁은 제국주의 간 전쟁이었다는 이유를 들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작동하는 논리와 쟁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핵보유는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되었고, 대중운동의 억압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소련의 핵우산 하에 있던 동유럽 사회주의의 역사가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차르 봄바'라는 최대 수소폭탄 실험은 핵보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유지한다는 소련의 역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2) 15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흐루시쵸프의 선언은 핵무기 개발에서도 나타나, 1961년 지금까지 최대의 위력을 지닌 수소폭탄 개발을 개시해 10월 30일 미츄시카 만 핵실험장에서 공중투하 방식의 핵실험을 시행하였다. 그 위력은 50메가톤으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15킬로톤이었으니 그보다 3천배 이상의 위력을 지녔다. 미국이 실제 실험한 수소폭탄은 15메가톤 규모였다. 차르 봄바는 무게 27톤에, 길이 8미터 직경 2미터의 어마어마한 괴물이었고, 투하 후 발생한 버섯구름이 직경 40km 높이 64km에 이르렀고, 4천 미터 상공에서 폭발하였음에도 지상에서 폭발의 화구만 반경 7km를 넘게 남겼고, 모든 사물을 파괴해버리는 반경만 25km였으며, 100km 밖에서도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가공할 위력을 보였다.


그리고 25년 후 체르노빌에서 노심용해의 대참사가 발생했고, 그 후 5년이 지나서 사회주의 소련은 붕괴했다. 차르 봄바도 소련 사회주의를 지켜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대안세계화와 핵무장 해제-반전의 길로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세계전략이 세계적인 군사위협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일상화한 전쟁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중단시키지 않고서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위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다시금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신자유주의 반대와 무장한 세계화 반대가 핵무장 반대와 함께 진행되지 않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북한 핵실험 정세 하에서도 더욱 속도를 붙여 진행되는 한 미FTA 협상과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으로 나아가는 군사적 재편은 이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


카오스 상태로 나아가는 국가 간 체계의 위기는 생존의 논리로서 핵무장에 대한 유혹을 더욱 확산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핵무장의 길은 신자유주의 반대와 무장한 세계화를 반대하는 길과 함께 가는 길일 수 없다. 대안세계화를 향한 길은 대중의 정치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고 전쟁의 위협을 통제하는 길이다. 사회주의의 역사 또한 군사력 우위의 신화가 결국은 국가를 국가 간 체계 속의 전쟁기계로 변신시키면서 사회운동을 억압해 온 과정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속에서 우리는 국가보다 호흡이 길고, 국가의 테두리로 한정되지 않는 운동이 가능하고 또 필요함을 발견하게 된다. 늘 위기는 새로운 돌파의 지점이기도 했다.




1) 북한 핵실험 이후 여러 가지 '음모론'이 등장했는데, 그 중 중국을 통제하기 위해 북한 핵실험을 용인했다는 음모론이나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위기를 증폭시켰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이런 맥락에서 적절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2) 차르봄바에 대해서는 http://nuclearweaponarchive.org/Russia/TsarBomba.html, http://blog.naver.com/bloodredglow?Redirect=Log&logNo=90000100422 본문으로

2006년11월03일 1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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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디젤기관차와 KTX, 시속 그 이상의 차이

 

최고 시속 150㎞와 300㎞ 수치상의 차이 뒤엔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가 있고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 뒤엔 열차를 타고 바라보는 경관의 차이가 있다
기관차가 근대의 풍경을 보존했다면 KTX에서 풍경은 영화의 스크린처럼 사라진다
한겨레

기술 속 사상/(16) 시대의 경관으로서의 철도기술
 

한국의 유일한 철도박물관인 경기도 의왕의 철도박물관에 가면 두 가지 흥미로운 전시물이 눈에 띈다. 하나는 철도기술연구원에서 만든 철도의 미래에 대한 모형이다. 도시의 일부를 재연하고 있는 이 모형은 항구와 고속도로, 고층빌딩을 한 장면 속에 묘사하고 있다. 철도는 이 것들을 연결하는 혈관 같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항구에 내려진 화물과 승객은 철도편으로 도시로, 더 넓은 세계로 옮겨 가며, 그 세계는 고층빌딩들이 솟아 있는 첨단의 장소이다. 철도가 꿈 꾸는 미래의 모습은 철도가 도시의 주요부분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회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자동차와 항공기가 보편화된 이후 철도는 항상 주변화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기존 선로의 미래철도 ‘틸팅 열차’

또 하나 눈에 띄는 전시물은 자기부상열차에 대한 것이다. 독일, 일본, 프랑스 등 각 나라가 개발하고 있는 자기부상열차를 소개하고 있는 게시물에 부속된 전시물은 자기부상열차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본의 신칸센 500계 열차의 모형이다. KTX가 자기부상열차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로 있는 걸로 봐서, 일반인들의 뇌리 속에는 ‘미래의 고속첨단 열차=자기부상 열차’라는 등식이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 같다. 박물관이 이런 일반인들의 선입견적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데, 그것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철도기술의 현황과 실제 현장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인에게는 철도의 미래는 자기부상 열차라고 알려져 있지만 당장 실용예정인 다음 기술은 차체가 기울어져 기존선로에서도 시속 200킬로미터까지 안정성 있게 달릴 수 있는 틸팅 열차이다. TTX(Tilting Train eXpress)라 불리는 이 기술은 새로 선로를 깔아야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KTX와는 달리, 기존 선로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주요한 철도기술로 세계 각국에서 각광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7년부터 충북선에서 TTX의 시험운행이 있을 예정이다. 철도기술이 향상하면서 우리 생활에서 철도가 가지는 위상도 변한다.




지금은 철도여행의 낭만이 많이 줄었지만, 어릴 적에는 기차를 올라타는 순간부터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진입로 같이 느껴졌다. 실제로 1980년대에 용산역에서 출발하던 목포행 호남선 완행은 열차 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전라도였다. 옆자리의 아저씨는 요즘 젊은 것들은 농촌으로 시집 오면 당장 죽기라도 할 듯 꺼린다면서 혀를 끌끌 차셨고, 차장은 안내방송에 대고 막걸리 같은 목소리로 울고 넘는 박달재를 읊었다.

 

호남선 완행 타는 순간 전라도

» 2004년 개통된 케이티엑스(KTX)가 힘차게 달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철길이라는 구조, 일정한 주기로 철커덕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우리를 향수의 세계로 밀어 넣는 열차 바퀴의 오묘한 음률, 버스와는 다른 느낌의 객차 내부, 그리고 삶은 달걀과 사이다, 천안의 명물 호도과자.... 지금은 열차에서 내리면 바로 다른 교통수단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철도여행이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라는 느낌은 많이 사라졌다. 거기다가 용접해 붙여서 이음매 없이 긴 장대레일 때문에 더 이상 규칙적인 철커덕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삶은 달걀과 사이다는 다른 메뉴로 대체되었고 모든 창과 문은 밀폐형이라 시골의 공기냄새를 맡을 수 없다.

 

사실 정보의 고속도로를 따라 정보들이 아무런 물리적 이동수단에 의존하지 않고도 순간이동을 하는 시대에 실제의 땅 위에 무거운 쇳덩어리를 써서 사람과 물건을 나른다는 것은 더 이상 급변하는 시대를 대표하는 표상도 아닌 것 같으며, 그에 대해 글을 쓰거나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는 것도 별로 신선한 주제가 아닌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탈근대의 첨단기술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요즘이야말로 근대의 기술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같은 세기가 철도와 사진을 발명했다고 한다. 양자는 근대의 시각장치(vision machine)이며 이동성과 깊이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870년대 미국 서부에서 활동했던 윌리엄 헨리 잭슨은 사진과 철도를 결합한 사진가였다. 그는 철도를 이동수단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객차를 개조해 자신의 작품을 고객들에게 선보이는 갤러리로 쓰기도 했다. 사진과 철도의 이런 결합은 남북전쟁 이후 백인들이 미국 서부를 더 왕성하게 개척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잭슨에게 철도는 시작장치이기도 했다. 그는 무거운 사진장비를 나르기 위해 노새를 쓴 경우가 많았지만, 그가 사진 찍은 땅의 범위는 기본적으로 철로를 따라 나 있었다.

 

자동차와 항공기의 발달이 근대의 풍경을 빠른 속도로 지워버린 것이라면, 철도가 근대의 풍경을 보존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워 보인다. 누구나 잘 알다시피, 철도는 철저하게 근대의 산물이고, 근대를 가져 온 원동력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과 재화를 포함하는 물질의 순환이 빨라지고 규칙적이 되고 능률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속도감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1825년 조지 스티븐슨이 만든 로코모션이란 이름의 증기기관차가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를 시속 24킬로미터로 주파했을 때 이는 이 세계를 다르게 보이게 할 만큼 경이로운 속도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속도가 어지러웠다고 하니 말이다.

 

한국의 철도는 1960년대 이래로 지금까지 디젤 동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현재는 급속하게 전력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2004년의 KTX의 개통에 이은 전력화와 고속화 추세에 따라, 한국형 고속철도인 G7의 개발이 진행 중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발전이 현재 한국의 철도를 디젤동력으로 표상되는 과거와 전력화, 지능화, 고속화로 표상되는 미래로 갈라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는 디젤동력은 1960년대에 영원한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진 증기동력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옛날 철도모델을 그대로 쓰고 있는 서구와는 달리, 과거의 테크놀로지와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의 철도 기술의 특성이기도 하다.

 

실제로 디젤기관차와 KTX는 아주 다른 패러다임에 속하는 기계이다. 그것은 최고속도 150킬로미터와 300킬로미터의 차이이기도 하고, 3천 마력과 1만6천8백마력의 차이이기도 하다. 디젤과 KTX는 단지 수치상의 차이일 뿐 아니라,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이기도 하다. 공기역학적 고려는 전혀 없이 직사각형의 딱딱한 디자인에 동력대차와 브레이크, 연료탱크 등 많은 기계부분들을 겉에 노출시키고 있는 디젤기관차와는 달리, 고속의 KTX의 설계에서는 공기역학적 구조가 아주 중요하게 고려되어, 차체는 항공기를 닮은 매끈한 유선형으로 되어 있으며, 전기를 받아들이는 펜타 그래프 외에는 어떤 것도 노출시키지 않고 있다. 고속으로 달리는 KTX의 특성상 조그만 장애물도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주행상태를 점검하는 많은 수의 센서들이 열차 내외부와 선로 주변에 장치되어 있는 것도 KTX가 기존의 철도와 다른 점이다.

 

과거과 단절된 한국 철도기술

» 이영준/기계비평가
이런 차이는 열차를 타고 바라보는 경관의 차이로 나타난다. KTX에서는 더 이상 지리적 참조점을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풍경은 그냥 영화의 스크린처럼 사라질 뿐이다. 기계적 패러다임의 차이가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기존 선로를 훨씬 빠른 속도로 달릴 틸팅 열차가 실용화되면 새로운 양상을 띨 것이다. KTX 만한 성능의 고속열차는 없지만 많은 연구자료를 담고 있는 철도박물관이 수도 없이 산재해 있는 미국이나 영국과는 달리, 제대로 된 철도박물관은 없지만 최첨단의 철도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철도기술은 분명히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영준/기계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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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상대성 이론, 시계에서 태어났다

 

16세기 갈릴레오 ‘진자의 등시성 원리’ 발견
100년 뒤 하위헌스 첫 자동 진자시계 발명
산업혁명 이래 ‘시간은 금이자 돈’
두 도시 시간 맞추기 고민하던 특허국 청년
‘시간 상대성’ 알아냈으니 그가 바로 아인슈타인
한겨레
기술 속 사상/⑮ 시계의 역사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표준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각도와 시간. 각도의 표준은 360도에서 얻어지고, 시간의 표준은 천체의 운행에서 1년과 하루를 정함으로써 얻어진다.

 

예전에는 천체의 운행이 자고로 하늘의 뜻과 관련이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시간을 정하고 기록하는 일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였다. 세종시대에 장영실과 함께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든 김빈은 “제왕의 정사에 때를 바로잡고 날을 바르게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하면서, “천 년을 헤아리는 것도 한 시각도 틀리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며 모든 치적의 빛남도 촌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적고 있다.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던 역대 왕들이 시간에 정성을 다했던 이유기 이것 때문이었다.

 

기원전 4천년 바빌로니아 해시계

시계의 역사는 기원전 4천년 바빌로니아 해시계에서 시작되었다. 그 다음 물시계가 개발되었고, 모래시계도 만들어졌다. 중세 시대에는 초를 태워서 시간을 알리는 초시계도 생겼다. 기계 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대략 13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기계시계의 개발에는 탈진기(脫進機 escapement)라고 기어의 회전을 일정하게 하는 장치가 필수적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시계들은 정확하지 않았다. 하루에 한 시간이 틀리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세종대왕이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를 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당시에 쓰던 시각장치가 정확하지 못해서 시간을 알리는 관리들이 중벌을 받는 경우를 염려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릴 수 있는 시계”를 만든 것이 자격루였다. 자격루는 시간을 알리는 나무인형이 물시계를 지키는 관리의 노고를 덜어주는 자동 기계였다.

 

16세기 말에 갈릴레오가 진자의 등시성 원리를 발견하면서 시계의 자동화의 역사에 결정적 계기가 생겼다. 추의 길이가 같으면 진폭에 관계없이 추가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일정하다는 것이 갈릴레오의 원리였다. 그렇지만 이 원리를 추시계에 적용하는 데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보통 추의 경우 등시성이 정확하게 만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네델란드의 물리학자 호이겐스에 의해서 17세기 후반에 해결되며, 호이겐스는 정확한 진자시계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 유럽 전역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이로부터 100년이 더 지난 18세기 후반, 영국의 기계공 해리슨은 80일 동안에 5초가 틀리는 정밀 시계 크로노미터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된 데이바 소벨의 <경도>에 소개되어 잘 알려진 에피소드로, 해리슨의 시계는 오랫동안 항해하는 배에서 경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쓰였다. 19세기 말엽에는 수정시계의 원리가 개발되었고, 20세기 초엽에는 손목시계가 등장했다. 20세기 중엽에는 원자시계가 만들어져서 시간의 표준으로 설정되었으며, 1970년대에 액정시계가 개발되어 디지털시계의 시대를 열었다.

 

시계가 확산되면서 생긴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이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시계가 광범위하게 보급되던 산업혁명 이전의 방적공들은 “당신은 월요일을 일요일의 형제로 알고 있어요/화요일도 마찬가지고요… /금요일에 실을 잣기에는 너무 늦어요/토요일, 다시 절반만 일하지요”라는 노래를 부를 정도로 시간에 대해 무심했다. 농촌에서는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리듬이 지배적이었다.

 

그렇지만 공장의 기계가 시계에 맞추어 돌아가고, 인간의 노동이 기계의 시간에 맞추어지면서 노동은 시간 단위로 쪼개졌다. 산업혁명 당시 한 공장은 오전 5시에서 오후 8시, 또는 오전 7시에서 오후 10시까지를 노동시간으로 공표하면서, 이중 1시간 30분을 아침과 점심식사 등에 할당했다. 또 다른 제철소는 감시원에게 노동자들이 시계를 바꿀 수 없도록 잠가놓으라고 명령했다. 이 제철소에서는 매일 아침 5시에 감독관이 근무 시작을 알리는 벨을, 8시에는 아침 식사 벨, 한 시간 반 뒤에는 다시 근무 벨, 12시에는 점심식사 벨, 1시에는 작업재개 벨을 울리며, 8시에 작업 종료 벨을 울리고 모든 문을 잠갔다.

 

출근시간 찍던 펀치카드사 IBM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계시계 중 하나인 영국의 솔스베리 시계 (1386).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고.
작업장에서 노동자들과 관리자들은 시간을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감독관은 시계의 분침에 추를 달아서 30분의 휴식시간을 27분으로 줄이는 방법을 개발했고, 노동자들은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다시 9시간으로 줄이기 위해서 투쟁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금이자 돈이 되었으며, 상품이 되었다. 1분1초는 이제 아껴 써야 할 것이 되었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죄악시되었다. 소중한 시간이 휴식에 낭비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잠을 많이 자는 것도 창피한 것이 되었으며, 옷도 재빨리 입어야 했다.

 

20세기 초엽, 미국의 ‘과학적 경영’의 아버지 프레드릭 테일러는 시간을 통제함으로써 작업장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에 대한 그의 집착은 극단적이었다. “서류를 찾지 않고 서류함을 열고 닫는데 0.04초, 책상 가운데 서랍을 여는 데 0.026초, 가운데 서랍을 닫는 데 0.027초, 옆 서랍을 닫는 데 0.015초, 의자에서 일어나는 데 0.033초, 의자에 앉는 데 0.033초, 회전의자에서 한 바퀴 도는 데 0.009초, 옆에 있는 책상이나 파일함까지 의자에서 앉아 움직이는 데 0.050초.” 당시 작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출근 시간을 펀치 카드로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이 펀치카드기를 판매하던 회사는 나중에 IBM이라는 공룡기업으로 성장했다.

 

작업장의 시간이 과학적으로 통제되고 상품화되던 20세기 초엽에도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여러 도시들의 시간을 어떻게 하나로 맞추는가라는 문제였다. 마을마다 쓰는 시간이 다르고, 또 한 마을에서도 현지 시간과 표준 시간이 차이가 나서 웃지못할 해프닝이 많이 벌어졌다. 투표 시간의 마감을 놓고 분쟁이 생기기도 했으며, 법정 개시 시간의 기준이 달라서 판사의 판결이 무효가 되기도 했다. 발명가들은 여러 마을들의 시간을 표준시에 맞추는 발명품들을 만들어 특허를 신청했다. 이런 특허 신청은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의 유럽에서 급증했다.

 

‘느리게 살기’ 책 단숨에 읽는 삶

1905년, 스위스 베른이라는 작은 도시의 특허국에서 시간을 맞추는 기계의 특허를 심의하던 청년이 있었다. 이 특허들은 보통 전신을 이용해서 도시 사이의 시간을 맞추는 방법을 취하고 있었다. 이 청년은 두 도시의 시간을 하나로 맞추는 방법에 대한 특허를 곰곰이 들여다보다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빛을 발사하고 돌아오는 빛의 시간을 측정함으로써 두 도시의 시간을 맞추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두 도시 중 하나가 움직이는 경우를 상상했다. ‘이 경우 어떻게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운동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던 청년은 결국 “시간은 시계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이 생각은 시간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시간의 상대성을 제창한 것으로, 특수 상대성 이론의 핵심이었다. 특허국의 청년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음은 물론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의 첫 머리에는 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맞추는 방법이 등장하는데, 이렇게 4차원 시공간의 신비를 규명한 실마리는 열차 역들 간의 시간이 맞지 않아 짜증을 내던 당시의 일상에서 출발했다.

 

»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1870년대 뉴욕 버팔로 역에는 시계가 세 개가 있었다. 하나는 버팔로 시의 시계였고, 다른 두개는 철도회사가 자기들의 열차시간을 맞추는 시계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간의 불일치에 대해서 이 정도의 관용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 영화 <철도원>에 보면 전혀 다른 정서가 지배적이다. 시간 엄수는 철도원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거스릴 수 없는 것이며, 여기서 철도원 오토는 딸아이의 죽음마저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소처럼 수신호를 보낸다.

 

시계의 역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보다 더 정확하게 측정하게 한 역사이다.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함으로써 우리는 시간을 더 세밀하게 통제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시간을 통제하면서 우리는 시간에 더 얽매이고 시간에 의해 더 지배당하게 되었다. ‘느리게 살기’가 유행이라지만, 느리게 살자고 주장하는 책을 단숨에 읽어야 하는 것이 “시간이 돈”인 세상의 지금 우리의 삶이다.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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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 ‘프랑켄슈타인’을 두려워하는 이유

 

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의 상징이었던 ‘괴물’
정체를 몰라 이름도 없고 험오스러웠다
차가운 기술에 따뜻한 숨결 주자는 이분법에
시몽동은 “기계-인간 맞물리며 진화” 반박
중요한 건 ‘인간적’ 문명에 이바지 여부
한겨레
기술 속 사상/⑭ 기술과 상징
 

어떤 노인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항아리를 안고 힘들게 물을 떠오고 있었다. 이를 본 젊은이가 왜 편리한 ‘기계’를 쓰지 않는지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기계는 기계로서의 기능과 효율이 있다. 여기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사람의 본성을 망치게 된다.” 중국의 고전 ‘장자’에 나오는 얘기이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근대적 기술비판의 원점을 찾을 수 있다. 기술의 편리함을 추구하다보면 사람이 기계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타나 있다.

 

그런데 물동이는 일종의 기술적 산물이다. 흙을 반죽하여 불로 구워낼 줄 알아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노인 역시 기술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은 이때 물동이처럼 소박한 도구와 수차(水車) 같은 기계의 차이를 지적할 것이다. 도구가 자연에 순응한다면 기계는 자연을 이용하거나 거스른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장자 시절의 기계란 모두 자연력에 순응하는 것들이니까. 현대철학자 하이데거를 떠올려보라. 20세기를 무시무시한 ‘원자력의 시대’로 정의할 때 그는 수차 같은 옛 기계들을 얼마나 정겹게 묘사했던가? 여기에 물음이 있다. 장자에게는 괴물이던 기계가 하이데거에게는 낭만적인 사물로 바뀐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자에게 괴물 하이데거에겐 낭만

하나는 분명하다. 대상의 정체를 모를수록 더 두렵고 혐오스러울 수 있다는 것. 근대기술을 둘러싼 이미지에도 이런 측면이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1818년)를 생각해보라. 여기서 괴물은 과학기술의 상징이기도 하다. 몸은 ‘자연재료’로 되어있지만, 그 생명은 기술의 결과이니까. 그런데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름을 붙여줄 마음도, 여유도 없었다. 이것은 결국 괴물을 만든 박사조차 기술의 정체를 몰랐다는 것, 그리하여 기술의 산물을 혐오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럴수록 괴물은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끝내 파괴되지 않았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마치 산업혁명과 기계파괴 운동 사이에서 표류하던 19세기 기술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과학기술을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추켜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성 파괴의 주역인 것처럼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다. 혼란스럽다. 우리는 아직도 기술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못한 것이다. 이런 혼란은 어쩌면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이다. 전통사회에서 기술에는 나름대로 분명한 위치가 있었다. 가령 ‘사농공상’이라는 질서는 어쨌거나 당시 사회에서 기술이 차지하던 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학기술의 의미는 괄호 속에 들어있으며 다만 그 효용과 부작용만 논의되고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철학자 멈포드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상징 개념을 제기했다. 여기서 상징이란 인간의 정서적 소통을 비롯해 개성, 창의성, 상상력과 연관된 문화 활동을 포괄한다. 그가 볼 때 문제는 상징 능력과 기술 사이에 균형이 무너진 데에 있다. 기술이 너무 빨리 성장한 바람에 그 문화적 의미를 소화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상대적으로 뒤쳐진 인간의 상징 능력을 북돋우어 다시 균형을 되찾자고 제안했다.

 

‘능동’적인 제안이다. 실질적으로 인문 예술을 좀더 발달시키자는 주장이니까. 그래서 ‘종합’적이다. 기술을 제한하기보다는 그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내성’을 길러, 한결 풍성한 문화를 만들자는 얘기이니까.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술과 상징이라는 이분법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상징은 주관적, 개성적인 반면 기술은 객관적, 기계적이다. 즉, 기술 속에는 ‘의미 있는 상징’이 없고 기계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없다. 이렇게 차가운 기술에게 따뜻한 숨결을 불어주는 것이 상징 능력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람처럼 기술 잠재력도 미지수

» 기술과 기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질베르 시몽동(1924-89). ‘포스트 구조주의’에 까지 영향을 줬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철학자 시몽동(Simondon)은 대조적인 얘기를 했다. 기계도 인간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 생각을 이해하려면 먼저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언뜻 보기에 기계는 마치 생물의 기능 가운데 하나를 고정해놓은 듯하다. 안테나는 곤충의 더듬이, 음파탐지기는 박쥐를 본 땄으며,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한 기능을 확정하는 것은 단지 처음 단계일 뿐이다. ‘인공지능’을 보라. 오히려 외부 환경에 따라 기능을 조절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도 똑같이 작동하는 기계는 초보단계이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외적 정보(상황)에 민감하며 상호작용하는 기계가 나온다. 기능이 다원화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른 기계들, 나아가 인간들과 접속하는 관계도 다원화된다. 서로 끊임없이 연결, 해체, 수렴한다. 이런 측면을 두고 시몽동은 ‘비결정성’이라고 불렀다. ‘열려있다’는 뜻이다.

 

그는 기계의 진면목이 이런 비결정성에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기계의 잠재성은 끝이 없다. 새로운 관계망 속에서 연이어 변화, 생성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또한 그렇지 않은가? 사람의 손은 악수를 할 수도 있고 컴퓨터를 다룰 수도 있다. 한 가지 기능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에 잠재된 능력은 아직도 미지수이다. 한계를 확정할 수 없다. 기계 속에 인간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특정 기능을 닮은 게 아니라 인간의 비결정성과 생성을 닮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과 기계는 모두 생성한다. 더욱이 함께 ‘공진화’한다. 가령 네 발로 기던 사람이 직립하여 도구를 쓴다고 하자. 여기서 ‘앞발’은 이동 기능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특정한 도구와 연결되었다. 인간/기계는 이런 식으로 접속하며 변화한다. 혹은 서로 헤어져 또 다른 접점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이것을 시몽동은 변환(transduction)이라고 불렀다. 이후에 들뢰즈가 ‘탈영토화’ ‘재영토화’ 등으로 발전시킨 개념이다.

 

인간/기계가 이렇게 맞물리며 진화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의 정신활동이 기술과 더불어 형성된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은 인간/기계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주관/객관, 기술/상징의 이분법도 벗어난다.

 

너무 낙관적인가? ‘장자’와 같은 심오한 비판을 너무 쉽게 여기는가? 물론 장자에는 일리가 있다. 지나치게 기능과 효용에 매달리면 인간성이 메마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직 기능과 효용을 위한 괴물로서 기술을 바라본다면 이것 역시 지나치다. 실제 장자의 생각도 그렇지는 않을 듯하다. 어떤 백정의 우화를 기억해보라. 사물의 자연스런 ‘결’을 거스르지 않았기에 19년이 넘도록 칼날을 갈지 않고 소를 잡았다는 이야기. 어쩌면 인간/기술의 창조적 공존을 보여준다. 그는 사물을 저마다 본성에 맞추어 대접하자고 했다. 기계의 고정된 기능에 맞춰 사물을 획일적으로 대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시몽동과 통하지 않는가? 자신의 ‘외부’에 맞춰나가는 기술, 혹은 비결정성 개념과 닮지 않았는가?

 

기술문명 전체 그물망 성찰해야

» 이지훈/한국해양대 강사
기술도 세계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래서 기술은 이미 하나의 상징체계이며 주관성을 띤다. 실제로 기술은 석기시대 이래로 다양한 상징과 아름다움을 표현해왔으며 상상력, 종교적 의미, 미적 유희를 기술혁신의 중요한 동력으로 삼았다. 요컨대 기술에도 개성과 주관성이 있다. 그리고 사람은 기술이라는 상징체계와 더불어 세계를 파악하며 살아간다. 그럼으로써, 세계와 맺는 관계망을 바꿔나간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체’의 관점이다. 전체로서의 인간/기술 그물망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그물이 엮어내는 문명이 말 그대로 ‘기계’적인지 ‘인간’적인지, 다시 말해 세계를 고정된 관점에서 획일화하는지 아니면 인간의 창조적 자유와 생성에 이바지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그럴 때야 기술은 익명의 괴물이 아니라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지훈/한국해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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