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속 사상] 엔지니어여, 세계 평화를 그대 품안에

 

기업과 엔지니어는 숙명적 대립관계
이윤만 생각하는 기업을 일차적으로 견제해야
자기 기술에 도덕적 책임 지는 게 수동적 의무라면
사회 이상을 실현하는 기술 개발하는 건 능동적 책무
한겨레
» 기술은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기술은 통제 가능한가? 기술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가? 생명 복제기술과 지능로봇 등장으로 우리는 기술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지난 1월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실이 밝혀진 뒤 서울 언론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에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황우석 교수. 이정아 기자 leej2@hani.co.kr
[관련기사]
기술 속 사상/(31)연재를 마치며- 기술의 사회적 책임
 

‘기술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지난 4월13일부터 시작하여 30회에 걸쳐 연재된 기술속 사상을 통하여 그동안 기술의 의미, 최근 기술발전의 방향, 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보는 관점들, 기술이 이 사회에 가져다 주는 순기능과 역기능, 그리고 기술과 정치, 기술과 예술, 기술과 건축 등 기술과 그 인접 분야 사이에 주고 받는 영향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러한 글들을 통하여 기술이 현대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강조되었다. 기술은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기술은 통제가 가능한가? 기술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면서 기술속 사상을 끝맺음하려 한다.

 

지난 40년 간 우리나라의 산업, 경제가 발전된 것을 본다면 기술이 우리 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한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일인당 국민총생산이 105달러에서 1만4000 달러로 증가했으며, 평균수명이 52살에서 77살로 늘어난 수치가 말해주듯 40년 전에 비하여 우리 삶은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었고 또한 편리해진 것이다.

 

편리한만큼 대가 치르게 하는 기술

동네에 텔레비젼 및 전화를 가진 집이 몇 안 되었고 자가용을 가진 집은 찾아 보기가 힘들었던 시절로부터 시작하여 기술 발전과 더불어 산업이 일어나 경제가 성장되고 좀 더 싼 값에 대량으로 공급되는 각종 공산물이 등장하면서 살림이 눈에 띄게 달라졌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앞으로 생활이 점점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왔다. 이러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사회도 선진화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급진적인 산업화와 더불어 부작용 또한 생기기 시작했다. 공기와 땅이 오염되고 시냇물은 물고기가 살 수 없는 죽은 물로 변해갔다. 더러워진 물과 공기를 마시면서 배만 부르면 되는 것인가?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대형사고를 경험하면서 기술이 발전되면 될수록 사고는 대형화되며 기술 속에 뭍혀 사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목표 없는 사회는 기술에 휘말려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사람이 내일이라도 인간생명을 복제할 수 있는 것처럼 떠들고 지능을 가진 로봇이 등장하여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처럼 예언하는 것을 들으면서 언젠가 내가 기술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기술이 나에게 풍요로움과 편리함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과연 기술은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되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두렵게 다가오는 기술은 인간에 의해 통제가 가능한 것인가? 소박한 생각으로는 기술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니 모든 기술은 인간의 손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미국의 기술사학자 토머스 휴즈는 에디슨의 전력시스템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면서 기술시스템과 관성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에디슨은 단순한 발명가가 아니라 전기의 발전, 송전, 소비 및 측정 기술이 네트웍화된 전력시스템을 건설한 시스템건설자이며, 그가 구축해 나간 기술시스템은 발전소, 변전소, 전등, 모터 등과 같은 인공물의 집합체만이 아니라 전력회사, 투자회사, 법적인 제도, 정치, 과학, 자원을 모두 포함하는 거대한 사회기술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시스템은 탄생, 성장, 확장 및 경쟁 단계를 거치게 되며 경쟁에서 이긴 시스템은 관성을 가지고 공고화된다고 말한다. 관성이 붙은 기술시스템은 어마어마한 힘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막거나 그 코스를 돌릴 수가 없을 것이다. 전기, 자동차, 컴퓨터, 인터넷과 같이 이미 관성이 붙은 대형기술은 쉽게 발전방향을 되돌리거나 제거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더불어 사는 수밖에 없다.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다고 곧 우리가 기술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야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어디까지나 도구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이지 이 사회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이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0년 전 우리가 너무 가난했을 때 가난에서 벗어나 선진화된 사회를 건설해 보자는 목표를 정하고 우리는 매진했으며 기술은 이와 같은 목표 달성에 조력자로써 훌륭한 역할을 해 내었다.

 

» 사진은 축전기와 영사기, 축음기 등 1000여가지를 발명한 에디슨. 하지만 에디슨이 만들어낸 것은 단순히 이들 발명품뿐만이 아니라 이것들이 사회에서 이용되면서 필요하게 된 법적 제도까지 포괄한다. 즉 사회기술시스템도 그가 만든 것이다. <한겨레>자료사진
이제 선진화된 사회를 건설한 지금 우리는 어떠한 사회적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있는가? “더 잘 살아보자”고 외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되는 뚜렷한 이상을 정하고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목표와 희망적 열정을 가지고 미래 사회 발전에 대한 비젼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한 목표가 있어야만 여러 가지 선택 가능한 기술 중에서 합리적이고 인간에게 유익한 기술을 택할 수 있는 규범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기술의 사회적 책임은 이 사회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구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다루기 쉬운 도구는 아니다. 높은 사회적 이상과 목표가 설정되고 이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희망적 열정이 있을 때 기술이 훌륭한 조력자가 되는 것이지 사회가 목표없이 표류한다거나 저급한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따라 가려한다면 거대한 기술의 힘에 사회가 오히려 휘둘리고 말 것이다. 기술이 자체의 힘으로 도덕적인 사회를 만든다거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술을 잘 선택하고 발전시킴으로써 도덕적인 사회,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조직에 묻힌 기술자는 비판받아야

지금까지 비인격체인 기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이야기했는데 기술을 만들고 그것을 활용하여 사회와 접목시키는 엔지니어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엔지니어는 어려운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데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가 만들어진 사회적 배경이나 역사를 파악하고 필요하면 직접 문제를 제기하거나 만들어내야 한다. 하는 일이 사회적 안전과 직접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거대한 기업이나 조직에 묻힌 엔지니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보다 주어진 조건에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몰두하는 엔지니어를 비판한 기술정치학자 랭든 위너의 말에 엔지니어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 이장규/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
사회의 전문인 집단으로서 엔지니어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이상과 목표를 찾는 데 동참하며, 사회적 이상과 목표에 입각하여 자기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면밀히 분석하고, 프로젝트의 결과가 이에 어긋나지는 않는지 고민해야 한다. 기존에 존재하거나 새로이 등장하는 자기 분야의 기술이 사회적 이상과 목표에 부합하도록 연구 방향이나 정책을 바꾸어나가는 데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엔지니어는 의사, 변호사와 같은 다른 전문직과 비교할 때 단독으로 개업을 하기보다 일반적으로 기업이나 연구소 같은 큰 조직에 소속되어 일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은 일차적으로 최대한 이윤을 추구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속성을 가진 기업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는 기업이 지나치게 이윤만 앞세운 나머지 사회안전을 해치지 않는지 견제하여야 한다. 엔지니어는 기업이 만들어낸 제품에 대해 일차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가장 정확히 그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기술사학자 에드윈 레이튼이 주장한 것처럼 사업가와 엔지니어는 항상 대립관계에 놓여 있는 숙명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엔지니어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이 사회의 안전과 시민의 안녕을 위하여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면서 필요하면 자기가 속한 조직이나 기업의 잘못된 관행에 맞서 고쳐 나가야 한다. 엔지니어가 자기 기술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는 것이 수동적인 의무라고 한다면 사회복지, 평화, 평등과 같은 지고한 이 사회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도움이 되는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은 엔지니어가 사회에 대하여 갖는 능동적인 책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청년도반 2006-11-2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들었던 연재 하나가 끝났다. 아쉽긴 하지만 그간 좋은 글들을 써준 글쓴이들에게, "과학기술학(STS)"에 대한 흥미를 일깨워주고 공부하게 해준 그 인연에 감사한다.

다만 이장규 교수의 마무리는 용두사미 격이라 아쉽다. 대미를 장식하는 글인만큼 좀더 흡인력 있는 글쓰기가 필요했을 터인데.
 

겉멋 교양인은 가라
한겨레
» 베이징 대학 구내에 있는 웨이밍후(未名湖). 미국박사 출신이 많아야만 영어로 논문을 써서 영미의 학술잡지에 발표할 수 있는 교수를 많이 확보할 수 있다는 식의 베이징 대학의 개혁은 미국의 변방 속국이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간양은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관련기사]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⑮

 

“대학 교양과정, 개론·통사 위주 탈피해 동서양 핵심적인 고전 읽기로 개편하자”

지식폭증 시대 걸맞은 깊이 있는 ‘인문학적 인간’ 양성에 주력

 

“내가 어렸을 적에 역사학자 샤쩡여우(夏曾佑)를 찾아뵌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 분이 ‘자네는 외국어를 잘해 외국 책도 볼 수 있으니 아주 훌륭해. 난 중국 책밖에 볼 수가 없지. 그렇지만 난 중국 책 다 봤어. 더 볼 필요가 없어’라고 하더라고. 당시에 난 깜짝 놀랐지. 아 이 분이 이제 노망이 드셨구나 라고 속으로 생각했지. 그런데 내가 지금 그 분의 나이가 되고 보니 그 분 말씀에 일리가 있더라고. 중국의 옛 책(古書)은 수십 종에 불과해. 그러니 깡그리 다 읽을 수가 있어.”

 

중국의 고전 수십종에 불과!

중국의 역사학자 천인커(陳寅恪, 1890-1969)의 생전 회고담이다. 샤쩡여우나 천인커는 모두 우리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둘 다 저명한 역사학자들이다. 특히 천인커는 중국 최고의 이른바 국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난 1990년대에는 한동안 이 분에 관한 붐이 일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십여년 전에 이 이야기를 읽고 난 잠시 흥분한 적이 있었다. 중국 책은 그야말로 바다처럼 많은데 어떻게 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일까. 도대체 수십 종에 불과한 핵심적인 중국 책은 어떤 책일까. 중국을 알 수 있는 ‘규화보전’은?




근자에 전개되는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계기가 되어 중국 대학의 인문교육에 관한 글을 읽다가 문득 예전에 읽었던 이 이야기가 생각났다. 중국 대학의 인문교육이란 주로는 학부생 단계에서 시행되는 교양교육을 지칭하는 것인데 최근에 이 문제가 부상하여 논의가 분분하다. 이 문제를 두고 작년에 열린 한 회의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개론이나 통사 위주의 교양교육에서 탈피하여 동서양의 핵심적인 고전을 읽는 것을 위주로 교양 교육이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중국은 일찍이 1952년에 소련의 대학편제를 따라 대학교 1학년 때 전공을 나누어 교양과 전공의 구분이 마땅히 없었다가 1995년부터 교양교육 제도를 도입하여 시험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문화소질(文化素質)교육 혹은 통식교육(通識敎育)이라는 말을 쓰는데 1999년 이후 32개의 시범 대학에서 최소한 10학점 이상의 과정(通選課)을 이수하도록 시범 실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이징대학(16학점)과 칭화대학(13학점)도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한편 작년부터 상해의 명문 푸단대학에서는 아예 학부의 관리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 미국의 하버드나 예일대학처럼 전공을 불문하고 모두 일단 ‘푸단학원’(우리의 학부대학과 같다)에 들어가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기초적 지식을 쌓게 하고 있다.

 

그동안 중국에서의 교양교육은 우리의 사정과 비슷하게 기존 전공 위주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학생들의 흥미와 지식을 넓혀 주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그저 이런 저런 과목을 많이 개설하면 좋은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중국 문화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른바 신좌파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기도 하는 간양(甘陽)은 이런 현상을 비판하면서 양보다는 핵심적 질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쩍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인문교육 문제가 주목을 끌고 있다. 그가 교양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다양한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요즘과 같이 지식과 정보가 대폭발하는 시대야말로 오히려 가장 기본적이고 어떤 때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두드러지는데 교양교육의 근본은 바로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사고능력(윤리문제, 인생문제에 대한 입장 등을 포괄하는)을 배양해낼 수 있는 기초를 닦는데 있다. 따라서 교양교육은 마땅히 주로 인문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고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책은 대충 읽어서는 안 되고 또 나중에 마땅히 읽을 기회도 없기 때문에 대학 1~2학년 때 집중적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학년이 되면 취업이다 뭐다 하여 편안히 이런 기초적인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중국의 주요 대학에서 배정한 교양과목의 학점이 앞서 밝힌 것처럼 제한적이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공통핵심과정(the common core course)’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격하게 설계되고 학생들에게 엄격하게 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시카고대학에 유학하기도 했던 그는 이런 중국 대학의 교양교육의 모델이 기본적으로 미국 대학의 교양교육 제도여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제도는 학생들에 대해 높은 책임을 질뿐만이 아니라 엘리트를 배양한다는 교육목표를 매우 효과적으로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인문계와 이공계의 학생에게 서로 다른 교양 수준을 요구를 하는 프린스턴 대학의 모델이 중국대학의 현실에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프린스턴 대학은 이공계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인문사회과학의 교양 수준이 인문계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자연과학의 수준보다 높다.

 

사실 근자에 중국 각 대학의 교양 과정의 설계는 대체적으로 미국 대학의 교양교육 제도를 모방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교양과목을 대략 다섯이나 여섯 개의 큰 영역으로 나누고 매 영역마다 적어도 하나씩은 반드시 선택하도록 하는 것 등은 미국과 유사하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가서 보면 아주 다르다. 미국의 경우 대학 1, 2학년은 기본적으로 ‘핵심교양’을 이수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과목을 이수하는데 필요한 요구 조건이 매우 엄격한 점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이다. 가령 미국의 대학생은 일주일에 500~800 페이지 정도의 책을 읽어야 함에 비해 중국의 경우는 100 페이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교양과목은 전체 이수학점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지만 미국은 아무리 못해도 5분의 1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양·전공 딱히 구분없는 소련 학계 모델 버리고

프린스턴 대학을 새 모델로 “서양을 알아야 중국 속으로 들어간다”는 주장

» 지난해에 전문적으로 교양교육(통식교육)을 위해 대학 안에 푸단(복단)학원(우리의 학부대학)을 설치한 상해의 명문 푸단대학.
정승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써야



그는 또한 인문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법학과 경영학 과정을 미국과 같이 대학원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에서는 우리와 같이 이들 학과를 학부에 두고 있는데, 경제가 발전하면서 학부에 이들 학과를 설치하는 대학이 늘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미국처럼 하면 학부에서 교양교육을 제대로 받은 우수하고도 건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만이 이들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 두 과정을 대학원에 두는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그것이 바로 이 두 과정이 시장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이 두 곳을 졸업한 학생은 돈을 잘 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덕적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이 돈을 잘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승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씀. 만약 미국에서 이 두 학과가 학부에 설치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근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전체 교양교육 제도는 유명무실해졌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간양이 이처럼 중국 대학의 교양교육의 모델을 미국의 대학에서 찾고 있다고 해서 그를 우리 주변에서 늘상 접하는 맹목적 미국 ‘추종주의자’가 아닐까 생각하면 커다란 오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신의 문화에 대해 주체적 자각을 가지고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훗날 미국의 교양교육의 기본적 모델이 된 20세기 초의 콜롬비아 대학의 교양교육제도는 전통적 고전교육 중심의 시스템이 붕괴된 이후에 현대적인 방식으로 과거의 고전교육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이다. 전통적 유대가 단절되자 새로운 방식으로 동일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만드는 교육이 바로 미국의 교양교육이었는데 콜롬비아대학(1917-1919)에서부터 시카고ㆍ 하버드대학(1945) 그리고 스탠포드대학(1987) 방식으로 몇 번의 변화가 있었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서양문명 속에서 놓인 위치를 인식하고, 그것과 자신의 역사문명의 관계를 자각케 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그렇다면 신유가(新儒家)의 주장처럼 간양도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면적으로 유가경전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중국과 서양의 핵심적 고전을 같이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현재의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백년간의 고독’ 속에 버려두었던 중국의 ‘토라’ 속으로 들어가는 맥락은 중국적 맥락이 아니라 서양문명의 각도에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을 모르면 진정으로 중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서양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 이해가 깊어져야만 비로소 서양문명으로부터 벗어나 중국문명에 대한 이해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서양을 알 수 있는 ‘규화보전’은? 그것도 깡그리 읽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 또한 나와 우리를 알 수 있는 비급은 어디에 있을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청년도반 2006-11-25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상] 신자유주의의 매서운 광풍이 절실한데도 유일하게 비켜가고 있는 영역이 한국의 교수 사회, 대학원 사회다. "미국 추수주의"라고 해도 상관없으니 어서 좀 싹 쓸어다오.
 

 

과학과 신화 그리고 페이어아벤트



페이어아벤트(P. Feyerabend)는 "방법에 대항하여"(Against Method, London: Verso 1988(개정판), pp. 238-252)에서 과학철학을 이렇게 묘사한다.


"과학철학 같은 잡종 분과(bastard subject)는 그 자체의 신뢰성을 위한 발견과 무관하다. 그것은 단지 과학의 부흥에서 이득을 얻었을 뿐이다."


2차 대전 이후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페이어아벤트는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본 사람이다. 그러한 위험성이 과학기술 자체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기는 학자는 기술결정론(technical determinism)을 주장한다. 인류 역사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결정된다. 마치 사회가 경제발전 모델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 사용의 주체자로서 행위자의 역할을 무시하는 경제결정론도 그렇다. 기술결정론은 과학기술에 의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새로운 문명론을 강조할 때 종종 사용된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이 역사를 결정한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과학과 기술도 역사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 또한 문화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왜 동양에서는 건축물 시공에 못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유물론의 약점은 이러한 질문에 특정 물리적 제한 요인을 동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약점은 오로지 그런 요인에 의해 대답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만약 과학과 기술이 여가와 문화에 무관할 수 없다면, 과학의 전통적인 합리성은 포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과학의 합리성은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17세기 이후 물리학이 300여년 동안 과학을 대표하면서, 보편성(universality)과 불변성(immutability)을 함축하는 객관성이 과학의 합리성을 대표해왔다. 심지어 윤리학도 그러한 객관성을 함축하기 위해 몸부림쳤고, 객관적이라는 용어는 철학자들에 의해 상대적인 것의 반댓말로 굳혀졌다.


페이어아벤트는 전통적인 과학의 합리성을 비판함으로써 무차별한 상대주의자로 낙인찍혔다. "무엇이든 통용될 수 있다"(anything goes!)는 구호로 대표되는 그의 무정부주의(anarchism)가 2차 대전과 함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페이아벤트는 과학과 국가 혹은 정부의 분리가 그 교훈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민주주의에서 국가와 종교, 특히 기독교가 최소한 정치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간주한다. 민주주의는 현실적 전략에서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국가와 종교의 분리에서 얻어진 정치적 승리이다. 페이어아벤트는 그러한 승리의 깃발이 이제 국가와 과학 사이에도 꽂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이어아벤트가 과학의 합리성에서 거부하는 객관성은 다음과 같이 두 측면에서 비판을 받는다.


(1) 이론에 대한 사실의 중립성 논제, 과학적인 것과 과학적이지 않는 것을 구별해주는 별도의 과학적 추론이 있다는 논제 그리고 과학의 발달을 규정하는 보편적 방법론이 있다는 논제에 근거한 모든 주장을 거부한다. 관찰과 실험에 이론이 개입하기 때문에 이론의 객관적 검증과 선택은 '이론에 대한 사실의 중립성 논제'에 의해 지지될 수 없다. 과학적인 것을 규정해주는 별도의 추리가 있다는 생각은 결과만을 보고 결과를 정당화하는 행위에서 비롯된 일종의 고정 관념이다. 실제 지금까지의 과학철학의 역사에서 정당화 문맥만이 강조되었지 발견법(heuristics)는 무시되어 왔다. 어떤 과학자가 순수 관찰에 근거해 일반 가설을 끄집어내었단 말인가? 과학자들이 귀납적 혹은 경험적으로 어떤 가설을 끄집어내었다고 주장할 때 그 의미는 19세기 휴월이 주장한 것처럼 이렇다. 어떤 사실의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설을 세운 다음 관찰과 실험에 의해 가급적 설명력이 큰 가설이 선택된다. 이러한 귀납의 설명은 귀납주의의 그것과 다르다. 귀납주의의 한계가 드러나자 페이어아벤트의 선생인 포퍼는 반증주의(falsificationism)를 주장하였다. 포퍼는 반증주의 방법론에 의해 과학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있고 과학 발달에 고유한 구조를 보였다고 주장한다. 포퍼의 조교 제안을 거부했던 파이어아벤트는 그러한 포퍼의 생각이 정당화 문맥만에 관심을 갖는 철학자들의 섣부른 판단에 기인한 것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또 예측력에서 대등한 프톨레마우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중에서 후자가 채택된 과정은 단순한 과학적 합리성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특정 이념의 정치적 선택과 효과적인 선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2) 과학의 세속화 여정은 과학 이론에 함축된 세계관과 종교적 세계관이 분리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과학은 교회의 권위에 더 이상 종족 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섣부른 고정 관념을 생산했다. 종교를 포함한 여러 이념 중에서 어떤 것이 현실세계에 비추어 그럴듯한지는 과학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실제는 과학도 사회라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종과 유사하다. 다른 이념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발견이 과장되기도 하고 숨겨지기도 한다. 과학은 다른 이념의 학교와 마찬가지로 사회 속의 또 다른 학교와 같다.

 


페이어아벤트는 '과학도 신념에 근거한 일종의 이념"과 마찬가지라고 결론 짓는다. 실제 과학의 역사에서 역사를 초월한 보편적인 진리를 함축한 지식은 없었으며, 현명한 삶이 반드시 지식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현명한 선택은 개인이 처한 상황과 연관된다. 만약 네가 무당 집 딸로 태어나 교육을 받고 점을 치며 살아간다면, 신화를 믿어라. 만약 네가 과학자라면 너의 작업에 신화를 섞지 마라.

 


과학도 어떤 의미에서 신화에 불과하다는 페이어아벤트의 입장은 극단적 상대주의로 분류되곤 하는데, 과연 그의 무정부주의가 그럴까? 그렇게 분류하는 사람들은 페이어아벤트를 반실재론자(anti-realist)로 몰아세운다. 아이러니 한 사실은 그가 뇌암으로 죽기 전 마지막에 쓴 자서전 "시간 죽이기"(Killing Time)에서 그는 자신을 실재론자로 규정한다. 그리고는 실재론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 채 눈을 감는 것을 아쉬워한다. 아쉬워하지만 후회는 없는 듯하다. 자서전에서 밝혔듯, 페이어아벤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그의 말년이다. 60이 넘는 나이에 젊은 이태리 여기자와의 결혼은 그에게 상식과 일상생활 그리고 전문가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가진 미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이 결혼은 그에게 6번 째 였다. 2차 대전 중 허리에 총을 맞아 성불구자와 마찬가지인 그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이 결혼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그 여기자와 아프리카 등 제 3세계에서 자원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이 기간이 그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페이어아벤트가 실재론에 관한 책을 남기지 않았으니 그가 생각하는 실재론이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자서전에서 밝힌 실재론에 관한 그의 실현되지 못한 오랜 구상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페이어아벤트가 과학의 객관성을 비판할 때 그 객관성은 대부분 철학자들에 의해 그려진 그러한 것이다. 특수한 것에 반대되는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 그래서 역사와 문화를 초월한 그런 객관성의 이념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에 페이어아벤트는 반대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가 추진하지 않았던 중요한 '소박한 객관성' 개념을 만난다.

 


소박한 객관성: 과연 페이어아벤트는 반복 가능한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로서 과학적 사실마저도 부정했을까? 뉴턴역학이 틀렸다고 하지만 그가 했던 실험은 그의 이론틀 속에서 지금도 그대로 반복 재현 가능하다. 뉴턴이 하나의 이론이 선택되면, 동일한 관측 사실에 대한 유사한 해석에 과학자들은 동의한다. 과학적 사실들은 이러한 점에서 역사적 사실들이다. 역사적 사실들로서 과학적 사실들은 결코 의사결정의 공적 기반이 될 수 없는 꿈과 같은 주관적 경험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합리성, 곧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확실성의 시대를 지배했던 합리성 개념에 구속된 '객관성'이라는 개념은 특정 철학 전통에 속한 것이지 결코 일상적 의미에서 '객관성'을 뜻한다고는 볼 수 없다. 반복 재현 가능한 측정량을 다루는 과학자들의 무의식 속에는 역사적 사실로서 소박한 객관성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과연 페이어아벤트는 이러한 소박한 객관성을 부정했을까? 그가 일상경험과 상식의 중요성을 깨달은 말기에서 실재론을 상식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그는 소박한 객관성 개념을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소박한 객관성과 과학의 역사 의존성만으로도 객관성 추구와 진보라는 과학의 미덕은 구제된다. 내가 발견한 사실이 미래에 깨어진다는 사실은 결코 소박한 객관성 개념을 붕괴시킬 수 없으며, 틀린 것으로 판명 난다는 사실이 객관성을 지향하겠다는 의도를 약화시킬 수는 없다. 만약 페이어아벤트가 통속적인 해석에 따라서 극단적 상대주의를 주장했다면, 그는 또한 과학의 진보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방법에 대항하여" 소개부에서 그는극작가 브레히트의 인용과 함께 다음의 화두를 던진다.


"질서는 오늘날 사방 도처에 널려있지만, 그런 곳은 실제는 무(無)이다. 이것은 하나의 결함의 증표이다."("Ordnung ist heutzutage meistens dort, wo nichts ist. Es ist eine Meinung Mangelerscheinung", Brecht) "과학은 본질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인 작업이다. 이론적인 무정부주의는 더욱 인본주의적일 뿐더러 법칙과 질서를 전제한 대안들보다 진보를 촉진한다." (페이어아벤트)


 

페이어아벤트가 전통적인 과학적 합리성 개념을 부정했으니, 그가 생각하는 과학의 진보 역시 기존의 진보 개념과 다르다. 영화 하이랜더(Highlander)를 보면 마지막 승리자는 단 한 명만 남는다. 전통적인 합리성 개념에 의하면 진보된 이론은 과거의 이론을 사장시킨다. 그러나 페이어아벤트는 실제 과학적 작업 속에서 선대의 업적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패러다임들이 한명의 과학자에게 공시적으로 적용되는지 잘 알고있는 그 당시 유일한 학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만 나오면 토마스 쿤(T. Kuhn)과 유사하게 밀어붙여 비판하는 앨런 차머스와 같은 학자의 공력으로는 페이어아벤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국내에서 꽤 많이 나간 그의 책 "현대의 과학철학"에서 페이어아벤트는 쿤과 비교되면서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출처가 애매한 '주관적 인식론'을 주장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페이어아벤트는 자신의 오스트리아 대 선배 마흐처럼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이분법,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이분법 그리고 실체와 경험의 이분법을 깨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방법에 대항하여" 끝에 선언한다. 그의 선언이 철학적으로 구체화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경고가 필요하다. 언급된 그러한 이분법에 나오는 개념 혹은 용어들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 전통'에서 굳어진 것이다. 그가 그 전통의 객관성 개념을 부정하였다고 하여 맞바로 주관적 인식론자라는 칭호를 갖다 붙여서는 안 된다.

 


페이어아벤트가 생각한 과학의 진보가 무엇인지는 그의 저술만 가지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무정부주의에서 하나의 힌트를 얻는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이념이든 나름대로 효과적인 영역을 갖는다. 현재의 시점이 아니라 그 이념이 통용된 그 당시 시점에서 그 이념을 이해하면, 페이어아벤트의 생각을 제대로 읽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무정부주의는 서로 이질적인 이론과 이념이 다양해지고 풍부해지는 것을 허락하며, 개인은 그런 다양성과 풍부함 속에서 선택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념의 좋고 나쁘고 그리고 선별해주는 절대적 척도는 없다. 마치 다윈의 수평적 진화론에서 종들간에 우열에 차이가 없듯, 이론과 이념들 사이에 본래적인 우열의 차이는 없다.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서 효과적인 이념은 다른 상황에서 그렇지 않다. 페이어아벤트를 읽을 때 종종 장자가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페이어아벤트의 무정부주의를 과학적 진보와 연관시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과학의 분과 다양성의 증가이다. 진화론의 핵심이 종 다양성 증가라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았듯이, 과학의 발전 또한 분과 다양성의 증가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페이어아벤트는 보편법칙이 없는 생물학을 모른 채 물리학의 패러다임 속에서 과학의 분과 다양성을 파악했다. 그의 뛰어난 능력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물리학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페이어아벤트가 과학과 연관해 이념의 독단화를 비판할 때 그것은 과학을 평가하고 설명하는 방법론과 직접 연결된다. 그가 실제 과학 작업의 배경 지침서로서 사용하는 '보존량 개념' 혹은 '자연선택 개념' 등을 직접적인 독단화된 이념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지침서 개념들은 문제 풀기에 동원되는 일종의 도구와 같은 것으로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그것들은 특정 세계 이해, 곧 세계관을 반영한다. 논의가 이쯤에 이르면, 페이어아벤트가 더 이상 다루지 않았던 주제가 나타난다. 과학기술은 특정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며, 또 세계관은 과학 이론의 지침서 개념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 과학의 분과 다양성의 역사는 과학 안에 여러 다양한 세계관들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런 세계관들은 기존의 다른 세계관과 내용적 측면에서 갈등한다. 과거 과학이 건드리지 못한 영역은 다른 세계관, 실례로 종교적 세계관의 성역에 속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과학적 권위를 둘러싼 많은 문제는 더 이상 과학적인 것과 과학적이지 않은 것의 구분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문제는 이제 현실이다. 과학을 둘러싼 여러 문제, 실례로 배아복제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이념의 갈등을 보여준다고 페이어아벤트는 말하겠지만, 나는 세계관의 갈등을 보여준다고 말하겠다. 그리고 과학 형성의 오랜 역사에 참가하지 않았던 우리에게 그런 갈등은 무척이나 중요한 주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이어아벤트에 호감을 갖지만 그의 무정부주의는 존 레넌의 '이메진' 가사처럼 너무나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비판한 합리성의 개념만큼이나 그의 무정부주의도 이상적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에 종속된 과학, 자본에 종속된 과학 그래서 인기 없는 분과는 죽어가는 현 상황을 현실의 이름아래 보고있어야 하는가? 과연 국가 정책과 과학이 맞물리는 것이 장기적인 의미에서 경제와 과학에 이득이 될까? 페이어아벤트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다른 어느 곳보다 다양한 세계관이 판치는 우리나라는 어쩌면 복 받은 나라이다. 그 만큼 여러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서 지나갔다고 대충 넘어갈 것이 아니라 페이어아벤트의 사상을 나름대로 새롭게 다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하다. 수입된 물이 흘러와 섞여서 새로운 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썩어가고 있다. 사방에서 역겨운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한다. 역겨운 말인가? 내 말이 역겹다면 그대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아직은 두뇌가 탄력적인 학생이 철학과 과학을 공부하면서 "왜 우리는 새로운 것을 못합니까?"라고 반문한다. 그대들 중 누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대의 교수 혹은 대학원 선배는 어떤 대답을 줄까? 대게 교통정리를 잘한는 것 자체가 훌륭한 공부라고 말한다. 개인은 그렇게 판단할 수 있지만 올바른 대답은 아니다. 남의 것을 교통정리 한 후에 새로운 문제를 만들고 이론을 건설하겠다는 것은 어리석거니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학도가 철학에 관심을 가져 충고를 원할 때 먼저 너의 분과나 열심히하라는 말은 제대로 된 충고가 아니다. 새로운 것을 못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 부족임을 깨끗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솔직해야 한다. "나는 그러고 싶어도 못하니 교통정리나 하는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후학은 안 그랬으면 좋겟어" 혹은 "나는 못하지만 너를 위해 이러이러한 충고를 하고싶다"라고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서양철학의 개념적 교통정리를 최대의 과업인양 떠들면서 후대 학문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문제 풀기와 병행하지 않는 그러한 교통정리는 이 땅에 특정 학문을 독단화, 곧 페이어아벤트의 용어로 이념화시키는 것이고, 그 정리가 학문 분과처럼로 정착할 때 해당 학문은 죽는다. 우리의 학풍이 없는 이유를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승화시켜야 한다. 나를 비롯한 여기 모임은 어쩌면 바위에 계란치기 시도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뭔가 남이 제대로 건드리지 않은 것을 하는 것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청년도반 2006-11-26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문주소는 http://goodking.new21.net/bbs/rgboard/view.php?&bbs_id=00007&page=&doc_num=20
 

<한국통계학회소식지>가 '종이 조각들'에서 책으로 모양을 크게 바꾸면서 소식지 안에 'people' 코너를 만들었다. <소식지> 편집위원장의 의뢰에 따라 그 가운데 통계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짧다란 글을 하나 쓰게 되었다. 2006년 10월호 7-10 쪽에 실린 글이다. [조재근 comment]



통계학사 인물 읽기 1
- 칼 피어슨

조 재 근 (경성대학교)



<한국통계학회 소식지> 편집위원장님 말씀에 따르면, 편집진에서는 통계학의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들을 소식지에 연재 형식으로 소개할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물 중심이든 획기적인 연구나 사건 중심이든 소식지 지면에서 통계학사에 대한 글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니, 통계학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그 코너에 처음으로 글을 쓰게 된 노릇은 아무래도 당황스러울 뿐이다. 통계학사와 필자의 인연이래야 겨우 책을 하나 번역한 정도에 머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만용을 부려 거칠고 서툰 글로 첫 소식지 한 구석을 어지럽히게 되었으니, 그저 차후에 부디 깊고 넓은 식견을 갖춘 분이 이 코너를 좋은 글로 채워주시기 바랄 따름이다.


글을 어떤 방향에서 쓸지 필자의 소견을 먼저 밝혀두자. 이 글을 읽는 학회회원들은 대체적으로 수리통계학을 중심으로 통계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회원들이 교과서나 논문에 흔히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연구들을 통계학 바깥에서 살필 기회는 다소 드물었을 것 같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물과 연구들을 교과서와 논문 밖으로 나오게 하여 그들을 시대적, 사회적 배경 속에 두고 조금 다면적으로 스케치해보는 기회를 가져보았으면 싶다. 이번 글에서 살펴볼 인물로 고른 사람은 칼 피어슨이다. 그를 택한 이유는 피어슨이 통계학의 founding father라고 일컬어지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면서 시대적으로 가장 앞서기 때문이다.


 



1. 네이먼,
피어슨을 만나다


1916년 봄, 스물두 살의 폴란드계 청년 네이먼은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 카르코프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르벡의 적분과 측도이론을 공부하는 한편, 젊은 유대인 강사에게서 확률론도 배우고 있었는데 훗날 다항식과 부등식으로 교과서에 이름을 남기게 될 그 강사의 이름은 Sergei Natanovich Bernstein이었다. 어느 날 그 강사가 권유한 책을 읽고 네이먼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가 읽은 책은 러시아어로 번역된 책이었는데 원래는 영어로 씌어진 것으로서 The Grammar of Science라는 제목이 붙어있었고 네이먼이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쓴 것이었다. 그 책은 “한 치도 타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존의 권위라는 권위를 모조리 공격하고” 있었는데, 네이먼으로서는 그때까지 과학에 대해 쓴 것 가운데 그처럼 과격한 내용을 대담하게 쓴 책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분명 날조라고 밖에 볼 수 없는 내용을 책이라고 낸 자는 마땅히 상당히 스케일이 큰 불한당일 텐데 그 불한당의 이름은 칼 피어슨이라고 적혀있었다.


약 10년 후, 네이먼은 런던으로 가서 그 불한당을 직접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때쯤에는 이미 ‘과학이란 explanation이 아니라 description’이며 ‘과학 이론이란 단지 하나의 model일 뿐’이라는 The Grammar of Science의 주장은 네이먼의 사고 틀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칼 피어슨이 있는 University College London(UCL)은 꼭 가서 연구하고 싶은 통계학의 성지가 되어있었다. 또한 피어슨이 편집하는 Biometrika는 네이먼이 목마르게 읽고 싶어하는 학술지가 되어있었으며, 피어슨이라는 이름은 네이먼에게 거의 통계학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1925년 가을 어렵사리 영국에 건너갔던 네이먼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실망만 안고서 영국을 떠나게 된다. 수학적으로 깊이 있는 통계학 연구의 최고봉일 것이라고 믿었던 UCL의 수학 수준은 네이먼이 보기에 기대 이하로 보였으며, 세계 유일의 통계학 교수이자 Biometrika의 종신 편집자인 피어슨은 그러한 권위를 터무니없을 만큼 부당하게 휘두르는 고압적인 노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결국 네이먼이 만난 피어슨은 이미 십 년 전 그를 놀라게 했던 The Grammar of Science의 지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네이먼이 피어슨을 만난 1925-26년의 시기는 영국 통계학을 선두에서 이끌어가는 지위가 이미 1922년을 전후한 무렵에 피어슨에게서 피셔에게로 넘어가고 난 이후였던 것이다.

 




2. 레닌,
피어슨을 읽다


수학적인 능력으로 굳이 비교한다면 피어슨은 30여 살 아래인 피셔나 네이먼에 뒤진다고 평가된다. 더구나 피셔의 경우, 통계학적 개념이나 이론을 세울 때 앞 시대 통계학자들의 어깨에 올라설 필요조차 없었을 정도로 대단히 보기 드문 천재성을 갖고 있었다. 피어슨이 노년기에 접어든 이후와 죽고 난 뒤, 피셔가 피어슨에게 퍼부은 맹렬한 비난은 피셔의 실력과 천재성 덕분에 더욱 힘을 얻게 되었고 20세기 초반에 피어슨이 누렸던 명성과 권위는 빠르게 퇴색해 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correlation coefficient, multiple correlation coefficient, contingency table, chi-square, coefficient of variation, goodness of fit, histogram, homoscedastic, skewness, kurtosis, weighted least squares, mode, moment, random sampling, standard deviation, truncation 등 그가 처음으로 이름 붙여 준 용어들이 너무 잘 알려진 결과, 그것들을 새삼스레 피어슨의 이름과 결부시키기도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곡선족(family of curves)’은 어느 틈에 통계학 교과서에서 물러나 통계학 박물관 속에 갇히게 되었다. 게다가 피어슨을 생물측정학(biometry)의 창시자라고 흔히 말할 때, 그 속에는 유전과 진화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지고 생물학자들과 길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결과, 초기 유전학의 발달을 더디게 만들었다는 비난과 조소의 뜻이 담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때 통계학 세계에서는 단연 으뜸가는 명성을 누렸던 피어슨은 20세기 중, 후반에 이미 돌이켜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이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이 사다리 오르듯 단선적으로 항상 새롭고 향상된 방향으로 진보만 거듭할 따름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피어슨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그를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신 약 80년에 걸친 그의 생애를 훑어보다 보면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어찌 보면 통계학이라는 학문의 정체성(identity)에 닿아있는 듯 보이기도 하는 그 질문들의 무게를 잠시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물론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에 이 글이 적절한 자리도 아니고 필자의 역량이 그런 질문에 답을 내놓을 정도에는 한참 못 미치므로, 여기서는 그저 두어 가지 질문들을 제시하는데 그칠 뿐이다.


피어슨은 1857년 생이다. 그가 태어난 지 2년 후에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였으니 피어슨 세대는 다윈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이 1867년에 나오는 등 사회주의 운동 역시 젊은 피어슨 세대가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또한 그의 3,40대 시기는 60년도 넘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가 저물고,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술렁이던 fin de siècle, 즉 “세기말”이었다. 학문 세계 역시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뉴턴 이래 세상 모두를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유포시킴으로써 모든 학문의 모범이 되어왔던 물리학에서 양자역학과 같은 애매모호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던 때가 바로 19세기 말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지금까지 이름조차 없었던 새로운 학문들이 우르르 생겨나 학문 분류체계까지 흔들어놓게 되었으니, 예컨대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등과 그때까지 ‘자연사’라고 두리뭉실하게 불리다가 분화해서 생긴 여러 학문 분야들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피어슨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은 대략 그러하였다.


통계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는 1857년에서 1936년에 걸친 피어슨의 생애를 크게 셋으로 나눈 바 있는데 그가 세 시기를 나누는 경계로 제시한 해는 1892년과 1922년이다. 1922년은 앞서 언급했듯 피어슨이 통계학계의 지배적인 지위에서 밀려난 시기이고 1892년이라는 해는 젊은 네이먼을 놀라게 했던 The Grammar of Science의 초판이 나온 해이다. 당시 30대 중반에 이른 피어슨은 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일 만큼이나 많은 분야(수학 이외에 법학, 독일 문학, 미술, 신학, 물리학, 철학 등)를 공부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이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활동, 그리고 우생학을 위한 활동, 여러 가지 강연, 엄청난 양의 글 쓰기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수학 교수였던 피어슨은 단지 수학 교수로서 뿐 아니라 과학철학자이자 다양한 사회 활동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과학철학 책인 The Grammar of Science는 그러한 피어슨을 잘 보여주는 한 정점이었다. 이 책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네이먼 말고도 많았는데 특히 피어슨이 쓴 운동, 물질, 에너지에 대한 내용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보기 힘든 난삽한 번역서들이 지난 8,90년대에 쏟아져 나왔을 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에서 레닌이 The Grammar of Science에 나타난 피어슨의 철학적 입장을 몇 차례 언급한 것을 볼 수도 있었다. 또한 피어슨의 이 책은 초판이 나온 지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Dover 출판사에서 계속 나오고 있다.


다른 한편, 1892년이 중요한 이유는 피어슨은 1892년 이전까지는 통계학에 대해 아무 것도 발표하지 않다가 그 다음해부터 통계학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이후 몇 십 년 동안 수학적인 통계학의 founding father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즉 1892년을 경계로 피어슨은 다양한 분야에서의 폭넓은 활동보다는 통계학이라는 하나의 분야로 초점을 모아가게 된 것이다. 통계학의 역사에서 피어슨의 앞에는 케틀레, 페히너, 그리고 골턴이 있다. 피어슨은 그들로 대표되는 19세기 통계학으로부터 전망과 더불어 한계를 읽어냈을 텐데, 그가 본 전망은 그가 젊은 시절에 접했던 어느 학문보다 뚜렷이 밝은 것이었으며, 그가 본 당대 통계학의 한계는 또한 다른 어떤 것보다 호기심과 의욕을 강하게 자극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갖게 되는 의문은 “그처럼 왕성한 지적 욕구를 가진 19세기 지식인이 폭넓은 지적 순례의 과정에서 과연 어떤 이유로 통계학이라는 지극히 변방의 분야에 정착하게 되었겠는가?”라는 문제이다. 과연 그는 정열을 쏟았던 허다한 일들을 모두 아무런 결과도 없이 덮어버리고, 혹은 모두 실패로 치부하고, 통계학이라는 한적한 골짜기로 숨어든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와 정반대로 숱한 일들을 하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학식들이 토대가 된 위에서 뚜렷이 지향할 목적을 세우게 되었고 그 목적 자체가, 혹은 그 목적으로 가는 길이 바로 통계학으로 통하는 길이었을까? 또한 The Grammar of Science와 같은 책에서 과학 원리에 대해 피어슨이 내세운 원리들이 그의 통계학 연구에 그대로 실현되었을까? 과연 피어슨이 생각한 통계학의 본질과 역할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3. 왕립통계협회,
피어슨의 생일잔치를 준비하다

사실 피어슨이 통계학에 발을 내딛게 된 동기는 UCL의 동료 교수로서 동물학을 전공한 웰던, 그리고 나중에 피어슨이 전기를 쓰게 되는 골턴과의 교류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그들과의 교류는 1892년 무렵부터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피어슨은 유전과 진화에 관련한 통계학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통계학적인 방법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다. 멘델주의를 둘러싸고 베이트슨과 치열한 논쟁을 벌인 사례라든가 Biometrika를 1901년에 만들어 죽기 직전까지 편집 작업을 한 것이 모두 그 연장이었다. 따라서 20세기 통계학의 역사는 초기 유전학의 역사와 상당 부분 겹치므로 골턴, 피어슨, 피셔에 대해 알아보려면 유전학을 건너뛰고 읽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보면, 19세기에서 20세기로 세기가 바뀌면서 통계학이라는 학문이 수학적인 엄밀함을 더하면서 비로소 학문의 세계에 진입하고 성장한 것은, 실험이나 관측 혹은 조사 데이터를 ‘과학적’으로 다루는 이론과 방법에 있어서의 일대 전환이라고 일컬을 만큼 중요한 변화였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올바른 지식이란 어떤 것인가’, 또한 ‘그러한 지식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라는 아주 오래된 주제, 즉 인식론 상의 큰 전환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피어슨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가 제기한 질문은 이러한 철학적 주제와 깊숙이 만나는 셈이다.


이처럼 통계학이라는 학문을 교과서나 논문에서보다는 조금 더 넓은 지평 위에 놓고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 우리가 통계학의 역사를 살펴보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피어슨처럼 구닥다리로 덮어두었던 통계학자들이, 상관계수나 카이제곱검정법 따위로만 치장된 신물 나는 얼굴 대신 수천 년 이어오던 학문의 큰 강물 속에서 원대한 포부와 고민을 지니고 길을 개척하던 모습으로 새롭게, 따라서 대단히 젊은 모습으로 우리 앞으로 걸어오기도 한다. 내년 2007년 봄, 영국 Royal Statistical Society에서는 영국 수학사학회 및 영국 과학사학회와 공동으로 Karl Pearson sesquicentenary conference, 즉 피어슨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컨퍼런스를 열 예정인데 그 날짜가 바로 피어슨이 태어난 3월 27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피어슨이 기념되고 있는 반면 그에 대한 평전이 그가 1937년에 죽은 직후 이곤 피어슨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평전을 쓴 이후 60년도 더 지난 2004년에야 처음으로 나왔다는 사실 (골턴의 평전은 이미 네댓 권에 이른다)은 뜻밖이다. 그나마도 과학사학자가 쓴 그 평전에는 통계학과 관련된 내용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적다. 아마 피어슨은 통계학 전공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시대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종수정일: 2006.11.13 [20:34]

210.110.162.12 - Mozilla/4.0 (compatible; MSIE 7.0; Windows NT 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술 속 사상] 인간~동식물~기계, 하나의 존재사슬

 

인간만 주체적이라는 인간중심주의가 인류의 존속 위협하는 환경위기 불러와
인간-환경 생태적 관계로 엮여있음을 인식할때 현재와 미래 동시에 충족시키는 기술 선택해
한겨레
기술 속 사상/(30) 지속가능한 기술
 

# 1.HP는 지난해 영업이익 5조3000억원 중 약80%를 프린터 소모품 판매로 벌어들였다. HP나 캐논이 리필 잉크나 재생 토너업체를 상대로 잇따라 특허소송을 벌이는 것도 소모품 시장 잠식 우려 때문이다.

 

# 2.미래형 자동차를 선점하기 위한 세계적 자동차 업계 간 대격돌이 치열하다. 도요타의 하이브리드형 엔진, GM의 수소 연료전지, BMW의 액화수소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하이드로젠 7’, 폴크스바겐 등의 ‘수소연료 전지차’ 등 수소를 연료로 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 3.타워형 고층아파트나 주상복합아파트의 경우 베란다와 같은 완충지대도 없고 고정된 통유리창이 많아 더워지면 열기가 집안에 가득 차서 그 열기를 밖으로 빼거나 식히기 위해서 에너지가 또 투입되어야 하는 악순환의 구조를 가진다.

 

위의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 기사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HP는 프린트 토너나 카트리지를 재활용할 기술이 없어서 그 많은 폐기물을 만들면서 재사용을 못하게 하는 것인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에너지 소모가 작은 판상형 아파트가 아닌 에너지 비용이 몇 배 높은 타워형 고층 아파트 일변도로 변해가는 것의 이유는 무엇인가? 대형승용차 판매율이 미국 다음 세계 2위인 한국의 수소자동차 개발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환경위기의 맥락




1960년 이후 냉전이 첨예화되고 월남전 등으로 국제정치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풍요로운 서양을 중심으로 산업사회의 부산물인 쓰레기, 오염된 공기와 물, 지구온난화, 자연자원의 고갈, 생태계파괴 등의 환경오염 문제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1958)’을 통해 DDT 등 유기합성 농약류 사용으로 인한 위험성을 처음 제기했다.

 

30여년 전에 예견된 인류의 위협

1972년 로마클럽은보고서 ‘성장의 한계’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인구, 자원, 쓰레기, 에너지 등을 분석한 결과, 21세기 중반, 인류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한다고 경고하였다. 환경오염은 유기화합물로 인한 수질오염과 토양오염(1970년대), 핵겨울과 산성비, 오존층 파괴(1980년대), 지구온난화(1990년대), 유전자 조작과 생명복제(1990년대 후반), 해양 및 내수 오염, 유해물질의 부주의한 사용 및 폐기, 동식물 종의 절멸 등의 이슈로 변환하면서 끈질기게 제기되어 왔다. 한국은 급속한 개발도상국의 압축적 성장과 팽창의 폐해가 지속적으로 나타난 뒤 80년대부터 환경문제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환경문제는 국경이나 빈부격차, 산업화 정도와 상관없이 전지구적 현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의 의미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은 21세기의 화두이다. 1987년 브룬트란트 위원회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인류사회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개념으로써 미래세대가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하였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국제간의 협력을 체계화한 리우선언(1992)과 그 실행계획인 의제 21은 1)환경자원의 독점적 사용불가와 형평성있는 이용, 2)생태계의 수용능력을 고려한 경제성장과 개발전략, 3)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개발전략 등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환경자원의 보호 및 소비와 생산, 개선을 위한 관리, 이를 위한 정책까지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일례로 1998년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온난화를 극복하기 위한 교토의정서는 선진국간 온실가스 배출권을 파는 거래시장을 제안했고 연간 거래규모는 연 250억~300억 달러에 이른다. 국제협약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정하고 그 배출권을 거래함으로써 ‘탄소 달러’를 만들어 독립국가의 경제 운용방식에까지 제한을 가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 갖는 한계

이처럼 지속가능한 발전은 환경 그 자체를 보전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개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며 저개발, 미개발 지역 혹은 국가의 개발가능성까지 선진국들이 통제하겠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지속가능성의 전제로서 다음 세대를 위한 환경보전을 강조하지만 다음 세대의 입장을 대변할 아무런 주체가 없다는 점에서 공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제들은 국가 간에 환경문제에 대한 구속력과 미래사회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강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속가능한 기술의 사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기술이란 화석연료대신 대체에너지를 활용하며, 환경효용을 고려한 기술적 발전을 도모하는 방향을 포괄한다. 또한 재활용기술을 개발하여 폐기물을 줄이면서 보관처리 문제해결 및 천연자원의 보호까지 도모한다. “3R(reduce, reuse, recycle)”을 반영하는 지속가능한 디자인과 기술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국제적 다국적 기업들이 이러한 친환경 정책으로 경제성은 물론 기업이미지까지 제고하는 사례는 많다.

 

특히 화석에너지의 2/3 이상을 차지하는 수송부문과 건물부문에서 기후, 대기보전, 에너지효율화 등에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필요로 한다. 이중에서 정치경제적 고려부터 기술적 고려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건축을 살펴보면 지속가능성은 각기 내재된 철학적 입장과 적용하는 기술의 복잡도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나타난다. 예를 들면 세계적 대도시에 자본주의의 상징인 산재하는 하이테크건축물들은 고도의 집약된 첨단기술과 정책의 산물이다.(사진 5-6) 반면 폐타이어, 흙, 태양열 집열판을 이용하여 전통적 집짓기로 전세계 여러 곳의 집없는 이들의 거주문제를 해결해 주는 지구선(Earthships)의 사례들을 들 수 있다. 위의 두 입장은 대조적인 만큼 지속가능하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결국 지속가능한 기술이란 적용할 기술 자체가 완전치 못하거나 불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인식하고 사용하는 국가와 사회, 민간과 공공의 선택, 그 아래 내재된 개인의 윤리적 소신까지 관여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환경위기 극복을 위한 실천적 인식

환경오염을 유발하고 생태계를 교란시킨 주범인 현대 과학기술이 그 행위의 결과에 따른 폐해를 진단하고 예측하며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란 점은 이 시대가 처한 역설적 상황을 함축해서 보여준다. 이처럼 목적의 합리성과 가치합리성의 사이에 대한 혼동과 부조리함은 현대 과학기술의 기초를 이룰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가 처한 환경위기와 일방향성의 근본적 원인이 되고 있다. 환경위기를 야기한 많은 결정들은 과학기술상의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 조치들로만 해결될 수 있는 차원은 벗어나 있다. 그 이유는 인간만 자율적이고 주체성을 갖는 동물이고 그 외 존재는 인과적으로 작동하는 타율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간중심주의적 형이상학적 신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자연정복과 지배를 정당화시켜왔기 때문이다. 근대과학 이후 자연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저장소로 인식된 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는 더욱 보편화되고 강화되어 왔다. 그 결과 오늘날 환경위기는 인류의 생물학적 존속마저 위협할 만큼 전면적이고 총체적이기 때문에 문명의 위기와 동일시되고 있는 점 역시 환경을 철저히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인식하고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을 역사발전의 일부로 이해해야

» 류전희/경기대 교수
자연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계층, 세대, 시대를 초월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터전이다. 자연환경을 지키고 그 가치를 모두가 향유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식물, 인간과 물리환경이 서로 ‘생태적 관계’를 통해 하나의 '존재의 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s)'로 엮여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러한 것을 복원하기 위한 대안적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실천이 전제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인간역사를 망라하여 살아 온 인간보다 현재 더 많은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깊이 고려해 본다면 현재의 승리는 자연과 역사라는 자신의 과거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포괄적 역사발전의 일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 시대의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류전희/경기대 교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