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길에서 만난 분열

 

  [먼슬리 리뷰] 중국 노동계급의 상황 (1)
  2006-07-10 오후 12:45:20
  올해는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권좌에 올라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화한지 꼭 3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중국은 사회주의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 요소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국제 시장경제 체제에 편입했고, 그 효과로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다.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본 경제규모에서 중국은 이미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에 올랐고, 앞으로 30여 년 뒤에는 미국도 제치고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고속성장의 이면에서는 도시와 농촌 간, 부자와 빈자 간,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물질적 격차가 확대돼왔고, 이제는 이런 격차가 사회적 불만의 확산으로 이어져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결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를테면 점→선→면의 발전경로에서 해안 산업도시들을 중심으로 점은 여러 개 찍었으나 그 점들을 서로 연결하는 선을 이리저리 긋고 면으로 경제성장을 확산시켜야 할 단계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중국 지도부가 채택해온 '자본주의의 길'이 만만치 않은 장애물을 만난 것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중국은 1970년대 말 이후 우리가 알고 있었던 중국과는 많이 다르다고 중국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제 중국은 더 이상 저렴한 노동력이 도시 산업지대에 무한정 공급되는 나라도 아니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문화를 동경하기만 하는 나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 지도부도 오랫동안 제쳐놓았던 평등이라는 가치를 다시 강조하고 나서고 있고, 개혁개방 이전에 사회적 통합의 근간이었던 사회주의 이념을 새롭게 복원시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중국은 과연 지난 30년 동안 달려온 '자본주의의 길'을 앞으로도 계속 질주해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동안의 고속성장의 후유증을 추스르고 사회양극화에 따른 내적 분열을 봉합하면서 경제와 이념의 구조조정을 거치는 기간을 불가피하게 갖게 될까? 아울러 중국의 정치와 사회는 그동안의 개혁개방에 따라 중국 국민들 사이에 확산된 민주화 요구를 원만하게 수용해갈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 마침 미국의 잡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최근호에 실려(☞ Conditions of the Working Classes in China), 그 전문을 번역해 4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필자인 로버트 웨일(Robert Weil)은 인권, 노동, 반전, 환경 분야에서 오랜 세월 시민운동을 해 온 미국의 활동가이자 사회학자이며 중국 전문가이기도 하다. <편집자>

 

 


  
  이 글은 내가 2004년 여름에 중국 문제를 연구하는 알렉스 데이 등 2명의 학생과 함께 중국의 노동자, 농민, 조직가, 좌파 활동가 등과 가진 일련의 면담에 근거해 씌어진 것이다. 이 글은 오클랜드 연구소의 특별 보고서로 출간될 보다 긴 논문의 일부이기도 하다. 중국에서의 면담은 주로 베이징의 시내와 그 주변 지역, 북동쪽의 지린 성, 중국 중앙부에 있는 허난 성의 도시 정저우와 카이펑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갈수록 양극화되는 중국 사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듣게 된 것들은 마오쩌둥이 죽은 뒤 30년간 일어난 거대한 변화가 초래한 결과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그 변화로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 실행됐던 혁명적 사회주의 정책들이 폐지되고 중국이 '자본주의의 길'로 복귀함에 따라 노동계급의 지위가 점점 더 취약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사회 중 하나였던 이 나라에서 지금은 양극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최상층에는 부가 축적되고 있지만, 밑바닥에서는 점점 더 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하루하루 더 악화되는 삶의 여건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현상을 예증해주듯 <포천>의 2006년도 억만장자(10억 달러 이상의 재산 소유자-옮긴이) 명단에 중국 본토에서 7명, 홍콩에서 1명이 포함됐다. 미국 등 다른 나라의 억만장자들에 비하면 재산규모가 작긴 하지만, 이들은 중국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등장을 대변한다. 당과 국가의 당국 및 기존의 기업 간부들을 새로이 생겨나는 민간 기업인들과 연결시켜주는 부패의 만연이 막 발흥하고 있는 자본가계급을 더욱 더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동맹의 거미줄 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반면에 노동계급은 지난 반세기 넘게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착취당하고 있다.
 

  
  우리가 면담한 노동자들은 중국경제의 기둥이었던 국유기업에서 일하다가 쫓겨난 수천만 명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실직과 동시에 국유기업 직장의 구성요소였던 주거, 교육, 보건, 연금을 비롯한 사회적 보장을 사실상 모두 상실했다. 그들이 다니던 국유기업들은 사적 투자자에게 아예 매각되거나 기존의 관리자 또는 국가나 당의 당국에 의해 부분적으로 민영화됨으로써 이윤추구 기업으로 전환됐고, 그 과정에서 부패가 일상화됐다.
 

  
  우리가 만난 농민들은 농촌 공동체의 해체가 강요되고 각 가정이 마을과의 계약에 따라 받은 농지를 경작해 생계를 해결하는 방식의 농가단위 책임제가 도입된 것이 초래한 장기적 파급영향에 대응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이런 중국의 농촌정책은 나라가 세계시장에 개방되고, 지방 관리들이 농촌 주민들에게 적절한 보상도 해주지 않으면서 토지를 개발업자들에게 매각하고, 농촌 지역의 환경이 마구 파괴되는 변화와 결합되면서 수억 명의 농민들로부터 그동안 그들이 누려온 집단적인 사회적 지원을 박탈했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계를 유지해나갈 방법을 찾아 나서도록 했다. 이런 농민들 가운데 1억 명 이상이 도시로 대대적으로 이주했고, 도시에 가서는 건설공사장 또는 새로 생겨난 수출품 제조공장에 취직하거나 가장 기본적인 인권조차 무시되는 매우 더럽고 위험한 공장들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이런 이주노동자들(민궁(民工)으로 불리는 농촌 출신의 도시 떠돌이 노동자들을 지칭-옮긴이) 가운데 다수는 도시 지역에 반영구적으로 정착하게 됐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이가 들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삶의 여건이 급속하게 악화됐다.
 

  
  중국의 노동계급은 삶의 여건이 악화되는 동시에 과거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에 해당하는 수십 년간의 투쟁과 희생으로 획득했던 권리들이 상실되는 상황에 직면해 수동적인 태도만 취하지는 않았다. 계급갈등과 사회적 동요가 지난 수십 년간 볼 수 없었던 정도로 증대됐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노동자, 농민, 이주노동자들이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큰 규모의 시위에 나서고 있으며, 그 규모가 종종 수만 명에 이르고 격렬한 충돌이 빚어지기도 한다. 정부의 공안부장도 '대중적 사건, 즉 시위와 소요'의 발생건수가 10년 전에는 1만 건이었는데 2003년에 5만8천 건, 2004년에는 7만4천 건으로 증가했다는 통계수치를 발표한 바 있다(<뉴욕타임스> 2005년 8월 24일). 사회적 불안 증대의 위협은 당과 국가의 최고위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으며, 그들이 더 큰 동요를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이미 정책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전문직과 관리자들로 구성된 이른바 신중산계급과 빠른 속도로 늘어난 대학졸업자들 가운데 다수가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경제호황의 기간에 번영을 누렸지만, 이제는 이들마저도 분열되고 있다. 마오쩌둥의 시절에는 대학원까지 사실상 무상으로 받을 수 있었던 교육도 점점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받을 수 있게 됐고, 이제는 그 비용이 노동계급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사는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도 시장의 압박에 의해 타격을 입고 있다.
 
 
 

  
  계급갈등의 첨예화
  
  경제개발이 가져다주었던 이득, 그 중에서도 특히 소비재와 식품의 공급 확대 및 사회적 신분이동의 기회와 직업상의 기회 증대도 그동안 계급분화가 확산되고 삶의 불안정성이 높아짐에 따라 훼손되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은 쉽게 해소될 수 없는 계급갈등과 정치적 불확실성이 첨예화하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노동계급이 나아가는 앞길은 매우 험난할 것이고, 좌파의 부활은 대단히 유의미한 현상이긴 하지만 아직은 아주 초기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글은 중국의 이런 복잡한 상황과 앞으로 가능한 변화의 전망을 탐구해보기 위한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대개의 경우 특정한 개인이나 조직의 이름은 밝히지 않으려 하는데, 이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지금 도시노동자, 떠돌이 이주노동자, 농민뿐 아니라 다수의 신중산계급까지도 삶의 여건이 서로 비슷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삶의 여건이 이렇게 수렴되는 현상은 자본주의 시장을 지향하는 개혁과 세계 경제세력들에 대한 나라의 개방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투쟁이 폭넓게 통합되는 데 토대가 되어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다른 곳들의 유사한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노동계급의 단합이 실현되기란 이론적으로 생각되는 만큼 쉽지가 않다. 오래된 편견들, 특히 중국 도시인들 중 다수가 농민들을 낮추어보게 하는 편견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런 편견은 농촌 지역으로부터 도시로의 대대적인 이주가 불러일으킨 새로운 형태의 경쟁에 의해, 그리고 각각의 집단이 다른 집단들과 맞서도록 하는 분할통치의 입증된 수법을 구사하는 권력자들의 조작에 의해 증폭돼왔다.
 

  
  한 예로 "베이징의 노동자들은 이주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느끼고 있느냐"는 질문에 한 활동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특히 해고된 노동자들 사이에 그렇게 느끼는 이들이 많다." 베이징의 노동자들 가운데 다수는 농촌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멸시한다. 태풍이 지나간 뒤 거리청소를 하던 도시 노동자들은 "이런 일은 민궁들에게나 시켜야 할 일이야. 그들은 고향에서는 돈 구경도 못했을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지닌 이런 이미지를 확인해주려는 듯 <뉴욕타임스>(2006년 4월 3일)는 상하이 시의 쓰레기 하치장에서 넝마주이 일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보도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큰 딸의 중학교 등록금 1만 위안(1250달러)과 작은 딸의 초등학교 교육비 1000위안(125달러)을 벌기 위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이징의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갖는 감정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은 그들대로 "이런 일은 해고당한 노동자들에게나 걸맞다"라는 식으로 비슷한 말을 한다.
 

  
  이주노동자인지 여부 외에 어느 인종과 민족에 속하느냐도 문제가 되는 미국에서는 너무도 익숙한 현상이지만, 이주노동자들이 체불임금을 지급받고 그들에게 합당한 권리를 인정받도록 도와주려는 정부의 시도가 다른 노동자들의 눈에 특혜적 지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중매체는 "도시 무산계급은 외자계 기업에만 취직하려 한다"거나 "이주노동자들은 아주 적은 임금만 받고도 얼마든지 일하려고 함으로써 해고된 노동자들도 자기들처럼 행동하도록 압박해 그들을 화나게 한다"거나 하는 기사를 내보내는 것을 통해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조작을 부추기는 근본 원인은 도시와 농촌 간 소득격차의 확대다. 중국의 도농 간 소득격차는 현재 3.3 대 1로 "세계에서 도농 간 소득격차가 가장 큰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미국보다도 격차가 더 크다"고 <뉴욕타임스>( 2006년 4월 12일)는 보도했다.
 
 
 

  
  "내가 지금 자네를 물어뜯지 않으면…"
  
  2001년에 큰 충돌이 일어난 정저우 지역의 송전장비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겪은 일은 바로 이런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이 어느 정도로 심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 공장을 운영하던 기업이 매각되고 해체되는 과정에서 경찰이 항의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을 밤에 체포해갔을 뿐 아니라 도둑처럼 공장에 들어와 기계장비들을 뜯어내어 갖고 가기도 했다. 게다가 경찰은 기계장비를 운반하기 위해 일당 50위안에 농민들을 고용해 투입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어난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공장의 기계장비를 뜯어서 들어내는 일에도 농민들이 고용됐다. 이렇게 농민들이 투입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시 당국에서 구린 일을 하는 데 경찰을 동원하면 대중이 공공연히 반발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조치였다. 고용된 농민들은 철모를 쓰고 기계장비를 들어내는 일을 했고, 지급받은 무기로 노동자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농민 용역깡패 500여 명이 30대의 트럭에 나뉘어 타고 공장에 투입됐다. 이는 정저우 시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한 사례에 불과했다.
 

  
  공장 안에 있던 노동자들이 누군가가 울린 벨 소리를 듣고 모두 쏟아져 나왔고, 농민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4시간이나 싸움이 계속됐다고 한 활동가가 말해주었다. 2001년 7월 24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날 싸움에서는 노동자들이 이겼다. 다른 여러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이 공장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달려온 덕분이었다. 이렇게 집결한 노동자들의 수는 모두 4만 명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8명의 노동자가 체포되고 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됐지만 다행히 법률의 도움을 받게 되어 이번에도 자본가들이 졌다. 한 노동자가 우리에게 개혁 이전의 시대에 노동자들이 보장받았던 권리들을 설명해주면서 말한 "우리의 법, 마오의 법"이 적용됐던 것이다. 이 노동자는 "너무나 많은 노동자들이 모였기 때문에 정부가 두려웠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민의 행동이 보여준 규모가 당국으로 하여금 잠시 머뭇거리게 했지만, 자본가들의 압력에 따라 당국은 다시 노동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법원을 우회하기 위해서인 듯 일반경찰이 아닌 공안경찰이 나서서 노동자들을 체포해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노동자들과 농민들 사이의 싸움이 열흘 간 계속됐다. 당국은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몰아내는 데 농민들을 동원했고, 공장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을 곧바로 팔아치웠으며, 5600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그런 다음 당국은 노동자들의 집을 포함해 모든 건물을 파괴했고, 공장 터는 사적인 토지개발업자에게 넘겨주어 그곳에 상점과 고급주택을 짓도록 했다. 이제 일자리도 집도 없어진 탓에 노동자들 모두 싸움을 계속하기를 두려워했다. 때때로 경찰이 경찰복을 벗고 스스로 폭력배가 되어 소유자계급, 즉 자본가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한 도기공장에서는 한 무리의 폭력배가 노동자들의 지도자 한 명을 때려 죽였다. 당국은 그들의 행동을 수수방관했고, 그 뒤에 이어진 항의도 묵살했다.
 

  
  이런 식으로 경찰은 물론 그 밖의 다른 정부기관들도 국유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직접 공격하거나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여러 부분들로 하여금 서로 적대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단합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험들로 인해 기존의 편견과 분열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전기장비 회사에서 일한다는 한 노동자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한 가족이 돼야 한다. 우리는 저들과는 싸워야 하지만, 우리끼리는 같이 일해야 한다." 노동자, 농민과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단기적인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공장 현장에 투입된 경찰의 책임자는 자기가 한 행동을 사실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도록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 노동자가 그에게 "당신은 개와 같다"고 말하자 그는 "그렇다. 하지만 내가 자네를 지금 물어뜯지 않으면 저들이 내 가죽을 벗길 것"이라고 대답했다.
 

  
  국유기업의 공장들이 사유화된 개발단지로 변하는 추세가 이런 분열을 갈수록 증폭시키고 있다. 사유화된 개발단지에 새로운 공장이 들어서기도 하지만 그런 공장은 대부분 필요한 인력을 농촌에서 구하고 있고, 그렇게 고용한 노동자들에게 주거시설이나 기타 편익을 전혀 제공하지 않고 있으며, 임금도 매우 낮은 수준으로만 지급하고 있다. 게다가 한 노동자가 말했듯이 미국에서와 달리 중국에서는 국유기업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은 서비스 직종의 일자리도 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자리에는 더 적은 임금만 줘도 되고 통제하기도 쉬운 농민들이 고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여건으로 인해 노동계급의 여러 부분들이 서로 같이 일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어도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서로에 대해 분노하고 적대할 수밖에 없다.
 

  
  이같은 분열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여러 부류의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 보다 폭넓고 더 높은 수준의 단합을 도모하고, 더 나아가 농촌에 남아있는 농민이든 도시로 이주한 농민이든 모든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 보다 긴밀한 연대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확산되고 있다. 정저우 시의 종이 공장, 직물 공장, 송전장비 공장 주위에서 일어난 시위들과 1997년에 이 도시에서 1만3천 명의 택시운전사들이 벌인 파업은 많은 기업과 부문들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지역사회 주민들과 더불어 사유화, 직장에서 누리던 편익의 상실과 실직, 세금과 공과금의 인상에 반대하거나 항의하는 대열에 가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국 전역에 걸쳐 이보다 더 보편적인 양상은 각각의 개별 공장 단위에서 노동자들이 고용주인 관리자들이나 그들과 결탁한 정부관리들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치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철길에 드러눕고, 고속도로의 차량통행을 막고, 관청을 에워싸거나 점거하고, 시민들을 위해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를 중단하는 등의 행동에 나서고 있고, 그 결말은 흔히 노동자들에게 소액의 돈이 더 지급되는 것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렇게 지급되는 돈은 노동자들이 생계유지를 계속해 나가는 데 충분한 정도는 결코 아니지만, 노동자들이 절박한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는 된다.
 

  
  상대적으로 고립된 형태인 이런 투쟁은 사유화, 실업, 그리고 그동안 누렸던 사회적 서비스와 생활보장의 상실을 비롯한 전반적인 여건 악화를 멈추게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정저우 안에 있는 여러 기업들의 노동자가 서로 연대하기 시작했다. 국유기업들 대부분이 문을 닫으면서 10만 명의 실업자가 생긴 카이펑에서도 노동자들이 성공적인 투쟁을 위해 더욱 폭넓은 연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카이펑에서 이미 실직한 다수와 아직 해고되지 않은 소수를 포함해 여러 공장의 노동자들이 기업별 대표자 모임을 갖고 공동으로 시위를 조직하는 등 실제로 단합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우리와 대화를 나눈 카이펑의 활동가들은 올해 후반기에 시 전역의 모든 공장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행동에 나서는 중국 노동자들
  
  그러나 그러한 단합된 행동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도시 무산계급 내부에는 아직도 경제적 분열과 세대 간 분열, 심지어는 정치적 분열도 아직 많이 남아있다. 이 때문에 도시 무산계급 중 일부는 '개혁정책'과 정부에 대해 좀더 지지하는 입장인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의 관점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가본 정저우 시내의 노동계급 거주지역 한가운데 있는 공원조차도 좌파의 구역과 우파의 구역으로 물리적인 구분이 돼있었다. 이 공원 중 일부 구역은 특히 낮 시간대에 우파인 노동자나 퇴직자들에 의해 장악돼있지만, 그밖의 다른 구역에서는 특히 밤 시간대에 좌파인 노동자나 퇴직자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매일 이 공원에 오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몇몇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험했던 바와 같이, 이곳의 토론은 얼마든지 가열될 수 있고, 심지어는 은근히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일종의 중간자적인 역할을 하는 가운데 노동자와 농민이 단합하게 될 것인가를 예상해보는 경우에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노동자와 농민이 서로 단합하고자 하는 뜻은 있지만, 삶의 여건과 정부의 처우에서 노동자와 농민 사이에 격차가 있다는 현실이 그러한 높은 수준의 단합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개혁정책의 영향으로 부의 역전이 부분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오늘날 중국에서 일부 농민들은 대다수 도시 노동자들보다 실제로 더 잘 살며, 이는 마오쩌둥이 지도하던 사회주의 시기의 상황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생존을 위해 애써야 한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빈곤한 농촌의 가정들이 가장 가난하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식량을 재배할 한 뙈기의 땅은 갖고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가난한 떠돌이 노동자들도 도시에서 더 살아나가기가 너무 힘들어지면 고향 마을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비숙련 도시 노동자들은, 특히 그 중에서도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진정으로 더 잃을 게 없다. 그들은 고전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처지로 전락해 생산수단에 접근할 길을 모두 차단당하고 외부로부터 그 어떤 종류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채 말 그대로 굶주림에 방치돼있다. 그들 중에 행여 병든 부모라도 있거나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보내야 할 아이라도 있는 경우에는 상황이 아주 절박할 수 있다. 도시 노동자들 중에서는 남들이 갖지 못한 기술을 갖고 있거나 어떤 종류이든 조그만 사업이라도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기 땅을 갖고 있는 농민들과 어느 정도 비슷한 여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두 계급이 실제로 단합된 행동을 하기가 어렵다. 종종 도시와 주변 농촌에서 거의 동시에 항의의 행동과 시위가 일어나곤 한다. 우리가 정저우와 카이펑을 방문했던 짧은 기간에도 이 두 도시의 내부와 외곽에서 그러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카이펑의 한 공장에서 20명의 노동자들이 체포됐는데, 바로 그날 인접한 농촌 지역의 농민들은 땅이 도로용지로 수용당하는 과정에서 기만을 당했다는 이유로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농민들의 행동에 대해 한 노동자는 "그들이 봉기해서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민들은 항의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관청 건물을 훼손했고, 고속도로를 차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은 서로 아무런 연관관계도 갖고 있지 않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이 한 자리에서 공동으로 항의시위를 벌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두 계급의 시위에 대한 국가의 대응에도 차이가 있다. 도시 노동자들은 지역 당국에 의해 특별히 강력한 탄압을 당한다. 도시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중의 눈에 더 잘 뜨이는데다가 도시에 있는 권력의 소재지를 뒤흔들 수 있고, 따라서 기업의 사유화와 새로운 자본가계급의 형성을 내용으로 하는 개혁정책의 심장부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한 노동자는 자기와 같은 사람들은 매우 분노하고 있다면서 "서로 단합해서 '항거'에 나서야 할 필요가 있지만, 중국은 미국과 달라서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돼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지만 자기와 같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그렇기에 투쟁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대규모 행동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행동은 때로는 지역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투옥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농촌의 삶의 여건을 개선한다는 것이 현재 중국 정부의 공식 정책이다. 하지만 농민들이 벌이는 시위는 대체로 대중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2005년 12월에 발전소 부지로 수용된 땅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지 못한 데 대해 항의하고 나섰다가 20여 명의 마을사람들이 사망한 광둥 성 둥저우 지역의 농민시위와 같이 대중의 시선을 끌 만큼 대규모로 일어나지 않는 한 농민들의 시위가 노동자들의 시위보다 오히려 더 잔혹한 탄압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런 분열과 장벽에도 불구하고 도시와 농촌의 노동계급이 서로 연대할 방법을 곧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왜냐하면 농민들의 분노가 점점 더 커지고 있고, 삶의 여건이라는 측면에서 농민들도 도시 노동자들과 비슷해지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들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생활형편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전체적인 조직화를 돕고 있는 활동가들이 노동자와 농민을 단합시키기 위한 운동을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운동은 이제 겨우 노동계급의 각 부분 사이의 골을 메우기 시작했을 뿐이며, 앞으로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로버트 웨일/미국 시민운동가,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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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왼손 : 미국의 공공병원

[이상한 제국의 앨리스](12) - Dr. Harris 위셔드 병원 대표와 담소

홍실이 

 

0. 제국을 위한 변명(?)

그동안 쓴 글들을 훑어보니, 제국이 좀 섭섭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래 뵈도 제국인데, 좋은 점이라고는 정말 하나도 없다는 거야? 그런 거야?’

‘아니, 뭐 꼭 그런 거는 아니고... 왜 좋은 점이 하나도 없겠어? 내가 좀 무심했나봐’

음, 그래. 이제 곧 정든(?) 이 곳을 떠날 텐데, 헤어지는 마당에 서로(?) 좋은 인상을 심어주자... 이런 따뜻한 동기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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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국의 공공의료 : 오해와 진실

미국의 보건의료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상당히 편차가 크다. ‘자유주의 경제사상과 시장원리가 활발히 작동하는...21세기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의료상(1)’이라는 주장에서부터, ‘그런 만신창이 보건의료 제도 하에서도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니!’하는 놀라움(ㅡ.ㅡ)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러한 상황 인식에 따라 미국적 제도의 수용에 관한 입장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 중, 보건의료의 공공성은 강화하면서, 미국의 장점인 시장의 효율성을 도입하자는 ‘좌파 신자유주의’ 정부의 주장은, 한쪽에 치우치지도, 과하지도 않은 ‘중용의 미덕’이자 실리주의의 모범처럼 들린다. 왜 그 좋은 걸 그동안 서두르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마저...

 

그러나,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여러 어르신들 - 마르크스에서 촘스키, 칼 세이건에 이르기까지- 의 말씀을 잠깐 떠올려보자. 한 사회의 보건의료 제도라는 것이 (좋던 나쁘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의 결과물인데 곶감 빼먹듯 장점만 살짝 가져다 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영리의료기관과 민간의료보험 제도가 의료서비스의 효율성과 경쟁력 증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지조차 매우 의심스럽지만, 백번 양보해서 ‘일단’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이 한국 사회에 바로 적용될 수 있을까?

 

미국의 보건의료제도가 시장 중심이라고 비판하거나 혹은 옹호하는 주장을 듣노라면, 미국에는 영리병원이 절대 다수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물론, 영리법인이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다른 선진국들과 구분되는 미국 사회의 특징이며, 그 비중 또한 분명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2003년 현재 지역사회병원(community hospital) 병상 중 영리기관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아직 14%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병상 중 84%를 민간이 소유하고 있으나(2), 민간=영리라고 말할 수 없으며 민간 병원의 대부분은 비영리 재단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림. 소유 형태에 따른 지역사회 병원의 수와 분포, 1980~2003년*

 
물론, 비영리 법인 설립이 금지되어 있는 한국에서야 모든 민간 병원이 비영리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역사성이나 운영의 개방성, 지역 사회 기여도라는 측면에서 이들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많은 민간 비영리 병원들은 공공 법인 형태로 주립/시립 병원들과 함께 지역사회 안전망 기능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 동네 케임브리지 병원(Cambridge Health Alliance, CHA)을 보자. 여기는 지난 1996년, 보스턴 강북 지역에 위치한 3개의 시립/민간 병원들이 합병하여 하나의 공공 법인으로 전환한 곳이다. 각 병원들이 설립된 연도는 1891, 1897, 1917년으로 백 년 이상 지역사회에서 기능을 해왔으며, 하버드 의대의 공식 수련병원이기도 하다. 또 다른 예로, 인디애나폴리스 시의 위셔드 병원(Wishard Health Services, WHS)은, 시 정부가 1859년에 천연두 치료를 위해 설립한 것으로, 남북전쟁을 전후해서는 군 병원으로 기능하다가 1866년부터 본격적인 지역사회 병원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물론 이곳도 인디애나 주립의대의 공식 수련 병원이다.

 

이들 공공병원의 특징이라면 무엇보다 ‘공공’ 병원으로서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서 예를 든 두 병원 모두 한 지역 내에서 백년 이상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왔으며, ‘우리 지역사회의 건강 증진’(케임브리지 병원), ‘권익 옹호와 지역사회 취약 계층 서비스에 대한 특별한 강조’(위셔드 병원)를 자신의 미션으로 표명하고 있다. 1980년에 설립된 전국 공공병원 협의회 (National Association of Public Hospitals and Health Services, NAPH)는 단순한 이익 단체라기보다, 공공의료와 사회 안전망 확보를 위해 활발한 권익 옹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위셔드 병원의 대표이자 진료부장인 Dr. Harris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아주 가까운 곳에 인디애나 주립대학 병원이 있는 데다, 시내에만도 큰 병원이 다섯 군데나 있다고 들었어요. 과연 공공병원으로서의 차별점이 뭐죠?

 

★ 인디애나 대학병원과 지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철학적 거리는 전혀 가깝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네요. 물론 연구와 진료 서비스의 질도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지역사회의 '사회안전망'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병원 수입의 구성비도 민간 병원과 큰 차이를 보이는 거죠. 병원 수입 중 민간보험을 통한 것이 12.7%,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12.7%, 시정부 보조가 40.7%에 이릅니다.

미국 내에서 의료보험이 없는 주민의 숫자가 15%에 이르는데다, 보험 상품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라 싸구려 보험일수록 급여 혜택이 형편없는 경향이 있으니, 이들 진료비 부담이 어려운 환자들은 공공 재원이나 자선에 의한 무상 진료(uncompensated service) 외에는 대안이 없다. 이러한 무상 진료의 규모는 미국 전체 병원진료비의 5.5%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 NAPH 소속 공공병원들이 담당하고 있는 비중은 20% 정도에 이른다. 말하자면, 이들 공공병원들은 시장 중심의 의료보험 제도에 희생된 서민과 빈곤층들의 최후 보루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 병원의 수입/지출을 비교해 보면 적자 규모가 엄청나던데, 어떻게 이런 구조가 유지될 수 있죠?
 
 

★ Mr. Livin (위셔드 병원, 재정국장) : 수입과 지출의 차이를 바로 적자라고 할 수는 없어요. 자, 여길 보세요. 진료비 수입과 예산을 비교해보면 1억 5200만 불의 부족분이 있죠? 이 중 90%는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나머지 10%는 보험은 있으나 경제적 부담이 불가능한 사람들의 진료비에 해당해요. 우리는 이걸 환자들에게 청구하지 않고, 카운티의 일반 회계로 충당하고 있어요. 환자들이나 보험회사로부터 직접 돈을 안 받는다 뿐이지, 균형 예산(balanced budget)을 유지하는 거지요. 여기 인디애나 주의 메디케이드 프로그램은 성인 빈곤층을 포함하지 않고 장애인, 노인 등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빈곤층은 자선이나 정부 지원에 의한 무상의료 서비스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요.

이들이 공공병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저소득층을 위해 경제적 장벽을 낮췄다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다수의 공공병원들은 의료 이용에서의 비경제적 장벽 극복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 지원은 물론, 지역사회 내에서 통합된 보건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테면 여기 소개된 두 병원은 사회적 소수자 (특히 소수 인종)의 접근성 향상을 위해 강력한 통역 (interpreter) 서비스와 다(多) 언어 표지판, 안내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위셔드 병원의 여성 위기 센터나 케임브리지 병원의 노인 응급 핫라인처럼 취약 계층에 대한 보건복지 통합 프로그램을 시행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동 진료소나 보건교육, 지역사회 보건센터(community health center) 운영 등을 병원 밖에서의 지역사회 활동에서도 상당한 평판을 얻고 있으며, (이를테면, 케임브리지 병원은 그 공로를 전국적으로 인정받아 Nova Award라는 상도 받았다) 수익성이 안 좋기 때문에 민간 병원들에서 기피하는 서비스 (예, 응급실, 화상 센터, 정신과 응급진료, 교정 시설 수감자 진료)를 제공하고 있다. 위셔드 병원의 행정실장인 Mr. Hayman의 이야기처럼, “교도소 환자들 진료는 우리 아니면 누가 맡아서 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이들 공공병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 이에 대한 지역사회의 평판은 어떨까?
 

 


☆ 한국에서는 공공병원이라고 하면 낮은 질의 서비스, 가난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 이런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편이예요. 미국도 그런 어려움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나요?
 

★ Ms. Harper (위셔드 병원, 인사/공보실): 여기도 그런 문제에서 완전 자유롭지는 않아요. 많은 병원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첨단 장비와 호텔 같은 서비스를 자랑하며 병원 홍보를 하는 게 현실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직접적인 홍보 전략보다 높은 진료서비스의 질을 강조하고 있어요. 특히 외상 센터(Level 1 Trauma Center)의 경우, 인디애나 주립 대학 병원도 갖지 못한 이 지역의 유일한 외상 센터인데다, 우리 병원의 화상 전문 센터 또한 인지도가 매우 높아요.

 

★ Ms. Young (CHA, 행정실) : 우리 상황은 어쩌면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일단, 하버드 의대의 수련 병원이라는 것이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고, 과거 시립 병원일 때부터 지역에서의 평판이 매우 좋았거든요. 어쨌든 지금도 시설 투자와 홍보를 통한 이미지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여기서 일하는 의사들의 경우 공공보건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열정 때문에 오는 경우가 많기는 한데, 대학의 수련 병원이라는 것도 양질의 의사인력 확보에 큰 장점이 되고 있죠. 우리는 교육/연구 활동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련 병원이라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양적/질적인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고급 의료 인력의 확보와 평판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NAPH 회원 병원의 80%가 교육 병원이고, 절반 이상은 전공의 수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메디컬 센터로서, 병원이 위치한 해당 지역 전공의 수련의 1/3을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공공병원들이 의학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한국과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19세기 말까지 의학 교육은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이론 교육이 중심이었으며, 병원이라는 곳도 빈민 구제소와 별 차이점이 없었기 때문에 중간 계급 이상의 진료는 대개 가정 방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20세기 초를 지나면서 근대과학의 혁신(과 전쟁을 거치면서 외상 치료에 대한 발전)에 힘입어 병원이 점차 빈민 구제소가 아닌 ‘치료 기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의학 교육에서 병원 임상 실습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의과 대학들이 자체 부속병원을 세우기는 어렵기 때문에 기존의 병원들과 협약을 맺어 임상수련을 실시하고는 했다. 하지만, 환자를 대상으로 ‘수련’을 한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잘 나가던 민간병원들은 수련병원이 되기를 기피했고 (세계적 명성이 드높은 브리검 병원조차 처음에 하버드 의대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공 병원들이 사회적 책임에 따라 그 역할을 맡고는 했는데(3), 이것이 오히려 나중에 공공병원의 큰 자산이 된 셈이다.

 
 
 

3. 진실은 저 너머에?

케임브리지 병원이나 위셔드 병원은 둘 다 미국 내에서도 예외적인 성과를 인정받고 있는 모범적인 공공병원들이다. 그래서 닥터 힘멜스타인은 이 병원들을 소개해주면서, ‘그러다 한국에서 미국 병원이 다 그런 걸로 오해하면 안 되는데... ’ 걱정을 늘어놓기도 했었다.

 

진실은 그렇다. 미국 사회의 공공병원은 혹독한 시장 질서에 희생된 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미약하지만) 최후의 보루이며, 이들은 많은 돈을 쏟아 부어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의 역사 속에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으며, 그러한 전통과 역량에도 불구하고 무한경쟁의 ‘의료 시장’에서 힘들게 분투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물론 공공의료=공공병원을 의미하지 않으며, 국민건강보험 제도에도 불구하고 공공지출이 OECD 국가들 중에서 바닥이라는 사실부터 지적해야겠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이야기를 ‘병원’으로 좁혀보자. 한국은 2004년 현재 전체 병상의 86%를 민간 부문이 차지하고 있으며 공공병상의 비중은 채 15%가 되지 않는다.(4) 이는 OECD 국가들 중에서 독보적인 기록이며 시장 중심이라고 흉보던 미국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그리고, 공공의료기관들도 사실 ‘공공’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이는 개별 병원들의 잘못이라기보다, 국가 공공보건의료체계에 대한 합의된 의제가 없었던 사회적 상황에 기인한 바가 훨씬 크다. 이들 공공병원들은 대개 의료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 민간 병원과 다름없는 치료 서비스에 중점을 두어 왔다. 하지만 의료 기관이 대폭 늘어나면서 이러한 역할의 중요성은 감소했고, 민간 병원과 시장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이 되면서 민간 병원 못지않은 수익성 추구에 나서고 있다.

 

한편으로는, 만성적인 의사인력 부족과 잦은 이동으로 인해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운 형편인지라, 건강보험 환자 수는 감소하고 의료급여 대상자나 저소득층 환자들이 주로 이용하게 되면서 ‘가난한 사람이나 가는 질 낮은 병원’이라는 오명까지 얻고 있다. 적자는 늘어나지, 지역 평판은 안 좋지, 재정자립이 취약한 지방 자치단체들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문제 아닌가.

 

의료기관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비영리 민간’ 병원들은 어떨까? 미국의 비영리 병원들도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너’ 개념이 분명한 한국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셔드 병원에서 의사들과 이야기하던 도중, 자동차와 휴대전화로 유명한 현대/삼성이 천 병상이 넘는 대형 병원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니까 이 양반들이 무척 신기해했더랬다.

 

더구나 개인 의원으로 시작해서 돈을 모아 병원을 키워 종합병원을 설립하고 심지어 나중에 의과대학까지 세우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니까 자기네들끼리 완전 쑥덕쑥덕... 내가 완전 허풍쟁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민간 소유라 해도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공공 법인의 성격을 갖게 되거나 종교 단체 등 자선재단의 성격을 가진 민간 병원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미국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 상황은 이렇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련병원들이 즐비하고,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양한 보건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온 미국의 공공병원들과 한국의 공공병원의 역량은 비교 자체가 어렵다. 한국의 민간 병원들은 현재 영리 기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이윤극대화 모형(profit maximization model)을 따르고 있으며,(5) 더구나, 허용만 된다면 민간 병원의 70%가 영리법인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6)

 

미국에서 영리법인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절대 규모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보건의료 시장 내의 이윤 경쟁을 격화시키면서 의료 서비스의 공익 개념을 후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취약한 공공병원 인프라와, 보장성 낮기로 악명 높은 건강보험 하에서 미국식의 시장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과연 어떠한 재앙을 초래하게 될지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공공의료를 강화하는 것은 ‘돈’만으로, 혹은 ‘불굴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병원 건립하고, 최신 기기 들여놓고, 대학병원과 자매결연 맺고, 지역사회에 봉사하겠노라는 현수막 걸어놓는다고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는 시간을, 경험을, 그리고 보건의료 인프라의 전반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 신자유주의’ 정부는 영리법인과 민간 보험도 도입하면서 공공의료도 강화할 것이라고 우겨대니, 도대체 이들의 발랄한 상상력을, 아니면 대책 없는 낙관주의를 비난해야 한단 말인가? 혹시 왼쪽 뇌가 하고 있는 일을 오른쪽 뇌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자(賢者)는 역사에서 배우고, 우자(愚者)는 자신의 경험에서 배운다고 했다.

 

‘좌파 신자유주의’ 정부가 미국의 경험과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기어이 스스로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뭐 본인들도 안타까운 마음이야 들겠지만, 정작 피 흘리며 쓰러질 이들은 우리들이니... 어쩌겠나. 우리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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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동안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참세상 독자들과 소중한 공간을 허락해주신 참세상 편집국에 감사드립니다.

In Solidarity! ¡En Solidaridad!
 

 



(1) 의협신문 2004. 1. 1. “미국의료와 자유의료”

 

(2) Kaiser Family Foundation, Trends and Indicators in the Changing Health Care Marketplace http://www.kff.org/insurance/7031/print-sec5.cfm

 

(3) Ludmere KM. Time to Heal : American Medical Education from the Turn of the Century to the Era of Managed Care.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4) 신영전. 미국 보건의료부문 영리화가 우리나라 일차의료에 주는 정책적 함의. 가정의학회지 2005;26(11) supple: s95-s108

 

(5)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보건복지부. “공공병원 확충방안 개발에 관한 연구” 2004.2

 

(6) 참세상 2006.4.13. “사회통제, 공공규제 철폐를 위한 자본의 침략” 참조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35885&page=8&category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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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재구성 되는지...

[이상한 제국의 앨리스](11) - 흑인 전용 심부전 치료제 BiDilⓡ의 탄생

홍실이 

 

1. 들어가는 말


며칠 전, 뉴욕 타임즈의 기업 면에 NitroMed 사의 임직원 두 명이 사임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회사 측에서 그 분명한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유일한 상품인 바이딜(BiDilⓡ)의 판매 실적이 예상보다 저조하기 때문인 것으로 기사는 추측하고 있었다. 이번 달 참세상 연재에는 도대체 뭘 쓸까 고심하던 중이었는데, 이를 보니 떠오르는 바가 있어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더랬다. (^^)


바이딜에 대해서는 이 연재에서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다. (3회차 참조). 이는 최초의 인종 맞춤약 (일명 ethnic drug)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지난 해 6월 미국 식품의약품 안전청 (FDA)으로부터 흑인(1)에게 특이적인, 그리고 흑인만을 위한 약제로 승인된 심부전(2)치료제다.

 

(믿거나 말거나) 한민족 단일 사회인 남한에서야 흑인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이 약이 관심거리가 아니겠지만, 바이딜의 탄생사에는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요소들이 있다.

 

물론, 드러나는 사실만 놓고 본다면, 바이딜은 참으로 기특한 상품이다. 미국의 흑-백인 간 건강 불평등 문제는 잘 알려져 있고, 더구나 기존의 심부전 치료법이 흑인들에게는 잘 듣지 않는다고 하니, 이 새로운 치료약이 건강 불평등 개선에 일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래서 임상시험 과정에는 ‘흑인 심장전문의 협의회(Association of Black Cardiologist, ABC)’가 참여했고, ‘흑인 의원 연맹(Congressional Black Caucus)’이 지지를 표명했으며, 지난 12월에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권운동단체인 ‘유색인종 지위향상협회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가 NitroMed사와 함께 ‘건강 정의를 위한 제휴(Partnership for Health Justice)’를 맺는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면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바이딜의 등장은 사회정의라는 가치와 의학이라는 객관적 학문의 행복한 결합 이면에, 과학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재구성되며, 그 재구성된 과학이 어떻게 현실의 지배 질서를 공고화시키는지 보여주고 있으니....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그림 1 NAACP와 NitroMed사의 제휴 상징 로고

 
 
2. 바이딜의 역사b

FDA의 승인이 이루어진 것은 작년이지만, 사실 바이딜의 탄생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즈음에서, 독자들에게 다소(!) 고통을 주더라도 이해를 돕기 위해 바이딜의 약리 기전을 잠깐 설명해야겠다. 앞서 설명했듯 심부전은 심장의 펌프 기능이 저하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치료 방법이란 심장 근육의 펌프 기능을 강화하거나 혈류량 혹은 혈관의 저항을 낮춤으로써 펌프질이 상대적으로 덜 힘들게 만들고, 각종 증상들을 완화시키는 것들이다.

 

바이딜은 Hydralazine과 Isosorbide dinitrate (이하 H/I)이라는 두 가지 혈관 확장제로 구성되어 있어, 주로 혈관의 저항을 낮추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성분은 각기 일반의약품으로 널리 쓰이던 것들이다.

 

심부전 치료와 관련하여 가장 획기적인 연구결과는 1980-85년에 실시된 V-HeFT (Vasodilator Heart Failure Trial) 1차 시험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때 H/I가 심부전으로 인한 사망률 감소에 다소 효과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통계적 검정력이 부족했다.

 

이를 확정하기 위해 1986-91년에 V-HeFT 2차 임상시험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는 H/I와 ACE-I의 효과를 비교했는데 후자의 효과가 월등한 것으로 나타났고, 그래서 ACE-I는 심부전의 1차 표준 약제로 인정되어 그 이후 널리 쓰이고 있다.

 

하지만 ACE-I에 잘 반응하지 않는 환자들이 있었고, 또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나는 환자들도 있어서, 이런 경우에는 대신 H/I의 사용이 추천되었다. 물론 이 두 번의 임상 시험에서 인종별 효과 차이 같은 것은 확인되지 않았었다.

 

1987년, V-HeFT 1차 시험의 결과가 논문으로 출판되었고 연구책임자 중 한 명인 Dr. Cohn이 울혈성 심부전의 H/I 사용에 관한 특허를 신청하여 1989년에 특허가 승인되었다.

 

하지만, H/I는 두 가지 모두 일반의약품이라 제약회사들의 관심을 그리 끌지 못했다. 그래서 1992년, Dr. Cohn은 복용이 쉽도록 이를 한 알로 만들어 BiDilⓡ이라는 상품명을 적용한 후 1995년 Medco Research, Inc.라는 생명공학회사에 등록했다. 물론 이 회사는 Dr. Cohn으로부터 지적 재산권도 확보해 두었다.

 

Medco사는 FDA의 신약 승인을 받기 위해 H/I를 각각 투여했을 때와 단일정으로 투여해도 그 효과가 같은지를 시험했고, 그 결과 1996년에 생물학적 동등성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는 1997년에 이루어진 신약 승인 심사에서 탈락했다. 심사위원회에서는 동등성 자체는 인정되지만, H/I의 효과 입증을 위해 인용된 V-HeFT 연구가 이미 20년 전의 것이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는 과학적 엄밀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 결과가 발표된 다음날 Medco사의 주가는 25% 폭락했고, Medco사는 바이딜 사업에서 손을 떼며 지적 재산권을 Dr. Cohn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연구자들은 V-HeFT 자료를 다시 이리저리 분석하던 중, ‘인종’간에 결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새로이 ‘발견’했다. 1997년에는 관련법이 개정되면서 임상시험 시 여성과 소수자를 포함하도록 권고하는 방안이 발표되었고, 마침 클린턴 정부는 Tuskegee 매독 연구(3)과 관련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발표했던 시점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인종 문제로 관심을 전환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99년에 Dr. Cohn은 V-HeFT 1, 2차 시험 결과를 인종별로 재분석하여 H/I는 흑인들에게, ACE-I는 백인들한테 더 효과가 있다는 논문을 출판하였다.

 

논문 출판과 같은 달, 보스턴에 위치한 생명공학 회사인 NitroMed는 Dr. Cohn으로부터 H/I와 관련한 지적재산권을 인수했으며 흑인 특이적 약물로 FDA에 승인을 신청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편 Dr. Cohn과 핵심 연구자들은 ‘흑인의 심부전으로 인한 사망의 예방과 치료 방법’으로 특허를 신청했으며, 이 특허권도 NitroMed에 양도함으로써 비로소 ‘인종 맞춤약’이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NitroMed가 V-HeFT의 인종 재분석 자료를 토대로 신약 인정 신청을 하자, FDA는 흑인에서의 분명한 효과를 입증하는 새로운 임상시험 자료를 제출하면 승인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하여 NitroMed는 2001년에 ABC와 함께 ‘자칭 흑인’ 환자 1천여 명을 대상으로 A-HeFT(African American Heart Failure Trial)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임상시험을 위해 벤처 캐피탈을 통해 3,140만 달러의 기금이 조성되었으며, 2003년에는 기업 공개를 통해 주식 시장에서 추가 자금이 조달되었다.

 

2004년 7월, 바이딜의 분명한 치료 효과가 확인됨으로써 예정보다 일찍 임상시험은 중단되었고 그 해 11월에 유수의 학술지에 그 결과가 출판되었으며(4), 2005년 6월, 마침내 FDA의 신약 승인이 이루어졌다.
 

 

3. 사회 속에서 재구성되고, 그리고 사회를 재구성하는 과학

이렇듯, 바이딜은 흑인들의 심부전을 치료하고자 고군분투하던 의사들의 열망과 치열한 연구결과가 만들어낸 소중한 결실이라기보다 이윤, 법, 사회정치적 정황이 만들어낸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카터 정부가 집권하던 1980년에는 학술연구의 상품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주요 법안이 통과되었다. 하나는 정부 연구소, 대학, 기업들 사이의 상호 협력을 장려하는 ‘기술 이전법 (Stevenson-Wydler Technology Transfer Act)’, 그리고 연방 정부 기금으로 연구를 수행한 연구기관들(이를테면 대학)이 그 성과물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한 ‘특허 및 상표권 개정안 (Bayh-Dole Patent and Trademark Law Amendment)’이 그것이다.

 

후자의 법에 의해 공공 기금으로 수행한 연구라 해도 그 성과물을 연구자 개인이 전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바로 이 덕분에 V-HeFT 연구자들은 지적 재산권을 확보하고 이를 기업에 매각할 수 있었다. 한편 V-HeFT 2차 시험 이후 추가 임상시험을 위한 연구비 확보가 어려웠던 이유 또한 지적 재산권과 관련 있는데, H/I 각각이 일반의약품이라 지적 재산권에 근거한 초과 이윤 창출의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복용하기 쉽도록 한 알로 만들어 새로운 특허를 인정받은 것은 매우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더구나 나중에 흑인에 대한 치료효과를 근거로 지적 재산권을 재획득한 것은 분자 구조의 변형이나 새로운 성분 추가 덕분이 아니라 기존의 시험 자료를 ‘재분석’함으로써 새로운 효과가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이를 통해 2007년이면 시효가 종료되는 특허권을 2020년까지 유효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죽어가는 의약품을 시장에서 살려낸 특허와 지적재산권이야말로, ‘탈리다 쿰’ 한 마디로 죽은 소녀를 일으켜 세웠던 예수의 권능에 비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기이한 탄생 비화와는 별도로, 흑인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약제가 개발되었다니 어쨌든 기뻐할만한 일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게 또 그렇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흑인과 백인의 구분이라는 것은, 피부 색깔의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를 제외한다면 생물학적으로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개념이다. 이를테면, 1980년대 초반, 루이지애나의 Phipps라는 백인 여성이 자신의 출생 기록부에 흑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걸 정정하라고 주 정부에 요청했다가 거부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던 사례가 있다.

 

주 정부 통계사무국이 그녀를 흑인이라고 기록했던 것은 ‘최소한 1/32의 흑인 혈통 Negro Blood이 섞인 사람은 흑인으로 규정’한다는 주 법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녀는 18세기 백인 농장주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조상의 후예이며, 전문가(?)의 분석 결과 최소 1/20의 흑인 혈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백인이고, 그녀 또한 백인으로서의 사회적 삶을 살아왔지만 그녀는 재판에서 패소했다. 이는 심지어(!) 피부색마저도, 인종 구분의 적절한 척도가 못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물며, 질병 발생이나 약물 반응과 관련하여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인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약물수용체의 분포나 대사반응은 ‘소위’ 인종 집단에서의 변이보다, 인종 내부의 개인들 간의 변이가 더 큰 것으로 입증되어 있다. 인종이란 철저하게 사회적/역사적 구성개념이며, 생물학에서 인종 개념이 부각된 것은 노예 제도의 합리화, 우생학의 득세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바이딜이 ‘흑인 전용’ 심부전 치료제라는 이름표를 달고 출현함으로써, 인종은 다시 ‘생물학적 실체’가 되고 말았다. 연방 정부는 FDA의 승인을 통해 ‘생물학적 실체’로서의 ‘인종’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의도적이던 아니던 간에) 현재의 흑/백 간 건강 불평등이 사회적/역사적 문제가 아니라 생물학적 문제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 되었다.

 

‘흑인 전용’ 약물이 가능하려면, 일단 객관적으로(!) ‘흑인’을 정의할 수 있는 생물학적 표지자 (biologic marker)가 존재해야 하고 이들 집단에서만 특이적으로 관찰되는 약물수용체가 확인되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두 가지 모두는 확인된 바 없다. 분명히, 기존의 치료약 (이를테면 ACE-I)에 잘 반응하지 않는 개인들이 존재하고 (자칭 백인과 흑인 모두), 바이딜에 잘 반응하는 유전적 특성을 가진 개인들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을 가려내기 위해 모든 심부전 환자들을 대상으로 약물수용체에 관한 유전적 검사를 실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마케팅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흑인 전용 치료제’라고 광고를 할 수야 있지만, ‘@#%&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 전용 치료제’라고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인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 않나... 결국 생물학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인종이 마케팅의 주요 대상으로 간택되었고, 그 과정에서 흑/백간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했던 사회적 바램들을 전유된 것이다. (기존 자료의 의도적인 왜곡 인용과 해석, 사회경제적 요인에 대한 부적절한 보정에 근거한 생물학적 차이 강조 등, 학술적 논쟁에 대해서는 참고문헌 참조)
 

 

4. 맺음말

오늘날, 과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가장 큰 힘은 이윤이며, 사회에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무수한 법적/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신약 개발과 관련하여 특허와 지적 재산권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한데, 제약회사들은 이를 통한 이윤 보상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연구 개발에 투자할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결국 환자들이 더 이상 신기술의 혜택을 볼 수 없게 된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전 세계 질병 부담의 18%를 차지하는 폐렴이나 설사 질환, 결핵 치료제를 개발하는데 지출되는 연구 개발비는 전체 보건의료 비용의 0.2%에 불과하다. 그리고 제약회사에서 거두는 수익의 34.4%가 판촉/행정 비용으로, 29.4%가 생산비로 지출되는 데 비해, 13.7%만이 연구개발에 재투자되며 23.6%는 이윤으로 귀속된다. 바이딜의 사례에서처럼, 수십 년 넘게 쓰이던 일반 의약품이 ‘신약’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특허와 지적 재산권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이러한 과학 자본의 세련된 확장 방식은 ‘정치적 올바름’까지 포섭하고 있다. 사회적 불평등의 역사 속에 자리한 흑인 환자들의 고통을 부각시키고, 흑인 의사회, 흑인 의원 연맹, 민권운동 단체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은 바이딜의 승인과 이후 마케팅 과정에서 무엇보다 강력한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재구성된 과학은 현재의 불평등이 사회경제적 문제라기보다, 유전적인 문제라는 불온한 환원주의를 확산시키면서 기존 질서를 공고화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래서?

레빈스와 르원틴의 이야기로 끝을 맺고자 한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는 과학의 상품화 이전 시대로 되돌아가자고 호소하기 위해 과학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상품화, 자본주의 생산 과정에의 전면적인 결합은 학술 활동을 위한 삶에서 지배적인 사실이며 과학자의 사고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것의 힘에 종속된 채로 남아 있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은 우리 부자유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각주

(1) 실제로 까만 인간은 없기 때문에 ‘흑인’이라는 표현은 어불성설이지만, 달리 ‘올바른’ 표현도 찾기 어려워 이 글에서는 그냥 흑인으로 지칭 (미국 사회도 아프리칸-아메리칸, 블랙 아메리칸을 혼용)
 

(2) 고혈압, 부정맥, 허혈성 심질환, 심근증 등으로 인해 심장의 펌프 기능이 저하된 상태. 피곤함과 체중 증가, 숨참, 다리나 발목이 붓는 등 비 특이적 증상을 보이며, 만성적인 경과를 밟지만 결국 5명 중 1명은 5년 이내에 사망하는 치명적 질환. 표준적인 치료로는 안지오텐신 전환효소 차단제 (ACE-I), 베타 차단제, 이뇨제, 강심제 등의 복합사용이 권장됨
 

(3) Alabama주의 Tuskegee에서 거의 40여년에 걸쳐 이루어진 매독의 치료방법과 자연사에 대한 연구. 시험에 참여한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동의를 받지 않았음은 물론, 페니실린이라는 효과적 치료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독의 자연 경과를 파악한다는 이유로 치료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진단명조차 숨겼는데, 참가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문맹의 흑인 소작농들이었음. 이는 연구윤리와 관련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끔 한 의학 연구사 최악의 스캔들 중 하나였으며, 흑인의 인권유린과 관련해서도 끔찍한 사례로 남아 있음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Tuskegee_Syphilis_Study)
 

(4) Taylor AL. et al. Combination of isosorbide dinitrate and hydralazine in blacks with heart failure. NEJM 2004;351:2049-57
 
 
 
 
 
 

참고자료
 

1. '2 Officials Quit Amid Slow Sales of Heart Drug for Blacks' New York Times March 22, 2006 (business section)
 

2. Barton JH, Emanuel EJ. The patents-based pharmaceutical development process: rationale, problems, and potential reforms. JAMA 2005;294(16):2075-2082
 

3. Correa CM. Ownership of knowledge - the role of patents in pharmaceutical R&D. Bulletin of World Health Organization 2004;82(10):784-790
 

4. Correspondence: Isosorbide dinitrate and hydralazine in blacks with heart failure. NEJM 2005;352(10):1041-1043
 

5. http://www.nitromed.com/index.asp
 

6. Kahn J. How a drug becomes 'ethnic': law, commerce, and the production of racial categories in medicine. Yale Journal of Health Policy, Law, and Ethics 2004;Ⅳ(1): 1-46
 

7. Lee K, Buse K, Fustuki an S. Health Policy in a Globalizing Wor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London 2002
 

8. Levins R, Lewontin R. The Dialectical Biologist.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85
 

9. Omi M, Winant H. Racial formation in the United States from the 1960s to the 1990s. Routledge. New York 1994
 

10. Sehgal AR. Overlap between whites and blacks in response to antihypertensive drugs. Hypertension 2004;43:566-572.
 

11. 'U.S. to Review Heart Drug Intended for One Race' New York Times June 13, 2005 (business section)
 

12. Wilson JF, et al. Population genetic structure of variable drug response. Nature Genetics 2001;29:265-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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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사회, 혁명운동 그리고 변증법

[이상한제국의앨리스](9/10) - Richard Levins의 세계

홍실이 

 

한 달에 한 차례 글을 올리기로 편집부와 철썩 같이 약속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난달을 거르게 되어 (별로 기다리진 않으셨겠지만) 독자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레빈스 교수의 쿠바 체류 때문에 약속 일정이 미뤄져서...

 

떨어진 신뢰 회복을 위해 이번 회는 양(!)으로 승부할 생각이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시고 스크롤 압박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

 

레빈스의 수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가 급진적 생태주의자이면서 (저야 잘 모르지만) 명성 높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글들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어렸을(?) 적 앵무새처럼 암기나 했던 변증법의 핵심 원리들이 저의 연구 작업과 세계 인식에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해야만 하는지를 깨닫고 새삼 놀랐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알게 된 그의 이력에도 놀랐고....

 

이번에 그를 만난 것은, 참세상 독자들에게 과학, 사회, 변혁 운동에 대한 ‘고수’의 이야기를 전해주고픈 마음과 더불어, 저의 연구 주제와 자기정체성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는 개인적인 동기가 함께 작용한 것입니다. 이전 글들에 비추어 볼 때 매우(!) 길고 다소(?) 딱딱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즐겨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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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열한 번째 테제로 살아가기(1)

레빈스는 미국 뉴욕 출신으로, 여성 실업자 평의회와 1930년대 뉴욕의 의류노동자 파업을 이끌었던 공산주의자 할머니, 1919년 청년 공산주의자 연맹의 창립회원이었던 아버지를 둔 3대째 공산주의자 집안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노동자라면 우주론, 진화,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어린 레빈스가 글을 깨우치기 전부터 마르크스주의 과학자들의 저작을 읽어 주고는 했다.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할머니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배우되, 그것을 모두 믿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으니, 1930년대 독일에서 비롯된 인종주의적 우생학과 이윤 착취에 복무하는 기존 학문의 위험성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레빈스는 노동절이면 학교를 빼먹고 존 리드 클럽이나 여성 평의회 등이 주관하는 행진에 참여했으며, 과학자이자 운동가가 되는 것을 인생의 당연한 행로로 생각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한 레빈스는 1950년대 한국 전쟁과 매카시 열풍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던 시절, 푸에르토 리코 출신인 아내와 함께 1951년 푸에르토 리코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그는 공산당 활동과 함께 농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FBI의 입김 때문에 대학에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선택한 삶의 방편이기도 했다. 중간에 4년 동안 뉴욕에서 대학원 학업을 계속한 뒤 푸에르토 리코에 돌아갔을 때에는 정치적 억압이 다소 완화되어 있었고 그는 ‘푸에르토 리코 대학’에서 생태학 교수 자리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 활동 - 특히 1965년부터 본격화된 베트남 반전 운동 - 은 계속되었고 1966년 종신 교수직 심사를 앞두고 FBI 끄나풀이 주도한 언론 공작에 의해 ‘무능함’을 이유로 재임용에 탈락하기에 이른다.

 

1967년 미국으로 돌아와 이후 시카고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직을 갖게 되었다. 한편 쿠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4년, 혁명 현장을 돌아보고 집단 유전학 개발에 자문을 하기 위해 쿠바를 방문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생태 농업과 생태적 경제 개발을 향한 쿠바의 투쟁과 노력에 깊이 관여해왔고 오늘날에도 이는 지속되고 있다.

 

학문적으로, 그는 변증법에 토대를 둔 진화생물학자로서 근대 서구 과학의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배격했을 뿐 아니라 합 목적론 혹은 기능주의적 진화론, ‘자연의 조화’라는 이상주의적이고 목가주의적인 생태 운동을 비판해왔다. 평생의 학문적-정치적 동지인 르원틴과 함께 『변증법적 생물학자(Dialectical Biologist)』(2)를 저술했으며, 절친한 동료였던 스티븐 굴드의 세계를 조망한 먼쓸리 리뷰(Monthly Review)의 ‘급진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평가에 따르면, 푸에르토 리코 독립 운동 참여를 통해 반제국주의자, 국제주의자로서의 자각을 얻을 수 있었고 이는 제국의 이해에 복무하는 학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부인의 날카로운 노동계급 페미니즘은 엘리트주의와 성차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으며, 쿠바와의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착취적인 사회에 또 다른 대안이 있음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연구실이 조만간 보수공사에 들어간다고, 배경이 영.. ㅜ.ㅜ 마스터 제다이의 풍모가 느껴지지 않는가? (요다 말고, 오비완 커노비)
 
 
 

1. 과학과 사회


★ 제가 미국에 와서 진짜 충격 받았던 게, ‘진화론 대 지적 설계론’ 논쟁(3)이었어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지적 설계론 가르친다는 나라는 지구상에 미국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요? 나중에 보니까, 미국인의 절반이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고 하던데, 이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이예요? 21세기에 이게 뭔 일이래요? (녹취한 걸 들어보니 막 따지고 있음 ㅡ.ㅡ)

 

☆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미국사회의 뿌리 깊은 반(反) 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를 들 수 있다. 미국에 처음으로 정착이 시작되었을 때, 이주자들은 대개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었고 상식과 근면한 노동만 있으면 충분한 살아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자본이 축적되고 은행이 생겨나고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이들 압제자들 - 교육 받은 동부 해안의 자본가와 은행가들, 그리고 지식인들 - 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강력한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두 번째로는 현재 미국의 우파들이 두 가지의 다른 커뮤니티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선 부유한 기업가 집단 - 이들은 진화론이나 낙태 문제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윤만 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정치적 기반 확대를 위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힘을 키워왔었다. 당혹스럽게도, 지금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 관련된 이야기인데, 현재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지형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참 난감해요. 우선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극렬 반대하잖아요. 여태까지 프로테스탄트 원칙이 자본의 이해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왔던 걸 본다면 참으로 기이한 일이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이 마치 인류를 질병에서 구원할 것 같은 엄청난 기대에다 이윤 창출의 노다지라는 생각 때문에 기업과 국가가 연구 개발에 왕창 몰려들고... 여기다 한국에서는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민족주의적 열기까지 더해져...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줄기세포 연구의 윤리문제를 비판하면 친미적 배신행위로 비난 받기도 했다니까요. 이런,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들을 어떻게 종합하고, 좌파 고유의 비판적 관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 이건 좀더 큰 문제, 과학의 근본에 관한 질문이다. 과학은 보편적이면서도 일국적이다. 어떤 측면에서 전체 인류를 위한 지식을 심화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관계를 가진 지식 산업의 산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 자체가 상품화되면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과학을 하는 상황이 출현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다른 상품들을 취급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과학을 다루고 있다. 상품은 일단 생산되고 나면 빨리 시장으로 이동해야 하고, 똑같은 이유로 과학에서도 이윤과 관련된 특허권을 빨리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결과를 날조하거나 과장하게 된다. 매년 출시되는 의약품의 1/3에서 절반이 유해효과 때문에 5년 내에 시장에서 퇴출되고 있는 현상은 이와 관련 있다. 5년 후에 퇴출된다고 해도 그 동안 이윤을 챙길 수 있다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그래서 과학에서의 부패는 제도화되어가고 있다.

 

또한, 과학자 자체가 프롤레타리아화되어 가고 있다. 기업들이 과학자를 학술 ‘인력’으로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18세기 영국의 직조공들이 경험했던 소외를 과학자들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은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기거나 자신을 노동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제 과학은 상품이 되었기 때문에 그 초점은 소유주의 관심에 따를 수밖에 없다. 모든 지식이 다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화학 살충제는 매년 농민들에게 팔 수 있지만, 함께 심음으로써 토마토를 해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작물은 매년 팔 수 있는 게 아니다. 책에 한 번 쓰면 끝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매우 불균등한 과학 발전이 일어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줄기세포 연구는 과거에 휴먼게놈 프로젝트처럼 모든 질병에 대한 치료를 가능하게 만드는 보증수표처럼 인식되고 있다. 급진주의자들은 이러한 모든 인기 영합주의를 거부해야 하며, 또한 과학을 과학 외부로부터 조종하려는 어떤 것도 거부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나는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허용을 지지하지만, 그게 모든 질병을 치료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과학 연구의 자유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언제나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워야 한다. 모든 것을 자료로 바꾸려고 하는 과학주의 (이를테면 비용-효과 분석), 그리고 또한 과학의 신비화에 대항해서 말이다. 현재 부시 정부는 이중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들은 과학적 근거 - 그들의 정치적 관점을 합리화시켜줄 과학적 근거 (이를테면 기후변화 문제가 결코 심각한 게 아니라는)를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신비화를 진행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지적 설계론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이 대두하고 있는 거다. 이는 우리의 싸움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과학을 방어하고 과학을 비판해야 한다. 또한 지식 산업의 상품화된 산물을 비판해야 하고, 과학의 의제를 변화시키려는 투쟁을 해야 한다.
 

 

★ 한국에서 최근에 있었던 스캔들은 알고 계시죠? 일단 진실이 밝혀지고 나니까 그야말로 무수한 학자들과 사회비평가들, 언론 매체들이 너나없이 우려를 표명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놓고 있어요. 대부분 동의하는 것은, 과학적 진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 이를테면 과학진실성 위원회(ORI)나 기관윤리심의 위원회(IRB)를 설치하고 강화하는 방법이죠. 한편 연구자들은 그동안 ‘진실 추구자’로서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손상 받은 데 대해서 크게 낙심한 거 같아요. 그래서 과학자의 양심과 자율성 회복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런 논의에 중요한 문제가 빠진 게 아닌가 싶어요. 우선, 전문가 위원회 말고, 과학 생산 과정에 대한 대중이나 과학기술 노동자의 ‘사회 민주적 통제’에 대한 고려가 없어요. 또, 세분화와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고 있는 학술 노동의 소외와 분절화를 어떻게 다룰 건지도 이야기가 전혀 없구요. 사실 이거야 말로 과학사기를 가능하게 하는 좋은 토양 아닌가요?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체계에 의해 조건 지워진 연구자들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학이 정치나 이데올로기, 사심어린 이해의 ‘나쁜’ 영향으로부터 떨어져 홀로 설 수 있다는, 이건 그저 신화 아닌가요?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좌파적 대안은 어떤 게 되어야 할까요?

 
 

☆ 우선, 대학 연구로부터 이윤을 획득하는 구조부터 없애야 한다. 과학자들이 연구비를 받지 않고도, 특허를 획득하지 않고도,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상품과는 무관한 장기적인 지적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학문적 자유의 기반이다. 기업이나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자율성을 유지해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정년 보장 교수라고 해도 대학원생들을 지원해야 하는 문제가 남고, 또 학생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첨단유행의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믿지만, 어떤 분야가 유망할지는 다른 이들이 이미 결정해 놓은 것들이다.

 

☆ 또한, 과학 내부에서, 환원주의를 극복하는 의제들을 스스로 요구해야 한다. 환원주의적 접근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DDT로 말라리아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몇 년에 불과했다. 모기들이 금방 저항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항생제의 개발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세균이 그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틀렸는지, 왜 실수를 저질렀는지 살펴보면, 환원주의적 틀에 따라 문제를 너무 협소하게 제시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의사들은 수의학자나 농학자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염병의 재창궐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식물, 야생 동물, 가축에게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지적 협소화는 과학의 상품화가 가져온 결과 중 하나다. 학생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많은 등록금을 내야하고, 이걸 빨리 보상할 수 있고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학문 분야를 공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중 운동이 학술 연구의 의제를 상당히 변화시키기도 했다. 이를테면, 지역사회 여성들이 자녀들이 비슷한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연구자들에게 조사를 요구하기도 했고, 소수인종 그룹이 자신의 동네에 버려지는 유해 폐기물들과 질병 발생의 관련성에 대해 연구를 요구하기도 했다. 환경 운동과 건강권 운동은 기존의 학문들이 정립해놓은 경계를 넘어서는 연구들을 요구했으며 때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특히 정치정당과 밀착해 있을 경우에는...

 

☆ 우리는 좌파 정당들이 협소한 현실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지적 독립성을 발전시키는 방식에서 진정 민중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과학 발전의 의제를 그들의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도록 요구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앞서의 답변 - 과학은 보편적이면서도 일국적이라는 명제로 돌아가게 된다. 모든 관점과 위치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모든 위치는 자체의 통찰력과 무지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며, 우리는 우리의 과학이 어떤 측면에서 통찰력이 있고 어떤 점에서 무지한지 자문해야 한다. 농민들과 함께 일해 보면 주변 환경과 경험에 대해 그들이 매우 상세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비교에 근거한 지식, 눈으로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다.

 

내가 쿠바에서 배운 것을 예로 들어보자. 그 곳에는 농민들 왈, 나무들이 바람 쪽을 향해서 자란다는 계곡이 있다. 그런데 식물생리학에서는 바람이 잎을 마르게 하기 때문에 그 반대편으로 더 잘 자란다고 나온다. 실제로 그 계곡에 가보면 정말로 나무가 바람 부는 쪽을 향해 자라고 있다. 태양광이 비치는 곳과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같은 방향인데, 태양의 효과가 바람의 효과보다 크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자, 보자. 현지 주민은 보다 정확하고 상세한 관찰을 했지만, 일반화에는 약하다. 하지만 우리처럼 외부에서 추상적 과학을 통해 접근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구체적 사실에는 어둡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호 이해를 위해 함께 작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일반성과 특수성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과학은 일반화를 할 수 없다. 또한 다른 사회적 목표는 다른 종류의 요구를 낳고 연구 의제의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는 대안적인 에너지 생산에 보다 관심이 많을 것이고, 미국처럼 땅이 넓은 나라는 광범위한 농업생산에 대한 전략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지형의 농업 문제는 한국 농업학자들에게 중요하지, 북미 학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보편적인 지평을 포기하지 않고도 사회 고유의 맥락과 과학적 전통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 중 하나는, 대부분의 학술 출판이 몇몇 중심 저널이 주도하는 영어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경력을 만들기 위해, Lancet 같은 저널에 출판하기 위해 실제 요구와는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쿠바에서 논의한 것 중 하나가 라틴 아메리카의 고유한 독립적인 학술 저널을 출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좌파 정당들은 우리의 개발이 경제적인 발전과 함께 지속가능한 것이어야 함을 주장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의 개발이,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우호적이면서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질병들이 노동현장과 관계있다. 특정한 화학물질이 암을 발생시킬 수도 있지만, 노동의 조직화 방식 자체가 질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노동자가 책임만 무겁고 자율성이 부족한 상황은 불안과 심장병을 일으킬 수 있고, 무관심, 우울, 자살률과도 관계있다. 한국에는 아주 놀라운 경제적 성과를 보여준 기업들이 많이 있다. 개발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복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좌파 정당이라면 어떠한 것이 진정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과학적 의제가 되어야 할지 정해야 한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공동 노력에 의해 태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한 번은, 캐나다에 육가공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퀘벡 대학의 연구자들을 찾아가 손에 사마귀가 많이 생긴다고 털어놓으면서 이 원인을 좀 밝혀 달라고 했다. 부탁을 받은 연구자들을 당신들을 ‘위해’ 연구할 수는 없다 - 다만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갈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육가공 사업장에서는 장갑을 끼고 일하는데 그 장갑들은 손상을 예방하기 위해 금속섬유로 강화처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장갑이 꼭 맞지 않으면 오히려 장갑이 손에 찰과상을 일으킬 수 있고 그로 인해 바이러스 감염이 쉬워진다. 이런 공장의 실온은 매우 낮고, 그러면 피부 표면의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고 면역 체계가 약화된다.

 

이렇게 두 가지 요인이 합쳐져 감염이 쉽게 일어나고 특히 냉동 육류를 다루는 노동자에게서 이런 문제가 빈발하고 있었다. 함께 공동의 노력을 기울였을 때에만 특정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민중 운동이, 노동 운동이 과학 의제를 정하도록 해야 하고, 과학은 그 스스로의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학술 운동과 대중 운동, 노동운동의 결합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해요. 그런데, 존 스노우 연구소(4) 같은 경우만 해도, 처음에는 지역 주민들의 참여에서 비롯되었지만 현재로서는 별 차별성 없는 전문 컨설팅 회사로 변해 있잖아요.(5) 한국에서도 지역사회에 토대를 둔 참여연구센터 운동(6)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 어떤 종류의 보호 장치를 마련할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선, 비전문가를 의사결정기구에 포함시키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이 직접 참여 했을 때 문제점은 그들이 측정한 자료들의 신뢰도가 낮고 기술적 오류의 가능성도 높다는 점이다. 하지만 장점이라면 이들이 서식지(habitat)의 좀더 폭넓은 상황, 역사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며 이는 전통적인 역학자들이 갖지 못한 것이다. 과학자와 지역사회 주민들이 실제 운영위원회에 포함되고, 노동조합들이 여기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또한, 기업과 연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독립적인 재원조달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 중 하나는 정부가 이러한 자율적 연구기관들을 지원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자율 대학 지원을 위한 고정예산 편성 촉구 운동이 있었다.

 

예산의 일정 분율을 확보해놓으면, 정치인들이 어떤 대학이나 어떤 연구에 지원할지 결정하는데 영향을 받지 않아도 된다. 이런 것을 독립 연구소에도 적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게 쉽지는 않다. 예산은 언제나 빠듯하고 기업의 연구비를 받으려는 유혹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대목에서는 강력한 헌신과 결의가 필요하기도 하다. 특히나 연구 결과가 특정 기업의 상품과 관계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연구 윤리에 관해서라면 개인의 결단도 중요하지만 집단적인, 조직적인 동의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독립 연구 센터들은, 주민의 불만이나 요청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해야 한다. 저널리스트와 학자로서의 결합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소리다.
 
 

 

★ 근데, 여기 미국에도 노동조합 형태의 학술 연구자 조직이 있나요? 한국에는 과학기술 노조가 있는데... (사실, 영문 이름이 기억 안나 대충 얼버무림 ㅡ.ㅡ).

 

☆ 노동조합은 아니지만 핵무기 확산에 반대하여 세워진 의사들의 조직 Physicians for Social Responsibility, MIT 출신 연구자들이 닉슨정부의 군사 프로그램에 저항하면서 설립한 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대학의 군사연구 지원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던 ‘Science for the People’ 등을 들 수가 있다. 과학 산물의 이용과 관련하여 과학자와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를 통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누가 과학자가 되느냐’도 중요한 문제다. 쿠바가 강력한 과학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시민 전체가 인재 모집의 원천이 되었다는 점이다. 무상 교육에, 인종 간, 성별 간 차별을 극복하면서 누구나 과학자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 사회의 구성이 바뀌어, 흑인이, 여성이 지도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게 되었다.

 

내가 속한 (쿠바) 기관과 연구소들만 해도 여성이 대표로 있거나 비중이 절반이 훨씬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과학자는 일부 기득권 계층 출신인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자신의 출신 배경에 따른 정치적 태도를 가지기 마련이다. 형제 중 한 명은 의사요, 하나는 농장 소유주, 또 다른 형제는 상원의원...
 

 

★ 맞아요. 한국에서 지금 바로 그런 문제가 벌어지고 있지요. 대학 등록금은 자꾸만 비싸지고, 교육이 계급을 영속화시키는...

 

 

 


2부 : 쿠바 이야기


★ 요즘에도 매년 겨울마다 쿠바에 가시잖아요?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신지 좀 소개해주세요.

 

☆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생태 농업으로의 이행을 성공시키기 위한 작업을 농림부와 함께 진행 중이고, ‘생태 및 시스템 연구소’에서 생물다양성 보존을 개발 전략의 일환으로 확립시키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 하바나 대학의 ‘건강과 안녕 센터’에서 보건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그 밖에 ‘열대의학 연구소’, ‘복잡성과 변증법을 위한 철학 연구소’에도 관여하고 있다. 서로 동떨어져 보이지만, 이들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모두는 사회주의적 개발 (socialist development)을 의식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드는 전체 전략의 부분이다.
 

 

★ 쿠바의 ‘생태적’ 개발 성공 사례는 유명한데... 사실, ‘환경’이니 ‘지속 가능성’이니 하는 것들은 선진국들한테나 해당하지 당장 먹고 사는데 급급한 개발 도상국가들한테는 요원한 이야기로 들리잖아요. 쿠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또,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떤 게 있었나요?

 

☆ 쿠바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계급 갈등이 아니라 비전의 차이 때문에 투쟁이 벌어졌다. 어떤 식의 발전을 할 것인가? 쿠바에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성공을 거두려면, 완수 가능한 임무가 주어져야 한다. 성취 불가능한 요구는 당혹과 절망감만을 낳을 뿐이다. 당시에는 지식을 축적하고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매우 급박한 문제였다. 쿠바사회의 무지와 비효율, 경직성은 굉장히 심각했다. 러시아에서 원조 물자로 타자기 리본을 대거 보내줬는데,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읽을 줄 몰라서 이걸 파자마 고무줄로 사용했다. 또 농림부 관료가 봐달라고 해서 가보니 독일로부터 들여오는 종자가 사실은 농사용이 아닌 빵 만드는 재료인 적도 있었다. 우리가 회의석상에서 DDT의 건강 유해성을 문제 삼으니까 한 사람이 일어나서 소련에서도 만드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진정한 변화가 필요했다.

 

정치의식이 일정 지점에 이르렀을 때 이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지적 자원이 필요하다.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는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필요는 절박감을 낳고 이는 때로 지름길을 쫓다가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필요’와 ‘훌륭한 생각’이 만났을 때만이 긍정적인 변화를 낳을 수 있다. 소련과 유럽의 사회주의 정권이 망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대안적 농업개발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쿠바에서 생태혁명이 가능했었던 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소련의 패망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필요’보다, 그동안 내부에서 발전 전략을 두고 투쟁하며 준비해왔었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들이 쿠바의 보건의료 시스템의 성과에 놀라워하죠. 더구나 최근에 베네수엘라의 보건 프로젝트인 ‘바리오 아덴뜨로’ 사업을 지원함으로써 또 다른 찬사를 얻고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미국 웹 사이트를 찾아보니까, 쿠바 보건의료 체계의 ‘진실’을 폭로한다는 것들이 꽤 있더라구요. 질 높은 의료 서비스는 다 외화벌이를 위한 거라서 외국인 환자들만 이용하고 일반 시민들은 이용할 수 없다더라. 공공 보건의료 기관들은 기본 의약품도 없고, 진짜 끔찍한 수준이라더라 등등... 전형적인 미국의 악선전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본다면 우리(?)도 너무 긍정적인 부분만 바라보고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쿠바 보건의료의 실체, 성공과 실패를 이야기해주세요.

 

☆ 어디에나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과에 대한 통계들을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 체계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고 현재도 문제 개선을 통해 꾸준히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의약품 부족 같은 문제는 분명한 사실이다. 무역 봉쇄조치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현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필요한 의약품이 1천이라면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것은 겨우 5-600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쿠바 의료 시설의 일정 부분은 의료 관광객을 위해 쓰이고 있다. 어떤 병원은 10%의 병상을 여기에 할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 10%가 병원 전체를 먹여 살리고 나머지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할 수 있는 재원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 의사들은 어떤가요? 베네수엘라 같은 경우 의사들이 바리오 아덴뜨로 사업에 반대하고 참여도 안 하잖아요.

 

☆ 상황이 다르다. 혁명 당시 30%의 의사들이 쿠바를 떠났다. 남아 있는 의사들은 사회에 대한 헌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교육을 받은 새로운 의사 세대가 성장하고 있지 않나. 많은 의사들이 돈을 버는 것 보다 사회적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쿠바에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의사들이 대부분 수도 하바나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교육과 수련 과정에서 오지나 빈곤 지역에서의 활동을 경험하고 있다. 의학 교육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세계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이해, 자연, 문학을 포괄하는 기본 교육과 함께 의학 윤리 교육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 한국 같은 경우 의사들이 대개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 ㅡ.ㅡ

 

☆ 쿠바도 옛날에는 그랬다. 지금은 아니지만.... 베네수엘라의 경우에도 지금 쿠바와 New Medical School에서 새로운 의학교육이 진행되고 있으니 10년 안에 수천 명의 젊은 의사들이 배출되고 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구세대 의사들은 결단을 내려야할 것이다. 미국의 마이애미 부촌으로 옮겨가서 개원을 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변화를 인정하고 자국에 남아 있을 것인가.
 
 
 
 
 

 

3. 삶과 운동


★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미국에서, 그리고 이 하버드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이었나요?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 내 평생, 한 번도 학계에서 흔히 말하는 ‘성공적인 이력’을 열망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정체성을 학계의 공식적인 보상과 인정 체계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고, 교수 사회의 상식을 공유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이것은 나에게 폭넓은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 1974년 국립학술원 (National Academy of Science) 회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베트남 전에 대한 학계의 협력을 비판하며) 이를 거부한 것도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그리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저 정치적 결정이었을 뿐이다. 또한 나는 정치적으로 항상 소수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려면 학계 외부에 급진적 커뮤니티를 갖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대학에서도 의견을 함께 하는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버드의 S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원자론적 환원주의에 함께 반대했고, D의 경우 공해의 건강 영향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고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통합하려는 N과도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특히 T같은 경우 그녀의 지나친 민족주의적 성향만 뺀다면 과학과 정치에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과 따뜻한 인간적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관계들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너도 대학 사회에서 누군가와 모든 면에서 견해가 일치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가지려고 할 필요는 없다. 만일 어떤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면, 왜 그렇게 느끼는 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걸 왜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또한 네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분명한 인식을 하고 이를 헤쳐 나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나도 학교에서 인간 생태학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보수적인 철학적 지향, 원자론적 환원주의에 대한 선호, 정치적 보수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대학의 원칙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 자체를 바꾸는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기본적으로, 하버드는 지배계급의 기구다.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지만,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는 사람들을 ‘어떻게’ 죽이는지 가르치고, 하버드는 ‘누구를’ 죽여야 할지 가르친다고 한다. 대학의 경우 교원을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한다.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이해득실을 따진다. 연구 성과가 좋거나 교육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면 정치적 문제를 좀 일으키더라도 문제 삼지 않지만, 그 수위가 점점 높아져 정치적 긴장이 심화되면 이를 다시 고려하기도 한다. 안정된 상황에서라면 다양성을 가진 게 학교의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50년대 매카시 광풍에도 하버드는 극소수의 교수만을 해직시켰다. 내가 하버드에 처음 왔을 때, 마침 경제학과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쫓아낸 참이었다. 아마도 대학 당국이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정치적 관점이 별 문제가 안 될 걸로 생각했던 거 같다. 당시 진화생물학 분야를 이끌었던 우리 셋 - 나, 스티븐 굴드 (Stephen J Gould), 르원틴 (Richard Lewontin) - 모두 마르크스주의자 아니었나.
 
 

 

★ 요즘 한국의 진보 운동은 매우 힘든 시기를 맞고 있어요. 뭐 제가 이러쿵저러쿵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가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지요....

 

☆ 우리에게 주도권이 없는 시기, 혁명주의자들의 주된 임무는 의식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진 이념은 서로를 강화하면서도 모순하는, 개념의 전체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건 이념뿐 아니라 느낌에서도 마찬가지다. 토론을 통해, 경험을 통해, 그러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이에 대한 도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베트남 전에서 고엽제의 위험성 문제를 제기했을 때, 미국 정부의 첫 번째 반응은 그저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힘들어지자 전쟁 자체가 비극이고, 양쪽 모두의 잘못이라고 둘러대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것마저 먹혀들지 않자 우리의 과실(mistake)이라고 인정했는데, 이들이 인정한 것은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지 전쟁 자체가 아니었다. 이 문제는 현재 이라크 전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군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학대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 상황에 처하면 너희라고 다를 줄 아냐고 발을 빼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적군이고 아군일지 알 수 없는 전쟁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도시 자체를 점령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이거는 분명 잘못된 전쟁이다. 전쟁이 저지른 잘못의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전쟁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의식을 전환시켜야 한다.

 

특히 좌파에게 마르크스주의 교육은 굉장히 중요하다. 문제는 교조적인 슬로건화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전 세계 좌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에 각자 다른 방식으로 끌어들여 해석하고 있다. 또한 이런 시기일수록 운동의 방식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저항이 폭력적일수록 급진적인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자포자기의 행동일 수도 있다. 어떤 계획을 세울 때, 과연 우리가 지지를 끌어내고자 하는 대상, 우리의 상대편, 그리고 우리 운동 내부에서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우리의 행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인가 비판적으로 성찰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운동을 건설해야 하며, 엄격한 국제주의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과거에 걸어온 길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과오를 이해할 때만이 이를 피할 수 있다. 운동이 열망하는 바와 실제로 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어왔다. 기독교인들도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 왜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서 듣는 이야기를 주중에 실천하지 않을까? 우리 급진주의자들은 여기에 더 나은 답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변증법적 유물론자로서 과거로부터의 유산 - 우리 자신을 포함한 - 을 가지고 미래를 건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건설하려고 하는 사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며, 우리 삶을 이에 따라 미리 형상화하려고 하지만 완벽할 수는 없다. 내가 처음으로 공산당 활동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공산당 활동을 하는 건 좋은데 ‘공산당’과 ‘공산주의 사회’를 절대 혼동하지 마라. 만일 당이 공산주의적 삶을 보장해준다면, 굳이 혁명이 필요 없을 거다. 이미 자본주의 안에서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소리 아니겠냐!”

 

또 다른 중요한 원칙은 민중에 대한 정직성을 그 어느 순간에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혁명 운동의 장기적 목적은 결국 민중의 역량을 강화하고 그들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인 정치적 이득을 위해 대중 조작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노조 총회에서 정치적 분파들끼리 특정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얼마나 싸우나. 하지만 많은 경우, 평 조합원들한테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도 하고, 지도부와 평 조합원 사이의 간극, 냉소주의를 조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현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전체 노동계급이 스스로 통치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꿈꾸지 않는가? 그것은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바보가 되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사람들 모두에게 해롭다.

 

쿠바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전국 의회에서 무언가를 의결한다고 할 때, 이는 이미 지역 공동체와 조직에서 수많은 논의를 거친 것들이다. 그래서 최종 결정 단계에서는 그리 큰 논란이 벌어지지 않는다. 한 번은 생태학자들 모임에서 내가 ‘외계인이 우주선을 타고 와서 내려다본다면, 여기가 사회주의 국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했더니만 답변이 ‘모든 사람이 다 회의에 가 있는 거 보고 알지’였다. 모든 운동은,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고 성공적이든 상승과 하강 국면이 있기 마련이다. 상승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강기에 얼마나 더욱 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운동의 힘이 약한 시기에 일어나는 가장 큰 논쟁 중의 하나는 제휴 (coalition) 문제다.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이냐... 만일 우리가 어떤 제휴에 대해 완벽하게 만족한다면, 그건 그 제휴가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휴 내에는 반드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공통의 기반을 찾고,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서 상호작용하고 서로 배워야 한다.

 

내가 비록 무신론자이기는 하지만, 평화운동의 상당부분이 종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유물론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전통적으로 영국의 정치경제학, 프랑스의 사회주의, 독일의 철학을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이라고 이야기했다면, 오늘날의 혁명 운동은 생태운동, 민족해방운동, 페미니즘에서 그 자양분을 얻고 있다. 운동은 이러한 생각들에 개방되어 있어야 하며 서로 제휴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운동에서 변증법적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 네....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쿠바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자세하게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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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 읽느라 지친 독자들을 위한 보너스

 

레빈스의 진짜 매력은 평생에 걸친 이런 이론적, 실천적 단호함과 어려움 속에서도 풍자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점! 이사도르 나비 (Isadore Nabi)라는 가공의 과학자를 만들어내서 그럴 듯하지만 황당하기 그지없는 궤변을 늘어놓아 학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풍자 넘치는 편지글과 광고로 사람들에게 지적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 중 하나, 이사도르 나비 인력회사의 모집 공고를 일부 소개한다.

 

“우리 회사의 과거 성공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나자렛 출신의 10대 미혼모를 탁월한 신앙 드라마의 주연으로 만든 것. O. bin L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비정부 기구의 대표로 채용한 것. 텍사스 기름 장수의 그저 그런,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맹한 아들을 위해 일류 일자리를 찾아준 것. 우리 회사는 현재 역사상 가장 도전적인 과제에 직면해 있는데, 바로 UniverseTM의 새로운 지적 설계자를 찾는 것이다...”

 

이사도르 나비 인력 회사의 모집 공고
 
 
 

 


(1) 2005년 7월, 캐나다에서 열린 ‘생물학의 역사, 철학, 사회학 국제 학회’에서 발표한 글의 제목 -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째를 지칭한다(‘철학자들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2) 먼쓸리 리뷰 서평 참조:http://www.monthlyreview.org/0505clarkyork.htm

 

(3) 진화론은 그저 하나의 이론(theory)일 뿐이기 때문에 대안 이론(alternative theory)도 가르쳐야 한다면서, 일부 지역의 교육위원회에서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을 생물시간에 가르치도록 하여, 재판 붙고 난리 났던 사건 (현재 진행형!). 지적 설계론의 옹호자들은 진화 자체는 인정한다면서, 다만 생명체라는 것이 너무나 오묘해서 우연히 발생하는 진화의 결과라기보다 무언가 고도의 우월한 존재가 설계한 진화의 경로를 따라온 것이라고 주장. ‘창조론’이라는 이름을 버림으로써, 종교가 아닌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과학자들 - 특히 진화생물학자들은 완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

 

(4) 존 스노우(John Snow)는 19세기 런던 콜레라 대유행 당시, 역학 조사를 통해 오염된 상수 공급이 콜레라 발생의 원인이라는 걸 밝혀낸 역학계의 전설적(!) 인물. 1970년대, 매사추세츠 워번 지역 주민들은 어린이의 백혈병 발생률이 유난히 높다는 걸 자각하고 그 원인을 규명해달라고 국립보건원과 질병통제센터에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하버드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자체 역학조사를 수행, 기업의 폐기물에 의한 식수원 오염이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소송을 통해 피해보상과 함께 관련 법규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이 활동에 참여했던 연구자들과 주민들은 전설적인 존 스노우의 이름을 딴 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연구소 홈페이지: http://www.jsi.com/JSIInternet/ )

 

(5) (부시 행정부의 아프리카 의료 인프라 지원 사업에는 Lockheed Martin, Northrup 같은 군수회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는데, 존 스노우 연구소가 Northrup과 손을 잡았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음)

 

(6)시민참여연구센터 (홈페이지 :http://www.sciencesho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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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홍실이의 이상한제국의앨리스](8) - 짧은 토론토 방문기

홍실이 

 

볼일이 있어서 지난 주 캐나다 토론토에 다녀왔다. 이전에 학회 때문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학회장에만 있었던지라(범생!) 다른 곳은 둘러보지 못했으니 사실 처음 방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근데.... 참으로 놀라운 것이, 겨우 1년 남짓 미국 물 좀 먹었다고, 미국과 다른 점들은 모두 신기하고 낯설게만 보이는 거였다. 그래서 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한국 돌아가면 욕먹기 십상 아닌가.

“어, 미국은 안 이런데?”
“뭐시라? 누가 보면 미국서 한 10년 살다 온 줄 알겠다? (...진짜 재수 없군...) ”

아니, 이럴 수가....

어쨌든, 별 사소한 것이 신기했는데... 이를테면, 지하철을 타러 가서 ‘깜짝’ 놀랐다. 우선, 지하철이 멀끔하다는 점에 놀랐고, 승객들이 조용한 데 놀랐으며 (미국 사람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떠들어 대는 모습을 보노라면, 한국의 입바른 아저씨들이 그리워진다. “거, 지하철 전세 냈어? 조용히 좀 합시다!”), 지하철 역 내에 분리수거 쓰레기통이 있다는 사실에 ‘진짜’ 놀랐다.

 

내가 살고 있는 보스턴은 미국 내에서도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가 돈 없다고 이 사회가 날 무시하는구나’였다. 연착은 기본이요, 문이 반쪽만 열리거나, 객실 유리창이 깨져 있는 차량, 쉴 새 없이 물이 새서 이리 저리 피해가야 하는 지하 역사... 지하철이 백 년 되었다니 낡고 더러울 수도 있지, 하면서 이해해보려고도 했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다른 민간 부문과 비교해볼 때 이건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나라가 할 짓이 아니다.

 

그 뿐이랴. 뉴욕의 중앙역 (Penn Station)에 갔을 때, 특급 열차(Acela)표를 가진 이들은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휴게 공간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기차를 기다리고, 그 유리벽 바깥에는 의자가 아예 없어서 일반 기차 승객들은 서 있거나 아니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기차를 기다리는 걸 보고 아주 기가 막혔더랬다. 돈 없으면 앉아서 기차를 기다릴 권리조차 없는 곳... 그러니, 특별히 호화로운 장식이나 특별난 최신 시설이 아니라, 그저 멀끔할 뿐인 토론토 지하철을 보고 감동을 받는 해괴한 현상이 발생할 수밖에...

 

아, 그리고 분리수거.... 참세상 독자들이야 뭔 소리여 하면서 의아해 하겠지만 말이다. 미국의 패스트푸드 점이나 각종 공공장소에 달랑 한 개만 놓여 있는 휴지통, 그리로 거기로 사정없이 뒤섞여 내던져지는 쓰레기들 - 마시다 만 물, 음료수, 남은 피자 쪼가리, 종이컵, 플라스틱 접시들을 보면서 ‘저러다 천벌 받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을 한 번이라도 느껴봤던 사람이라면 이 놀라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땅 넓으니 묻어버리면 그만이고, 최신 압축 기술 덕에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오랫동안 매립할 수 있다고 좋아라들 하는 미국 사회.... 그런데, 토론토 시내에서는 지하철역은 물론, 쇼핑몰의 푸드코트, 심지어 묵었던 호텔 방 안에까지 분리 수거통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하철 역사 내의 쓰레기 분리수거 시설 - 감동 받아 사진까지 찍었는데, 지금 보니 호들갑이었다는 자각이 마구...
 
 
 

예외, 그리고 정상

사실 이번 방문은 현지 공공병원을 견학하고 관련 연구자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 위한 것이었다. 캐나다와 미국이 서로 맞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보험을 비롯한 사회보장 제도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걸핏하면 서로 비교되고...

 

캐나다는 조세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제도(Medicare)를 가지고 있으며, 주 정부(provincial government)가 보험자가 되어 전 국민에게 보험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처럼 의료보험 미가입자 문제라던가, 메디케이드 (Medicaid: 빈곤층을 위한 의료급여제도) 예산 삭감, 높은 본인 부담금 같은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미국에서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최소한의 행정비용인데, 환자는 대부분 무료로 병의원을 이용하고, 의사는 자기가 제공한 서비스를 주 정부에 청구하고, 병원은 주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총액 예산으로 재원을 조달하고 있으니 미국처럼 여기저기 보험회사와 병의원, 환자들이 서로 얽혀 청구서를 처리할 일 없다는 게 큰 장점 중의 하나다. (지난 글 참조)

 

하지만, 여기라고 문제가 없으랴... 비록 미국보다 훨씬 낫다고는 하지만 여기에도 엄연히 건강 불평등의 문제가 존재하고(그래도 가장 모범적인 국가 중 하나), 정부는 치솟는 의료비 부담 때문에 고심하고 있으며(주 정부 예산의 1/3에 이르는 곳도 있단다), 비응급 수술의 기나긴 대기자 명단은 악명이 높다.(특히 미국의 비판 장난 아니다. 당신들이나 잘 하시지....)

 

그러다보니 경비절감과 효율성 제고의 21세기형 만병통치약, ‘사유화, 영리법인 도입’ 이야기가 여기에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게 현실이다.(이건 사족인데, 심지어 미국도 대놓고 수익 창출 운운하며 의료‘산업’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의료‘산업’으로 돈 한 번 벌어보자고 대통령 직속 위원회까지 설치하는 건 아무리 봐도 결코 정상이 아니다.)

 

McGuinty 정부의 공공병원 사유화에 반대하는 온타리오주 보건 연합의 선전물 (사진 : 진보 블로거 Neoscrum)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캐나다의 발걸음에는 분명 미국과 다른 그 무엇이 존재한다. (어떻게 아냐고? 멀더와 스컬리가 살짝 알려줬다. ^^) 연구자들이나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미국보다 특출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보건의료 기관들이 특별히 더 관대한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는 다양한 정치세력의 스펙트럼이 실존(!)하며, 각각의 지향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언론과 정당이 살아 있다는 점이다. 최소한 미국처럼 ‘그들만의 리그’가 굴러가고 있지는 않다는 것!

 

이를테면, 1999-2000년 겨울의 인플루엔자 유행 당시, 토론토의 의료체계가 완전 마비되는 (심지어 응급실 인질극까지!) 난리가 났었단다. 극우 신문인 National Post 에서는 비효율적인 공공의료 자체가 문제라며 시장 메커니즘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한 데 비해, 중도 좌파 신문 Toronto Star 는 연방 정부의 투자 부족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논쟁을 벌였고, 주 정부의 특별조사위원회는 이러한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보고서를 제출했다.

 

좌/우의 논쟁이라니, 미국의 우/우 정치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아닌가? 또한 주목받은 사실 중 하나는, 당시 캐나다 전역을 휩쓴 인플루엔자 유행 속에서도 사스캐치완 (Saskatchewan) 주 같은 곳은 응급실부터 장기요양시설에 이르기까지 의료 서비스 제공의 흐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점이다. 여기가 어디냐? 바로 캐나다 국민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토미 더글라스 (Tommy Douglas)가 주지사로 좌파 연정을 이끌면서 1962년 북미 대륙 최초로 국민건강보험을 도입했던 바로 그 곳이다. (사실, 당시 처음 보험을 도입할 때 의사들이 전면 파업을 벌여서 장난 아녔단다. 미국 의사협회에서 파업 적극 지원하고, 주 정부에서는 파업 파괴조로 영국에서 의사를 모집해 와 보건소 등에 파견하고.... 역사에서 뭐 하나 공짜로 되는 건 없지 않나...)

 

여기는 그동안 건설한 강력한 공공의료 체계와 효율적인 지역보건 네트워크를 통해 (당시 집권 정당은 보수당이었는데도 말이지...) 토론토에서와 같은 비극적 사태가 충분히 예방 가능하다는 것을, 보건의료 서비스의 질은 제대로 된 공공 네트워크와 조율을 통해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한 현실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번에 만났던 닥터 래클리스 (Michael Rachlis)는 좌파 정당의 보건 정책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보건의료정책 전문가인데 (선거 준비 때문에 바빠 죽을 지경이란다 ㅡ.ㅡ), 이 양반이 나한테 물어봤다. “어떤 연유로 이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냐? 부모님이 노동당 소속이셨나?” “뭐시라고요? 노동당? (이 양반이, 큰일 날 소리를...) 한국에서 진보정당이 의석 가진 건 이번이 해방 이후 처음이라니까요... (쫑알쫑알 횡설수설...)”

 

음... 그랬다. 내가 그동안 한국이나 미국이라는 ‘예외’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거지, 여기 캐나다 또한 여느 민주주의 국가들과 다름없이 다양한 이념적 ‘지향’과 정치적 실체로서의 ‘정당’이 있고, 현실에서의 ‘투쟁’이 있었던 거다. (Neoscrum 블로그 참조) 그리고 보건의료의 공공성은 그 투쟁과 갈등의 산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조직화된 노동자 운동, 좌파 정당의 부재가 현재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공공정책의 퇴조를 가져왔다는 Dr. Himmelstein의 말에 이백 퍼센트 공감!

 

토론토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 산재 노동자 추모 조형물 ‘100인의 노동자’- 1901-2000년에 온타리오 지역의 노동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들의 사망년도와 이름, 작업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노동안전보건을 강화하자는.... 이런 조형물이 서울 시청 광장에, 혹은 뉴욕의 타임 스퀘어 광장에 세워지는 걸 상상할 수 있나? (사진 : 진보 블로거 Neoscrum)
 

그래도, 이건 음모가 틀림없어!

토론토 시내 한 공공병원의 의사결정 지원국장이랑 이야기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공공병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가는 곳, 의료의 질이 낮은 곳’, 이런 편견이 존재하는데, 여기는 안 그런가요?”

“상업화된 의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환자들이 걸린 질병은 다르지 않은데 환자의 다른 조건 - 이를 테면 경제적 조건- 에 따라 치료가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왜 같은 환자를 분리해서, 다르게 치료해야 하죠? 그건 질병의 선택이 아니라 병원의 선택일 뿐입니다. 환자는, 질병은 모두 같아요.”

 

오잉? 연구자도, 활동가도 아닌 자가 이런 멋진 말을?


그 병원의 행정부서 실무자를 만나 비용절감을 위한 외주나 용역, 비정규 고용 실태가 어떤가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기 일에 만족하지 않으면 환자의 만족도가 절대 높아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용역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비용이 절감되는 것도 아니구요. 그래서 우리 병원은 최근에 정책을 바꿔서 외주를 없애고 모두 정규직 인력을 투입하고 있어요. 간호 인력도 파트타임이나 대체 보조 인력을 줄이고, 정규직 풀타임 간호사를 늘여가고 있는 중입니다. 단기 비용은 좀 들어갈지 몰라도 임상 서비스의 질과 환자의 만족도를 고려하면 오히려 이게 더 경제적이죠.”

잉? 당신 진심이야?

 

중간에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아저씨, 저는 미국에서 여기 병원 견학 왔는데... 캐나다 의료제도가 좋다고들 하잖아요. 근데 진짜로 의료보험 제도가 맘에 드세요?” 불과 1초도 안되어 날아온 대답.

“당근이지. 우리처럼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도 부담 없이 병원에 갈 수 있잖아. 우린 미국이랑 다르다구....”

“근데, 대기 시간 길다면서요.”

“급한 치료나 수술은 다 금방 할 수 있어. 물론 나쁜 점도 있지... 치과 같은 거는 보험이 안 되거든. 그렇다고 미국처럼 되는 건 절대 반대야...”

 

?? 수상해.... 혹시 음모가 아닐까?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같이 캐나다 국정홍보처 직원 같은 이야기만 골라서 할 수가 있냐구...


심지어 면담을 마치고 병원에서 나오는데, 눈보라 속에 경찰차들이 출동하여 마약에 취한 노숙자들을 하나씩 부축해서 쉼터로 태워가는 모습까지... 그것도 바로 내 면전에서.... (나도 좀 태워서 호텔까지 데려다주면 좋으련만...)

이 마당에서 나는 완전 확신을 굳혀버렸다. 이 인간들이 작전을 짠 것이 틀림없다! ‘한국의 이름 없는 최저위층 인사 1인이 방문하니, 그녀의 동선 주변에 우리 요원들을 촘촘하게 배치하라! 오바’ (요즘에 X-Files 시리즈에 빠져 다시 음모론 신봉자가 되었음을 이해 바람)
 

 

미래는 무한한 현재의 연속...

닥터 래클리스가 거듭 강조했듯, 캐나다가 이상적인 사회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스스로 노력하고 투쟁하는 사회라는 점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다. 사회마다 나름의 역사와 질서, 동력이 있는 법 - 따라서 캐나다가 결코 우리의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캐나다의 경험은 미국식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길은 아니며, ‘결국에는’ 미국처럼 될까봐 미리 좌절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현실에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넓고, 미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많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것은 결국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이 즈음에서 ‘어떤 위대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미래는 결국 무한한 현재의 연속’이라는 하워드 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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