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체코에서 있었던 일이 '남의 일'일까?

 

  [한미FTA 뜯어보기 107 :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정치경제학(2)] 노바TV
  2006-09-28 오전 9:52:25
  이번에는 2003년에 체코 공화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자. 앞글(1회)의 표현과 어투는 물론 그 내용까지 이번 글에 반복된다는 점에 대해 미리 용서를 빈다. 앞글은 가상의 상황에 대한 것이고 이번 글은 실제 상황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두 상황의 대칭성에서 비롯된 것이니 필자의 무딘 글 솜씨만 탓하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미국인 로널드 라우더와 체코의 노바TV
  
  1990년대 초에 공산주의 체제가 종식된 이후 새로이 나라 건설을 하느라 바쁜 체코 공화국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분야 모두에 대해 민영 방송국 설립을 허가하기로 결정하고, 한정된 수의 방송국 설립허가를 따기를 원하는 민간 지원자들을 모집한다. 체코인인 블라디미르 젤레즈니(Vladimir Zelezny)는 이 기회를 활용해 체코의 지식인들 몇 명과 함께 CET21이라는 작은 회사를 만들어 텔레비전 방송국 설립허가를 따낸다.
 

  
  한편 미국의 화장품 재벌이자 공산주의 몰락 이후 새롭게 열리기 시작한 중유럽 나라들의 방송과 매체 시장 진출을 노리고 '중유럽 미디어(Central European Media Enterprise: CME)'라는 회사를 설립한 미국인 로널드 라우더(Ronald Lauder)는 재빠르게 1993년에 젤레즈니와 접촉했다. 중유럽 전체로 도약할 발판을 체코 공화국에 마련할 수 있겠다는 계산에서였다.
 

  
  라우더는 흥정에 성공했다. 그는 TV 방송국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댔고, 그 돈으로 젤레즈니는 방송 설립허가를 무형자산으로 갖고 있는 CET21에 대한 지분을 늘려 이 회사를 완전히 자기소유로 만든다. 그 대신 젤레즈니는 자신의 지분에서 나오는 의결권을 항상 라우더의 회사인 CME와 일치하는 방향으로 행사하기로 약조했다. 이리하여 체코 최초의 민영 영어 텔레비전 방송인 '노바TV(TV Nova)'가 생겨났다.
 

  
  노바TV를 운영하는 회사인 CNTS(Ceska Nezavisia Televizni Spolecnost)의 지배소유구조는 약간 복잡하게 되어 있었다. 라우더의 CME가 압도적 지분(2000년 당시 93%)을 갖고 있었고, 그 나머지인 약간의 지분을 CET21과 체코의 한 은행이 나누어 갖고 있었다. CET21의 경우는 지분 중 60% 이상을 젤레즈니가 가지고 있었고 그는 명시적으로 CME에 절대적 충성을 서약한 바 있기에 사실상 이 회사 전체가 라우더와 그의 회사 CME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젤레즈니는 CNTS의 CEO가 된다.
 

  
  그 뒤 노바TV의 행보는 극적인 성공과 극도의 비난이 엇갈리는 과정이었다. 노바TV는 체코 방송위원회 등의 규제를 철저히 무시하고 미국식 오락프로와 섹스 및 폭력물 등으로 공격적인 편성을 하는가 하면 뉴스를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의 제작과 편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사업상의 이익을 늘리는 데 주력했다. CME가 미국 나스닥에 제출한 회사설명서(prospectus)에는 당연히 언론 편집의 독립성과 공정성 및 공공성을 존중한다고 씌어 있었지만, 이는 실제와 다른 것이었다.
 

  
  그 결과 1996년이 되면 노바TV는 체코 인구의 70%가 즐겨 시청할 정도가 됐다. 광고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된 CNTS는 1996년 1~9월 중 노바TV 방송국 운영비용으로는 600만 달러를 지출하는 데 그쳤지만 세전 수익은 7000만 달러나 거두었다(체코 잡지 <튀덴(Tyden)> 1997년 1월 13일자).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CME는 우크라이나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의 방송시장에도 진출했고, 나스닥에서 CME의 주가는 한없이 치솟았다. 1996년에 <파이낸셜타임스>는 2000년경이 되면 약 30억 달러에 달하게 될 동유럽의 광고시장을 CME가 장악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라우더와 그의 회사 CME의 이러한 성공은 체코 국내에서 큰 반발에 부딪혔다. 엄청난 돈이 국외의 초국적 기업으로 빠져나간다는 것 외에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체코 사회의 문화적 기풍을 정면으로 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체코 방송위원회는 수 차례에 걸쳐 규제를 제대로 지킬 것을 종용했으나 이미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갖게 된 노바TV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되레 정규 방송시간 중에 사장인 젤레즈니가 나와 정부와 관료들을 가리켜 "국부유출이 어쩌고 하는 해묵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는 내용의 일장연설을 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이미 CME는 노바TV 외에도 라디오방송국, 잡지, 신문 등의 매체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사회적 권력으로 변해 있었다. 1999년 4월에 행해진 여론조사에 의하면 체코 국민들의 40퍼센트는 체코의 언론자유가 사라졌으며, 이런 답변을 한 이들 중 상당수는 그 원인을 매체가 외국인들에 의해 소유돼 있다는 데서 찾았다.
 

  
  1997년 4월 17일 젤레즈니가 체코 의회에 출석해 CME가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상업 텔레비전 방송인 노바TV를 통해 '프리마TV(Prima TV)'를 인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발표했을 때 그의 성공신화는 절정에 이르렀다. 프리마TV의 대주주인 체코의 국영은행이 노바TV에서 내건 조건에 응함으로써 주식매매에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이 발표 직후 체코 의사당에서는 거의 난장판에 가까운 대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발표된 대로라면 체코의 민영 TV 방송은 사실상 CME에 전부 장악당하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배신한 젤레즈니에 대한 라우더의 역공
  
  그러나 성공담은 여기까지이며, 이후의 이야기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체코 사회에서 일급의 거물로 성장한 젤레즈니가 라우더와 CME를 배신하고 독자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관계가 악화된 라우더와 CME는 1999년 3월에 젤레즈니를 해고해버린다. 하지만 방송국 설립허가를 보유한 회사는 CET21이었고, 이 회사에 대해서는 젤레즈니가 홀로 60%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젤레즈니는 이름만 바꾼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고 독자적으로 계속 노바TV를 운영하는 한편, CME나 CNTS로부터의 서비스 구매를 중단하고 일체의 관계를 끊어버리면서 이른바 '내부인수(internal takeover)'를 거행한다. 졸지에 방송국을 빼앗기게 된 라우더와 CME는 체코 사법기관에 3억 달러 규모의 고소를 하지만, 체코의 재판소가 젤레즈니와 같은 정치적 거물에 불리한 판결을 내릴 것을 기대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부터 라우더와 CME는 아예 체코 정부를 사냥감으로 삼기 시작한다.
 

  
  라우더와 CME 측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체코 정부는 방송사의 문제는 독립기관인 방송위원회 소관이므로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공언했다. 이에 라우더와 CME는 노바TV의 원래 지배소유구조를 회복시켜 줄 것을 방송위원회에 요청했지만, 방송위원회는 법원에서 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노바TV의 일에 휘말릴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 사이에 젤레즈니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이들에게 자신의 보유주식을 이전시켰다.
 

  
  이런 젤레즈니의 행동은 상황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체코 국내의 법원에서 라우더와 CME가 승리하여 노바TV의 원래 지배소유구조를 회복시키라는 명령을 받아낸다 해도, 젤레즈니의 손에 남은 주식은 이미 극히 소량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젤레즈니의 주식 이전을 방송위원회가 승인하였다는 것이 또 다른 빌미가 되었다. 이제 라우더와 CME는 감독소홀로 인한 피해에 대해 배상할 책임자로 체코 정부를 몰아세우기로 작정한다.
 

  
  라우더와 CME는 각종 양자 간 투자협정(Bilateral Investment Treaties: BITs)에 포함되어 있는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investor-state claim) 조항에 호소하여 체코 정부를 국제 중재기관으로 끌고 가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로 했다. 이들은 체코 정부의 감독소홀이 결국 자신들이 체코에 투자한 자산의 가치를 심대하게 훼손했고, 결국 이는 사적 소유물의 '수용(expropriation)'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라우더와 CME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먼저, 1991년 발효된 네덜란드와 체코 사이의 양자 간 투자협정을 이용할 수 있었다. CME는 조세회피지역인 버뮤다와 네덜란드 모두에 기반을 둔 회사이기 때문이었다. 또 미국과 체코가 1958년에 맺은 조약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CME의 소유자인 로널드 라우더가 미국인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두 가지 모두를 이용하기로 했다. 즉 라우더와 CME가 각각의 투자협정을 이용하여 따로따로 체코 정부를 상대로 5억 달러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기로 한 것이다.
 

  
  이리하여 로널드 라우더 개인이 시작한 소송의 국제 중재재판이 런던에서, CME가 시작한 소송의 국제 중재재판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각각 시작됐다. 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 로널드 라우더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광고를 실어 체코가 얼마나 투자자들이 살아가기에 힘든 곳인지, 그래서 투자자들이 얼마나 체코를 멀리해야 하는지를 열심히 홍보했다. 하지만 판세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2001년 2월 암스테르담의 국제 중재재판에서 벌어진 CME와 젤레즈니 개인 간 소송에서 CME는 부당한 피해를 입은 것이 전혀 없으며, 따라서 CME 쪽이 제기한 배상 요구는 근거가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곧이어 9월 초 런던에서 벌어진 라우더와 체코 정부 사이의 재판에서도 재판관 만장일치로 체코 정부는 문제된 거의 모든 쟁점에서 책임이 없으며 따라서 배상의 의무도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중재법정의 배상 판결
  
  그런데 2003년 3월에 CME와 체코 정부 간 소송의 스톡홀름 중재재판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스톡홀름 중재법정은 CME가 체코 정부의 부당한 조치에 의해 피해를 입었으며, 따라서 체코 정부는 3억500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는 체코 국내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체코 정부가 이미 두 건의 소송에 1000만 달러의 비용을 지출한 데 이어, 이제는 3억5000만 달러라는 훨씬 더 큰 부담이 정부재정에 얹혔다. 체코는 인구 1000만 명, 일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정도의 작은 경제다. 이 나라에서 3억5000만 달러는 나라 전체 의료보험의 1년 예산에 맞먹는 금액이며, 인구와 국내총생산(GDP) 규모에 비추면 이는 영국이라면 105억 달러, 독일이라면 140억 달러나 마찬가지인 부담이었다. 게다가 체코 정부는 이미 3억6000만 달러 정도의 기록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졸지에 정부적자가 두 배로 늘어난 셈이 되었다. 그리고 지불이 늦어질 때는 이자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재정악화로 인한 국가신인도 등의 문제도 불거지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체코 정치가들은 군말 없이 가급적 조속한 시일 내에 배상금 전액을 지불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다. 이유는? 가뜩이나 라우더의 국제적 캠페인으로 악화된 국제 투자자들 사이에서 체코의 이미지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외교장관 키릴 스보보다(Cyril Svoboda)가 말한 대로 '국제적 평판(reputation abroad)'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막대한 돈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논의가 들끓었지만, 정부에서는 각종 부가가치세를 늘리는 쪽으로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두 건의 소송 비용으로 나간 돈 외에 라우더와 CME에 갖다 바칠 배상금까지 체코 국민들이 물어내게 된 것이다.
 

  
  체코 국민들의 시련은 여기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라우더와 CME의 성공담은 수많은 다른 나라의 국제 투자자들로 하여금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를 이용해 체코 정부로부터 큰돈을 뜯어내도록 자극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 있는 일본 노무라 금융법인의 자회사인 살루카 투자(Saluka Investments)는 이미 2000년에 벌어진 'IPB 은행' 파산 과정에서 자신들이 당한 차별을 이유로 10억 달러의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이밖에도 여러 사례들에서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투자자들이 CME 사건에 고무되어 체코 정부에 으름장을 놓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것이 2003년 체코의 풍경이었다.
 

  
  이런 체코의 사례는 몇 개의 작은 나라들과의 FTA를 거쳐 이제 미국이라는 경제대국과의 FTA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외국자본에 의한 지배소유구조의 복잡한 변형, 방송의 공공성 파괴, 이로 인한 국내의 사회적 분란과 동아시아 차원의 시장구조 변동…. 하지만 어찌 보면 이러한 것들은 굳이 FTA라는 형식적 틀이 없어도 자본의 지구화로 달려가고 있는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이미 마주쳤거나 언젠가는 한 번씩 마주치게 될 문제일지 모른다.
 

  
  여하튼 앞의 1회와 이번 2회의 이야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후반부의 기막힌 반전이다. 초국적 미디어 기업과 지역 및 국내의 미디어 산업 간 각축전 및 이전투구는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의 일상이며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그런데 FTA나 양자 간 투자협정(BIT)을 맺은 나라들의 경우 그 이전투구의 흙탕물이 엉뚱하게도 정부, 그리고 나아가 국민 전체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바로 그러한 조약이나 협정 안에 들어 있는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라는 희한한 제도 때문이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다
  
  지난 5월 19일 <프레시안>의 보도('미국기업에 한국 제소권 보장' ☞ 바로가기)를 통해 우리는 한사코 숨겨 온 한미 FTA 협상안에 바로 이런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는 부인하지 않고, 대신 이 제도는 이미 정부가 성사시킨 몇 개의 다른 FTA에도 포함되어 있고, 또 세계적으로 모든 투자협정이나 FTA에 포함되는 일종의 '글로벌 스탠더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또 실제 이 제도가 활용되어 소송이 벌어지는 건수는 많지 않기에 그 위험성을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첫째, 이 제도가 마치 거의 성문법에 가깝도록 국제적으로 안착된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1990년대 초에 미국, 캐나다, 멕시코가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서 처음 생겨난 이 제도는 이후 숱한 비판과 저항에 부딪히면서 1990년대 지구정치경제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앞으로 보겠지만, 1990년대 말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사이에 추진되던 다자간 투자협정(MAI)이 결국 결렬된 데도 이 제도에 대한 논란이 큰 역할을 했으며, 최근에 체결된 미국-오스트레일리아 자유무역협정(AUSFTA)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내의 거센 반대여론에 의해 결국 이 제도에 관한 조항은 빠지게 되었다. 나아가 미국 내에서조차 이 제도를 명시한 NAFTA 11장을 제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고, 이런 여론을 이끈 인물은 다름 아니라 지난번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후보로 나섰던 존 케리(John Kerry) 상원의원이다.
 

  
  둘째, 실제 소송의 건수가 적고 규모도 작으므로 이 제도의 위험성을 주장하는 논리는 과장이라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이 제도로 인해 멍들고 있는 나라는 체코뿐만이 아니다. 2003년 현재 파키스탄 정부는 스위스 회사 SGS, 이탈리아 회사 Impreglio, 터키 회사 Bayinder 등에 의해 각각 수억 달러의 소송에 걸려 있고, 그 배상요구 총액은 10억 달러에 달한다. 유엔 산하기관인 UNCTAD는 지난 1997년 이후 2004년까지 이 제도로 인한 국제적 소송 건수가 8배로 증가했다고 보고한 바 있다. UNCTAD의 '투자기술사업개발국' 국장인 소방(Karl P. Sauvant)은 2004년도 보고서에서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각국 정부는 투자협정 협상에서 대단히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고 논평했다.
 

  
  한미 FTA 전반의 위험성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지적이 나와 있다. 그럼에도 전대미문의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는 한미 FTA의 세부내용을 뜯어보면 실로 포복절도할 만한 부조리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지금은 그런 세부사항 하나하나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로 한미 FTA에 관한 토론이 발전돼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야말로 그러한 세부사항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며, 한미 FTA의 성격과 그 결과의 예후를 보여줄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는 결코 몇 푼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따지는 돈 계산으로 찬반을 논할 문제가 아니다. 이 제도는 1990년대 이후 구조적 변화를 보여 온 지구정치경제 체제의 본질적 성격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의미심장한 것이고, 지난 10년 간의 여러 경험들에서 숱한 문제점과 모순을 드러낸 것이며, 단순한 경제적 사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환경, 보건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근본적인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것이다.
 
 
   
 
  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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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이 땅에서 벌어질 일을 살펴보니…

 

  [한미FTA 뜯어보기 106 :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정치경제학(1)] '새장 속의 새'
  2006-09-27 오후 6:43:08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단순한 '무역자유화 협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경제통합 협정'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며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에 한국이 더 깊숙이 포섭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우려를 하는 이들은 예를 들어 '자동차 수출에는 플러스, 농업에는 마이너스'하는 식으로 부문별로 경제적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것만으로는 한미 FTA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정부의 한미 FTA 추진 태도를 비판해 온 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홍기빈 씨는 "FTA는 포괄적인 지구정치경제(global political economy)의 틀에서 그 성격을 파악해야 하는, 지구적 자본의 21세기형 전략"이며 "따라서 한미 FTA는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회에서 어떤 모습의 삶을 살게 될 것인가를 정치, 사회, 문화, 외교에 걸쳐 포괄적으로 반성하여 판단할 문제"라고 지적한다.

  
  홍기빈 씨는 한미 FTA의 지구정치경제적 본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것은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도(investor-state claim)'라면서 이 제도의 역사적 내력과 그 구체적인 적용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들에 대해 심층 분석한 글을 <프레시안>에 기고해 왔다.

  
  한미 FTA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는 홍기빈 씨의 이 글을 오늘부터 10여 회로 나눠 연재한다. <편집자>
 
 
 
 
 

  
  노무현 정부는 기어코 2007년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고 2008년 1월 1일을 기해 발효시켰다. 2년 뒤인 2010년 미디어 거물 루퍼트 머독은 한국의 서울방송을 접수하기 위한 공작을 시작한다.
 

  
  루퍼트 머독이 엄청난 크기와 발전 가능성을 가진 중국 등 아시아의 미디어 및 광고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1990년대부터 동분서주해 온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와 방송이라는 예민한 부문을 둘러싼 각종 규제와 장벽으로 인해 그의 아시아 진출이 그다지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시아 문화권에서 상당한 위력을 가진 한류 대중문화의 발원지인 한국이 한미 FTA를 통해 각종 규제를 해제하고 미국과 동일한 사업조건을 제공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아시아 진출의 안정된 발판을 바라는 그에게 낭보가 아닐 수 없었다.
 
 
 

  
  머독이 움직이기 시작하다
  
  하지만 한미 FTA가 머독에게 무엇이나 할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갖추어준 것은 아니었다. FTA 체결 과정에서 방송계와 방송노동자들의 반대, 그리고 국내 문화 인프라의 붕괴를 우려한 국민여론으로 인해 몇 가지 장벽들은 남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외국인 소유의 회사는 한국의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을 직접 소유할 수 없다는 규제였다. 그래서 머독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서울방송은 소유구조의 일대 변화를 겪고 있었다. '방송설립 허가'라는 무형자산은 노종현이라는 이가 사장으로 있는 '열린나라'라는 법인이 보유하고 있었다. 머독은 재빨리 노종현과 접촉하고 작전을 짠다. 먼저 머독은 한국과 투자협정을 맺고 있는 싱가포르에 '범아시아 미디어사업단(Pan-Asian Media Enterprise: PAME)'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PAME는 거액의 자본을 투자해, 방송설립 허가를 갖고 있는 '열린나라'와 함께 '새서울방송'이라는 회사를 새로 설립하고 그 지분을 8대2로 나눠 갖는다.
 

  
  노종현은 머독에게 융통한 거액의 자금으로 '열린나라'의 지분을 대폭 늘려 지배주주가 됐다. 그 조건은 노종현이 자신의 지분을 이용해 '열린나라'가 '새서울방송'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항상 머독과 PAME의 뜻에 따라 움직이겠다고 명시적으로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머독과 PAME는 '새서울방송'의 사실상의 소유주가 되고 노종현은 그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 이후 '새서울방송'은 머독의 폭스TV를 벤치마크해 파격적인 프로그램 편성과 기획으로 방송계 구도를 뒤흔든다.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한, 강도 높은 폭력과 섹스를 담은 선정적 프로를 수입해 방영하거나 이런 것들을 모델로 국내에서 자체 제작한 프로와 시트콤을 저녁시간에 전면 배치한다. 또 이미 한국의 지배적인 문화코드가 된 미국식 생활과 정서를 흠뻑 느낄 수 있는 토크쇼나 오락물을 영어해설과 덧붙여 방영한다. 교양물도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주로 비행접시나 '체험! 원조교제'와 같은 선정적인 화젯거리 위주다. 뉴스 프로에 대한 시간배분은 줄이고 여론몰이에 유리한 쟁점들을 집중 보도해 사회적 담론에 대한 파괴적 영향력을 높인다.
 

  
  이러한 공격적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어 광고시장에서도 '새서울방송'은 독보적인 존재로 성장한다. 매 분기마다 당기순이익의 기록적인 신장이 이루어지고, 그 돈은 PAME를 통해 머독의 손으로 들어간다. 머독은 한국 방송시장에서 거둔 이런 성공을 발판으로 해서 미국식과 적절히 '퓨전'된 한국 콘텐츠를 개발하고 이를 '신한류(NEO 韓流)'로 포장해 아시아 시장으로 힘을 확장한다. 나스닥에 상장한 PAME 주식의 시세는 연일 기록을 갱신하며 치솟고, 머지않아 PAME는 아시아 전체의 매체 및 광고 시장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될 것이라는 평판을 얻는다.
 

  
  '새서울방송'은 선정적인 매체뿐 아니라 저명한 계간지나 유수한 일간지는 물론 인터넷 포털도 소유하고 출판사와 음반사, 미술관까지 거느린 미디어 복합기업이 되며, 그 최고경영자인 노종현은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권력자로 떠오르게 된다.
 

  
  물론 비난여론이 들끓는다. 부모들은 진저리를 낸다. 저녁식탁에서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바라보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매일같이 반쯤 벗은 남녀들이 떼거리로 나와 총질, 칼질과 끈적이는 눈짓, 몸짓을 하는 장면을 보아야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한국문화의 정서와 언어의 아름다움이 국적불명의 미국식 문화에 파괴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사회 전체 여론이 '새서울방송'에 의해 마구 휘둘리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한국에서는 이제 언론의 자유와 중립성은 사라졌다고 한탄한다. 해마다 방송과 광고 시장에서 엄청난 돈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국부유출'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방송위원회가 수도 없이 권고와 경고를 날리지만, 이 '막가는' 초국적 미디어 회사 앞에서는 바퀴 앞 사마귀다. 되레 노종현 사장이 정규 방송시간에 등장해 '새서울방송'에 쏟아지는 온갖 비난이야말로 "이 세계화의 시대에 19세기식 종속이론이나 들먹이는 시대착오"라는 일장연설을 하고, 이런 그의 연설은 전국에 방영된다.
 

  
  2014년에 노종현 사장은 드디어 문화방송 인수 작업에 착수한다. 문화방송의 최대주주인 KBS는 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새서울방송'의 주식을 넘겨받아 일종의 상호출자 구조를 만드는 조건으로 자사가 보유한 문화방송 주식을 대거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사회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이제 한국의 민간 공중파 방송은 모조리 루퍼트 머독과 노종현의 손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공격의 화살을 정부 쪽으로 돌리다
  
  그러나 노종현 사장의 욱일승천 성공담은 여기까지다. 이때부터는 상황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그 불똥은 어이없게도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모조리 뒤집어쓰게 된다.
 

  
  일개 작은 회사의 경영자였다가 언젠가부터 갑자기 사회적 거물로 성장해 거들먹거리게 된 노종현을 머독은 경계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혹시 노종현이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새서울방송'에 대한 경영권과 그 자산을 남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게 머독의 우려였다. 마침내 머독과 PAME는 2015년 '새서울방송'의 주주총회에서 노종현을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해고시킨다. 이때부터 노종현과 머독은 만화 '톰과 제리'를 능가하는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노종현은 방송설립 허가라는 무형자산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열린나라'를 새로운 법인으로 등록하고 머독과 PAME가 소유하고 있는 '새서울방송' 법인에서 빠져나와 독자적으로 방송국을 운영해 나간다. 그리고 그 전까지 미국 쪽 콘텐츠나 각종 서비스의 구매처였던 PAME와의 거래를 모두 끊어버린다. 이른바 '내부인수'를 거행한 것이다.
 

  
  혹을 떼려다 암에 걸린 격이었다. 노종현을 축출하기는커녕 졸지에 방송국을 잃게 된 머독과 PAME는 선불 맞은 멧돼지마냥 이리저리 날뛰며 온갖 공격방법을 생각해낸다. 먼저 한국의 법원에 3조 원 규모의 초대형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노종현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낸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별로 효력이 없을 것이었다. 한국의 법원에서 이미 한국 굴지의 권력자로 큰 노종현에게 3조 원의 돈을 뱉어내라는 배짱 좋은 판결을 할 돈키호테 같은 판사가 과연 있겠는가?
 

  
  머독은 자신이 아는 워싱턴의 실력자들로 하여금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도록 하는 방법도 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민간 방송사의 소유구조 문제는 정부 소관이 아니라 독립기관인 방송위원회의 관할"이라고 발뺌한다. 머독은 방송위원회로 가서 '새서울방송'의 소유지배 구조를 원상회복시켜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방송위원회도 법원의 결정이 나오기 전에는 개입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발뺌한다.
 

  
  이때 노종현이 회심의 반격을 한다. 법원의 가처분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노종현은 자신이 보유한 '열린나라' 지분의 대부분을 자신에게 우호적인 여러 사람들에게 분산시키는 작업에 나섰다. 그렇게 되면 법원에서 머독과 PAME가 승리한다 해도 노종현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분은 이미 매우 낮아진 뒤이니 예전의 소유지배 구조를 회복시킬 길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노종현이 이렇게 주식 분산을 하려면 방송사 소유구조 감독기관인 방송위원회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 노종현은 정교한 논리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방송위원회로 하여금 그러한 재가를 내리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제리'는 이제 무사히 담장 밖으로 넘어간 셈이었다.
 

  
  고생만 하고 헛물만 켠 '톰'이 되어버린 머독과 PAME는 이제 '제리' 대신 엉뚱하게도 '새장 속의 새'를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한국 정부는 이 숨바꼭질에서 머독과 PAME와 같은 외국인 투자자를 전혀 보호하지 않고 은근히 노종현의 책략을 방기하는 행태를 보였다. 그것은 명백히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차별적 행동이며, 그 결과로 PAME의 자산은 가치가 심각하게 줄어들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간접적 수용(indirect expropriation)'에 맞먹는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니 그같은 수용에 걸맞는 배상을 할 책임이 한국 정부에 있다. 머독과 PAME는 이런 논리에서 한미 FTA와 같은 조약에 명기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investor-state claim) 조항을 이용해 한국 정부를 고소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머독과 PAME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싱가포르에 자리 잡은 PAME가 한국과 싱가포르 간 FTA를 근거로 국제 중재재판을 시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국적을 갖고 있는 머독이 한미 FTA를 근거로 국제 중재재판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머독과 PAME는 이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진행하기로 한다. 두 FTA를 근거로 하여 한국 정부를 상대로 각각 50억 달러짜리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로 한 것이다.
 

  
  국제 중재기관에서 소송을 진행하는 비용이 만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송에서 이길 경우 획득할 수 있는 배상액에 비해서는 소송비용이 큰 것은 아니다. 게다가 투자자-국가 소송 제도에는 중요한 비대칭적인 특징이 있다. 투자자는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 수 있지만 국가는 투자자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 수 없다. 따라서 머독과 PAME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 정부가 패소하면 큰 돈을 얻게 되지만 설령 자신들이 패소한다고 해도 소송비용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게다가 미국과 싱가포르 두 군데서 제기하는 소송은 각각의 독립된 중재위원회에서 진행하게 되어 있다. 두 마리 말 모두에 판돈을 걸어보는 것이 승률을 높이는 데 유리하지 않겠는가.
 

  
  이리하여 2017년, PAME가 한국-싱가포르 FTA에 의거하여 건 소송은 제네바에서, 머독이 한미 FTA에 의거해 건 소송은 런던에서 각각 별개의 국제 중재재판단에 의해 진행되기 시작한다.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를 명시한 FTA를 체결해 놓은 한국 정부는 손발이 묶인 '새장 속의 새'의 입장이어서 꼼짝없이 제네바와 런던으로 끌려 나가 고양이의 발톱과 이빨에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정부는 1000만 달러에 가까운 소송비용을 써가면서 소송에 대응하고 나선다.
 

  
  머독도 얌전히 앉아서 판결을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는다. 지구적 미디어 황제라는 자신의 위치가 주는 힘을 이용해 온갖 방법으로 한국이 투자자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를 선전하고, 절대 한국에는 투자하지 말라는 국제적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인다. 그 영향으로 국제 투자자들은 한국에 대한 큰 규모의 투자계획들을 보류시킨 채 판결의 추이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고양이뿐 아니라 승냥이, 호랑이도
  
  중재재판이 몇 년에 걸쳐 이어지더니 판결이 나오기 시작한다. 먼저 2019년에 나온 런던에서의 판결은 머독의 완패다. 머독이 주장한 자신의 부당한 피해란 대부분 근거가 없으며, 한국 정부는 아무런 배상책임도 없다는 것이 심판관들이 만장일치로 내린 결론이다. 그런데 다음 해인 2020년에 제네바에서 폭탄이 날아온다. 제네바 국제 중재재판에서는 정반대의 판결이 나온 것이다. 한국 정부가 PAME에 35억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한국은 충격에 휩싸인다. 머독과 노종현이 벌인 숨바꼭질의 뒷감당이 모조리 정부의 몫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미 한국 정부는 연간 4조 원가량의 적자로 재정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제 적자가 졸지에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나 버렸다. 하지만 여의도와 청와대의 공통된 의견은 군말 없이 배상금을 어떻게든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머독의 공작 탓에 불안해진 국제 투자가들 사이에서 한국의 입지를 더 이상 악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외통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국제적 평판'의 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조속한 시일 내에 전액을 배상하겠다는 입장을 내외에 천명한다.
 

  
  문제는 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다. 머리를 맞대보지만 쉬운 답은 없다. 배상금 지급이 늦어질수록 이자비용은 커질 것이고, 국가신인도도 문제다. 결국 정부와 여당은 부가가치세율을 일시적으로라도 올리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담이 고스란히 한국 국민들 전체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의 시련은 이제부터 시작인지도 모른다. PAME의 성공담은 그간 십몇 년 동안 한국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바 있는 다른 국제자본들에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북소리이자 춤사위였다. 꽤 오래 전에 외환은행을 인수하려다가 '정부기관의 횡포'로 인해 실패한 바 있는 미국의 투기자본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머독의 소송보다 몇 배나 되는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한국전력을 탐내다가 물러났던 일본 금융회사로부터 한국이동통신을 노리던 핀란드 회사까지 줄줄이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를 활용해 한국 정부로부터 모두 수십조 원을 뜯어갈 전략을 세운다. 이제 '새장 속의 새'는 제네바로, 스톡홀름으로 불려 다니면서 고양이뿐 아니라 승냥이, 호랑이의 공격도 받아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연재의 첫 글에 웬 느닷없는 가상소설이냐고 불쾌해 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다음 회의 글을 읽으면 그런 불쾌감은 사라질 것으로 믿는다.
 
 
   
 
 

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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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앞으로…

 

  [먼슬리 리뷰] 중국 노동계급의 상황 (4·끝)
  2006-07-13 오전 9:11:57
  중국에서는 공개적으로 어떤 입장을 밝히고 나서려고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폭넓게 탄압이 가해지고 있다. 물론 이런 탄압이 반드시 좌파에 집중되거나 우파에 집중되고 있지는 않다. 정부가 대응조치를 취하느냐 여부를 가르는 관건은 국가에서 수용할 수 있는 틀 밖으로 얼마나 멀리 나갔느냐에 있다.
 

  
  심지어는 개혁정책을 지지하고 농민들을 독립적인 '시민'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토지의 사유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던 한 이주노동자 조직가도 '인권' 신장을 위한 회의를 베이징에서 열려고 했다는 이유로 감금당했다. 조직화된 방식으로 일당지배를 종식시키려는 그 어떤 공개적인 시도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는 것이며, 공적인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국가의 지배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그 구체적인 정치적 내용이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곧바로 문제가 된다.
 
 
 

  
  '중국 노동자들의 웹사이트와 토론 목록'
  
  이런 억압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급속히 확대되는 노동계급의 투쟁에 보다 조직화된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기에 당국에는 특별한 위협으로 느껴진다. 이런 점에서 당국이 취한 상징적인 조치는 '중국 노동자들의 웹사이트와 토론 목록'이라는 이름의 웹사이트를 폐쇄시킨 것이었다. 유사한 다른 토론모임들과 달리 이 웹사이트는 "오늘날 중국에서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신들의 투쟁에 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설계된 중국 최초의 웹사이트"였다.
 

  
  이 사이트에서는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지식인을 포함한 모든 지식인들이 "노동자와 관련된 쟁점들에 대해 노동자들과의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인터넷을 통한 이런 연결은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각별한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웹사이트의 베이징 지역 편집진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설명했듯이 "정부는 지금 사회주의를 실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이 마오주의 시대의 공산당과 지금의 당을 달리 본다"고 말했다. 노동계급의 입장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공개적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듣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웹사이트는 자본주의가 제공하지 못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를 노동자가 갖도록 해주는 것이니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실현하기를 원할 만한 것"이었다고 위 사람은 말했다. 그러나 당국은 노동계급에 속하는 회원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액의 등록비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이 웹사이트를 폐쇄했다.
 

  
  노동자와 농민들 및 넓은 범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신중산계급 안에도 경제체제와 정치체제가 보다 투명해져야 하며, 각자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에 더 많이 참여할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매우 폭넓게 존재한다. 미국식의 '선거제 민주주의'는 중국에서 아직 폭넓은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민주적 권리에 관한 이야기 자체는 그야말로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또 어떤 이들에게는 야당의 존재가 실현돼야 할 주된 과제다. 지금 많은 노동자들이 "일당 체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당 안에서도 공개적인 토론의 공간을 더 넓히는 방안을 찾기 위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고, 새로 생겨나는 '시민사회'의 비정부기구들이 여성인권과 환경을 비롯한 광범위한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중국에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서가 폭넓게 퍼져 있으며, 정부도 단순히 억압하는 것만으로는 이에 대처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변화를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것을 통해 이런 도전에 대응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정부가 취하고 있는 공식적인 개혁정책은 겉으로는 민주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노동계급은 냉소를 보내고 있다. 예를 들어 향진정부('향진'은 중국의 말단 지방행정 단위-옮긴이) 구성에 선거제가 도입됐지만, 그것은 대체로 위에서 당이 지명한 사람을 승인해주는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많은 영역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화의 영역에서도 사회주의 시기의 기억들, 특히 문화혁명 시기에 노동자와 농민들이 공장과 농장의 운영에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대학과 지방정부의 운영에도 참여했던 경험의 기억이 지금도 여전히 하나의 비교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기준은 그러한 정치적 권리들이 모두 박탈된 지금의 상황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정부가 실행해 온 민주화 개혁조치들은 마오의 혁명을 뒤집어 놓았고, 노동자들의 삶도 뒤집어 놓았다. 그런 개혁조치들은 노동계급에 대한 보복과 응징의 한 형태다."
 

  
  따라서 중국에서 수용될 수 있는 정치적 개혁의 방법은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통제라는 좌파의 개념을 현재 전 세계에 걸쳐 진보적 의제의 하나로 떠오른 참여적 민주주의에 결합시키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방향의 탐구는 이미 시작됐다. 2004년에 좌파 혁명원로들이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로 제기한 요구 중 하나는 권력의 남용을 제어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밑으로부터의 대중투쟁을 다시 활성화시키고, 민주적 체제의 한 부분으로서 노동계급에게 당과 국가의 기능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된 운동을 구축해 그러한 혁명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 오늘날 세계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에도 존재한다. 과거의 유산에도 불구하고 나이든 노동자와 농민들은 이른 시일 안에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의 새로운 단계에 이르지 못할 경우 혁명의 시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것이고, 젊은 세대는 부자가 되고 소비문화에 편입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경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처지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농촌정책 변경과 그 의미
  
  그러나 중국인들은 '전에 가보았고 해보았다'는 강점을 갖고 있다. 때로는 전망이 요원해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중국은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급행노선에 오르게 될 가능성이 남아 있고, 만약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다시 한번 중국이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물론 이런 가능성은 가까운 미래에 중국에서 일어날 변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다수의 가능한 시나리오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중국 계급구조의 복잡성과 양극화가 중국 사회를 서로 모순된 여러 방향으로 동시에 끌어당기고 있어, 폭넓은 범위에 걸쳐 다양한 결과가 가능한 게 지금 중국의 상황이다.
 

  
  이런 점은 노동계급의 여건과 새로운 도전과제들에 대한 당과 국가의 대응에서 최근 보이는 변화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농촌에서 더 이상의 소요를 막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등 중국의 두 최고 지도자는 농촌정책에 일련의 변경을 가했고, 이런 정책변경은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낳았다. 새로 도입된 농촌정책 중에는 그동안 농민들로 하여금 항의에 나서게 한 주된 원인이었고 대부분 불법적인 것이었던 지역적 공과금의 대부분과 농업세의 폐지도 들어 있다. 또한 정부는 소규모 도시와 농촌마을에 있는 공장들에 대한 투자를 포함해 농촌지역에 대한 투자, 특히 농촌지역의 교육, 보건, 환경을 위한 투자를 확대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이런 조정정책들은 농산품에 보다 유리한 가격을 설정한 조치와 더불어 많은 농민 가정들에 가해지던 경제적 압박을 상당히 경감시키고 있다. '사회주의 신농촌'이라는 말도, 비록 그 의미가 아직은 분명하지 않으며 이미 도입된 농촌정책에 보다 좌파적으로 들리는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개혁정책의 틀 안에서의 개혁조치로서 그동안 발표된 것들이 과연 어느 정도의 깊이를 가진 것인지는 앞으로 더 두고 봐야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지배구조에 내재된 특징이기도 하지만 중앙정부의 정책이 지방에서는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던 과거의 경험, 그리고 종종 부패한 관리들이 농촌지역의 땅을 개발업자에게 팔아치우는 행위가 여러 지역에서 줄어들지 않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농촌정책 변경이 가져온 충격효과 한 가지는 이미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불과 3~4년 전의 상황과 분명히 달라진 것은 해안지역의 수출단지들이 노동력 부족을 점점 더 많이 겪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주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고향 농촌마을로, 아니면 고향과 가까운 내륙도시로 돌아가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새로운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고향 농촌마을이나 고향 인근 도시의 나아진 여건을 이용하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해안지역의 공장에서 당해 온 가혹한 착취를 거부하는 태도가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역이주(逆移住)는 이주노동자들의 고조된 의식, 저항, 조직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 가운데 다수는 이제 단련된 경력노동자이며, 보다 어렸을 때 자신들을 유혹했던 해안지역 도시의 여건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공장에서 선호되지만 가장 심한 착취적 여건 속에서 일하게 되는 나이 어린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농가의 젊은 여성들이 해안지역 공장지대로 이주하던 흐름도 역시 고갈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수출산업으로 하여금 충분한 규모의 노동력을 계속 유인하기 위해 임금과 기타 부가지급의 인상에 나서도록 강요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출산업이 베트남, 인도, 방글라데시와 같이 노동비용이 더 저렴한 나라들로 공장을 이전하는 '바닥으로의 경쟁'을 시작하는 조짐도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시장과 점점 더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는 가운데 그 세계 자본주의 시장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고려하면, 중국 안에서 시도되는 모든 조치는 추가적인 모순을 불러일으키게 돼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의 현 체제를 교정해줄 단순한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의 국내시장이 커지고 있다 하더라도 국제경쟁력이 심각하게 약화되고 그 결과로 경제성장 속도가 떨어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는 이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사회적 평등"을 새로이 강조하면서 시도하고 있는 정책수정을 계속 밀고나갈 여력이 빠르게 잠식될 뿐 아니라 대규모 혼란이 초래될 위험도 있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로의 이행은 이런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좌파에게 지속적으로 새로운 힘을 주는 원천이 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좌파의 영향력이 점점 더 증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눈에 띄는 사례가 2006년 3월에 발생했다. 아마도 10년 만에 처음인 듯한데, 공산당이 운영하는 입법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중국의 지속적인 고속 경제성장으로 인해 이미 오래 전에 매장됐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이념논쟁에 휘말렸다. 이 논쟁으로 인해 중국 정부는 형식적인 절차만 거치면 당연히 통과될 것으로 기대했던 재산권 보호 법안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고, 규모는 작지만 목소리가 큰 사회주의 성향의 학자나 정책자문자 집단의 영향력이 다시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부각됐다.
 

  
  예전의 좌파와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 지식인은 소득격차가 확대되고 사회불안이 고조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국가가 사적인 부의 축적과 시장 주도의 경제개발을 무분별하게 추구하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런 공격을 과거 시대로의 후퇴라고 일축한 사람들은 현저한 빈부격차, 만연한 부패, 노동자 인권 침해, 토지 수용 등으로 인해 중국의 현실이 그 공식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매우 멀어졌음을 사람들이 매일같이 재확인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지속적으로 발휘하는 호소력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뉴욕타임스> 2006년 3월 12일). 재산권 보호 법안은 장기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통과될 가능성이 높지만, "교육과 보건 분야에서 시장의 역할 확대를 허용"하자는 제안이나 보다 급진적으로 토지의 사유화를 요구하는 주장에는 일단 제동이 걸렸다.
 

  
  최고위 지도층도 적어도 겉으로 만이라도 사회주의 쪽으로 다시 방향을 전환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게 된 것 같다. 그동안 정부와 당이 자본주의적 정책을 구사해 왔지만 사회주의는 여전히 중국 정부와 당의 이론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후 주석은 2002년에 권좌에 오른 이래 마르크스주의를 칭송하고 마오를 찬양하는가 하면 중국의 공식 이데올로기인데도 종종 무시돼 온 사회주의 이념을 지금의 시대현실에 대해 보다 적합성이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연구에 재정지원을 하는 등의 행동을 통해 좌파로서의 자신의 신뢰도를 높이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뉴욕타임스> 2006년 3월 12일).
 
 
 

  
  당과 정부의 새로운 시도
  
  당의 부패가 깊이 뿌리 내렸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면서 기울어가는 당의 정통성을 복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마오 시대의 방법들이 부활되기도 했다. 마치 조직 내 혼란과 대중적 이미지의 실추를 걱정하는 거대 기업처럼 중국 공산당은 지금 스스로를 효율적이고 현대적인 기능적 조직체로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 공산당은 자신의 옛 정치적 수단, 다시 말해 학습모임들을 갖춘 마오주의 식의 이데올로기 캠페인을 선택했다. 최근 14개월 이상 중국 공산당의 7000만 당원들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연설문들은 물론이고 1만7000여 자로 씌어진, 읽어내기 힘든 논문과 같은 당헌을 읽으라는 명령을 받아 그렇게 했다. 아울러 당원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하게 돼 있는 당의 회의는 기간당원들이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도 비판하는 절차를 두기에 이르렀다(<뉴욕타임스> 2006년 3월 9일).
 

  
  이런 캠페인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개혁의 노력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으나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냉소의 대상이 됐다. 어쨌든 이런 캠페인은 그 직접적인 영향보다는 당이 원래의 혁명적 목표들로부터는 물론이고 마오가 요구한 "인민에게 봉사"하는 역할로부터도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가를 인정한 결과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 후와 원이 사회주의 혁명을 부활시키거나, 당과 국가가 지난 30여 년 동안 몰입해 왔고 이제는 각종 경제적 흐름들과 긴밀하게 얽히게 된 자본주의의 길로부터 당과 국가를 근본적으로 벗어나게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혹시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개념들을 확산시키는 홍보가 공식적으로 펼쳐지고 마오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확산되는 것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좌파가 더욱 분명히 부활할 수 있도록 보다 넓은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중국의 좌파가 전 세계 좌파 세력의 투쟁들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 그런 투쟁들과 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가지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런 움직임은 전 세계에 걸쳐 진행되는 논의와 격리되어 고립된 방향으로 나아가던 중국 좌파의 그간 추세와 다른 것이다. 아울러 외부와의 연결을 제한하려는 중국 정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새롭게 급속히 확장되는 통신망과 조직망을 통해 외부와의 연결이 진전되고 있다.
 

  
  노동계급의 삶의 여건 악화는 노동계급을 보다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방향으로 급속히 몰아가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뿐만 아니라 다수의 지식인들, 보다 넓게는 신중산계급의 일부도 지구적 자본주의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자신들이 마오의 지도 아래 건설했던 혁명적 사회주의가 오늘날 앞으로 나아갈 대안의 길의 윤곽 정도는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점점 더 깊게 이해하고 있다. 중국의 공장과 농장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착취에 저항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대안의 길'에 대한 기억을 아직 갖고 있다. 그리고 개혁정책 이전의 사회주의 시대에 영위했던 삶의 경험으로부터 그들은 지구적 자본주의의 통제되지 않는 광란에 대응해 실행 가능한 대안의 길이 존재함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유산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어떤 형태로도 가능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동안 워낙 많은 변화가 있었고, 너무 많은 요정들이 갇혀 있던 병에서 빠져나왔기에 그들 모두를 병 속에 다시 집어넣을 수는 없게 됐다. 과거의 실패와 오류는 그 성공이나 승리와 함께 모두 재검토돼야 하고, 세계의 다른 곳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첫 번째 사회주의의 시대가 드러냈던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길이 찾아져야 한다. 이를 위한 투쟁이 앞으로의 시기에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중국의 노동계급은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뒤를 돌아보기도 할 것이며,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수행했던 과거의 투쟁과 지금의 투쟁을 결합시켜 다시 한번 혁명적 변혁을 이루고 나름대로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끝)
 
 

  
  (번역=이주명 기자)
   
 
  로버트 웨일/미국 시민운동가,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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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좌파의 새로운 모색

 

 

[먼슬리 리뷰] 중국 노동계급의 상황 (3) 

  2006-07-12 오전 9:21:57
  마오 시대의 사회주의적 조직형태들은 그동안 시장경제의 새로운 여건에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정되긴 했으나, 그렇게 수정된 형태로나마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사례들이 있다. 이런 사례들은 그 수가 적지만 영향력은 아주 클 수 있다.
 

  
  예컨대 현재 중국의 전체 농촌마을 가운데 대략 1%는 인민공사 시절의 집단화된 형태를 완전히 포기한 적이 전혀 없다. 이런 농촌마을이 구체적으로 몇 개나 되는가는 누가 셈하느냐와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수천 개는 될 것으로 보인다. 덩의 개혁정책을 받아들여 실행했던 농촌마을 가운데 일부는 다시 집단화된 생산 체제로 돌아갔고, 그렇게 함으로써 농촌경제의 대안을 탐색하는 다른 마을들에 모델이 되고 있다.
 
 
 

  
  마오주의 마을 '난제춘'의 사례
  
  사회주의 시대의 목표와 방법들을 유지하고 있는 농촌마을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허난 성의 정저우에서 차로 1시간가량 가야 하는 곳에 있는 '마오주의' 마을인 난제춘(南街村)이다. 이 마을은 15~20년 전에 재집단화에 착수했으며, 그 뒤로는 모든 주민들을 위한 일종의 코뮌(인민공사)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마을은 기본적으로 모든 주민들에게 주거, 보건, 교육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젊은이들에게는 대학 학비도 지급하고 있다. 이 마을은 숙련노동자들이 받는 임금보다 더 많은 보수를 관리들에게 지급하지 않는 등 사회주의 시절의 평등주의적 관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은 여전히 마오의 정치적 목표들을 실현하는 데 전념하고 있으며, 마오의 사진과 마오가 한 말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을 비롯한 다른 혁명 지도자들의 사진이나 그림과 함께 마을 전체에 눈에 띄게 내걸려 있다. 이 마을의 각 가정은 밝고 통풍이 잘 되는 아파트 한 채씩을 제공받으며, 이런 아파트를 포함한 다층 주택단지들이 깨끗하게 정돈된 가로수길, 산책로, 정원들에 에워싸여 있다. 이 마을에는 근사하게 지어진 학교와 아동보육시설도 있다. 이런 마을 모습은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도시의 신흥 주거지역을 제외하고는 중국에서 사실상 이곳에서만 볼 수 있으며, 이 마을과 인접한 외곽 지역의 보다 전형적인 중국 농촌의 환경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난제춘의 실천은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마을은 재정의 많은 부분을 외국인투자에 의존하고 있고, 이제는 자본주의 경제에 완전히 통합된 향진기업(鄕鎭企業,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에 따라 결성된 농촌 소기업-옮긴이)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주로 외곽 주변지역의 농민들로 충원하며, 이렇게 고용된 농민들은 살 만은 하지만 확실히 덜 편안한 합숙소에서 거주하고 있다. 우리가 난제춘을 방문할 때 동행해준 두 사람을 포함한 정저우의 활동가들에 따르면 최근 난제춘은 심각한 재정상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으며, 그 주된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영역으로 생산을 확장한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한계는 난제춘이 자본주의의 바다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생존을 위해 시장경제 속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하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난제춘은 중국 농촌을 위한 대안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여전히 믿는 사람들에게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난제춘이 어떻게 집단화된 생산과 분배를 계속 실천할 수 있었는가를 연구할 목적으로 중국 각지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매일같이 이곳에 찾아오고 있다. 농민이나 노동자들을 가득 채운 버스도 종종 이곳에 온다. 허난 성 당국도 난제춘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로 보호해주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좌파 당 원로들도 2004년에 후진타오에게 보낸 공개편지에서 난제춘을 가리켜 오늘날 농촌지역에서 추구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난제춘과 달리 마오 시대의 유산이 그렇게 뚜렷하게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도 마오 시대의 경험과 개념들이 부단히 현재의 상황을 대조하고 분석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2004년 여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변화의 흐름은 농가단위 책임제 방식의 영농이 글로벌 시장에 직면해 겪고 있는 고립과 불안정성을 완화해보려는 노력의 하나로 농업 합작사(合作社, 협동조합)을 지향하는 새로운 운동이었다. 농업 합작사는 예를 들어 비료를 집단적으로 구매하고 수확한 농작물의 판매가격을 협상할 때 보다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것을 통해 시장에서 어느 정도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것과 구성원들에게 금융지원과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비록 모든 농민이 처한 지금의 상황이 지닌 절박한 측면들을 모두 해소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빠져 죽지 않으려면 계속 헤엄쳐라'라는 식이었던 개혁시기의 개인주의 정책으로부터의 의미 있는 이탈임은 분명하다. 또한 이런 노력은 비록 인민공사 체제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반(半) 재집단화' 정도의 성격을 지닌 것이긴 하지만, 혁명 이전의 초기 합작사 운동의 경험뿐 아니라 농민들이 익숙하게 잘 아는 마오 시대의 개념들을 계속 참고하며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지린 성 동북부 지역의 쓰핑(四平) 근처에 있는 한 합작사를 방문했을 때 만난 합작사 대표나 그 합작사에 소속된 젊은이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특이할 게 없다. 그 합작사의 대표는 농촌과 도시의 여러 계급들과 오늘날 그들이 각각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해 매우 자세한 비교분석을 해주었고, 젊은 합작사 소속원은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나라가 처한 상황을 국내적으로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도 관련시켜가며 깊이 있게 설명했다. 중국의 노동계급은 노동과 착취의 실제 세계에 관해 도시의 지식인들에게 가르쳐줄 것을 많이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데도 보다 능숙하다. 또한 노동계급은 교육을 더 많이 받은 젊은 좌파 지식인보다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의 기본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능력이 오히려 더 잘 개발돼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신중산계급의 형성과 변화
  
  사회의 급속한 양극화는 신중산계급을 그들의 구체적인 직업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노동자와 농민이 직면해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이런 변화는 신중산계급과 노동자, 농민이 하나로 단합할 토대를 구축해주는 동시에 좌파가 부활할 대중적 근거가 형성되도록 돕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소외집단들이 점점 더 폭넓게 생겨난다. 오늘날에는 국유기업에서 일하던 공산당 기간당원들조차도 자기가 소속된 국유기업을 사적 투자자들에게 매각하는 작업을 거들고 나서는 그 기업에서 내쫓기고 있다. 국유기업을 사들여 새로 소유주가 된 자본가들은 그들을 기업 안에 그대로 놔두지 않고 쫓아낸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한 노동자는 "방금 건넌 다리를 불태우는 격"이라고 표현했다. 기업에서 쫓겨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실업자가 되고서야 비로소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의식이 고양된다"는 것이다.
 

  
  자기 삶의 여건 변화로부터 사회에 대해 이처럼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 사람들은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가 베이징에서 대화를 나눈 한 진보적 학자처럼 처음에는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을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마오쩌둥으로 되돌아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문화혁명까지 재검토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여러 차례 들었다. 그 중 일부는 "대중으로부터 배워서" 그렇게 됐다고 했다. 예전에는 농촌 지역의 아주 보수적인 학생이었던 한 유명한 사람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가 "전향"하게 된 것은 농민들을 만났을 때 마오에 대한 비판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한 반면 덩에 대한 비판은 많이 듣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과거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재검토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재평가는 일부 사람들의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개혁의 시대가 시작된 뒤에 '중국적 특징을 가진,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사유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와 당의 선전가들이 개진한 논리에서부터 학계와 비정부기구들에서 주로 발견되는 서구의 자유주의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념적 경향들이 생겨나면서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트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그동안의 이런 다양한 이념적 경향들은 오늘날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들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점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한 홍위병 출신자와 한 젊은 지식인 활동가는 각각 우리와 가진 별도의 대화에서 똑같이 "다른 모든 것을 시도해보았으니", 애초에는 개혁정책을 선호했지만 이제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현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두 가지 노선의 투쟁과 문화혁명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방법들을 다 시도해보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현재의 문제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중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구체적이었고 그래서 비교적 쉽게, 예를 들어 '반부패 운동' 같은 것을 통해 교정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날에는 중국 사회의 문제들이 체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 쉽게 다루기 어렵다는 인식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이제는 중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근본적인 변혁이 요구되지만, 자본주의와 글로벌 시장은 그런 변혁을 이루어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국가와 당도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그런 변혁을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그 결과 문화혁명의 시기에 자본주의적 길에 대해 마오가 전개한 비판이 오늘날의 현실에 들어맞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왜냐하면 마오가 그의 말년에 전개한 비판에 들어있는 사상은 현재의 체제에 대해 그 점증하는 모순들의 뿌리를 건드리는 철저한 분석을 계속해서 제공해주며, 그런 모순들을 단지 경감시키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보다 깊은 해법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동안 온존돼온 많은 금기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문화혁명은 대부분의 학자들과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에게 대체로 아직 혐오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조금이라도 내비친다면 그것은 동료들로부터 고립되고 경력을 망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우리는 들은 바 있다. 그러나 그런 문화혁명조차도 토론과 재검토의 주제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나름대로 역사 연구를 수행하면서 오랫동안 무시돼온 사료를 발굴하고, 문화혁명의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새로 발견된 사실들을 웹에 게시하고, 그밖의 다른 방법으로도 문화혁명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당의 공식 입장에 도전하고 있는 젊은 층 좌파 사이에 특히 이런 분위기가 뚜렷하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관계
  
  좌파가 부활하면서 '노동계급의 투쟁'과 연대의 폭을 넓혀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매우 의미 있는 징조가 여럿 발견된다. 1999년에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한 작은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베이징의 대학생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들은 흔히 중국의 MIT로 불리는 칭화대학 학생들이었고, 이들이 참여하는 모임은 최근에 특히 일류대학들에서 생겨난 비슷한 모임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 나는 모임이 효과적이려면 대학 교정을 벗어나 노동계급과 연대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1989년의 톈안먼 학생운동은 초기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적어도 베이징에서는 노동자들이 나중에 대거 가담했다가 살인적인 폭력과 탄압을 집중적으로 받았고, 결국 그러한 폭력과 탄압으로 인해 운동이 종료됐으며, 학생들과 노동계급 사이의 골은 근본적으로 메워지지 못했다.
 

  
  중국 북동쪽 지역에 있는 창춘에서도 보다 작은 규모이긴 하나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 도시에 있는 자동차회사인 제일기차집단공사의 넓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대학 교정을 뛰쳐나온 학생들과 결합하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학생들은 매우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런 뼈저린 경험은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계급과 격리된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재평가하도록 했다. 톈안먼 운동의 경우 결국에는 중국의 역사에서 흔히 벌어지곤 했던 대로, 베이징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가 출동하기를 꺼려하자 베이징 외곽의 농촌에서 동원된 농민군이 운동을 진압하는 데 투입됐다. 톈안먼 운동 당시의 경험이 준 교훈은 지금의 젊은 학생들 세대의 좌파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2004년 여름에 관찰된 변화는 매우 극적이었다. 오늘날 상당수의 학생 활동가들이 대학 교정을 떠나 노동계급과 접촉하고, 노동계급의 삶의 여건을 연구하고, 그들에게 법률적이거나 물질적으로 지원해준 뒤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어난 일들에 관한 소식을 갖고 교정으로 돌아가곤 한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이었고 지금도 정저우에서 핵심적인 좌파 조직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사람은 학생과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그에 따르면 이미 2000년부터 중국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인 베이징대학의 마르크스주의 연구모임 소속 학생들이 베이징 안에 있는 공장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칭화대학 학생단체 소속 학생들도 2001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공장들을 방문해왔다. 2004년에는 베이징에 있는 또 다른 대학의 학생 80명이 정저우를 찾아왔다. 국가당국은 이런 종류의 접촉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 저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문화혁명 때는 나라의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열차를 공짜로 타게 해주는 등 여러 가지 격려조치를 취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정부는 그런 흐름을 차단하려고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학생 대표들에게 열차표를 판매하기를 거부하거나 그들이 정저우에서 하차하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어도 정저우를 방문하는 학생들의 발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저우에 도착한 학생들은 공장을 방문한다. 정저우의 투쟁이 초기단계였을 때는 일부 학생들이 공장 안에서 지내면서 공장폐쇄를 막는 데 도움을 주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런 운동은 정저우에서 시작된 뒤 북동쪽으로 확산됐고, 그밖의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나갔으며, 농촌지역으로도 번지고 있다. 농촌지역으로 가는 학생들도 농민들에게 필요한 자료를 가져다주고, 농민들과의 연락망을 구축하고, 법률적 지원을 해주는 등 비슷한 활동을 벌이고 있고, 그러는 과정에서 전반적으로 많은 농민 활동가들이 갖는 고립감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베이징대학을 비롯한 많은 대학에 바로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농민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결성돼있으며, 이름과 달리 이 조직에는 '농민의 딸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1999년에 한 좌파 활동가를 만났을 때 그는 노동계급의 여건에 대해 직접 조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일을 거의 혼자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2004년에는 스스로 동기부여된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어 자기와 같은 선도적 활동가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는 학생들이 주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운동은 대학생 사회 자체의 구성과 여건 변화에 의해 추동되기도 하고 더욱 촉진되기도 한다. 1999년 이후 대학 입학생 수가 세 배로 늘어나면서 대학생이 되는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늘어났지만, 그들 중 다수는 재학 중 교육비를 마련하고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는 데서 점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결과로 많은 대학생과 노동자, 농민들 사이에 공감과 단합의 사회적 토대가 확장되고 있다. 개혁정책 초기에는 문화혁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덩샤오핑이 홍(紅)보다 전(專)을 강조하면서 대학 입학에 보다 배제적인 자격조건을 부과하도록 했다. 오늘날에는 그때에 비해 중국의 대학들이 특권층의 영역이라는 성격이 줄어들고 좀더 대중적인 성격을 갖게 됐다. 그 결과로 지금 중국에서는 좌파 학생들이 공장이나 농장에서 힘겹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엘리트 지식인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
 

  
  이제는 대학생들이 공장이나 농장의 노동자들과 친척관계인 경우가 보다 많아졌으며, 그렇지 않은 대학생이라도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 중국의 현 단계는 마르크스주의 학생들이 레닌의 인도 아래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공장구역으로 달려갔던 러시아혁명 초기 시절과 매우 닮았다. 물론 당시의 러시아와 지금의 중국은 같지 않다. 당시의 러시아와 달리 지금의 중국 대학생들 가운데 다수는 노동자나 농민 집안 출신이다. 또 지금 중국의 젊은 층 좌파는 노동계급과의 새로운 관계 형성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씨름하고 있긴 하지만, 마오의 지도 아래 쌓은 50년 간의 혁명적 사회주의 경험을 배후에 갖고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좌파의 토양과 현실
  
  마오 시절의 개념, 정책, 관계들을 그때와 매우 달라진 오늘날의 상황에 아무런 변경도 가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 정책, 관계들은 좌파가 자본주의적 개혁정책과 세계적인 시장경제화의 현 단계에 노동계급이 처한 여건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의지하고 활용할 수 있는 혁명적 사상과 실천의 거대한 저수지로 여전히 남아있다. 새롭다고는 할 수 없는 좌파의 사상이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 이미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향들을 과장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세력으로 파악되는 중국 좌파는 아직 소규모이고 주변적인 상태이며,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그룹과 분파들로 분열돼있다. 전 세계의 모든 좌파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좌파도 그들이 이전에 알고 있었던 세계가 붕괴하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고, 그들 자신을 조직화하고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데 중심 기반으로 삼을 만한 공통의 개념들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대체로 보아 노동자와 농민들이 스스로 주도력을 발휘하며 때로는 힘겨운 투쟁에 직접 나서고 있다. 이런 투쟁을 들여다보면 좌파가 지도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지만, 좌파가 전체적으로 좀더 큰 규모로 조직화된 운동에 나서는 경우는 그동안 거의 없었다.
 

  
  자유주의적 개혁론과 사회민주주의적 개념을 비롯해 새로이 경합하고 있는 여러 이념들은 좌파에게도 하나의 도전이 되고 있다. 미국에서의 상황이 그대로 되풀이되듯 오늘날 중국에서는 '계급'이라는 단어 자체가 예전보다 덜 사용되고 있고, 그 대신 시장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회적 집단이라는 뜻의 '사회약세군체(社會弱勢群體)'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착취라는 개념이 겉으로 덜 드러나는 방향으로 용어가 변한 셈이다. 도시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든 간에 그들 중 다수가 보여주는 삶의 양식도 이런 경향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중국에서 스스로 좌파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포함한 일부 지식인들은 요즘 도시에서 꽤 많은 돈을 벌고 있으며, 삶의 여건에서 점점 더 자신들과 멀어지는 노동계급과는 실천적 연결관계를 대체로 잃어버리고 있다. (다음 회에 계속)
 
 
   
 
 

로버트 웨일/미국 시민운동가,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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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중국의 좌파

 

  [먼슬리 리뷰] 중국 노동계급의 상황 (2)
  2006-07-11 오전 8:44:52
  중국에서 전개된 사회주의 투쟁 과정에서 깊이 있는 경험을 했고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중국의 농민, 이주노동자, 도시 노동계급 속에 존재한다는 점이 높은 수준의 단합이 실현될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유산은 오늘날 중국에서 좌파가 부활하는 데 기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전에 정저우에서 홍위병으로 활동했던 한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혁명의 사회주의와 현실의 자본주의를 명확하게 구분해 전개하는 투쟁인 '두 가지 노선의 투쟁'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둔 행동은 이제 지식인들보다는 노동계급으로부터 주로 나오고 있다. 그것은 특히 반부패 운동의 형태를 띤다. 반부패 행동은 금전적 불법행위나 뇌물수수에 대해 반대하는 것도 물론 포함하지만 이런 좁은 의미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국가와 당의 관료, 관리자, 기업가의 동맹이 생산수단을 신흥 자본가의 사적 재산으로 완전히 전환시킴으로써 혁명의 시대에 노동자와 농민들이 성취한 사회주의의 이득을 역전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더 폭넓은 시도로서의 반부패 운동이다.
 

  
  혁명의 이론, 정신, 실천은 활동가들의 노력에 의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이런 현상은 정저우를 포함해 192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 지역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정저우 시 중심가에는 1971년에 세워진 쌍둥이 불탑 형태의 기념탑이 있다. 이 기념탑은 1923년에 베이징과 한커우 간 철도의 노동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지도 아래 벌인 총파업이 이 지역 군벌에 의해 야만적으로 진압되는 과정에서 살해된 100여 명의 노동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마오 시대의 유산이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도 매우 높으며, 이런 점들이 두 가지 노선의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이 도시의 노동자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부각된 것은 그들이 일해 온 공장에서 스스로 갖게 된 권리의식이었다. 국유기업에서 노동자들이 갖는 사회적 소유 및 참여의 권리에 어떤 한계가 있든 간에, 그리고 그러한 권리는 덩샤오핑 식의 개혁정책이 초래하는 권리몰수에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안전장치로서는 미흡함이 이미 확인되긴 했지만,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해 온 공장에 대해 어떤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것'이라는 강한 의식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누군가가 설명해주었듯이 전송장비 공장은 '노동자들의 땀으로' 지어졌으며, 노동자들은 그 공장이 자본가들에 의해 탈취되고 사유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공장은 국가 전체의 것이며, 노동계급 모두가 집단적으로 이룬 경제적 축적의 일부라는 것이다.
 

  
  마오가 지도자로 있던 시절에는 노동자들도 공장에 대해 어느 정도의 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제시한 의견은 경청됐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문화혁명의 시기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당시에는 그들 자신이 지도자였다.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대표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노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못하다. 한 평생의 노동으로 쌓아올린 집단적 재산을 사실상 도둑맞고 과거에 누렸던 참여권을 박탈당한 결과로 노동자들이 갖게 된 권리상실감의 표출이 이어지고 있다.
 

  
  정저우의 한 노동자는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런 이해를 보다 이론적인 맥락 속에 위치시켰다. 그는 '관료적 자본'의 현 체제가 지닌 문제는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분석은 마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논문에서 곧바로 도출된 것 같아 보인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갈등"이며 주로 정치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노동자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중국은 사회주의를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미국과 다르다. 나이든 노동자들은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한다. 그들 대부분이 마오의 시대와 문화혁명을 거쳤다. 그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경험했고, 그들의 세대는 중국을 '마오의 길'로 복귀시킬 수 있기를 원한다. 그 길은 사회주의의 경로를 보호하기 위한 국제적 투쟁의 일부다."
 

  
  이 노동자는 중국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해, 그리고 사회주의의 길로 복귀하는 것이 그들에게 왜 중요한지에 대해 서방에서 더 깊이 이해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것은 기나긴 투쟁이다. 그는 중국의 노동자들이 서서히 사회주의의 길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럴 경우 노동자들이 결국은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운동이 곧 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젊은 층 노동자들은 그것을 단지 '더 나은 생활여건'을 위한 경제적인 투쟁으로만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젊은 층 노동자들의 분위기는 반사회주의 개혁의 시기가 남긴 유산이며, "부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말을 포함한 덩샤오핑 어록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이 젊은 층 노동자들의 사고력을 파괴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서로 만나 이런 것들을 토론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노동자가 드러낸 느낌과 같은 종류의 느낌을 드러내는 나이든 노동자들의 발언을 여러 번 들었다.
 

  
  여전히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혁명의 유산을 계속 살려가고 그것을 새로운 세대에 이전하기 위해 자기들의 의식과 경험을 전수하는 다른 방법들, 다시 말해 단지 정치경제적인 형태만이 아닌 문화적인 형태의 방법들을 찾고자 하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찾아갔던 정저우 시내의 노동계급 거주지역 한가운데 있는 공원의 한 모퉁이에서는 매일 밤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옛 혁명가요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 가본 주말 저녁에는 늙은 은퇴자들로부터 10대 후반,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100여 명이 모였다. 그들은 역동적인 몸놀림을 하는 지휘자가 이끄는 음악가들의 연주에 맞춰 아주 활기찬 노래들을 불렀다. 다른 주말에는 그곳에 "몇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며, 어떤 때는 1천여 명이 모이기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를 그 공원으로 데려가준 노동자들 가운데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의 정치적 의미는 공산당, 즉 변질된 지금의 공산당에 대한 우리의 반대를 보여주고, 마오를 이용해 그런 공산당에 대항하며 우리의 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역사적 정신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실천적 투쟁에도 스며들어 있다. 이 지역에서 사유화에 대한 저항의 '모델'로 남아있는 2000년의 종이 공장 파업 당시에 노동자들은 관리자들을 몰아내고, 공장을 접수하고, 장비의 반출을 막고, 노동자들에 의한 관리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문화혁명'의 방식을 이용했다고 한 활동가는 말했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뒤에도 이 공장의 일부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수중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들은 시장경제 속에서 살아남고 공장을 경제적으로 훼손하려는 관리들의 기도를 극복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의 투옥된 지도자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 공장 노동자들이 이런 형태의 투쟁방법을 선택한 것은 "파리코뮌의 원칙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기장비 공장에서 전개된 투쟁에서도 이와 비슷한 좌파의 역사적 관점이 보인다. 이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은 생산하며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슬로건도 내걸었지만, "마오쩌둥 사상을 지속적으로 받들자"라고 쓰인 깃발도 내걸렸다. 노동자들은 이보다 훨씬 더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형태의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종이 공장을 접수한 바로 그 해에 마오의 사망일(9월 9일-옮긴이)을 기념하는 행사가 시작됐다. 2001년에 열린 이 행사에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고, 1만여 명의 경찰이 그들을 에워쌌으며, 대규모 파업과 충돌이 벌어졌다. 마오가 태어난 날이나 사망한 날에는 이 도시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마오의 동상이 있는 작은 광장은 노동자들의 출입이 금지된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이 광장으로 가서 경찰과 대치한다. 바로 이곳에서 2004년 9월 9일에 노동자 활동가인 장정야오가 공산당과 정부가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저버리고 광범위한 부패에 가담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내용의 전단을 뿌렸다. 이 전단에는 중국이 자본주의로 치닫는 것을 비난하고 마오가 나아갔던 '사회주의의 길'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 전단을 작성한 장정야오와 장루취엔은 집에 급습해온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이들의 일은 중국에서 곧 유명한 사건이 됐고, 2004년 12월에 이 두 사람에 대한 비공개 재판이 열렸을 때 중국 전역에서 많은 좌파 사람들이 정저우를 찾아와 법정 밖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두 사람은 재판에서 각각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 두 사람 외에 전단의 작성과 인쇄를 도왔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괴롭힘을 당한 게리잉 및 왕장칭 등 모두 4명의 노동자 활동가들은 그 후 '정저우 4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에게 이들의 석방을 호소하는 내용의 탄원서가 전달됐다. 이 탄원서에는 200명 이상이 서명했으며,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중국 국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특히 서명한 사람들이 직면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고려할 때 좌파 노동자들에 대한 전례 없는 지지의 표출이었고, 중국 내 지식인 및 활동가들과 해외에 있는 그들의 국제적 동료들을 단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탄원서에 대해 중국 정부가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장루취엔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가 석방된 표면적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였으나, 일부 활동가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탄원서와 더불어 정저우 4인 사건에 관한 많은 정보와 분석을 좌파 웹사이트에 게시하는 등의 연대활동이 불러일으킨 압력이 작용한 결과로 그가 석방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정저우 4인 사건은 중국의 노동자들이 당과 국가가 부과하는 새로운 여건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일반 노동자들 사이에 좌파의 이념과 행동주의가 끈질기게 유지되고 있으며, 중국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들에 대한 지지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국 좌파가 새로이 힘을 얻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 좌파의 분열도 드러내준다. 정저우 4인에 관한 탄원서 서명 운동은 주로 젊은 층 좌파가 인터넷을 통해 탄원서 내용을 회람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주도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이들 젊은 층 좌파는 좌파 선배나 스승들 가운데 적어도 처음에는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던 이들을 비판했다. 이들 젊은 세대에게는 정확하게 올바른 노선을 취하는 것보다는 공개적으로 좌파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나이든 세대의 좌파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념과 정책에 관한 과거의 분열과 갈등이 공동의 행동을 향한 단합을 가로막곤 했다. 이들의 경우에는 현재의 새로운 여건들에 맞서기 위해 역사적인 갈등을 제쳐놓는다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웠다.
 

  
  이와 같은 태도의 차이는 중국의 좌파에는 세 개의 주요 그룹이 있다는, 널리 인정되는 분석과 상응한다. 여기서 세 개의 주요 그룹이란 ① 주로 당과 국가의 조직 속에서 경력을 쌓아오면서 많은 경우 처음에는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받아들였으나 그 뒤 개혁정책이 지닌 자본주의적 성격이 점점 더 분명해지자 그에 대한 반대로 입장을 바꾼 '옛 좌파' ② 마오의 지도 아래 중국 사회주의의 혁명적 시대에 추진된 정강정책을 꾸준히 지지해왔고, 주로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중적 기반을 두는 '마오주의자' ③ 1960년대 서구의 신좌파와 비슷하게 주로 대학과 새로 생겨난 비정부기구(NGO)들에 활동중심을 두면서 넓은 범위의 마르크스주의는 물론이고 더 넓게는 사회학적이고 사회민주주의적인 경향에도 문호를 개방하고 있지만, 흔히 옛 좌파보다는 마오의 지지자들과 보조를 같이 하기를 더 좋아하는 '새 좌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세 그룹 사이의 구분선은 고정적이지도 상호 배타적이지도 않다. 옛 좌파는 정부의 안과 밖에 걸쳐 사회 전반에서 발견되지만, 마오주의자들 중 다수와 새 좌파 중 일부는 당과 국가의 내부에도 존재한다. 서구의 좌파 분류범주 가운데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해서 그것과 중국의 좌파 분류범주를 과도하게 빗대어서는 안 되며, 특히 '새 좌파'의 경우가 그러하다. 왜냐하면 위와 같이 세 가지로 분류된 중국의 좌파 그룹은 각각 중국에서의 투쟁역사를 반영하는 고유의 중국적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최고위 지도자들이 모여 국가전략을 논의하는 장소인 해변도시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2001년에 극히 보기 드문 회의가 열렸다. 네 가지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의 그룹들이 한데 모인 이 회의는 정저우 시의 홍위병 지도자였고, 개혁정책이 시작된 뒤 여러 해 동안 투옥돼 있다가 풀려난 한 활동가가 조직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 모인 사람들은 개혁정책 전부에 대해 반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서로 간의 의견 차이를 인정하기로 했지만, 덩샤오핑이 추진한 자본주의의 복원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나갔다고 한 목소리로 비판했다.
 

  
  보다 최근에는 몇몇 유명한 연구소, 대학, 정부기관의 고위급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중국의 현재 상황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하기 위한 포럼이 열렸다. 이 포럼의 개막사는 베이징대학 총장이 했고, 참석자들은 이 포럼이 일회성 행사가 아닌 정기적인 모임이 되기를 바랐다. 고참 당원으로서 이 회의를 배후에서 조직하는 일을 맡아 한 사람은 적어도 고위급의 누군가가 지원하지 않았다면 이같은 회의는 열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저우에서는 이와 유사한 포럼이 지난 10여 년간 계속 열려왔다.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오늘날 중국에서 '자유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서구의 자유주의자보다 더 급진적인 사람도 흔히 포함된다)이 이끄는 정저우의 이 포럼에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폭넓게 참여한다. 이 회의 참여자들의 공통분모는 중국사회와 정부정책이 지금 나아가는 방향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배경과 접근방법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옛 좌파, 마오주의자, 새 좌파 등 세 가지 좌파의 범주 모두에 대체로 포함될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이들은 당과 국가의 기간조직 및 관련기관의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다. 이들의 사상도 그렇지만 이들이 여는 다양한 포럼과 회의들도 서로 겹치고 상호침투하면서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이념을 공유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끌어당기고 있다. 새로 생겨난 비정부기구들에는 강력한 좌파적 성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빈궁한 농촌 마을에 학교를 지어주는 일이나 사회가 보다 더 노동자와 농민에 의해 운영되도록 하는 일 등을 한다. 이와 같은 좌파의 부활은 노동계급의 대중적 투쟁력이 강화됨에 따라 중국이 사회적 위기에 대한 대응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중국의 사회적 위기는 점점 더 위협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도 좌파의 부활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국에서 이렇게 좌파가 부활하는 것이 마오 시대의 혁명적 사회주의를 오늘 당장 되살려낼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그럴 가능성 자체는 만들어내고 있다.
 

  
  좌파가 이런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준 두드러진 사례 중 하나로, 2004년 10월 한 무리의 '원로당원, 기간당원, 군부인사, 지식인'들이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보낸 편지를 들 수 있다. "현재의 정치지형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의견"이라는 제목의 이 편지는 정저우 4인의 전단에 비해 그 어조가 겸손했고, 개혁정책이 이룬 경제적 성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다루어진 주제는 매우 비슷했고, 교정조치를 취해 "자본주의의 길"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의 길로 돌아가기를 요구하면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비판을 가한 점에서는 정저우 4인의 전단과 같은 정도로 투쟁적이었다.
 

  
  이 두 개의 문건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어쨌든 중국 내 좌파는 정저우 4인을 지지하는 서명을 받는 작업을 계속했고, 새 좌파 중 일부는 정저우 4인이 내건 대의명분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이들을 비롯한 마오주의자 활동가들을 옹호해주었다. 그리고 이런 새 좌파의 행동은 옛 좌파들로 하여금 후 주석 앞으로 보낸 편지에 쓴 내용과 같은, 그들이 오래 전부터 품어온 비판을 공개적으로 제기할 수 있도록 운신공간을 넓혀주었다. 초기 혁명투쟁에 참여했던 원로당원들이 당과 국가의 현 정책에 대해 이처럼 기꺼이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1999년에만 해도 나이든 세대의 중국 내 좌파와 토론을 하다보면 개혁정책의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스스로를 억제해야 한다고 느끼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예전의 지도자들은 물론 그들과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 의견을 보다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에 따라 이제는 과거가 현재에 정보를 주고, 좌파 중 어느 한 부분의 행동이 다른 부분들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단지 이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상황이다. (다음 회에 계속)
 
 
   
 
  로버트 웨일/미국 시민운동가,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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