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이명박 현상,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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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pssp@jinbo.net
이명박의 기세가 좀처럼 꺾일 줄 모르고 있다. 도곡동 땅투기, BBK 주가조작사건도 소용이 없다. 조선일보 김대중은 아예 노골적으로 “어차피 선거는 ‘덜 나쁜 사람’(lesser of the evils)을 선택하는 제도”이라며, 이명박 비리가 별 문제 될 것 없다는 식이다. 게다가 노무현정권의 무능부패는 어느 때부터인가 “좌파의 실패”로 둔갑했다. 현 정권의 실정과 반민중성에 분노한 대중의 선택은 ‘좌파정권 심판’을 내걸은 이명박, 이회창에게 온통 쏠려 있다. 마치 보수=반민중적 정치이념, 진보=민중적 정치이념이라는 근대정치이념의 기본 도그마가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보수화에 대처하는 두 가지 대응 : 탈주냐 반보수 연합이냐

전형적인 반응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국민이 노망났다”는 김근태 식의 반응이다. 민중생존을 파탄 내버린 정권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김근태의 발언은 후안무치하고 오만방자한 지껄임에 불과하다. 조금 더 진지하고 좌파적인 견해로는 이진경식의 반응이 있다. 현 정세는 ‘잘못된 민중의 뜻’이 지배하는 국면이며, 이와는 다른 결의 정치를 위한 “탈주”와 “아방가르디즘”(민중의 뜻과 분리된 전위주의)이 필요하다는 것이 요지다. 근본적인 혁신과 대안형성이 중요하다는 면에서 심정적으로는 공감이 가는 진단이다. 그러나 ‘대중의 양면성’을 단지 옳고 그름과 진보, 보수의 기계적 댓쌍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뿐더러, 현실의 대중운동과 분리/괴리된 주관주의적 대응방향이라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다른 반응은 현 정세를 수구보수화로 규정짓고, 반보수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조류다. 오래전부터 기승을 떨쳐온 비판적 지지의 새로운 버전이라는 점에서 매우 낯익은 대응방향이다. 그러나 물론 노골적인 문국현/정동영 지지 그룹을 제외로 한다면, 민주노동당을 진보정치세력의 독자적 구심으로 상정한 가운데, 반보수연합을 추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비판적 지지 흐름과는 보다 복잡한 모양새를 띤다. 각 세력과 논자들마다 설명방식과 주장의 톤이 다르긴 하지만, 그 핵심요지는 결선투표제와 정당명부제를 도입하고, 민주노동당을 노동자 운동정당에서 진보개혁정당 혹은 민족민주정당으로 확대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민주노동당 자체를 ‘비판적 지지 정당’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명박/박근혜의 등장을 보수 반동적 흐름으로 경계하는 상식적인 외양을 띠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기화로 운동전선의 후퇴와 민주노동당의 우경화를 대안으로 내세우는 몰정세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의견이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상반된 두 가지 편향의 진단방식과 대응방향을 넘어서는 대안적 대응방향을 수립하기 위한 핵심 논점은 세 가지다.



첫째, 이명박 현상은 노망난 대중의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반신자유주의 투쟁 패배의 정치적 효과다.

국민의 60%가 이명박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꺾일 줄 모르는 이명박 지지의 기세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막대기를 꽂아놓아도 당선될 것이라는 한나라당 프리미엄 때문이겠지만, 그것은 왜 또 그러한 것인가. 원인은 "정권을 바꿔, 자기 생존의 여건을 개선하려는” 대중의 열망이 그만큼 확고한 탓이다. 그렇다면 대중은 노동자, 민중은 보수화된 것인가 혹은 노망이 나버리고 만 것인가.


대중의 생존적 열망은 그 자체로는 옳거나 그른 무엇이 아니고, 진보적 이념과 결합할 수도 보수적 이념과 결합할 수도 있다. 대중의 양면성은 옳은 대중과 틀린 대중이 공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세적 역동성과 다면성 그 자체를 의미할 뿐이다. 대중이 보수지향적인 성장-발전주의적 정치지도자를 선택했다고 해서, 대중의 생존적 열망이 보수 이념적인 무엇으로 변질된 것으로 비난하거나, 비대중적인 어디인가를 향해 탈주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작금의 이명박 현상은 거듭된 ‘반신자유주의 투쟁 패배의 정치적 후폭풍’이다.


좁고 낮은 수준의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노무현 정권에 대한 대중의 정치적 환멸과 생존적 요구를 받아 안는데 실패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대안은 지배정치의 보수화에 조응하는 전선의 후퇴와 우경화가 아니라, 대중의 열망의 깊이와 높이에 부합하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혁신과 확장이다.



둘째, 보수정치세력의 강력한 등장과 정치적 불안정성의 심화라는 위험 : 현재의 정치국면은 2002~2003년에 버금가는 정치공황의 도입부이다.

두 번째 논점은 이명박/한나라당 집권이 불러올 위험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이명박/한나라당 집권이 불러올 위험은 정치이념, 정책의 수구 보수적 반동화의 위험이라기보다는 김대중/노무현을 압도하는 강력한 보수적 정치선동을 구사하는 인민주의적 정치의 위험이다. 이명박의 이념적 지향은 확실히 보수적 색채를 띠지만, 그는 수구 이념적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관리자형 정치가다. 그가 민자당/신한국당 출신이라고 해서 민자당 군부세력이 귀환한 것은 아니다. “정권을 바꿔 경제를 살리자”는 그의 선거 캠페인, 또한 어떤 수구보수적인 정책이념을 표방 한다기보다는 내용 없는 인민주의적 선동에 가깝다. 그의 정책이념의 실체는 기껏해야 그 말 많고 탈 많은 대운하건설공약 뿐이다. 반면, 박근혜/이회창의 경우가 보다 보수 이념적이고, 권위주의적 퇴행을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 역시 신자유주의 우파라는 큰 틀의 정책적 컨센서스(금융-군사세계화, 노동유연화) 안에서, 노무현정권의 실정을 비난하는 것에 보수적인 정치적 레토릭을 동원하는 차원의 보수우파다. 따라서 이명박/한나라당, 혹은 박근혜/한나라당 현상은 김대중/노무현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 기조를 뒤집기보다는 이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의 변화를 뜻할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은 바뀐 것이 없는가? 물론 상황은 더 나빠졌다. 무엇이 더 악화되고 위험해진 것이란 말인가.


현 대선정국의 본질적 특징은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보수정치세력(과 이념)의 압도적 우위가 아니라, 어떤 선거결과로도 깔끔하게 매듭지어 질 수 없는 정치적 불안정성에 있다. 누가 이런 대선의 결과를 온전히 승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이명박의 고공 지지율이 고스란히 표로 연결되어 당선되더라도, 그의 지지율은 당선 다음날부터 내년 총선까지 몰아닥칠 온갖 비리의혹과 한나라당 내부분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번 대선은 정책과 이념이 아니라 온갖 고소고발과 검찰수사로 진행된 선거다. 이런 선거를 통해 등장한 정권이 어떤 정치적 정당성을 바탕으로 어떤 정치적 통합력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대선의 결과는 곧 총선정국의 지분을 둘러싼 극단적인 분열과 대립으로 연결될 것이다. BBK관련 의혹이 한 번의 검찰수사발표와 대선을 끝으로 마무리되지도 않을 것이고, 삼성 비자금 관련 사건이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어떤 수준으로까지 확대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2002년 대선 직후 노무현 정권은 여당의 분당과 야당의 탄핵으로 이어진 혼돈의 세월을 보냈다. 그 후 노무현 정권은 탄핵반대 촛불시위를 기화로 일시에 회복된 듯 보였지만, 장기 구조화된 경제위기와 잇단 측근 비리로 결국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이 같은 정치적 불안정성은 더욱 확대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2008년은 전후 최악의 미국경제 불황이 예고된 해이고, 이명박의 지지층은 노무현의 지지층보다 다양하고 단일한 결집력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노무현의 탄핵 촛불시위 같은 카드가 이명박에게는 없다.



셋째, 이명박/한나라당에 맞서는 우리의 대안은 비상한 정세인식과 태세에 걸 맞는 변혁의 정치다

결국 정리하자면 이렇다. 보수적 정치세력의 집권이 목전에 다가왔다. 이명박/한나라당의 집권은 보수정치이념의 재등장으로 인한 위험이라기보다는 대안도 없고 방향도 불분명한 정치적 불안정화의 위험이 증폭되는 계기다. 현재의 정치국면은 2002~2003년에 버금가는 정치공황의 도입부이다.


그리고 물론 이 같은 정세인식은 보수정치세력의 취약성을 밝혀 위안거리로 삼거나, 다음 정권의 예고된 실패를 점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명박/한나라당의 기세는 놀랍도록 크고 강하다. 그것은 당분간 강력한 정치적 실제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새로운 통합과 합의를 이루는 대안적 내용과 대안적 체계를 가지 못한 채 매우 불안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비이성적으로 폭압적일 수 있는 정치적 불안정성 자체다. 때문에 보수정치세력의 등장을 기화로 한 타협과 우경화(중도적 연합전선)라는 대안은 이 같은 정세적 변화의 맥을 헛짚은 공상에 불과하다. 현 정세에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난 10년간 구조화된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나날이 격화되고 심화되어온 정치적 불안정성이 단순히 지배정치의 취약성을 뜻하기보다는,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민주주의의 파괴와 대중의 정치적 환멸을 키워왔다는 점이다. 작금의 대선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보수 반동적 정치세력들의 대 부흥현상은 이러한 민주주의 파괴의 부산물이고, 대중의 정치적 환멸의 잠정적 도피처일 뿐이다. 심각하고도 본질적인 사실은 그 같은 파괴와 환멸이 비단 지배정치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연대를 파괴한 가장 큰 동력이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지난 10여 년간 이어져온 노동자 민중운동에 대한 퇴행적 탄압과 분열, 패배의 악순환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운동의 근본적 자기성찰과 혁신을 통한 대안적 연대창출이 지체된 결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도탄에 빠진 민중의 생존을 개선해줄 수 없는 것이 명확하다면, 그들의 예정된 파국은 민중의 더 큰 불행이 되지 않도록 변혁되어야 한다. 자기 생존을 갈망하며 한나라당을 선택한 대중들을 탓하고 원망하기 전에, 악화된 현실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생산하자. 보수 세력의 위용에 놀라 투쟁대오를 뒤로 물리기보다는 변혁과 이행의 정치복원으로 나아가자.

2007년12월04일 23: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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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론사회학회 ․ 한국과학기술학회 공동학술대회


“사회학과 과학기술학의 만남”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막중한 역할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으리만큼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사회체계의 관계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아직은 미흡한 실정입니다. 더구나 국내에서는 문과-이과를 구분하는 단절적 교육체제로 인해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가 시작에 불과합니다.  

최근 서구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접근이 활성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과학기술학(STS: Studies of Science, Technology & Society)'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지적 과업의 중요성은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력에 비례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국내에서도 사회학과 과학기술학 사이의 심층적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장점을 공유하고 한계를 보완하는 교차적 상호발전을 도모하는 일이 절실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한국이론사회학회와 한국과학기술학회에서는 학술진흥재단의 지원 하에 공동 학술심포지움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마련된 이 보람된 자리에 꼭 참여하시어 모임을 빛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과학기술학회장  김환석
한국이론사회학회장  김문조




1. 일시: 2007년 12월 1일 오후 2시


2. 장소: 고려대 국제관 321호


3. 행사 일정



1:45 ~ 2:00  등록
2:00 ~ 2:15  개회사
2:15 ~ 2:30  기조 발제 김문조(한국이론사회학회장)
2:30 ~ 2:45  기조 발제 김환석(한국과학기술학회장)

 


주제 발표 Ⅰ사회  이영희 (가톨릭대)


2:50 ~ 3:20  유비쿼터스사회로의 변화와 사회이론적 과제
발표: 서이종(서울대)
토론: 송위진(과학기술정책연구원)


3:20 ~ 3:50  과학기술학을 통한 사회학의 확장: "한의학의 과학화"와 "황빠현상," 두 사례연구를
중심으로
발표: 김종영(과학기술정책연구원)  
토론: 송성수(부산대)

 


3:50 ~ 4:00  휴식

 


주제 발표 Ⅱ 사회  김광기 (경북대)


4:00 ~ 4:30  대중의 과학이해(PUS)를 통해 본 과학기술학의 전통사회학 방법론 비판
발표: 박희제(경희대)
토론: 문용갑(성균관대)


4:30 ~ 5:00  과학기술학의 분석 개념으로서 젠더: 성인지적 과학과 기술 논의를 중심으로
발표: 박진희(동국대)
토론: 하정옥(가톨릭대)

 


5:00 ~ 5:30  종합 토론

 

 


주최: 한국이론사회학회 ․ 한국과학기술학회
후원: 한국학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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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계의 연구윤리 정립 노력 활성화를 위한 범 학회 심포지엄"

 


■ 일시: 2007년 11월 16일 (금) 13:30~18:30

■ 장소: 서울 팔래스 호텔 1층 로얄볼룸 (고속터미널 뒤편)

■ 주최: 한국과학기술학회, 한국과학사학회, 한국과학철학회, 한국생명윤리학회

■ 후원: 과학기술부

 


*** 행사일정 ***


13:30~14:00 개회식


- 개회사  정병훈 한국과학철학회장
- 축  사  박종구 과학기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 축  사  박찬구 한국생명윤리학회장

 


14:00~15:20 제1부


제1부 한국적 상황과 연구윤리의 쟁점들      사회: 홍성욱(서울대)


저자 자격 부여의 윤리                     전방욱(강릉대)
이중게재의 문제점과 과제                 함창곡(한양대)∙배종우(경희대)
국내 실험실 문화와 멘토링 현황         황은성(시립대)
제보자 보호와 연구기관의 책임          김환석(국민대)∙김명진(성공회대)

 


15:20~15:30 coffee break

 


15:30~16:50 제2부


제2부 연구윤리 내재화를 위한 제도적 정책     사회: 신중섭(강원대)


연구윤리 실천을 위한 외국의 제도               김옥주(서울의대)
국내 대학의 연구윤리 정착을 위한 노력        조진호(서울대 연구처)
연구윤리 정립을 위한 학회의 역할과 노력     김용권(서울대)
연구윤리 정착을 위한 제도적 장치 모색        홍성욱(서울대)

 


16:50~17:00 coffee break

 


17:00~18:30 제3부 토론


- 지정토론: 이상욱(한양대), 조은희(조선대), 이현숙(서울대),
      이영희(가톨릭대), 박진희(동국대), 민병주(원자력연구원),
      안재환(아주대), 전상헌(과기부)
- 자유토론
-  폐회사  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18:30~20:00 만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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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원신문 156호 _2007년 11월 6일(화)

[기획서평] 테리 이글턴 새롭게 읽기 




‘세련된’ 변증법이 아닌, 현실에 밀착된 변증법을 향하여



●『성자와 학자』(차미례 역, 한울, 2004)

●『우리 시대의 비극론』(이현석 역, 경성대 출판부, 2006)

●『성스러운 테러』(서정은 역, 생각의 나무, 2007)

 

 

 

 

 

 아일랜드 출신인 테리 이글턴의 첫 저서는 『망명자들과 이민자들: 근대 문학 연구』(1970)이다. 이 책은 제대로 된 20세기 영국문학은 영국 본토 출신 보다는 아일랜드 출신(제임스 조이스, 예이츠), 폴란드 출신(콘래드) 등 제3세계 출신이거나 영국 내의 제3세계라고 할 수 있는 빈한한 탄광출신 (D. H. 로런스)이거나, 미국에서 영국으로 귀화하거나(T. S. 엘리어트) 영국에서 미국으로 귀화 (W. H. 오든) 했던 작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문화주의가 횡행할 때에도 이글턴은 어디까지나 ‘우선적으로 계급과 민족을 거쳐서만’ 문학과 예술을 논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것이 이글턴적 맑스주의의 특이성을 구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노동계급 출신과 아일랜드 출신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다.

 70년대 중반은 이글턴이 한참 알튀세를 받아들여서 매우 ‘영국적인’ F. R. 리비스의 이른바 휴머니즘적 문학이론 및 비평을 비판하고 나서던 때였다. 『비평과 이데올로기』(1976), 『맑스주의 문학이론』(1976) 등이 이 시기의 저서이다. 그 후 『발터 벤야민, 혹은 혁명적 비평을 위하여』(1981)와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이론 등을 소개하는 『문학이론입문』(1983)을 쓰면서는 이전의 이른바 ‘과학주의적’ 비평에서 탈피하여 정치적 비평, 수사학적 비평을 주창하고 나섰다. 물론 이전의 작업에서 이미 ‘문학’과 ‘작가’의 아우라는 ‘생산’이라는 이름하에 탈신비화된 것이지만, 더 나아가 문학교육 및 연구제도 자체의 정치성을 전면화하면서 특히 ‘영문학’, ‘정전’ 등이 푸코적인 ‘권력’ 관계에 의하여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었고, 그 파급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비평을 표방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푸코 이래로 모든 것이 ‘이미’ 정치적임이 밝혀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정치적’ 비평은 ‘더’ 정치적이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질적으로 다른 ‘정치’를 말하는 것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것이 정치적임을 계속적으로 주장해야 하는 것인지 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글턴이 이론적으로 명쾌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른바 헤겔주의적 혹은 아도르노적인 ‘정치성’(프레드릭 제임슨을 포함하여)은 ‘변증법’이라는 밤에 모든 대립을 해소해버린다고 비판하는 점에서,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저 계급적이고 민족적인 거친 현실, 그것을 직시하는 바로 그것이 정치라고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저 세련된 변증법이 밥 먹여주냐’라는 것이다. 이는 브레히트의 거친 진실, 혹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세속적’ 비평과 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가장 생존과 직결되는 이 너무나 ‘자명한’ 것들이 ‘이론’과 ‘언어’라는 이름으로 증발되기 일쑤라는 점 또한 이 후기 자본주의 현실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성자와 학자』(1987)라는 소설은 풍자와 위트라는 수사학을 동원하여 아일랜드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는 한편, 그 참상이 참상임을 전달하는 데 있어 언어가 갖는 한계의 문제를 다루고, 1916년 부활절 봉기의 현실과 그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이 과연 헛된 죽음인지 아닌지를 논구하고 있다. 미하일 바흐친의 형인 니콜라이 바흐친은 먹고 마시는 데 탐닉하는 그야말로 바흐친적(카니발적) 인물인가 하면, 동성애적 욕망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여기에 아일랜드 시민군 총사령관 제임스 코널리가 총살당하기 직전에 이들과 잠시 합류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코널리의 행위도 하나의 ‘언어 게임’이라고 주장한다. “그건 아마도 육체의 언어, 다시 말해서 죽음, 순교, 부활의 언어라고 부를 수 있겠죠. 다른 모든 언어를 번역해낼 수 있는 한 개의 순수한 언어요.” 이글턴의 결말에 의하면 코널리는 총살당함으로써 결국 하나의 언어로만 남지만, 그것은 “새 공화국의 탄생을 알리는 첫 울음소리”가 되고, 비트겐슈타인은 그 앞에서 통렬한 패배감에 사로잡힌다.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면 나는 끝장이다. 만약에 저 작자가 성공한다면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글턴은 실재 앞에서 언어는 무력하지만, 그 무력하다는 사실 또한 언어를 통해서 말해진다는 역설에 주목한다. 결국 언어의 힘을 믿어야 한다. 그의 노력의 상당 부분은 부르주아 혹은 우파가 전유물로 사용하는 언어를 해체하고 탈환하는 작업에 쏟아진다. 이는 단순히 미학적, 혹은 문학적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학 및 문학을 적극적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은, 문학 및 문학제도를 탈신비화시키고 정전논쟁과 ‘문학에서 문화로’라는 슬로건을 촉발시킨 장본인이 어째서 과거의 미학이나 문학에 ‘집착’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셰익스피어나 콘래드를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구현되어 있다고 비판한 다음 내치기보다는 역사와 정치의 장으로 끌어내어 수사학적 설득의 자료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가 넘나드는 영역은 광범위하다. 철학, 미학, 역사, 소설, 시, 희곡 등 그가 ‘정치적’ 수사를 위하여 동원하는 언어와 텍스트의 집적체는 방대하고, 특유의 신랄함과 위트로 무거운 주제들을 적절하게 요리하여 전달하는 재능은 놀라운 바가 있다.

 

 


비극을 낳는 실재로서의 자본주의

『우리 시대의 비극론(원제:달콤한 폭력?비극의 사상)』(2003)은 비극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비극론에 대하여 반기를 든다. 비극의 핵심이 죽음, 순교, 속죄양, 정화, 부활 등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신화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고통당하고 죽음을 당하며 내쳐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하나같이 그 안에 역설을 포함한다. 죽음과 순교는 각자의 몫으로 일어나지만, 공동체의 생존과 재생에 관여하고, 그것은 다시 말해 그러한 죽음을 필요로 할 만큼 공동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포는 개개의 폭력적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을 넘어서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죽음이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전지구적 체계 즉 실재 자체가 공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이글턴은 비극이란 치명적인 하마르티아를 가진 영웅적 인물이 운명적으로 몰락하되 실재에 대한 비전을 얻는 것이라는 식의 비극론에 내재한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비극을 지금 이 시대에 전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핵심을 지구적 자본주의의 작동에 없어서는 안 될 희생양들, 박탈당한 다수의 계급현실에 두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글턴의 수사적 전략을 읽어 본다면, 비극이라는 고급화되어 있는 장르의 핵심을 오늘날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부여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이 계급에게 돌리는 한편, 이 비극을 낳는 ‘실재’로서의 자본주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헤겔적인, 더 변증법적인


『성스러운 테러』(2005)는 이 비극론의 연장선상에서 종교와 윤리의 문제를 좀더 적극적으로 다룬다.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지적하고 있듯이 윤리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한다는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해결이 가로막혀 있다는 징후일 수 있다. 이를테면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부르주아가 완전히 패권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기대가 전무하던 시대에 박애주의에 기초한 종교분파들이 극성을 부리던 것을 상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윤리의 언어를 먼저 장악하는 쪽은 지배계층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유와 정의와 평등은 부르주아의 전유물이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이글턴은, 이 말들을 그냥 저들이 가져가 마음대로 쓰게 내버려둘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치 니체가 선악의 계보를 따라가서 그 계급적 성격을 밝혀내듯이 계보학적으로 추적하고 해체하여, 탈환해야 것은 탈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테러라는 말은 지배계급이 그 타자에 대하여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런데 계보학적으로 따져 올라가보면 (이글턴은 아감벤의 작업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것은 희생양이 가진 ‘성스러움’의 이면이다. 이 양면성이 서로 분리가 되면 희생을 위한 희생이 되어버리거나, 폭력을 위한 폭력이 되어버려 단지 죽음충동의 먹이가 되고 만다. 아니면 희생과 폭력이 도구화되어 버려 그 성스러운 성격을 잃고, 목적과 수단이라는 이원론의 끝나지 않는 지리한 갈등 속에서 ‘테러리즘’이 된다. 이글턴은 데리다처럼 죽음 자체에 뭔가 불가해한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이 갖는 성스러움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삶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개인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접근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알랭 바디우와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른바 인간성 내지 ‘인권’을 본질화하게 되면 또다시 근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이것은 다시 다른 것을 수단화하는 테러리즘으로 갈 수 있음도 경계한다. 어쩌면 이글턴의 작업은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헤겔적인 것과 변증법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젝을 경유한 (지젝은 다시 라캉을 경유한다) 것이기는 하지만 헤겔이 이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보다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경덕│연세대 영문과 강사 malte03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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