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자네는 언제나 내게 예스맨이었다. 내게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었고, 나의 실수에 늘 관대했으며, 심지어 나를 걱정하고 위로할 때도 많았다. 자네는 본성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어제 자네와의 술자리에서 그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는 선배보다 동기나 후배와의 관계가 편했다고 회상했고, 자네는 그 반대였다고 대답했다. 나는 말로만 예스맨을 미워하는 위선자임이 분명하다. 이 말을 자네가 들었다면 '형은 위선자 아니에요'라고 했을 것이다. 어제 그런 자네에게 내 많은 치부 중 몇을 드러냈고, 자네는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역시 자네는 예스맨임이 확실하다.


자네가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다른 사람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보다도 훨씬 반가웠다. 특히 자네의 연애 소식이 그러했다. 변변한 연애 경험이 없는 내 생각에도 연애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대학시절 나는 자신이 결핍의 존재라는 사실도 모르는 못난이였다. 결핍을 모르니 사랑을 모를 수밖에. 최근 밀려오는 수많은 후회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앞으로 자네의 연애사업이 잘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여자 친구에게 자네가 줄 수 있는 많은 것을 주라고 권하고 싶다. 손에 쥔 것 중 하나를 내려놓아야 다른 하나를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 화투의 교훈 아니던가. 생각하면 나는 가진 것을 지키기에 급급한 멍청이였다. 하나쯤 내려놓아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나의 실패담이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어제 술자리에서 잠깐 현실감각이란 말이 화두가 되었었다. 자네나 나나 현실감각이 뛰어난 청년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네도 조금씩 생활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네의 입에서 집값과 월급,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다소 어색한 단어들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과거에 어색했던 단어들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그 당연한 일을 하지 못해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자네가 생활인이 되어 감을 보면서 스스로 불편해 하지 않았으면 한다. 나아가 자네가 거기서 행복을 느끼기를 바란다. 지금 자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적고 보니 늘 우울하면서도, 진정한 생활인이라 할 수 없는 내가 끼적이는 또 하나의 실패담이 되고 말았다.


자네와 내가 같은 고등학교를 2년 동안 함께 다녔다는 사실을 대학 2학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어제 내가 자네에게 드러낸 치부도 이와 같을 것이다. 너무나도 명백한 것을 나만 몰랐던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 나만 몰랐던 것이다. 그 결과는 이렇듯 후회와 실패담의 연속이다. 어쩌면 나는 예스맨인 자네에게 실패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뜬금없이 자네를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의 술자리에는 그런 이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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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언제나 자네가 먼저였다. 함께 밥을 먹자 말한 것도 자네가 먼저였고, 한 잔의 술을 권한 것도 자네가 먼저였으며, 숱한 소풍과 여행을 제안한 것도 자네가 먼저였다. 이름을 불러준 것도 자네가 먼저였고, 손을 내밀어 준 것도 자네가 먼저였으며, 마음을 알아준 것도 자네가 먼저였다. 그 시절 나는 자네를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참으로 쉽고도 편한 우정이었음을 모르고 벗을 사귀었으니, 그것이 내 철없음의 또 다른 증거다.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다. 다시, 자네가 나를 먼저 찾았다. 자네와의 재회에 몇 가지 특별한 우연이 겹쳤으나, 그것은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오랜 시간 자네는 대답 없는 나를 부르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것이 우리 재회의 이유가 아니겠는가. 


자네는 우정의 영원함과 재회의 기쁨을 말했으나, 벗이여 미안하다. 나는 영원을 믿지 않는다. 또한 나는 그닥 기쁘지도 않다. 이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아직 두렵고 조심스럽다. 벌써 나는 다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 아마 자네도 그것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자네에게 털어놓은 일들이 전부이겠는가? 자네에게도 차마 보이지 못한 나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들이 역겨울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세상의 짐을 모두 짊어진 양 굴긴 싫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는 법이다. 다만 내게 자네의 이야기를 들어줄 만큼의 여유가 없으니, 그것이 또한 미안한 것이다. 아, 전생에 자네는 내게 큰 빚을 지었음이 분명하다. 이번 생에 내가 자네를 먼저 찾는 날이, 자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는 마법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네를 만나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나니 조금은 편안해진 기분이다. 자네 덕에 다른 벗들에게 연락할 용기도 얻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부터는 안 해 본 짓을 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했건만 쉽지 않다. 그것은 온전히 내 몫일 것이다. 십 년의 소회를 이토록 밋밋하게 말하는 나 자신이 나도 싫다. 그러나 이것이 나다. 자네가 벗이라 불러준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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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 2021-04-21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밤의 순댓국 맛있었지~
 

오랜만의 서재 방문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9호선, 4호선, 3호선, 6호선, 공항철도. 중간 중간 택시와 버스도 탔다. 지하철 노선도만 봐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노선도에서 잠시 시선을 옮겨 앞에 서 계신 어르신의 신문을 엿본다. 아이돌 가수와 같은 문 대통령의 인기에 언론도 영합하고 있단다. '문비어천가'를 들먹이면서 비판 없는 찬양은 결국 정권에 독이 될 것이란 충고를 하려는 모양이다. 


불순하기 짝이 없게도 나는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을 떠올렸다. 그의 집권 시절, 나는 그의 행보가 연예인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완벽하게 연출된 방법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인기 많은 연예인. 어떻게 해야 팬들이 환호하는 지를 잘 아는 노련한 연예인. 한때는 그의 팬클럽에나 어울릴 법한 이름을 내세운 정당이 만들어지기도 했던 연예인, 아니 정치인.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신문 우측 상단으로 눈길을 준다. 역시나 조선일보다. 아, 그의 집권 시절에도 조선일보가 이런 사설을 냈더라면 하는 생각은 정녕 쓸 데 없는 생각인가.


조선일보는 믿을 것이다. 이것이 정녕 정론의 자세라고, 이것이 정녕 국익을 위한 충고라고. 선조도 믿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명나라로 도망치는 것이 조선을 살리는 길이라고. 명성황후도 믿었을 것이다. 임오군란의 와중에 청을 끌어들인 것은 사익이 아닌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이승만도 믿었을 것이다.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치는 것만이 적화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그도 자신의 아버지가 일으킨 쿠데타를 가리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었다.


제기랄, 문제는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선택이 최악일 수 있다고 의심하지 않고, 최선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도 그러하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정말 양비론이 싫지만, 나의 상념은 양비론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다시 한 번, 제기랄. 선택에는 쉬운 길과 옳은 길이 있다고 했다. 나는 비겁하다. 굳이 어려운 길을 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쉬운 길을 가면서도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우기지는 않으려 한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것만은 지키자고 생각해낸 것이 고작 이 정도다. 역시 나는 겁쟁이에 위선자다.


충무로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탄다. 나는 일곱 번째 칸에 탔다. 토요일 오후의 북적이는 지하철에 난 데 없이 자전거가 등장했다. 한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앞으로 움직인다. 통로에 사람이 서있으면 경적을 울린다. 나는 그 소리가 참으로 뻔뻔하게 느껴진다. 사람이 어찌 이리 무례할 수가 있는가. 경적을 몇 차례 울린 끝에 여섯 번째 칸으로 이동한다. 보아하니 앞 칸 사정이 만만치 않다. 노인은 개의치 않고 제일 앞 칸까지 자전거를 끌고 갈 기세다. 타고 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노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노무현을 떠올렸다. 자전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연 지하철은 서민의 발이기만 한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노선으로는 모자라는지, 다들 신규 노선을 원한다. 정치인도 유권자도, 집 주인도 세입자도, 자동차가 있어도 또 없어도. 물론 나도 원한다. 의정부와 용인과 김해의 경전철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지하철 역명에 담긴 부동산의 경제학은 또 어떤가? 신목동역과 신중동역이라는 이름에 담긴 욕망은 과연 그 지역 주민들만의 욕망일 뿐인가.


지하철은 욕망의 덩어리다. 노무현은 그 욕망의 덩어리 안으로 자전거 하나에 몸을 싣고 홀연히 들어섰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말은 이미 우리가 지켜본 바다. 이제 9년의 세월이 흘러 노무현의 친구가 다시 자전거를 탔다. 지하철 안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힘들고 지쳤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욕망마저 지친 것은 아니란 것을. 그것은 어쩌면 더 강렬해졌다는 것을. 이 욕망의 덩어리 안을 비집고 헤쳐 나가려면 때로는 뻔뻔하고, 때로는 무례할 필요도 있다는 것을. 그 모습을 보며 9년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갈 것임을.


지난 가을부터 올봄까지, 많은 사람들은 각자가 응원하는 자전거가 지하철 맨 앞 칸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를 소망했었다. 이제 겨우 노무현의 친구가 탄 자전거가 출발했을 뿐이다.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헌법을 지키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아는 자전거 주인이 지하철 운전석에 앉기를. 영화를 보지 않아 설국열차의 반전은 잘 모르지만, 현실 속의 반전은 잘 알고 있다. 바로 자전거를 응원하는 사람과 지하철 안을 욕망으로 가득 채운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 어쩌면 여기에서 노무현의 실패와 비극이 기인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부디 노무현의 친구는 실패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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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은 블랙리스트 관련 무죄 판결로 풀려났고, 안철수, 박지원, 이용주는 제보조작 관련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몰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시종일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고, 판사와 검사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을 대신해 책임질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박근혜와 이재용 역시 재판에서 몰랐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박근혜는 일국의 대통령이었다. 조윤선은 정부 부처의 수장이었다. 안철수는 한 공당의 대선 후보였고, 박지원과 이용주는 각각 그 당의 대표였으며, 공명선거추진단장이었다. 이재용은 현재 굴지의 대기업 부회장이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들은 허수아비, 얼굴마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허수아비 공화국이고, 얼굴마담 공화국이다.


종편에 이른바 전문가라는 자가 등장해 박근혜에게는 전두환의 장세동과 같은 '좋은' 부하가 없음을 한탄한다. 박근혜가 헌법과 법률을 어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하들과 인간관계를 잘 맺어오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는 투다. 기가 찰 노릇이다. 법을 지키는 것보다 의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아직도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사고를 하는 자들 때문에 내부고발자들이 고통을 받는다. 이명박의 선진화와 박근혜의 비정상의 정상화가 실패한 이유도 바로 이런 사고 때문이다. 이들은 왜 허수아비, 얼굴마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오너'이기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 남경태에 따르면 동양의 지배자는 언제나 오너였다. 오너가 아니라 관리자였던 서양의 지도자들은 몸소 전장에 나아가 전공을 세우려 노력한 반면, 동양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전쟁이 나면 도망가기 바빴다. 군왕이 곧 사직이었고, 국가였기에 자신부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마자 선조는 의주로 도망쳤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도망친 것도 모자라 한강다리를 끊어버렸다. 선조가 전쟁 후에도 왕위를 지킨 것은 그렇다 쳐도,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는 걸 보면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아직도 우리는 무늬만 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의 전대 출마 소식을 전하는 앵커들은 그를 창업주라 부른다. 그 당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뉴스에서 이재용을 비롯한 재벌가 소식을 전할 때면 오너 일가라는 말이 꼭 등장한다. 그 기업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당연시한다는 사실이다. 나부터가 그들을 주인으로 또 오너로 인정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어느 한 사람이 공당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들이 아니었던가? 아니, 법인격을 가진 법인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둘째, 이들은 책임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한다. 이들의 '모른다'는 정말 몰랐다는 무능의 고백이 아니라, 본인 대신 책임질 사람이 있다는 힘의 과시이다. 따라서 몰랐다는 말을 하면서도 이들은 부끄럽지 않다. 뻔뻔하면 뻔뻔할수록 이들의 힘은 강한 것으로 판명되고, 따르는 무리를 결속시킬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조폭의 논리보다 못한 것이리라. 나는 재판에서 부하에게 얼굴마담 소리를 들었다는 이재용이 무죄로 풀려나더라도 어떻게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잘못된 것이었다. 부하가 구속되고 본인이 풀려난다면 그의 힘은 더 강해질 것이 분명하다. 박근혜도 그러하고 안철수도 그러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주인'은 몰랐고, 내가 알아서 했다고 말해줄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흔히들 그 힘을 권력이라 부른다. 한병철에 따르면 권력은 폭력이나 영향력과는 다른 것으로서 억압과 금지와 같은 부정적 맥락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권력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책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대목은 권력이 느껴진다면 이미 권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박근혜, 조윤선, 안철수, 박지원, 이용주 그리고 이재용은 권력자인가, 아닌가? 그들의 부하들이 그들에게 동화되어 스스로 알아서 따르는 것이라면 정말 그들은 권력자인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권력은 과연 무엇을 생산하는 권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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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소셜 - 사피엔스에 새겨진 ‘초사회성’의 비밀
장대익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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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손가락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행동에 '자기가 관심을 두는 대상에 다른 사람도 같이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사회적 기술'이라는 거창한 설명이 붙었다. 이 단순하면서도 거창한 행동을 보노보나 침팬지는 하지 못한단다. 생각해보면 누군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그 손가락을 보지 않고 달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보노보나 침팬지도 하지 못하는 이 어려운 일을 애완견이 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단다. 이걸 보면 가리키기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 정서에 기반한 사회적 능력임이 맞는 것 같다.


'인간이 눈을 통해 의미 있는 협력 시그널을 주고받는다'는 이 가설에서 주목하는 것은 인간에게 두드러진 흰 공막이다. 이 흰 공막 때문에 우리 인간은 눈의 윤곽과 눈동자의 위치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상대방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생각과 느낌, 의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눈이 인지 장치인 동시에 사회적 장치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눈은 보는 장치인 동시에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는 말로 들려 흥미로웠다. 저자는 타인과 협력하며 살아가고 싶다면 그 사람이 보는 곳을 보라는 처방을 내리고 있다. 뒤에서 나는 이 처방에 더 보탤 말이 있다.


마음 이론을 다룬 장의 핵심은 틀린 믿음 테스트다. 이 테스트는 자신의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오직 4세가 지난 인간만이 이 테스트를 통과한단다. 침팬지를 비롯한 다른 영장류들도 '어느 정도는 타 개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인간처럼 타 개체의 틀린 믿음까지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 읽기의 능력은 무리를 지어 살아가야 했던 인류에게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다시 말해 이 능력은 자연환경에 적응한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복잡성에 적응한 결과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전한다. 이야기의 기원과 관련해서 나는 쾌락 버튼 가설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이 책에서는 적응주의 문학론의 관점에 무게를 두고 있다. 스토리텔링 능력은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하거나, 생존과 번식에 관한 동선을 미리 연습하기 위해 진화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정서를 규제하고 배양하는 기능'이 있다는 주장에 이른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해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 소비와 높은 수준의 인지 능력이 필요하다.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의 기원을 파고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공감과 이해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문제는 개인의 경험과 사회의 문화에 따라 그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감과 이해 지수를 높이려면 다양성 지수를 높이라고 말한다. 동성애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과 동성애 커플을 이웃으로 둔 사람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상상력의 차이를 짐작해보라고 말한다.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대학 입시를 통과해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문화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창의성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획일성은 공감과 이해 능력의 쇠퇴로 이어진다고 경고한다.


이 책은 인간의 정체성을 사회성에서 찾고, 그 사회성을 '초사회성'이라 명명한 후 그것을 탐구하는 책이다. 그 과정에서 손가락과 눈동자, 그리고 마음과 이야기가 등장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류 전체가 아닌 나 개인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게 되었다. 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나 내 두 눈이 바라보는 곳에 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에 있을까? 개인의 경험과 개인을 둘러싼 배경이 타인에 대한 이해력 증진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본 立場이란 두 글자가 떠올랐다. 어쩌면 나의 정체성은 다른 데에 있지 않고 내가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상대가 바라보는 곳을 보라는 저자의 처방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상대와 같은 자리에 서라는 것이다. 상대와 같은 곳에 서 있지 않다면 상대가 바라보는 곳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본다 해도 다르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 읽기는 인간의 훌륭한 사회적 능력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와 공감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상대와 같은 곳에 선다는 것을 저자의 말로 바꾸면 다양함을 경험하는 일, 다양함의 문화를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타인의 자리에 서 보지 않고 계속 내 자리에만 서 있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계속 지금처럼 살면 앞으로도 지금만큼만 이해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경험의 폭이 넓어지지 않으면 앞으로도 지금의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두려워지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남은 평생을 지금처럼 살다가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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