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 소셜 - 사피엔스에 새겨진 ‘초사회성’의 비밀
장대익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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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손가락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행동에 '자기가 관심을 두는 대상에 다른 사람도 같이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사회적 기술'이라는 거창한 설명이 붙었다. 이 단순하면서도 거창한 행동을 보노보나 침팬지는 하지 못한단다. 생각해보면 누군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그 손가락을 보지 않고 달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보노보나 침팬지도 하지 못하는 이 어려운 일을 애완견이 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단다. 이걸 보면 가리키기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 정서에 기반한 사회적 능력임이 맞는 것 같다.


'인간이 눈을 통해 의미 있는 협력 시그널을 주고받는다'는 이 가설에서 주목하는 것은 인간에게 두드러진 흰 공막이다. 이 흰 공막 때문에 우리 인간은 눈의 윤곽과 눈동자의 위치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상대방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생각과 느낌, 의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눈이 인지 장치인 동시에 사회적 장치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눈은 보는 장치인 동시에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는 말로 들려 흥미로웠다. 저자는 타인과 협력하며 살아가고 싶다면 그 사람이 보는 곳을 보라는 처방을 내리고 있다. 뒤에서 나는 이 처방에 더 보탤 말이 있다.


마음 이론을 다룬 장의 핵심은 틀린 믿음 테스트다. 이 테스트는 자신의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오직 4세가 지난 인간만이 이 테스트를 통과한단다. 침팬지를 비롯한 다른 영장류들도 '어느 정도는 타 개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인간처럼 타 개체의 틀린 믿음까지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 읽기의 능력은 무리를 지어 살아가야 했던 인류에게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다시 말해 이 능력은 자연환경에 적응한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복잡성에 적응한 결과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전한다. 이야기의 기원과 관련해서 나는 쾌락 버튼 가설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이 책에서는 적응주의 문학론의 관점에 무게를 두고 있다. 스토리텔링 능력은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하거나, 생존과 번식에 관한 동선을 미리 연습하기 위해 진화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이야기에는 '사람들의 정서를 규제하고 배양하는 기능'이 있다는 주장에 이른다. 이야기를 만들고 이해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 소비와 높은 수준의 인지 능력이 필요하다.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의 기원을 파고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공감과 이해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문제는 개인의 경험과 사회의 문화에 따라 그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감과 이해 지수를 높이려면 다양성 지수를 높이라고 말한다. 동성애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과 동성애 커플을 이웃으로 둔 사람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상상력의 차이를 짐작해보라고 말한다.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대학 입시를 통과해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문화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창의성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획일성은 공감과 이해 능력의 쇠퇴로 이어진다고 경고한다.


이 책은 인간의 정체성을 사회성에서 찾고, 그 사회성을 '초사회성'이라 명명한 후 그것을 탐구하는 책이다. 그 과정에서 손가락과 눈동자, 그리고 마음과 이야기가 등장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인류 전체가 아닌 나 개인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게 되었다. 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나 내 두 눈이 바라보는 곳에 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에 있을까? 개인의 경험과 개인을 둘러싼 배경이 타인에 대한 이해력 증진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본 立場이란 두 글자가 떠올랐다. 어쩌면 나의 정체성은 다른 데에 있지 않고 내가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상대가 바라보는 곳을 보라는 저자의 처방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상대와 같은 자리에 서라는 것이다. 상대와 같은 곳에 서 있지 않다면 상대가 바라보는 곳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본다 해도 다르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 읽기는 인간의 훌륭한 사회적 능력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와 공감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상대와 같은 곳에 선다는 것을 저자의 말로 바꾸면 다양함을 경험하는 일, 다양함의 문화를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타인의 자리에 서 보지 않고 계속 내 자리에만 서 있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계속 지금처럼 살면 앞으로도 지금만큼만 이해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경험의 폭이 넓어지지 않으면 앞으로도 지금의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두려워지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남은 평생을 지금처럼 살다가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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