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선은 블랙리스트 관련 무죄 판결로 풀려났고, 안철수, 박지원, 이용주는 제보조작 관련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몰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시종일관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고, 판사와 검사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을 대신해 책임질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박근혜와 이재용 역시 재판에서 몰랐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박근혜는 일국의 대통령이었다. 조윤선은 정부 부처의 수장이었다. 안철수는 한 공당의 대선 후보였고, 박지원과 이용주는 각각 그 당의 대표였으며, 공명선거추진단장이었다. 이재용은 현재 굴지의 대기업 부회장이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들은 허수아비, 얼굴마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허수아비 공화국이고, 얼굴마담 공화국이다.
종편에 이른바 전문가라는 자가 등장해 박근혜에게는 전두환의 장세동과 같은 '좋은' 부하가 없음을 한탄한다. 박근혜가 헌법과 법률을 어긴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하들과 인간관계를 잘 맺어오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는 투다. 기가 찰 노릇이다. 법을 지키는 것보다 의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아직도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사고를 하는 자들 때문에 내부고발자들이 고통을 받는다. 이명박의 선진화와 박근혜의 비정상의 정상화가 실패한 이유도 바로 이런 사고 때문이다. 이들은 왜 허수아비, 얼굴마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오너'이기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 남경태에 따르면 동양의 지배자는 언제나 오너였다. 오너가 아니라 관리자였던 서양의 지도자들은 몸소 전장에 나아가 전공을 세우려 노력한 반면, 동양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전쟁이 나면 도망가기 바빴다. 군왕이 곧 사직이었고, 국가였기에 자신부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마자 선조는 의주로 도망쳤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도망친 것도 모자라 한강다리를 끊어버렸다. 선조가 전쟁 후에도 왕위를 지킨 것은 그렇다 쳐도,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는 걸 보면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아직도 우리는 무늬만 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의 전대 출마 소식을 전하는 앵커들은 그를 창업주라 부른다. 그 당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뉴스에서 이재용을 비롯한 재벌가 소식을 전할 때면 오너 일가라는 말이 꼭 등장한다. 그 기업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당연시한다는 사실이다. 나부터가 그들을 주인으로 또 오너로 인정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어느 한 사람이 공당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들이 아니었던가? 아니, 법인격을 가진 법인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둘째, 이들은 책임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한다. 이들의 '모른다'는 정말 몰랐다는 무능의 고백이 아니라, 본인 대신 책임질 사람이 있다는 힘의 과시이다. 따라서 몰랐다는 말을 하면서도 이들은 부끄럽지 않다. 뻔뻔하면 뻔뻔할수록 이들의 힘은 강한 것으로 판명되고, 따르는 무리를 결속시킬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조폭의 논리보다 못한 것이리라. 나는 재판에서 부하에게 얼굴마담 소리를 들었다는 이재용이 무죄로 풀려나더라도 어떻게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잘못된 것이었다. 부하가 구속되고 본인이 풀려난다면 그의 힘은 더 강해질 것이 분명하다. 박근혜도 그러하고 안철수도 그러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주인'은 몰랐고, 내가 알아서 했다고 말해줄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흔히들 그 힘을 권력이라 부른다. 한병철에 따르면 권력은 폭력이나 영향력과는 다른 것으로서 억압과 금지와 같은 부정적 맥락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권력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책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대목은 권력이 느껴진다면 이미 권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박근혜, 조윤선, 안철수, 박지원, 이용주 그리고 이재용은 권력자인가, 아닌가? 그들의 부하들이 그들에게 동화되어 스스로 알아서 따르는 것이라면 정말 그들은 권력자인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들의 권력은 과연 무엇을 생산하는 권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