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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땅
지피 글.그림, 이현경 옮김 / 북레시피 / 2017년 5월
평점 :
두 형제가 주인공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형제의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아버지는 법이고 질서다. 문명의 종말과 아버지의 죽음, 새판을 짜기 위한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졌다. 죽은 아버지는 수첩에 기록을 남겼다. 두 주인공은 글을 모른다. 서사는 그 무지에서 비롯된다. 수첩에 적힌 글을 읽어줄 사람을 찾아 형제는 모험을 시작한다. 특히 동생은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기록했는지가 궁금하다. 소년이 가질 수 있는, 아니 당연히 가져야 할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신화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다. 그래서 동생의 질문과 수첩에 대한 집착은 더 절실하다.
주인공의 모험에는 조력자와 방해자가 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아직 남성이랄 수 없는 주인공 형제와 성인 남성으로 설정된 방해자들(아린고, 쌍둥이, 신도들), 그리고 여성으로 설정된 조력자들(마녀와 노예)은 우리에게 익숙한 구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익숙함은 결말까지 이어진다. 옛 질서가 새로운 질서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익숙한 것들은 우리에게 처음에는 편안함을 주지만, 나중에는 허망함을 안기고 만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이 펼쳐 보이는 새판은 대안 보다는 복기에 가깝다. 이미 영고성쇠를 다 겪고 멸망한 문명의 시작에 대한 복기 말이다. 고작 이 복기를 위해 작가는 문명을 멸망시키고, 아버지를 죽인 것일까?
작가는 사랑과 관계를 말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형제는 수첩을 읽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구출한 노예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고백을 듣고도 그녀를 버리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생은 수첩을 버려 마녀를 구한다. 수첩을 버린 동생은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것이다. 대신 동생은 타인의 손을 잡는 법을 배울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사형 집행인으로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수첩을 버릴 명분과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 사형 집행인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아무래도 좋다. 소년들은 성숙했고, 사형 집행인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언어 특히 문자는 권력이고 질서다. 신도들은 사형 집행인을 중심으로 다시 모일 것이다. 그는 신의 말씀을 전할 능력을 갖고 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이다. 아버지의 수첩과 사형 집행인의 수첩이 힘을 갖는 것은 그 배타성과 불가지성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최초의 문자는 소통을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작품 속에서 시종 수직적 질서를 만들어온 수첩이 단 한 번 수평적 교환의 도구가 된다. 동생이 그것을 마녀의 목숨과 바꾸는 장면이 그렇다. 어쩌면 작가는 이 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문명을 멸망시키고, 아버지를 죽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배를 타고 떠나는 주인공 형제와 마녀, 그리고 노예는 앞으로 어떤 서사를 써나갈까? 그들도 우리처럼 가족을 이루어 핏줄로 이어지는 수직적 질서를 쓰게 될까? 아니면 수첩과 마녀를 교환했던 것처럼 수평적 사랑의 기록을 쓰게 될까? '종말 이후 그 어떤 책도 쓰이지 않았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종말 이후에도 쓰이는 책이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일 것인가가 아닐까? 불길한 것은 수첩을 대신한 것이 마녀라는 점이다. 마녀는 멸망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그래서 이 작품에 그려진 새판은 대안이 아니라 복기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