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면 무서운 말이다. 이 무서운 말을 뭣도 모르고 좋아했다. 언제나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는 INTP이자 소음인인 내가 왜 이 말을 좋아했을까? 이명박의 '정의'나 박근혜의 '100%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과 같은 배경이었을까? 오늘 우연히 이 말에 대해 두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생각과 삶은 별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의 생각은 나의 삶의 일부이다. 생각하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나처럼 생각'만' 하는 것은 문제지만.) 이미 여기서 이 말은 논리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삶에서 생각을 떼어낸 것에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모순과 불순을 받아들여도 문제는 또 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정직이나 지행합일, 삶과 철학의 일치로 볼 수는 없을까?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생각대로 살라는 것인가. 아니면 생각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둘을 일치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심리학자들이 설명한다.) 생각대로 살라는 것인가. 나는 후자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전자는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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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말들 - 말해지지 않는 말들의 한恨국어사전 우리시대의 논리 24
이문영 지음, 김흥구 사진 / 후마니타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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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가벼울 수 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취급하는 세상은 무도하다. 무도한 세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삶은 비루하다. 가볍지 않은 무엇인가에 관해 말하거나 글을 쓸 때, 우리의 말과 글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곤 한다. 세상은 무도하고, 삶은 비루하며, 언어는 가볍다. 이 세가지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절망에 가깝다. 우리의 무능과 무력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저자의 본업은 기자다. 기자의 운명은 이 절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은 무도하지 않다는 최면과, 삶은 비루하지 않다는 자위와, 언어는 가볍지 않다는 거짓으로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기자도 있다. 우리는 그런 기자를 '기레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누군가를 쓰레기로 규정하는 일은 너무도 쉽다. 진정 어려운 일은 무엇인가. 가벼울 수 없는 것들을 가벼운 언어로 말하고 쓰는 것, 하여 무도한 세상과 비루한 삶과 가벼운 언어를 동시에 까발리는 것, 그것이다. 저자는 그 일을 한다.


무도한 세상의 배후에는 권력과 자본이 있다. 권력과 자본은 그 얼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공문서와 법조문의 해독 불가능한 언어로, 우아하고 고상한 언어로, 애국과 질서와 발전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언어로 존재할 뿐이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권력과 자본은 우리에게 사람의 얼굴을 요구하지 않는다. 명령에 따라 노동하고, 욕망에 따라 소비하는 기계가 될 것을 요구할 뿐이다. 기계가 존엄을 말할 때, 기계는 폐기처분되거나 존엄을 모르는 다른 기계로 대체된다.


세상이 무도하니 삶은 비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의 무도함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할 일이 있다. 인정하는 것이다. 애국과 질서와 발전이라는 말에 편승하여 우아하고 고상하며 해독 불가능한 언어의 세계로 편입하고자 했던 욕망, 그 빌어먹을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존엄을 내려놓았다. 존엄을 말하는 기계의 폐기처분에 동의했으며, 자신이 그 자리에 대체되기를 바랐다. 생각하면 무도한 세상과 비루한 삶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도한 세상과 비루한 삶에 대해 말하고 글쓰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침을 뱉으면 내 얼굴에 떨어지고, 칼을 들이대면 내 몸에서 피가 난다. 언어가 가볍다는 이유로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말하고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듣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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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땅
지피 글.그림, 이현경 옮김 / 북레시피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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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가 주인공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형제의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아버지는 법이고 질서다. 문명의 종말과 아버지의 죽음, 새판을 짜기 위한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졌다. 죽은 아버지는 수첩에 기록을 남겼다. 두 주인공은 글을 모른다. 서사는 그 무지에서 비롯된다. 수첩에 적힌 글을 읽어줄 사람을 찾아 형제는 모험을 시작한다. 특히 동생은 아버지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기록했는지가 궁금하다. 소년이 가질 수 있는, 아니 당연히 가져야 할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신화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다. 그래서 동생의 질문과 수첩에 대한 집착은 더 절실하다.


주인공의 모험에는 조력자와 방해자가 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아직 남성이랄 수 없는 주인공 형제와 성인 남성으로 설정된 방해자들(아린고, 쌍둥이, 신도들), 그리고 여성으로 설정된 조력자들(마녀와 노예)은 우리에게 익숙한 구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익숙함은 결말까지 이어진다. 옛 질서가 새로운 질서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익숙한 것들은 우리에게 처음에는 편안함을 주지만, 나중에는 허망함을 안기고 만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이 펼쳐 보이는 새판은 대안 보다는 복기에 가깝다. 이미 영고성쇠를 다 겪고 멸망한 문명의 시작에 대한 복기 말이다. 고작 이 복기를 위해 작가는 문명을 멸망시키고, 아버지를 죽인 것일까?


작가는 사랑과 관계를 말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형제는 수첩을 읽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구출한 노예가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고백을 듣고도 그녀를 버리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생은 수첩을 버려 마녀를 구한다. 수첩을 버린 동생은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것이다. 대신 동생은 타인의 손을 잡는 법을 배울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사형 집행인으로부터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수첩을 버릴 명분과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 사형 집행인의 말은 진실이었을까? 아무래도 좋다. 소년들은 성숙했고, 사형 집행인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언어 특히 문자는 권력이고 질서다. 신도들은 사형 집행인을 중심으로 다시 모일 것이다. 그는 신의 말씀을 전할 능력을 갖고 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이다. 아버지의 수첩과 사형 집행인의 수첩이 힘을 갖는 것은 그 배타성과 불가지성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최초의 문자는 소통을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작품 속에서 시종 수직적 질서를 만들어온 수첩이 단 한 번 수평적 교환의 도구가 된다. 동생이 그것을 마녀의 목숨과 바꾸는 장면이 그렇다. 어쩌면 작가는 이 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문명을 멸망시키고, 아버지를 죽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배를 타고 떠나는 주인공 형제와 마녀, 그리고 노예는 앞으로 어떤 서사를 써나갈까? 그들도 우리처럼 가족을 이루어 핏줄로 이어지는 수직적 질서를 쓰게 될까? 아니면 수첩과 마녀를 교환했던 것처럼 수평적 사랑의 기록을 쓰게 될까? '종말 이후 그 어떤 책도 쓰이지 않았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종말 이후에도 쓰이는 책이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일 것인가가 아닐까? 불길한 것은 수첩을 대신한 것이 마녀라는 점이다. 마녀는 멸망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그래서 이 작품에 그려진 새판은 대안이 아니라 복기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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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된 것이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어머니의 고된 노동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를 나의 무력과 무능이 있다. 불효가 있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함민복의 시가 있다. 그리고 이 시에 이어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김훈의 문장이 있다. 다음 생이란 것이 있다면 알에서 태어나고 싶다. 부모를 버려두고 날아가고 싶다. 부모를 '다려 먹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가여워서가 아니라 맛이 없어서다. 밥벌이보다 지겨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핏줄이 아닐까.


어머니를 다려 먹었습니다

맛이 없었습니다

-<섣달 그믐>


난생하는 것들의 자유는 낳은 자와 낳음을 받은 자 사이의 괴롭고도 무거운 관계를 세우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지 무리지어 퍼덕거리면서 세계의 가장 자리에서 가장 자리로 옮겨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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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라리를 버린 사람은 별이 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는데도

   지붕 위에 앉아

   평생 밤하늘 별만 바라본다

                                       - 별




살다가 문득 그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선택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무능력의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어른이 되기도 싫다. 그러나 내가 벌써 어른이라면, 아마 그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나는 어른일 것이다. 우리는 둘 다 가질 수 있기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가질 수 없기에 선택을 강요받는다. 선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손에 쥔 것을 하나 포기해야 바닥에 놓인 것을 가져갈 수 있다. 화투가 가르쳐준 것이다. 둘 다 가질 수 없다. 선택은 둘 다 가질 수 없다는 무능력에서 기인한다.


사다리를 포기해야 별이 될 수 있다. 사다리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다리를 버리는 것은 배수진을 치는 것과 같다. 배수진을 쳤으니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 수 밖에 없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별은 이렇듯 사투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니 별은 희망을 상징할 수 밖에 없다. 별이 희망을 상징하는 것 말고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과 싸우는가. 지상에서 유혹하는 온갖 것들과 싸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엄마와 밥이 가장 센 상대다. 엄마는 핏줄이요, 밥은 생계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할 때, 그 대가로서 다 버릴 수 있어도 차마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핏줄과 생계가 아니던가. 우리는 모두 엄마의 몸을 빌어 태어난 존재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다. 우리의 무능력은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지도 모른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어 빛나지도 못하고, 지상으로 내려와 핏줄도 생계도 잇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른다. 시인의 자리는 하늘과 지상의 경계, 지붕 위다. 시인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런 시인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이 있기에 별의 존재를 알았다. 희망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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