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크린 말들 - 말해지지 않는 말들의 한恨국어사전 우리시대의 논리 24
이문영 지음, 김흥구 사진 / 후마니타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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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가벼울 수 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취급하는 세상은 무도하다. 무도한 세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삶은 비루하다. 가볍지 않은 무엇인가에 관해 말하거나 글을 쓸 때, 우리의 말과 글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곤 한다. 세상은 무도하고, 삶은 비루하며, 언어는 가볍다. 이 세가지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절망에 가깝다. 우리의 무능과 무력이 탄로나기 때문이다. 


저자의 본업은 기자다. 기자의 운명은 이 절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은 무도하지 않다는 최면과, 삶은 비루하지 않다는 자위와, 언어는 가볍지 않다는 거짓으로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기자도 있다. 우리는 그런 기자를 '기레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누군가를 쓰레기로 규정하는 일은 너무도 쉽다. 진정 어려운 일은 무엇인가. 가벼울 수 없는 것들을 가벼운 언어로 말하고 쓰는 것, 하여 무도한 세상과 비루한 삶과 가벼운 언어를 동시에 까발리는 것, 그것이다. 저자는 그 일을 한다.


무도한 세상의 배후에는 권력과 자본이 있다. 권력과 자본은 그 얼굴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공문서와 법조문의 해독 불가능한 언어로, 우아하고 고상한 언어로, 애국과 질서와 발전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언어로 존재할 뿐이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권력과 자본은 우리에게 사람의 얼굴을 요구하지 않는다. 명령에 따라 노동하고, 욕망에 따라 소비하는 기계가 될 것을 요구할 뿐이다. 기계가 존엄을 말할 때, 기계는 폐기처분되거나 존엄을 모르는 다른 기계로 대체된다.


세상이 무도하니 삶은 비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의 무도함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할 일이 있다. 인정하는 것이다. 애국과 질서와 발전이라는 말에 편승하여 우아하고 고상하며 해독 불가능한 언어의 세계로 편입하고자 했던 욕망, 그 빌어먹을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 존엄을 내려놓았다. 존엄을 말하는 기계의 폐기처분에 동의했으며, 자신이 그 자리에 대체되기를 바랐다. 생각하면 무도한 세상과 비루한 삶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도한 세상과 비루한 삶에 대해 말하고 글쓰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침을 뱉으면 내 얼굴에 떨어지고, 칼을 들이대면 내 몸에서 피가 난다. 언어가 가볍다는 이유로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말하고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듣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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