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사라리를 버린 사람은 별이 되었다

   나는 사다리를 버리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시는데도

   지붕 위에 앉아

   평생 밤하늘 별만 바라본다

                                       - 별




살다가 문득 그것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 선택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무능력의 문제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어른이 되기도 싫다. 그러나 내가 벌써 어른이라면, 아마 그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나는 어른일 것이다. 우리는 둘 다 가질 수 있기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가질 수 없기에 선택을 강요받는다. 선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손에 쥔 것을 하나 포기해야 바닥에 놓인 것을 가져갈 수 있다. 화투가 가르쳐준 것이다. 둘 다 가질 수 없다. 선택은 둘 다 가질 수 없다는 무능력에서 기인한다.


사다리를 포기해야 별이 될 수 있다. 사다리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다리를 버리는 것은 배수진을 치는 것과 같다. 배수진을 쳤으니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 수 밖에 없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별은 이렇듯 사투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니 별은 희망을 상징할 수 밖에 없다. 별이 희망을 상징하는 것 말고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과 싸우는가. 지상에서 유혹하는 온갖 것들과 싸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엄마와 밥이 가장 센 상대다. 엄마는 핏줄이요, 밥은 생계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할 때, 그 대가로서 다 버릴 수 있어도 차마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핏줄과 생계가 아니던가. 우리는 모두 엄마의 몸을 빌어 태어난 존재다.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존재다. 우리의 무능력은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지도 모른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어 빛나지도 못하고, 지상으로 내려와 핏줄도 생계도 잇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른다. 시인의 자리는 하늘과 지상의 경계, 지붕 위다. 시인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런 시인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이 있기에 별의 존재를 알았다. 희망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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