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의 독서와 관련한 화두는 이야기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요즘 어떤 책을 읽어도 이야기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한 해 동안 읽었던 책들을 정리해 본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능을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책. 한마디로 말해서 스토리텔링 본능은 인류의 생존에 도움을 준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전하고, 듣고, 믿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회성. 인간의 초사회성은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렇게 태어난 이야기는 인간의 초사회성을 강화했다.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 우리가 가장 관심 있는 이야기는 바로 남 얘기라는 것.

인류가 여기까지 온 동력은 바로 이야기.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은 모두 이야기로 되어있다. 이야기라는 말 속에는 구성된 허구라는 뜻이 들어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신화와 종교, 민족과 국가, 법과 제도, 이념과 같은 이야기들은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의문이 있다. 이 이야기가 아니면 안 되는가? 앞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등장할 것인가? 그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유발 하라리의 생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이렇게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자의 이 말은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이자,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일 게다. 신화와 동화에서 만화와 영화까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분석하는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화론까지 하나의 이야기 구조로서 분석하고 있다는 것. 이야기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과학도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 체계였던 것. 다윈 본인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서로 만나지 않았음이 분명하지만, 두 사람이 만났다면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 이 책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그럴듯한 이야기다. 사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를 사로잡는 이야기는 언제나 그럴듯한 이야기다. 다윈의 '진화'와 마르크스의 '혁명' 중 어떤 이야기가 더 그럴듯한 이야기인가? 진화는 상식이 되고, 혁명은 따분한 이야기가 된 것은 무슨 연유이고, 그것이 두 이야기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앞으로도 영원히 두 이야기의 위상이 지금과 같을 것인가?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각각 상징하는 것을 법이나 윤리, 혹은 이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뭐라 부르든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그것의 본질은 이야기이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각자가 믿는 이야기를 무기 삼아 싸운다. 그러나 이야기의 입장에서 보면 그 반대다. 이야기도 서로 경쟁한다. 도킨스가 말하는 유전자와 인간의 관계처럼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어쩌면 이야기의 도구일 뿐이다. 그것도 모르고 둘은 서로 싸운다. 비극을 지켜보는 어제의 그리스인도, 희곡으로 읽는 오늘의 우리도 싸운다. 말, 즉 이야기로 싸운다. 저 뒤에서 이야기가 웃고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 인물이 그려진 작은 종이를 물건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동물이다. 이 신념의 체계가 바로 이야기다. 우리가 이야기의 생존경쟁에 이용당하는 도구라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화폐라는 이야기, 혹은 자본주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자본의 증식은 이미 우리의 의지와 욕망을 넘어섰다. 자본은 스스로 증식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도구에 불과하다. 이렇게 적으면 이것은 또 얼마나 식상한 이야기인가?

이야기의 중층 구조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 첫째, 이 책은 역사책이다. 역사는 가장 규모가 큰 이야기 중 하나이다. 둘째, 이 책은 종교를 다루는 책이다. 종교는 거의 모든 인류를 매혹시켜온 이야기다. 셋째, 주인공 메노키오와 그를 심판하는 심문관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끝으로 메노키오가 읽은 책들도 이야기로 된 책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가 삶과 죽음에 걸쳐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것. 생사가 걸린 종교재판에서 메노키오는 끊임없이 자신의 신념을 말하려 하고, 심문관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천일야화>의 이탈리아 버전인 셈.

어떤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것은, 그것을 제외한 다른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 역사 서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선택의 문제이리라. 사마천은 결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의 역사에는 그의 '마음'이 배어있고, 그래서 저자는 <사기>에서 그의 마음을 읽는다. 사마천의 글에는 사마천 아닌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결국 우리가 읽는 것은 사마천 한 사람의 마음이다. 그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가 누구의 이야기를 선택했는가 하는 문제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글쓰기가 있다면 카프카와 같은 글쓰기가 아닐까? 로쟈 선생님의 강의에서 들은 말이다. <선고>에서는 예술적 자아를 상징하는 러시아 친구가 살아남아 아버지에게 인정받는다. <화부>에서는 부모에게 항변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배 안에서 정의감에 불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항의한다. 현실에서 하지 못한 것을 카프카는 이야기 속에서 우회적으로 해냈다는 취지다. 카프카 스스로 자신의 글을 다른 사람들이 읽을 필요가 없는 자신만을 위한 글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글에 담긴 내용은 역설적으로 이야기와 인간의 사회성이 결합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체호프는 푸시킨을 인용해서 이렇게 썼다. '진리의 어둠보다는 우리를 고양시키는 기만이 더 소중하다.'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고, 허구가 이야기의 본질이라면, 우리의 삶이 거짓과 기만 위에 서 있음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상자 속의' 삶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은 아닐까? 굳이 상자 밖으로 나갈 필요가 있을까? 아니, 상자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촘스키의 말이 떠오른다. '과학이란 마치 길 건너편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 반대편 가로등 아래서 열쇠를 찾고 있는 술 취한 사람과 흡사합니다. 가로등 아래에 빛이 있기 때문이죠.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에 비하면)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고귀한 출생과 훌륭한 가문으로 상징되는 소수 엘리트의 지배가 당연하다는 이야기의 기원을 신라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 밝히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친족 이데올로기라는 이야기는 중국에서 건너온 과거제와 신유학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물리치고 19세기 말까지 살아남았다. 오늘날 이 이야기는 완전히 패퇴한 것일까? 우리는 뉴스에서 종종 '왕자의 난'과 '금수저'를 보고 있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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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 2019-05-20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을만큼 매력적인 리뷰입니다.

책의속밖 2019-05-20 19: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전파하고 다 함께 그것을 믿는 능력. 이것이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인류가 여기까지 온 비결이다. 그에 따르면 종교, 국가, 민족, 신화,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화폐와 기업, 법과 제도와 같은 것들은 모두 이야기다. 이야기라는 말 속에는 물론 허위와 거짓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식'으로서의 이야기다. 한 남자가 온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가 부활하여 인류를 구원으로 이끈다.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다. 허위와 거짓이므로 혼자서 이것을 믿고 말하면 그는 정신병자다. 그러나 수십억의 사람이 함께 믿으면 그것은 종교다. 따라서 허위와 거짓이기에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허위와 거짓임에도 함께 믿기에 의미가 있다. 아니 허위인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 인류가 만들어낸 대개의 것이 그러하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야기는 절대적이다.


<치즈와 구더기>와 <돈>을 우연히 유발 하라리의 책과 비슷한 시기에 읽었다. 이야기라는 키워드로 두 권의 책을 읽어보았다.


<치즈와 구더기>에는 여러 층위의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다. 먼저 이 책은 유발 하라리가 이야기의 대표적인 예로 제시하고 있는 종교에 관한 책이다. 16세기 이탈리아에 살던 한 방앗간 주인이 종교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우주관과 종교관을 펼쳐 보이다 화형을 당해 죽는다. 그런데 이것 자체도 하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역사도 이야기다. 허위나 거짓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형식으로서의 이야기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역사가 이야기 형식으로 서술됨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새로운 서술 방식으로 인해 주류 사학계의 반감을 산 것도 사실이다. 이 책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 층위는 바로 주인공 메노키오가 보았다는 여러 책들이다. 그 책들도 분명 이야기 형식으로 된 것들일 것이다.


메노키오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도 흥미롭지만,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더 흥미롭다. 그리고 그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단 심문관들이 그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욕망과 듣고자 하는 욕망이 교차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는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어쩌면 메노키오는 삶과 죽음 사이를 줄타기하면서 이단 심문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재판의 현장에서 말 한마디 잘못 하면 바로 죽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노키오는 끝까지 신과 교회를 부정한다. 세상이 용납할 수 없는 신념이다. 이 지점에서 메노키오의 자아와 내면이 발견된다. 어쩌면 그는 근대가 도래하기 전에 나타난 근대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근대문학으로서 소설은 내면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다. 소설은 이야기 중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메노키오가 글을 읽는 것에서 더 나아가 뭔가를 글로 썼다면, 그 글은 어쩌면 소설의 원형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돈>은 19세기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화폐와 자본주의를 둘러싼 담론들이 실체가 없는 허위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다시 말하지만 허위라서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그 허위를 믿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주식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실제의 돈이 아니다. 숫자와 그것을 적은 종이,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소문, 확인할 수 없는 기대와 희망이다. 이것을 열정이나 상상력, 혹은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체가 없는 허위라는 점이다. 소설은 인간이 허위의 이야기를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인간을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는 에밀 졸라의 의도가 아니라 유발 하라리의 관점이다.


이야기들도 서로 경쟁을 한다면 화폐와 자본주의 이야기는 살아남았고, 마르크스주의 이야기는 패퇴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의 결말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 주인공 사카르는 살아남고, 죄 없는 마르크시스트 시지스몽은 병에 걸려 죽는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지금은 자유주의 이야기 전성시대다.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인권과 같은 하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미래에 대한 그의 전망은 명료하면서도 두려운 것이다. 미래에도 자유주의 이야기가 통할 것이라는 보장을 누가 하는가? 아니, 반드시 자유주의일 필요가 있는가?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슈퍼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류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도 생각할 수 있겠다. 이야기를 생각하다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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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시골보다 못한 소도시였다. 게다가 노인들만 살고 있는데도 너무 드문드문 죽어 나가는 통에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로실드의 바이올린> 도입부다. 내게 체호프는 <상자 속의 사나이>의 작가였다. 이번에 체호프를 읽으며 얻은 수확 중 하나는 이 작품을 알게 된 것이다. 정말 완벽하고 환상적인 소설의 첫 문장이다. (판본에 따라 두 문장이 아니라 한 문장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체호프의 러시아어는 한 문장인가, 어떤가 모르겠다.) 독서 모임에서 교과서에 나올 법한 도입부라고 지껄였는데, 나중에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책에서 이 문장을 칭찬하는 대목을 읽은 기억이 났다. 불과 몇 달 전 일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내가 죽은 날까지 주판알을 튕기는 주인공 야코프라는 노인이 사랑스러워 죽겠다.


1894년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했다. 한반도에서는 갑오개혁과 동학운동이 있던 해다. 문학사나 소설론을 제대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소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일국의 소설의 발전은 그 나라의 근대화의 정도나 국력의 신장과 궤를 같이 한다고 했다. 잊기 쉬운 사실, 소설은 근대문학 양식이다. 우리가 근대화의 초입에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러시아에서는 이미 이런 단편이 나왔다. 더 놀라운 점은 체호프보다 수십 년 앞선 선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이미 러시아 문학의 정점을 찍고 난 다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의 <무정>을 갖기 한참 전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각각 단편 하나씩을 읽었을 뿐이라 잘 모른다. 다만 두 사람의 작품이 체호프의 그것과는 결을 달리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일단 스케일 면에서 체호프를 압도한다. 분량도 그렇고 서사도 그러하다. 인물을 비교해도 그렇다. 체호프의 등신들을 말해 뭣하랴? 굳이 체호프의 작품을 두 선배의 작품 앞에 두지 않더라도, 그의 문학은 비주류나 변방이라는 말과 잘 어울린다. 어쩌면 체호프 자신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바로 직전의 두 거장의 문학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체호프의 문학은 등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체호프의 세계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터이지만.


체호프는 혁명 직전을 살다 죽었다. 세상의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러시아의 혁명 직전 상황은 참혹한 것이었다. 그의 소설은 조국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쓴 글치고는 지나치게 태평해 보이기도 한다. 체호프의 단편은 한마디로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것은 어쩌면 변화를 택하지 않고는 어떤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러시아에 대한 은유가 아니었을까? 체호프를 위한 내 나름의 변명이다. 차르의 압제, 대기근, 거기에 전쟁까지 겹치고 나서야 혁명은 가능했다. 체호프는 혁명을 예감했을까? 살아서 혁명을 보았다면 뭐라 말했을까?


체호프의 등신들은 상자 속에 들어가 있다. 상자라는 비유는 두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소통의 불가능성이고, 또 하나는 변화(성장이든 퇴보든)의 불가능성이다. 그런데 어쩌면 소설은 소통과 변화를 보여주는 문학이다. 소설에는 최소한 서로 다른 인물 두 사람이 등장해야 이야기 진행이 가능하다. 인물 간의 소통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소설이라고 해도, 작가는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작가 자신의 입장을 배반하는 것일지라도. 소설 속의 변화는 시간의 흐름에서 온다. 소설 속에서는 시간이 흐르는데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체호프마저도 (소설이 아니라 희곡이긴 하지만) <갈매기>의 여주인공의 변화는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체호프의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상자 속에 갇혀 산다. 그래서 나는 궁금하다. 소설 속에서 소통과 변화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체호프는 왜 다른 것을 하지 않고 문학을 했을까? 이것 역시 일종의 반작용인 것인가?


체호프는 소설보다는 희곡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희곡을 코미디라고 우겼다는 것. <갈매기> 한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그의 희곡은 결코 코미디는 아니었다. 이현우 선생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코미디와 체호프가 생각하는 코미디가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혹시 그가 생각하는 코미디는 작품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희곡과 연극을 보는 관객을 합쳐놓으면 코미디가 되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단편과 그것을 읽는 독자를 겹쳐놓으면 코미디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바로 내가 그렇다. 내 얘기인 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면서 등신 운운하며 체호프를 읽었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한 마디. 뭘 웃나? 이름만 바꾸면 자네 얘긴데.


세계사나 소설론도 모르면서 체호프의 소설 안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의 소설 밖에서만 기웃거리는 독서가 되고 말았다. 인상 깊었던 문장을 옮긴다.



삶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은 어딘가 무대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무대 위는 고요하고 평온하죠. 그저 말 없는 통계만이 몇 명이 미쳤고, 몇 양동이의 술을 마셔치웠고, 몇 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며 저항하고 있죠. 어쩌면 분명 그래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행복한 사람이 평안한 건 불행한 사람들이 말없이 자기 짐을 지는 덕분이라는 게 명백하니까요. 불행한 사람들이 침묵하지 않으면 행복이란 불가능하겠죠. - <산딸기>


그리고 그녀의 사랑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런 일 없이도 힘들고 온갖 불행으로 가득 찬 내 삶을 그녀가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이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 <사랑에 관하여>


저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제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사소하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생각할 때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 선행이나 악행보다 더 고상한 것,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해야 하며, 아니면 차라리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 <사랑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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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 2018-08-1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가독성이 정말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책의속밖 2018-08-18 16:55   좋아요 0 | URL
네, 읽고 쓸 때 가독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네요. 고맙습니다.
 

삶은 비루하다. 

이것이 내가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을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나는 당신이 비루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더이상 비루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주기를 바랐다.


세상은 무도하다.

적들은 당신보다 더한 죄를 짓고도 떳떳하다.

뻔뻔하게도 그들은 당신 죽음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오독할 것이다.


언어는 가볍다.

명복을 빈다는 문장에는 결코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적어나간 문장들도 그러할 것이다.


비루한 삶과 무도한 세상 앞에 가벼운 언어를 가지고 나는 섰다.

당신도 그러했을 것이다.

오늘, 친구를 하나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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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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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사의 아내들>

맹인 조율사의 두 번째 아내가 된 벨이 죽은 첫 아내 바이얼릿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아무렴, 아무렴. 남편은 그 거짓말에 동의한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감동을 준다. 그 감동은 남편인 맹인 조율사의 태도에서 온다. 잠언과도 같은 남편의 생각은 이렇다. 벨이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고, 그런 주장에 따라 피해를 입거나 파괴당하는 뭔가가 생기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이기는 법이니 결국에는 벨이 이길 터였다. 그 또한 공정해 보였으니, 바이얼릿은 처음에 이겨 더 나은 시절을 누렸기 때문이다.


눈으로 소설을 읽은 독자는 벨의 거짓말을 확인할 수 있지만, 소설 속 맹인 남편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가? 남편은 '거짓말'이 아니라 '주장'이라고 했다. 사실 벨의 주장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꿈처럼 연약한 것이 입은 피해'다. 꿈처럼 연약한 것은 첫 아내 바이얼릿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바이얼릿과 결혼하기 이전에도 그의 눈이 되어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바이얼릿도 그 사람의 흔적을 보며 혹시 벨과 같은 절망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바이얼릿의 주장은 모두 참이었을까? 만약에 거짓이 섞여 있었다고 해도 남편은 벨의 주장을 검증할 수 없듯, 바이얼릿의 주장을 검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이얼릿의 주장도, 벨의 주장도 모두 거짓이며 남편은 영원히 그 거짓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숙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남편의 태도가 사실은 검증 불가능함에서 기인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인생을 대하는 성숙한 태도로 일컬어지는 것들이 사실은 체념이나 무능력의 고백과 다름없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소설 속의 남편처럼 맹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율을 잘 해내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우정>

왜 배신인가? 남편 필립은 아내 프란체스카의 외도에 공모한 아내의 친구 마지에게 배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독서는 마지의 고백처럼 '지나치게 나아갔다.' 세바스천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 네 사람이 서로 잘 아는 관계인 것으로 짐작된다. (프란체스카가 아니라) '필립이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마지의 독백과 '세바스천은 아주 멋지죠'라는 필립의 말이 그 근거다. 필립은 프란체스카와의 결혼을 통해 마지와 세바스천을 조금 아는 정도가 아니라, 이 두 사람과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분명하다. 그래야 배신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문제는 필립과 마지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점이다. 이 둘은 전형적인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의 차이를 보여준다. 서로 불편해 하고 적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필립의 육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머리와 눈의 색깔, 몸집의 크기, 손가락의 굵기 등 최소한의 외양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중요한 등장인물 중 유독 필립만이 외모에 대한 묘사가 없다. 그리고 그는 작품 속에서 먹지 않는다. 필립은 작품 속에서 집안일을 따분해 하고,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적의를 갖는 성격과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언변으로만 존재한다. 그런 필립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부부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금발이다. 두 아이의 외양묘사는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 세바스천도 금발이다. 출생의 비밀까지 거론하는 것은 그야말로 지나치게 나아간 것이리라. 거짓말과 장난을 일삼는 두 아이는 아폴론형 아버지 필립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어쩌면 두 아이는 아버지 필립보다 어머니의 옛사랑 세바스천을 더 닮았는지도 모른다. 필립은 이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지나친 적의를 갖는 것과 아내에게 부탁할 단 한 가지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남편 필립은 불안하다.


그런 필립의 공간으로 마지가 자꾸 드나든다. 아내 프란체스카를 자주 만난다. 그것도 모자라 아내의 불륜을 부추겼다. 어쩌면 필립과 마지가 처음 만난 순간, 둘은 서로가 섞일 수 없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프란체스카를 가운데 둔 둘의 게임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필립은 아폴론의 영역으로 끌고 가려하고, 마지는 디오니소스의 영역에 그대로 붙들어 두려 한다. 결혼으로 인해 필립이 승리한 것으로 보였다. 프란체스카가 곱슬곱슬했던 머리카락을 폈다는 것은 이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마지의 배신은 바로 암묵적인 게임의 규칙을 깼다는 것이다. 남자를 끌어들인 것, 그것도 자신이 아는 남자, 자신의 아들들이 자신보다 더 닮은 남자를 끌어들인 것은 마지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그래서 남편의 분노는 아내에게서 마지로 옮겨간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게임의 규칙을 깬 마지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아내에게서 마지를 떼어놓은 필립이 이긴 것일까? 마지가 세바스천 얘기를 꺼냈을 때, 프란체스카는 '이제는 정착할 때'라고 말한다. 필립은 프란체스카에게 '당신은 전에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프란체스카는 이미 여러 번 디오니소스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온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또 그럴 것 같다. 남편 필립의 불안은 계속될 것 같다.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것 같다.


<감자 장수>

수치심과 죄의식은 다르다. 수치심은 자신의 치부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졌을 때 작동한다. 반면 죄의식은 그것과 상관없이 작동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하곤 한다. 남편 없이 아이를 낳게 된 엘리에게 감자장수와 거짓 결혼을 시키는 그녀의 외삼촌과 어머니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중에 이웃들이 자신의 거짓 결혼을 알게 되었을 때 감자장수는 괴로워한다. 10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잘 지냈지만, 남들이 알게 되는 순간 문제가 된다. 수치심이란 그러하다.


작품 속에서 엘리만이 수치심이 아니라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자 장수와 결혼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이제 와서 딸에게 진실을 말한다. 자신의 결혼과 딸의 출생에 돈이 오고갔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지만 괴롭다. 죄의식은 이렇게 작동한다. 엘리가 그 죄의식 속에서 평생 살아야 했다면, 그녀는 아마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남들은 멀쩡한데 혼자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이제 와서 딸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딸의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느냐고 엘리를 힐난할 수도 있다. 현실적인 지적이다. 한편으로는 딸의 인생을 위한 더 성숙한 태도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엘리는 딸에게 '지금은 무엇 하나 쉽지 않다 해도 이 순간의 어려움이 모두 사라질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지나친 낙관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엘리에게 중요한 것은 딸의 미래보다 진실이다. 그녀는 거짓에 불과한 딸의 삶과 그것에 일조한 자신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죄의식은 모르고, 수치심만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루>

제목은 하루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몇 년, 어쩌면 인생이라고 해야 한다.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후, 음주와 망상, 절망과 후회에 빠져 사는 여자의 이야기다. 소설을 읽으면서 의문을 갖게 된다. 알콜 중독으로 의심되는 화자의 고백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남편의 불륜이 정말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 처음부터 그것은 그녀의 망상은 아니었는지 궁금하다. 이 의문을 더 밀어붙이면 지금 화자가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남편의 부재를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은 여럿 있다. 남편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내가 먼저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려도 그는 이불 속에서 꿈쩍하지 않는다. 그런 남편을 지켜보며 화자는 말한다. '이맘때면 늘 그러듯이 눈앞이 흐릿하고 두통이 있다. 하루 가운데 최악의 순간이다.' 남편이 잠에서 깨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남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남편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과 서술이 있을 뿐이다. '간밤에 그녀의 또 다른 꿈에서 남편은 그녀를 안고 갔고,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소곤거리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진짜 꿈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꿈같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서술은 '그는 늘 그렇듯이, 그녀를 안아 옮길 때 부드럽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되면서 독자의 의심에 무게를 싣는다.


이제 남편은 없다. 7년 전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후 어느 날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시점은 불륜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를 입양하자는 그녀의 말이 남편에게 거부당한 때인 것 같다.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도 못 하는 화자는 그 날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제는 중년이라 입양도 쉽지 않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날 두 부부는 끝난 것이다. 그런데도 화자는 아직도 남편의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는다. 남편이 밖에서 낳은 아이가 집 위층에서 지낸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서글픈 일이다.


더 서글픈 것은 그녀가 자신의 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청소를 도와주는 여자 '매리에타가 일주일에 세 번 집에 올 필요가 없기를 바라지만,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안다.' 매리에타는 단순한 가사 도우미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매리에타가 화자에게 던지는 말을 그냥 넘기기 어렵다. 후회는 아무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은 이제 술은 그만 마시고, 새 삶을 살라는 충고처럼 들린다. 규칙적으로 하는 게 최고라는 말은 뭔가를 자꾸 잊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말로 들린다. 중독처럼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과 고통, 그것이 지금 화자가 처한 상황이다. 정원에서 잡초를 뽑다 뭔가 실수를 한 화자를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레스웨스 부인은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캐낸 것을 도로 집어넣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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