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평점 :
<조율사의 아내들>
맹인 조율사의 두 번째 아내가 된 벨이 죽은 첫 아내 바이얼릿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아무렴, 아무렴. 남편은 그 거짓말에 동의한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감동을 준다. 그 감동은 남편인 맹인 조율사의 태도에서 온다. 잠언과도 같은 남편의 생각은 이렇다. 벨이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었고, 그런 주장에 따라 피해를 입거나 파괴당하는 뭔가가 생기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이기는 법이니 결국에는 벨이 이길 터였다. 그 또한 공정해 보였으니, 바이얼릿은 처음에 이겨 더 나은 시절을 누렸기 때문이다.
눈으로 소설을 읽은 독자는 벨의 거짓말을 확인할 수 있지만, 소설 속 맹인 남편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가? 남편은 '거짓말'이 아니라 '주장'이라고 했다. 사실 벨의 주장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꿈처럼 연약한 것이 입은 피해'다. 꿈처럼 연약한 것은 첫 아내 바이얼릿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바이얼릿과 결혼하기 이전에도 그의 눈이 되어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바이얼릿도 그 사람의 흔적을 보며 혹시 벨과 같은 절망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바이얼릿의 주장은 모두 참이었을까? 만약에 거짓이 섞여 있었다고 해도 남편은 벨의 주장을 검증할 수 없듯, 바이얼릿의 주장을 검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이얼릿의 주장도, 벨의 주장도 모두 거짓이며 남편은 영원히 그 거짓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숙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남편의 태도가 사실은 검증 불가능함에서 기인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인생을 대하는 성숙한 태도로 일컬어지는 것들이 사실은 체념이나 무능력의 고백과 다름없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소설 속의 남편처럼 맹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율을 잘 해내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우정>
왜 배신인가? 남편 필립은 아내 프란체스카의 외도에 공모한 아내의 친구 마지에게 배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독서는 마지의 고백처럼 '지나치게 나아갔다.' 세바스천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 네 사람이 서로 잘 아는 관계인 것으로 짐작된다. (프란체스카가 아니라) '필립이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마지의 독백과 '세바스천은 아주 멋지죠'라는 필립의 말이 그 근거다. 필립은 프란체스카와의 결혼을 통해 마지와 세바스천을 조금 아는 정도가 아니라, 이 두 사람과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분명하다. 그래야 배신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문제는 필립과 마지가 너무나도 다르다는 점이다. 이 둘은 전형적인 아폴론형과 디오니소스형의 차이를 보여준다. 서로 불편해 하고 적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필립의 육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모두 머리와 눈의 색깔, 몸집의 크기, 손가락의 굵기 등 최소한의 외양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중요한 등장인물 중 유독 필립만이 외모에 대한 묘사가 없다. 그리고 그는 작품 속에서 먹지 않는다. 필립은 작품 속에서 집안일을 따분해 하고,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적의를 갖는 성격과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언변으로만 존재한다. 그런 필립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부부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금발이다. 두 아이의 외양묘사는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 세바스천도 금발이다. 출생의 비밀까지 거론하는 것은 그야말로 지나치게 나아간 것이리라. 거짓말과 장난을 일삼는 두 아이는 아폴론형 아버지 필립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어쩌면 두 아이는 아버지 필립보다 어머니의 옛사랑 세바스천을 더 닮았는지도 모른다. 필립은 이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지나친 적의를 갖는 것과 아내에게 부탁할 단 한 가지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남편 필립은 불안하다.
그런 필립의 공간으로 마지가 자꾸 드나든다. 아내 프란체스카를 자주 만난다. 그것도 모자라 아내의 불륜을 부추겼다. 어쩌면 필립과 마지가 처음 만난 순간, 둘은 서로가 섞일 수 없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프란체스카를 가운데 둔 둘의 게임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필립은 아폴론의 영역으로 끌고 가려하고, 마지는 디오니소스의 영역에 그대로 붙들어 두려 한다. 결혼으로 인해 필립이 승리한 것으로 보였다. 프란체스카가 곱슬곱슬했던 머리카락을 폈다는 것은 이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마지의 배신은 바로 암묵적인 게임의 규칙을 깼다는 것이다. 남자를 끌어들인 것, 그것도 자신이 아는 남자, 자신의 아들들이 자신보다 더 닮은 남자를 끌어들인 것은 마지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그래서 남편의 분노는 아내에게서 마지로 옮겨간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게임의 규칙을 깬 마지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아내에게서 마지를 떼어놓은 필립이 이긴 것일까? 마지가 세바스천 얘기를 꺼냈을 때, 프란체스카는 '이제는 정착할 때'라고 말한다. 필립은 프란체스카에게 '당신은 전에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프란체스카는 이미 여러 번 디오니소스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온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또 그럴 것 같다. 남편 필립의 불안은 계속될 것 같다.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것 같다.
<감자 장수>
수치심과 죄의식은 다르다. 수치심은 자신의 치부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졌을 때 작동한다. 반면 죄의식은 그것과 상관없이 작동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하곤 한다. 남편 없이 아이를 낳게 된 엘리에게 감자장수와 거짓 결혼을 시키는 그녀의 외삼촌과 어머니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중에 이웃들이 자신의 거짓 결혼을 알게 되었을 때 감자장수는 괴로워한다. 10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잘 지냈지만, 남들이 알게 되는 순간 문제가 된다. 수치심이란 그러하다.
작품 속에서 엘리만이 수치심이 아니라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자 장수와 결혼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이제 와서 딸에게 진실을 말한다. 자신의 결혼과 딸의 출생에 돈이 오고갔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지만 괴롭다. 죄의식은 이렇게 작동한다. 엘리가 그 죄의식 속에서 평생 살아야 했다면, 그녀는 아마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남들은 멀쩡한데 혼자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이제 와서 딸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딸의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느냐고 엘리를 힐난할 수도 있다. 현실적인 지적이다. 한편으로는 딸의 인생을 위한 더 성숙한 태도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엘리는 딸에게 '지금은 무엇 하나 쉽지 않다 해도 이 순간의 어려움이 모두 사라질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지나친 낙관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엘리에게 중요한 것은 딸의 미래보다 진실이다. 그녀는 거짓에 불과한 딸의 삶과 그것에 일조한 자신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죄의식은 모르고, 수치심만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루>
제목은 하루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몇 년, 어쩌면 인생이라고 해야 한다.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후, 음주와 망상, 절망과 후회에 빠져 사는 여자의 이야기다. 소설을 읽으면서 의문을 갖게 된다. 알콜 중독으로 의심되는 화자의 고백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남편의 불륜이 정말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 처음부터 그것은 그녀의 망상은 아니었는지 궁금하다. 이 의문을 더 밀어붙이면 지금 화자가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맞는지도 의심스럽다.
남편의 부재를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은 여럿 있다. 남편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내가 먼저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려도 그는 이불 속에서 꿈쩍하지 않는다. 그런 남편을 지켜보며 화자는 말한다. '이맘때면 늘 그러듯이 눈앞이 흐릿하고 두통이 있다. 하루 가운데 최악의 순간이다.' 남편이 잠에서 깨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남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남편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과 서술이 있을 뿐이다. '간밤에 그녀의 또 다른 꿈에서 남편은 그녀를 안고 갔고,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소곤거리며 그녀를 달래주었다. 진짜 꿈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꿈같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 서술은 '그는 늘 그렇듯이, 그녀를 안아 옮길 때 부드럽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되면서 독자의 의심에 무게를 싣는다.
이제 남편은 없다. 7년 전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후 어느 날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시점은 불륜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를 입양하자는 그녀의 말이 남편에게 거부당한 때인 것 같다.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도 못 하는 화자는 그 날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제는 중년이라 입양도 쉽지 않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날 두 부부는 끝난 것이다. 그런데도 화자는 아직도 남편의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는다. 남편이 밖에서 낳은 아이가 집 위층에서 지낸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서글픈 일이다.
더 서글픈 것은 그녀가 자신의 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청소를 도와주는 여자 '매리에타가 일주일에 세 번 집에 올 필요가 없기를 바라지만,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안다.' 매리에타는 단순한 가사 도우미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매리에타가 화자에게 던지는 말을 그냥 넘기기 어렵다. 후회는 아무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은 이제 술은 그만 마시고, 새 삶을 살라는 충고처럼 들린다. 규칙적으로 하는 게 최고라는 말은 뭔가를 자꾸 잊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말로 들린다. 중독처럼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과 고통, 그것이 지금 화자가 처한 상황이다. 정원에서 잡초를 뽑다 뭔가 실수를 한 화자를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레스웨스 부인은 그래봐야 아무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캐낸 것을 도로 집어넣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