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사람들은 늘 물을 것이다. 세상은 왜 이런 모습인가? 우리 사회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제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에 몇 달 전 새삼 이런 질문을 떠올린 것은 박권일의 책을 읽어서다. 세계 가치관 조사라는 것이 있단다. 세계 주요 국가를 상대로 조사하는 여러 가치관 중 박권일이 주목하는 것은 생존 가치와 자기표현 가치의 대립. 내 식으로 거칠게 정리하면 전자는 '먹고사니즘'의 문제이고, 후자는 민주주의, 양성평등, 소수자 배려, 환경문제와 같은 공공성에 대한 관심을 뜻한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모든 나라에서 경제가 성장하면 전자의 지표는 낮아지고, 후자의 지표는 올라간다. 단 전세계에서 두 나라만 예외다. 싱가포르와 우리나라.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높은 생존 가치는 떨어지지 않고, 낮은 자기표현 가치는 오를 줄 모른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런가? 우리는 왜 사적 관심사(그마저도 경제적 이익에 한정된)에 갇혀 좀처럼 공공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이런 사태의 역사적 기원은 무엇인가?







  이철승의 책이 답이 될 수 있다면 내 경우에는 질문보다 답을 먼저 읽은 셈이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여러 모습을 결정한 원인으로 벼농사를 지목하고 있는 이 책은 일종의 환원론이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명쾌함을 선사한다. 벼농사 지역과 밀농사 지역에 대한 대조는 이미 잘 알려진 논의인데, 이 책에서 주목하는 우리나라 벼농사의 특징은 경작은 공동으로 하고, 수확물의 소유는 개인적으로 하는 이중적 시스템이다. 공동으로 경작하기에 평등의식은 높아지는데, 개인적으로 소유하기에 경쟁은 심해지는 고약한 상황이 펼져진다. 공동 경작이므로 옆집과 우리 집의 '노력'은 비슷할 수밖에 없는데, 옆집의 수확량이 우리 집보다 많으면 배가 아프다. 비교가 끊이지 않고, 수확량과 관계없이 불행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연공서열의 중시나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과 같은 벼농사 문화에서 비롯한 현재 한국사회의 여러 모습을 다루고 있는데, 나는 야경국가 논의와 과거제와 관련된 논의가 인상적이었다. 벼농사는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에 취약하기 때문에 한반도 사람들은 대개 국가의 역할을 재난의 예방과 구휼로 봐왔는데, 이는 세월호나 코로나 국면에서도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편 벼농사 체제에서 신분 상승의 통로로 존재한 과거제가 시험 숭배의 계기와 차별의 도구가 되었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이철승의 책은 대단히 흥미롭다는 면에서 그리고 보완 후속 작업이 필요하다는 면에서 다음 저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부계로 이어지는 종법 계승과 적장자 우대 상속제도, 종법 질서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차별받는 여성(딸과 며느리)과 서얼, 일상적으로 되풀이되며 사람들을 규율하는 제사와 상장례 의식.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이라는 것은 아무리 올려잡아도 조선 후기, 즉 17세기 이후의 모습이라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자주 깜박해서 문제지만. 박권일과 이철승의 책을 읽었으니 이제는 조선 시대를 다룬 책을 읽을 차례다. 주로 미야지마 히로시와 계승범의 책을 보았다. 미야지마 히로시는 소농사회론이라는 경제사적 틀을 가지고 조선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형성과정을 보여준다. 계승범은 주로 한중 관계사를 연구해 조선 후기 지배층의 보수성과 폐쇄성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을 하는 듯하다.

  이철승도 인용하고 있는 소농사회론은 집약적 벼농사, 과거제, 주자학, 종법 질서 등을 핵심으로 한다. 중국은 송대 이후 한국은 16세기 이후 집약적 벼농사가 가능해지면서 고용노동이나 예속적 노동이 아닌 가족 중심의 경영이 보편화했고, 이에 따라 지배층이 농업 경영에서 물러났다. 지주로서 지대를 받게 된 지배층은 과거 준비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공부해야 할 주자학은 관료제와 종법 질서에 기반한 국가체제를 추구한다. 이로써 조선은 과거제도에서 비롯한 '양반관료제', 족보 편찬 붐에서 확인할 수 있는 '친족 네트워크', 유향소나 향약 등 양반에 의해 통치되는 향촌사회가 성립된다. 이것이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변화다.






  

  계승범의 한중관계 연구에서도 16세기가 중요하다. 조선 초(15세기)까지만 해도 사대를 국시로 내걸기는 했지만 사대가 곧 국익을 보장한다는 관념은 없었다. 그러나 16세기 중종 대에 이르면 사대와 국익을 동일시하는 지배층의 생각이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계승범은 중종 대에 관한 책을 따로 한 권 냈는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과 당시 명 황제로 있던 가정제와의 특별한 밀월관계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흥미롭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 명나라는 명실상부하게 임금의 나라이자 아버지의 나라가 된다. 문제는 군신 관계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있으나, 부자간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 '재조지은'을 베푼 명은 이후 조선 지배층에게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된다.

  청 황제의 책봉을 받고 청 황제에게 조공을 받치면서도(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 안에서 국가의 안위를 보장받으면서도), 청나라를 멸시하고 명이 망한 천하에서 조선만이 유일한 중화의 문명을 이어받게 되었다는 소중화론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시대착오적 소아병에 가깝다. 심지어 숙종 때에는 궁궐 안에 대보단을 세우고 명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례를 거행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영조와 정조 대를 거쳐 개항 후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개항 후 조선이 겪은 역사는 모두가 아는 바다. 계승범에 따르면 명청 교체 이후 조선은 중화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이 택한 길은 그 길이 아니었다.







  미야지마 히로시와 계승범을 읽으면서 얻은 수확은 우리 역사에서 16세기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16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한반도의 소농사회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을 규정하였고, 16세기부터 변화하기 시작한 조선 지배층의 대명 의식은 그 후 한반도의 역사를 정체와 비극으로 몰아갔다. 사실 조선사를 다룬 책을 찾아보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한국인에게 결여된 공공성에 대한 감각과 그렇게 된 역사적 기원이었다. 이것은 다음 독서로 미루기로 한다. 사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막막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