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중문화에서, 기성의 제도(회사나 학교 또는 경찰과 같은 관공서)는 본질적으로 자비로운 존재로 묘사되었다. 제도가 우를 범하는 것은 제도에 간혹 섞여 있는 ‘나쁜 개인들‘ 때문이었다. - P241
메이지 시절 종교가 겪었던 운명은 이후 일본이 걸었던 길을 여러 면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적이지 않다‘고 낙인찍어 기존 질서를 파괴했고, 사실상의 신흥 종교를 ‘순수하고‘ 자생적인 전통으로 포장하여 만들어냈으며,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에 열광한 소수의 엘리트들이 그 제도적 유산을 오래도록 일본에 남기게 된다. 또 ‘일본적인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데 집착했던 메이지 일본은, 일본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필수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대륙의 영향을 애써 지우고자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많은 서양 문화를 허겁지겁 받아들여 미숙하게 소화시켰다. 그 결과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서양에 대한 일종의 정신분열 상태에 빠졌고, 이러한 모순은 이후 비참한 정치적 결말을 가져온다. - P143
현대 중국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가장 먼저 권할 만한 입문서.위화는 이 이후에도 유사한 에세이집을 두어 권 더 냈지만 이 책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원래 원전을 설계했던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은 원전에 심각한 하자가 있으니 수리 작업을 해야 한다고 도쿄전력 측에 경고했으나 무시당했다. 그런 경고를 수용한다는 것은 곧 원전에 위험성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도쿄전력의 ‘원자력촌(원전 마피아)‘과 학계 · 정계 · 관계에서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줄곧 선전해온, 원자력은 깨끗하고 안전한 기술이라는 메시지와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잘 작동 중이던 원전이 수리 작업에 들어간다거나, 원전의 보호를 위해 세운 방조제보다 더 높은 곳으로 비상 전원 설비를 옮겨서 쓰나미가 닿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다든가 하면, 애초에 위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이런 것을 보면 대출이 상환되지 못할 위험에 대비한충당금을 쌓아놓지 않았던 일본 은행들이 떠오른다. 대출의 일정 비율이 회수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가정하는 일은 곧 대출 심사에 허점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다. - P407
일본의 조직들은 전략적 실수를 인정하고 발생한 문제를 직시하는 데 유난히 서둘다. 개인은 비난받을 수 있고 심지어 희생되기도 한다. 조직에서 명목상의 리더인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스캔들에 휘말린 뒤 형식적인 사죄를하고 사퇴하는 풍경은 매우 익숙하다. 이는 상당수가 쇼에 불과할 뿐이지만(그런 리더들은 뒤에서 따로 보상을 받고 잠잠해지면 되돌아온다), 실제로 수많은 일본의 개인은 실수나 혹은 더 큰 문제에 대해서도 기꺼이 책임지려는 훌륭한 태도를 보여준다. 문제를 일으키고도 나서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호사 뒤에 숨어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미국인 다수의 경멸스러운 행태는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조직으로 넘어오면 이야기가 딜라진다. 일본에서 실수를 인정할 줄 모르고 강제적인 상황에 몰리기 전까지는 급격한 변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앞 장에서 다뤘던 비즈니스의 사례들에만 국한된 생리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때 일본 황군이 보여준 행위에서 시작해, 어떠한 공공사업 프로젝트라도 한번 공식적으로 인가되면 철회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현대 일본의 경향까지 모든 곳에서 드러난다. 공공사업 프로젝트 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끔찍한 피해가 뒤따를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드러나도 어쩔 수 없다. 이런 프로젝트들은 좀비나 흡혈귀처럼 계속 부활하는데, 왜냐하면 인가를 내준 주체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부 부처이거나, 그 부처와 협력관계에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를 철회한다는 것은 곧 해당 부처가 실수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 P408
그래 나도 이게 제일 궁금하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의 모든 문화 현상을 아우르는 것은 무엇인가. 야마모토 요지와 가와쿠보 레이의 패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 젤다 게임 시리즈, 「모노노케히메」와 같은 애니메이션, 「링」과 같은 공포영화, 포켓몬, 게임보이, 서양의 젊은이들을 한 세대가 넘도록 사로잡아온 수많은 애니메이션과 망가, 이런 모든 것 사이에 도대체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이 다 일본 문화일 수 있는가. 귀여운 것에 대해 질릴 정도로 집착하는 듯한 문화가 어떻게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성적 도착을 과도하게 묘사하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기도 하는가. 그리고 이런 모든 현상이 어떻게 무로마치 시대의 위대한 수묵화와, 교토의 가쓰라 리큐(정원으로 유명한 천황가의 별장), 오즈 야스지로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과 동일한 문화적 뿌리에서 탄생할 수 있는가. - P368
전통적인 일본 문화의 옹호자들은, 외국인들이 일상생활로부터 분리된 공간인 박물관이나 공식적으로 인정된 문화 교류의 장을 통해서만 일본 문화를 체험하기를 원하는 듯하다. 이들은 서양의 어린아이들이 닌자나 포켓몬에 푹 빠져 피규어를 사들이거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강도 높은 포르노 그림 중 최고로 인정받는 작품들은 죄다 일본 아티스트들의 것이라는 현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 일본의 재계와 관료사회는 현대 일본 문화에 대한 세계의 치솟는 관심을 어떻게 상업화해야 할지 여전히 잘 모른다. 이 말은 곧 현대 일본 문화가 이들의 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증거이기도 하다. - P370
샐러리맨들은 회사와 일을 위해 자기희생을 불사할 정도의 열정을 보여야 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핵심인데, 거기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그 열정을 스스로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일본 단어가 마코토다. 마코토는 보통 ‘진정한sincere‘이라고 번역되지만, 서양에서 이 단어를 쓸 때처럼 정말로 믿고 있지는 않으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과 같은 어감은 들어 있지 않다. 그 대신 일본어의 마코토에는 개인의 내적인 감정을 사회의 외부적 기대와 일치시키기 위해 강제로 끼워 맞춘다는 느낌이 있다. 샐러리맨은 스스로가 자기 목숨을 바치도 좋을 대의(회사)를 위해 싸우는 군인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결국 자신은 얼굴 없는 거대한 산업 기계 안에서 혹사당하는, 교체 가능한 톱니바퀴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자각도 함께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런 자각과 함께 사는 삶을 - P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