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신의 섬을 되찾으려는 칼리반의 시도는 식민지 해방 투쟁에 값하지만, 그는 이것이 스테파노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김으로써 가능하리라고 본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적 입장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다. 그는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을 탐욕과 환상이 빚어낸 어리석은 행동으로 줄곧 그려왔고, 폭풍우에서 칼리반의 반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프로스페로가 자신의 적들을 모두 용서하는 5막은 전형적인 셰익스피어식 대단원으로, 그의 용서를 받은 칼리반은 다시금 ‘길들여진 노예‘ 상태로 돌아가 자발적으로 순종을 맹세한다. 그들의 확고한 주종 관계가 재차 확인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결말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야만인‘ 칼리반이 교정이 필요한 위협적인 존재이고, 강간이나 모반 같은 그의 반사회적 행위는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그 당시 연극의 주된 관객이었던 영국 지배계급의 식민주의적 태도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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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왜 굳이 ‘괴롭힘‘이라는 표현을 쓸까? 재미 삼아 붙이는 표현이지만, 전문가들은 일본이 ‘사회 동조 압력‘, 즉 자신의 의견과 태도에 동조하도록 타인에게 가하는 심리적 압력이 강한 사회, 또는 그런 사회라고 믿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자신이 다수가 아니라 소수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이다. - P76

서울대학교 박훈 교수도 일본은 겉으로는 개인주의적 사회로 보이지만, 결코 아니라고 단언한다. 개인주의의 핵심은 사회 비판과 저항의 용인인데, 일본은 이를 수용하는 문화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 사회가 허용하는 것은 집단의 안정을 위협하지 않는 ‘개인의 일탈 뿐이라고 꼬집는다. 개인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일종의 ‘고립 허용주의‘라고 부른다. - P82

‘고립‘과 ‘무관심‘이란 키워드로 접근하면 일본식 개인주의의 독특함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프라이버시 존중은 서구의 그것과 좀 다르다. 특유의 ‘민폐‘, 일본어로 메이와쿠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나도 민폐를 끼치지 않을 테니 너도 그래라."라는 식이다. 간섭은 사양, 일본어로 ‘엔료‘한다는 것이다. 독립보다는 고립의 색깔이 짙다. 잘 뭉치지만 개인은 단절되어 묘한 느낌이다. - P82

"기부는 국가의 몫"이라는 일본의 뿌리 깊은 사고가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사회의 취약계층을 돕는 것은 공적 서비스로, 행정 역할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상부상조라면 모를까, 사회단체를 통한 기부에 동의하고 선뜻 기부하는 데 저항감을 느끼는 일본인이 많다. 여기에 "가난은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조自助 노력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다. 국가나 사회가 그들을 도와주는 것은 응석을 받아주는 것이다."라는 이른바 ‘자기책임론‘도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한다. - P90

냉소의 배경으로 1960년대 전공투(公共圖, 전학공투회의)와 일본 적군파(赤軍派)로 상징되는 과격 투쟁에 대한 부정적 기억을 드는 사람이 많다. 극단을 달리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행태에 시민들이 큰 충격을 받고 외면해버렸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일본 근현대사에서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성공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는 줄곧 ‘위로부터의 개혁‘의 연속이었지, 우리의 4·19혁명이나 6월 민주항쟁처럼 미완이라도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처절한 좌절의 기억밖에 없다. ‘승리의 기억‘은 저항의 역사에서 큰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일본 시민들은 일종의 ‘학습된 무기력감‘에 빠진 것일까. - P105

한국과 일본은 갈등 해결 방식에도 차이점을 드러낸다. 이누미야 요시유키 교수는 《주연들의 나라 한국 조연들의 나라 일본》에서 한국인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진취적이지만, 갈등이 밖으로 드러나 조정과 타협이 어려운 갈등 ‘외재화外在化‘ 사회가 되기 쉽다고 진단한다. 근본적인 문제해결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과잉과 분열로 치달아 사회 전체적으로 피로감이 쌓이곤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일본은 갈등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억제에 치중해 안으로 굶기 쉬운 갈등 ‘내재화內在化‘ 사회로 흐른다고 말한다.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다 보니 언젠가 모순이 폭발한다고 지적한다. - P109

이런 처리 방법은 일본인의 독특한 합리화로 나타났다. "육군을 중심으로 한 일부 범죄적 군벌이 전쟁 책임을 져야 하고, 일왕도 국민도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군벌에게 속은 희생자" 라는 역사관의 성립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군부를 ‘꼬리 자르기‘ 한 셈이었다. 그들의 편리한 역사관은 전시 중의 궁핍하고 통제된 국민 생활이나 군인의 횡포에 대한 생생한 기억에 뿌리를 둔 만큼, 아주 강한 심적 근거와 공감대가 있었다. 이는 대부분 일본인이 자신과 군부를 분리함으로써 스스로 합리화하는 방어기제로 작동했다. "나도 피해자" 라는 역사관의 확산은 자신들이 가해자이며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주변국에 큰 고통을 줬다는 인식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일종의 집단마취였다. - P124

나는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일본 ‘종전 기념일‘에 아시아 주변 피해국의 고통을 진지하게 조명하는 기획을 그다지 보지 못했다. ‘피해자 일본‘의 아픔을 되씹는 프로그램만 넘쳐났다. ‘가해자 일본‘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일본의 피해자 의식은 짙어지고 있고 갈수록 더 심해질 것 같다. 젊은 세대는 이미 ‘사죄 피로감‘에 가득 차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 정부의 태도다. 시종일관 인권이 아니라, 정치 · 외교적 관점에서 과거사 문제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죄와 보상의 길은 너무 멀고, 쉽게 열리지 않을 듯하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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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일본 학자와 변호사는 먼저 ‘무오류 신화‘의 문제점을 든다. 일본 검찰에서는 자신들의 수사가‘완벽하다‘는, 아니 ‘완벽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너무 강하다는것이다. 기소했는데 무죄를 받으면 담당 검사는 인사에서 좌천되고 평생 경력의 오점으로 남는다고 한다. 언제나 완벽한 수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다. 과학수사 기법이 발전하면 새로운 증거가 나올 수도 있다. 따라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가정하고 제도적으로 보완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권위의 실추, 불명예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 P23

그러다 보니 일본에서는 ‘억울한 죄‘를 구제하기가 정말 어렵다. 무죄라는 증거가 차고 넘쳐도 수십 년에 걸쳐 호소해야 겨우 재심이 받아들여지거나 그마저도 묵과된다. 일본 사법 역사상 재심을 통해 누명을 벗은 사건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그중에는 62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다. 모두 증거라고는 자백뿐이었던 사건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건을 담당한 경찰과 검찰, 재판관이 사죄한 사례가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우리 법정에서 가끔 나오는, 판사가 고개 숙여 국가가 지은 잘못에 대해 피해 당사자에게 사과하는 장면을 일본 법정에서는 꿈꿀 수도 없다는 이야기다. - P24

왜 일본 최고재판소는 눈에 띌 만큼 위헌 결정에 소극적일까? 최고재판소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파장이 일 만한 사안에 대해 일부러 판단을 회피하거나 자제해왔다. 최고재판소는 이를 우아하게 국회와 정부의 "재량권을 폭넓게 존중" 해서라고 표현한다. 일부에서는 사법 소극주의의 원인을 사회적 조화를 중시하고 분쟁을 피하는 일본의 문화적 특성에서 찾기도 한다.
최고재판소가 입법부에서 합의된 법률을 사회적 합의‘로 보고, 파기하는 데 부담을 가진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사법부가 행정부 정책에 관한 판단을 회피한다면 민주주의의 기본인 ‘삼권분립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것 아닐까? 사법부가 입법 · 행정부를 존중만 한다면, 이는 스스로 사법독립을 부정하는 것이어서 결국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일본 내에서도 "삼권분립이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이 종종 나온다. - P32

불평등조약 개정이 절박했던 메이지 정부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법전 편찬 등 사법 근대화를 서둘렀고, 결국 법의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물론 일본의 다른 분야 근대화도 급하게 추진된 면이 강했지만, 사법 근대화는 정권의 운명이 달려 있는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에 조급함이 훨씬 더했다. 그러다 보니 근대법의 핵심 가치인 인권, 입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에 관해 고민이 거의 없었고, 소홀히 다뤄질 수밖에 없었다. 기존 일본의 봉건적 가치관은 그대로 둔 채 서구의 법체계만 따온 기묘한 모습이 된 것이다. - P36

메이지 법의 기본 개념은 ‘사법 관료=천황의 관료‘였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천황의 관료‘라는 권위주의가 민주주의 하에서도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윗사람인 법관이 잘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백성은 입 다물고 거기에 따르면 된다는 봉건적이고 고압적인 법의식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 P39

한국과 일본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성평등 지표에서 최하위권이다. 사회적 젠더 감수성은 바닥이다. 어느 나라가 낫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갈 길이 너무 멀다. 그런데도 일본이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미투 운동의 강한 역풍에서 보듯이 그것이 문제임을 자각하는 의식 자체가 희박하다는 점이다. 사회적 공감대가 약하다 보니 다음 단계를 말하기조차 어렵다. - P58

일본 여성들은 개헌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성평등 사회로 바꿔나갈 힘은 부족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남녀평등을 규정한 헌법 조항(제14조)은 있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남녀평등법은 끝내 제정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패전 후 모든 법적 권리가 ‘내부‘인 일본 여성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미군이라는 ‘외부‘
로부터 주어진 권리라는 근본적 한계가 작용한 탓일 것이다. - P63

고도성장 시기에는 일본의 사회복지 모델이 큰 무리 없이 작동했다. 낮은 실업률에 종신고용과 연금이 보장됐고, 전업주부인 여성은 육아 등을 담당하면 됐다. 그러나 1990년대 거품이 꺼지고 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 모델은 ‘기능부전機能不全‘에 빠졌다. 기업이 더는 고용을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서구처럼 국가가 나서서 복지를 맡아야 하지만, 재정 능력이 모자라는 국가는 복지의 책임을 가족, 즉 여성에게 계속 떠넘겼다. 문제는 남성의 고용이 불안해지면서 여성들이 전업주부에만 머무를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적지 않은 여성이 가계를책임지는 저임금 파트타임 노동자이자 가족의 돌봄까지 맡으며 이중 부담을 졌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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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년은 말할 수 없이 길고 지루하기만 했다. 그리고 시험은 영원으로 통하는 그 어떤 가능성들을 하나하나 막는 문들과 같았다. 나는 시험이 제일 싫었다. 내가 보기에, 시험은 인류가 개발한 가장 사악한 제도요, 아이들에게 일찌감치 인생의 괴로움을 맛보게 하는 음모였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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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공부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독서와 공부는 별개의 일이다. 읽는다는 행위는 교정 밖에 있고 책은 교과서 밖에 있다. 독서는 생명의 어떤 신비한 동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이익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하지만 독서 경험은 길을 안내하는 등불과 같아서 인생의 어두운 곳들을 환하게 비춰준다. 어둠의 끝자락에는 콩알만 한 등불이 있다. 이것이 바로 독서의 출발점이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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