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인들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상황을 면책의 사유‘로 생각하지는 않는 전통 속에 살아왔다. (중략) 서구적 윤리는 완전히 고정적인 것이어서 ‘린치라는 행위는 악이다.‘라고 규정한다면 특별고등경찰이 저질렀건 공산당원이 저질렀건, 또는 하사관이 저질렀건 폭력단이 저질렀건 린치는 악에 해당하고, 또한 런치의 대상이 공산당원이건 로건 스파이건 똑같이 린치라는 ‘행위‘만을 끄집어내 ‘악‘으로 규정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태도를 취하지 않고 항상 그 반대의 태도를 취한다. - P139
확실히 공자의 생활 방식은 일본적이지 않다. 그에게 ‘아비와 자식의 윤리‘는 문자 그대로 부자의 윤리였다. 공자는 동시대의 제후를 대할 때는 절대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생활 방식은 종신 고용과 회사에 대한 귀속 또는 조직에 대한 충성을 절대시하는 현대 일본인보다는,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의 계획을 채택해 그 시행을 자신에게 맡겨줄 조직을 스스로 선택하는 미국의 경영진과 더 비슷하다. 만일 그런 것을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공자가 오늘날의 일본인보다 더 근대적이다. - P168
일본은 30년 전까지 ‘충효일치‘를 통해 ‘효‘를 조직으로 확대한 상태를 ‘충‘이라고 부르면서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해도 신하는 신하 노릇을 하라‘는 것을 당연시하던 사회였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이것이 봉건제후에 대한 복종을 절대화하는 이데올로기였는데, 메이지 이후에는 이런 이데올로기가 극한까지 확대되었고 그 극한에 놓인 것이 덴노였다. 이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타격으로 붕괴되었지만, 물리적 붕괴가 질적 변화를 의미하지 않았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곧바로 새롭게 생겨난 다양한 조직을 ‘효‘의 대상으로 만들어 그것들이 서로 ‘한가족‘을 형성했다. 오히려 전쟁 직후의 시대는 그런 조직이 형성되기 쉬운 토양을 제공했다. - P170
메이지 시대의 일본을 만들어놓은 플러스의 ‘그 어떤 힘‘은 필경 그것을 괴멸시킨 마이너스의 ‘그 어떤 힘‘과 같은 것이고, 전후 일본에 ‘기적의 부홍‘을 일으킨 ‘그 어떤 힘‘도 아마 그것을 괴멸시킬 가능성을 지닌 ‘그 어떤 힘‘과 같을 것이다. 그 힘을 통제할 방법을 갖지 않는 한 그 힘이 어느 한쪽을 향할 때 얻은 성과가 그 힘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때 일거에 파괴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 P190
많은 사람은 메이지 시대와 관련된 과거의 상징을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을 고루하다거나 완고하다고 매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들을 매도한 사람이 그 상태를 벗어났다거나 새로운 상징을 임재감적으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반대로 즉각 새로운 상징을 임재감적으로 파악하고 그 상징과의 사이에 ‘문명개화‘라는 새로운 ‘공기‘를 조성했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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