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으로서, 특히 일본 외교관으로서는 매우 이상하게도 도고는 퉁명스러운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일본인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다. 얇은 종이로 벽을 만들어 방을 구분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무례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도고 역시 에둘러 말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거칠다.(중략)
그러나 도고는 매우 성공적인 외교관이었다. 그는 아마도 일본의 전형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밝힌다) 일본의 숙적인 러시아와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 P100

도고는 비판을 받았어도 일본에 승산이 없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전쟁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일본의 완고한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장군과 사이가 이미 틀어졌다. 자리에서 밀려난 그는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산악지대 나가노에 있는 고향집으로 가서 패망한 나라들을 공부했다. 러시아와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내부 혼란으로 무너진 과정을 깊이 연구했다. - P101

인종주의적 적의와 자부심은 언제나 격정을 불러일으킨다. 1905년 러일전쟁으로 유럽 강국에 패배를 안긴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된 근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서구 국가들로부터 동등한 나라로 대우받기를 원하고 기대했다. 백인 국가들의 지속적인 인종주의와 멸시로 적개심에 불탄 일본은 백인 패권에 맞선 인종주의적 복수자가 되었다(혹은 그런 태도를 취했다). 일본은 백인을 내쫓아서 아시아인을 위해서 아시아를 통합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다른 민족보다 야마토 민족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가진 일본인들은 유럽 식민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잔인한 행태를 보였다. 차고 넘치는 잔학행위(마을을 불태우고 여인을 강간했다)는 열정으로서 용서받았다.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은 출범 후 5년이 지나자 시체 안치소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지경이 된다. - P109

히로히토는 자기 성찰형 인간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절반은 신이자 동시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자신의 독특한 지위를 모르지는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새장 속에 갇힌 새"라고 말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군대가 자신의 이름으로 미친 짓(국가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일)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자신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는다. 히로히토의 이름이 신화에 둘러싸여 있어도(그리고 쇼와 천황이 결코 "밝은 평화"의 시대가 아닌 때에 나라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모순적이지만), 그는 자신의 왕좌가 언제나 검을 쥔 남자들의 용인으로유지되었음을 알고 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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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감정, 혹은 그 비슷한 것이 간간이 새어나오고는 했다. 로스 앨러모스의 비밀 연구실에서 핵폭탄 개발을 담당한 선임 과학자 J.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5년 11월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을 방문해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대통령님, 나의 손에 피를 묻힌 기분입니다!" 대통령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냉정하게 오펜하이머를 내쫓고는 "애처럼 징징대는 저 과학자"를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 P17

스팀슨은 많은 결함을 가진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로 만들 철학을 체현했고 설파했다. 즉 미국의 외교정책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혼합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말이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인도주의 및 윤리적 가치와, 국익을 위한 냉혹한 힘의 사용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 P19

1930년대에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 과학자들은 핵에 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영국과 미국으로 갔다(독일이 유대인을 정부에서 쫓아낸 1933년 4월 7일에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미 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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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대에 문학을 왜 읽어야 하느냐‘ ‘문학의 힘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같은 질문을 종종 받는다. 문학계에 한 발 걸친 사람이라면 요즘 다들 비슷한 질문을 받는다. 문학의 힘이 잘 보이지 않으니 나오는 질문이다. 돈의 힘이 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다.
내 귀에는 궤변처럼 들리는 답이 있다. ‘문학의 힘은 무력함에서 나옵니다‘ ‘문학은 힘이 없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 공허한 말장난 같다. 나는 문학에 힘이 없는 게 아니라 힘있는 문학이 줄어든 것 아닌가 의심한다. - P264

원래 거대한 사건은 안에서 평가하기 어렵고 처음 보는 일이라면 더 그렇다. - P265

아름다운 노래가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고 그것은 예술의 힘이다. 때로는 찢어지는 비명이 다가오는 재난을 경고할 수 있고 그것 역시 예술의 힘이다. 위로의 노래가 필요한 순간이 있고 사이렌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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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자가 쓴 쉼표 하나, 숨 한 번까지 제대로 표현하려는 노력이 고고한 비기가 아니라 쓸데없는 신경증일 수 있다는 것, 불필요한 단어를 떼어내고 적당히 정리된 문장으로 속도감 있게 상대의 말을 전달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더 돌돌한 방법이라는 것.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울의 겹이 한 층씩 덧대졌다. 이런 시대에 통역사의 노동이란 쓸데없는 집념과 열정의 산물인가 싶었고, 하루에도 네댓 번씩 밀려드는 자괴와 열등감에서 나는 좀처럼 발을 빼내지 못하고 있었다. - P195

다만 그들과의 작업 후에, 나는 내게 맞는 일이 통역뿐임을 깊이 깨달았다. 문장 안에서 나는 평온함을 느꼈다. 반대로 문장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야 할 때 민감해졌다. 앞으로는 어쩌다 실수로 그런 걸 맡아도 내 의견 따위를 밖으로 꺼내는 과오는 저지르지 말자고, 내 일이 문장 안에 갇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 P210

난데없이 울컥했다. 어째서 욕구 없이 평온한 삶을 누리겠다는 내게 자꾸 그게 문제라고 하냔 말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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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은 그들을 보는 동안 삶이란 성장의 축적이 아니라 그저 그때그때 문제를 안고 육박하는 것일 뿐이며, 어떤 삶은 개선되지 않고 줄곧 서툰 채로 흘러만 간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그 세계를 실감할 때 진저리쳤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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