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한국이랑 똑같구나...

문부과학성이 정한 기준에 따르면, 1천 페이지의 책을 10년 걸려서 번역한 것보다 3일 만에 쓴 10페이지 남짓의 논문이 업적으로서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번역에는 독창성이 없지만 논문에는 독창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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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갖고 스스로 문을 열어 본 사람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넓디넓은 풍경‘, 그것도 ‘그곳‘ 이외의 어느 장소에서도 볼 수 없는 조망입니다. - P40

보리스 건축의 장치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문을 열지 않으면 그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기심의 보상으로서 그곳 이외의 어느 장소에서도 볼 수 없는 조망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도 먼 옛날에 돌아가신 건축가로부터 학생에게 주어지는 개인적인 선물이라는 형태로 말이지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교사의 건축 사상으로서 이것만큼 훌륭한 것은 유례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사 그 자체가 배움의 비유로 점철되어 있지요. 그런데 건축가는 이 장치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단지 건물만을 남겨 주었습니다. 건축가로부터의 메시지는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이 스스로 발견하세요‘입니다. 이것은 죽은 건축가가 후세 사람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P41

결의를 갖고 자신의 손으로 문손잡이를 돌린 자에게만 보상이 주어집니다. 문 앞에 서있다는 이유만으로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정보를 요구해도 안 되는 것이지요. 자신의 손으로 손잡이를 돌린 자에게만 건너편의 풍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배움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배움에 대한 의욕이 가장 상승하는 것은 지금부터 자신이 배울 것의 의미와 가치를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뭔가에 강하게 끌리는 상황에서입니다. 어렴풋한 신호에 반응해서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신체와 시간을 사용해서 자신의 감각을 믿고 신체를 그 장소에 밀어 넣은 사람에게만 개인적인 선물이 도착합니다. - P42

사고하는 것은 자신이 말한 것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 맺기 없이는 우리는 사고하는 것조차 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현재에 붙잡고 있으면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앞당겨서 맞이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일 없이는 우리는 대화도 사고도 할 수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 맺기 없이 우리는 인간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학문(인문학)의 시작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 맺기에 관한 기예라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자명한 일입니다. - P47

문학 연구자인 한 ‘문학 연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와 같은 물음을 늘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그런 학부가 있고, 실제로 수강 편람에 과목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연구자는 자신이 하는 연구의 의미에 관해서 늘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 P50

저는 이전에 불문학회 학회지의 편집위원을 4년간 하면서 젊은 연구자들의 학회 발표를 많이 듣고 논문을 몇편 읽었습니다. 그때마다 곤혹함을 느낀 것은 그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연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그들은 심사자를 향해서, 즉 심사자에게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 논문을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면 평가에서 높은 평점을 얻고 수치로 환산되는 순간에 연구는 그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10년, 20년 후에도, 먼 외국의,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생활습관도 다른 독자들에게도 가독성이 있는 글쓰기를 목표로 한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글쓰기로 오늘날의 젊은 연구자들은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 P51

‘어떤 식으로 인간은 욕망을 배우는가‘, ‘어떻게 절망하는가‘, ‘어떻게 거기에서 다시 일어서는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가‘와 같은 일을 연구하는 것이 문학 연구입니다. 그래서 문학 연구가 학문의 기본이고, 그것이 모든 학술의 한가운데에 존재해야만 합니다. - P54

제가 빈곤한 정치적 경험으로부터 얻은 결론은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 실현할 수있는 범위를 넘어선 정치적 사상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 정치로부터 각자의 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자신의 깜냥 이상의 사상은 말하지 마라‘는 말을 반복해서 입에 담았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이상을 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하지만 이상을 말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면 자신의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몸이 미치는 범위를 넓힐 수밖에 없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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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속에서 느낀 것을 노든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리고 노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이 너무 서운했다.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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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불행한 코뿔소인데 제멋대로인 펭귄이 한 마리씩 곁에 있어 줘서 내가 불행하다는 걸 겨우 잊고 사나 봐."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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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일본에 비해 많은 것이 뒤처졌던 시절에 일본은 "밉지만 배워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잃어버린 30년‘ 속에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제 그런 정서도 많이 옅어졌다. 특히 젊은 세대는 과거에 일본을 본보기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를 의아해한다. - P282

선진국론은 서구 우월주의 시각에서 국가의 서열화를정당화하는 논리에 가깝다. 세계의 여러 나라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누고 끊임없이 줄을 세우려는 불온한 의도가 숨어 있다. 김종태는 <선진국의 탄생>에서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은 곧 후진국에 대한 우월감"을 뜻한다며, "선진국 담론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한 인식체계"라고 지적한다. - P283

그러나 과거에 앞서갔다는 사실이 문제를 앞서 해결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앞선 장에서 보았듯이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생겼던, 그리고 원래부터 일본 사회가 갖고 있던 수많은 모순과 과제를 적당히 봉합한 채로 지나쳤다. 효율과 속도를 지나치게 중시한 탓이리라.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산적한 문제를 미뤘다. 계속된 전쟁과 불황이라는 위기를 핑계로고 고도성장의 풍요로움도 초점을 흐렸다. 전근대적인 관행도 ‘일본의 전통‘ 이라며 옹호했다. 결국 인권 문제와 젠더 문제 등이 계속 곪다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다. - P284

일본은 "유쾌하지 않은 근대화의 매개자"였다. 우리는 일본이 번역한 서구를 다시 번역했다. 우리에게 서구화는 중역, 즉 이중번역 과정이었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일본의 시스템을 학습하고 모방했다. 해방 전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 ‘선택지가 없는 타의‘였다면, 해방 후에는 ‘선택지가 적은 자의‘  였다. 일본을 따라간 덕분에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었지만, 압축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후유증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는 질곡이 되고 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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