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끝난 1991년경, 미국은 어떤 나라가 최대의 위협이라고 생각했을까? 소련은 붕괴 직전이었고, 중국 경제는 아직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 미국이 생각하는 최대 위협은 일본이었다. - P317

1990년대 들어 미국은 "동맹국과 미국의 공동 번영을 더는 기대할 수 없었다. 미국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강요했고,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상대방이 필요해졌다. 미국에겐 지적인 일본 수상이 더는 필요 없어졌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는 수상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 P330

비록 정론이라 해도 나 홀로 주장하면 따돌림을 당하는 법이고, 아무리 틀린 말이라도 다수가 주장하면 항상 주류에 남는다. 무리 속에만 있다면 아무리 틀린 말을 해도 훗날 검증당할 위험은 없다. 이것이일본 언론계의 실상이다. - P343

일본의 보수 세력이 신줏단지처럼 받들고 있는 미일 동맹은 언제나 그렇듯 위기 때마다 항상 회귀본능을 자극하는 안식처이자 방파제가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자민당 장기 집권기에 자주 나타났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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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7년간 인내심을 가지고 기시를 전범에서 수상으로 변신시켰다. 기시는 <뉴스위크> 도쿄지국장 파케남의 영어레슨을 받으면서 외신부장인 해리 칸을 통해서 미국 정치가와 만나게 된다. 해리 칸은 안보투쟁 시 CIA장관이던 알렌 덜레스와 친구로 나중에 CIA 중개역을 맡았다. 기시는 미국대사관 당국자와의 관계를, 마치 난초를 키우는 일처럼 소중히 생각했다. - P205

국제정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이 유명 대학의 학생운동이나 인권단체, NGO 등에 자금이나 노하우를 제공함으로써 반미 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를 만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이렇게 대규모 시위의 경우, 먼저 CIA가 개입했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 P219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은 전후 진보 세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6월 17일, 매우 이례적인 7개사 공동선언을 경계로 이 두 신문사는 성격이 완전히바뀌었다. 더 유감스런 일은 그것이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이 변하면서, 소위 지식인층에도 큰 변화가 찾아와 지식인 사이에 우경화 흐름이 강해진다. - P225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고 갔던 시절의 각료이면서, 도쿄 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수상에게 정국을 맡기다가는 자칫 일본은 다시 전전 체제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컸다. 경찰 권력으로 국민을 억압하거나 의회민주주의를 붕괴시킬 수도 있고, 아니면 미국과 하나가 되어 해외에 군대를 파병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국민들 사이에 있었던 것 같다. 1960년 안보투쟁의 시작은 미국 혹은 미국의 뜻을 반영한 재계의 정치공작에서 비롯되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일본사에 전례 없는 대중투쟁으로 발전했다. - P227

 자주노선과 추종선의 경쟁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일미군 문제이고, 그 다음은 중국과의 관계이다. 일본은 중국의 이웃국가다. 당연히, 일본 국내에는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잠재적인 라이벌로 간주하고 있어서, 중국이 공산주의 색채가 강할 때에는 봉쇄정책을 쓰고 군사력이 강해지면 대항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국을 둘러싸고 항상 미일 간 갈등이 발생한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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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국 지위를 회복한 뒤 일본은 외교 감각을 회복하려고 해도 오랜 타성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전히 점령군의 중추세력인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자주독립의 정신은 한번 상실하면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P144

지금까지 자신이 검열관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사람은 겨우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은 나중에 대학교수나 주요 신문 기자가 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점령 후 공무원이 되었을 것이고, 아니면 언론계나 학계, 혹은 경제계에서 나름 한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중략) 미국 첩보기관에 이용되었던 당시 지식인 계층들은 전후 일본에 무려 5천 명이나 머물러 있었다. 미국의 방침에 거스르면 추방되고, 잘 보이면 경제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그때의 구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P146

가리오아 자금이 중요했던 것은 일본의 엘리트들이 그 돈으로 유학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나 공무원 등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학했고, 그중에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 후 일본 사회에서 미일 관계 강화를 위해서 움직였다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 P152

2009년 9월부터 2010년 5월까지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이 오키나와 후텐마기지를 최소한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을 암시한 적이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일본 측에서 미군 기지 축소 계획을 제시한 사례는 과거 반세기 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의 주장은 미군이나 일본이 볼 때 반세기 이상에 걸친 기본 노선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그러나 하토야마 내각을 붕괴시키려는 움직임이 보기 좋게 성공했다. - P161

결국, 미국은 요시다 - 오카자키 콤비가 교섭하여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기간만큼 주둔시킬 권리를 법적으로 확보하고," 미군 관계자 전원에게 사실상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수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 때문이다. - P169

일본 전후사를 살펴보면, 한때 미국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 정세가 바뀌면서 이용가치가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새로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정치인은 미국에 의해 퇴진당한다. - P172

 북방영토 가운데 에토로후와 구나시리라는 2개 섬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미국이 소련에 준 영토이다. 미국은 냉전 이후 소련이구나시리와 에토로후를 일본에 양도하려고 하자 양자 관계에 간섭을 해왔다. 일본과 소련 간 분쟁의 여지를 남겨서 우호관계를 훼방하려는 미국의 속셈인 것이다. - P184

영국 등은 식민지에서 철수할 때, 대부분 분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물러난다. 식민지가 단결하여 영국의 반대 세력이 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철수할 때 인도-파키스탄 간에 캐시미르 분쟁을 남겨두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철수할 때는 부족 갈등을 일으키도록 국경을 얼키설키 설정한다.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고 방글라데시까지 만든 것 또한 영국의 전통적인 분할통치 방식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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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니들이 한국에 한 짓이잖아... 최소한 니들은 강제 징용을 당하거나 노역에 끌려가거나 위안부로 끌려가진 않았네.

 강화조약 체결 시 외무성조약국장이던 니시무라 구마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점령통치 6년간의 고통은 지금 30, 40대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에서 그저 지시만 내려올 뿐이었다. 언제 어디서 처벌당할지 아무도 몰랐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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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세계전략에서 각국을 어떻게 활용할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미국의 세계전략이 바뀌면 장기의 말처럼 일본의 역할 또한 크게 바뀐다. - P116

냉전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패전 후 미국, 영국, 소련은 서로 세력권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소련은 피점령국인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에 차례차례 공산당 정권을 수립한다. 이에 서방국가가 크게 반발한다. 이런 과정에서 냉전이 시작되었다. - P118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세계전략의 목적 또한 바뀌었다. 일본과 독일이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억압하던 노선을 전환하여 소련과 대항하는 노선으로 갈아탔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대우 역시 크게 달라졌다. - P119

점령 초기에 미국의 대일정책은 군사력과 경제 해체 및 민주화 촉진이었다. 그러나 소련에 대항하면서부터 일본의 경제력과 공업력을 이용하는 것이 미국에게 이익이라는 판단으로 갑자기 전략을 180도 전환하게 된다.(중략)
미국의 급격한 노선 전환은 그때까지 일본에 군림해 온 맥아더의 점령정책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맥아더와 트루먼 대통령, 그리고 국방성 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한국전쟁을 둘러싼 갈등이 심해지자 맥아더는 최고사령관에서 해임된다.
미국이 노선 변경한 대상은 정책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다루는 방식도 크게 바뀌어 과거 전범으로 수감된 사람들이 소련과 대항하기 위해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전범들이 석방되어 차례로 정계에 복귀했다. - P121

왜 북한은 이런 바보 같은 전쟁을 시작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그때야말로 북한이 한국을 제압할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북한의 이런 목적은 전쟁 초기에 거의 달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북한의 이런 생각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미국의 개입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은 미국이 반격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일까?
북한이나 동맹국인 소련이 최고의 스파이 조직을 동원해 미국의 비밀 정보를 수집했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전쟁 전이라면 필시 미국의 전쟁 개입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 국가안보회의는 1949년12월 한국 철수를 결정했다. 이 문서를 입수한 소련 스파이가 미국 참전은 없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 P124

점령군의 본래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일본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다. 첫째 주일미군 기지를 계속 유지할 것과, 둘째 재무장을 통해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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