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 지위를 회복한 뒤 일본은 외교 감각을 회복하려고 해도 오랜 타성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전히 점령군의 중추세력인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자주독립의 정신은 한번 상실하면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P144
지금까지 자신이 검열관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사람은 겨우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은 나중에 대학교수나 주요 신문 기자가 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점령 후 공무원이 되었을 것이고, 아니면 언론계나 학계, 혹은 경제계에서 나름 한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중략) 미국 첩보기관에 이용되었던 당시 지식인 계층들은 전후 일본에 무려 5천 명이나 머물러 있었다. 미국의 방침에 거스르면 추방되고, 잘 보이면 경제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그때의 구도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P146
가리오아 자금이 중요했던 것은 일본의 엘리트들이 그 돈으로 유학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나 공무원 등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유학했고, 그중에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 후 일본 사회에서 미일 관계 강화를 위해서 움직였다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 P152
2009년 9월부터 2010년 5월까지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이 오키나와 후텐마기지를 최소한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을 암시한 적이 있다. 일본 수상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일본 측에서 미군 기지 축소 계획을 제시한 사례는 과거 반세기 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유키오 수상의 주장은 미군이나 일본이 볼 때 반세기 이상에 걸친 기본 노선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그러나 하토야마 내각을 붕괴시키려는 움직임이 보기 좋게 성공했다. - P161
결국, 미국은 요시다 - 오카자키 콤비가 교섭하여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기간만큼 주둔시킬 권리를 법적으로 확보하고," 미군 관계자 전원에게 사실상 치외법권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수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 때문이다. - P169
일본 전후사를 살펴보면, 한때 미국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 정세가 바뀌면서 이용가치가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새로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정치인은 미국에 의해 퇴진당한다. - P172
북방영토 가운데 에토로후와 구나시리라는 2개 섬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미국이 소련에 준 영토이다. 미국은 냉전 이후 소련이구나시리와 에토로후를 일본에 양도하려고 하자 양자 관계에 간섭을 해왔다. 일본과 소련 간 분쟁의 여지를 남겨서 우호관계를 훼방하려는 미국의 속셈인 것이다. - P184
영국 등은 식민지에서 철수할 때, 대부분 분쟁의 여지를 남겨두고 물러난다. 식민지가 단결하여 영국의 반대 세력이 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철수할 때 인도-파키스탄 간에 캐시미르 분쟁을 남겨두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철수할 때는 부족 갈등을 일으키도록 국경을 얼키설키 설정한다.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고 방글라데시까지 만든 것 또한 영국의 전통적인 분할통치 방식이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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