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이야기 비룡소 걸작선 29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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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관련 스포일러 주의*

 

"지금 이 순간, 오직 나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는 단 한 권의 마법의 책을 찾아, 그리고 환상 세계를 찾아 떠나는 모험"

엔데의 대표작인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것은 두근거리면서도 동시에 힘든 일이었다. 아트레유의 모험은,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바스티안의 모험은 그저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끝없는 도전과 극복으로 가득찬 성장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 또 한 번, 답이 보이지 않는 시련 앞에서, 혹은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장벽 앞에서 고뇌하는 그들을 대신해 차라리 내가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던 것이 도대체 몇 번이었던가.

이 소설은 바스티안이라는 한 남자아이의 이야기이다. 세상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 매일이 우울로 점철되어 있던 바스티안은 어느 비 오는 아침 코레안더 씨의 서점에서 자신이 그 동안 계속 찾고 있었던, 언젠가 읽을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되고, 그 책을 서점 주인인 코레안더 씨 몰래 훔쳐 달아나기에 이른다. 학교에 도착한 바스티안은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학교 창고에 혼자 앉아 책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바스티안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읽고 있는 또다른 이야기는 현실이 아닌 환상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 속의 환상 세계에 위기가 닥쳤고, 그 위기는 환상 세계의 어린 여왕이 병에 걸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여왕은 이 문제를 해결할 단 하나의 인물로 아트레유라는 소년을 지목한다. 아트레유는 여왕의 명을 받들어 여왕이 전해준 '아우린'이라는 부적을 지니고 환상 세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난다.
여왕을 낫게 하는 방법은 여왕에게 새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고, 여왕에게, 그리고 환상 세계의 모든 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바깥 세계에 사는 인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트레유는 여왕이 있는 상아탑으로 찾아가 여왕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다. 여왕과 아트레유는 책을 통해 바스티안에게 그들의 대화를 들려주며, 그 순간 책을 읽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환상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보고 있는 바스티안이 환상 세계로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려 하지만, 바스티안은 시공을 넘어 어린 여왕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아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다. 그러나 여왕이 결코 가서는 안 되는 곳, 방랑산 정상에 있는 알 속에 들어가 그곳에 갇혀서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바스티안은 저도 모르게 여왕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그럼으로써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환상 세계로 간 바스티안은 자신이 '달아이'라고 이름을 붙여 준 어린 여왕을 만나게 되고, 여왕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권한을 상징하는 '아우린'을 주며 그가 원하는 대로 세계를 창조하라고 말한다. 부적 뒷면에 적혀 있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라는 메시지에 따라, 바스티안은 하나씩 하나씩 마음 속에 생겨나는 '소원'을 이루어 가며 세계를 창조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소원대로 아름다워졌고, 누구보다 강하고 지혜로워졌으며, 그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던 아트레유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소원을 하나씩 이루어 갈 때마다, 그리고 그가 창조한 이야기들이 현실이 될 때마다 바스티안은 그의 바깥 세계에서의 기억을 하나씩 잃어하게 된다. 바스티안은 현실 세계의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 잊어버렸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원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성격이 어떠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되면서 점점 환상 세계의 주민에 가까워져 현실 세계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버리게 된다. 바스티안의 이런 변화를 그의 친구 아트레유와 행운의 용 푸후르는 걱정스런 눈길로 지켜보며 그에게 계속해서 충고를 하지만, 바스티안은 그들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며 자신에게 훈계하고 참견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사악한 마법사 크샤이데의 꾐에 빠진 바스티안은 아트레유의 진심을 모르는 채 마침내 아트레유와 푸후르를 내쫓아 버리고, 크샤이데의 부추김에 넘어가 어린 여왕이 자리를 비운 상아탑을 자신이 차지하고 환상 세계의 황제가 되기로 한다.
대관식 날, 바스티안을 떠났던 아트레유가 군대를 이끌고 와 상아탑을 점령하고, 아트레유는 바스티안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그에게서 아우린을 빼앗으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바스티안은 마법의 칼로 아트레유에게 상처를 입힌다. 도망친 아트레유를 쫓아 상아탑을 떠난 바스티안은 그 때부터 가장 중요한 마지막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늙은 황제들의 도시를 본 후, 바스티안은 환상 세계의 황제가 되려고 했던 것이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바스티안은 자신의 소원이, 일찍이 사자 그라오그리만이 말했던 진정한 '소원'이 바로 환상 세계의 황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틀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소원은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바깥 세계의 기억의 갯수만큼만 소원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이제 자신에게 남은 소원은 몇 개 되지 않으며, 그 소원들이 끝나기 전에 바깥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 역시 예전에 황제가 되려 했던 사람들과 똑같이 늙은 황제들의 도시에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렇게 말없이, 영원히 환상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바스티안은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바깥 세계로 나가는 길로 이끌어 줄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단 하나의 '진정한 소원',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여행을 계속한다.

그의 마지막 소원, 다른 어느 소망보다 강렬한 단 하나의 열망이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라는 존재의 근간이며, 가장 기본적인 사랑이며, 자기 외에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기본 전제 조건인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남의 존재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그 사랑의 마음을 남에게 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스티안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뭔지 깨닫고 바깥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생명의 물로 향하던 도중 자신이 만들고 변화시킨 슐라무펜들의 습격을 받아 길잡이를 잃어버렸을 때, 그의 친구인 아트레유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다. 모험을 하는 내내 친구의 안위를 걱정했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그의 오해를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친구를 구하기 위해 친구를 이겨야 했으나 그가 상처를 입을 것을 마음아파하여 결국 자신이 상처를 입었던, 친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감내했던 아트레유가 마지막으로 다시 친구를 돕기 위해 바스티안의 앞에 나타난 그 순간, 그 장면에서 나는 또다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처음부터 바스티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문의 열쇠는 처음부터 바스티안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여왕은 환상 세계에 나타난 영웅을 맞이한 그 때 그가 돌아갈 길까지 이미 제시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바스티안은 바로 자기 앞에 있는 문을 보지 못하고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다. 진정으로 원하는 소원이 뭔지 깨닫기 전에 다른 소원을 빌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모험은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그 자체가 그가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문을 찾기 위해 그가 걸어야만 했던 '그의 길'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일들을 겪어온 바스티안은 처음 환상 세계에 왔던 때의 바스티안과는 달랐다. 그리고 지금의 바스티안만이 생명의 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아우린을 벗어 버린 바스티안에게 그가 잊어버린 그 자신의 이름을 다시 가르쳐 주고, 그를 생명의 샘으로 인도해 준 아트레유는 환상 세계에서의 바스티안의 마지막 책임, 즉 바스티안이 풀어 놓은 이야기를 끝맺는 임무마저 자신이 대신 지고 바스티안을 바깥 세계로 돌려보내 준다. 바스티안은 아트레유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자신만을 생각해 준 진정한 친구임을 그제야 깨닫지만, 어쩔 수 없이 그와 이별하고 바깥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바스티안이 양손 가득 담아왔던 생명의 물은 비록 어디엔가 흘려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은 바스티안의 아버지에게 전해져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게 된다.

'끝없는 이야기'는, 환상 세계가 그 세계와 여왕에게 새 이름을 지어 줄 영웅을 끝없이 기다리며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스티안이 발견했던 마법의 책은 그 순간 그에게 있어 단 한 권의 신비한 책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마법의 책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 특별한 순간, 단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는 마법의 책이. 그리고 그 책을 만나 환상 세계로 가서, 먼 여행 끝에 진정한 자신을 찾은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환상 세계에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랑'을 전해주게 되고,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또다시 자신만의 '끝없는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것이다.
이 책은 동화이자 판타지이며 가장 훌륭한 성장 소설이다. 책을 읽는 이라면 누구나, 아이이든 어른이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단 하나의 가장 강렬한 열망을 찾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 여로의 끝에서 만난 자신은, 지금의 자신보다 한층 성장한 얼굴로 웃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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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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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인조 때, 중국은 바야흐로 명이 멸망하고 여진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려던 시기였다. 명을 압박한 청은 그때까지 명에 조공을 바쳐오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고, 명이 청과의 전쟁 중 파병을 요청하자 이에 응한 바 있었던 조선을 치려 한다. 청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남하해왔고, 적병이 청천강, 그 다음의 임진강을 넘어 진군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기에 이른다. 종묘의 신주와 왕자와 빈궁들을 강화 행궁으로 한 발 먼저 떠나보내고 조금 늦게 그 뒤를 따라가려 했던 임금과 세자 및 조정 신료들은 그 사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버려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결국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피신하게 된다.
산성 안에서 긴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2월 2일 삼전도에서 영조가 청의 칸에게 삼복구읍으로써 항복한 것을 역사에서는 '삼전도의 굴욕'이라 일컫는다. 이 책은,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다가 끝내 항복하기까지의 45일간의 이야기이다.


빈궁과 왕자들이 강화로 건너가고, 임금이 산성으로 들어앉기 전부터도 주화와 척화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죽음이 가벼우냐 삶이 가벼우냐,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아니면 치욕을 참고 살아남아 후일 다시 아름다워질 것인가 하는 주화와 척화 간의 싸움은 시작부터 답이 없었다. 그 싸움에 시작부터 답이 없음은, 양편 모두 아름답고 큰 명분 -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희생이 크더라도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쪽도, 조금이라도 덜 잃기 위해 화친해야 한다는 쪽도, 결국은 모두 조선을 위한 것이었으니, 그 공론에는 끝이 없고 답도 없었다. 경복궁 편전에서 남한산성 내행전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계속되는 주화와 척화의 말다툼 속에서 임금은 이도 저도 할 수 없었고, 그러는 사이 날은 추워지고, 강은 얼고, 적은 얼어붙은 송파강을 건너 산성을 포위하고, 비는 내리고, 내려 얼어서 조선 군사들의 몸을 얼렸다. 밤새 내행전에서 빗소리를 들은 임금은 죄 없이 젖고 얼어가는 군사들, 자신의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슬퍼하며 버선발로 마당에 나와 엎드려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린다. '경들이 박복하구나'라고 임금은 말했지만, 박복한 것이 어찌 신료들뿐이랴. 신료들이 박복하고. 백성들이 박복하고, 군사들이 박복하고, 백성들을 지켜내지 못한 임금이 박복하고, 강대국 옆에 자리한 조선이 박복하다. 조선은, 임금은, 백성들은 그저 살아가기를 바랬을 뿐이었으리라. 백성들이 살아남고 나라가 살아남기를 임금은 바랬으리라. 그러니, 강의 언 길을 골라 청병을 건네 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연명하려는 몽매한 백성을 어찌 탓할 수 있을까. 잘못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 있고, 서울을 지켜내지 못한 자들에게 있을 뿐, 백성은 그저 그 환란 속에서 살아남기를 원했을 뿐이리라. 그러니 어찌 그들을 탓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공을 베어 두어야 했던 것은, 그 역시 나라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니, 이 역시 어찌 탓할 수 있으랴.

산성에서 신년을 맞아 명 황제가 있는 북경을 향해 무도를 거행하며 망궐례를 올리는 임금의 모습은 기묘하고도 슬퍼서, 그 장면을 망월봉 꼭대기에서 지켜보고 있던 칸이 임금을 이해할 수 없었듯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의 사대주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쓰러져 가는 명에게 그토록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조선은 그런 나라였고, 그러한 조선을 어쩔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조선의 그러한 면을 아직까지도 곧고 아름답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그저 그러려니 여기기로 했다.
그러나 칸의 군대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고, 용서할 수 없었다. 청의 장수 용골대의 군대는 조선의 국토를 짓밟고 백성들을 포로로 부리고 여인들을 유린했으며, 뒤이어 내려온 그들의 칸은 항복을 종용했다. 한편에선 구차한 삶은 치욕이다, 다른 편에선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며 묘당이 옥신각신 싸우는 와중에도 병사들은 허기지고 얼어가고, 말은 죽어가고, 성 안의 가축은 씨가 말라가고, 성 밖으로 나간 격서는 전해지기는 하였으나 군사들은 당도하기도 전에 패해 버리고, 성 안의 모두가 성문이 열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의로 열리든 타의로 열리든, 안에서 열고 나가든 밖에서 밀고 들어오든,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을 목 베든 싸움을 부르짖는 김상헌을 묶어 끌고 나가든 어쨌든 성문이 열려야 백성도 임금도 나라도 살 수 있을 것이었고, 성 안은 모두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으로 들어온 이상 끝은 예견된 것이었고, 그저 그 끝이 언제인지를 알 수 없었을 뿐, 살아남을 길은 두 개가 아니었다. 세상 어느 임금이 자신의 백성이 자꾸 죽어가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며 견딜 것인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백성들은 고단해지고, 군사들은 지쳐가고, 땅은 황폐해진다. 설상가상으로 강화 행궁마저 무너지고 종친들이 사로잡히고, 칸이 돌아가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임금은 굴욕을 받을 것을 결심한다.

용맹하고도 야만스러운 칸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읍하고, 칸이 주는 술 세 잔을 받아 마시고, 세자를 볼모로 떠나보내고서야 임금의 나라는 평안을 얻었다. 을씨년스러운 편전에 왕은 다시 자리했고, 신료의 아침 문안을 받았고, 피난을 갔던 백성들은 다시 제 살던 고장으로 돌아왔다. 불타버린 집을 새로 짓고, 아무 데서나 썩어가는 시체들을 묻고, 황폐해진 논과 들을 다시 일구어, 앞으로의 삶도 이제까지의 삶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었다. 모든 삶은 왕이 맡은 그 흙냄새에서 나오고, 나와서 그리로 다시 돌아가고, 그 흙내 나는 땅을 지기키 위하여 그 모든 싸움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므로.


대국 옆에 붙어 있는 소국으로서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슬픔과 그 모든 치욕은 이 한 번의 슬픔, 이 한 번의 치욕과 다르지 않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그리고 병자호란, 그 외에도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무수한 전란들은 이 전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의 역사에는 늘 그러한 전쟁이 있어왔고, 임금들과 백성들은 그 무수한 전쟁을 지나며 살아남아왔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나보다 한참 앞서 이 땅에 살았던 그들이 그 수많은 고통과 슬픔과 굴욕과 그 후의 재기의 과정을 거쳐 끝까지 살아남아 준 덕택임을 잊지 말자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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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착오
앤소니 버클리 콕스 지음, 황종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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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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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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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37
윌리엄 제랄드 골딩 지음, 유혜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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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설을 소설로 처음 접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쯤이었던가, 이 소설을 영화화한 것을 어머니와 함께 본 것이 이 소설과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엔 원작이 소설이라는 것도 모르고 봤었는데, 아주 오래 전에 봤는데도 불구하고 내용이 워낙 인상적이었던 터라 그 영화를 보며 느꼈던 두려움이나 당혹감 같은 느낌들이 아직도 떠오를 정도로 기억 속에 깊숙히 남아 있다. 그러다가 최근에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곧 책을 사서 읽어 보았다.

약 십수 명의 소년들이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추락한다. 그들은 모여서 그들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른들의 사회처럼 질서를 지닌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랄프가 주운 소라는 사회 속의 질서와 규칙의 상징이다. 그들은 소라를 우러러보듯이 회의 때 소라를 손에 든 소년을 우러러보았고, 소라를 가장 긴 시간 가지고 있는 랄프의 말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 사회 속의 또 하나의 지도자, 즉 사냥 부대의 대장인 잭은 계속해서 랄프와 의견 충돌을 겪는다. 잭의 사냥부대는 처음에는 실패하지만 이윽고 자력으로 멧돼지를 잡는 데 성공하게 된다. 망설임은 한 번 뿐이었다. 그들은 사냥이라는 유혈유희에 점점 중독되어 봉화를 내버려두고 사냥에 열중하는 본말전도적인 상황을 초래한다. 잭의 사냥부대로 인해 랄프의 질서는 흔들리고, 랄프는 질서를 재정립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랄프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한계를 맞아 알게 모르게 랄프에 대한 의심이 모두의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드는 바로 그 때, 랄프와 잭의 대립은 극에 달하고 결국 소년들은 두 패로 갈라지게 된다. 잭의 야만적인 힘에 매료된, 혹은 사냥의 산물인 고기에 이끌린 몇몇 소년들이 잭을 따라 떠나고, 아직도 질서를 중시하는 이들은 랄프의 곁에 남는다.

그리고 곧이어 일어난 첫 번째의 살인... 피에 미쳐 야만적인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던 소년들은 그들의 원 속으로 들어온 것이 자신들의 동료인지 짐승인지 판단할 생각도 않고- 아니, 동료임을 알면서도 그를 짐승으로 간주하며 그저 광기에 씌어 그 누군가를 사냥한 것이다. 아직 가치관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소년들이 극한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의 잔혹성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지, 그리고 일단 얼굴을 가지고 밖으로 드러난 잔혹성은 얼마나 철저해지는지가 이 첫번째 살인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사실적으로 드러난다. 소라가 질서와 규칙의 상징이었다면, 잭의 무리들이 뒤집어쓴 가면은 야만성과 잔혹성의 상징이다. 그 가면 속에 있는 것은 분명 방금 전까지는 사회의 질서를 따르던 소년이었으나, 가면을 쓰는 순간 마치 모든 사회적인 예속에서 일시에 벗어나 버린 것처럼 온갖 잔인한 짓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한편, 질서를 중시하며 사회를 이루고 있던 소년들도 그들의 야만적인 놀이에 이끌려 함께 춤을 추려 하지만, 야만인들이 잔혹하게 저지른 살인에 놀라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살인을 막지는 못한다. 그들은 야만인들을 말리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도망친다. 물론 그처럼 그들의 사냥을 섣불리 막으려 하다가는 오히려 자신까지 사냥당할 상황에서 그것을 막지 못하고 도망친 것은 무턱대고 욕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소년들의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문명이 야만에 대항하지 못하고, 무력 앞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몸을 사렸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사회에서 사회적 규범과 질서는 무의미해졌으며 이제 힘만이 유일한 질서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소라의 시대는 가고 가면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 사건을 통해 작가는 무력 앞에서 의미를 잃는 문명과 무력의 무법성 및 절대성을 충격에 가까운 대비를 통해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모인 소년들은 일부러 그 축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빙빙 둘러 말하며, 사이먼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한다. 우린 아무것도 못 본 거야, 그들이 춤을 추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난 거야, 하며 애써 상기하지 않으려 하고 못 본 체하는 데서 소년다운 심리와 발상이 드러난다. 어린아이들은 사회적 질서와 통념에 어긋나는 짓을 해서 어른에게 야단을 맞을 것이 두려워지면 그 일을 잊어버리려 하거나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고 쉽게 도피하고 합리화해 버린다. 사회는 어린이들에게는 관대하니까,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어린 소년들이 살인을 목도했을 때의 충격, 그리고 그 살인을 저지른 것이 어른도, 짐승도, 공인된 악인 따위도 아닌 바로 얼마 전까지 함께 생활하던 같은 또래의 소년들이라는 것에 대한 공포가 그들로 하여금 사실을 인정하지 않게 했던 것이다. 그런 소년들의 심리가 마치 내가 직접 겪은 듯이 느껴져 와 나는 섬뜩함을 견딜 수 없었다.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건설하려 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명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용기를 짜내어 안경을 돌려받으러 갔던 새끼돼지는 첫 번째의 살인 이후로 이제는 한층 더 냉정하게, 겁없이 살인을 할 수 있게 된 야만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아름다웠던 소라도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문명 사회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두 명의 소년이 결국 힘 앞에 무릎을 꿇었고, 단 한 명 문명인으로 남은 랄프는 야만인들에게 사냥을 당한다. 그리고 야만인들에게 ?기던 랄프는 사이먼이 몽롱한 의식 속에서 보았던 그 '파리대왕'을 보게 된다.

'파리대왕'은 그들이 생활하는 도중에 일어난 모든 추악한 것의 집합체이다. 나뭇가지에 꽂힌 멧돼지의 머리는 잭의 사냥부대가 이미 먹을 것을 위해서만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 그 자체를 즐기게 된 후에 신이 나서 잡아 죽인 멧돼지의 머리를 잘라낸 것이다. 유희로서의 사냥의 결과로 희생된 멧돼지의 머리를 이번에는 파리떼가 새까맣게 에워싸고 탐욕스럽게 배를 채운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후, 백골만 남은 멧돼지의 머리는 그러나 오히려 웃음을 띄고 있다. 그것은 분명 소년들을 향한 비웃음이리라. 보아라, 너희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보아라, 지금도 얼마나 망가져 가고 있는지 두 눈을 뜨고 똑똑히 보아라. 너희의 사회는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다. 아직 어린아이임을 핑계삼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그건 크나큰 오산이다. 너희의 사회를 이렇게 잘못되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희들이다. 보아라, 지금 너희의 꼴을 좀 보아라... 그렇게 악마처럼 속삭이며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 멧돼지의 머리가 꽂혀 있던 나뭇가지를 빼어든 랄프는 나뭇가지의 양쪽 끝이 모두 뾰족하게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살인을 부추기는 사냥도구, 그것을 일단 손에 든 랄프는 어쩌면 살인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상처입히고 죽인 후에 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변명해도 어쨌든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

책의 결말은 내가 기억하는 영화의 결말과 달랐다. 영화를 하도 오래 전에 봐서 내 어렴풋한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의 결말에서는 랄프 하나만이 구원을 받았던 것 같다. 봉화를 보고 구조하러 왔던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야만인들의 사냥을 목격하고 그들을 정말로 섬에 살던 야만인들로 여기고 퇴치하여 랄프만을 구한다는 결말. 영화의 결말이 정말로 그랬는지 자신있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죽 그렇게 생각해 왔던 나는 책의 결말이 어쩐지 못마땅했다. 그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데, 구원받을 자격은 이미 없는데. 그렇지만 그들이 구조를 받았다 해서 다시 예전의 그 자랑스런 영국 국민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섬에서의 기억은 그들이 되찾게 될 양심 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평생 그들을 괴롭히겠지.

작가 윌리엄 골딩은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문명을 향한 무의식적인 지향, 극한 상황에서 눈을 뜨는 인간의 본성, 상황의 변화에 따른 문명과 무력의 관계 등 여러 가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기껏해야 열 대여섯 된 어린 소년들이 갖가지 사건을 겪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느끼는지, 그 심리묘사가 무척이나 탁월하다. 책을 읽어가며 과연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달까. 한번쯤 읽고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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