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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조 인조 때, 중국은 바야흐로 명이 멸망하고 여진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려던 시기였다. 명을 압박한 청은 그때까지 명에 조공을 바쳐오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고, 명이 청과의 전쟁 중 파병을 요청하자 이에 응한 바 있었던 조선을 치려 한다. 청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남하해왔고, 적병이 청천강, 그 다음의 임진강을 넘어 진군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기에 이른다. 종묘의 신주와 왕자와 빈궁들을 강화 행궁으로 한 발 먼저 떠나보내고 조금 늦게 그 뒤를 따라가려 했던 임금과 세자 및 조정 신료들은 그 사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버려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결국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피신하게 된다.
산성 안에서 긴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2월 2일 삼전도에서 영조가 청의 칸에게 삼복구읍으로써 항복한 것을 역사에서는 '삼전도의 굴욕'이라 일컫는다. 이 책은,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다가 끝내 항복하기까지의 45일간의 이야기이다.
빈궁과 왕자들이 강화로 건너가고, 임금이 산성으로 들어앉기 전부터도 주화와 척화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죽음이 가벼우냐 삶이 가벼우냐,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아니면 치욕을 참고 살아남아 후일 다시 아름다워질 것인가 하는 주화와 척화 간의 싸움은 시작부터 답이 없었다. 그 싸움에 시작부터 답이 없음은, 양편 모두 아름답고 큰 명분 -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희생이 크더라도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쪽도, 조금이라도 덜 잃기 위해 화친해야 한다는 쪽도, 결국은 모두 조선을 위한 것이었으니, 그 공론에는 끝이 없고 답도 없었다. 경복궁 편전에서 남한산성 내행전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계속되는 주화와 척화의 말다툼 속에서 임금은 이도 저도 할 수 없었고, 그러는 사이 날은 추워지고, 강은 얼고, 적은 얼어붙은 송파강을 건너 산성을 포위하고, 비는 내리고, 내려 얼어서 조선 군사들의 몸을 얼렸다. 밤새 내행전에서 빗소리를 들은 임금은 죄 없이 젖고 얼어가는 군사들, 자신의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슬퍼하며 버선발로 마당에 나와 엎드려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린다. '경들이 박복하구나'라고 임금은 말했지만, 박복한 것이 어찌 신료들뿐이랴. 신료들이 박복하고. 백성들이 박복하고, 군사들이 박복하고, 백성들을 지켜내지 못한 임금이 박복하고, 강대국 옆에 자리한 조선이 박복하다. 조선은, 임금은, 백성들은 그저 살아가기를 바랬을 뿐이었으리라. 백성들이 살아남고 나라가 살아남기를 임금은 바랬으리라. 그러니, 강의 언 길을 골라 청병을 건네 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연명하려는 몽매한 백성을 어찌 탓할 수 있을까. 잘못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게 있고, 서울을 지켜내지 못한 자들에게 있을 뿐, 백성은 그저 그 환란 속에서 살아남기를 원했을 뿐이리라. 그러니 어찌 그들을 탓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공을 베어 두어야 했던 것은, 그 역시 나라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니, 이 역시 어찌 탓할 수 있으랴.
산성에서 신년을 맞아 명 황제가 있는 북경을 향해 무도를 거행하며 망궐례를 올리는 임금의 모습은 기묘하고도 슬퍼서, 그 장면을 망월봉 꼭대기에서 지켜보고 있던 칸이 임금을 이해할 수 없었듯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의 사대주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쓰러져 가는 명에게 그토록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조선은 그런 나라였고, 그러한 조선을 어쩔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조선의 그러한 면을 아직까지도 곧고 아름답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기에, 그에 대해서는 그저 그러려니 여기기로 했다.
그러나 칸의 군대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고, 용서할 수 없었다. 청의 장수 용골대의 군대는 조선의 국토를 짓밟고 백성들을 포로로 부리고 여인들을 유린했으며, 뒤이어 내려온 그들의 칸은 항복을 종용했다. 한편에선 구차한 삶은 치욕이다, 다른 편에선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며 묘당이 옥신각신 싸우는 와중에도 병사들은 허기지고 얼어가고, 말은 죽어가고, 성 안의 가축은 씨가 말라가고, 성 밖으로 나간 격서는 전해지기는 하였으나 군사들은 당도하기도 전에 패해 버리고, 성 안의 모두가 성문이 열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의로 열리든 타의로 열리든, 안에서 열고 나가든 밖에서 밀고 들어오든,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을 목 베든 싸움을 부르짖는 김상헌을 묶어 끌고 나가든 어쨌든 성문이 열려야 백성도 임금도 나라도 살 수 있을 것이었고, 성 안은 모두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으로 들어온 이상 끝은 예견된 것이었고, 그저 그 끝이 언제인지를 알 수 없었을 뿐, 살아남을 길은 두 개가 아니었다. 세상 어느 임금이 자신의 백성이 자꾸 죽어가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며 견딜 것인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백성들은 고단해지고, 군사들은 지쳐가고, 땅은 황폐해진다. 설상가상으로 강화 행궁마저 무너지고 종친들이 사로잡히고, 칸이 돌아가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임금은 굴욕을 받을 것을 결심한다.
용맹하고도 야만스러운 칸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읍하고, 칸이 주는 술 세 잔을 받아 마시고, 세자를 볼모로 떠나보내고서야 임금의 나라는 평안을 얻었다. 을씨년스러운 편전에 왕은 다시 자리했고, 신료의 아침 문안을 받았고, 피난을 갔던 백성들은 다시 제 살던 고장으로 돌아왔다. 불타버린 집을 새로 짓고, 아무 데서나 썩어가는 시체들을 묻고, 황폐해진 논과 들을 다시 일구어, 앞으로의 삶도 이제까지의 삶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었다. 모든 삶은 왕이 맡은 그 흙냄새에서 나오고, 나와서 그리로 다시 돌아가고, 그 흙내 나는 땅을 지기키 위하여 그 모든 싸움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므로.
대국 옆에 붙어 있는 소국으로서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슬픔과 그 모든 치욕은 이 한 번의 슬픔, 이 한 번의 치욕과 다르지 않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그리고 병자호란, 그 외에도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무수한 전란들은 이 전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의 역사에는 늘 그러한 전쟁이 있어왔고, 임금들과 백성들은 그 무수한 전쟁을 지나며 살아남아왔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나보다 한참 앞서 이 땅에 살았던 그들이 그 수많은 고통과 슬픔과 굴욕과 그 후의 재기의 과정을 거쳐 끝까지 살아남아 준 덕택임을 잊지 말자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