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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ㅣ 비룡소 걸작선 29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엔딩 관련 스포일러 주의*
"지금 이 순간, 오직 나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는 단 한 권의 마법의 책을 찾아, 그리고 환상 세계를 찾아 떠나는 모험"
엔데의 대표작인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것은 두근거리면서도 동시에 힘든 일이었다. 아트레유의 모험은,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바스티안의 모험은 그저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끝없는 도전과 극복으로 가득찬 성장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 또 한 번, 답이 보이지 않는 시련 앞에서, 혹은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만들어낸 장벽 앞에서 고뇌하는 그들을 대신해 차라리 내가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던 것이 도대체 몇 번이었던가.
이 소설은 바스티안이라는 한 남자아이의 이야기이다. 세상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 매일이 우울로 점철되어 있던 바스티안은 어느 비 오는 아침 코레안더 씨의 서점에서 자신이 그 동안 계속 찾고 있었던, 언젠가 읽을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책 한 권을 발견하게 되고, 그 책을 서점 주인인 코레안더 씨 몰래 훔쳐 달아나기에 이른다. 학교에 도착한 바스티안은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학교 창고에 혼자 앉아 책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바스티안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그가 읽고 있는 또다른 이야기는 현실이 아닌 환상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 속의 환상 세계에 위기가 닥쳤고, 그 위기는 환상 세계의 어린 여왕이 병에 걸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여왕은 이 문제를 해결할 단 하나의 인물로 아트레유라는 소년을 지목한다. 아트레유는 여왕의 명을 받들어 여왕이 전해준 '아우린'이라는 부적을 지니고 환상 세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난다.
여왕을 낫게 하는 방법은 여왕에게 새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고, 여왕에게, 그리고 환상 세계의 모든 것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바깥 세계에 사는 인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트레유는 여왕이 있는 상아탑으로 찾아가 여왕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다. 여왕과 아트레유는 책을 통해 바스티안에게 그들의 대화를 들려주며, 그 순간 책을 읽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환상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보고 있는 바스티안이 환상 세계로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려 하지만, 바스티안은 시공을 넘어 어린 여왕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아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다. 그러나 여왕이 결코 가서는 안 되는 곳, 방랑산 정상에 있는 알 속에 들어가 그곳에 갇혀서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바스티안은 저도 모르게 여왕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그럼으로써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환상 세계로 간 바스티안은 자신이 '달아이'라고 이름을 붙여 준 어린 여왕을 만나게 되고, 여왕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권한을 상징하는 '아우린'을 주며 그가 원하는 대로 세계를 창조하라고 말한다. 부적 뒷면에 적혀 있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라는 메시지에 따라, 바스티안은 하나씩 하나씩 마음 속에 생겨나는 '소원'을 이루어 가며 세계를 창조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소원대로 아름다워졌고, 누구보다 강하고 지혜로워졌으며, 그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했던 아트레유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소원을 하나씩 이루어 갈 때마다, 그리고 그가 창조한 이야기들이 현실이 될 때마다 바스티안은 그의 바깥 세계에서의 기억을 하나씩 잃어하게 된다. 바스티안은 현실 세계의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 잊어버렸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원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성격이 어떠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되면서 점점 환상 세계의 주민에 가까워져 현실 세계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버리게 된다. 바스티안의 이런 변화를 그의 친구 아트레유와 행운의 용 푸후르는 걱정스런 눈길로 지켜보며 그에게 계속해서 충고를 하지만, 바스티안은 그들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며 자신에게 훈계하고 참견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사악한 마법사 크샤이데의 꾐에 빠진 바스티안은 아트레유의 진심을 모르는 채 마침내 아트레유와 푸후르를 내쫓아 버리고, 크샤이데의 부추김에 넘어가 어린 여왕이 자리를 비운 상아탑을 자신이 차지하고 환상 세계의 황제가 되기로 한다.
대관식 날, 바스티안을 떠났던 아트레유가 군대를 이끌고 와 상아탑을 점령하고, 아트레유는 바스티안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그에게서 아우린을 빼앗으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바스티안은 마법의 칼로 아트레유에게 상처를 입힌다. 도망친 아트레유를 쫓아 상아탑을 떠난 바스티안은 그 때부터 가장 중요한 마지막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늙은 황제들의 도시를 본 후, 바스티안은 환상 세계의 황제가 되려고 했던 것이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바스티안은 자신의 소원이, 일찍이 사자 그라오그리만이 말했던 진정한 '소원'이 바로 환상 세계의 황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틀렸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소원은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바깥 세계의 기억의 갯수만큼만 소원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이제 자신에게 남은 소원은 몇 개 되지 않으며, 그 소원들이 끝나기 전에 바깥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 역시 예전에 황제가 되려 했던 사람들과 똑같이 늙은 황제들의 도시에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그렇게 말없이, 영원히 환상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바스티안은 자신이 살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바깥 세계로 나가는 길로 이끌어 줄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단 하나의 '진정한 소원',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여행을 계속한다.
그의 마지막 소원, 다른 어느 소망보다 강렬한 단 하나의 열망이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자기'라는 존재의 근간이며, 가장 기본적인 사랑이며, 자기 외에 다른 이를 사랑하기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기본 전제 조건인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남의 존재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그 사랑의 마음을 남에게 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바스티안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뭔지 깨닫고 바깥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생명의 물로 향하던 도중 자신이 만들고 변화시킨 슐라무펜들의 습격을 받아 길잡이를 잃어버렸을 때, 그의 친구인 아트레유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다. 모험을 하는 내내 친구의 안위를 걱정했고, 친구를 구하기 위해 그의 오해를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친구를 구하기 위해 친구를 이겨야 했으나 그가 상처를 입을 것을 마음아파하여 결국 자신이 상처를 입었던, 친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감내했던 아트레유가 마지막으로 다시 친구를 돕기 위해 바스티안의 앞에 나타난 그 순간, 그 장면에서 나는 또다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처음부터 바스티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문의 열쇠는 처음부터 바스티안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여왕은 환상 세계에 나타난 영웅을 맞이한 그 때 그가 돌아갈 길까지 이미 제시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바스티안은 바로 자기 앞에 있는 문을 보지 못하고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다. 진정으로 원하는 소원이 뭔지 깨닫기 전에 다른 소원을 빌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모험은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그 자체가 그가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문을 찾기 위해 그가 걸어야만 했던 '그의 길'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일들을 겪어온 바스티안은 처음 환상 세계에 왔던 때의 바스티안과는 달랐다. 그리고 지금의 바스티안만이 생명의 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아우린을 벗어 버린 바스티안에게 그가 잊어버린 그 자신의 이름을 다시 가르쳐 주고, 그를 생명의 샘으로 인도해 준 아트레유는 환상 세계에서의 바스티안의 마지막 책임, 즉 바스티안이 풀어 놓은 이야기를 끝맺는 임무마저 자신이 대신 지고 바스티안을 바깥 세계로 돌려보내 준다. 바스티안은 아트레유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자신만을 생각해 준 진정한 친구임을 그제야 깨닫지만, 어쩔 수 없이 그와 이별하고 바깥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바스티안이 양손 가득 담아왔던 생명의 물은 비록 어디엔가 흘려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은 바스티안의 아버지에게 전해져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게 된다.
'끝없는 이야기'는, 환상 세계가 그 세계와 여왕에게 새 이름을 지어 줄 영웅을 끝없이 기다리며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스티안이 발견했던 마법의 책은 그 순간 그에게 있어 단 한 권의 신비한 책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마법의 책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 특별한 순간, 단 한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는 마법의 책이. 그리고 그 책을 만나 환상 세계로 가서, 먼 여행 끝에 진정한 자신을 찾은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환상 세계에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랑'을 전해주게 되고, 다시 돌아온 사람들은 또다시 자신만의 '끝없는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것이다.
이 책은 동화이자 판타지이며 가장 훌륭한 성장 소설이다. 책을 읽는 이라면 누구나, 아이이든 어른이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단 하나의 가장 강렬한 열망을 찾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 여로의 끝에서 만난 자신은, 지금의 자신보다 한층 성장한 얼굴로 웃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