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은 일본 에도 시대(1603-1868)에 성립된 학문이다. 에도 시대에 접어들며 비약적인 경제 및 문화 발전을 이룬 일본은 민족주의적 사상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국학은 일본 고유의 사상을 강조하며 이에 비례하여 중국과 인도에서 유입된 유교와 불교를 일본에 맞지 않는 외래사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배제하고자 한 학문체계다. 따라서 국학의 이상향은 불교와 유교가 일본에 유입되기 이전의 옛 일본이 된다. (중략) 국학은 에도 시대의 상공인과 지주층의 지지를 받아 성장해갔으며 천황을 숭배하는 존황사상으로 이어져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상체계가 되었다. - P18
근대 일본은 국학이 강조되는 동시에 유교적 도덕관도 유례없이 강조되던 기묘한 시대였다. - P21
‘모노노아와레‘는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서, ‘공감을 통한 애정과 연민‘에서 오는 미적 쾌감에서 ‘국체‘, 즉 일본 그 자체를 상징하는 개념으로까지 의미가 확장되었지만, 당연하게도 일본인만이 자연과의 ‘공감을 통한 애정과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략) ‘국체‘가 상상의 공동체였듯, 인류의 보편적 감정을 유교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발견하고 일본인만의 미학으로 삼아버린 이 논리적 오류로 생겨난 ‘모노노아와레‘ 역시 실체가 모호한 환상의 미학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 P23
너무 완벽해도, 너무 부족해도 안 되는 아슬아슬한 수위의 순간, 이를 ‘와비사비‘의 미학이라 한다. - P29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불완전하고 꾸미지 않는 부족함의 미학인 ‘와비사비‘는 사실은 대단히 사치스럽고 럭셔리한 개념이다. 앞서 몇 번이나 ‘의도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눈치채셨으리라. 부족함을 추구하는 ‘와비사비‘는 ‘와비사비‘를 구현하고자 하는 자가 실제로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실제로는 부족한 것이 없는 자가 잠시 무소유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놀이, ‘와비사비‘는 그 가난함을 즐기는 놀이인 것이다. 정말로 가진 것이 없는 자는 부족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31
스님들에게 있어 차를 마시는 행위란 본질적으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수단에 불과하다. ‘와비차‘란 스님들의 치열한 수행을 흉내 내보는 것으로, 흉내를 통해 자신의 마음도 맑아지고 깨달음에 한 발짝 다가선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하는 스님 놀이, 다른 말로 스님 코스프레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지나친 일일까. 센 리큐 역시 스님의 복장을 하고 살았지만, 출가한 스님은 아니었다. - P32
‘와비사비‘는 놀이였다. 지배층 고위계급 무사들이 잠시 가난함을 느끼는 놀이, 잠깐 스님의 삶을 맛보며 속계를 떠나 깨달음의 길에 한 발짝 다가선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놀이로, 오직물질적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소수의 지배계급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미학이었다. 가난의 기억이 있는 히데요시에게 가난함을 느끼는 것은 놀이가 아니라 고통이었을 것이다. - P36
‘와비사비‘는 지배층 무사계급의 미학이었다. 소수 지배층의 미학이 일본을 대표하는 미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며 앞서 언급한 마쓰오 바쇼의 하이카이가 국민문학으로 승격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 P36
21세기에 들어서서도, 미니멀리즘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와비사비‘는 일본적 미니멀리즘의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브랜드인 ‘이름이 없다‘, 즉 노브랜드라는 뜻의 ‘무인양품‘은 ‘와비사비‘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 P37
사족이지만, 무소유의 ‘와비차‘를 위한 찻잔들이 고가였듯, 비어 있고 절제되어 있는 디자인의 무인양품의 상품들 역시 비슷한 아이템을 다루는 다이소와 비교해서 (고려찻잔만큼의 고가는 아닐지라도)결코 저렴하지 않은 것도 흥미롭다. - P38
조슈 · 사쓰마 연합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에도 문화를 부정해야 했지만, 동시에 일본이 유럽 각국에 못지않은 고급문화를 가지고 있는 문명국임을 내세워야만 했다. 또한 서양에 대한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서양 문화를 따라가려 노력하는 동시에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 국민에게 일본 문화의 우수성도 강조해야 했다. 근대 일본은 서양에 대한 열등감과 우월감이 동시에 표출되는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콤플렉스의 시대였다. - P39
《창조된 고전》에 따르면, 메이지 시기의 문학 엘리트들은 중국의 문학은 호방하고 웅장하며, 서양 문학은 정교하다. 그리고 일본 문학은 이들에 비해 ‘우미하다‘라는 특징이 있다고 결론 내린다. ‘우미‘는 문학사의 기준이자 프로파간다가 되었고, 이 기준을 통과한 작품들만이 문학사의 정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우미‘라는 개념은 문학을 넘어 예술 및 문화 전반에 걸쳐 (고급) 서양 문화에 견줄 수 있는 수준인지에 대한 척도가 되었다. ‘우미‘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 서양 문학에 대한 상대적 기준이었다. 따라서 서양인의 눈으로 봤을 때 ‘우미하다‘라고 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 P40
에도 중기 이후, 일본 문화의 중심은 평민들의 문화로 옮겨간다. 메이지의 새로운 권력이 ‘우미‘하지 않은, 타락하고 퇴폐한 문화라고 지칭한 것은 바로 이 평민들의 문화였던 것이다. - P41
"이성 간의 통로로서 설치되어져 있는 특수한 사회"라는 모호한 표현을 두글자로 줄이면 ‘유곽‘이 된다. ‘와비사비‘의 공간이 차를 마시는 다실이었다면, ‘이키‘의 공간은 술을 마시는 유곽이었던 것이다. 유곽이 문화의 중심이었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유곽은 에도 시대 평민문화의 중심 가운데 하나였다. 메이지 시대의 엘리트들이 에도의 대중문화를 서양인들에게 감추고 싶은 저속한 문화라고 여긴 것도,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면이 없지 않을 것 같다. - P46
‘이키‘란 ‘비타이‘, ‘이쿠지‘, ‘아키라메‘의 세 가지 내포적 징표를 갖는 ‘긴장감 있는 세련된 성적 매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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