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키모노란 대개 화려한 옷을 망토처럼 두르고 가죽을 덧대어 입는다든가, 과장된 머리 스타일, 상궤를 벗어난 큰칼, 큰 담뱃대 등 사람의 눈에 띄는 외양을 하고 흉폭한 행동과 과장된 언동을 일삼는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다. 이러한 가부키모노는 무사계급의 억압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에돗코들에게 있어 세상의 상식과 권력, 질서로부터의 반항, 반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러한 상궤를 벗어난 일탈자, 가부키모노를 주인공으로 삼는 가부키는 에돗코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 P101

악한 권력을 응징하는 장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의 크기는 실제로 받았던 억압에 대한 불만에 비례한다. 권력자의 시각에서 보면, ‘시바라쿠‘는 피지배층의 반항과 불만의 데포르메였다. 불만의 압력을 낮추기 위해 허용은 하나 결코 권장할 수는 없는 필요악, 가부키 극장이 아쿠바쇼, 즉 나쁜 곳으로 불렸던 또다른 이유였다. - P104

현대의 코스튬 플레이가 대상 캐릭터에 최대한 닮을 수 있도록노력한다면, 에도 시대의 코스튬 플레이는 타인에게 그 의미가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암호처럼 글자나 그림을 꼬아서 표현하는 방식(한지모노라고 한다)을 채택해서 추상적인 문양으로 표현하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러한 미스터리 패턴은 일종의 은어와 같은 효과를 가지게 되어, 패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세련된 그룹, 즉 ‘이키‘의 그룹과 그렇지 않은 촌스러운 그룹, ‘야보‘의 그룹을 나누는 역할도 하게 된다. - P110

유곽에서 탄생하고, 극장에서 구체화되어간 ‘이키‘라는 스타일은 유행이라는 양탄자를 타고 담을 넘어 저잣거리로 퍼져간다. ‘이키‘의 의미는 확장되어 우리나라 말의 ‘멋‘과 비슷한 스펙트럼으로 사용되었다. ‘이키하다‘라는 말은 ‘멋있다‘라는 우리말처럼 사람의 행동과 패션뿐만 아니라, 유행가나 공간에도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스타일을 일컫는 범용적 표현이 되었다. - P123

이제 ‘이키‘는 ‘이키즘ikism‘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만큼 문학, 미술, 음악, 건축, 패션, 음식 등의 모든 문화예술 분야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미학적 스타일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중략)
이러한 ‘이키즘‘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요정이다. - P124

‘이키‘한 공간에서 ‘이키‘한 음식을 ‘이키‘한 게이샤들을 불러서 함께 먹는 것을 멋으로 생각한 에돗코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이키즘‘이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 P127

가부키 극장에서 요정의 도시락을 먹는 것, 이 역시 ‘이키‘한공간에서 ‘이키‘한 음식을 즐기는 에돗코 스타일의 ‘이키즘‘이었다. - P128

‘비타이‘와 ‘이쿠지‘, ‘아키라메‘라는 키가 분석한 ‘이키‘의 성분은 패션과 건축, 음식, 음악의 세련된 스타일로서의 ‘이키‘에서는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보기 어려워질 정도로 ‘이키‘의 의미는 확장되어갔다. 물론 이것 역시 ‘키‘라는 단어로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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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처럼 보여야 하고 진짜처럼 보이지만 진짜가 아닌 사랑을 연기하는 비일상적 일상이 벌어지는 유곽과 현실처럼 보이지만 비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이지만 일상처럼 벌어지는 연기를 하는 가부키 극장을 묶어서 나쁜 곳이라는 의미의 아쿠바쇼로 불렀던 것은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유곽은 가부키와 함께 나쁜 곳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필요악으로서, 비일상적 상황을 다루는 일상적인 공간으로 존재한다. - P85

요시와라는 문화의 중심이 에도로 옮겨진 후, 가부키, 소설, 그림등의 주요한 공간 배경으로 자주 사용되어 드라마틱한 특별함이 더해져 갔다. 요시와라의 고객층은 원래 다이묘 수준의 고위 무사계급이었지만 점차 하위 계급으로까지 내려가게 되어, 아사쿠사로 옮긴 이후 요시와라의 주된 고객층은 무사계급만이 아닌 부르주아조닌계급도 포함하게 된다.
상위계급의 손님들을 위해 기루의 주인들도 그들과 어울리는 교양을 쌓기 위해 다도와 꽃꽂이, 그림, 패션, 향, 제례 의식 등에 정통하게 되었고, 가부키 배우, 화가, 작가의 후원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또한 손님을 상대하는 유녀들에게도 문화 전반에 관한 교양을 익히게 했으니,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유행을 창조해가던 요시와라의 최상위 계급 유녀를 오이란이라 부르며, 노래와 춤을 부르는 사람은 예능인이라는 뜻의 게이샤라 부른다. 게이샤에는 남자 게이샤도 존재했었고 이들은 주로 손님의 기분을 맞춰주는 재담꾼의 역할을 맡았다. 주인과 손님, 유녀, 게이샤가 어우러져, 요시와라는 최신유행과 새로운 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최신유행의 발신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 P86

후카가와는 세련되고 최신유행이 넘쳐나는 핫플레이스였다. 아무리 추워도 버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으며, 남자가 입는 겉옷인 하오리를 걸치는 후카가와 게이샤 특유의 패션처럼 후카가와만의 독특한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에돗코들은 이러한 후카가와의 문화를 세련됨으로 인식했고 후카가와 스타일을 ‘이키‘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 P89

요약하면 오쿠마는 선물을 받으면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알고, 빈틈없는 일 처리가 가능하며, 세련된 복장이 어울리는 여성으로 이를 한 단어로 줄이면 ‘이키‘한 여성이 되는 것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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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선과 달랐던 일본의 지배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바로 일본은 봉건제 국가였다는 점이다. 일본의 무사 권력은 허울뿐이기는 하나 천황과 귀족계급을 유지시킨다. 형식상이나마 천황에게 각 지역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는다. 그리고 조정의 일을 일임받아 천황이 있는 교토가 아닌 다른 곳에 관청을 여는 형태를 취했다. 이러한 관청을 막부라 부른다. 막부의 장을 부르는 호칭이 다름 아닌 장군이란 의미의 쇼군이다. 막부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각 지역을 할거하던 군소 무사 권력들이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고 센고쿠 시대라 불리는 혼란한 시대에 들어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전국을 통일하고 에도 막부를 열어 쇼군이 된다. 에도는 수도가 되었고 이때부터를 에도 시대라 부른다. - P54

쇼군의 직할지인 에도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른 번의 번주(다이묘)와 그 휘하의 무사들은 비록 지체 높은 무사님들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P55

에도야시키는 (각 번의 대사관 격이었기에) 궁궐에 필적하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가가번(현재의 가나자와현에 해당)의 에도야시키는 현재 도쿄대학교 캠퍼스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른 번들의 야시키 또한 현재 미술관, 동물원, 방위청 등의 부지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 P57

흔히 일본이 경박단소한 물건을 잘 만들어 내는 이유를 일본의 민족성 등에서 찾고는 하나, 전쟁과 참근교대와 같은 인적 이동이 잦았던 일본의 역사적 사실이 민족성과 같은 모호한 이유에 우선한다고 생각한다. - P61

화재의 빈번함은 에도 조닌들이 일생에 한두 번은 화재로 집이 불타 없어질 것을 각오할 정도였다. 화재와 지진 등의 재난으로 불타고 부서진 건물들을 새로 짓기 위해서 많은 목재와 인력이 필요했고 재화가 투입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재건 사업을 통해 에도는 호황을 누렸고 조닌의 사회경제는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에도인들은 화재가 도시 부흥과 경제발전의 비료와 같은 효과를 낸다는것을 거듭된 화재와 부흥의 경험을 통해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화재는 에도의 꽃‘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러한 성공 경험에서였다. - P64

얇은 나무판자 하나를 맞대고 다른 세대와 이어져 있는 나가야에서 사생활 보호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협소한 나가야의 공동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강도는 현재 우리나라의 아파트에서 겪는 층간소음 문제 정도를 떠올려보더라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주민들 간의 매너와 규칙, 벌칙 등의 문화도 발달하게 된다.
길을 가다 상대방의 발을 밟으면 밟은 쪽도 밟힌 쪽도 서로 미안하다고 표현한다든지, 아이들에게 매너교육을 어릴 때부터 시킨다거나,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비난하는 분위기 등 현대의 일본에서도 이어지는 매너와 룰은 현대의 공동주택 생활에서 지켜야 할 매너와 규칙 등과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중략) 아파트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인들이 단독주택을 선호하게 된 것을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P67

일본어 ‘구다라나이‘는 내려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구다라나이가 볼품없거나 재미없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 된 것은 물건이나 사람이 위쪽의 가미가타에서 구다라나이, 즉 교토와 오사카에서 내려오지 않아 볼품없다, 재미없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에도는 아직 미성숙한 도시였다. - P68

교덴의 에돗코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에코는 에도에서 태어나야 하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며, 돈에 집착하지 않는사람이어야 한다. 특히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에돗코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이자 미덕이었다. - P70

돈을 아끼면 에도에서 태어나도 에돗코가 아닌 것으로 여겨졌대 하루 지난 돈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에돗코다. 그러나 돈이 없어도 돈에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꽤 괴로운 법이다. 이를 풍자하는 많은 센류와 이야기들도 전해오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허세를 부리는 것 역시 에코스러운 모습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당시의 에도인들은 이러한 허세를 다른 번, 즉 다른 나라 사람들은 따라할 수 없는 에도에서 살아가는 에도토박이들만의 특징으로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 P71

에돗코가 타자화시킨 대상은 다름 아닌, 에도에서 무위도식하며 거들먹거리지만 에도가 낯선 곳이기에 어리숙하기만 했던, 그렇지만 칼을 차고 있기에 고개는 숙여야 했던, 참근교대로 각 지역에서 올라와 있던 (에돗코의 입장에서 보면) 시골무사들이었던 것이다. 무사들에게 고개 숙여야 하지만 에도는 자신들의 홈코트이고 그렇기에 무사들보다 훨씬 세련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에도 조닌들의 프라이드와 연대감, 그리고 무사계급에 대한 숨겨진 반항의 표출이라는 결과가 에돗코 문화였다. - P72

에돗코들의 삶이란 아주 높은 확률로 한순간에 모든 재산이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재해를 당할 것이라는 확정적으로 불안한 미래와 함께하는 것이었다. 에도에서 태어나 에도에서 살아가고 죽어야 할 에돗코들은 재난이라는 비일상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에돗코들의 선택은 어차피 불에 타 없어질 거라면, 처음부터 재물을 다 써버리겠다는 데카당스적 라이프스타일이었다. 무사계급의 소비에 더해 생산계급의 소비문화 유행은 에도를 극단적인 소비사회로 만들었다.
에돗코의 소비는 (불타 없어지지 않을) 삶을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그들이 즐기던 엔터테인먼트는 공연예술(가부키, 조루리 등), 스포츠 관전(스모 등), 도박, 화류 등이었다. 이는 지금의 현대 도시인들이 즐기는 보편적 엔터테인먼트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에도 시민들이 삶을 즐기려 했던 욕망은 대중문화예술을 더욱 정제되고 세련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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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은 일본 에도 시대(1603-1868)에 성립된 학문이다. 에도 시대에 접어들며 비약적인 경제 및 문화 발전을 이룬 일본은 민족주의적 사상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국학은 일본 고유의 사상을 강조하며 이에 비례하여 중국과 인도에서 유입된 유교와 불교를 일본에 맞지 않는 외래사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배제하고자 한 학문체계다.
따라서 국학의 이상향은 불교와 유교가 일본에 유입되기 이전의 옛 일본이 된다. (중략) 국학은 에도 시대의 상공인과 지주층의 지지를 받아 성장해갔으며 천황을 숭배하는 존황사상으로 이어져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 일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상체계가 되었다. - P18

근대 일본은 국학이 강조되는 동시에 유교적 도덕관도 유례없이 강조되던 기묘한 시대였다. - P21

‘모노노아와레‘는 시대적 필요성에 의해서, ‘공감을 통한 애정과 연민‘에서 오는 미적 쾌감에서 ‘국체‘, 즉 일본 그 자체를 상징하는 개념으로까지 의미가 확장되었지만, 당연하게도 일본인만이 자연과의 ‘공감을 통한 애정과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략) ‘국체‘가 상상의 공동체였듯, 인류의 보편적 감정을 유교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발견하고 일본인만의 미학으로 삼아버린 이 논리적 오류로 생겨난 ‘모노노아와레‘ 역시 실체가 모호한 환상의 미학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 P23

너무 완벽해도, 너무 부족해도 안 되는 아슬아슬한 수위의 순간, 이를 ‘와비사비‘의 미학이라 한다. - P29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불완전하고 꾸미지 않는 부족함의 미학인 ‘와비사비‘는 사실은 대단히 사치스럽고 럭셔리한 개념이다. 앞서 몇 번이나 ‘의도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눈치채셨으리라. 부족함을 추구하는 ‘와비사비‘는 ‘와비사비‘를 구현하고자 하는 자가 실제로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실제로는 부족한 것이 없는 자가 잠시 무소유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놀이, ‘와비사비‘는 그 가난함을 즐기는 놀이인 것이다. 정말로 가진 것이 없는 자는 부족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31

스님들에게 있어 차를 마시는 행위란 본질적으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수단에 불과하다.
‘와비차‘란 스님들의 치열한 수행을 흉내 내보는 것으로, 흉내를 통해 자신의 마음도 맑아지고 깨달음에 한 발짝 다가선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하는 스님 놀이, 다른 말로 스님 코스프레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지나친 일일까. 센 리큐 역시 스님의 복장을 하고 살았지만, 출가한 스님은 아니었다. - P32

‘와비사비‘는 놀이였다. 지배층 고위계급 무사들이 잠시 가난함을 느끼는 놀이, 잠깐 스님의 삶을 맛보며 속계를 떠나 깨달음의 길에 한 발짝 다가선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놀이로, 오직물질적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소수의 지배계급만이 향유할 수 있었던 미학이었다. 가난의 기억이 있는 히데요시에게 가난함을 느끼는 것은 놀이가 아니라 고통이었을 것이다. - P36

‘와비사비‘는 지배층 무사계급의 미학이었다. 소수 지배층의 미학이 일본을 대표하는 미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며 앞서 언급한 마쓰오 바쇼의 하이카이가 국민문학으로 승격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 P36

21세기에 들어서서도, 미니멀리즘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와비사비‘는 일본적 미니멀리즘의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브랜드인 ‘이름이 없다‘, 즉 노브랜드라는 뜻의
‘무인양품‘은 ‘와비사비‘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 P37

사족이지만, 무소유의 ‘와비차‘를 위한 찻잔들이 고가였듯, 비어 있고 절제되어 있는 디자인의 무인양품의 상품들 역시 비슷한 아이템을 다루는 다이소와 비교해서 (고려찻잔만큼의 고가는 아닐지라도)결코 저렴하지 않은 것도 흥미롭다. - P38

조슈 · 사쓰마 연합은 쿠데타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에도 문화를 부정해야 했지만, 동시에 일본이 유럽 각국에 못지않은 고급문화를 가지고 있는 문명국임을 내세워야만 했다. 또한 서양에 대한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서양 문화를 따라가려 노력하는 동시에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 국민에게 일본 문화의 우수성도 강조해야 했다. 근대 일본은 서양에 대한 열등감과 우월감이 동시에 표출되는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콤플렉스의 시대였다. - P39

《창조된 고전》에 따르면, 메이지 시기의 문학 엘리트들은 중국의 문학은 호방하고 웅장하며, 서양 문학은 정교하다. 그리고 일본 문학은 이들에 비해 ‘우미하다‘라는 특징이 있다고 결론 내린다. ‘우미‘는 문학사의 기준이자 프로파간다가 되었고, 이 기준을 통과한 작품들만이 문학사의 정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우미‘라는 개념은 문학을 넘어 예술 및 문화 전반에 걸쳐 (고급) 서양 문화에 견줄 수 있는 수준인지에 대한 척도가 되었다. ‘우미‘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 서양 문학에 대한 상대적 기준이었다. 따라서 서양인의 눈으로 봤을 때 ‘우미하다‘라고 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 P40

에도 중기 이후, 일본 문화의 중심은 평민들의 문화로 옮겨간다. 메이지의 새로운 권력이 ‘우미‘하지 않은, 타락하고 퇴폐한 문화라고 지칭한 것은 바로 이 평민들의 문화였던 것이다. - P41

"이성 간의 통로로서 설치되어져 있는 특수한 사회"라는 모호한 표현을 두글자로 줄이면 ‘유곽‘이 된다. ‘와비사비‘의 공간이 차를 마시는 다실이었다면, ‘이키‘의 공간은 술을 마시는 유곽이었던 것이다. 유곽이 문화의 중심이었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유곽은 에도 시대 평민문화의 중심 가운데 하나였다. 메이지 시대의 엘리트들이 에도의 대중문화를 서양인들에게 감추고 싶은 저속한 문화라고 여긴 것도,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면이 없지 않을 것 같다. - P46

‘이키‘란 ‘비타이‘, ‘이쿠지‘, ‘아키라메‘의 세 가지 내포적 징표를 갖는 ‘긴장감 있는 세련된 성적 매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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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는 19세기부터 시작된 일반 서민 대중의 미의식이었다. 지배계급의 미의식이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미학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 P10

‘모노노아와레‘와 ‘와비사비‘가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미학이라 한다면, ‘이키‘는 사람과의 교감을 중시하는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이키‘를 사람들이 만들고 많은 사람(대중)이 서로 접촉하며여러 관계를 맺게 되는 도시를 배경으로 생성된 미학, 다시 말해 ‘도시미학‘으로 부르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11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 일본의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정신에 서양의 기술을 익히겠다는 화혼양재를 넘어 모든 것을 서구화하겠다는 탈아입구로 이어졌다. 이윽고 일본의 근대 예술과 미학은 서양 근대 예술과 서양의 최신 미학사조와 연동된다. 공간은 그대로였지만, 에도는 도쿄로 바뀌어갔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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