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aporia > 가장 신뢰할 만한 스피노자 관련 국역본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으려고 할 때, 그런데 주위에 그 책에 관해 물어볼 만한 사람이 없을 때, 아무래도 서평 등을 참고하게 된다. 여기에다 그 책값이 상당하고, 특히 (철학/인문학 관련) 번역서라면, 돈도 별로 없거니와 직간접적으로 오역의 폐해를 경험한 나 같은 경우 리뷰를 보지 않고서는 책 살 엄두를 아예 내지 못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스피노자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독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용기를 내 글을 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스피노자 관련 연구서 중 ‘소장’해서 두고두고 읽을 만한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다. 이는 우선 저자인 피에르 마슈레의 이론적 역량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제자라는 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 마슈레 역시 ‘~를 읽자’라는 노선에 아주 충실하다. 앞의 서평자도 말했듯 이는 들뢰즈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연구와 비교되는 지점이다(그렇다고 해서, 특히 들뢰즈의 독해가 꼼꼼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어디까지가 스피노자의 견해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견해인지를 다소 불분명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네그리는 더 심하고 말이다. 네그리를 읽고서 스피노자를 알았다고 하는 건 솔직히 어폐가 있다). 스피노자, 특히 ‘에티카’ 1~2부를 정밀하게 읽고자 할 때 한글로 된 문헌 중에 이 책보다 훌륭한 동반자를 찾기란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딱딱한 ‘훈고학’은 아니다. 알다시피 알튀세리앙들의 독해 노선은 ‘징후적 독해’로서, 텍스트의 모순과 공백과 균열을 특권화하면서 텍스트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말하지 않는 무엇?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 또는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들과의 대결 또는 동맹 말이다. 여기서 ‘당대’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당대며, 다른 편으로는 마슈레의 당대다. 후자와 관련하여 내가 주로 파악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유물변증법’이라는 쟁점이다. 앞서 스피노자 연구와 관련하여 이름난 두 명의 이론가로 들뢰즈와 네그리를 든 바 있는데, 이들은(또는 국내에서 이들을 따르는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을 폐기하고 완강한 反변증법의 노선을 택한다. 이는 그들의 주장이므로 그에 대한 이견 여부와 관계없이 존중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들의 주장이 스피노자의 사고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는 식의 통념이 형성된다는 점, 그러면서 스피노자 사고의 많은 부분 심지어 결정적 부분이 제거된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마슈레의 이 책은 우리나라에 널리 소개되지 않았던 스피노자의 다른 면목(심지어 진면목!)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특히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스피노자의 불가분성은 이 책의 전반부를 통해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입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물변증법의 문제는 이에 비하자면 마슈레의 해석이 좀더 많이 가미됐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철저히 훈련받은 징후적 독해의 노선 덕분에 마슈레는 자의성을 효과적으로 피하면서 독창성에 도달하는 듯 하다. 이는 그가 헤겔과 철저하게, 그렇지만 (예컨대 네그리처럼 외재적으로가 아니라) 내재적으로 대결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개한 것은 이 책 자체에 관한 것이지, 이 책의 ‘국역본’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데리다가 쓴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아무리 훌륭한 의의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국역본을 추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리뷰를 쓰게 된 근본적 전제는 번역자의 이론적 역량에 대한 신뢰다. 이에 대해서는 백번의 설명보다는 그가 쓴 ‘불량배들’ 서평(나 역시 이 서평 때문에 그를 알게 되었다)을 직접 보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꼼꼼한 번역은 물론이거니와, A4 30장에 달하는 역자해제 및 상세한 역주는 불어본으로 환원할 수 없는 국역본의 고유한 가치다. 더욱이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 언제든 역자에게 이론적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이에 대해 이론적 환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어떤 책의 독서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매우 강력한 지적 자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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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트래블가이 > 인도차이나에 대한 올바른 태도의 여행서

 


이 책을 사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살펴본 양극을 달리는 2건의 리뷰가 흥미로웠다. 책이야 보는 사람 마음대로이겠지만 나로서는 아무래도 별 다섯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동남아 여행의 경험을 여러차례 갖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그 어느 책이나 사이트에서도 제공하지 못했던 사실들과 관점을 던져주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저자가 바탕에 깔고 있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애정과 특별한 시각이다. 이 시각은 특히 베트남에 대해서 보다 냉철하고 발전적이다. 베트남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강요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베트남과 한국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내가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혼란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지를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살을 부딪히며 여행해 본 사람들은 모두들 이 점에서 깊은 공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베트남에 대해서 진정으로 사과하려면 베트남 정부가 아닌 베트남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을 폄하한 리뷰가 저자의 베트남에 대한 관점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이 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돌고돈 여행지를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은 사실로 보기 힘들다. 저자는 앙코르와트가 있는 시엠립과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이 거의 또는 흔히 방문하지 않는 지역, 예를 들어 반띠아이스레이나 프놈꿀렌 그리고 베트남 기념비와 같은 곳을 힘겹게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캄보디아의 프놈펜이나 캄폿이나 보꼬와 같은 곳도 그렇다. 심지어 앙코르와트 조차도 저자는 지금까지의 흔하고 흔한 관점에서 일찍 달아나고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나라들은 두어번씩 방문한 내게도 이 책은 내가 가보지 않았던 지역들을 답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디를 얼마나 돌아다녔는지가 아니다. 어떤 눈으로 보고 마음과 머리에 무엇을 담을지에 대한 좋은 여행서가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찾아보기가 무척 어려운 소중한 여행서가 될 충분한 자격과 미덕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저자는 어떻게 보면 이 심각하고 본질적인 이야기를 여행서로서 그야말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미덕이다.

인도차이나의 3개국을 여행할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그 나라의 역사, 역사의 현재적 의미 그리고 사람들과 문화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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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니까 사서 보는 거다, 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럼에도 이 만화를 펼쳐 읽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할 지언정 베토벤의 삶을 동경하는 이는 없듯이, 1989년부터 오직 이 한 만화만 무려 16년 동안 그려온 작가 미우라 켄타로(三浦 建太郞)가 만들어 내는 이 가상의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는 가츠가 살아야 하는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의 삶을 행여 닮을 까봐 두렵고 겁이 나기 때문이다.

가츠가 살아야만 하는 세계가 끝 간 데 없이 공포스러운 것은 그 속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상정하는 최소한의 기계적인 이분법이 지켜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두움,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명징한 대비는 상식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균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속의 주인공이 어떠한 고난에 맞서 악전고투하고 있더라도 결국에는 적들을 물리치고 원하는 것-그것이 악의 세력에게 붙잡힌 공주이건, 왕국의 재건이건-을 손에 넣게 될 것임을 믿을 수 있기에 그다지 조바심을 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츠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가.  인간계는 마계에 의해 끊임없이 침범당하고, 권력자들의 착취는 일상적이며, 성직자들은 마녀사냥에서 흘리는 무고한 백성들의 피에 취해있고, 신으로부터는 구원이 오지 않는다.  희망이 사라져버린 세계.  상상을 초월하는 마물들, 그리고 신성과 마성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사도들.  그들에게 무력하게 사지를 찢기고 벌거벗기운 채 강간당하고 삶의 터전인 마을이 불태워져도 신음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인간들.  그리고 제물의 낙인이 찍혀 영원히 안식할 수 없는 가츠와,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소멸해버리고 말 캐스커.  이것들을 설명하는 절망이나 공포라는 말은 차라리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스물여섯 번째 단행본인 이 책에서 가츠 일행은 트롤의 본거지에서 마을 주민들-그래보았자 먹이로 삼기위한 어린아이들과 강간을 하기 위해 데려온 젊은 여자들뿐이었지만-을 구해내고 빠져 나오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온몸을 던져 활로를 뚫는 가츠의 싸움을 통과 의례처럼 경험하게 된다.  무수한 마물에 맞서는 단 하나의 인간, 검은 검사(劍士) 가츠.  그림체는 한마디 말도 없이 펼쳐 놓은 두 페이지 가득 붓자국이 선명한 굵고 거친 선들로 채워지고 그것들은 종이를 찢어버릴 듯이, 남은 하나의 눈마저 멀게 해 버릴 듯이 분노한다.  그리고 한 쪽 눈이 먼 가츠가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트롤들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기 시작했을 때부터 글썽이던 나는 기어이 또 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상황과 그림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살갗이 찢기고 혈관이 터지는 싸움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  나는, 마치 내 등 뒤에 꽂혀있는 육중한 대검의 무게를 느끼기라도 하듯이 가츠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

이전 편에서 가츠를 돕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던 해골의 기사는 인간으로서 신이 되어버린 그리피스와 싸워야 하는 가츠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를 강하게 암시하며 사도들에 맞서 그와 함께 싸움에 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가츠의 몸에 입혀지는 광전사(狂戰士, Berserk)의 갑옷.  몸을 파먹어 들어가는 고통도 잊은 채 벌어진 상처에서 온 몸으로 흘러내려 갑옷 밖으로 스미는 자신의 피에 젖은 채 싸우고 있는 가츠를 끝으로 이번 권의 이야기는 끝난다.  명부마도(冥付魔道)의 길이란 무엇이며 고드핸드는 누구인지, 불사신 조드 마저도 주인으로 숭배하는 '비상하는 흰 매' 그리피스의 계획은 무엇인지.  이번 편에서도 의문은 의문으로서 침묵할 뿐 우리는 여전히 암흑(暗黒) 속 인과(因果)의 길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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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겨울낙타 > 세상을 향한 예리한 칼잽이, 춈스키《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읽고

 


세상을 향한 예리한 칼잽이, 춈스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를 읽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칼의 노래>가 마음 속에 얽히곤 했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라는, 이순신의 칼만큼이나 치열하고 순결한 김훈 선생님의 말씀도 맴을 돌았다. '정치'는 순수한  '정치'의 것으로, '무(武)'는 '무'의 영역 안 그 정확한 자리로, 라고 외치는 칼의 노래.  '정치' 와 '무', 그 둘 사이를 어정쩡하게 흔들리다 간 많은 정객들 틈에서 과거의 이순신은 아스라히 스러져 갔고, 오늘날의 춈스키는 그 '칼'로 자본주의의 구조와 모순의 이면을 가른다. 홍해를 가른 모세의 지팡이가 이처럼 날렵하고 다급했을까.

  내가 춈스키를 처음 알게 된 건 대학에서 변형생성문법을 배울 때였다. 그 때는 그저 언어학 쪽의 신선한 학자정도로만 마음속에서 매김됐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한 신문에서 우연히 포리송 탄원서 사건에 연루되어 곤욕을 치룬 뒤의 춈스키와 그의 고언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렴풋한데 아마 이러했던 것 같다. " 내가 누군가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것과, 그가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지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책을 쭉 읽으면서도 가장 먼저 눈이 간 대목도 사실 이 글 전체 맥락과 다소 거리는 있으나, "어떤 이유로도 제한될 수 없는 표현의 자유"를 말하면서 프랑스 지식인의 폐쇄성을 꼬집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어디 그런 합리적이지 못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에만 있으랴.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토론 문화에 대한 경험이 비천하고 분단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배타성이 벽으로 가로막힌 경우,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예 귓바퀴를 틀어 막아버리거나 적대적인 감정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표현의 내용과 표현의 형식을 '포를 뜨듯이' 아주 합리적이며 예리한 칼날로 갈라 사고하는 진보적 정치 운동가로서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그것만큼이나 새롭고 설레는 과정이었다.
  이 책은 1999년, 현대 정치, 언론, 경제, 지식인의 문제에 대하여 프랑스의 두 언론인(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과 춈스키와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대화 형식 그대로 담아놓았다. 우선, '지식인'과 '진실'에 대한 뜻매김부터가 인상적이었다. 춈스키는 '지식인'이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보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이라 정의하면서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규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 또 얼마나 저명한지, 그리고 우리 체제 안에 반체제 운동을 하건, 우리 적의 체제 안에서 체제 전복적 활동을 하건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기반 위에서건 진실을 말하는 이가 바로 '지식인'이라 본다.
  그리고 '진실'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한 사실"이라 했다. 우리 세계는 '진실'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을 칼로 예리하게 발라 찾아내는 참 지식인(춈스키는 "책임 있는 지식인"이라 했다.)도 거의 없는 듯하다. 춈스키는 진실이란 "의자 위에 있는 책"을 두고 "책이 의자 위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간단하다고 했지만, 우리 세계 속에서 진실은 그처럼 간단하거나 자명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는 지식인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의 세계는 가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판을 친다. 권력의 중심은 부자나라들에 있다.  최강대국들(미국, 일본, EU)과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IBRD, IMF)과 국제기관(WTO)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다. 이러한 체제와 국가 권력 기관은 서로 공생하고 있다. 더욱 암담한 것은 그 속에서 '지식인'의 제대로 된 역할을 감당해야할 언론이나 학교, 인텔리겐차, 그리고 여론에 영향을 미치면서 통제하는 연구기관들이 권력에 동원되어 대중이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권력기관들은 지식인들을 앞세워 대중의 정신을 통제하며 권력을 강화시킨다. 춈스키는 예전에는 폭력적 수단으로 대중을 억압하고 진실을 은폐했는데, 이제는 정교하게 꾸며진 여론조작이라는 전략으로 대중을 통제한다고 "조작된 동의"란 분석 틀을 가지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가짜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주입을 통해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갖게 되면서 장시간 노동은 기꺼이 수용하되, 타인에 대한 연민과 연대와 같은 인간적 가치는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는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민주주의를 확대시키려는 소수 대중과, 민주주의를 제한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지배계급간의 투쟁만 계속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형편도 춈스키가 분석한 바와 결코 다른 걸음을 걷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미 IMF로 인해 우리 은행들은 대부분이 외국자본으로 넘어가 있는 실정이고, 다른 공공기업도 민영화의 위기를 겪고 있다. 공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공기업을 민간기업이나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넘기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습은 과점형태의 경제활동을 우려케 하므로 우리 경제구조나 사회 전반에 걸친 부작용을 낳을 것임은 분명하다. 또, WTO로 인한 우리 농업경제는 얼마나 피폐해져 있는가. 이라크 파병 문제의 저변에는 또 얼마나 큰 경제문제가 걸려있는가. 하루를 멀다하고 쏟아지는 정치권력자들의 부패, 비리는 언제나 경제 경영자들과 짝을 이룬다. 이런 정치와, 경제의 암담하고도 탄탄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는 체제 속에서 언론이나 지식인의 작태는 또 얼마나 '조작된 동의'를 구하고 있는가.
  춈스키는 이런 곤경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중의 결집된 힘에 있다고 본다.  억압받는 대중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 만들어지고 또, 우리 세계가 느리나마 진보의 역사를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여론의 압력, 즉 조직화된 대중의 역량에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언론과 지식인은 민간기업(대기업)에 시청자나 팔아 넘기지 말라고, 이해관계가 밀접히 연결된 국가권력에도 종속되지 말라고, '조작된 동의'의 배달부가 되지는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춈스키의 그러한 예리하면서도 따끔한 충고는 비단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언론과 지식인들만을 겨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언론을 포함한 지식인은 '조작된 동의'가 아닌 '진실'의 배달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식인은 인간 문제에 대한 진지한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진실을 밝혀내고 한편, 언론은 자신의 고유 영역으로 돌아가 진실을 밝혀내는 태도와 모순된 체제에 대한 비판, 깊이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노력에 경주해야 할 것으로 본다. 정치나 다른 경제 분야도 역시 본래 영역과 범위에 충실한 활동과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인간 문제 각 영역의 고유함과 영역이 분명하지 않다 보니, 언론은 정치의 수단이 되고 정치는 경제의 목적이 되고 하는 옳지 못한 구조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춈스키를 읽는 동안 계속 떠올렸었다. 정치적인 알력구조 속에는 절대 자신의 '무'의 세계를 건설하고 싶지 않았던, 너무나도 사실적인 이순신과 그의 외로운 '칼의 노래'가 자꾸 맴돌았던 것이 이 책에 대한 잘못된 읽기가 아니었다면, 어느덧 춈스키는 분리되고 선명해져야 할 세상을 향해 예리한 칼을 갈고 있으리라.
          2004년 5월 4일 쉬는 시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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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슈마리 > 쉽게 만나는 최신 경제학의 세계


경제학,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여기저기 경제학 강의를 다니다보면, 가끔 황당한 질문을 받게 될 때가 있다.

"미시경제학은 왜 들으려 하나요?"

"주식 투자에 도움이 될까 해서..."

"미시경제학은 주식 투자하고는 상관이 없는데요"

"그럼, 경제학은 뭐에 쓸모가 있나요..."

사실, 쓸모가 없다는 대답이 솔직한 것일지 모르나, 경제학으로 밥을 먹고 사는 터라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법. 대개, 경제의 원리를 깨우치는 데 도움이 되고, 감각을 키우는데 필요하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가끔, 경제학 교과서이나 대중서를 대할 때면 지나칠만큼 트렌디하게 흘러가는 경영학 관련 서적들과 크게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커리큘럼의 규범이 확실하고 립서비스와 진배없는 사기가 아닌 진정한 학문이라서 그렇다, 라는 항변이 가능하겠지만 '자연'이 아닌 '사회'의 과학이고 보면 그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소비하는 대중이 외면하고 소비층이 얇아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경제학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쉽게 썼다는 수십종의 경제학 풀이서들도 이러한 경향에서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시중에 나가보면, 원론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딱딱하고 비싼 교과서를 빼고서도, "알기 쉬운"이라는 꼭지를 단 경제학 대중서는 많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이러한 책들 중에서 제대로 건질만한 책은 극히 드물다. "알기 쉬운"이라는 간판을 내건 이 책들은 경제원론의 표준적인 주제나 쳬계를 따르되, 수식과 그래프만 없애고 몇 가지 잘 알려진 사례를 그럴듯하게 재포장해 내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복적으로 다뤄지는 기본기 이외에, 그리고 경제학 전공자를 위한 전문 교과서 이외에, 대중을 유혹할 수 있는 보다 그럴듯한 포장과 알맹이를 지닌 경제학 대중서는 매우 드물다는 말이다.

산업조직으로 풀어낸 경제학의 묘미

런 면에서 보면, 이토 모토시게의 [비즈니스 경제학]은 그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매우 대담한 시도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토 모토시게는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일본의 학자로서 전방위적인 관심과 더불어 대중적인 글쓰기로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비즈니스"라는 대중적인 골자를 빼놓고 보면, 이 책은 이른바 '산업조직'에 관한 책에 가깝다. 경제학 원론이나 개론을 가르칠 때 산업조직에 관한 부분에서 김이 빠져버리기 일쑤다. 일단, 이론적인 기반이 되는 완전경쟁 시장을 다루고 그 대척점에 선 완전 독점을 다룬다. 그렇다면, 현실은 그 사이 어딘가 일텐데, 기업간의 현실적인 경쟁의 모습을 담고 있는 과점 시장은 분석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피해간다. 은근 슬쩍 넘어간다고 쳐도, 뒷 맛이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

현대 경제학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세련화된 산업조직을 원론 차원에서 수용하지 못하다는 이유는 복잡하다는 것이다. 기초적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엎친데 덮칠 필요는 없다는 것. 또한, 과점 시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게임 이론이라는 또하나의 분석 도구가 필요한데 이것 역시 원론이나 개론 수준에서 가르치고 배우기에는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

모토시게는 고고할 수 있는 학자임에도 이런 부담스러움을 기꺼히 감수하면서, 속세의 때까지 적당히 묻히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책의 전반부는 산업조직론의 기본 테마인 가격 차별의 논리, 주인-대리인 문제, 그리고 게임이론을 통한 경쟁전략과 같은 최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이미 산업조직론에서는 잘 알려진 주제들이지만, 이를 대중적으로 포장해 잘 먹기 좋게 조리해두었다는 점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다.

이렇게 산업조직론의 대강을 훑은 후에 후반부에는 좀 더 다양한 주제가 펼쳐진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 전략 개념을 차용해 경영학의 논의를 끌어들이는가 하면, 정보화로 인해 초래되는 경제의 변화를 논하고 저자 자신의 전공 분야인 국제경제와 비즈니스까지 풀어나가고 있다. 전반부에 비해 공력이 떨어지는 맛이 없지는 않지만, 다양한 주제를 쉽게 전달핟나는 애초의 취지에는 여전히 충실하다.

토착 경제학을 위한 노력

내용을 떠나서 이 책에서 가장 높이 살만한 부분은 경제학의 이론이 말하는 현실을 꼼꼼히 찾아내려 한 모토시게의 노력이다. 요시노야의 규동 판매 전략이라든가 세븐 일레븐의 점포 확대 방식 등을 논한 부분 등 책 곳곳에 등장하는 일본 기업들의 실제 사례는 경제학의 토착화를 시도하는 저자의 지향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교과서들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럴듯한 토착적인 사례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경제신문 기사를 맹맹한 수준에서 이리저리 모아놓은 것이 대부분이고 본다면, 적절한 예를 찾아 이론과 맞춰나가려는 우리 학자들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 아닐까 싶다. 고고함을 버리고 속세로 뛰어든 모토시게를 우리의 학문 풍통에서 만나고 싶은 생각 역시 간절해진다. 이왕이면 값비싼 하드커버 양장을 한 딱딱하고 부담스러운 교과서 말고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부드러운 대중서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아쉬운 점 몇 가지  

경제학에 흥미를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다음의 두가지는 아쉽게 느껴진다.

첫째, 산업조직론의 이론체계를 지닌 앞부분이 보다 탄탄한 이론의 구성과 치밀한 사례의 소개로 전개됨에 반해 다양한 주제가 섞여 있는 후반부에 들어서는 아무래도 맥이 풀리는 감이 없지 않다. 특히, 정보통신 혁명을 다루는 부분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특히, 배리안(H. Varian)과 샤피로(R. Shapiro)가 쓴 명저 [Information Rules]와 같은 뛰어난 참고도서가 존재하는데도 그 내용들이 책에서 거의 흡수되지 않은 점은 꽤나 의아하다. 앞서 장들이 해당 분야의 주요 교과서들을 참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아쉽다.

둘째, 책의 번역과 관련된 문제. 번역의 전반적인 수준은 무난하나, 세부적으로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들이 간혹 드러난다. 크게 두 가지만 지적하겠다.

우선, 일본 책을 번역할 때 미국 저자들의 이름이 어떻게 표기되어야 하는지 종종 의아할 때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의 번역서에서는 서구권 저자들의 인명 표기에 가타카나 표기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현재 이에 대한 번역업계의 규정이나 관행이 어떤 것인지 필자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어쨌든 폴 밀그롬(Paul Milgrom)이 "미르그롬"이라고 적혀 있는 부분은 꽤나 거슬렸다.(하지만, 마이클 포터 같은 경우에는 그냥 "포터"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역자의 실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음으로 원저자인 모토시게의 착각이라고 생각되지만, 게임이론 관련 부분의 참고서가 된 딕시(Dixit)와 네일버프(Nalebuff)의 책은 [전략의 게임 Games of Strategy]가 아니라 [전략적 사고 Thinking Strategically]이다. [전략의 게임]은 딕시와 수전 스키스(Susan Skeath)가 쓴 다른 게임이론 관련 서적의 제목이다. 미루어 짐작하자면, 원저자가 혼동했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출판될 때 책 제목이 바뀌었거나 둘 중 하나일 듯 하다(번역문에는 영어 원제 앞에 "전략적 사고란 무엇인가"라고 표기되어 있어 전자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 보인다). 하지만, 번역이 또하나의 창작이라는 적극적인 취지에서는 이러한 부분 정도는 미리 잡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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