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회전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가 우리의 친구를 쫓는 살인자에게 오로지 ‘예‘와 ‘아니오‘로만 답할 수 있으며 물음에 답하기를 단순히거부할 수는 없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칸트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의무라고 말한다.
여기서 생겨나는 첫 번째 의문은 이렇다: 정직truthfulness과 거짓말은 어느 정도로까지 법적인 관념들인 것인가? 이러한 혼동을 처음 초래한 것을 가지고 콩스탕을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칸트는 최선을 다해 그러한 혼동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의논증은, 정직과 거짓말이라는 한 쌍의 용어를 법적인 맥락에서 취급하려는 그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향들로 계속해서 행로를 바꾼다. 때로는 윤리적 쟁점의 방향으로(예컨대 그가 진리를 말할 의무는 ‘무조건적 명령인 신성한 이성의 법‘이라고 말할때), 그리고 때로는 법 그 자체보다는, 어떤 법 철학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의미에서 좀더 ‘철학적인‘ 영역을 향해. 법과 법철학이 칸트의 이론에서 다소간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참일지는 모르지만, 특정 국가 기구에 세워진 기존 관행으로서의 법과 법의 토대와 가능성에 관심을 두는 법 철학 간의 구분을 강조하는것이 여전히 도움을 줄 것이다. 사실상 바로 이러한 구분이야말로 칸트가 자신의 논변에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주장들 예컨대, ‘거짓말은, 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정의에서 요구하듯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야만 한다는 추가적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의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칸트는 두 가지 점에서 콩스탕과 논쟁을 벌인다. - P81

어떤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고 있으며 그에 관한 어떤 정보를 갖게되었다고 가정하자. 나는 그 정보를 그가 알게 된다면 큰 고통을당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에게 고통을 야기할 의도로 나는그에게 그 일에 대해 알려주기로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알 권리를 근거로 이러한 행위를 정당화한다. 따라서 나는 그것이 불필요한 고통을 남에게 가하는 악의적인 행위라는 것을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진리 -말하기라는 훌륭한 행위로서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마도 타인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그것이 나의 신성한 의무라는 것에 스스로 수긍하고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앨리슨은 어떤 상황의 ‘도덕적으로 돌출해있는 요인(들)‘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이른바 ‘자기기만이라는 것을 예증하기 위해 이 사례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사례를어떤 다른 것의 예증으로서 사용할 것이다. 즉, 우리의 의무를 행동의 구실로서 제시하는 도착적 태도의 예증으로서 말이다. 더구나 여기서 우리는 이중적 ‘자기기만‘의 경우를 다루고있는 것이다. 자기기만의 첫 번째 계기는 앨리슨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실제 의도-남을 해치는 것-와 관련하여 스스로를 기만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기만은 또 다른 보다 근본적인 자기기만의 계기를 기반으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의 ‘내용‘)를 ‘기성의ready-made‘ 것으로서, 즉 우리가 상황에 연루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 P100

‘우리는 당신의 실제 의도가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행동을 위선적인 것으로서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 경우에 그는 단순히, 타인에게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야만 했다고 계속 말할 것이다. 그 자신은 타인을 해쳤을 때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며,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기 때문에 이를 회피할 수는없었다고 말이다.......이러한 종류의 위선자의 가면을 벗길 유일한 방법은 그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타인에게 당신이 알고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는 것이 어디에 쓰여 있습니까? 왜 당신은 그것이 당신의 의무라고 믿는 것입니까? 당신은 당신의 의무에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칸트의 윤리의 근본적 원칙들에 따르면, 의무는 오로지 주체가 자신의 의무로 만드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십계명처럼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자신의 의무로 만들고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은 바로 주체다. 정언명령은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부터 이끌어내는 잉여-향유를 뒤에 숨길 수 있는 윤리적 행위들의 목록(남김 없는 목록은 아니더라도)을, 즉 일종의 ‘순수이성의 교리문답‘을 만들 수 있게 해줄 어떤 시금석이 아니다. - P101

칸트는 매우 유사한 문제와 대면한다. 왜냐하면 그의 저술에서 정념적인 것(이는 주체가 느낄 수 있는 것, 쾌락과 고통이다. ‘지적인‘ 혹은 ‘정신적인‘ 쾌락 또한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은 장애물을, 자유의 방해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자유는 본질적으로 주체의 ‘분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주체가 정념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행위 속에서 구성된다. 하지만 우리는정념적인 것이 복수를 한다고, 즉 정언명령의 통로를 따라서 어떤 종류의 쾌락을 심어놓음으로써 자신의 법칙을 부과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쾌락에 대한 최선의 묘사는 ‘고통 속의쾌락‘일 것이다. 즉 쾌락의 변형으로서의 고통, 쾌락이 소진될 때 그 자리를 차지하는 정념적 양태로서의 고통 말이다. 여기서주체의 직접적 관심사는 다른 어떤 것- 예컨대, 주체가 그것의 이름으로 자신의 직접적 관심사와 쾌락을 잊게 되는 어떤 이념이나 어떤 cosa nostra[우리의 것]ㅡ에 의해 대체된다. 예컨대, 주체는 ‘대의good cause‘에 이바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고통을 받아들이려 한다. 사드와 칸트 모두는 이러한 논리를 뛰어넘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는, (여하한 종류의 정념적 동기라는 형태로의) 쾌락에 의해서건, 아니면 주체의 죽음에 의해서건, 언제나 한계를 만날 수 있다. 이러한 방해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고 그것 너머에서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그 무엇은, - P131

라캉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칸트의 요청(그것의 진리는, 우리가 보았듯이, 육체의 불멸성이다)은 정확히 동일한 제스처를, 동일한 ‘해결책‘을 함축한다. 그것의 기능은 시간과 공간 외부에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설치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보다 낮은 단계로부터 보다 높은 단계의 도덕적 완전성에로의‘ 무한하고 끝없는 전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칸트가 영혼불멸성의 요청을 도입하는 것은 종종 반대에 직면한다. 순수 실천 이성의 분석론」에 나오는 논변과는 대조적으로 이제 칸트가 도덕적 주체들에게 (일종의) 천국과 행복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청과 더불어 그는 그가 이전에 그렇게도 엄격하게 배제했던 것을 ‘뒷문으로‘ 도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행동을 위한 어떤 가능한 ‘정념적 동기‘를말이다. 하지만 불멸성의 요청과 관련한 우리의 논변에 비추어볼 때, 이 약속(혹은, 격려)은 매우 이상한 것임이 판명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도중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온갖 고통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정언명령을 끝까지 따른다면, 당신이 희생 그 자체에서 취하는 쾌락과 자긍심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마침내 당신에게 주어질 수 있으며, 그리하여 당신은 마침내 당신의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영혼불멸성은 우리에게 매우 특이한 천국을 약속한다. 왜냐하면 윤리적 주체를 기다리는 것은 사드적 규방을 섬뜩하게도 닮은 천국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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