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생물학처럼 오해받는 학문도 없을 것이다. 생물학은본질주의가 아니라 그 반대다. 진화론에 기반한 생물학은 글자그대로, 생물과 환경(문화)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고 그 과정에서 생명체의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적응과 조화가 핵심 원리지, 약육강식이 아니다. 생물은 자신의 생활 환경에 적응하면서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형태로 진화하며, 생존 환경에 적합한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한다는 것이다. 환경과 상호 작용에 성공한 생명체가 생존이라는 자연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적자생존의 법칙이다. 이 같은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서 확신시킨 사람이 다윈이다.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P164

나이가 들면 "나는 뭘 하며 살았나", "그래도 너는 뭔가 이룬게 있잖아" 같은 대화가 오간다. 가장 성숙하지 못한 접근은 나이 듦에 대한 타자화다. 나이가 들면 경험, 성숙, 세월의 멋, 지혜 등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이나 반대로 노추(老醜), 노욕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이나 ‘곱게 늙음‘에 대한 강박과 칭찬이 난무한다. 나이 듦에 대한 타자화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특정 연령대에 대한 임의적 규정이다. 앞에 적은 특성들은 개인차일 뿐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곱게 나이 들어야한다"는 말이 싫었다. 일단 돈과 건강, 외모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얘기인 데다, ‘곱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이 든사람의 정당한 분노는 ‘곱지 않다‘. 그들의 ‘지나친 의욕도 거북하다. - P165

지금 인간이 자신과 지구를 살리는 길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생태사회주의가 주장하는 탈성장만이 답이다. 내겐서울의 강남 좌파든 강남 우파, 열심히 사는 부자들의 인생이최악이다. 이들은 자연 파괴를 가족 단위로 세습한다. 인간의존재 의미는 사회적 성취가 아니라 생명체로서 도리, 자연과의관계에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전진한다? 역사적 평가에 맡긴다? 여기서 역사는 발전주의에 기반한 근대 역사주의의 산물이지, 사실이 아니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가 아니다. 이제 혁명은 질주하는 자본주의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여야 한다. ‘무의미한 인생‘이야말로 ‘없는 우리‘의 최고 무기다.  - P167

나는 마지막 장면-죽음에서설레기까지 했다. 이 선택은 자유주의적 발생도 아니고 강제도아니다. 장남이 부모를 업고 산에 오르는데, 부모를 그렇게 할수 없어서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남성도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여성 노인은 득도한 듯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세뇌‘ 때문이다. 에고가 공포를 가져온다. 가볍고 조용한 죽음. 인간의 존엄, 죽음의 철학에 관한 최고의 영화다. 역대 칸에서 상을 받은 영화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하는 이가 나뿐만은 아닐것이다. - P170

발명 전부터 나쁜 동기를 가진 매체는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좋은 뜻이었거나 그런 의도였다고 강변한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동기는 사람들의 고된 노동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지만, 결국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논의해야 할문제의 핵심은, 핵무기든 다이너마이트든 콘돔이든 SNS는 이모든 ‘오브제‘가 인간의 삶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나는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발명품을 꼽으라면 인쇄술, 콘돔, 인터넷을 들겠다. 콘돔은 인구 조절과 인류의반 이상인 여성을 평생 동안의 임신과 육아에서 해방했으며, 인쇄술과 인터넷은 인간의 언어와 그에 따른 총체적인 구조 변동(국가의 출현 등)을 가능케 했다. SNS는 혁신적인 매체다. 그만큼 중요하다. 은행 건물도 없는 아프리카의 내전 국가에서 스마트폰을 가진 몇몇 부자들은 인터넷으로 국제 금융 시장에서주식 투자를 하고 돈을 번다. 포스트스페이스, 포스트휴먼의시대다. - P175

몇 년 전에 SNS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느
‘명망 있는 남성 지식인‘이 내 글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혹평을했고, 그의 페이스북에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른 사건이 있었다. 지인이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 중에 내 친구까지 있다고전해줘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요지는 "당신(나)은신문 지면을 갖고 있으므로 매체가 있는 기득권자이고, 그렇지않은 사람들에게는 SNS가 지면이므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SNS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1인 매체의 등장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업으로 SNS에 글을 쓰는사람과 어느 정도 ‘평가받은‘ 단행본을 10권 정도 낸 사람의 삶과 인생(人生苦)는 같지 않다. 그런데도 SNS 문화는 후자는기득권자이므로 골고루 평등‘을 위해 더는 글을 쓰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한다. - P176

이전 시대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종이 신문보다 인터넷이, TV보다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에 개인의 노력과 능력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사회 정의로서 평등이 아니라추상적 개인(individual)인 인간이 모두 같다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평등(sameness)‘, 즉 전체주의다. 평등은 지구위 70억명인구가 모두가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등은 구조적 불평등에저항하는 것이지 개인의 개별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평등. 이것이 역설적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가 허용되는 이유다. 성별, 인종, 나이에 따른 차별이 있지만 그것은중요하지 않다. 차별을 인식하고 사회를 바꾸는 대신 차이가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혐‘이나 ‘여혐‘이나 다 똑같고,
억울하면 너도 혐오 발화를 하라는 식이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이나 이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이나 모두 같은 페 - P177

미니즘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페미니즘‘들‘이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온라인에서 ‘차이‘ 혹은 위계를 결정하는 요소는 단 한 가지다. 강한 멘털 사회성과 타인, 인간관계를 무시하는 정신 승리,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강심장, 거침없는 뻔뻔함, 누가 더
‘기‘가 세고 거짓말을 잘하는가이다. 혐오발화의 능력도 바로이 무신경함에 달려 있다.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민감한 사람은 ‘루저‘가 된다. ‘홍어‘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말)나 ‘오뎅‘ (세월호 희생자를 비하하는 말) 같은 슬프리만치 끔찍한 비인간적 발화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찬양하는 극한의 비윤리성에서만 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채팅 장면과 배우 류준열의 명연이 돋보이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에 대한 감독의 비판 정신을 정확하게보여준다. - P178

홍석재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이들을 괴물로만 보지말아 달라"고 말했지만 이들은 이미 ‘괴물‘이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끔찍했던 이가 오프라인에서 지극히 평범하거나 사회적지위가 높은 사람인 사건들을 알고 있다. 문제는 나를 포함해인간은 모두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나는 온라인의 피해자도 피해자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용자(가해자)‘가SNS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 P180

글쓰기의 정의는 이견이 없다. 글은 ‘자기‘ ‘생각‘을 표현(재현)‘하는 ‘노동‘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법이고, 생각하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다. 글쓰기는 중노동이다. 글쓰기는 두렵고, 어렵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수입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SNS에서 글쓰기는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도 손쉽고 이익이 막대한 돈줄이자중우(衆愚)정치다. 키보드 사용자의 노동과 시간은 고스란히
‘구글‘이나 ‘삼성‘이 가져가지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바친다. 그 대가는 무엇인가? - P181

SNS에서는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요구받지도 않는다. SNS에서의 자아와 현실에서의 자아는 다르다. 일상적 공간에서도 다른데(예를 들어, 혼자 있을 때와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때), 관음증과 노출증을 전제로 하는 공간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는 불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여자 주인공이 타인의 코멘트를 극도로 기피하는 것은 조금도, 부분적으로도 (타인에 비친)자신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욕망은 포기하지 못해서 온라인으로 도피한다. 만일 그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한 곳에서만 글쓰기에 매달렸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P182

어떻게 살 것인가, 인쇄물(책)을 소환할 때다. 지금으로서는잠시 SNS을 중단하고 오프라인에서 글쓰기가 유일한 저항처럼보인다. 너 자신을 알라. 생각을 하라. 죽도록 연습하고 표현하라.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백미는 글쓰기 수업 파트다. 소셜 네트워크의 본질을 꿰뚫는 감독의 통찰력과 영화를 만드는 뛰어난
‘작전 구사력‘이 돋보인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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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때마다위로가 된다. 이 영화는 지구 멸망이나 홀로코스트를 맞더라도,
사랑과 슬픔이라는 인간의 힘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슬픔이 최고의 힘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그러나 내겐 너무 아프고 부담스러운-부탁을 들어주는 것이다. - P126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내가 가장 동일시한 인물은 작품속 캐릭터가 아니라 영화 원작자다. 이 영화는 감독과 출연을겸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표작임에 분명하지만 원작에 빚지고 있다. 20년 동안 링 위에서 컷맨(cut man, 복싱 선수가 경기 중피가 나면 응급처치를 해주는 스태프)으로 일한 소설가는 흔치 않다. 원작을 쓴 제리 보이드(JerryBoyd, 1930~2002, 필명 F. X. 툴)는 생년월일이 불명일 정도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단편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실린 소설집 《불타는 로프(Rope Burns)》(2000년)가 그가 생전에 남긴 단 한 권의 작품이다.
투우사, 택시 운전사, 술집 주인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고에 시달렸고, 정식 문학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40년간 혼 - P126

자서 글을 썼다. 이 책 이전까지 그의 글은 모두 출판사로부터거절당했다. 첫 책이 출간되고 2년 후에 그는 완성된 영화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나는 알코올과 노숙, 중노동과 글쓰기를함께하면서 69세에 첫 소설집을 낸 소설가가 감히 부럽다. 그의삶은 고달팠지만 그가 쓴 이야기는 전 세계 사람들이 보고 눈물을 흘렸고 영원으로 남았다.
이 영화에는 명장면, 명대사가 넘치는데, 거의 메타포다. 이영화는 이스트우드가 쓴 인생과 고통에 관한 시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가 왜 공화당원인지 진정 이해하게 되었다. 항상나 자신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 어떤 부위는 맞으면 피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인생에는 극복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복싱에서 중요한 것은 자세라는 것・・・・・ - P127

인생에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로부터 혹은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해 망신스러운 기분, 어딘가에 하소연하기에도 자존심 상하는 사건,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실연, 상실, 시련·····…. 이러한 상황이 아주 심할 때는 영화도 책도 음악도 잡히지 않는다. 오로지 이불 속이 우주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내가 먼저 전화하기는엄두가 안 나고 스팸 전화라도 왔으면 싶다. "오늘 만날 수 있어(요)?" 메시지를 보내거나 심야에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충분한 경청과 공감, 위로, 대안 제시는 바라지 않는다. 그냥 상대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세상에 이런 친구는 없다. 상담자도 없다.
있더라도 찾기 힘들다.  - P134

아. SNS가 있다. 트위터를 공개하지 않고 일기장으로 삼는이들도 있다. 좋은 기능이다. 나는 간혹 내 메일 주소로 일기를보낸다. 실은 그냥 끄적거리다 만다. 커서는 깜박이며 재촉하지만, 왠지 모니터 앞에서는 구체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다. 페이스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가 최대 5천 명이라고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 친구 5천 명을 ‘달성한‘ 이들도 있지만, 지구상에서진짜 친구가 5천 명인 사람은 없다. 인생에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한 명도 힘들다. - P135

영화에서 주인공이 엄마나 지인, 가족에게 오랜만에 전화를걸어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울먹거리며 바로 끊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우리의 조디‘도 더러운 커튼이드리워진 어두운 방에서 오래전에 떠나온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의 삶도 고달플 것이다. 갑작스런 딸의 전화에 엄마는
"무슨 일 있니?" "건강해라."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조디는 눈물을 훔치며, "아니, 별일 아냐. 그만 주무세요."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끊는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상처도 두 배로 커질것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 P137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아는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먼저 말하는 것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든 영화 감상은 자의적이고,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감동도 크게 다르다.
둘 다 외롭고 아플 때 보면 더많이 보이는 영화다.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난 동일시했다. <피고인>, <화양연화>를 보고 나는 머리가 흔들리도록 울었다. 인생에는 ‘안되는 일‘이 천지다. (어떤 말은)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쓴다. - P141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중년들과 중년의 배우와 동일시한 나는 이 드라마의 모든 장면이 다 부드럽게 흘러갔다. 제주도가 배경이고 다양한 연령대가 나오지만 내게 이 작품의 주제는 ‘나이 듦‘이었기 때문이다. 노희경 작가, 이정은 배우, 엄정화배우의 ‘인간적 고민‘을 나는 알 것 같다. 연령은 계급, 젠더와함께 중요한 사회구성 요소로, 모든 분야에서 노소(老少)에 따른 ‘우선권‘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의 전쟁터다. 나이는 다른 사회 구조와 다르게 어려도, 어중간해도, 늙어도‘ 맥락에 따라 차별받는다. 그래서 모두가 피해자라고 싸운다.
- P145

세상에는 진실도 객관도 사실도 없다. 그것으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있을 뿐이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염두에 두지 않는 것만이 위험하다. 나는 영화나 책을 집중해서보지만, 완전히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노력하는 편이다.
본 것이 지식으로 자리 잡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삶은 기존의읽을 비워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P148

토박이 제주 사람들은 주로 그들끼리 이런 농담을 한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 한라산이 가장 잘 보인다!" "우리 집 귤이 제일 맛있다!" 제주도(濟州島)는 섬 전체가 하나의 산(한라산)이다. 산 전체에 도심, 해변, 중산간(中山間), 정글도 있고 습지도있다. 제주는 하나의 섬이자 산이다. "우리 집에서 한라산이 가장 잘 보인다"라는 얘기는 섬의 일부에서 섬의 일부인 ‘꼭대기‘
가 가장 잘 보이는가 하는 문제다. 내부에서 어느 내부가 가장잘 보이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앎이 내가 본 것과 안 본 것 사이에서 정해지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싸우기 쉽다.
전체도 부분도 없다. 앎의 범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인정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상이 앎이요, 삶이어야 한다. - P150

나는 내 나이에 비해 임종 경험이 많다. 그래서 내세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나는 그런 면에서 날 선 얼치기 유물론자지만, 인생이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고 싶지않을 때가 있다. 인생이 한 번이라는 사실은 너무 불공평하다.
이럴 때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윤여정 배우의 ‘말씀‘으로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면 지인들은 "지금부터라도 그렇게(영화처럼) 살라"고 한다. 더 화가 난다. 나는 아직은퇴 자금이 없으며, 여행할 체력이 안 되고, 연애가 성립(?)된적이 없다. 내세에는 다른 지역에서 다른 시대에 다른 사람으로태어난다는 믿음 없이는, 현실을 버틸 수 없는 세상이다. - P156

불가촉천민이라 불리는 이들.
조혼과 젠더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 내전 상황의 물 없는 마을, 굶고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들, 젊은 나이에 질병으로 사망하는 이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 상황부터 그렇다. 내가여성운동을 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92년 미군의 잔인한 폭력으로 숨진 윤금이 사건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
내 또래였다. 그와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없었다. 충격과 슬픔이 나를 압도했다. 그저 나는 그와는 다른환경의 가정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 P157

‘제2의 성‘인 여성의 삶은 원래 시민인 남성보다 사회 변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근대화는 어쨌든 여성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근대화, 자본주의의 변화는 여성 개인의 노력보다 생년(生年)이 삶을 결정해 왔다. "시절을 잘만나서" 나는 내 어머니보다는 나의 의지로 살았고, 내 어머니는 외할머니보다는 오래 그리고 ‘배운 여성‘으로 사셨다. 개인의 노력보다 시대적 조건이 여성의 삶을 좌우했다. 아무리 행복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해도 여성들의 삶이 이전 시대보다 ‘나은 상황임은 분명하다(물론 성차별이 나아졌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 P157

그러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봤다. 극중 영옥(한지민)은 바다를 좋아한다. 거기서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바다 속에는 평생을 돌봐야 하는 다운증후군 쌍둥이 언니영희(정은혜)가 없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그는언니를 홀로 부양해야 했다. 몸에 철근을 두른 듯한 부담감과그래서 바다에서는 혼자인 해방감 나는 아주 조금 이해한다.
그는 울먹이며 연인에게 말한다. "억울해. 왜 나한테 저런 언니가 있는지. 억울해. 왜 우리 부모님은 착하지도 않은 나한테 저런 애를 버려두고 가셨는지. 억울해.
나도 이렇게 억울한데, 저렇게 태어난 영희는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렇다. 내세를바라는 게 아니라 이러한 태도가 정의다.  - P158

당대는 ‘평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혁명도,
개혁도, 민주주의도 없다. 나는 티모테 샬라메나 아미 해머(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집안 출신이다)가 아니다. 유물론자인 나의태도는 내세를 기도하기보다 현실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어려운 처지인 사람들과 상부상조, 상호 의존하는 것이다. 남부유럽의 햇살은 <내셔널지오그래픽>으로 보기로 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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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몸은 의지로 움직인다. 죽음이란 몸에서 의식이빠져나간 이후를 말한다. ‘몸‘만 남는 것이다(영어 body의 대표적인 뜻은 ‘시체‘이다).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울증은 의지-의식의욕, 이 세 가지 상실이 혼재된 상태다. 한마디로 무기력의 연속이다. 그래서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없는 상태가 몇 년간 지속되어 근육 쇠약으로 사망하는 이도있고, 우울한 상태에서 자신과 극한 투쟁을 벌이며 생활을 이어 나가는 이도 있다. 우울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이나 공부,
글쓰기에 몰두하여 생산력이 높은 ‘고기능 우울증 환자‘도 있다(어니스트 헤밍웨이, 버지니아울프………).  - P117

지구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다. 이 힘은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universal gravitation)이라고 부른다. 그래비티(gravity), 중력(力)은 말 그대로 무거운 힘이다. 물체의 무게는 이 힘을 가리킨다. 만유인력과 지구 자전에 의한 원심력이더해져 우리가 지표면에 의지해 살 수 있다.
우울증 환자의 호소 "지구가 나를 붙잡지 않아요." 지구의의지, 중력의 법칙에서 버려진 이들이 우울증 환자다. 우울증의고통에 비하면 ‘우울(憂鬱)‘이라는 표현은 우아하다. 우울증 환자의 삶은 스펙터클하고 격렬하다. 격렬한 고통이다.
현실의 중력이 너무 강하면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지표에 끌려 다니며 먹고사느라 세속을 헤매게 된다. 우울증 환자는 이와반대로, 몸에 중력이 작용하지 않아 떠 있는 상태다. 무중력 상태의 삶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 P118

삶은 인간관계다. 그것이 전부다. ‘인간(人間)‘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 단어다. 죽음과 더불어인생에서 이것만이 진실이다. 이를 잊을 때 우리는 크고 작은실수를 한다. 관계(성)를 독자성, 자유, 자율, 의존 같은 개념과혼동한다. 의존도 독립도 관계다. 반대항으로 보이는 이런 단어들 자체가 관계성의 반증이다. 삶에서 관계성과 대립하는 개념은 없다. 최근 중년 남성들의 로망인 은둔자 ‘자연인‘ 되나
‘관종‘도 ‘집콕‘도 관계적 삶이다.
인간관계 중에서 우리가 가장 고민하는 주제는 넓은 의미의
‘사랑‘이다. 이 글에서 배타적 로맨스 관계는 논외다. 로맨스는제도이지만 가장 복잡한 담론이다. 후유증도 커서 심장이 뭉개지게 아프다.  - P123

한편 사랑의 정의가 다르다는 사실보다 더 복잡한 문제는논의의 범주가 넓다는 점이다(애국, 모성, 이성애, 예술 애호, 신앙····…). 사랑은 내용, 대상, 인식(감정), 심지어 섹스 여부에 따라 개념이 달라진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한요소는 관계의 사회적 맥락을 합의하는 것이다. 이 또한 지성과용기와 성찰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문제다. 대표적으로 제도화된 사랑인 이성애나 모성에 대한 공부, 자신의 위치, 사회에 대한 이해 같은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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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국외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전체의 동등한 일부, 보편자라고 생각한다. ‘불행은 남의 일이다. 나에게일어날 리 없다. 국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희망이 없다면살 수 없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은 손쉬운 발상인 저항이나진실을 제시하기보다 관객의 위치를 질문한다.
문제는 ‘도쿄‘와 ‘서울‘이 특정 지역(후쿠시마, 밀양, 강정…………)에 위험 시설을 건설하여 끊임없이 내부 식민지를 만들어내는현실이다. 한국은 문제가 생기면, 은폐(그것도 대충), 책임자의거짓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림, 여론이 조용해질 때까지 방관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치기, 피해자 고립을 대책으로 삼는 나라다. 진상 규명을 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를 고사시키고 문제를 떠넘긴다. 통치 세력은 이 문제에 관한 한 대단히 발전된 메커니즘과 언어를 갖고 있다. p78

슬픔은 소비의 적이다. 권력은 희로애락에 관해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정 시민만을 보호한다. 이처럼 기쁨과슬픔을 자율적으로 나눌 수 없게 될 때,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피해를 특정인의 몫으로 치부하지 않고 ‘바로 당신의 문제‘
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필요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을 뜻하는 용어, ‘필요악‘.
인식과 문법 면에서 모두 틀린 표현인데 사회는 이 말을 좋아한다. 불의와 불평등을 손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원전, 성매매, 누가 군대에 갈 것인가 같은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일상에서 가장 만연한 필요악 논리는 아마 성매매일 것이다. 성매매는필요악이다? 누구의 입장에서 필요하고, 누구의 입장에서 악이란 말인가. 필요도 악도 모두 남성의 시각이다. 악은 악일 뿐이다. 사회 문화적으로 제도화하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필요한악‘은 없다.p79


TV에 나와 후쿠시마 생선을 먹어도 문제가 없다고 직접 시식하는 일본 총리의 모습은 오히려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품게한다. 문제가 없다면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런 속임수조차 쓰지 않는다. 모두가 슬퍼하는 것보다 ˝산 사람이라도 살자˝고 주장한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생각이 문제의 원인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고기, 가기 싫은 군대, 환경 오염된 미군 기지・・・・・・ 해결할수 없다면 다 같이 겪어야 한다. 그래야 개선된다. 자기 집에 물난리가 날 때, 기름이 유출될 때, 자식이 군대에서 자살할 때,
세월호에 탔을 때‘만‘ 권력은 움직이게 되어있다. 불행하지만 이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혹은 다수가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다. p80


[피해를 공유하는 윤리 -스톱]에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 스톱과 그의 사망 소식에 더해 정희진쌤의 생각들을 읽는다. 김기덕, 조재현은 성폭력 가해자, 조직범죄자다.

공감한다.

대추리에서 촛불을 든 대부분의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 처음든 생각이 이랬다. 먹고 살아야할 문제와 해먹여할 식구들로 하루 종일 논밭과 부엌에서 동동거린 할머니들이 이제는 쉬어야 할 시간에 촛불까지 들게 만드는 세상이, 동북아 평화를 위한 세상일까?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미군 기지 이전일까?
언제든 약자는 배제된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 가능할까? 2022년 가을, 더욱 불가능한 꿈이다.
이런 저런~ 뉴스의 뒷면을 보면 울적한 추석이다. 에구~ 달이나 보러 가야겠다.




이 표현들로 지난 제20대 대선의 핵심 사안을 분석할 수 있는가. 나는 선거 기간 내내 몹시 괴로웠다. 가부장제가 부추기는 여성의 자원(몸, 외모)이 결과를 좌우한 선거였기 때문이다.
검찰에 대한 문민 통제, 개혁이슈가 젠더로 은폐되었다. 김건희 씨의 섹슈얼리티는 성산업과 무관하다. 소송때마다 검사와유착해 자신을 자원으로 이용한 경우인데, 나는 이와 관련한글을 썼다가 여성주의자들에게 "왜 김건희 씨를 비판하냐, 여성혐오다!"라는 (분노에 찬 지적을 받고 절망했다. 지금 한국 사회의 ‘혐오‘ 단어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절망한 이들이 선택한 간단한 존재 증명이다. - P50

나는 모든 이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페미니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모두 부분적 세계관이다. 개인이 단 하나의 가치관을 갖는 것이바람직한가?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에게 부분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공부일 뿐이다. - P50

우리는 매일매일 온라인에서 시간을 보낸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가장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명언, 미디어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다. 그래서미디어가 발달할수록, 다양할수록 소통은 더욱 어려워진다. 최소한의 합의도 힘들고 중간 지대는 사라지고 삶의 전반이 양극화된다. 계급의 양극화는 물론이고 건강, 문화, 앎, 만들어진 외모까지 양극단화된다. 지금의 플랫폼 자본주의처럼 완벽하게승리한 지배 체제는 없다는 절망적 생각이 든다.  - P51

어느 분야나 자기 언어를 갖기 위해서는 최소 10년 정도의
‘엉덩이 훈련‘이 필요하고, 사회는 이들의 노력을 인정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이들은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되지 않는(?) 여성주의 공부를 선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 자기방어를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여성들에게 여성주의 공부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나는 최근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공부 무용론‘ 선동에 큰 좌절감을 느낀다. 여성끼리 작은 공부 모임을 만들어공부만 해도 지구의 반을 구할 수 있다. 지역 도서관에 여성주의 책을 희망 도서로 신청하고, 온라인에 성의 있는 댓글을 달자, 잔물결이면 충분하다. - P52

최근 작고한 철학자 장춘익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주 인용하게 된다. "오래가는 항의는 아무튼 짜증나는 거야 내가 잘 돌보고 싶은 아이도 자꾸 울면 짜증나는데, 별로동의해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자꾸 하면 정말 짜증이 안 나겠어?
항의는 내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것이고, 같은 항의가 오래 반복된다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결핍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항의 기간이 길어지면네가 세저쪽은 짜증나고 이쪽은 초라하고 비참한 거야.
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흡페미니즘(다른 입수하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다는 것이야.
장도 마찬가지다-필자)이네 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주는 것이아니라, 너의 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것이야. 페미니즘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 P53

앞의 사례들은 성역할 규범(norm)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는지 잘 보여준다.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해야 한다‘.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경험한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와 주변 사람들과 충돌하는일이 잦다. 평소 나 자신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정신 차리자." "정신 줄을 놓으면 안 돼." "가만 생각을 하자." 나는 거의매일, 이렇게 중얼거리고 다짐을 거듭한다. 객관적으로 그럴 만한 상황인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 건가?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아니다. 어떤 경우는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당하지 않고 살려면, 혹은 당한이유라도 알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 P56

‘여성‘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있고, 민초들이 자각하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왜 그토록 미움을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자들은 비밀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피억압자들에게 앎, 깨달음은 해방이기도 하고 기꺼운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일 여성들이 밥하는 일이 여자의 ‘운명‘(성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남자들은 삼시 세끼 준비 스트레스로 평생을 전전긍긍하느라 역사를 창조하지 못했으리라.
최저 임금이 정규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당대 자본주의의본질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이들이 있다면?
이들이 매복해 있다가 어딘가를 습격한다면?
- P59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성별, 계급, 인종 따위가 얽힌 지점에서 저마다 다른 삶을 산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섬이다. 서로를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없다‘. 어렵다. 역지사지는 상대와 다른 땅(위치)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섬에서 땅으로 이동이 쉽겠는가. 같은 여성이라도 강간을 경험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은 젠더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제주 4·3 사건, 호모포비아처럼 타인이 상상하기 힘든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말하기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일단 자신이 경험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자기도 못 믿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이야기하겠는가. 자기 검열과 정치적, 사회적 검열은 연속선을 이룬다. 그래서 평생을 특정 사건의 후유증(aftermath)으로 보내는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 P61

이 영화에서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는 할 일이 많을 때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본 것과 남편)이 말하는 것이불일치할 때 나온다. 삶에서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믿을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세계는 혼돈(dis/order)의 연속이다. 질서(order)는 ‘저들의 것‘이다. 저들의 질서가 나를 점령하고 있기때문에 나만의 삶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불안이 정상이다. 불안은 몸의 외부와 자신의 몸이 불일치할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성(理性)의 반응이다. "안정돼 보인다." 나는 이 말,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안정을 욕망하는 현실이 싫다. 안정만큼 계급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넉넉하고 아쉬움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며 사랑받고 아프지 않은 상태, 어떤 부정의에도 분노하지 않는우아한 세계, 불일치와의 투쟁이 필요 없는 삶. 이런 인생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 P63

동시에 피억압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말이다.
악은 원래부터 세상이 내 것이라고 믿는 ‘정신 승리자들‘의세계다. 승리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인데, 승리를 이미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 한가한 사람들 때문에 현실이 왜곡된다. 그러므로 ‘정신이 안정되고 멀쩡한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속이는기득권자들이다. 극중 연홍이 자기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너 걱정되게 왜 그래?" "말도 안 돼." "미쳤군."・・・・・…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을 믿고 마법을걸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외롭고 서러운 일이다. - P64

 윤리성 추구와 지향, 가장기본적인 윤리적 자세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지식은 공부하고 조사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딘가에 있어서 찾아내는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각이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다. 시각이 지식을 드러나게 하므로 지식은 발명(making)되는 것이다. 그래서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시각이 앞을 결정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색깔에 달려 있다. - P67

암수살인의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라는 점, 피해자의 신분이나언론의 관심도에 따라 사회적 자원(수사)이 다르게 분배되는 현실을 이만큼 성실히 추적한 영화도 드물 것이다. 한국판 페미사이드(여성 살해)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안전이라는 사회적 공공재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권력,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다. - P70

저항이 큰 이유는 이 때문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과 연결된 문제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과 협상할 수는 있지만 양립할 수는 없다. 환경운동은 발전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모든 인식이 당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상은 매 순간의 긴장을 요구하는만만치 않은 요구다. - P72

남성, 단 한 명의맥주 회동 사진은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사진 속 세 사람의표정은 무의식의 ‘바닥‘을 드러낸 듯 적나라했다. 그들은 서로눈을 맞추지 못하고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백인 경찰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의기양양한 표정이고, 지구상 유일한 제국인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대통령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열받은 상태를 감추는 것이었을까? 자기 집에 들어갔는데 강도로 오인받아 체포된 교수는 주눅 든 듯 얌전히 앉아 있다. 그의 작은 몸은 더 작아 보였다. - P93

이 사진이 나의 무엇을 건드렸을까. 당시도 지금도 나는 분노한다. 인종차별과 성차별, 차별의 유사성 때문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 심지어 비열한 인간‘이, 인종이나 젠더만 작동해준다면 언제든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몰역사적 현실이 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이 겪었지만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위협감, 공포감 그리고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늘 느끼는 외로움과 서러움…………. 사실 인종이나 젠더 문제가 아니더라도, 단지 자신의 지위나 직업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이 판치 - P93

는 시대다. 그들은 작은 특권이라도 120퍼센트 활용한다. 이 사진은 정의란 올바름이 아니라 여론과 문화 권력임을, ‘흑인 대통령 시대‘의 미국 사회를, 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I AmNot Your Negro)〉(2016년)의 현재성을 집약한다. - P94

‘객관적‘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약자는맥락에 따라 그 범주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존재다.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집단이지,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늘 있기 마련"인 그런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어야만 사회가 움직인다는 뜻이다. 미국의 이미지 중 하나는 흑백 갈등이지만 실제 미국의 흑인 인구는 12퍼센트 내외다. 인구에 비하면 상당한 ‘영향력‘이다. 그만큼 흑인운동이 활발하다는 얘기다. 사회적 약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 인한 가시화 여부이기 때문이다. - P97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알고, 내가 상대하는 이들을 아는 일이다. 이 두 문제는 서로 겹쳐 있다. ‘나‘는 타인과사회와 맺는 관계를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레너드 코언의 명곡 <아임 유어 맨 (I‘m Your Man)>의 가사를 보자. "나는 당신과당신을 향해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살아왔어요.
기어가 당신 발밑에 엎드리겠어요. 난 당신의 아름다움 앞에 헐떡이는 한 마리 개. 만일 당신이 혼자이길 원한다면 난 사라져주겠어요." 한마디로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 나는 당신의 사람이라는 사랑 이야기다.
여기서 나는 주체(subject)이고 너는 대상(object)이다. - P99

 영화 속 볼드윈의 말대로 "당신(백인)은 나(흑인, 여성을 비롯한 피억압자)를 보지 않아도 됐지만, 난 당신을봐야 했다. 당신이 나를 아는 것보다 내가 더 당신을 잘 안다.
인종 모순과 젠더 모순의 공통점은 지배자의 무지다. 지배자들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 무지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몰라도 되는 것이다. 몰라도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알게 되면 자기 분열과 긴 성찰의 시간으로 인생이 뒤죽박죽될지 모른다. 하지만 억압받는 이들은 자신과 상대방, 세계를 알지 못하면 생존할 수없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내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이기도 하다. - P108

또 한 가지 개인적으로 사무치게 공감한 부분이 있었다. 영화 초반에 제임스 볼드윈의 "이제 쉰다섯 살이 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내레이터 새뮤얼 잭슨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나는 볼드윈처럼 살지도 않았지만, 나 역시 지쳤다. 어느 시대나 저항의 지도자는 적이 아니라 내부 분열이나 열렬한 지지자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일이다. 흑인도, 여성도,
그 어떤 정체성의 내부도 균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저항은 일시적인 내부의 통일 전선일 뿐이다. 흑인도, 여성도 내부에 같은 인간은 없다. - P108

내겐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감독이 <청년 마르크스(TheYoung Karl Marx)〉(2017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그것도 비슷한 시기에 말이다. 이는 리들리 스콧이 ‘마초 영화‘의거장이기도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 같은 영화도 만들었다는얘기와는 다른 문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인간 마르크스는 매우 싫어한다. 마르크스의 오리엔탈리즘, 백인 우월주의, 남성우월주의…………. 라울 펙 감독은 어떻게 제임스 볼드윈과 마르크스에게 재현 대상으로서 같은 애정을 품을 수 있었을까.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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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문을 나서며 
wyiscie z kina


새하얀 화폭 위로 깜빡이며 명멸하는 꿈
달에서 떨어져나온 파편과도 같은 두 시간.
그리운 멜로디에 실린 옛사랑이 있고,
머나먼 방랑으로부터의 행복한 귀환이 있다.

동화가 끝난 세상에는 검푸른 멍과 희뿌연 안개.
숙련되지 않은 어설픈 표정과 배역들만 난무할 뿐.
군인은 레지스탕스의 비애를 노래하고,
소녀는 고달픈 삶의 애환을 연주한다.

나, 그대들에게 돌아가련다, 현실의 세계로,
어둡고, 다사다난한 운명의 소용돌이로문간에서 서성이는 외팔이 소년과
공허한 눈빛의 소녀가 있는 그곳으로



‘정희진‘의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를 읽다가 갑자가 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가 읽고 싶어졌다. [극장 문을 나서며] 때문이었던가 보다. 극장? 사라져가고 있는 단어라는 생각에 시 보다는 ‘극장‘에 꽂혔던.
시장에 가야하는데, 할 일이 산더미인데, 생각과 달리 몸뚱이는 [끝과 시작]을 펄럭거리고 앉아 있다. 이 짓도 나쁘지는 않네.

시는. . .
가까운, 어렵지 않은,
매일 매일의 일상이다.
요즘 내 생각과 같은 [나에게 던진 질문],
깊은 눈의 시인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듯.





나에게 던진 질문
 Pytania zadawane sobie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벗이 저지른 과오 중에
나로 인한 잘못은 없는 걸까?
함께 탄식하고,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어떤 사람들은 시를좋아한다 
Nicktórzy lubia poche


어떤 사람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전부가 아닌
전체 중에 다수가 아니라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일부를 뜻함.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과
시인 자신들을 제외하고 나면
아마 천명 가운데 두 명 정도에 불과할 듯.

좋아한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말은 신중히 해석할 필요가 있음.
치킨 수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럴듯한 칭찬의 말이나 푸른색을 유달리 선호하는 이들도 있으므로,
낡은 목도리에 애착을 갖기도 하고,
뭐든 제멋대로 하기를 즐기거나,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으므로,

시를 좋아한다는 것一
여기서 ‘시‘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불확실한 대답들은이미 나왔다.

몰라, 정말 모르겠다.
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 꽉 부여잡고 있을 뿐.

끝과 시작
 Konice poczatek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 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대들보를 운반하고,
창에 유리를 끼우고,
경험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열심히 끄덕인다.
어느 틈에 주변에는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아직도 누군가는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이삭을 입에 문 채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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