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생물학처럼 오해받는 학문도 없을 것이다. 생물학은본질주의가 아니라 그 반대다. 진화론에 기반한 생물학은 글자그대로, 생물과 환경(문화)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고 그 과정에서 생명체의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적응과 조화가 핵심 원리지, 약육강식이 아니다. 생물은 자신의 생활 환경에 적응하면서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형태로 진화하며, 생존 환경에 적합한 것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한다는 것이다. 환경과 상호 작용에 성공한 생명체가 생존이라는 자연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적자생존의 법칙이다. 이 같은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서 확신시킨 사람이 다윈이다. 약육강식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지구에는 어떤 생물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P164
나이가 들면 "나는 뭘 하며 살았나", "그래도 너는 뭔가 이룬게 있잖아" 같은 대화가 오간다. 가장 성숙하지 못한 접근은 나이 듦에 대한 타자화다. 나이가 들면 경험, 성숙, 세월의 멋, 지혜 등이 저절로 따라오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이나 반대로 노추(老醜), 노욕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이나 ‘곱게 늙음‘에 대한 강박과 칭찬이 난무한다. 나이 듦에 대한 타자화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특정 연령대에 대한 임의적 규정이다. 앞에 적은 특성들은 개인차일 뿐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곱게 나이 들어야한다"는 말이 싫었다. 일단 돈과 건강, 외모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얘기인 데다, ‘곱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이 든사람의 정당한 분노는 ‘곱지 않다‘. 그들의 ‘지나친 의욕도 거북하다. - P165
지금 인간이 자신과 지구를 살리는 길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생태사회주의가 주장하는 탈성장만이 답이다. 내겐서울의 강남 좌파든 강남 우파, 열심히 사는 부자들의 인생이최악이다. 이들은 자연 파괴를 가족 단위로 세습한다. 인간의존재 의미는 사회적 성취가 아니라 생명체로서 도리, 자연과의관계에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전진한다? 역사적 평가에 맡긴다? 여기서 역사는 발전주의에 기반한 근대 역사주의의 산물이지, 사실이 아니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가 아니다. 이제 혁명은 질주하는 자본주의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여야 한다. ‘무의미한 인생‘이야말로 ‘없는 우리‘의 최고 무기다. - P167
나는 마지막 장면-죽음에서설레기까지 했다. 이 선택은 자유주의적 발생도 아니고 강제도아니다. 장남이 부모를 업고 산에 오르는데, 부모를 그렇게 할수 없어서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남성도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여성 노인은 득도한 듯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세뇌‘ 때문이다. 에고가 공포를 가져온다. 가볍고 조용한 죽음. 인간의 존엄, 죽음의 철학에 관한 최고의 영화다. 역대 칸에서 상을 받은 영화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하는 이가 나뿐만은 아닐것이다. - P170
발명 전부터 나쁜 동기를 가진 매체는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좋은 뜻이었거나 그런 의도였다고 강변한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동기는 사람들의 고된 노동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지만, 결국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논의해야 할문제의 핵심은, 핵무기든 다이너마이트든 콘돔이든 SNS는 이모든 ‘오브제‘가 인간의 삶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나는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발명품을 꼽으라면 인쇄술, 콘돔, 인터넷을 들겠다. 콘돔은 인구 조절과 인류의반 이상인 여성을 평생 동안의 임신과 육아에서 해방했으며, 인쇄술과 인터넷은 인간의 언어와 그에 따른 총체적인 구조 변동(국가의 출현 등)을 가능케 했다. SNS는 혁신적인 매체다. 그만큼 중요하다. 은행 건물도 없는 아프리카의 내전 국가에서 스마트폰을 가진 몇몇 부자들은 인터넷으로 국제 금융 시장에서주식 투자를 하고 돈을 번다. 포스트스페이스, 포스트휴먼의시대다. - P175
몇 년 전에 SNS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어느 ‘명망 있는 남성 지식인‘이 내 글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혹평을했고, 그의 페이스북에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른 사건이 있었다. 지인이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 중에 내 친구까지 있다고전해줘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요지는 "당신(나)은신문 지면을 갖고 있으므로 매체가 있는 기득권자이고, 그렇지않은 사람들에게는 SNS가 지면이므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SNS는 평등과 민주주의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1인 매체의 등장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업으로 SNS에 글을 쓰는사람과 어느 정도 ‘평가받은‘ 단행본을 10권 정도 낸 사람의 삶과 인생(人生苦)는 같지 않다. 그런데도 SNS 문화는 후자는기득권자이므로 골고루 평등‘을 위해 더는 글을 쓰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한다. - P176
이전 시대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종이 신문보다 인터넷이, TV보다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에 개인의 노력과 능력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사회 정의로서 평등이 아니라추상적 개인(individual)인 인간이 모두 같다는 ‘하나의 덩어리로서 평등(sameness)‘, 즉 전체주의다. 평등은 지구위 70억명인구가 모두가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등은 구조적 불평등에저항하는 것이지 개인의 개별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평등. 이것이 역설적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혐오가 허용되는 이유다. 성별, 인종, 나이에 따른 차별이 있지만 그것은중요하지 않다. 차별을 인식하고 사회를 바꾸는 대신 차이가없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혐‘이나 ‘여혐‘이나 다 똑같고, 억울하면 너도 혐오 발화를 하라는 식이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이나 이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이나 모두 같은 페 - P177
미니즘이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페미니즘‘들‘이 한국 사회에 등장했다. 온라인에서 ‘차이‘ 혹은 위계를 결정하는 요소는 단 한 가지다. 강한 멘털 사회성과 타인, 인간관계를 무시하는 정신 승리,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강심장, 거침없는 뻔뻔함, 누가 더 ‘기‘가 세고 거짓말을 잘하는가이다. 혐오발화의 능력도 바로이 무신경함에 달려 있다.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에 민감한 사람은 ‘루저‘가 된다. ‘홍어‘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말)나 ‘오뎅‘ (세월호 희생자를 비하하는 말) 같은 슬프리만치 끔찍한 비인간적 발화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찬양하는 극한의 비윤리성에서만 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채팅 장면과 배우 류준열의 명연이 돋보이는 카메라의 시선은 이에 대한 감독의 비판 정신을 정확하게보여준다. - P178
홍석재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이들을 괴물로만 보지말아 달라"고 말했지만 이들은 이미 ‘괴물‘이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끔찍했던 이가 오프라인에서 지극히 평범하거나 사회적지위가 높은 사람인 사건들을 알고 있다. 문제는 나를 포함해인간은 모두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나는 온라인의 피해자도 피해자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용자(가해자)‘가SNS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있다. - P180
글쓰기의 정의는 이견이 없다. 글은 ‘자기‘ ‘생각‘을 표현(재현)‘하는 ‘노동‘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법이고, 생각하기는 가장 외로운 작업이다. 글쓰기는 중노동이다. 글쓰기는 두렵고, 어렵고,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수입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SNS에서 글쓰기는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도 손쉽고 이익이 막대한 돈줄이자중우(衆愚)정치다. 키보드 사용자의 노동과 시간은 고스란히 ‘구글‘이나 ‘삼성‘이 가져가지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바친다. 그 대가는 무엇인가? - P181
SNS에서는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요구받지도 않는다. SNS에서의 자아와 현실에서의 자아는 다르다. 일상적 공간에서도 다른데(예를 들어, 혼자 있을 때와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때), 관음증과 노출증을 전제로 하는 공간에서 ‘진정한 자아 찾기는 불가능하다. <소셜포비아>의 여자 주인공이 타인의 코멘트를 극도로 기피하는 것은 조금도, 부분적으로도 (타인에 비친)자신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욕망은 포기하지 못해서 온라인으로 도피한다. 만일 그가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한 곳에서만 글쓰기에 매달렸다면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P182
어떻게 살 것인가, 인쇄물(책)을 소환할 때다. 지금으로서는잠시 SNS을 중단하고 오프라인에서 글쓰기가 유일한 저항처럼보인다. 너 자신을 알라. 생각을 하라. 죽도록 연습하고 표현하라.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백미는 글쓰기 수업 파트다. 소셜 네트워크의 본질을 꿰뚫는 감독의 통찰력과 영화를 만드는 뛰어난 ‘작전 구사력‘이 돋보인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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