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상에 세워진 산타마리아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에 이르니 안개가걷히고 있었다. 코엘료가 쓴 《연금술사>에서 자아의 신화를 이루려는주인공 산티아고가 자신의 검을 찾게 되는 배경이 된 곳이기도 했다.
꿈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자아의 신화를 만들기 위한 그의 끝없는 여정속에 지금 내가 서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다.
간절한 마음으로 원하고 바란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진실을믿어야 한다고 코엘료는 말했다. 그것은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 P293

삶이 궁극에는 모두 순금의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음을 마음에새기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최선의 시간을 살아내야만한다.
그동안 카미노 길의 수많은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카미노를 걸어본사람들은 삶에도 이런 친절한 이정표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여 제나름의 이정표를 만들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모든 마음을 이기내며 나아가자! 새롭게 새겨진 믿음의 이정표를 따라 멈추지 말자!
하며.... - P294

에콰도르에서 NGO 활동을 하며 만난 두 친구. 에너지가 넘치는조아나와 달리 산드라는 무척이나 왜소하고 가냘프다. 그런 그녀가 남자친구와 이별 후 1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 잊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었다.
조금 더 견뎌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녀가 말한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려운 때를 아파하고있었다. 필연이든 우연이든 견디는 시간은 이기는 시간이다. 그 시간만큼세상을 살아내고 있으니까. 많이 울어도 도망가지 말고 스러지지 말아야한다. 비록 통증일지라도 깨끗이 비워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것이니까. 그녀도 나도 모두 이겨 내야 할 삶의 한때를 살고 있었다.
산드라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지루하고 힘들었을지 모르겠다.
끈적끈적 발길을 잡는 숲길을 지나니 도심까지 이어진 도로길 저 멀리사리아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다다른 곳에서 마지막 알베르게를코앞에 두고 가파른 오르막 계단이 숨 가쁘다. 서로 파이팅을 외치며산드라와 조아나는 공용 알베르게의 마지막 베드를 차지했다. - P309

잠시 잊었던 그리움이 뒤범벅되어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선생님이 신기한 듯 다가와 한솥단지에 무엇을 만들어 먹는지궁금해하면서도 권하는 음식을 극구 사양한다. 누가 봐도 이 민족의취향은 선뜻 소화하기 힘들 것 같다. 빨간 고추장에 마늘까지 들어갔으니선생님 취향은 정말 아니다. 오늘의 요리는 주제도 이름도 없는 그냥먹거리일 뿐이다. 그저 때우기 식사였음에도 내겐 최고의 밥상이었다.
그렇게 갈리시아의 어느 맑은 날, 그리운 밥을 먹는다. 따뜻하다. - P324

이른 새벽 어두운 길에도 사람들이 시끌벅적하다. 이제 평온한 새벽길도북적대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는 한 시간을 기다려도 보이지 않던사람들이 이제 길 위에 넘쳐나고 있다. 때론 사람이 그립다가도 번거로워지기도 하고, 기운도 되지만 그로 인해 한없이 지쳐버릴 때도 있었다.
이제 막바지로 접어든 길에 많은 얼굴이 스친다. 그들은 지금도 묵묵히길을 걷고 있을까? 또 다른 길을 선택하고 떠났을까? 조금 더 많은사람들과 나누고 인연 되지 못함을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지금의무탈한 시간이 그저 고맙다.
‘함부로 인연을 만들지 마라.‘
그것이 비단 사람뿐일까? 무엇을 얻게 되고 희망과 기쁨을 안고도우리는 그것을 잃을까 염려한다. 소유는 기쁨도 되지만 한편으론 마음의어려운 몫을 갖게 되기에 항상 쉽지 않았다. - P327

그 기록 중에 가장 많은 날을 함께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훌리오선생님이다. 첫날 나바레테 성당 앞에서 손짓 발짓으로 시작된 우리의우연이 오늘에까지 이어졌다. 처음엔 말도 통하지 않았고, 몸의 언어도모자라 수첩에 그림도 숱하게 그렸다. 교직 생활을 오래한 탓인지선생님의 그림은 설득과 이해의 충분한 도구이기도 했지만, 남다른탁월한 솜씨를 갖고 있었다.
딱히 약속된 것도 없이 시작된 하루 이틀의 우연한 만남이, 어느새단짝 동무가 되고 난 후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위안하며 안아주었다.
함께 하는 친구들과 있을 때는 누구보다 흥겨운 친구였고, 그를 통해스페인과 카미노를 더욱 깊게 이해하며 느낄 수 있었다.
하루하루 걸음을 떼듯 하나둘 카미노 말을 배워갔다. 무엇보다 심신의기운이 지쳐 쓰러졌을 때 진심으로 걱정하며 보듬어주었다. 그것은 결코잊을 수 없는 작은 빛으로 남았다. 그 귀한 마음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따뜻함을 나누는 인연의 경이로운 시간은 주어질 것이라믿는다.


이제 내일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많은 이들이 여정을 마치는 곳! - P345

집을 떠나온지 40여 일이 되어 간다. 그만큼 멀어진 현재의 시간에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 그런 생각을하자니 풋 하고 터지는 웃음과 함께 밀려오는 허무한 느낌이 우습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내 삶 속에도 나는 없었다.
동장의 잔고를 쌓으려 한 만큼 내 마음의 곳간도 채워야 했었다. 부재한삶. 그저 세상 속에 존재하기 위한 모양새를 꿰맞추려 분주했었다.
세상으로부터 역할과 직무를 부여받고 살아왔지만 정작 내 스스로 살을향한 뜨거운 응원가 한 번 부르지 못했다. 한없이 딱하고 안쓰러운 시간들이었다. - P378

위인전 같은 삶을 바란 것도 아니고, 인간의 굴레에서 엄청 벗어난오류를 범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삶은 내게 단호했는지. 그것은 세상속의 옷을 벗고 채워놓은 시간의 몫이었다. 스스로 행동하고 마주 선진실. 그 값진 가치의 진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찌 보면 그 모자람으로고통을 앓고 넘어지고 부서진 것이었다. 그러한 영혼의 통증이 내두려움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다시 길로 나서며 야릇한 긴장감이 밀려왔다. 이제 온전히 혼자가 된이 길을 참 멀리도 돌아왔다는 생각과 함께 행복한 긴장감이었다. 그동안 부재한 삶과의 외로운 동거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넘어져야 일어서는 법을 알아가듯, 그때야말로 삶의 풍요로운 시력을 찾을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 P378

나는 헛걸음에 지쳐 이정표 없는 길 위에서 누군가 나타나기를 한없이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지나는 바람이 감미로웠다가 뜨끔하게두려움으로 나를 몰아세우고는 사라져버렸다. 길을 잃는 것이 크나큰과오는 아니다. 하지만 왜 길을 잃고 너는 여기에 있는지….
때론 이해하고 반성하고 견뎌야 하는 그때를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잠시 겸손한 성찰의 시간이 지난 후 만나게 되는 지혜는 평화롭다. 나는이제 조금 더 배려하고 진실한 나와 남은 길을 걷고 싶다. 새삼 지금까지무던히 스스로를 믿고 단단히 끌어안아 준 날들이 고맙다.
길을 걸으며 매번 나를 괴롭힌 또 하나는 길 끝의 허전함을 어찌할까걱정했었다. 성공적 결과 지향의 길들여진 시간 속에서 목표의 부재는매번 공허하게 버거웠다. 그 조바심 가득한 마음을 어찌 메울 수 있을까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괜한 망설임이었다. - P381

920km. 그리 쉬운 걸음이 아니었다. 여정의 끝에서 지난 시간의숨결이 푸르게 살아나 안겨 왔다. 그 날들 속의 사람, 풍경, 괜한 슬픔,
오기와 탄식, 후회의 시선, 가슴속 축복의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이 마음에풍요로웠다.
그 길 위의 조화로운 시간 속의 환희가 저기 깊고 눈부신 대서양 바다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작지만 성취된 빛나는 선물이었다.
지나온 시간이 아름다운 영광으로 차오르며 일렁였다. 삶의 막다른곳에서 선택한 길을 걷고 이제 마침표를 찍는다. 바다 저 너머엔 삶을요동치게 할 무엇이 있을까? 대륙의 끝자락을 밟고 서니 설렘의 탄성과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 P382

내가 만나고 싶은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길을 걸으며 나는 두렵고위태로웠다. 그렇게 차오르지 못한 허전함 속에 무던히 꺾이지 않는신념의 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리고 나로부터 시작된 내 안으로의여행에서 묵묵히 견디며 걷는 영혼의 순례자를 만났다. 더디게 참고,
끝없이 응원하고 위로하던 내 영혼의 순례자.
나는 오늘 삶의 물결 위에 카미노란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곳에서울었던 아픔은 평화로움으로, 미숙한 시선은 더욱 인내하며 자라는지혜로 거듭나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제 선택된 일상에서 진실한 가치로꾸준히 격려할 것이다. 내 영혼에 새겨진 이 길을 기억하며.. - P382

나는 오늘 순례자입니다.
타인의 시선보다 내 안의 물음을기적을 바라기보다 기도를,
스포트라이트보다 등대를,
비겁함보다 인간적 눈물,
소유보다 존재를 잊지 않게 하소서이제사람을 읽고, 길을 읽고떳떳한 가치를 찾는 걸음과한 뼘의 마음이 자라게 하소서


김수연
그림이 좋았지만 열심히 그리지 못했다.
영혼 없는 생의 반나절이 지나며인간이 제 이름만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길을 나섰다. 자신과의 불편한 진실 속에마음 길의 도로시가 되어보기로 한 것이다.
아직 삶의 습작 시간은 충분히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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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라는 차분한 경청자다. 형제 많은 집에서 자라 배려가 몸에 익숙한듯하다. 앳된 모습과 달리 서른이 지난 그녀의 나이가 어색하다.
왜 카미노를 걷게 되었는지 사람들이 물을 때가 가장 난감하다는 그녀.
나름의 깊은 사연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은 별다른 이유 없이떠나온 여정이라고.… 아무래도 순례자를 위해 근사한 답을 만들어놓아야겠다며 그녀가 웃는다.
세상사는 데 답이 무엇인가? 너는 틀리고 내가 맞는 것이 또무엇일까. 서로 다른 삶에 끝없는 선택의 시간들. 그 누적분이 지금서로의 모습이 아닌가. 현재의 나는 내가 택한 만큼의 모습일 뿐. 모든시간은 선택되지 못한 것까지 감당하는 것인 만큼 타인의 규범이 내 삶에 - P130

우선일 수 없을 것이다.
모두 각기 다른 일상이 답이고 최선이고 귀한 삶인 것이다. 아주사소한 것이라도 누군가에겐 전부가 되고 삶의 답이기도 하니까…우리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처럼….
"네 모습이 좋아... 항상 그렇게 웃으며 응원해줘, 안젤라."
만난지 며칠 안 되었지만 누군가에게도 배려 깊은 그녀가 편안하다.
때론 속속들이 나를 아는 사람보다 무작정 대화가 편한 사람이 있다.
나의 수월치 않은 언어에도 마음을 나눠준 그녀 덕분에 하루가 풍요롭다.
오후가 한참 지났는데도 햇살의 기운이 기세등등하다. 우리는 앞서 간엘리자베스를 잠시 걱정하기도 했다. 저기 멀리 아직 걷기를 멈추지 않은지친 걸음의 순례자가 간간이 지나고 있었다. - P131

아타푸에르카Atapuerca 입구에는 세계문화있었다. 마을엔 선사 유적지 답사를 온 학생들의 야외 수업 차량이많았다. 유럽 초기 공동체 화석 유적지로 고대 인류 생활의 많은 흔적이발견된 곳, 세계 3대 선사유적지라니 지나칠 수 없는 교육의 현장에 온것이다. 훌리오 선생님이 장황하게 역사와 유래를 이야기하지만못한 언어의 부재는 그저 가슴 답답한 현실의 아쉬움뿐이다.
저녁 숙소에서 오랜만에 한국분을 만났다. 반가웠지만 한국 사람이란것, 그리고 혼자 왔다는 것 외엔 그녀가 더 이상의 것을 원치 않는 것같아 묻지 않기로 했다. 아쉽지만 그건 개인의 취향이니까. 서로 다른취향은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하니까. 스스로 불편한 기분을 만들 필요가없다. 때로 원치 않는 상황 속에 일방적 요구는 관계 성장에 불필요한 에너지인 셈이다.
우린 태어나고 자란 곳에 생태적 습관처럼 모두 갖가지 모양으로살아간다. 그것은 다른 세계에 뿌리내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론이념이나 환경, 문화적 습관도 변형될 수 있겠지만 타인의 취향은조심스럽고 어렵다. 그러한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집요한 본능 혹은서글픈 미련으로 애쓸 것이 아니다. 각자 세상을 살아가는 안목과 지혜는서로 다르게 성숙하는 것이니까...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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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Camino de Santiago 
Santiago de Compostela



길이 있다.
스페인 북서부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e the Compraile 를향해 걷는 800km의 순례길, 길은 스페인의 문화와 함께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기독교 3대 성지순례의 길이 되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스페인어로 산티아고)의 유해가 있다고 알려진 이 길은 9세기 이후종교적 성찰의 순례의 목적지가 되었다.
- P6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은 프랑스에서 시작하는 길을 비롯해 ‘북쪽 길Camino Del None‘ 남쪽 세비야sevilla에서 북으로 이어진 ‘은의 길 Via de la Plata‘ 포르투갈 길 Camine Portugues‘ 외에 마드리드, 발렌시아, 그라나다 등 스페인 전역이 카미노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길이 프랑스 길이다.


사람들은 순례길의 이정표 가리비 조개와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각자 길을 걷는 목적도 속도도 다르지만 출발 지점에서 발급받은 크레덴시일 Credential-순례자여권에 매일 지나게 되는 도시와 마을의 성당, 알베르게Albergue-순례자 숙소 바Bar등 다양한 곳에서 스탬프를 찍게 된다. 이 스탬프 - P6

는 최후 도착지인 산티아고에서 콤포스텔라순례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는준비 과정으로 개개인이 걸어온 순례의 흔적을 알 수 있다. 걷기는 최소100km, 자전거는 200km를 완주 후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콤포스텔라‘
를 받게 된다.


성 야고보의 유해가 있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발걸음은 12~15세기 수많은 순례의 역사와 전설로 이어져왔다. 레콘키스타 시절Reconquista. 8~15세기에 걸쳐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한 이베리아반도 지역 탈환을 위해 일어난 기독교도의 국토 회복 운동 알폰소2세는 스스로 순례자가 되어 오비에도oviedo 부터 산티아고까지 걸었고,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산티아고 방문 이후 1993년 프랑스의국경도시 생장피드포르st. Jean Pied Port에서 스페인 산티아고로 향하는 프랑스 길 Camino Frances 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P7

새롭게 잡힌 물집이 아려서 꽤 많이 절뚝거린 하루였지만 무사히 일정을마칠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다. 건너편 벤치에서 사람들의 수다가 오후를채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수다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신기한 것은 딱히 통하는 언어가 없어도 그 이상의 눈빛과 마음은귀하게 통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언어는 소통을 수월케 하지만 조금모자라도 괜찮다. 서로에게 조금 더 신중히 귀 기울이게 하니까. 그저당신의 마음을 내가 어찌어찌하여 파고 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지친 몸도 아랑곳 않고 하나의 길 위에서 우리는 만났기에 가능한것일까? 함께 가는 길. 나누고 보태는 벅찬 응원들. 그 깊은 배려는서로의 에너지를 더할 수 있는 소중한 삶의 행보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 P77

그녀의 요점은 늘 꾸준하라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만나기 전 아주 상세히 이상형의 모습을 하나님께 기도했다며 추억을 회상했다.
배우자를 위한 기도의 모습으로 지금의 남편을 얻게 되었다며, 자상하고멋진 수염을 가진 남편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도 항상 잊지않고 기도문을 꾸준히 적어 기도한다고 했다. 최근 그녀의 기도는 오랜지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의 건강과 함께 세상에 조금 더 나눌 것을 찾아베푸는 것이라 한다. 매번 서두르지 않고 꾸준한 기도처럼 흔들림 없이지속되기를 바란다 했다.
영혼의 기도는 삶을 정성껏 살게 한다. 그녀의 이야기에 낮잠처럼 빠져든다. 살면서 내 편이 되어주는 든든한 사람이 있다는 것, 세상을이길 수 있는 스스로의 다짐을 다시 곧추세우며 스러지지 않는 영혼의 힘이 된다. 그녀의 기도가 기적이 된 것은 믿음으로 이뤄진 평안이었다. - P85

꼬박걷기만 집중한 탓일까. 요일 개념이 사라졌다. 가끔 스페인의국경일이나, 주말을 앞두고 미리 먹을거리를 장만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요일도 날짜도 딱히 필요치 않은 이 무중력의 달나라 여행.
집 떠나온 지 열흘, 들쑥날쑥한 아침밥 때문인지 비틀어진 날들은 편치않았다. 요 며칠 같아선 삼시 세끼 한꺼번에 먹어두고 야금야금 에너지로썼으면 딱 좋겠다. 사 먹기도, 만들어 먹기도 굶기도 쉽지 않은 세끼가어렵다.
밥이란 새날을 귀하게 살겠다는 약속이고, 꼭꼭 씹어 삶을 다짐하는것이며... 때때로 엉킨 삶의 실타래를 풀 수 있는 기운이었고, 절망의상처에 따뜻한 소염제였다. - P98

호락하지 않은 밥벌이를 위해 발버둥치며, 하루 세 번의 밥상 앞에꼬박꼬박 경건한 인사를 잊지 말아야 했다. 하루 한시도 잊을 수 없는삶의 신성함...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해도 세상은 온통밥! 밥이기에 꾸역꾸역 살아내야 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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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기법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 특히 여성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오지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모르거나 혼란스러워한다. 타인의 기대와 자신의 원하는 것(want)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이러한 유동성은 인간의 본질에 가깝다. 인간 행동을 설명할 때, "내가 원해서 한 행동"은 극히 일부분이다. 더 논쟁적인 지점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하는 것은 실상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유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정체성(동일시)과 욕망의 산물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나의 선택이라고 해서 모두 수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사회 정의와 충돌할 때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일베‘ 같은 여성혐오 세력이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라는뜻이다. 내가 내 몸의 ‘쓸모‘를 결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와 협 - P218

상하는 삶을 의미한다.
더구나 개인의 선택이나 의지는 사회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회와 분리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를통해 사고하는데, 그 언어가 이미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전 세계에서 가장 성 산업이 발달된 국가에서 성산업으로의 진입 장벽은 너무나 낮다. - P219

대개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고정관념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어떤 맥락에서 폭력인가 아닌가 여부가 아닐까. 회유는 폭력인가? 저항으로서 폭력은? 솔직히 필자는 폭력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폭력 없는 세상은 모든 인간이 ‘쿨‘하고 우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약자는 분노하고 강자는 차분하기 쉽다. 그렇다면 약자만 폭력적인가? 이 논의는 대단히 복잡하다. 권력은 곧 폭력이라는 주장부터 권력이 있다면 굳이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논의까지. 다음의 주장을 살펴보자  - P220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은 지성이다."(맬컴엑스) "혁명은 신적(divine) 폭력이다."(슬라보예 지젝 "폭력은 식민지인이 저항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다." (프란츠 파농) "지배자의 평화는 민중에게 비상사태이다." (발터 베냐민) "법은 조직된 공적 폭력의 코드이다."(니코스 풀란차스)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는 식의 타자화(他者化)야말로 가장 큰 폭력이다."(도미야마 이치로) "삽입성교 자체가 폭력이다."(안드레아 드워킨) 모든 대상화, 즉 내가 정의하는 네가 너다. 너의 존재는 나에 의해 정해진다는 논리, 이것이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의 폭력이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군대나 경찰 같은 공권력을 ‘합법적 - P220

(normal) 폭력‘이라고 한다. 다른 의미에서 대표적인 ‘합법적 폭력‘
은 일상에 만연한, 그러나 제대로 처벌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인류학은 의례(ritual)로서 폭력을 연구한다. 이처럼 폭력 개념을 개인의 의지에 반한 것으로만 설명할 때 우리는 폭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피해 또한 여성의 관점에서 정교하게 드러낼 수 없다. 아내에 대한 폭력도 마찬가지이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성 산업보다 더 안전하다는 일상의 인식은 가족주의에 불과하다. 남편과 손님 중 누가 더 폭력적인가? 이것은 개별 사안의 문제이며, 구조적으로는 오히려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의 폭력이 더 은폐되기 쉽다. 더구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남성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 P221

성 노동론 주장은 사회적, 공적 임금 노동으로서성산업 종사여성들의 노동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 주장 역시 당연하다. 문제는 이 담론의 효과이다. 성 판매가 노동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여성에게는 그 일이 적합하다"는 의미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여성은 잠재적 ‘창녀‘로 간주된다. 이는 성매매 찬반 논쟁과 무관하다. 변화무쌍하게 질주하는 성매매와 성 산업의 성격을 현실에 더 가깝게 드러낼 수 있는 개념이 중요하다. - P222

복지는 원래 보편적인 시민의 권리이다. 소득이 높은사람은 세금을 더 많이 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적게 낸다. 이러한 조세 정의가 실현된 상태에서 모든 시민이 복지를 누리는 것이다. 부자도, 빈자도 복지 인프라를 활용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복지개념은 시혜적인 의미, 모든 이의 권리가 아니라 없는 사람만 국가가 배려해준다는 의식이 강하다(여기서 복지 대상이 되는 이들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이에 대한 대안적(?) 개념으로 ‘진보 세력‘은 복지라는 단어에 ‘보편적‘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여서 복지를 동어 반복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또다시 불필요한 논쟁 구도가 형성되었다. ‘보편적 복지 대 선별적 시혜적 복지‘가 그것이다. 논의가 이렇게 전개되면, 대개는 선별적 복지가 더 합리적이라는 여론이 만들어지기 쉽고, 이는 보수 진영의 ‘승리‘로 귀결된다. 시민권으로서 복지는 부자와 빈자, 사회 구조의 가해자와 피해자, 시혜자와 수혜자를분리할 수 없는 당위다. ‘가정 경제‘가 ‘나라 경제‘의 토대라면, 학교급식은 복지 이슈가 아니라 단지 일상적인 경제활동인 것이다. - P223

이 글은 ‘시간과 공간‘, ‘마음과 몸‘, ‘문화와 자연의 이분법이라는 근대 서구 남성 중심적 사유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정의하는방식이 될 때, 여성의 몸을 공간으로 간주하는 성별화가 성폭력의발생 원인이 됨을 논하고자 한다. 또한 몸/마음(이성, 정신……), 공간/시간의 이분법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그간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반대 운동의 중요한 논리적 기반이었던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주장을 문제로 삼고자 한다.
여성이 남성 주체에 의해 타자화되거나 대상화될 때 여성의 몸은공간화된다. 이때 공간 개념은 사회적 공간이 아니라 몸에 기반하 - P236

지 않은 본질주의적인(disembodiment)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 인식이 젠더 논리와 결합하면, 여성의 몸은 남성 문화를 담는 그릇으로 간주된다. 전쟁,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 청소) 자체가 젠더적현상인데, 특히 최근 국제 사회에서 심각한 인권 이슈로 등장하는제노사이드 상황에서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은 여성의 몸이 인종화되고 성애화된 공간으로 영토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에대한 집단 성폭력이 제노사이드의 주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성폭력을 공간 문제와 연결하여 살펴보면, 공간과 젠더는 상호 연고 교직(交織, interweave)되어 서로를 생산함을 알 수 있다. 젠더가개입된 ‘공간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터‘와 ‘집‘ 분리 같은성별에 따른 공간 분리에 대한 비판이 가능할 뿐 아니라, 성폭력을근절하기 위해서는 젠더 질서의 변화와 몸, 공간에 대한 사유의 변화가 동시에 필요함을 알 수 있다. - P237

남성의 폭력을 기억하는 여성의 몸은주체의 의지대로 이동하지 못한다. 공간지각 능력은 개인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의 능동성과 관련이 있다. 인간이 존재한다 혹은 살아 있다는 근거는, 인간의 몸이 공간의 어느 구체적인 장소에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이 공간을 인식하는 주체로부터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공간이 인식 주체의 몸을 기준으로 삼아서만 특정하게 인식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몸이 없다면 공간도 인식되지 않는다. 폭력으로 인해 몸의 주체성을 빼앗긴 여성들은 자신의 육체가 머물고 있는 공간과 자기의 관계, 즉 공간에서 자기몸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공간지각력 상실은 여성에 대한폭력 피해자뿐만 아니라 고문 등 국가폭력의 피해자에게서도 공통적으로발견된다). - P240

성폭력 발생 원인은 물론이고 이후 투쟁은 피해 여성 개인의 사회 의식, 자원, 장애 여부, 인종, 사회적 관계망, 학력, 계급, 외모,
나이, 건강 상태, 비혼 여부, 지역 같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한 명의 여성이 안전하지 않다면 모든 여성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은여성 운동으로서 성폭력 운동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여성 경험의 공통성을 증명해야 하는 정치적 부담이 있을 뿐 아니라실제로 여성의 현실은 같지 않다. 김은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모든 여성이 일정 정도는 젠더 연속선(continuum)에서 살아간다. 즉 언제든지 여성 한 명의 피해가 다른 여성의 피해로 대치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한 여성의 문제는 모든 여성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연속선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처지와 맥락이 다른 여성들의 젠더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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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는 젠더(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문화 혁명에준하는 사건으로서 우리 사회 전반의 뿌리 깊은 인습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에 문외한인 나조차 오래전부터 고은의범법 행위를 알고 있었다. 내용도 알려진 사실보다 심각하다. 그의행동은 상습적인 범법일 뿐 한량 문화도 아니고 기행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시가 계속 교과서에 실리기를 주장하는 이유는 ‘문학적업적‘ 때문이 아니다. 나는 원래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서사시, 대하소설...... 한국의 일부 남성 문인들은 자신을 예술가가 아니라 역사 서술의 주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생각이 여성에 대한 폭력의 구조 중 하나다. ‘내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기 때문에‘ 타인은 없는 존재이거나 존재하더라도 그/그녀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그래서 나를 위해 봉사해야한다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폭력의 원인이다. - P135

친일과 반공으로 사익을 챙겨 온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에대한 차별이 불가피하다고 믿어 온 일부(?) 진보 진영의 자기 직면은 지금부터다. 고은의 작품이 교과서에 남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교과서에는 모범적인 저자와 글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현실, 실패한 역사도 포함되어야 한다. 둘째 이유는 ‘노벨상 타령‘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서구 콤플렉스와 남성 패거리 문화를 영원히 기록하기 위해서다. "이런 시를 쓴 사람이 그런 행동을 - P135

했고 한국 사회는 그를 숭배해 왔지만 여성들의 투쟁이 있었다"라고 적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반성 없이 탄생한 시, 성폭력 가해자가 연출한 작품은 무조건 졸작인가. 교과서는 이를 논쟁적으로 제시하는인식론을 제공해야 한다. 영화감독 김기덕은 <해안선> <나쁜 남자><빈 집〉〈스톱〉 등 작품의 완성도 자체가 황망한 경우부터 목불인견인 영화,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수작까지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공과를 따지기보다 인간과 사회는 복잡하고 모순적이라는사실을 인정하고 사유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투명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를 포함해 현실을 세탁한 모든 텍스트는 "껍데기‘다. 우리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책들은 넘치고 넘친다. 교사는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실제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한 갈등도 적어지고 이후 현명한 대처도 가능해진다. 교과서는 우리를 인식할수 있는 교사이자 반면교사여야 한다. 그것이 가해자가 가해자로서 역사에 남는 방법이다. - P136

피임 방법 중 여성이 매일 복용해야 하는 경구 피임약이나 자궁내 장치보다 남성의 콘돔 사용이 안전하고 편리하지만, 대개 남성좋은 콘돔 사용을 기피한다. 성별 권력관계는 피임의 책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성이 남성에게 콘돔 사용을 강제할 협상력이없고, 콘돔 사용을 "장화 신고 달리기"라며 억울해하는 남성 문화메다, 피임은 여성의 책임이라는 의식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여성은 임신 중단이라는 자신의 몸에 대한 폭력과 사회적 낙인, 죄의식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낙태죄 폐지 주장은 폭력의 후유증을 조금이라도 줄이자는 절실한 요구일 뿐이었다. 남성의 ‘귀찮음‘이 여성의 생명권을 침해한다 - P140

낙태죄 존속과 폐지 주장 이전에 더 중요하고 효과적인 문제는 남성의 인식 교정이다. 성관계는 쾌락, 의무, 교환 등 여러 의미가 있지만 그 모든 의미의 전제는 출산을 원치 않는다면, 피임이다. 피임을 성관계의 일부로 규범화해야 한다. 여성들은 피임 자세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남성과는 성관계를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성적 자기 결정권이다. 남성의 인격은 성관계 시 피임과자신의 성병을 살펴보는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 P141

임신 중단(낙태)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생명의 소중함과 전혀관련이 없다. 피임의 책임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다는 사고방식과 여성의 몸은 남성의 소유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성 문화에서 임신 중단은 남성 공동체가 소유한 그릇(container)인 여성의 몸에 (예를 들어 자궁宮) 주인의 허락 없이 그릇을 비우는 행위다. 축구에 비유하자면, 골이 들어갔다가 그물 밖으로 나왔을 때의분노와 비슷하다. 축구는 남성 중심적인 섹스를 은유하는데, 골인(goal in)은 사정인 셈이고, 실점은 다른 남자의 정자가 ‘내 여자‘ 에게 들어가는 것이다. 자책골을 넣은 선수나 골키퍼가 살해 위협수준의 비난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 P141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료 인력의 편중과 부족이다. 성형외과나피부과에 집중되는 것은 심각한 공중보건 문제다. ‘선진국‘ 일본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산부인과 의사 인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소아 환자의 진료 거부 사태는, 성형 시술에 국가의 개입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만일 의료 인력 편중으로 ‘우리‘ 누군가 아플 때 의사가 없어서 사망한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모든 의사가 성형외과를 전공하고(심지어 이 인력도 모자라서 정형외과 의사가 미용 성형에 동원되기도 한다), 대부업과 연계되어여성의 성형 시술을 부추기고, 일부(?) 여성들이 성형 시술로 의료인력을 독점한다면, 여성주의는 이에 어떻게 개입해야 할까. - P147

성교육은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가‘가 아니라 인권과 공중보건교육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타인 몸의 개별성을 인식하고 거리를 둘 줄 알며, 자기 몸에 대한 존중감을 키워주는 게 성교육이다.
이런 훈련은 장애인이나 외국인에 대한 무례나 폭력적 행동도 줄일수 있다. 20대에게 성 문화를 강의하다 보면 무지와 왕성한 활동이빚어낸 비극을 본다. 고통은 거의 여성의 몫이다. 초등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나는 건강교육(성교육), 정치교육, 환경교육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P151

정신이 육체를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정상이고 합리적이며 우월하기 때문에 이로인한 시민권의 위계와 차별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노인, 유아, 임신부, 다친 사람, 여자환자, 장애인(모두 기저귀를 찬다)에 대한 비하와 혐오는 이 때문이다.
이들은 눈물, 침, 혈액, 월경혈, 양수, 대소변 같은 체액을 통제하지 똥하고 몸 밖으로 ‘줄줄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모든 가부장제 사회에서 시민권 획득 기준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결정한 사랑 예술장애인, 노인은 아닌)인 것도 이 때문이다. - P154

하지만 아무리 잘난 남자도 생로병사에서 예외일 수 없고, 그 누구도 육체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생명이 지속되는 한 체액은 우리 몸 안팎을 넘나든다. 체액은 타인과 사회에 상호 의존적인적 자아로서 인간의 존재 양식이다. 그러나 체액에도 위계가 있어서 남성 문화는 ‘기저귀 찬 사람‘을 경멸하면서도, 권력의 상징인 페니스에서 나오는 소변, 정액 같은 자기들 체액은 불결하거나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소변 방울이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배변기 앞에서 조심스러워하는 남성은 드물다. 영역 표시를 상징하는 남성의 소변을 성찰하고, 취약한 몸의 구체적 고통에슬퍼하면서 우는 남성이 많아진다면,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사고하는 힘의 원리는 재고될 수 밖에 없다. 육체의 불완전성은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다. ‘기저귀 찬 사람들‘의 목소리와 관계 맺기 이것이야말로 평화정치학의 핵심이 아닐까. - P154

"가정폭력은 사소한 집안일"이라는 인식은우리 사회의 프라이버시는 곧 남성의 프라이버시라는 걸 의미한다.
만일 국가가 사적 영역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면, 1970년대 출산통제 정책이었던 가족계획이나 그 반대인 현재의 저출산 대책, 상속세 등도 모순이며, 더군다나 시민의 연애를 관리하고 간섭하는 ‘곰신‘ 관리 제도는 어불성설이다. - P158

인간은 언어와 상징 없이는 사고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피해야 할 은유나 상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것은 국민적 거부감을 낳고 군 종사자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문제일 뿐, ‘그들이 원하는 안보 의식 강화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 P170

정체성과 일상의 실천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물이나 아동과의 관계는 합의가 어려우므로 무성애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이들이 많다. 한편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스는 인간의 몸의 성별, 즉생물학적 의미의 섹스인 ‘male‘, ‘female‘로 구분된다는 ‘지식‘이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다양하고 유동적인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은 이들의 인권을위해서, 그리고 남성 중심의 이성애를 상대화하고 이성애의 문제들(성폭력, 성 상품화, 가부장적 성적 규범.....)을 문제화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섹슈얼리티 개념의 가장 문제적이고 좁은 개념은 남녀 간 성교(性交, intercourse)이다. 이 행위가 전부가 아니라고 인식할 때 변화도 가능하다. - P175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는 포유류 같은 고등동물은 자웅이체, 미생물 같은 하등동물은 자웅동체 라고 가르친다. 물론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이는 가부장제가 얼마나 과학을 오염시킬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자연과학 역시 가부장제 담론임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자웅이 한몸에 있거나 남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우를 인터섹스라고 한다. 이것은 ‘기형도 ‘장애‘도 아니다.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통계치는 그 자체로 정치학이다. 남성과 여성의 몸의 차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따라 인터섹스를 100명 중의 1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이를 몸의 ‘문제‘로 인식하고(클라인펠터 증후군Klinefelter syndrome) ‘과학적‘ 측정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들도 있다.  - P181

나는 ‘타인의 취향‘ 존중이나 ‘톨레랑스‘ 같은 자유주의적 사고를 그다지 선진적인(?) 문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는 이런 가치를 적용할 대상조차 드물다는 것이다. 다름에 대한 무지, 무시, 무감각은 모든 독립적인 타인(개인, individuals)을 타자(the others)로 만들어버린다.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기 이전에, 인간이 개인으로, 타인으로 존재하기 힘든 사회다. 모두가 우리이거나 모두가 우리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인 사회다. 톨레랑스? 관용하고 배려할 ‘다름‘ 자체가 제대로 가시화되기 힘들다. - P185

스포츠 경기에서 남녀 구분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은 누구나 안다. 다만 성별 확인이 불가피하다 해도 다른 형식, 다른 방식, 다른 사유가 있을 수 있다. 여성의 성별을 가임 여부나 몸의 특정 부위를 확인해야만 알 수 있는가. 남자 같아 보이는 여성 축구 선수 논란은 겹겹의 무지가 중첩된 사건이다. 국가정책, 지식 사회, 사회 운동을 비롯한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젠더사안을 인식하지 못한다. 평소 이에 대한 사유가 축적돼 있지 않은데다 구별 집착이 겹쳐 발생한 ‘해프닝‘이다. 그러나 이 해프닝은 에피소드가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인권 침해의 상상력을 구성하는 공포정치다. 장애인, 성적 소수자, 이주노동자, 환자, 노인(우리 모두는 나이 든다) 모두 이 ‘확인의 정치‘에서 타자가 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스스로 타자화의 대상이자 타자를 생산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논쟁은 계속돼야 한다. - P185

누가 여성인가,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해부학?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구호는 생물학‘적‘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생물학조차 과학적이지 않다. 양성이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생물학을 혼동한다. 실제로 이 둘은 정반대다. 생물학은 환경과 문화와 생명체의 상호작용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본질을 캐는 학문이 아니다. 아니, 생물학뿐만이 아니다. 본질을 추구한다면 이미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신앙이다".
모든 이들은 ‘사람‘으로 태어날 뿐인데, 가부장제 사회에서만 인간을 ‘남녀‘로 구별한다. 이는 차이가 차별을 낳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어야 차별의 근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흔 - P186

한 표현은 차이를 원래 있는 것처럼 본질화하고 고정화하는 사고방식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다. 여성도 남성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으로 표시되는 것뿐이다. 성별은 없다.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는 성별이 있을 뿐이다. 여성은 실체도 실재도 아닌 지배 규범(성 역할사회화)의 산물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특정한 여성만 여성으로 간주된다. 나이, 인종, 계급, 외모, 직업 등에 따라 여성의 개념은 유동적이다. - P187

여성주의 사상의 핵심은 ‘차이‘이며, 이는 현대 철학 전반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성이라고 간주되는 집단 내부의 차이, 흑인노예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은 성별보다 인종의 차이가 더 크다.
이 때문에 정체성의 정치에서 출발한 여성주의는 진정한 여성이라는 허명으로 다른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타자화하기도 한다.
정체성(正體性)은 "우리는 같다"는 팩트가 아니다. 오히려 같지 않기 때문에 동일시(同一) - 여성임을 자각‘ -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주의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까지 현모양처, ‘예쁜 여성‘ 같은 여성의 기준은 남성 문화가정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혐오 사태는 여성이 남성을 대신 - P187

해서 누가 여성인지를 정하겠다는 발상이다. 일단 이 ‘진정한 여성‘기획은 불가능하다. 오랜 역사를 거쳐 구성된 여성 개념은 이미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기는 작은 차이다. 작은 다름을 본질로 만드는 그것이 바로 권력이다. 자궁이 있어서 출산을 하고 저절로 육아 전문가가 된다면, 성대가 있는 사람은 모두 오페라 가수가 되어야 하는가.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여성이나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애 제도는 인간을 남녀로 구별하기 위한 강력한 장치다. 이성애는 자연의 법칙이 아니다. 동성애, 무성애, 범성애 등 인간의성적 실천은 다양하고, 이에 따라 성별 정체성도 달라진다. 성별은본디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사회적 강제를 거부하고 개인이 선택할수 있다. - P188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그들이 여성의 권리를 빼앗아 간다? 여성 우선 페미니즘? 누구도 타인의 성별을 규정할 수 없다. 이제까지 여성 운동은 민족/민중/시민 개념을 독점하면서 인권의 위계에 따른 순서("여성 문제는 나중에")를 주장해온 남성 중심의 사회 운동에 저항해 왔다. 여성주의가 진짜 여성과 가짜 여성을구별하고 배제에 앞장선다면, 그런 여성주의가 왜 필요할까. - P188

에로틱의 의미는 계속 재정의되어야 한다. 사랑이나 성애의 상대가 누구든 간에 동등함과 관계성, 인격적 관계가 에로틱한 것이며 이러한 상태(사랑)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파일은 인간의 사랑 행위 중 일부일 뿐, ‘동물과 섹스하는 사람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섹스가 아니라 동물의 삶을 성의 측면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레즈비언이 되기로 ‘선택‘
한 여성들, 아니, 주파일이 되기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인간처럼 더 나은 삶을 원한다.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선택한다는것은 성적 지향에 머무는 일이 아니며,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생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와 주파일 중 누가 더 성과 사회에 고민이 많겠는가. 그런 면에서 주필리아는 여성 노동의 성애화, 여성 섹슈얼리티의 상품화, 만연한 젠더폭력, 구조적 가해자의 위치에 있는 남성 문화에대한 강력한 비판이자 새로운 목소리다. - P196

성별 의제를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눈다면, 하나는 차별을 정상화하는 성별 분업(이는 곧 여성의 이중 노동이다)을 극복하기 위한평등권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양성 자체의 구분을 문제 제기하는것이다. 물론 이 두 의제는 상호 보족적이며 현장의 상황에 따라달라진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전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권력이 무엇이 의미 있는 차이이고 의미 없는 차이인지를 규정하기 때문에, 차이는그 자체로 언제나 문제가 된다. 의미 없는 차이는 만들어지지 않거나 ‘다양성‘ 등으로 탈정치화된다. 차이는 선재(先在)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만들기 위한 전제다. 세상의 어떤 차이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 이것이 차이의 정치학이다. 그러므로 여성, 장애인, 성적소수자의 이해가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고 또 연대해야 한다. - P210

인터섹스의 가시화는 1) 그 상태도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 2) 남녀는 모두 뒤섞인 사회적 몸(social body)이라는 것 3) 몸의 차이는 연속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즉 여성, 장애인, 성적소수자의 인권 (이들을 인구수로 합치면 전 인구의 과반을 훨씬 넘는다)을 완전히 다른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게 한다. 한마디로 인간의 기준을 바꾸는 것이다. 기존의 인권 개념이 백인 남성을 모델로 하여 약자에게까지 그것을 ‘적용‘(배려, 시혜, 관용...…)하는 과정이었다면(그조차 가능했던가?) 인터섹스는 사람의 개념을 새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인식론이다.
이 글이 강조하는 것은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을 깨자‘라거나 ‘비정상의 정상화‘가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 원래 그런 것은 없다.
그것은 권력의 선택이고 담론의 구성이다. 케이트 본스타인은 말한다. "젠더를 이야기하는 데 이렇게 힘을 많이 쏟아 붓다니, 도대체 사람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세상이 어땠을지 궁금하네. "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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