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정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 노론에서 임금으로 추대하는 경우뿐이었다. 노론 외에는 은언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조를 지지하는 소론과 남인이은언군을 추대할 리는 만무했다. 결국 은언군 문제는 정순왕후와 노론이정조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정국의 가장 큰 문제는 정조보다정순왕후를 임금으로 받드는 노론의 속마음이었다.
정조가 은언군을 만난 것은 전날인 4월 13일이었다.
"그를 어제 만나 보았더니 살가죽만 겨우 보존하고 있는 상태로서 내려가거나 여기 머물러 있거나 아무 관계될 것이 없었다. 애당초 데리고 오게한 뜻에 비하면 지금 돌려보내는 것도 걸맞지 않은 일이지만 한 해에 한 번만나겠다는 뜻은 사사로운 정을 공법(法) 밖에서 펴자는 것이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서글퍼진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노론이 아니었다. 다시 김희 등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끝내 사(私) 한 글자를 끊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매번 이런조치가 있는 것입니다. 빨리 사자를 제거하소서."
사간원 정언 안정선(廷) 등은 한술 더 떴다.
"이 역적이 한 번 섬에서 나오자 온 나라가 몹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만일 제 마음대로 왕래하도록 하면 종묘사직이 당장 위태로울 것입니다. 신들이 주장하는 것은 오직 공법(法)일 뿐입니다. 자전의 뜻을 체득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끊어 버리고 의리로 처단하소서."
은언군을 죽이라는 뜻이었다. 정조는 다시 타협에 나섰다. - P139

이른 아침.
정조는 동궐(東闕)로 향했다. 대비에게 문안하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먼저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있는 동궐로 가서문안인사를 드려야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이 일은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촌수로는 할머니지만 영조 21년(1745) 생으로서 영조 28년(1752) 생인 정조보다 불과 일곱 살이 많을 뿐이었다. 사가 같으면 누이가 될 정도의 나이차였으나 열다섯 살에 예순여섯의 할아버지 영조와 대혼(婚)을치름으로써 법적인 할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영조 11년생(1735)인 혜경궁홍씨보다는 열 살이 적었으나 혜경궁 역시 어머니로 깍듯이 섬겨야 했다. 광해군이 계모 인목대비를 폐모시켰다가 쫓겨난 전례가 있으므로 정순왕후를 대할 때 정조는 정성을 다해야 했다. 국왕은 효도에 있어서도 모범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그녀의 친정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직접 가담했음은 모두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부친 김한구, 홍계희 - P152

짬禧) 등과 짜고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다. 그 배후에는 정순왕후가있었다. 김귀주는 과거 급제도 못한 처지였으나 여동생이 국모가 되자 음보(蔭補)로 조정에 나와 왕비의 오라비라는 배경으로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는 그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정견을 갖고 있던 노른 벽과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정순왕후 또한 정조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다. 정조 즉위 후 오라비 김귀주가 탄핵을 받아 흑산도로 유배 갔다가 끝내 나주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정순왕후의 친정에서 제공했다. 김귀주가 사도세자 죽이기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이런 인과관계를 무시했다. 원인은 무시하고 결과에만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 원한을 풀기 위해 틈만 나면 언문 하교를 내려 정조의하나 남은 이복동생이자 사도세자의 핏줄인 은언군을 죽이려 압박했다. 명분은 ‘국왕을 보호한다‘, ‘사직을 위한다‘는 것이었지만 누구보다 그녀가정조를 저주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순왕후에게 은언군은 정조를 압박할 수 있는 좋은 먹이였다. 정조는 자신이 이 여인보다 먼저 죽으면 강화도의 은언군은 죽은 목숨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P153

그러나 이때까지도 남편과 자신과 아들이 하나로 묶인 운명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남편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당론에는 따랐으나 아들을 제거하려는 당론에는 강력히 저항했다. 자신의 저항이 없었어도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들의 즉위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했고, 비로소 혜경궁은 남편과 자신과 아들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천생(天生)의 인연으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과 아들 모두모순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아들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의 친정을 몰락시켰다. 숙부는 사형당했고 부친은 연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공격을받았다.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동조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아들이 부친 사도세자의 복수에 나서면 모친인 자신의 친정이 다치는 모순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혜경궁 자신과 국왕 아들이 함께 져야 할 업보였다.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라는 상소에 아들은 "처분이 곧 뒤따를 것이다(從當處分)"라고 답했다. 처분이 뒤따른다는 것은 곧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혜경궁은 단식으로 맞섰고 아들은 겨우 부친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혜경궁은 자신과 정조 모두가 풀 수 없는 모순에 빠졌음을 절감했다. 정조가 이미 죽은 부친을 잊고 살아 있는 자신만을 위해 주는 것이 해결책일 수 있지만 정조는 부친을 잊지 않았다. 뒤주 속에서 여드레 동안이나 신음하다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156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창밖은 어슴푸레했지만 정조는일어나 옷을 입었다. 지난밤 야연 (야간 경연)에서 김재찬에게 한 말이 생각나 입가에 가만히 웃음이 떠올랐다.
"한번은 한밤중까지 책을 읽다가 피곤이 몰려오고 졸음이 쏟아졌는데, 갑자기 한 줄기 닭 울음소리를 듣자 몽롱한 기운이 단번에 사라지고 청명(淸明)한 기운이 저절로 생겨서 이 마음을 일깨울 수 있었다." (일득록』4)
어제도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읽기로 마음먹었던 책을 다 읽지 못했기때문이다. 정조는 경연 후 시신(臣)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반드시 일과를 정해 놓고 글을 읽었다. 병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과를 채우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고, 임금이 된 뒤에도 폐지하지 않았다. 저녁에 신하들을 만난 후에 깊은 밤까지 촛불을 켜고 책을 읽어 일과를 채우고 나서 잠을 자야만 비로소 편안하다."(『일득록』 1)
정조는 하루의 독서 목표량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정무 중에는 너무나 바빠서 독서할 틈을 찾을 수없었다. 정조는 일을 적체시키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날 처리할 일은 그날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만기(萬機)를 친림(親臨)하는 국왕의 업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승지들은 괴로워했다. 매일 새벽부터 출근해서 업무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평할 수도 없었다. - P172

임금 자리는 천하의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조에게는 더위도 장마도 모두 걱정이었다. 무더위에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고 별전으로 옮길 것을 거부했지만 정조는 사실상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었다. 재위 22년(1798) 정조는 각신 이만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더위를 참지 못하기 때문에 매년 삼복더위가 지나고 서늘한바람이 처음 불어오면 마치 옛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기쁘다. 그러나 올해는 가뭄 때문에 농사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날씨가 일찍 서늘해지는것을 꺼리고 있다. 백성을 위하는 나의 일념 때문에 날씨가 서늘해져도 기쁜 줄을 모르겠다. 방백(方伯: 감사)과 수령들도 이러한 나의 마음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정조는 또한 검소함에 대해 김조순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 (일득록』10)
그랬다. 부지런히 일하되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정조가 생각하는 조선 왕가의 법도였던 것이다. 영조도 그랬고 자신도 그랬다.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그 누구보다 검소했다. 규장각 각신들은 정조의 검소함에여러 차례 탄복했다. 각신 서유방(徐有防)의 기록에 따르면 재위 11년(1787)정조의 거처는 벽지를 바른 지 오래되어 검게 변했고, 기둥과 서까래도 계속 내린 비로 다 썩었다. 경연 신하가 유사(有司)에게 고치게 하자고 청하자 정조는 서두르지 말라고 말렸다. - P178

정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명주옷, 즉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부드러운 명주옷보다 거친 무명옷을 선택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사람은 대체로 화려한 옷을 한 번입으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이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받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1)
그 무명옷도 여러 번 빨아 입었다. 대개 군주들은 옷을 빨아 입지 않고새 옷만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 P179

이렇게 정조가 옥사를 재심리해 사형수를 사면하자 비방하는 소리가 나왔다. 국법과 기강이 무너진다는 비방이었다. 정조는 남공철에게 자신의옥사 판결 원칙을 설명하면서 비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나는 살릴 만한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지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다. 한고조(高祖)의 약법(法)에 ‘남을 죽인 자는 죽인다‘고 하였고, 당(唐) 태종(太宗)이 경계하여 삼간 바는 대옥)에 있었다. 죽여야 하는데 살린다면 죽은 자에게 원한이 남게 하는 것이고, 살릴만한데 죽인다면 살인자와 차이가 없다. 삼척(三尺)의 법이 지극히 엄한데내가 어찌 은혜로운 사랑으로 억지로 살리기 좋아한다는 이름을 붙이려 하겠는가... 나를 모르는 자들은 혹 반드시 죽일 자를 살리려 하는 것이라의심하는데 내 어찌 죽여야 하는 자를 살려 주려 하겠는가." (일득록」8)
정조의 옥사 판결은 살인자는 처벌해야 한다는 원칙 속에서도 혹시 억울한 사람이 없는지를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었다. 이렇게 새벽부터 시작한 일과는 늦은 밤까지 계속 이어졌다. - P217

자전(慈殿: 정순왕후)이나 자궁(慈: 혜경궁)이 나타나면 신하들은 모두 문 밖으로 물러나야 했다. 외간 남녀가 얼굴을 마주칠 수 없는 법도 때문이었다. 좌의정 심환지 등은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잠시 후 문 밖 가까이 다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신들이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혜경궁이 세자와 함께 돌아가자 심환지 등이 다시 들어왔고, 부제조 조윤대가 정순왕후가 말한 성향정기산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시수가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두세 숟가락을 정조의 입에 넣었는데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도해 내기도 했다. 이시수가 강명길에게 진맥하게 했고, 진맥을 마친
강명길이 엎드려 말했다.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정순왕후가 등장한다. 내시를 통해 다시 말을 전한것이다.
"주상의 병세는 풍 기운 같은데 대신이나 각신이 병세에 적절한 약을 의논하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기색만 있으니 무슨 일이오."
좌의정 심환지가 회답했다.
"이제는 성상의 병세가 이미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천지가 망극할 뿐 더이상 아뢸 말이 없습니다."
약원 제조 김재찬이 인삼차와 청심원을 들여왔으나 정조는 마시지 못했다. 도제조 이시수는 이때 엉뚱하게도 수정전으로 달려가 정순왕후에게 경 - P246

과를 보고한다.
"인삼차에 청심원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만무합니다.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
이시수가 통곡하자 정순왕후가 분부한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심환지 등이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다.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둘만 있었다. 위독한 정조 곁에 최대 정적 정순왕후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 방 안에서 정순왕후의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론 벽파 심환지와 같은 당파 이시수가 문 밖에서 말했다.
"지금 4백 년의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왕대비전하(妃殿下: 정순왕후)와 자궁저하(慈宮邸下: 혜경궁 홍씨) - P247

뿐입니다. 동궁저하께서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두문께 있는데 어찌 그 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지극히 엄중한 국가의 예법‘이란 비록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조선의 예법을 말한다. 따라서 이 순간 대비 정순왕추가 다른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정조의 병석을 지킨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국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은 정조의 최대 정적인 정순왕후 김씨였다.
정조의 병세 진행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란 많았던 연훈방과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했던 경옥고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라는 점이다. 연훈방을 제시한 심인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고, 연훈방을 정조에게 소개한 이시수는 같은 당파 심환지와 상의했을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인의 친척이란 점에서 심환지는 남인들의 의심의 표적이 되었다.
영조의 계비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숨을 거두었다 해서 목놓아 통곡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따지면 조손(孫)지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인 두 사람이었다. 정조 24년인 이해, 세자의 나이는열한 살이었으므로 정조가 세상을 떠날 경우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 경우 정조의 즉위와 동시에 몰락했던 정순왕후의 친정이 다시 살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시 말해 정조가 죽어야 정순왕후의 집안이 사는 것이었다. 이런 정순왕후가 정조를 살리기 위해 성향정기산을 올렸다고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정조는 정순왕후와단둘이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정조에게 어떤 조처를 취했는지는알 수 없지만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48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양주(楊州)와 장단(長湍등의 고을에서는 한창 잘 자라던 벼 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이는 상복을입는 벼(居喪稻"라며 슬퍼했다. 시골 노인들이 벼가 상복을 입었다고 전할정도로 백성들을 사랑했던 개혁군주 정조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꾸었던 갑자년의 구상도 개혁의 꿈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 P249

순조 1년(1801) 노론 벽파 정권은 정조의 사망 이후 풍천 부사에서 쫓겨난 유득공을 북경으로 보낸다. 「주자를 구해 오라는 것이었다. 유득공은 거부하려 했으나, 순조 즉위 후 정조의 사랑을 받던 모든 이들이 처벌받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든 노모가 적극 권유하자 마음을 바꿔 사은사 조상진(趙尙鑛)의 사행 행렬을 따라갔다. 유득공은 북경에서 과거 친분을 쌓았던 『사고전서(四庫全書)』책임자 기윤(紀)을 만나 『주자』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실패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주자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정조 사망 이후 다시 주자의 나라로 회귀했다.
명백한 자멸의 길이었다.
정조 사후 조선에는 민란(民)이 빈발하였다. 정조 재위 때는 민란이 없었다. 정조가 재위에 있을 때만 해도 백성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군부(君父)께 아뢰기만 하면 억울함을 풀어 줄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러나 정조가사망하자 백성들은 임금도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제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목숨 걸고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남에서 북에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정은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질주했다. 그 결과는조선 전체의 멸망이었다. 한 개혁 군주의 자리는 이토록 컸던 것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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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자리는 천하의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조에게는 더위도 장마도 모두 걱정이었다. 무더위에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고 별전으로 옮길 것을 거부했지만 정조는 사실상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었다. 재위 22년(1798) 정조는 각신 이만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더위를 참지 못하기 때문에 매년 삼복더위가 지나고 서늘한바람이 처음 불어오면 마치 옛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기쁘다. 그러나 올해는 가뭄 때문에 농사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날씨가 일찍 서늘해지는것을 꺼리고 있다. 백성을 위하는 나의 일념 때문에 날씨가 서늘해져도 기쁜 줄을 모르겠다. 방백(方伯: 감사)과 수령들도 이러한 나의 마음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정조는 또한 검소함에 대해 김조순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 (일득록」
그랬다. 부지런히 일하되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정조가 생각하는 조선 왕가의 법도였던 것이다. 영조도 그랬고 자신도 그랬다.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그 누구보다 검소했다. 규장각 각신들은 정조의 검소함에여러 차례 탄복했다. 각신 서유방(徐有防)의 기록에 따르면 재위 11년(1787)정조의 거처는 벽지를 바른 지 오래되어 검게 변했고, 기둥과 서까래도 계속 내린 비로 다 썩었다. 경연 신하가 유사(有司)에게 고치게 하자고 청하자 정조는 서두르지 말라고 말렸다. - P178

"나는 사치스러움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옷은 모시와 목면에 지나지 않고 음식은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데 억지로 애써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몸소 행한 효과가 있으면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지금 도리어 온 세상이 사치스럽고 화려할 뿐 변화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다. 아마도 나의 정성이 감동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습속이갑자기 변화하기 어려워 그런 것인가." (일득록」7)
정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명주옷, 즉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부드러운명주옷보다 거친 무명옷을 선택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사람은 대체로 화려한 옷을 한 번입으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이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내가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발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1)
그 무명옷도 여러 번 빨아 입었다. 대개 군주들은 옷을 빨아 입지 않고새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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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가난을 달관하며 이덕무는 독서에 열중했다. 그가 세상에서 집착하는 유일한 분야는 독서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바보)라고 부르자 스스로「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지었다.
"목멱산(남산)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눌해서 말은잘하지 못하고, 성격은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욱 알지 못했다. 남들이 욕해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해도 지금하지 않고 오직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동창 • 남창· 서창의 세창이 있었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따라가며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으면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지목하여 간서치라 하여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장안의 양반 장서가들은 그가 책을 빌리면 꺼리지 않고, "이덕무는 참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라면 어찌 책 구실을 하겠는가"라면서 새로운 책이 나오면 빌려 달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싸서 보내 주기도 했다. 이덕무가 자신의 책을 빌려 갔다는 것이 자랑거리가되었다. 그러나 책은 싸서 빌려 주었어도 음식을 싸서 보내 주지는 않았다. 기아는 늘 이덕무 곁에 있는 친구였다. - P162

박지원은 밖으로 나갔다. 뭘 하는가 보았더니 몸소 쌀을 씻고 있었다. 양반 사대부 출신이 쌀을 씻는 모습은 박제가로서는 처음 구경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는 아주 익숙한 솜씨였다. 그제야 비로소 박제가는 이덕무가 박지원은 다르다‘고 거듭 말한 것이 이해가 갔다. 고고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덕무가 칭찬하는 양반이라면 뭔가 다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박지원은 그 예상까지 뛰어넘었다.
쌀을 다 씻은 박지원은 다관(茶罐)에 쌀을 넣고 익숙하게 밥을 지었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장을 읽는 것보다 그의 밥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양반, 그것도 노론 출신의 양반 사대부가 직접 밥을 하는 모습이니 재미있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지원은 흰 주발에 밥을 퍼서 옥소반에 받쳐 내왔다. 반찬은 서너 가지뿐이었지만 술도 한 병 있었다. 박지원은 술잔을 들어 박제가를 축수했다.
박제가는 감격에 겨워 글을 지어 화답했고 박지원은 탄복했다.
백탑은 양반과 서얼들이 어울리는 신분 타파의 장이기도 했다. 이서구는 선조(宣祖)의 부친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서 부친 이원(李)은 영의정까지 추증 받은 명가 후손이었다. 이덕무보다는 열네 살, 유득공보다는 일곱 살, 박제가보다는 다섯 살이 어렸으므로 학문과 시를 배울 목적으로 백탑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이는 특수한 경우이고 백탑은 여전히 서얼들의 무대였다. 서상수. 윤가기 • 이희경 같은 서얼들은 ‘백탑시사(白塔詩社)‘라는 시 동인모임을 만들어 시를 지었다. 백탑파(白塔派)라는 명칭도 생겼다. 한시를 능숙하게 짓는 이 서얼들은 그러나 능력과 관계없이 신분제 사회의 그늘일 뿐이었다. 그 그늘 속에서 그들의 학문은 햇볕보다 빛났다.
•166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 P166

"수개월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평소 듣지 못하던 사실을 들었고, 중국의옛 풍속이 여전히 남아 옛사람이 나를 속이지 않은 사실에 감탄했다. 그래서그들 풍속 가운데 본국에서 시행하여 일상생활을 편하게 할 만한 것은 글로기록하고 아울러 그것을 시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폐단을 첨부해 하나의 설을 만들었다."(박제가, 「북학의 서문
북학파라는 실학의 중요한 한 조류는 벼슬길을 꿈도 꾸지 못하던 서얼출신 스물아홉 백두(白頭) 지식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제가에게 북학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었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지고, 재정은 날로 궁핍해지고 있다. 무릇 사대부로서 장차 팔짱 낀 채 구제하지 않을 것인가? 과거의 인습에 안주해 편안한 안락을 누리면서 아는 것을 모르는 체할 것인가?"
그러나 「북학의에 아무리 조선을 잘살게 할 수 있는 획기적인 내용을담았다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북학을 주장하는 박제가가 서얼이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최고의 학문과 경험을 지녔다 해도 서얼은 절대 등용될 수 없는 것이 곧 법이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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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가 없었다면 오늘의 정조는 없었다. 영조가 아니었다면 세손은 노론 벽파라는 철벽을 넘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손의 감정은 복잡했다.
세손은 대렴까지 마치고 상복으로 갈아입는 성복날에야 비로소 즉위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때도 조건을 내걸었다.
" 뭇 신하들의 심정에 몰리어 장차 왕위에 서기는 하겠지만, 면복(冕服)차림으로 예식을 거행하기에는 내 마음속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의장복인 면복 차림이 아니라 상복 차림으로 즉위하겠다는 뜻이었다. 상복 차림으로 즉위한 사례는 개국 이래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학자군주답게 상복 차림으로 즉위하는 근거를 제시했다.
"상복 차림도 가하다는 예(禮)는 『서경』의 강왕지고)에 보인다. 소식의 주설에 ‘상복 차림 그대로 관례(冠禮: 성인 의식)를거행해야 한다‘고 한 대문을 인용하여 예법이 아니라고 비난해 놓은 것을 채침이 서집전(書傳)』에 수록해 놓았다."
상복 차림으로 관례를 행해도 된다는 구절을 즉위로까지 확대 해석한것이었다. 한 개인이 어른이 되는 관례와 한 나라의 임금이 되는 즉위를 같은 차원으로 해석할 수는 없었다. 전례도 없었다.
대신과 신하들이 거듭 말리자 할 수 없이 면복을 입는 것으로 물러선 세손은 부축을 받으며 빈전(殿 국왕의 시신을 모신 곳)에 네 번 절하는 사배례(禮)를 거행했다. 영의정 김상철(金尙)이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선왕 영조의 유교를 받들었고, 좌의정 신회가 대보(大寶:옥새)를 받들어 올렸다. 명실상부하게 영조의 후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세손은 눈물을 흘리며 망설이다가 거듭된 재촉에 마지못한 듯 유교와 옥새를받았다. 이제 비로소 대권을 손에 쥔 것이었다. - P39

속광이었다. 솜이 움직이지 않으면 숨이 끊어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세손은 서두르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라."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대신들이 또 속광을 청했다. 통곡 속에서 세손이 말했다.
"그리 하라."
솜은 미세한 움직임도 없었다. 영조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춘추 여든셋. 왕위에 있은 기간만 무려 52년이었다. 그 누구보다 눈물이 많았고, 그누구보다 인자했으나 때로는 그 누구보다 냉혹했던 그런 임금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세손은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아니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열한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그 소년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었다.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스물다섯의 나이였으나 그 25년 동안 그가 감내했던 고통과 사색과 번민의 무게는 동시대의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 P53

그러자 김양택은 정후겸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정후겸은 대관도 아니니 사는 더욱 실형(刑)하는 것입니다."
"결안 죄를 시인함)을 받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사사하는 율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전에도 이렇게 한 예가 있었다."
홍인한과 정후겸은 이렇게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겉으로는 즉위방해 사건을 단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용으로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몬 데 대한 단죄였다. 정조는 사도세자란 말을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고이 사건에 대한 주모자들을 이렇게 처벌했다. 이로써 정조는 과거사 정리가일단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다. - P75

1759년(영조 35년) 6월 22일 오시(吾時: 11~1시).
예순여섯의 영조는 어의궁(於義宮)으로 향했다. 새로 신부를 맞이하는친형제(無刃)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2년 전 사망한 정성왕후 서씨의 뒤를이를 한 소녀가 어의궁에서 영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간택 끝에 뽑힌 김한구(출漢書)의 딸로 불과 열다섯 살짜리 소녀였다.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무려 열 살이나 어렸다.
영조는 어의궁에서 수줍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소녀가 훗날 이나라에 가져올 파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손자를 죽이고, 손자며느리는 물론 증손며느리의 피까지 손에 묻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서운관(書雲觀)에서 길일(吉日)에 길시(時)라고 점쳐 택일한 날에 거행하는 대혼(婚)이 축복이 아니라 왕가의 피로점철된 저주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구나 조선의 운명까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 줄을.
대혼날까지 그 아버지 김한구는 벼슬하지 못한 유학신세였다. 그러나 이날부터 그는 또 한 명의 척신(戚臣)으로 등장했다. 자신보다 서른살이나 많은 사위를 둔 새로운 국구(國: 왕의 장인)의 등장이었다. 딸이 왕비가 되면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에 봉해진 김한구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금위대장이 되어 궁중의 실세가 되어 갔다.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도 마찬가지였다. 정순왕후보다 다섯 살 위인 그 역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백두였으나 동생이 왕비가 되면서 음보로 벼슬에올랐다.
이렇게 딸과 여동생 덕분에 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김한구 ·귀주 부자 - P78

는 홍봉한 · 인한 형제 못지않게 권력욕이 많았다. 기묘하게도 두 외척은사도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했다. 사도세자는 김상로. 홍계희 등 노론중진들과 두 외척의 협공을 받아 영조 38년 살해되고 말았다. 궁중의 두 여인,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는 모두 안에서 호응했다.
그러나 세자를 제거한 후 두 외척의 자세는 달라졌다. 공동의 적이었던사도세자가 사라지자 외척 가문 사이에 노론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던 것이다. 김한구 ·귀주 부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노론벽파의 맹장이 되었고,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노론 시파의영수가 되었다. 같은 노론 내에서 파벌이 갈린 것이었다.
사도세자가 살해되고 10년이 지난 영조 48년(1772) 7월 21일, 두 외척은 드디어 정면충돌했다. 영조가 재위 42년 병석에 누웠을 때 홍봉한이 영조의 간호에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고 공조참판 김귀주가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 P79

정조는 즉위 3일 만인 3월 13일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다. 정조실록』이 "특별히 발탁했다"고 적고 있듯이 이례적인 발탁이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넉 달 후에는 도승지로 승진시켰으며, 9월에는 규장각을 만들면서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시켰다. 뿐만 아니라 홍국영에게 군권까지주었다. 정조는 즉위년 11월 홍국영을 수어청종2품 수어장관인사(守禦使)로 임명했다. 홍국영이 장수까지 겸임할 수 없다며 소명을 거부했으나 정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지신사(事: 도승지)의 품질을 올려 장수의 임무를 맡기려 한 지오래되었다. 지금의 국세에 맡길 수 있는 심복 신하에게 위호(護: 호위)하는 직임을 맡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것을 진정시키고 왕실을 돕게 할 수 있겠는가?"
이듬해(1777) 5월에는 홍국영을 총융사로 삼았다가 다시 금위대장大將)으로 삼았다. 금장)이라고도 하는 금위대장은 국왕 경호 책임자로서 종친이나 외척들이 맡아 오던 자리였다. 금장까지 겸임함으로써 홍국영은 국왕의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와 경호실장격인 금위대장을 한 손아귀에 장악한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도승지는 정3품, 금위대장은 종2품으로 극품(極品: 정1품)은 아니었지만 조정의 실권은 홍국영의 손아귀에 있었다. 사실상 정조와 홍국영의 공동정권이었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 불과서른이었다. - P131

홍국영의 충격은 컸다. 자신에게 아부하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런 세태에 대한 마음속의 울분을 끝내 이기지 못했는지 혹두봉조하 홍국영은 정조 5년(1781) 4월 5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불과 서른넷의 나이였다.
이날 정조는 경연에서 홍국영 문제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했다.
"일언이폐지하고 한마디로 말하면 이는 곧 나의 과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국영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동시에 그의 시대도완전히 막을 내렸다. 「정조실록』(3년 9월 26일)은 홍국영이 정조 즉위 후 "국변인(人나라 쪽의 사람)으로 자처하고 역적을 친다는 핑계로 제 뜻대로다했다"며 비판하고 있다. 또한 "지신사(知事: 도승지)로서 숙위대장大)을 겸해서 이조와 병조의 모든 인사를 먼저 다 결정한 뒤에야 위에 올렸다"고도 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뜻밖의 재앙이 당장 오므로, 온 세상이두려워서 마치 조석(朝夕)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여 여염집에서 사사로이말하는 자일지라도 다 지신사라 부르고 감히 그 이름을 가리켜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권력자일수록 처신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일찍 권력을 잡았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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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와 덴마크 왕자 햄릿은 저주받은 운명에 좌절했던비극적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운명의 신탁(神託)을 받고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길을 떠나지만,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이미 신탁이 실현된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결국 그가 할 수 있었던 선택은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테베를 떠나는 것뿐이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햄릿에게도 현실은 가혹했다. 꿈에 부왕(王)이나타나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가 자신을 독살했다고 알려 주면서 햄릿의 운명은 급격히 비극 속으로 빨려든다. 연인 오필리아의 부친을 신왕(王) 숙부로 오인해 살해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오필리아는 미쳐 죽고 만다. 수많은번민 끝에 숙부를 죽여 복수에는 성공하지만, 어머니와 자신까지 죽게 되는비극이 그가 선택한 운명이었다.
그런데 비극의 질로 따지든 양으로 따지든 정조는 이런 비극의 주인공들에 뒤지지 않는다. 더구나 오이디푸스와 햄릿은 전설상의 인물에 불과하지만 정조는 실존인물이었다. 호메로스는 아들과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의 어머니는 목매어 자살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죽을 때까지 테베를통치했다고 전하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비극적 영웅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각색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햄릿도 - P6

셰익스피어의 각색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소포클레스도, 셰익스피어도 필요 없었다. 그의 생애가 비극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뒤주에 갇히던 날, 열한 살의 어린세손(世孫)은 할아버지에게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빌었으나 냉혹한정치 현실 속에서 어린 손자의 애원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손자가 있었기에 할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수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정조는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깨달았다. 더구나 모친까지도 그 죽음에 관계되어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있었기에 할아버지 영조는 ‘삼종(三宗: 효종 • 현종. 숙종)의 혈맥(血)‘인 아버지 사도세자를 버릴 수 있었으며, 모친 또한마찬가지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음력 윤5월 좁은 뒤주 속에서 여드레 동안이나 신음하던 아버지가 숨을 거둔 순간, 비극은 고스란히 정조의 운명이 되었다. - P7


그러나 정조는 비극적 운명이 자신과 사도세자만의 것이 아니란 사실을깨닫는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라는 ‘금등지사(詞)‘는 할아버지 영조도 저주받은 신탁의 주인공임을 일러 주고 있었다. 아들을 버린 영조가 손자만은 끝내 보호한것이 이를 말해 주었다. 그래서 정조는 햄릿처럼 미친 체하지도 않았고,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하지도 않았다. 오이디푸스처럼 왕국 테베를 버리지도않았다. 그는 자신과 왕실에 내려진 저주스런 신탁에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다시는 이 왕국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비극을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P7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즉위한 정조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그가 단 하루도 잊지 않았던 영조 38년(1762) 윤5월 21일,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신음하다 훙서(한 그날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것은대리청정하던 저군(君: 세자)을 죽인 세력들을 향한 복수의 길이었다. 그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야 하는 사람이 할아버지 영조였다. 그 길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죽인 생부 라이어스나, 햄릿이 숙부로 오인해 죽인 연인 오필리아의 부친 폴로니어스 같은 인물도 만나야 했다. 그리고 복수에 성공했으나 그 자신도 죽고 마는 햄릿의 운명을 따르게 될 수도 있었다. 하긴 햄릿을 빌려 올 필요가 있겠는가. 모친 윤씨를 비명에 잃은 연산군이 그랬고, 모친 장씨를 비명에 잃은 경종이 이미 그랬지 않은가.
정조는 그런 과거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이 저주받은 운명의 주인공이라는사실을 명백히 밝혔으나, 그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공간은 과거가 아니라 현실이며, 현실이 응축된 미래라는 사실을수없이 탐독했던 역사서 속에서 깨달았다. 현실이 과거에 지배받을 때 미래는 불행해짐을 그가 본 역사서들은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런 과거를 가슴에 묻고 또 다른 길, 미래로 나아갔다. 그것은 굴복도 회피도 아니었다. 자신과 왕실, 그리고 조선의 저주받은 운명과 맞서 싸우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미래를 택했다고 하여 어찌 과거가 온전히 잊힐 수 있겠는가. 다른집안도 아닌 왕가, 그것도 손이 귀한 삼종의 혈맥이 뒤주에 갇혀 죽어야 했던 과거가 어찌 잊힐 수 있겠는가. 병석에서 "두통이 많이 있을 때는 등 쪽에 - P8

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氣) 때문이다"라고 토로했던 가슴속 분노는 소멸될 수 없었다. 그 화기는 햄릿에게 나타났던 부친의 유령보다 훨씬 더 강한 목소리로 과거로 돌아가자고 속삭였지만 정조는 거부했다. 그 길은 증오의 길이자 자신은 물론 선조의 혼이 서린 이 나라를 파멸로 몰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가슴속의 증오와 분노, 화기에 맞서 싸웠다. 가슴속의 갈등을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조금의 여유와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세손시절 그는 시강원의 스승인 빈객에게 준 글에서 "나는 천하만사가 모두 하나의 ‘나 게으름)‘자로부터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그렇게그는 단 한순간의 나태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을 다그쳤다. 그렇게 그는정심(正心)을 추구했다.
「대학(大學)』의 정심(正心)은 마음에 노(怒)함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수양 단계이기 때문에, 그는 매일같이 정심을 되뇌는 것으로 분노와 증오를 다스려야 했다. 그 과정이 그를 철인(哲人)으로 만들었다. 가슴속의 분노와증오, 그리고 부친의 원수들과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 고통을 정심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활을 쏘며 그는 "정심을 하지 못하면 과녁을 맞히지 못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과녁을 맞힐 때는 정심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학문과 정사와 활쏘기가 모두 하나였다. 그렇게 그는철인
정치가가 되어 갔다.

정조는 미래를 향해 고통스런 걸음을 옮겼다. 그릇된 과거와 단절하는 길이 미래의 길이었다. 대리청정하는 저군을 뒤주에 넣어 죽인 증오의 정치,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君)의 정치, 노론(論)만이 존재하는 일당 - P9

전제정치는 극복돼야 했다. 또 단절해야 할 커다란 과거는 성리학 신정(神政) 체제였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청나라에 조공 사신을 보내면서도 속으로는 망해 버린 명나라를 섬기는 교리를 제공하는 것이 성리학이었다. 명나라 황제를 임금으로 섬기는 성리학 체제에서 조선은 제후의 나라에 불과했다. 자국 임금을 제후로 만들어 황제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압박하는것으로 노론은 권력을 유지했다. 노론에게 성리학은 배타적 권력을 유지하는 최상의 도구였다. 바로 이런 과거와 단절해야 했다.
과거를 버리고 미래로 가는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도상에서 정조가 만났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순왕후와 노론은 결코 미래로 갈 수 없다며 정조의 발목을 잡았다. 정순왕후와 노론은 정조 이복동생들의 사형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사도세자를죽인 증오의 정치구조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과 그를 추대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홍국영처럼 미래를 가장해 과거를 걷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 P10

그러나 그 길에 어찌 그런 사람들만 있었겠는가. 그 도상에는 정조가 과거를 선택했다면 만날 수 없었을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주교를받아들였던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형제 같은 남인들과 사회의 천시 속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쌓았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같은 서얼들, 그리고 사도세자의 이장(移葬)에 눈물을 흘리던 백성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정조는 미래를 향해 걸었다. 그 길의 끝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정조에 의해 발탁된 서얼 출신의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들이 단번에 조선의 지식계를 평정한 것처럼 조선은 새롭게 바뀌어 갔다. 그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서학(西學)을 받아들이고 북학(北學)을 주장했다. - P10

1800년 6월 28일 유시(酉時: 오후 5~7시). 정조는 창경궁(昌慶宮) 영춘헌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우며 시대를 고민하던 비극적 영웅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완성하지 못한 꿈의 죽음이자 미래를 지향하던 조선의 죽음이었다. 역사의 신이 그에게 10년. 아니 5년만 더 살아 있기를 허락했다면, 그래서 그가 초인적 의지로 구축했던 정치체제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동시에 조선은 미래에서 과거로, 개방에서 폐쇄로 소통에서 단절로, 사랑에서 증오로 돌아섰다.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랬다. 1800년 6월 28일, 그의 죽음과 함께 조선은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오늘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 시대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지도자를 갈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갈구는 언제나 크지 않았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꾸었던 꿈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 증오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열려고 했던 그의 미래가 우리의 내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와 햄릿보다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지만 결코 그 운명에 굴종하지 않았던, 끝없는 수양으로완성된 인격을 추구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 나라를 새롭게 바꾸려 했던,
그렇게 자신과 역사에 무한한 책임을 지려 했던 한 비극적 영웅의 꿈이 미완인 채로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2008년 정월
천고(遷固) 이덕일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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