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와 덴마크 왕자 햄릿은 저주받은 운명에 좌절했던비극적 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운명의 신탁(神託)을 받고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길을 떠나지만, 어느 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이미 신탁이 실현된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결국 그가 할 수 있었던 선택은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후 테베를 떠나는 것뿐이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햄릿에게도 현실은 가혹했다. 꿈에 부왕(王)이나타나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가 자신을 독살했다고 알려 주면서 햄릿의 운명은 급격히 비극 속으로 빨려든다. 연인 오필리아의 부친을 신왕(王) 숙부로 오인해 살해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오필리아는 미쳐 죽고 만다. 수많은번민 끝에 숙부를 죽여 복수에는 성공하지만, 어머니와 자신까지 죽게 되는비극이 그가 선택한 운명이었다. 그런데 비극의 질로 따지든 양으로 따지든 정조는 이런 비극의 주인공들에 뒤지지 않는다. 더구나 오이디푸스와 햄릿은 전설상의 인물에 불과하지만 정조는 실존인물이었다. 호메로스는 아들과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의 어머니는 목매어 자살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죽을 때까지 테베를통치했다고 전하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비극적 영웅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각색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햄릿도 - P6
셰익스피어의 각색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소포클레스도, 셰익스피어도 필요 없었다. 그의 생애가 비극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뒤주에 갇히던 날, 열한 살의 어린세손(世孫)은 할아버지에게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빌었으나 냉혹한정치 현실 속에서 어린 손자의 애원은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손자가 있었기에 할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수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정조는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깨달았다. 더구나 모친까지도 그 죽음에 관계되어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있었기에 할아버지 영조는 ‘삼종(三宗: 효종 • 현종. 숙종)의 혈맥(血)‘인 아버지 사도세자를 버릴 수 있었으며, 모친 또한마찬가지였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음력 윤5월 좁은 뒤주 속에서 여드레 동안이나 신음하던 아버지가 숨을 거둔 순간, 비극은 고스란히 정조의 운명이 되었다. - P7
그러나 정조는 비극적 운명이 자신과 사도세자만의 것이 아니란 사실을깨닫는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라는 ‘금등지사(詞)‘는 할아버지 영조도 저주받은 신탁의 주인공임을 일러 주고 있었다. 아들을 버린 영조가 손자만은 끝내 보호한것이 이를 말해 주었다. 그래서 정조는 햄릿처럼 미친 체하지도 않았고,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하지도 않았다. 오이디푸스처럼 왕국 테베를 버리지도않았다. 그는 자신과 왕실에 내려진 저주스런 신탁에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다시는 이 왕국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비극을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 P7
수많은 어려움을 뚫고 즉위한 정조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그가 단 하루도 잊지 않았던 영조 38년(1762) 윤5월 21일,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신음하다 훙서(한 그날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것은대리청정하던 저군(君: 세자)을 죽인 세력들을 향한 복수의 길이었다. 그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야 하는 사람이 할아버지 영조였다. 그 길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죽인 생부 라이어스나, 햄릿이 숙부로 오인해 죽인 연인 오필리아의 부친 폴로니어스 같은 인물도 만나야 했다. 그리고 복수에 성공했으나 그 자신도 죽고 마는 햄릿의 운명을 따르게 될 수도 있었다. 하긴 햄릿을 빌려 올 필요가 있겠는가. 모친 윤씨를 비명에 잃은 연산군이 그랬고, 모친 장씨를 비명에 잃은 경종이 이미 그랬지 않은가. 정조는 그런 과거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이 저주받은 운명의 주인공이라는사실을 명백히 밝혔으나, 그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공간은 과거가 아니라 현실이며, 현실이 응축된 미래라는 사실을수없이 탐독했던 역사서 속에서 깨달았다. 현실이 과거에 지배받을 때 미래는 불행해짐을 그가 본 역사서들은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런 과거를 가슴에 묻고 또 다른 길, 미래로 나아갔다. 그것은 굴복도 회피도 아니었다. 자신과 왕실, 그리고 조선의 저주받은 운명과 맞서 싸우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미래를 택했다고 하여 어찌 과거가 온전히 잊힐 수 있겠는가. 다른집안도 아닌 왕가, 그것도 손이 귀한 삼종의 혈맥이 뒤주에 갇혀 죽어야 했던 과거가 어찌 잊힐 수 있겠는가. 병석에서 "두통이 많이 있을 때는 등 쪽에 - P8
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氣) 때문이다"라고 토로했던 가슴속 분노는 소멸될 수 없었다. 그 화기는 햄릿에게 나타났던 부친의 유령보다 훨씬 더 강한 목소리로 과거로 돌아가자고 속삭였지만 정조는 거부했다. 그 길은 증오의 길이자 자신은 물론 선조의 혼이 서린 이 나라를 파멸로 몰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가슴속의 증오와 분노, 화기에 맞서 싸웠다. 가슴속의 갈등을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조금의 여유와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세손시절 그는 시강원의 스승인 빈객에게 준 글에서 "나는 천하만사가 모두 하나의 ‘나 게으름)‘자로부터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그렇게그는 단 한순간의 나태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을 다그쳤다. 그렇게 그는정심(正心)을 추구했다. 「대학(大學)』의 정심(正心)은 마음에 노(怒)함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수양 단계이기 때문에, 그는 매일같이 정심을 되뇌는 것으로 분노와 증오를 다스려야 했다. 그 과정이 그를 철인(哲人)으로 만들었다. 가슴속의 분노와증오, 그리고 부친의 원수들과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 고통을 정심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활을 쏘며 그는 "정심을 하지 못하면 과녁을 맞히지 못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과녁을 맞힐 때는 정심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학문과 정사와 활쏘기가 모두 하나였다. 그렇게 그는철인 정치가가 되어 갔다.
정조는 미래를 향해 고통스런 걸음을 옮겼다. 그릇된 과거와 단절하는 길이 미래의 길이었다. 대리청정하는 저군을 뒤주에 넣어 죽인 증오의 정치,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君)의 정치, 노론(論)만이 존재하는 일당 - P9
전제정치는 극복돼야 했다. 또 단절해야 할 커다란 과거는 성리학 신정(神政) 체제였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청나라에 조공 사신을 보내면서도 속으로는 망해 버린 명나라를 섬기는 교리를 제공하는 것이 성리학이었다. 명나라 황제를 임금으로 섬기는 성리학 체제에서 조선은 제후의 나라에 불과했다. 자국 임금을 제후로 만들어 황제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압박하는것으로 노론은 권력을 유지했다. 노론에게 성리학은 배타적 권력을 유지하는 최상의 도구였다. 바로 이런 과거와 단절해야 했다. 과거를 버리고 미래로 가는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도상에서 정조가 만났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순왕후와 노론은 결코 미래로 갈 수 없다며 정조의 발목을 잡았다. 정순왕후와 노론은 정조 이복동생들의 사형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사도세자를죽인 증오의 정치구조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과 그를 추대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홍국영처럼 미래를 가장해 과거를 걷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 P10
그러나 그 길에 어찌 그런 사람들만 있었겠는가. 그 도상에는 정조가 과거를 선택했다면 만날 수 없었을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주교를받아들였던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형제 같은 남인들과 사회의 천시 속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쌓았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같은 서얼들, 그리고 사도세자의 이장(移葬)에 눈물을 흘리던 백성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정조는 미래를 향해 걸었다. 그 길의 끝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정조에 의해 발탁된 서얼 출신의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들이 단번에 조선의 지식계를 평정한 것처럼 조선은 새롭게 바뀌어 갔다. 그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서학(西學)을 받아들이고 북학(北學)을 주장했다. - P10
1800년 6월 28일 유시(酉時: 오후 5~7시). 정조는 창경궁(昌慶宮) 영춘헌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우며 시대를 고민하던 비극적 영웅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완성하지 못한 꿈의 죽음이자 미래를 지향하던 조선의 죽음이었다. 역사의 신이 그에게 10년. 아니 5년만 더 살아 있기를 허락했다면, 그래서 그가 초인적 의지로 구축했던 정치체제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뀔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동시에 조선은 미래에서 과거로, 개방에서 폐쇄로 소통에서 단절로, 사랑에서 증오로 돌아섰다.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랬다. 1800년 6월 28일, 그의 죽음과 함께 조선은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오늘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 시대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지도자를 갈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갈구는 언제나 크지 않았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꾸었던 꿈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 증오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열려고 했던 그의 미래가 우리의 내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와 햄릿보다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지만 결코 그 운명에 굴종하지 않았던, 끝없는 수양으로완성된 인격을 추구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한 나라를 새롭게 바꾸려 했던, 그렇게 자신과 역사에 무한한 책임을 지려 했던 한 비극적 영웅의 꿈이 미완인 채로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2008년 정월 천고(遷固) 이덕일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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